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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Novel

동급해커

알 수 없는 사용자 2012. 1. 5. 05:20

동 급 해 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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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유저 저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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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커(Hacker) 컴퓨터내의 기록을 패스워드를 풀어 훔치거나 망치는 사람

.......................................... <현대시사용어사전.동아일보사.90년.>

대부분 구 자유학원 부근에서 산책을 하는 편이지만, 간혹 도큐핸즈에서 DIY 제품들을 구경하며 고객을 만나곤 한다. 개인적인 아르바이트가 없을때는 산타마(山多摩) 지구의 싸이클링 센터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기도 하는데, 한참동안 자전거를 타노라면 그가 입는 버튼다운 셔츠는 땀으로 범벅이 된다. 그럴 경우 땀을 식히는 데는 역시 술이 최고다. 리무진 택시로 긴좌부근의 서민 주점에 도착,한잔의 차가운 정종을 마시면 그날의 피곤이나 노곤함은 흔적없이 사라진다. 그런 것들이 그의 일상 생활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는 변함없는 그였다.

그가 하는 작업은 주로 자정 무렵에 시작했다가 끝났다. 작업 중에 그는 간혹 Gif 파일이나 케이크워크로 자신이 편곡한 음악을 들었는데 그것도 이젠 그만 두었다. 오늘 같은 경우는 DAT(디지털 오디오 테입)으로 레코딩 된 로저 워터스의 노래를 듣고 있었다. 어쩌면 준은 지금 음악에 빠져 있는지 모른다.
준이 하는 작업에는 매뉴얼이나 교과서가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준의 경우처럼 교도소 생활을 경험하는데,그것도 나쁜 경험이 아니다. 해커가 되면,어느새,머릿속에 컴퓨터 잡지 하나는 미끈하게 뽑을 정도의 지식이 쌓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니까 교도소에 들어가면, 시간이 언제가나 하며 복역하는것이 아니라,자신이 습득한 방대한 지식을 복습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눈치 없는 친구들은 바보가 되어 나오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밥벌이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에는 항상 최소한의 정당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은행 휴면구좌를 농락할 때는 그 돈을 가난한 서민들에게 나누어준다는,그런 멜랑꼴리한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수고비쪼로 자신의 구좌에 1% 정도 쑤셔 넣는 경제적 안목도 필요하다.
준은 방금전 교세라 인터내셔날 인스티츄드(KII)에 침투해 들어갔다. 본사정보팀이 교세라가 개발중인 3IC용 세라믹의 패키지도면을 원했을 때 그가 처음에 생각한 것은 핸드폰 암호를 하나 물색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경우 대개 아마추어들은 일반 전화선을 전송루트로 사용하거나,혹은 전화국에 침입한 뒤 전화 코드를 일일이 바꿔가며 당국의 추적을 피한다. 그건 그가 생각하기에는 참으로 원시적이고 비능률 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한때는 그런 식으로 작업을 했었다. 그가 최고의 전문가가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타인의 핸드폰암호를 풀어 그 핸드폰의 전파를 무선모뎀에 연결하는 것이다. 더구나 지금같이 일본에 앉아 미국까지 침투할 때는 (KII는 미국 실리콘 벨리에 위치하고 있는 일본계 연구소다.) 각별하게 신경을 써야 한다. 준은 잠시동안 이미 파악해 놓은 몇개의 핸드폰 암호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가 준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백악관에 출근하는 어느 얼빠진 미국인의 핸드폰을 자신의 전송루트로 이용하기로 했다.

실리콘벨리에 있는 교세라 인터내셔날 인스티튜트의 대형 JT 컴퓨터는 침입자에 대해 어떠한 움직임도 포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조용히 흐느적거리고 만 있을 뿐이었다. 사실 JT-9900형 대형 컴퓨터는 일본 NEC가 자랑하는 비 IBM형 컴퓨터로 220기가의 대형 용량을 자랑하고 있는 초괴물이었다. 하지만 JT는 몇가지 약점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약점은 다른 대다수의 컴퓨터처럼 유닉스 최신버전을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자면 유닉스 광인 해커들에겐 여지없는 사냥감이란 뜻이었다. 그리고 JT 시리즈에는 미국제 대신에 일본 방역회사가 제작한 자체 방역시스템이 기본적으로 탑재되어 있었는데 그 점 역시 약점중의 하나였다. 방역시스템은 준이 침투하는 시간에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준은 이미 JT 플랫폼 문 앞까지 들어가 있었다. 준이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의 중앙 한가운데에는 분홍빛의 박스가 나타나 준에게 암호를 묻고 있었다. 준은 이와 같은 직접적인 교섭에 접촉할 경우에는 왠지 식은 땀이 났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수많은 훈련을 했던 남자였다. 어쩌면 지난 1년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교세라를 비롯해서 모두 7개의 대기업 방역시스템을 해체한 경험이 있어서인지 모른다. 준은 동호(무슨 이름인지 몰라 제 이름을 살짝)가 제작한 (자동 패스워드 축출 프로그램)을 걸어 보았다. 그러자 채 몇분이 되기전에 암호문을 물어오던 분홍색의 박스는 수많은 난수표를 째각 이며 읽어 들이기 시작했다. 준의 프로그램에 여지없이 걸려든 것이다.
이윽고 준의 눈 앞에서 12자리의 문자가 완성되어 갔다. 그런 뒤 암호문을물어왔던 분홍색의 박스는 화면 한가운데에서 흔적없이 사라졌다. 준은 그때 카푸치노 커피를 마시며 컴퓨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간 감기 기운도 있었지만 화면이 열리는 것이 보이자 준은 제정신을 차렸다.

준은 담배를 손끝으로 튕긴뒤 거칠게 입에 물었다. 그런 뒤 삽시간에 플랫폼 내부로 치고 들어갔다. 화면 우측에선 한꺼번에 수백종류의 아이콘이 별처럼 무수히 지나가고 있었지만 준은 색깔만으로도 아이콘의 용도가 무엇인지 판별해내고 있었다. 하기야 지금은 그따위 아이콘에 신경을 쓸 입장이 아니었다. 이미 키보드의 위에 올려져 있는 준의 손가락은 한치의 오차도없이 타이핑을 해대고 있었고,그때마다 모니터 화면에서는 수없이 많은 방들이 접혀졌다가는 다시 다른 방으로 인도하고 있었다. 준이 패키지 도면을 찾아낸 것은 그로부터 불과 50초 뒤였다.

준은 패기지 도면을 초고속으로 압축했다. 준의 컴퓨터에 램상주로 떠있는 디지털 시계는 JT 시스템에 적용되는 (암호자동 교환시간)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디지털 시계가 정확하게 판별했다면 JT에 걸려있는 방역시스템은 3분마다 새로운 암호를 갱신하려고 대들 것이다. 만약 그 시간안에 모든 걸 해결하지 않는다면 준의 위치는 순시간에 포착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아직 1분 20여초 남았을까. 준은 이미 모든 작업을 끝낸 뒤였다. 준은 다시 담뱃불
밗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담배를 뒤로 물고 필터 부분에 라이터 불을 당겼던 것이다. 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간혹 자신이 멍청하다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럴 정도로 심할까...<br>
준은 이제 당연하다는 듯이,300개의 바이러스를 압축한 (Computer Terminator/해커버전)을 선물로 던져 놓고 나왔다. 그런 뒤 마지막 작업으로 준은 자신의 아이디명을 JT 시스템안에 던져 놓고 나왔다.

아마 교세라는 누가 침입했는지 조차 모를 것이고,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그게 바이러스 탓이라고만 여길 것이다.
300개의 바이러스는 이미 수년 전부터 준이 맥아피연합에서 리콜해 온 각종 바이러스 소스였는데,이런 경우에 제법 쓸모가 많았다.

도면을 확인하는 작업까지 끝나자 준은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젠 필터에다 대고 불을 붙이거나 하는 실수를 하지 않는다. 준은 컴퓨터를 멍하니 응시하며 이제부턴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았다. 지금 이 시간이면 도쿄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야구장처럼 떠들썩한 분위기일 게다.
순간적으로 나쓰에가 웃는 모습이 준의 뇌리에 떠올랐다. 나쓰에와 준이 만난 건 게이오 대학에서 열린 일렉트로녹스 포럼에서 였다. 나쓰에는 27세의 훤칠한 키를 가진 여자였는데 표정이나 행동거지가 제법 수수한 여자였다. 그것은 그녀가 그날 검정색의 수트를 걸치고 온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쓰에는 포럼이 끝난 뒤 자신을 소개할때 클리퍼광이라고 말했다. 그 점에 준은 흥미를 느꼈고,그 날밤 준은 나쓰에와 함께 파노라마 파크까지 걸어갔었다. 둘이 헤어진 건 다음날 새벽 공원 다리 위에서였다.

