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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꽃무늬 주방가전, 1970년대

drake_kr 2014. 2. 27. 03:59

Source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59&contents_id=2382

 

누가 맨 처음 플라스틱 표면 위에 너, 꽃무늬를 그려 넣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너의 생일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니 네가 천애 고아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그나마 어느 여성 잡지에 실린 몇몇 광고 사진들 덕분에,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무렵의 네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를테면, 1975년에 게재된 아폴로 전기밥통과 보온병의 광고 사진.볼이 통통한 젊은 여인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걱으로 밥을 그릇에 담고 있다. 전기밥솥과 보온병은 ‘아폴로’라는 이름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으로 그녀 앞 식탁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전기밥솥은 꽃무늬로 치장한 반면, 보온병은 옵아트의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되었다. 아마도 너는 이 무렵 추상성을 앞세운 문양들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너의 일방적인 승리.

입식 부엌과 플라스틱 가전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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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생산된 아폴로 전기밥통과 커피포트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너는 플라스틱의 표면 위에 자리하게 되었던 것일까? 일단 하나의 가설을 세워보자. 제일 먼저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플라스틱 생산 공정상의 문제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서울에 이른바 집장사 집이 대거 신축되면서 입식 부엌이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고, 그와 더불어 새로운 부엌 가전들이 속속 등장했다. 전기밥솥, 믹서, 보온병, 커피포트, 토스터 등등. 이 부엌 가전들 대부분은 플라스틱 외장을 갖추고 있었다. 당시플라스틱은 상당히 낯선 소재였다. 가전의 총아나 다름없던 텔레비전마저도 나무 가구의 모양새로 보급되던 그런 시절이었다. 문제는 국내 가전업체들이 이 플라스틱이라는 재료를 능숙하게 다룰 역량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 가전업체와 기술제휴를 맺고 제품의 금형을 수입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금형을 들여오더라도 설계 도면대로 플라스틱 형태를 사출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플라스틱이 굳으면서 수축하곤 해서, 제품의 표면이 휘거나 쪼그라드는 일이 다반사였다. 재료의 특성을 살려 단순명료한 기하학적 형태를 뽑아내는 일은 쉽게 성취될 수 없는 부류의 것이었다.

조명을 비추면 선명하게 굴곡을 드러내는 백색의 표면. 이 부엌가전의 생산업체에 근무하는 디자이너가 있었다면, 그냥 모른 채 지나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제품의 약점을 감추려고 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는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해결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값싼 판박이 스티커를 사용해 그 표면에 원색의 컬러 문양을 입히는 것. 물론 이런 가설을 세운 뒤에도 여전히 빈 구석이 남는다. 다음과 같은 질문이 그렇다. 그는 왜 하필 너를 선택했던 것일까?

좀 더 추론을 진척시켜보자. 그는 아마도 문양의 종류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집안을 기웃거렸을 것이다. 그는 얼마 전에 서울 변두리에 집장사가 지은 1층 양옥을 어렵게 구입해 이사한 터였다. 그의 아내는 입식부엌에서 가사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이젠 냄새나는 석유풍로로 밥을 지을 필요도 없고 연탄가스 걱정 없이 겨울을 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를 기쁘게 한 것은, 친정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장만해주신 부엌세간들을 내놓고 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혼수 살림 중 그녀가 가장 아꼈던 것은, 꽃무늬로 담담하게 여백의 미를 살린 고급 자기 세트였다. 이전의 셋집에서 그것들은 행여나 깨질세라 나무로 짠 찬장의 제일 윗자리에 보이지 않게 감춰져 있다가, 귀한 손님이 찾아오면 한 번씩 바깥바람을 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자기 세트의 그런 궁색한 처지가 안쓰러웠는지 그녀는 이사하자마자 내부가 환히 보이는 유리 찬장을 구입했다. 그리고 손이 제일 잘 닿는 높이의 칸에 자기 세트를 올려놓았다. 레이스가 달린 자디잔 꽃무늬의 식탁보 위에 놓인 꽃무늬의 그릇과 접시들. 아마도 우리의 익명의 디자이너는 그 모습을 보며 “빙고!”를 외쳤을 것이다. 그가 찾던 문양의 ‘도안’이 바로 거기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는 직접 연필을 들고 자유로운 곡선으로 꽃봉오리를 그려보기도 하고, 자와 컴퍼스를 동원해 단순화된 스타일로 꽃잎을 정리해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꽃무늬만으로는 확신이 서지 않았는지, 옵아트를 연상시키는 기하학적 패턴도 그려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앞서 살펴본 광고사진 속의 아폴로 전기밥통과 보온병이 등장한다.

