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장난치기

자살한 과학자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6. 27. 22:02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여러 방면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 중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  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운의 화가  고호, 세기적 문호 헤밍웨이 (여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등 문화, 예술 방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이들도 있고,  히틀러와 같은 실패한 정치가도 있고 그밖에도 많은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사에 있어서도 자살한 사람들의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그 원인이야 연구상의 좌절이나 위기  등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이었든, 아니면 가정사나 다른 개인적  문제였든간에 일일이 파악  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과학기술자들의 자살에 관하여 심층적으로 분석, 연구된 바가 있는지 어떤 지 는  잘 모 르겠지만, 이들  몇몇의 경우를 살펴 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1. 나일론의 발명자 캐러더즈

1938년  9월21일,  미국의  유명한  화학회사  뒤퐁(Du  Pont)은   "나일론(Nylon)"이라는 새로운 섬유 발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신문들은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든 섬유", "거미줄 보다도 가늘고 강철보다 질긴 기적의 실" 이라면서 대서특필하였고, 이 소식에  세계 각국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는, 명주도,  식물성재질도 아닌 석탄, 물, 공기 따위로 어떻게 섬유를 만들 수있느냐고  "엉터리"임이 틀림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인 뒤퐁사는 신문사들이 아무 근거없는 이야기를 했겠느냐고 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제품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인하여, 나일론 견본은 세계  여러 나라로 보내졌고,  각국의 과학자들은 인공섬유 나일론을 분석한 후, 그 수성에 감탄하였으며, 관련업자들은 발빠르게 나일론 제품의 판매를 서두른 결과 나일론은 전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1939년의뉴욕만국박람회에서  나일론은 가장 인기있는 품목이었고, 1940년 5월, 뉴욕에서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시작되자 많은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 들어 스타킹을 사고서 치마를 걷어 붙이고 즉석에서  신어 보았다고 한다. 값싸고 질  좋은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 폭발적"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제품의  개발자 캐러더즈(Wallace H. Carothers; 1896-1937)는 자신의 발명품이 날개 돋히듯 성황을 이루는  행복한 장면을 볼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부와 명성도 누리지 못했다. 캐러더즈  박사는 뒤퐁사가 나일론의 발명을 발표하기 전해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캐러더즈는 1896년 4월, 미국 아이오와 주의 벌링턴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 났다. 아버지는 상업학교의 선생으로서, 아들이 좋은  직업을 얻도록 상과대학에 들어 가도록 하였고, 캐러더즈는 열심히 공부하여 남들보다 일찍 졸업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소원은  수학이나 과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주리 주 타키오 대학에서 상학부 조교를  하면서 화학을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 으로 졸업하였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유기화합물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  대학 에서 천연섬유 등의 고분자 구조에 관해 연구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매우 탁월한 유기화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나, 한정된 예산으로 인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분야인 고분자설에 관한 연구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스승은 캐러더즈를 뒤퐁사의 중앙연구소에 추천하였고, 그도 역시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인 뒤퐁사에서 충분한 연구비와 풍부한 기자재를 지원 받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1928년  뒤퐁사에 입사한 그는 이듬해에 중앙연구소의 기초과학  연구부장이 되어서 고분자  연구를 주도하였고, 1929년에는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닥쳐 왔으 나, 도리어 뒤퐁사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기초연구와 그에 기반한 신제품 개발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하고, 캐러더즈에게 충분한  연구인력과 설비를 지원하였다. 덕분에 그는 회사의 사장, 중역 등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풍부한 연구비를 지원 받으면서, 분자량이 작은  물질을 연결해 고분자를 만드는 "고분자 중합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천연고무보다 우수한 물성을 지닌 합성고무 네오프렌의 발명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의  연구팀은 고분자 연구를 계속하던 중, 연구원 중의한명인 줄리언 힐이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는 실패한 찌꺼기를 씻어 내다가, 불을 쬐어 본 결과, 찌꺼기가  게속 늘어나서 실 같은 물질이 되 었다. 이것을 본 캐러더즈는 합성섬유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1935년에 마침내 합성섬유  로 적합한 폴리아미드를 발견하여 나일론의 시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합성섬유를 "폴리머 6-6"이라 명명하였고, 이것을 상품화하기 위해 뒤퐁사는 230명의 화학자를 포 함하는 대규모의 연구개발인력과 시설을 총동원하였다. 기초연구의 성공을 본격적인 상품화로 연결  시키는, 오늘날의 전형적인 R&D 방식이 이때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품화 및  양산 공정을 위한 몇가지 난제를 해결한 뒤퐁사는 1938년, 나일론을 공 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였고, 석탄과 물과 공기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상한 섬유" 나일론은 양말, 여성용 스타킹, 의류 등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시에는 낙하산의 제조에 널리 이용되었다. 