나쓰에의 모습이 떠오르자 준의 손은 자동으로 오거나이저를 열기 위해 마우스를 이동시키고 있었다. 준은 손쉽게 나쓰에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런 뒤 준은 그녀의 전화번호를 머리 속에 외웠다. 하지만 오늘은 한가지 좋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준이 오거나이저를 크로즈한 뒤에,다시 사방팔방으로 어지럽게 열려져 있는 유닉스를 닫고 DOS 화면으로 막 복귀하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모니터 화면에서 스크롤이 발생한 것이다. 그런 뒤 모니터 화면 중앙에서 난데없이 정체불명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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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가없이 미 합중국 컴퓨터를 파괴하는 자는 5만불 이하의 벌금,또는 5년 이하의 구금,혹은 이를 병과 한다.

........................... -연방 컴퓨터 시스템 보호법안 중에서. 미국. 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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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이 거주하는 하숙집 가나기원金木園은 도쿄 신주쿠新宿에 있는 아베구장의 뒤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가나기원은 문자 그대로,금빛처럼 울창한 정원수로 둘러 쌓여있는 신주쿠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은 하숙집이었다. 8조 다다미방 24실의 가나기원의 여주인인 모리타 가나에는 딸 하나를 키우고 있는 미망인 였는데,그녀는 다도(茶道)를 24명의 하숙생에게 일일이 챙겨줄 정도로 정성스럽다. 한편으로 그녀는 풍부한 머리카락과,혼혈아 흔적으로 보이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가나에는 오늘 밤에도 딸 준꼬와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초봄이라 그런지 지금도 정원에는 아스라이 찬기운이 남아 있다. 아마 곧 있으면 벚꽃이 필 터이다. 가나에는 문득 한국에서 건너온 사내가 1년동안 투숙하고 있는 방을 쳐다보았다. 사내의 방에서는 저녁 내내 불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가나에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휠체어에 앉아있는 준꼬를 내려다보았다. 준꼬는 한참 재롱을 떨 8살 난 여자애였지만 선천적으로 하반신 마비 환자였다. 준은 가나에 모녀가 정원에서 걸어다니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지만 아직도 물끄러미 자신의 데스크탑 컴퓨터에 떠있는 경고문을 응시하고 있다.
==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
별안간 준의 머리에 자신의 어두웠던 과거가 떠올랐다. 아는 게 없었던 시절...그저 불안하게 컴퓨터에만 매달렸던 시절이었다.

벌써 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994년 그 해 3.1절 특사로 출감했을 때 준의 나이는 27살이었다. 그날 교도소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야할 매형과 누나는 보이지 않았다. 유일한 돈줄이었던 누나는 이미 준이 교도소에 수감된 사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것이다. 그러니까,그 당시의 그는 기숙할 곳조차 변변치 않았다. 당장 급한 것은 먹고사는 문제였다. 하지만 취직자리를 구한답시고 이력서에 (신용카드 복제 대행으로 대전 교도소 3년 복역)이라고 기입하는 일은 가당치도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그해 3월경의 준은 (그의 말처럼 아까운 청춘조차 멍이 든 채) 탱자탱자 서울거리를 거닐며 소비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때 운이 좋게도 준은 제일그룹 정보팀에 근무하는 친구 고종수를 만날 수 있었다. 말이 고교동창이었지,그와 고종수는 친하지도 않았고 당구를 같이 친 적도 없었다.
"자네 소식은 3년전에 한번 들었던 것 같군..."
"대기업에 근무한다더니...신문기사까지 스크랩하나?"
"내가 출세하는 데에 자네 실력이 도움되면 좋겠어."

그들은 고려빌딩 지하에 있는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야릇한 밀담을 나누기엔 너무 개방적인 장소였다.
"원하는 도면이 뭔데 그래....?"
종수는 웨이터에게 히쭉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말을 시작했다.
"마쓰시다 전기의 가전제품이네. 코끼리 밥통의 일종인데 그게 밥도 하고 캔터키 치킨까지 튀길 수 있는 모양이더군..."
준은 안주를 기다리다 말고 레몬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군. 사실 나도 내 기술이 녹스는 걸 원치 않아. 요즘은 당구비조차 없어서 빌빌대니까 말야. 어쨌든 좋아. 한가지 약속만 확실하다면 자네가 원하는 것을 구해보겠네."
"무슨 약속인데...?"
"도면을 구해오면 아파트 한 채를 나에게 준다고 약속하게..."
종수는 벙찐 얼굴로 준을 쳐다보았다. 어이가 없었는지 웃음이 나왔다.
"후... 착각이 심한 편이군."
종수는 포켓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보수는 당연히 없다는 걸 명심하게. 난 단지 신문지상에서 읽었던 자네의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 게야. 자네가 용산 해커계의 최고였다면 말이지."
용산 해커...
순간 준의 눈에서 적의의 빛이 번쩍였다.
준의 입장에서 본다면 용산상가는 대덕단지 못지 않은 두뇌들이 모여있는 장소였다. 비록 장사치라고 불리기는 하지만 그들의 세계는 거대한 비전을 꿈꾸고 있었다. 그 비전 아래서 꿈틀거리는 용산의 해커들...그 말에는 어쩐지 범죄자라는 뉘앙스가 풍겨오고 있다. 따지고 보자면 준은 말 그대로 용산해커였다. 다니던 대학을 때려치우고 처절하게 밑바닥 생활부터 시작한. 모든 건 돈 때문이었다. 각자 먹고살기 바쁜 세상에,준도 남들처럼 고만고만한 꿈이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하루종일 컴퓨터에만 빌붙어 있는 남자가 학비를 벌기 위해 뛰어 다닐 생각을 할까. 아니 그보다는 준 스스로가 컴퓨터에 너무 미쳐 있었다고 하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남들보다 1퍼센트 정도...그저 1퍼센트만 더 미쳐 있었다는 것이 준의 인생을 지금과도 같이 만들어 놓았다.
우울한 마음이 진정된 것은 안주가 나온 뒤부터였다. 웨이터 두사람이 가지고 온 안주는 기대와는 다르게 아주 푸짐했다. 그 때문에 준은 갑자기 긴장감이 풀렸다. 사실 배가 고팠다. 그런 준의 변화가 재미있었는지 종수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여긴 우리 정보팀이 자주 오는 단골집이네. 그래서 내가 오면 대개 이 정도의 안주는 미리 준비가 된다네. 어떤가? 여잘 불러서 같이 먹자고 할만큼 많은 양은 아니겠지?"

준이 해커계로 복귀한 건 그로부터 3일 뒤인 수요일 밤이었다. 준은 고종수가 원하는 도면을 구하기 위해 우선 북경대학 단말기에 접속했다. 거기서 잠시 하는일없이 놀다가 10분뒤에 준은 곧바로 홍콩에 있는 사설 비비에 접속을 시도했다. 이미 준에게는 여러 종류의 아이디가 크랙되어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번 건은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았다. 홍콩 사설비비 단말기안에서 다시 적당한 아이디를 크랙한 준은 곧장 그 아이디를 사용해서 인터넷에 들어갔고,그곳에서 일본 온라인망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 뒤 곧바로 마쓰시다 연구소까지 치고 들어갔다. 물론 도면을 다운 받는 일은 어린애들도 할 수 있는 쉬운일이었다. 준이 그날 작업을 하면서 걱정한 것은 단지 전화비 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준은 다운 받은 도면을 디스켓에 카피한 뒤 고종수를 찾았다. 고종수는 전혀 의외라는 듯 준을 맞이했다. 고종수가 준이 입수한 도면을 자신의 20인치 멀티싱크로 읽어 들인 것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서였다. 이때 종수는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입이 벌어졌다.
이걸 무슨 방법으로 카피해 온 것일까...
그건 분명 마쓰시다의 초인기 품목인 Violet 전기밥솥의 설계도면이었다.