물론 이런 추정은 네가 국내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했으리라는 전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선 얼마든지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이를테면 당시 일본 가전제품들 중 일부도 너를 채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렇다. 이에 따르면제작 업체가 설계도면 혹은 금형과 부품뿐만 아니라, 너의 도안도 함께 수입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너는 이식설을 부정하고 자생설에 한 표를 던지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자생설에 대한 사실 여부만 확인된다면, 너는 독특한 한국적 디자인의 사례로 네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당시 너는 그저 생산 공정상의 이유로 야기된 플라스틱 표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다. 너는 매끄럽지 못한 표면을 감추거나, 표면으로 향한 시선을 네 화려한 표정으로 되돌리려고 애썼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주부들의 반응이 네 예측을 훨씬 넘어섰다는 사실이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주부들은 네 모습이 들어간 부엌 가전들을 사들였고, 다른 업체들도 경쟁적으로 자사 제품에 너를 그려 넣었다. 사실 너를 선택한 주부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생이냐 이식이냐는 문제는 사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핵심은 네가 그녀들의 시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사로잡은 매혹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녀들이 너에게 애정을 쏟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꽃무늬는 완전히 도시화되지 못한 전원적 감수성과 닮았다

대세를 거스르지 않는다면, 입식 부엌은 플라스틱부터 스테인리스 스틸까지 차가운 물질성의 재료들로 구성된 직선들의 세계, 효율성과 청결함의 척도로 측정되는 가사 노동의 위생학적 공간, 그래서 가능하다면 식모에게 맡겨놓고 싶은 그런 공간으로 가파르게 변모할 듯 보였다. 이런 급경사의 변화 앞에서 주부들은 수동적인 존재로 남겨졌다. 남편과 아이들을 뒤치다꺼리해서 내보내놓은 뒤에는 건조한 리듬으로 집안일을 반복해야 할 것이며, 단조로운 일상이 안겨다준 무기력감이 그녀들을 압박할 것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그녀들은 ‘현대적인 교양주부’의 덕목을 체득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런 그녀들에게 현대적 모양새의 부엌은 여전히 익숙지 않다. 그녀들의 감각은 심한 낯가림에 시달린다. 불과 5-6년 전만 하더라도 대량생산 체계가 본격화되지 못했던 터라, 그녀 주변의 물건들에는 그것을 만들어낸 장인이나 수공업자의 손길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주부가 된 그녀들이 백화점이나 시내 상점에 구입해 집 안으로 들고와야 할 제품들은 그런 사물과는 다른 종에 속한 것들이다. 산업화의 논리에 따라 대량생산된 사물들. 그 번들거리는 플라스틱 표면들은 번듯해 보이긴 하지만 잔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서울깍쟁이를 닮았다. 그녀는 불편하다. 그녀의 정신은 애써 미래를 향하지만, 그녀의 몸은 과거를 되돌아본다. 한때 순수했던 처녀 시절의 감수성을 그리워하며 고향의 들판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몸과 정신의 괴리.

아마도 그녀들은 시내에 외출 나갔다가 우연히 너를 장식한 가전제품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들은 그 제품이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기계 공학의 냉정한 논리로 충혈된 정신을 지녔지만, 몸은 여전히 자연과의 연결 고리를 끊지 않으려고 피부에 꽃무늬 문신을 새겨 넣은 제품. 처지가 비슷한 이들은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기 마련이다. 결국 그녀들은 자신을 닮은 제품을 구입한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주부들이 네 모습이 담긴 제품을 구입해서 부엌의 한쪽 구석에 놓는 순간 나름의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네가 아직 완전히 도시화되지 못한 그녀들의 전원적 감수성을 툭 건드렸기 때문이었다고 말이다. 아무튼 너는 그녀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심신의 불일치가 가져온 어정쩡한 자세, 그리고 거기에 가미된 미량의 촌스러움은 그녀들이 너에게서 동류로서 더욱 강한 유대감을 느낄 수 있었던 정서의 얼개였다. 너는 다정다감한 대상이었다. 그녀들의 은밀한 독백을 묵묵히 다 들어주는. 그녀들이라면 너를 바라보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김추자의 ‘꽃잎’을 몽롱한 목소리로 따라 흥얼거릴 것이다. 꽃잎이 지고 또 질 때면/그날이 또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서로가 말도 하지 않고/나는 토라져서 그대로 와버렸네/그대 왜 날 찾지 않고/그대는 왜 가버렸나/꽃잎 보면 생각하네/왜 그렇게 헤어졌나/꽃잎 꽃잎....

이 시기에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자수나 꽃꽂이 강좌가 유행처럼 번졌던 것은 확실히 우연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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