나일론의 발명에 힘입어, 인류는 의복의 재료를  면화, 비단, 모피 등의 자연물뿐만 아니라, 대량생산 되는 인공합성물로부터도 값싸게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민간기업의 대규모 연구개  발 능력이 신제품 개발에 대성공을 거둔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을것이다.   캐러더즈 박사의 탁월한 능력 못지 않게, 자유로운 기초 연구를 보장하고 연구비와 인력, 설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뒤퐁사 경영진 의  방침이 없었더라면, 나일론은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발명자인 캐러더 즈박사  가 성공을 거두고서도 왜 자살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일론의 상품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러시아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매우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도 한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서 큰 빛을 발하는 것을보지 못한  채, 41세의 아까운 나이로 스스로 삶을 마쳤다. 


2. 소다 제조법의 발명자 르블랑

화학식 NaHCO3,  명칭은 탄산수소나트륨,  산성탄산나트륨, 중탄산나트륨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화학물질이  하나 있다. 간단히 "소다"라고 말하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화학공업이 근대화되고, 급속히 발전된 오늘날에는 그다지 특별히 중요한 물질이 아닐 수도 있겠 으나, 역사적으로 소다는 근대 산업사회에는 무척 중요한  물질의 하나였다. 황산과 아울러 소다의 대량 제조가 중화학공업의 시초이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산업혁명기의 영국에서는 급속히 발전한 방적, 직물공업에 따라서 많은 양의 직물들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을 완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깨끗이 씻기 위한 비누 역시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누의 원료가 되는 소다를 당시에는 나무를 태운 재로부터 얻었는데, 갑자기  폭증한 소다의 수요를 감당하 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나무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유럽의 각 지역에서는 산림이 황폐화될 지경이었 다. 따라서, 나무를 태우지 않고 소다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해초를 태운  재를 소다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스페인으로부터 수입해서  비누를 만드는 데에  써 왔으나, 18세기 초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이후  수입이 막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775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소다의 대량  제조법의 발명에 2400프랑의  상금을 걸고서 널리 모집하게 되었다.  마라르베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소금과 황산으로부터 소다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여 상금을  타기도 하고, 실제 소다의 제조에 그 방법이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 서 철이나  납, 식초와 석탄 등이 필요하였으므로 그다지 값싼 방법은 아니었다.