준이 정보팀 팀장을 만난 건 다음날 밤이었다. 물론 고종수가 만든 술자리에서 였다.
정보팀 팀장인 이혁수는 다소 꾸부정한 인상을 가진 중년남자였지만 하버드 유학파중 하나였다. 그는 한달전부터 비서실장 물망에 올라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로 상당히 지쳐있었다. 그는 준의 능력을 한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이혁수는 간단하게 말했다.
"우선은 본사 전산실에서 근무해 보도록 하게. 그 후에 내 시간이 있으면 자네에게 적당한 자리가 있는가 찾아보겠네."
그날 밤 처음으로 종수와 준은 당구를 함께 쳤다. 그런 뒤 기계를 구입해 여관으로 들어갔다. 둘 사이의 고스톱판이 끝난 건 다음날 아침 7시였다.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밤에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 뒤 준이 일본에 날아온 것은 작년 3월이었다. 이때 김준은 제일 신문사 도쿄 특파원이란 헤드(Head:위장직업)를 가지고 나리타 공항에 도착했다. 물론 그의 임무는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일본의 축적된 기술을 암암리에 훔치는 것은 준의 임무중 기본적인 것에 불과했다. 이미 일본으로 날아오기 전에 준은 그룹 본사에서 개설한 8개국어 습득반에 등록해 일본어를 정책적으로 익혀왔기 때문에 적응하는 문제도 별무리가 없었다. 일본에서 지난 1년간 김 준이 훔친 정보는 모두 27종류에 달했다.

즉,준은 자기 자신을 (확고한 직업정신)을 가진 (전형적인 해커)라고 생각했다. 그는 항상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한 뒤 보수를 획득했는데,그러한 그를 매장하겠다는 경고 메시지가 30분전에 모니터 화면에 떠오른 것이다.
준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보너스를 주겠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자신을 매장하겠다는 따위의 말장난이라니.
버러지 같은 놈. 내가 극동 최고의 해커라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 것일까...
준은 자꾸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비록 구형이긴 했지만 펜티엄 프로세서를 채용한 준의 데스크탑 컴퓨터는 고종수가 준의 입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카드로 긁은 것이었다. 하드용량도 겨우 1.2기가 밖에 안되었지만 그곳에는 준이 아끼는 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이 때문에 요즘 유행한다는 불루칩으로 업그레이드할 생각도 일부러 떨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어느 미친 놈이 하드디스크 안에다가 웃기지도 않은 메시지를 남기고 간 것이다.

준은 오염된 데스크 탑의 하드를 정리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걸어 놓은 뒤 문제가 있는 있는 파일을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도중에 방문을 두들기는 노크소리가 들려 왔다.
후루겔스 게이꼬였다. 메리노종의 니트를 즐겨 입는 여자.
"뜻밖이군. 이 밤중에 왠 일인가. 게이꼬양?"
가나기원의 하숙생중 홍일점이었던 게이꼬는 TV 도쿄의 취재부 기자였다.
수준급의 미모와 일본사회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는 안목. 게다가 이 미모의 아가씨는 좌절할 줄도 알았다. 뭐니뭐니해도 게이꼬의 매력은,남성에게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각선미에 있었다. 어쨌든,게이꼬는 한밤중에 준을 만나러 온 적이 없었다. 그저 가끔가다 하숙집 연못가에서 마주보고 앉아서 한일간 정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의 수준이었을까.
"죄송한데...이 디스켓을 해체할 수 있을까 해서요."
그녀는 3.5인치 디스켓을 미소 지으며 흔들었다.
"해체? 패스워드를 찾아 달라는 뜻인가?"
"하이. 마끼 준사히라는 여자의 유서입니다만."
"글쎄....난 보시다시피 컴퓨터에 문제가 있는데?"

준이 싸늘하게 거절하자 게이꼬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잘못 들어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분명 게이꼬가 느끼기에 이 한국인 사내는 지금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럴까...
불현듯 게이꼬의 뇌리에 며칠전 읽었던 도큐멘트성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 1996년 벽두를 시작으로 쓰쿠바 지역은 이웃 한국에서 날아온 산업스파이 문제가 떠들썩하게 부각되고 있다. 이른바 (파워유저 코리아)라고 불리는 이 집단은 마구잡이로 쓰쿠바 전지역을 휩쓸고 다녔고 급기야는 노무라 연구소와 외무성 온라인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현실적으로 이웃 한국 재벌들의 입장은 매우 다급한 상황이다. 앞쪽에는 일본과 독일이 골대를 막고 슈팅을 허용하지 않았는데,등뒤에서는 인도네시아와 같은 신진공업국들이 물밀듯이 올라오고 있는 게 현 한국상황이다. 이때문의 대다수의 한국 기업은 아예 정보팀을 일본에다 상근시키는 경우도 있다.
훔치던지. 아니면 박살내라.
이것은 파워유저 코리아의 숨은 임무중 하나다. ------------

히풋 자신도 모르게 게이꼬는 미소를 흘렸다. 이 남자...설마 산업스파이는 아니겠지...
게이꼬는 일부로 아양을 떨었다.
"좀 봐주세요,네? 저 실은 내일 아침에 당장 필요한 내용이거든요."
게이꼬는 허리를 90도 각도로 구부리며 절을 한 뒤,이번에는 책장의 노트북을 가리켰다.
"노트북에 이상이 없으시면 부탁드립니다. 이 디스켓의 내용은 내일 아침 뉴스의 빅 스쿠프(Scoop;특종)가 될 겁니다."
게이꼬의 유래없이 정중한 말투를 듣자 준은 미처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준은 게이꼬가 건네주는 디스켓을 받았다. 게이꼬는 이미 방문을 닫고 복도 끝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게이꼬가 건네준 디스켓에는 바이러스가 없었다. 유서 파일의 이름은 MK였고,백업 파일은 없다. 의아한 점은 MK파일이 6개의 디렉토리중 맨 마지막 디렉토리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나머지 5개의 디렉토리 안에는 파일이나 기타 비슷한 것조차 없다.
병적이군... 2HD 디스켓 안에 6개의 디렉토리를 만들어 놓다니...
준은 뷰(파일보기) 프로그램을 크로즈한 뒤 화면 상단부에 있는 디렉토리 안으로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그러자 패스워드를 물어오는 박스가 화면에 떠올랐다.
아차 하는 심정으로 준은 다시 각각의 디렉토리에 진입을 시도해 보았다.
놀랍게도 디렉토리마다 패스워드가 걸려 있다. 준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Mdir로 디렉토리를 카피해서 노트북으로 옮겨 담았다. 그렇지만 노트북에 옮겨진 디렉토리에도 패스워드가 여전히 걸려 있다. 이번에는 (암호축출 프로그램)을 구동시켰지만 이마저 디렉토리에 걸려 있는 암호가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한다. 준이 가지고 있는 축출프로그램은 이미 구형이 된 것일까. 아니면 암호 자체가 더 지능화된 것일까.
준은 생각을 바꾸고 마우스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전체 디렉토리의 크기가 노트북화면에 떠올라왔다. 4만 바이트 수준이었다. 고작 원고지 몇매의 내용이 들어 있을 성싶은데 왜 암호를 걸어 놓았을까... 더구나 이건 자살한 여자의 유서라고 하지 않았나...

준은 약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노턴 데스크탑을 가동시켜 보았다.
그러자 별안간 매크로 현상이 복잡하게 발생했다. 그런 후에 노트북은 자동으로 다운이 되었다. 준은 잠시 어이가 없어서 액정화면을 가만히 응시했다.
매크로...?
준은 담배를 입에 물고 방금전 자신이 봤던 광경이 무엇인지 판별하려고 했다.
노트북을 다시 부팅시키자 이번에는 상위 5개의 디렉토리안에 X1부터 X5까지의 파일이 각각 새롭게 존재하는 것이 발견되었다. 흥미있는 일이었다. 뷰 프로그램으로는 새로 파생된 파일의 내용이 무언지 식별할 수가 없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야,준은 X1부터 X5까지의 새로 생성된 파일들이 유틸리티에 대한 방어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간파했다. 그러니까 그가 노턴데스크탑을 구동시키는 순간 매크로로 생성된 5개의 파일은 (상용 유틸리티)의 작동을 방해하는 일종의 보안장치였다.
어느새 로저 워터스의 노래가 다 끝나가고 있었다.
추측하기에 노트북의 하드디스크안에도 새로 생성된 파일이 있을 것 같다.
역시 준의 생각대로 새로 생성된 파일이 하드디스크 안에서도 발견이 된다.
아마 이 유서를 남긴 여자는 노턴이 가동되면 매크로가 발생하는 프로그램을 디스켓안에 짜 놓았을 것이다. 峠 착상이자 능력임 셈이다.
준은 코볼을 펼쳐서 프로그래밍을 시작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암호를 크랙하는 파일을 만드는 것이다.

디렉토리가 열린 건 그로부터 1시간 뒤였다. 처음에 뷰 파일로 보았듯 맨 마지막 방에 MK라고 쓰인 문서 파일이 얌전히 잠을 자고 있다. 아마 문제의 유서일 것이다. 준은 유서를 읽기 위해 워드프로세서를 구동시켰다.
하지만 이 역시 다시 암호가 걸려 있다.
준은 다시 암호크랙용 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메인 시스템을 엑세스하는 것이 아닌 이상 소규모의 암호에 접근하는 방법은 이 방법이 최선이었다.

MK 파일에 걸려있는 암호는 러브love라는 단어였다. 준은 파카 만년필을 꺼내 벽에다가 러브를 써놓았다. 그건 준이 하는 버릇 중 하나였다.

게이꼬는 막 자신의 방을 나왔다. 어느새 두시간 가량이 지나가고 있었다.
지금쯤이면 그 한국인 사내가 암호를 찾아냈는지 모른다.
간혹 게이꼬는 사내에게서 이상야릇한 호기심을 느끼곤 했다. 한번쯤이면 러브캡슐로 가자고 말을 걸어올 텐데...
사내가 그런 말을 해도 게이꼬는 싫진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게이꼬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카푸치노 커피를 좋아할까...
준은 게이꼬가 나타나자 곧바로 해킹한 디스켓을 내밀었다. 게이꼬는 붉게 물든 얼굴로,이 카푸치노와 쓰시(초밥)는 자신이 직접 만든거라고 강조한 뒤 접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 뒤 고꼬니 가이데...라고 말했다.
메모지에다가 암호를 적어 달라는 뜻이다.
준이 암호를 적어주자 게이꼬는 그것을 잠시동안 들여다보았다.
LOVE...
순간 게이꼬는 이게 무슨 뜻일까 하는 생각에서 준을 쳐다보았다. 준은 게이꼬의 기대와는 다르게 아무말없이 컴퓨터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상 준은 암호에 대해 할말이 없었다. 암호는 말 그대로 암호인 것이다. 준이 자신에게 아무런 설명도 않자 저절로 게이꼬의 이마는 찡그러진다. 게이꼬는 쌀쌀하게 준의 방을 나섰다. 이지워크 향수 냄새를 방안 가득 남겨 놓고.

같은 시각 짙은 어둠 속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뚫고 서울 밤거리를 질주하는 중형택시가 있었다. 고종수. 제일그룹 정보팀 팀장인 고종수는 지금 밤늦게 퇴근을 하다가 긴급히 본사로 뒤돌아가고 있었다.
고종수가 본사 현관에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수위가 인사를 했지만 종수는 아는 채도 하지 않고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뛰어 갔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종수가 본사 33층 꼭대기에 있는 정보팀에 들어서자 이미 기다리고 있던 한일수 대리는 담배를 뻑뻑 피며 종수를 맞이했다. 종수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어딘지 알아냈나?"
"글쎄요 저 그게 말입니다만..."
"빌어먹을. 한대리는 빨리 정보팀을 비상소집하게. 난 미스 탁에게 가 있을테니까."
종수는 자신의 발마칸 코트를 사각이며 섹션 V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야간 근무자 중 한 명인 탁선미 양이 막 자리에서 일어서서 종수에게 인사를 했다. 이미 탁선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그래 어떻게 된 겁니까? 선미씨."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장님."
탁선미는 종수의 굳은 표정에 겁을 먹고 재빨리 허리를 굽히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해킹된 암호코드가 모니터 중앙에 올라왔다.

== LOVE ==

종수는 눈앞이 아득해 질 정도로 긴 충격을 받았다. LOVE는 제일중공업과 국방부 사이를 연결하는 사라사테 시스템의 메인암호였다. 어느 미친 놈이 그 암호를 해킹하고 제일중공업에 침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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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준, 나쓰에와 심각한 데이트를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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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오후에 준은 외환은행 도쿄지점에 들렸다. 임무가 완수되면,자료의 내용이나 질에 관계없이 고종수가 220만원의 보너스를 송금해주기 때문이다.
준은 습관적으로 수금된 돈을 스미모토 신탁은행 구좌로 옮겨 놓기 위해 현금인출기의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돈은 아직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세번씩이나 재확인했지만,준의 구좌로 떨어져야 할 220만원의 송금은 지연 되고 있었다. 창구의 아가씨는 싸늘하게 굳어 가는 준의 표정에 겁이 났는지 스미마셍 스미마셍 고개를 숙인다.

오후 5시. 준은 도쿄 돔에서 야구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곧 소나기라도 내릴 것 같이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야구는 오리온즈팀이 7점차로 지고 있었다. 본사와 핫라인이 연결이 된 것은 오리온즈팀이 4점짜리 만루홈런을
다시 두들겨 맞을 때었다.

"어떻게 된 거야?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잖아?"
한쪽으론 핸드폰을,다른 손으론 네스카페를 마시며 준은 다그쳤다.
"전화를 회피한 점은 사과하겠네...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어."
고종수의 음성은 전에 없이 차가웠다.
"무슨 일인데 그래? 롯데 오리온즈가 두들겨 맞는 것보다 더 큰 문젠가?"
반은 농담이었을 것이다. 준의 말이 끝나자 종수는 기다렸다는 듯이 차갑게 말을 뱉었다.

"본사 중공업 터미널이 뚫렸네."

준은 네스카페를 들이키다 말고 그것을 떨구었다. 차가운 커피가 준의 바지를 타고 흘러 내렸다.
"뭐라고 했나. 방금...?"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네. 어제 밤에 중공업 터미널이 뚫리면서 국방부 병참사령부까지 개방된 모양이야."
"그럴 리가?!"
갑자기 커피 맛이 확 달아났다. 준은 불현듯 머리가 아파왔다.

이때 나쓰에는 검정색 나염을 하늘거리며 준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남자야... 야구장에서 만나자면서 좌석표만 달랑 보내오다니... 나쓰에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외국인과의 데이트는 난생 처음이었다. 특히 한국인 남자와는...

한국인 남자는 일본 남자와 다르지 않았다. 골격상의 문제나 피부색도 일본 남자와 구별이 안된다. 일본 남자처럼 보이는 외국인과의 데이트.
아마 다른 여자들은 이 기분을 모를 거다. 이걸 몰래 데이트라고나 할까.

나쓰에는 길게 호흡을 한번 쉬더니 준의 어깨를 툭 쳤다.
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나쓰에를 돌아다 봤다.
"아 나쓰에양..."
"어머,무슨 일...왜 그러세요?"
"아.아닙니다. 늦으셨군요..."

나쓰에는 히풋 미소를 흘리며 준의 핸드폰을 쳐다보았다. 가끔 보는 상표였다. 핀란드제일 것이다. 에릭슨이라 했던가. 그녀의 입에서는 잔잔하게 구강향수냄새가 흘러 나왔다.

"제가 방해한 건 아닌 가요?"
"아닙니다. 10분 정도만 기다려 주지 않겠읍니까?"
나쓰에는 왠지 이 남자에게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조명때문에 이런 생각이 드는지도 몰라. 나이트게임으로 열리는 프로야구 경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종수는 준과 나쓰에의 대화를 전화를 통해 듣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이 녀석은 지금 데이트중이란 말인가?
종수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정보팀 팀장이 된 이후로 종수는 하루에 3갑을 빨아대는 해비스모커가 되었다. 다시 준과 여자사이에서 일본어가 오고 갔다. 그런 뒤 잠시 잠잠해 진다. 둘 사이의 대화가 끝난 것으로 판단한
고종수는 입을 열었다.

"러브라는 암호를 알고 있나?"
"러...브...?"
"러브는 사라사테 시스템의 패스워드네."

준은 힐끔 곁눈으로 나쓰에를 응시했다. 그렇지만 준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러브)라면 게이꼬가 건네 준 디스켓에 걸려 있던 암호다.