그 후, 프랑스의 귀족 오를레앙 공의 전속 의사로 일하던  르블랑 (Nicolas Leblanc; 1742-1806)은 한때 화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소다의 제조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다 싼 가격으로 소다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던 그는, 소금과 황산으로 황산소다를 만든 후, 숯과  석회석을 섞어서 노 속에서 구워서 소다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발명하였고, 이른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으로 불린 이  방법은 과학아카데미에도 당선되었다. 1790년, 조수와 함께 대량 생산법을 개선한 그는 본격적으로 소다의 생산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이듬해인 1791년 오를레앙의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소다 공장 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어져서, 쟈코뱅 산악파가 득세한  이후에는 국왕 루이 16세를 비롯한 많은 왕족, 귀족들이 사형에 처해졌고, 드디어  르블랑의 후원자 였던 오를레앙 마저 1793년 11월 재판에 회부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오를레앙 의 전재산은 혁명정부에 의해 몰수되었으며, 르블랑의 공장 역시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쫓겨 났으며,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의 비밀은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반에 공개 되고 말았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조금 잠잠해지게 된 후, 프랑스 정부는 산업에 꼭  필요한 소다의 제조를 촉진하기 위하여 그의 공장을 돌려 주었으나, 이미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르블랑은 공장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모으고 설비를 갖추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내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극빈자 구호소에 들어 간 그는 절망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 1806년 권총으로 자살을함으로써 한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르블랑은 소다 공장을 세우기 직전인 1790년 3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예견한 듯 소다 제조법이 담긴 가방을 한 변호사에게 맡겼는데, 보관기간이 "50년"이라고 말해서 변호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그 가방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서류에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과 함께 그가 최초로 그것을 발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손을 위하여 발명의 권리를 남기려 한 그는, 자신이 예감한 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비극 적인 삶을 마쳤다. 한편, 불행한  발명가 르블랑이 발명한 소다 제조법은 그 후 아일랜드 출신의 머스프래트(1793-1886)에 의해 영국에서 크게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리버푸울을 비롯한 영국의 여러 지역에 르블랑식 소다 공장을  세우고 엄청난 양의 소다를  생산해내었다. 머스프래트에 의해 대성공을  거둔 영국의 소다  제조업은 중화학공업 발전의 시초가 되었고, 르블랑의 소다 제조법은  19 세기 후반 솔베이법이라는 새로운 소다 제법이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소다 제조법의 경우도 "애써서 발명한 사람 따로, 돈 번 사람 따로"인 경우의 한 예인 듯하다. 

  
3. 무선기술의 공로자 - 암스트롱

현대 전자공학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 힘입어, 인류는 많은 문명의 이기들을 누리고 있다. 그  중  에서도, "무선"기술은 오늘날에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라디오, TV 등의 방송기술에서부터 휴대전화, PCS와 같은 무선통신기기 등, 기존의 "유선"기술에  의존했던 많은 부분들이 무선으로 대체 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무선기술을 최초로 실용화하는데에  성공한 인물로는,무선전신의 발명자로 잘 알려진 마르코니를 들 수 있다. 그  공로로 그는 1909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무전기,라디오, TV 등이 세상에  나올 수  있 는 길을 열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르코니 혼자만의 공로는 아닐 것이다.