우연일까. 왜 하필 게이꼬의 암호가 사라사테 시스템의 암호와 동일한가...<
준은 입을 열었다.
"자초지종은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오늘 송금이 불발된 이유나 설명해주게."

이때 라이온즈의 강타자 데스트라데가 만루 홈런을 친 모양이다. 갑자기 나쓰에가 간지러지게 환호성을 질렀다. 준의 등을 때리면서.

종수는 울컥 화가 났다. 함성소리 때문에 준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저쪽에서는 한대리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구경기가 끝나면 이야기하세. 이러다간 아무 일도 안되겠군..."
그런 뒤 종수는 와락 전화수화기를 놓았다. 몹시 화가 나 있었다.

한대리는 종수의 책상 옆에 멈추어 서 있다. 한대리는 말했다.
"분명합니다. 교수님의 전화번호가 침투루트로 이용되었습니다."
종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발마칸코트를 걸쳤다.
"확실한가?"
교수님은 바로 김준의 암호명이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침투 전화라인을 역추적해 보니까,사용된 건 김준의 핸드폰이었습니다. 방금 부장님이 통화했던 그 핫라인을 통해 제일중공업 단말기가 뚫린 겁니다."

믿을 수가 없다. 종수는 머리가 어질해졌다. 준은 이 사실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아니 그 친구가 제일중공업을 뚫고 들어올리는 없었다.
누가 김 준의 핸드폰 암호를 풀어 해치고 이용했을까...

"알겠네. 한시간 후 다시 통화하기로 했으니까 이 문제는 당분간 자네만 알고 있도록 하게..."
"알.알겠습니다 부장님."
종수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정보팀 직원들이 종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말 없이 종수를 따라 섹션 V로 걸어갔다.

야구는 롯데 오리온즈가 데스트라데에게 만루홈런을 두방이나 내 주더니 결국 96년 시즌 개막전을 17점차로 대패했다. 절규하는 롯데 팬 사이에서는 준이나 나쓰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쓰에는 스타킹을 벗으며 준을 쳐다보았다. 준은 막 욕실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이제 나쓰에가 욕실에 들어갈 차례였지만 왠지 기분이 나지 않았다.
무슨 일 때문에 저럴까. 저 남자는...

아까 나쓰에가 들은 건 분명 한국말이었다. 나쓰에는 오래전부터 조총련계 한국인 여자 친구를 사귀고 있었기 때문에 몇 마디의 한국어는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때 나쓰에는 한국어를 교양과목으로 선택하기도 했으니까.

나쓰에는 준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준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나쓰에는 그런 사내의 모습에 뜨겁게 달아오르기도 했다.
만나자구 해 놓고선 잠을 잔다 이 사내는.

준의 핸드폰이 울린 건 그로부터 2시간 뒤인 밤 10시 무렵이었다. 나쓰에는 가만히 벽에 기대선 채로 핸드폰이 울리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잠옷을 입고 있었다.

다시 요란하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자 침대에 누워있던 준은 잠이 깨었다. 준은 약간 아픈 머리로 핸드폰을 찾아 손을 더듬었다.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종수였다.

준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있나...?
놀랍게도 고종수는 김준을 의심하고 있었다.

준은 핸드폰 스위치를 끄고 침대에서 일어섰다. 나쓰에가 보이지 않았다.
준은 나쓰에를 찾아 시선을 돌렸다. 나쓰에는 TV 옆에 서 있었다. 히풋 미소를 흘리며 나쓰에는 준이 더듬거리는 행동을 감상하고 있었다.
나도 참 이상해...별일이지. 한편으론 화가 나면서도 저 남자가 잠자는 걸 2시간동안 지켜보고 있다니...

준은 슬쩍 손을 들어 흔들었다.
나쓰에는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는 줄 알고 침대로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이 남자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러더니 옷을 주절주절 찾아 입는다. 나쓰에는 황당했다.
"어머, 왜 그러세요? 갑자기?"

"지금 가야겠소. 미안합니다 나쓰에양."
준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면서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밤 10시를 막 지나고 있다. 이 시간에 호텔에 들어와 잠을 퍼자다니.
나도 미쳤군...
준은 재빠르게 옷을 입은 뒤 문 쪽으로 걸어갔다.
헌데 가만히 보니까 여긴 호텔이 아니다.

나쓰에는 분통이 터져 준을 따라 붙었다.
"이럴수가 있는 거예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구 싶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내 방에 온 게 아닌 가요? 헌데 지금 이 행동은 뭐죠...?"

그러고 보니 여긴 호텔이 아니라 나쓰에의 방인 것 같았다. L자 구조의 맨션. 준은 잠시 방안을 둘러보았다. 곰인형이 방 한편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방구경은 대충 한것 같군요. 미안합니다 나쓰에양..."
준은 대충 인사를 한 뒤 맨션 밖으로 뛰어 나왔다.

나쓰에는 황당했다. 이런 멋없는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쓰에는 자신의 방을 남자에게 공개한 적이 없었다. 준이 그 유일한 남자였는데.
나쓰에는 울화통이 터져 곰인형을 사정없이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준은 다시 한번 백미러를 응시했다. 도쿄 외각에 있는 아담한 맨션...
준은 맨션 주소를 머릿속에 외운 뒤 자가용의 시동을 걸었다.
게이꼬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준의 차가 스타터하자 회색 싱글재킷을 입은 사내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런 뒤 자신의 차에 시동을 걸었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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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준, 바로 눈 앞에서 후루겔스 게이꼬를 놓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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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루겔스 게이꼬는 동료들과 함께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벌써 밤 11시었다. 비까지 내리니 오늘 같은 날은 술마시기에도 좋았다.
"어쩜...오늘 아침에 그 뉴스는 특종이었다 애."
미도리가 다시 그렇게 말하자 게이꼬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니까. 흥!"
그런 뒤 무스탕 재킷 안에서 게이꼬는 히쭉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분홍색 입술은 그때 V자 형으로 요염하게 오므라들었다.

게이꼬의 야심은 TV도쿄의 메인 앵커 자리였다. 아니 게이꼬는 사실 재능도 많았다. 그렇지만 그녀에겐 여러가지 약점이 있었다. 가장 큰 약점은 PD와 함부로 잠을 자지 않는 다는 점이었다. PD들은 그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게이꼬의 미모를 흠모했지만 그녀에게 잠을 자자고 말을 붙이는 용기 있는 PD는 없었다.

게이꼬는 그게 싫었다. 요즘 들어선 못생긴 걸로 유명한 곤바야와 함께 잠을 자고 싶기도 했다. 만약 그렇게 해서 메인 앵커 타이틀이 자신에게 주어진다면 말이다.

못생긴 걸로 유명한 곤바야 제작1부장은 지금 막 TV도쿄 데스크에 앉아서 교양 프로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직까지 전화 한통화 없는 것을 보니 이 교양프로그램이라는 것이 또 시청률 경쟁에서 깨진 모양이다. 이런 프로는 1년뒤에야 전화가 걸려 올 것이다. 아저씨,1년전에 그거 재방송 안해요? 라고...하면서 어느 정신나간 놈들이나 전화통을 두들겨댄다.

"살맛 안 나는 군..."
곤바야는 히쭉 뇌까리며 데스크 실을 빠져 나왔다. 하시모토 일행은 이미 TV도쿄의 최대 인기프로인 (사랑의 향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청자도 참 가지각색이다. 정신병자의 삼각관계를 다루는 포르노 드라마에 눈물을 흘리고 웃고 하다니 말야. 음 역시 포르노인가...

곤바야가 제작 1실로 들어왔을 때는 낯모르는 남자가 성큼성큼 복도끝에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싸늘하게 생긴 게 이 근처에선 본적이 없는 남자다.
신참 탤런트일까...곤바야는 무의식중 발길을 돌렸다. 그때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여기가 보도 제작1국입니까?"
"예 그렇소만..."
"제 이름은 김준입니다. 한국 제일신문사 도쿄특파원이죠."
준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이상하게 못생긴 그 뚱보에게 건네주었다. 그는 단추 만한 눈알로 명함을 쳐다본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지요? 귀사와 저희는 기사제휴관계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요..."
"실은 후루겔스 게이꼬 양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숙집엔 아직 귀가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아, 게이꼬 리포터를 찾으시는 군요?"

"예.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게이꼬양이 오늘 아침에 보도한 뉴스를 볼 수 있을까 합니다. 제가 운이 나쁘게 그 보도를 놓쳤습니다..."
거짓말을 하려니까 잘 안된다. 준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곤바야는 그런 준의 심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아,한국에도 마끼 준사히의 팬이 있군요? 뉴스에 나온 그 죽은 여자 말이죠."
곤바야가 그렇게 말하자 준은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팬이라니...
망나니 여자를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 하이. 안녕하세요. TV 도쿄의 후루겔스 게이꼬입니다. 오늘 전 구보 부동산의 외동딸이 자살한 이즈해에 와 있습니다. 예 아시는 군요. 마끼 준사히양의 자살 사건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시간에서 마끼 준사히의 알려지지 않은 유서를 공개하려고 합니다. 그녀는 자살하기 하루 전에 이 디스켓 안에 자신의 유서를 작성해 놓았습니다....
아 제 뒤에 보이는 화면은 녹화화면입니다. 전 이 유서 내용을 어젯밤에야 입수를 했고,미처 문제의 장소로 찾아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제 등뒤에 보이는 화면은 일주일전에 방영된 문제의 요트폭발 사고장소입니다. 음 사실 감이 안 난다고요? 후후 저 후루겔스 게이꼬는 사건을 쫓아갑니다... 장소가 아니죠. 네... -----

준은 녹화된 화면을 보았다. 별 이상한 점은 없다. 게이꼬의 말대로 디스켓 안에는 마끼 준사히의 유서가 들어있었던 모양이다. 준은 어젯밤에 유서 내용을 읽지 않았었다. 유서 내용도 별 이상한 게 없었다. 그저 마끼 자신이 사귄 남자친구들의 주소록이라고 할까.

마끼의 난교파티에 참석한 남자 중에는 몇몇 알만한 사람이 있었지만 그저 그 정도 수준이었다. 죽기 전에 물귀신처럼 자신과 사귀었던 남자들을 끌고 가려고 했는지 모른다. 마끼는 미인이 아니었다.

준이 녹화된 화면을 모두 시청하자 곤바야가 준의 등을 슬쩍 건들었다.
"게이꼬양은 미나미 주점에 있을 겁니다. 아까 보니까 오늘 거기서 고교 동창생 모임이 있다고 하더군요."
준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실례지만 게이꼬의 디스켓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아 그거는..."

곤바야는 난감했다. 곤바야 역시 그 디스켓에 유서만 작성되어 있었는지 궁금했다. 게이꼬는 유서밖에 들어있지 않다고 했지만 무엇인가 감추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니 사실 곤바야는 뉴스 취재원이 어딘지 궁금했다.

"디스켓은 게이꼬가 가지고 있을 겁니다만...사실 저도 그 디스켓을 살펴보고 싶었는데 게이꼬가 싫어하더군요. 워낙 독특한 여자라서리..."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준의 자가용이 미나미 주점 앞에 멈춘 것은 밤 11시 47분이었다. 준은 신문지로 비를 피하며 미나미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게이꼬는 아직도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있다가 문득 준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게이꼬는 긴장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봤을까...
게이꼬는 손을 번쩍 들어서 흔들었다.
"하이. 안녕하세요?"

준은 성큼성큼 게이꼬에게 걸어갔다. 게이꼬의 동료들은 무슨 일일까 하고 의자에서 주춤거리며 일어섰다. 개중에 몇명은 준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대부분은 노처녀들이었으니까,갑자기 나타난 건장한 남자에게 호기심이 생긴게다.

준은 비에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어설프게 인사를 했다. 그런 뒤 게이꼬에게 눈짓을 보냈다. 게이꼬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으며 준을 따라 술집 밖으로 나왔다.

주점 밖은 천둥번개까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둘은 주점 처마 밑에 서 있었다. 게이꼬가 물었다.
"다급한 표정이네요? 무슨 일이죠?"
게이꼬는 걸치고 있는 무스탕에 빗물이 묻을까 재빠르게 털기 시작했다.
"미안한데,그 디스켓을 다시 볼 수 있겠나?"

소나기가 처마 밑에까지 사정없이 튀어오자 게이꼬는 무스탕을 포기했다.
"마끼의 유서가 기록된 디스켓 말입니까?"
게이꼬는 의외라는 듯 준의 눈을 응시했다. 거리가 가까웠는지 이지워크 향수 냄새가 준에게 느껴졌다. 둘은 키스를 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별안간 게이꼬는 호흡이 가파졌다.

"난처한 일이 발생했나 보군요..."
게이꼬는 불쑥 폭우속으로 뛰어 나갔다. 그러더니 씩씩하게 팔운동을 한다.
"궁금한데요? 그런데 어쩐다죠? 지금 그거 저에게 없어요. 뉴스 끝내고 난 뒤 방송국 자료실에 두고 나왔거든요. 급하시다면 자료실에 전화를 넣을 수도 있는데."

준은 특제 와코루 수건을 게이꼬에게 내밀었다.
"그래주시겠소?"
그녀는 와코루로 비에 젖은 머리를 닦는다. 사실 비를 맞으며 빗방울을 닦다니 피차 일반이다.

"그렇게 하죠 뭐. 친구들만 없다면 제가 갈 수도 있겠는데..."
"그럼...기다리겠소."
갑자기 준이 그렇게 말하자 게이꼬는 기분이 묘했다. 기다리겠다니. 무슨 뜻일까...오늘은 어쩐지 이상하다. 갑자기 장난스럽게 내리는 이 폭우도 심상치 않고.

게이꼬가 나온 건 그로부터 10분 뒤였다. 둘은 준의 자가용에 올라탔다.
하지만 자가용은 시동이 걸리지 않고 있었다. 준은 별안간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백미러를 쳐다보았다. 회색 싱글 정장 차림의 사내가 준의 자가용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준의 자가용 옆에 멈추더니 품에서 수첩을 꺼내 펼쳐 보였다.
그러더니 남자는 말했다.
"국가 안전기획부 도쿄 주재원입니다. 저와 함께 잠깐 대사관에 가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준의 이마는 바짝 오므라들었다. 준은 사내를 올려다보다가 게이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 도로 너머에 지하철입구가 보였다. 준은 슬쩍 게이꼬에게 턱짓을 했다. 게이꼬 역시 운전석 창너머에 서있는 회색 신사복의 남자를 쳐다 보다가 준이 주는 턱짓을 알아차렸다. 남자는 이제 막 운전석 문을 열려고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순간 게이꼬는 조수석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곧이어 준이 뛰어 나갔다.

임춘해. 임춘해는 여자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상 남자였다. 그리고 그는 대한민국 안기부의 최고 베테랑이었다. 이제 나이가 40대에 접어든.
임춘해는 두 남녀가 반대편 도로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면서 순간적으로 자신의 회색 싱글 정장의 안쪽 포켓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하지만 춘해는 권총을 꺼내지 않았다.

새벽 0시 32분. 지하철 역구내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이꼬는 플랫폼쪽으로 뛰어가다가 잠시 멈추어 호흡을 가다 듬었다. 그러다 뒤를 돌아다 보았다. 준이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죠? 정말?"
준은 게이꼬의 옆에 섰다. 게이꼬는 준을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다...
다시 묘한 분위기. 주위에는 걸어다니는 사람이 없었다.

"동경역에서 내리십시오. 그런 뒤 카페테리아에서 기다리십시오. 제가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게이꼬는 무의식중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영화같은 장면이다...
게이꼬는 준을 힐끔힐끔 돌아보며 플랫폼을 통과했다.

춘해는 여차하면 권총을 뽑아 들 양으로 오른손을 품속에 집어넣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벌써 지하철을 잡아탔을까...
춘해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오른쪽 통로로 진입했다. 순간 날카로운 주먹이 춘해의 얼굴을 가격해왔다.

---퍽---

침을 뱉었다. 이빨 두개가 부러져 나가 있다.
...인간 임춘해가...이게 뭔가...
춘해는 씁쓸한 미소를 띄우며 바닥에 뒹굴고 있는 자신의 몸뚱이를 쳐다보았다. 불쑥 화가 났다. 지금 심정이라면 놈에게 권총 몇십발 쏘아 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춘해는 바닥에서 일어섰다. 회색 양복은 이미 피로 물들어 있었다. 춘해는 통로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양복 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상운을 호출했다.