그에 앞서서,맥스웰(Maxwell)과 헤르츠(Hertz)는 "전자기파"의 존재를 수식으로 예견하고 이를실험 적으로  확인하였고, 더 거슬러 올라 가자면 패러데이(Faraday)는 전자기유도 등 많은  전기적  현상 들을  발견, 입증하고 전기력선 등의 개념을 도입한 바 있었다. 여러 뮬리학자들의  이론적, 실험적노력 들이 결실을 맺어 오늘날과 같은 "무선시대"의  서막을 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기반 위에서, 무선기술에 관련된  여러 발명품들을 창안하고 실용화 하는데에 공헌한 전자공학자, 기술자들도  많으나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의   하나가   미국의 발명가가   암스트롱(Edwin  H. Amstrong; 1890-1954)이다. 그는 무선기술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사업화와 관련된 경쟁에서 밀려나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 불우한 인물이기도 했다. 무선으로 음성을 보내는 기술, 즉 라디오 방송의 선구자로는 한때 에디슨의 조수로 일한 바  있는 페슨던을 들 수 있다.  그는 무선전신을 이용하여 전파에 음성을 실어 멀리 보내는데 성공하였고, 무선방송, 통신의 본격적인 사업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가 사용한 무선방송방식은 AM, 즉 진폭 변조 방식이었다. 진공관의 발명은 전자공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아울러, 무선기술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  기존의 2극진공관에 또하나의 극을 추가한 3극진공관은 1906년 드 포레스트(De Forest)에 의해 발명되었지만 그는 이것을 증폭용으로 이용하지는 않았다. 당시 전화사업을 확장시켜 나아 가던 미국의 벨 전화회사(AT&T)는 이 특허를 구입하여 전화기의 음성을 증폭시켜서 더욱 먼거리에서도 통화가  가능토록 하는 증폭관으로 응용하였는데, 당시에는 "Audion"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1890년 미국 뉴욕 태생의 암스트롱은 콜롬비아 대학 재학시절부터 스승 푸핀교수의  지도 아래 무선 기술  등을 연구하였고, 3극진공관의 여러 기능에 대해서도 깊이있게 검토하였다. 그는 이 과정에서 오늘날 전기회로기술에 있어서 매우 폭넓게  응용되는 중요한 발명을 이루어 내었는데, 출력부의 신호를 다시 입력부로 되돌려서 증폭시키는 "피드백회로"가 바로 그것이다.  암스트롱의 피드백회로가 라디오 방송기술 등 무선기술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자 미국  무선공학자협회에서는 발명자인 그의  공로를 기리는  의미에서 기념메달을  수여하기도 하였다. 1935년, 푸핀의 후임으로 콜롬비아대학 전기공학 교수로 재직하게 된 암스트롱은 그 무렵 무선기술의 발전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또하나의 독창적인 발명을 이루어 내었는데, 기존의 진폭변조(AM) 대신에, 주파수변조(FM)를 택하여 노이즈 등을 줄이고 감도를 높이는 새로운 라디오 방송  방식을 창안해 낸 것이다. 이러한 FM방식은 지금도 음악방송 등의 스테레오 라디오 방송에도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암스트롱은 전자기술에 관한 탁월한 능력과 뛰어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사업화의 과정에서는 그다지 운이 따르지 못했고, 패배의 쓴잔을 여러번 마셔야 했다. 어찌보면, "엔지니어"로서의 자존심에 집착한 그가  무모하게 싸움을 거듭 한  댓가일 수도 있겠고, 사업자들의 생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한번은 피드백회로기술을 둘러싸고 3극진공관의 발명자인 드포레스트와 특허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는 특허권에 따른 경제적 이익보다는 "피드백회로의 창시자"라는 명예를 더 중시하여  먼저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지리한 분쟁 끝에 미국의 대법원은 암스트롱의 독창성을  중시하면서도 그와 비슷한 생각이 드포레스트 등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착상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에 대하여 암스트롱은  너무도 분개한 나머지, 피드백회로 발명의 공로로 미국 무선공학자  협회 로부터 받은 기념메달까지 반납해 버렸다고 한다. 또한,  그가 창안한 FM 방송도 기술적으로 뛰어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대형 방송사로부터는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RCA(미국라디오회사)와 같은 당시  미국 최대의 방송관련 제조회사는 이미 AM방식으로 대규모 투자를 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새로운 방식 때문에 손해보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은 RCA에 대항하여 독자적으로 새로운 FM  방송망을 이루려 노력하였고, 여러 군소 방송사들에 의해 FM 방송도  서서히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다. RCA와 암스트롱은 드디어 숙명적인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 었는데, 어느쪽이 더 많은 주파수 대역을 차지하는가 하는 싸움에서 승부는 판가름나게 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민생용 텔레비젼 방송의 확장에 주력해 오던 RCA는 텔레비젼 방송을  위한 좋은 주파수대역을 차지하려하였고, 암스트롱측은 FM방송을 위한 더 많은  주파수대역을 얻어 내려  애썼다. 그러나, "심판관"인  미국 연방통신 위원회(FCC)는  결국 RCA의 손을 들어 주었고, FM 주파수 대역을 다른 곳으로 옮기고, 예전의 FM 대역을 텔레비젼 방송이 사용하도록 결정을 내렸다.

이로 인하여 종래의 FM 방송관련 장비,  시설들이 일순간에 고철덩어리로 돌변하였고, 암스트롱은 치명적인 패배 를 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는 다시 RCA소유 방송사인 NBC 및 RCA를 상대로 하여, 이들이 자신의 FM 방송관련 특허를 침해하였다는 소송을 냈으나, RCA와 같은 거대기업에 단신으로 맞서 싸운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다시 오랜 시간을 끈 소송정에서 그는 심신이 몹시 지치게 되었고 경제적으로도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1954년  암스트롱은 자신이 살던  아파트의 10층 창문 에서 투신자살하여 영욕이 교차했던 일생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4. 통계물리학의 창시자 - 볼쯔만(Boltzmann)