이상운. 안기부의 신참 에이전트인 이상운은 방금 나루미의 상체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빌어먹을 놈의 핸드폰은 꼭 오르가즘이 시작될때마다 울린단 말야. 이상운은 허탈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귀에 댔다. 나루미는 아쉬운 듯 상운의 밑에서 그의 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나루미는 이상운이 오늘 영사관 앞에서 만난 대학 1학년짜리 여자였다.
섹시하긴 했지만 머리가 나쁜 여자. 지금 나루미는 곰인형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녀의 하체는 알몸이었다.

게이꼬는 지쳐 있었다. 바짝 피곤한 모습의 샐러리맨 몇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게 느껴졌다. 한밤중에 여자 혼자서 지하철역 구내에 들어오다니.
게이꼬는 그제야 자신의 미니스커트가 빗물에 젖어 허벅지 위까지 올라가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사내들은 그런 게이꼬의 하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게이꼬는 서둘러 자신의 미니스커트를 아래로 내렸다. 그런 뒤 정신을 집중할 양으로 핸드백에서 보그 한 개피를 꺼내 물었다.
정말 그 디스켓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게이꼬로서도 무엇인가 집히는 것이 있었지만 아직 채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게이꼬는 의아했다. 이미 10분이 지났는데...지하철은 오지 않는다. 이상하다.

다시 2분쯤 흐르자 그제야 터널에서 들어오는 지하철이 보였다. 게이꼬는 지하철이 멈추자 마자 자신도 모르게 열리는 문으로 들어섰다. 다른 사람들은 그 지하철에 올라타지 않는 다는 것을 모르면서.

준이 게이꼬의 모습을 본 것은 그 순간이다. 준은 안전기획부에서 나왔다는 남자의 얼굴을 강하게 올려 친 후 지금 막 구내로 뛰어 들어왔다. 그때 지하철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녹색 불빛을 전멸하며.
순간 준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건 분명 긴좌銀座선 지하철이 아니라 동서선東西線 지하철이었다.
니혼바시日本橋역을 관통해야 할 지하철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준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게이꼬에게 비명을 질렀다.

무언가 히스테릭칼한 음성...올라타는 순간 게이꼬는 준의 음성을 들었다.
게이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지하철문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일순간이었다. 게이꼬가 다리를 빼는 순간 그녀의 얼굴은 지하철 문에 보기 나쁘게 그대로 끼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바로 지하철은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이꼬의 몸은 달리는 지하철과 함께 허공으로 붕 떴다.

4초 뒤. 게이꼬의 하체는 깔데기형으로 좁혀져 있는 터널의 벽에 그대로 부딪치더니 파편처럼 흩어져 날아갔다.

준은 무지개 빛 선열을 토하며 게이꼬의 몸이 산산조각으로 박살나는 모습을 보았다. 눈 앞이 캄캄했다. 사람들은 모두 괴성을 지르며 사고 현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준은 그것을 자각했다.
지금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돼가고 있다.....

간다神田역 천장에 설치된 폐쇄카메라 18호는 사고가 발생한 장소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스르르...소리를 내며 좌우로 왕복을 시작했다.
분명 폐쇄회로 카메라는 김준의 모습을 찾고 있었다.

그 시각. 하야시 후꾸오는 어둠속에서 손을 더듬거리다가 마일드 세븐을 집었다. 이윽고 하야시는 담배를 입에 물고 터보라이터의 불을 당겼다.
치직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도 불꽃이 일어났다. 머리를 감지 않은지 벌써 3일이 넘어서인지 하야시의 손끝은 온통 비듬으로 절어 있었다.

하야시는 다시 머리를 긁었다. 그의 치렁치렁한 머리는 그의 등까지 화려하게 내려와 있었지만 냄새가 많이 났다. 하야시는 히쭉 뇌까렸다.
사람을 죽인 건 오랜만이다...
그것도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말이다.

하야시는 자신의 다락방 전면에 설치된 7개의 모니터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곧 있으면 하야시의 할머니가 잠꼬대를 할 시간이다. 할머니는 남편이 전범으로 총살당한 것을 온통 가슴에 한처럼 묻고 살았다. 하야시는 그런 할머니가 밉지도 싫지도 않았다. 하기야 하야시는 할머니의 인생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다.

하야시는 다시 한번 6번째 모니터 화면을 주시했다. 그 놈--키가 이상하게 크고,머리에 무스를 잔뜩 처바른 그 한국남자는 그곳에 서 있었다. 어찌할 바를 찾지 못하는 듯 당황하면서 말이다.

하야시는 그를 힐끔 쳐다보다가 방석에서 일어 났다. 그런 뒤 기타를 집어 존 레논을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런 하야시의 등 뒤로는 (파워 유저 저팬)이란 글자가 일본어 배너로 프린팅되어 벽에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붙어있는 존 레논의 전신사진에는 (작지만 귀여운...살인마 BBS) 라는 글자가 매직펜으로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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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꼬, 위기에 몰린 김준을 구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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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섹션 V실의 월드타임 테이블은 서울 시각을 새벽 2시로 기록하고 있었지만 18명이나 되는 전 정보팀 직원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다. 이미 이틀째 강행군이다.
고종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컴퓨터팬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틈바구니에서 팩시밀리 전문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그와는 다르게 정보팀의 메인 데스크는 일일이 걸려오는 전화에 답변하느라 여직원 6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핑크색 유니폼의 단발머리 여직원은 그중 가장 중요한 전화를 담당했다. 그녀가 김준의 전화를 받은 것은 새벽 2시 08분 경이었다. 그녀는 곧바로 한대리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한대리는 총알같이 섹션 V실로 달려갔다.

이미 고종수는 전화수화기를 들고 연결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분명 김준이었다. 종수는 울컥 화가 나서 외쳤다.
"자네 어떻게 된 거야. 지금?"
준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종수는 타임테이블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3초다... 종수는 탁선미에게 전화 발신지를 추적하라고 지시를 했다.
그제야 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 음성은 매우 낮았다.
"안기부가...왜 나에게 따라붙은 거지?... 말해봐라... 종수야."
제길...
종수는 순간적으로 눈 앞에 캄캄해졌다.
역시 안기부까지 붙었단 말인가...?

종수는 힐끔 유광남 과장을 쳐다보다가 다시 시선을 제자리로 옮겼다.
이젠 더이상 감출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유과장에게 손짓을 했다. 유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에 쥐고 있던 프린터 용지를 종수의 책상 위에다 펼쳤다. 종수는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19일 0시 49분 25초. 사라사테 시스템 개방...동 02시 31분 17초 국방부 메인 컴퓨터 개방...동 34초 병참사령부 개방...동 48분경 합참본부 중앙자료실 개방. 동 59분 17초 대전 공군사령부 메인 컴퓨터 개방..."

후우... 종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제 더이상 제대로 읽어 나갈수가 없을것 같았다. 어느덧 앞이마 어딘가에서 뿌옇게 무엇인가를 밀려오면서 종수의 신경을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종수는 말했다.
"그런 뒤 19일 오후부터 다시 시작되었네... 벌써 아홉군데나 뚫렸어! 대한 민국 국방부 컴퓨터는 온전한데가 없이 모두 뚫렸단 말야!"

"설마..."
다시 수화기에서 준의 힘없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종수는 알았다. 준이 지금 어떤 기분이라는 것을. 하지만 지금은 더이상 회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게 모두 네놈 핸드폰 암호가 해체된 이후에 발생했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우리 둘이 사용하는 이 핫라인이 침투 루트로 이용된 거야. 게다가 놈은 네 놈 아이디를 사용해서 침투했단 말야,이 밥통아!"
"뭐라고?"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안기부가 너에게 붙은 거야! 어젯밤 우리 둘의 전화를 도청하고 널 따라 붙은 거란 말야! 그런데 난 이 사실을 여태 모르고 있다니. 허허..."

이때 유과장이 무엇인가 손짓을 했다. 종수는 그것을 무시했다. 한대리는 종수를 쳐다보다가 유과장에게 걸어가 조용히 귓속말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종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한 짓인가? 사라사테 건 말야."
"....."
"그럼 우리 둘만 사용하는 핫라인이 어쩌다 이용된거지? 뭔가 이유가 있어야 나도 자넬 믿을게 아닌가?"
"모르겠네. 나도..."