현대 물리학의 거장 중의 한사람인 파인만(Richard Feynman)은  많은 업적으로 노벨 물학학상을 수상 한 바 있으며, 그가 쓴  물리학교재(Lectures on Physics) 및 명강연, 여러 재미있는 행적 등으로 잘  알려 진 인물이다. 그가 강연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장기말이 한둘만 놓인 장기판의 한 귀퉁  이만 보면, 당장 무엇이 어떻게 될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말 모두가 놓인 장기판 전체를  보면, 장기말이 너무 많아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여러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 행위도 따지고 보면 간단한 법칙을 따르는  하나하나의 원자가 엄청나게 많이 모여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 데,  이것을 믿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기존의 물리학의 주요 관심사는, 자연현상 을 일으키는 기본법칙들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중력, 전자기력 등  입자들간에 상호작 용하는 힘, 물체의 운동법칙 등등...) 즉, 장기에 비유한다면, 장기말 하나하나가 움직이는 규칙을 알아 내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장기말 각각의규칙  을 안다고 해서, 장기 한판의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 등의 기본 입자에 작용하 는 힘과 법칙 등을 알아 냈다고 해서  자연현상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입자의 수가 많은 대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엄청나게 다 양하고 복잡하며, (예를 들면, 기체 및 유체의 운동, 기상 의  변화 등)  인간을 포함한 생명현상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자연현상 을 다립자의 집단적 시스템의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곧 통계 물리학이며,  극도의 복잡성에서 새로 운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그 목표이다.

통계물리학은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대물리학자 볼쯔만(LudwigBoltzmann; 1844-1906) 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그는, 뮌헨대학, 빈대학 등에서 물리학을 강의하면서 기체의 운동, 열현상  등에 대해 깊이 연구  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고 , 열적 현상의 비가역과정(Irreversib-le process)은 원자, 분자 등의 운동개념 으 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오스트발트, 마하 등의  원자론에 반대 하는 당시의  학자들과 수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특히, 1895년 뤼벡에서 열린 독일 자연과학 자대회에서의 대논쟁은 매우 유명한데, 많은 학자들이 원자 론자와 원자반대론자의 두 패로 갈리어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였다.  돌턴(Dalton)의 원자론이 나온지 거의 100년이 되었건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분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매우  많았던 것 이다. 그후, 원자론자들은  일정 부피에 들어 있는 기체  원자의 수를 정밀하게 계산해  내고, 기체의 미립자 운동(=브라운 운동)을 분자운동의 이론으 로 해석해 내는 등,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고 명확한 근거를 설명하자 원자반대론자들은 결국  항복할 수 밖에 없었고, 원자, 분자 론은 현대 과학의 수많은 분야에 적용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통계 물리학의  창시자이며, 원자론을 승리로 이끈 핵심인물이 었던 볼쯔만은  1906년 9월6일, 어느  피서지의 호텔방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가 자살한 원인에 대해서는,  그간 원자반대론자들과 반복된 격렬한  논쟁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하며, 말년 에는 극심한 신경쇠약 증세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제시한 통계물리학 이론에 비춰 본 우주의 미래를  비관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우주를 닫힌 계(Closed system)로 보면,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Entropy)는 계속 증가하여, 그것이 최고 에이르는 순간은 바로 우주의 열적 죽음,  즉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당시 또다른 상태에 처하게 된 고전물리학의 위기를 반영하는 사건 으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비록  볼쯔만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제시한 통계물리학이라는 새로 운 방법론은 오늘 날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과학분야에도 널리  적용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현대 과학사상의 한 축을  이루며, 최근에  각광받는 카오스이론(Chaos theory) 등의 "복잡성의 과학"에도 그 토대를 제공 했 다고 말할 수 있다.


5. 표본 위조의 생물학자 - 캄메리

생물학에 있어서 진화론은 오늘날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진화론"하면  다아윈(1809-1882)을 떠올리게 되는데, 진화론에도 여러가지  다른 이론이 있으며, 다아윈  이전에도 진화론을 주장한 학자들이 꽤 있었다. 물론, 오늘날 정설로서  인정되는 것은 "자연도 태설" 에  기반한 다아윈의 진화론이지만,  "용불 용설"(用不用說)에 기반한 라마르크(1744-1829)의 진화  론도 옛날에는 만만치  않았다. 용불용설과 자연도태설의 가장 큰 차이는, "획득형질의 유전" 여부인데,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은 왜 길까?"  를 설명할 경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서는 "기린은 높은 나무의 잎을 먹으려고 자꾸만 목을 길게 뽑았으므로 목이 길어졌을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반면,  다아윈의 자연도태설에서는 "기린의 목이 저절로 길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경쟁의 과정에서 목이 짧은 기린들은 도태된 반면, 목이 긴 기린들만이 살아 남아 세대를 거듭하면서 지금처럼 진화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오늘날에는,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라마르크의 학설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꼬리를 자른 암수 쥐를 교미시킨다고 해서, 꼬리가 없는 새끼쥐가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연도태설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20세기 초반 무렵까지만 해도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을 지지하는  주장을 펴는 생물학자들도 많았다.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파울 캄메러(1880-1926)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빈에서 태어난 그는 빈대학을 졸업한 후, 주로 양서류와 파충류를 연구하였는데, 그는 이 종류의  동물들을 사육하고 관찰하는데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두  종류의 유럽산 불도마뱀을 표본으로 삼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육하여 그들의 형질을 다르게 하는데에 성공하였다. 즉, 얼룩 불도마뱀을 검은 흙에서 사육하면 노란 반점이 점점 없어져서 도마뱀의 몸이  거무칙칙하게 되고, 반대로  노란 흙에서 사육하면 노란 반점이 점점 커져서 도마뱀의  몸 색깔이 전체적으로 노랗게  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그는 이것을 라마르크의 이론에 유리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가 더욱 강력하게 라마르크의 이론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이른바 "두꺼비의 혼인혹"에 관한 실험인데, 이는 나중에 숱한 논란을 낳게 되었다.

양서류, 즉 물뭍동물인 개구리는 대부분 물속에서 교미를 하기  때문에, 교미할 시기가 되면 그에 적합하도록 개구리의 몸에 변화가 일어 나게 된다. 즉, 암개구리를 붙잡기 편리하도록 수캐구리의 앞발  끝에 검고 뿔같은 모양의 융기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혼인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개구리 종류 중에서도 두꺼비의 경우는, 땅 위에서 교미를 하기 때문에 혼인혹 같은 것을 필요 로 하지 않으므로 교미기가 되어도 이런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캄메러는 작은 동물의 사육에 관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서, 두꺼비를 물 속에서 사육하였고, 그렇게 하면  두꺼비에게도 혼인혹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었다. 1919년, 그는 자신의 실험 결과 한  마리의 숫두꺼비에게도 혼인혹이 만들어졌다고 학계에  보고하였으며, 많은  생물학자들은 이것이 라마르크의 이론을 확증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 하여, 세계 생물학계는 큰 충격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소련의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에 근거하여 획득형질의 유전을  믿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연히 캄메러의 주장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1926년 생물학자들은 별도의 위원회를 조직하여, 캄메러가 사육하였다는 숫두꺼비  표본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몇 주일의 정밀한 조사  끝에 나온 결론은, 캄메러의 실험결과가 엉터리 였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개구리의 혼인혹은 가시모양의 돌기 가 있어야 하는데, 캄메러가 지니고 있던 두꺼비는 그런 모양이  아니었고, 거무스름한 빛깔은 인위적 으로 먹을 주입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지 얼마 후인 1926년 9월23일, 캄메러는 오스트리아의  어느산 속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캄메러가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학자적 양심마저 내팽개친 채 스스로 두꺼비  표본을 조작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조작에 그도 속았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장난치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논리오류  (0) 2011.08.03
연금술 이야기  (0) 2011.07.28
동시발견과 우선권 논쟁  (0) 2011.06.27
생활과학상식  (0) 2011.06.26
마왕을 위한 지침서  (0) 2011.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