유과장은 한대리의 말에 불쑥 화가 났다. 유과장의 생각은 김준을 잡아 들이는 것이었다. 일이 더 커지게 전에 말이다. 하지만 한대리는 고종수에게 모든 걸 맡기자고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유과장은 한대리의 얼굴을 한방 처 올리려는 욕구를 꾹꾹 참아내고 있었다. 이때 고종수가 다시 탁선미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이 보였다. 유과장은 입이 벌어졌다.

그것은 전화추적을 중지하라는 지시였다. 그런 뒤 고종수는 다시 싸인을 바꾸어서 내리고 있었다. 그러자 한대리가 급하게 교환기에 부착된 스위치를 올렸다. 도청방지 장치였다. 유과장은 갑자기 모든 게 썰렁하게 느껴졌다.
이젠 갈 때까지 갔구나. 제일그룹 정보팀은 미친 거야. 안기부가 도청하는걸 알면서도 방해를 하다니...

종수는 전화버튼 옆에 붙은 다이오드가 점등하는 것을 응시하면서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좋아. 이제 솔직히 말해보게. 뭐 이상한 점은 없었나? 이 일이 발생하기 전에 말야..."

"글쎄...한가지가 있다면..."
"뭔가 있긴 있었나?"
"그날 사라사테가 뚫렸을 때 후루겔스 게이꼬라는 여자가 나에게 암호 하나를 해킹해 달라고 부탁해왔네...자살한 여자가 유서를 디스켓안에 남겼다는데,암호가 걸려 있다고 하더군."

"그래서...?"
"러브라는 암호였네."
종수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라사테 시스템에 걸어놓은 암호와 동일하다. 종수는 식은 땀이 났다.

"그랬었군. 그럼 그렇다 치고 그 여자는 지금 어디에 있나?"
"후루겔스 게이꼬 말인가?"
"그래. 너에게 디스켓을 건네준 게이꼬인지 뭔지 하는 여자 말야."
"방금 죽었네."
"뭐?"

종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인가?"
"그래. 방금전 지하철 역에서 즉사했어. 이상한 사고였네. 아무래도..."
종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또 다른 건 없었나?"

준은 대답이 없었다. 종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며 라이터를 찾았다.
그러자 재빠르게 한대리가 라이터 불을 당겨 종수의 코앞에 갔다댔다. 한대리의 손도 낙엽처럼 떨리고 있었다.
"누구야? 네 정체를 아는 녀석이?"
"모르겠네. 그 전에... 디스켓을 해킹하기 전에 누군가가 날 매장하겠다고 하는 경고문을 내 컴퓨터에 인스톨한적이 있었네. 난 바이러스인줄 알았지..."

준의 이야기가 끝나자 비로소 종수는 무엇인가 가닥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누군가 어느 놈이 김준의 정체가 알고 있고 있는 것이다. 김준이 파워유저 코리아라는 것을. 파워유저코리아...일본내에게 정보를 훔치는 한국인들...
놈은 그 사실을 알고 김준에게 게임을 걸어왔던 것이다.
정말 운이 나쁘다. 자네는....

종수는 입안이 바짝 타 들어갔다. 이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일이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이다. 종수가 할말을 잃고 가만히 있자 준이 말했다.
"난 뭐가 뭔지 모르겠어. 지난 이틀동안의 일은 아무래도..."
종수는 벌래 씹은 듯한 표정으로 준의 말을 잘랐다.
"알았네. 자넬 의심한 거 미안하네. 난 또 혹시나 했지."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종수는 유과장을 바라보았다. 유과장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송환하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종수는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찌되었건 간에 김준은 종수의 친구였다. 종수는 허탈하게 책상 위에 걸터앉았다. 그런 뒤 종수는 속삭이듯 말했다.
"도망가게..."

유과장은 얼굴이 빨개진 채 이번에는 종수에게 주먹질을 했다. 하지만 종수는 유과장을 무시했다. 한대리 역시 손으로 싸인을 보냈지만 종수는 본체만체도 하지 않았다. 종수는 말을 계속했다.

"김준...내 말 잘 들어. 잡히지 말고 도망 다녀야 하네. 하지만 네가 벌여놓은 일은 네놈을 해결해야 해. 우리 한두번 이런 경험이 있는게 아니잖아.
그렇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 놈을 찾으란 말야. 그래서 박살내란 말야, 이 바보자식아!"

2시 17분 정각. 종수는 다시 자신의 손목시계를 쳐다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정보팀 직원들이 모두 종수에게 몰려와 그를 쳐다보았다. 종수는 그들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무엇인가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이들은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수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그런 뒤 고개를 쳐들고 직원들에게 말했다.
"02시 30분 정각에 사라사테 시스템을 옵라인으로 차단하고 모두 퇴근한다. 섹션 V는 그 시각 이후 해체되니까 그리들 아시오!"
갑자기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광남 과장은 눈이 대문짝만하게 커졌다.
"종수씨. 이건 위험한 방법이요. 옵라인이라뇨?"

유과장은 종수보다 7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정보팀 통설권은 종수에게 있었다. 종수는 유과장의 말을 무시하고 다시 전직원을 향해 말했다.

"내 말대로 하시오. 중공업 전산라인은 오늘부터 모두 폐쇄되니까 그리들 아시오. 그리고 앞으로 섹션 V는 유과장님이 여직원 하나 뽑아 담당하시오. 아시겠소 모두들? 지금 이 시간 이후 사라사테 시스템 건은 아예 없던 일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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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화장실로 향했다. 한대리가 엉거주춤거리며 종수의 뒤를 따라왔다.
종수는 슬쩍 손으로 한대리를 밀쳤다. 피곤하니까 잠시 날 놔두게...
한대리는 헤프게 미소를 지으며 꾸벅 절을 했다. 한대리에게 있어 고종수는 신화적인 존재였다. 나이 29살에 부장대우...그런 인물은 제일그룹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런 고종수가 지금 화장실에 가고 있다.

종수는 양변기에 대고 바지 자크를 내렸다.
안기부에 맡깁시다. 사건이 커지기 전에...
종수는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당겼다.

이미 고종수는 박이사에게서 안기부가 달라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박이사가 결정한 판단도 매우 합리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고종수는 인정했다. 이제부턴 모든 것을 안기부에 맡기는 것이다....

종수는 박이사 못지않게 자신의 판단력도 정확하다고 믿고 있었다. 김준이 사라사테 시스템에 침투할 리가 없었다. 분명 다른 사람이다. 어떤 개자식인지는 모르지만...그 일본놈은 사라사테 시스템 외에는 접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최소한 사라사테 시스템만 묶어 놓으면 더이상 계열사 단말기가 뚫리는 불상사는 없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말이다. 종수는 세면대 거울을 쳐다보며 추리를 했다.
해커는 다른 것을 노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단지 국방부만 노리고 있는 것일까?
종수는 한기가 일어났다. 밤바람이 써늘하게 화장실 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종수는 수도꼭지를 틀고 차가운 물에 자신의 손을 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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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꼬는 자신의 방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며 듄을 하고 있었다. 듄 최후의 전쟁은 준꼬가 지금까지 해 본 오락중 최고의 걸작이었다. 준꼬는 숨이 가프게 마우스를 끼릭했고,온 몸을 떨었다. 엄마는 그 옆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끼아 하고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준꼬는 가나에의 숙면을 의식하며 자신의 입을 막고 비명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어느덧 새벽 2시 30분이었다. 준꼬는 또 다른 행성 하나를 정복하다가 밖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리는걸 느꼈다. 준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휠체어 버튼을 눌렀다. 윙윙 소리를 내며 휠체어는 방향을 바꾸어 문쪽으로 갔다.
준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보았다. 그 아저씨였다. 그 한국인 아저씨...

준꼬는 다시 비명이 나오려 하는 걸 참았지만 이번에는 잘되지 않았다.
"아저씨야,엄마...그 아저씨가 오늘도 밤늦게 놀다 왔나봐..."
준꼬의 생각과는 다르게 가나에는 깊숙한 잠에 빠져 있었다. 그녀의 수밀도 높은 가슴은 아이보리색 잠옷안에서 조심스럽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이상운은 나루미와 함께 가나기원의 정문 앞에 도착했다. 차 문을 열고 내리자 나루미도 폴짝거리며 이상운을 뒤따라 내렸다. 이상운은 기가 막혔다. 쳇...머리 나쁜 건 마를린 몬로를 뺨치는 군. 이 여자는...

"차안에서 기다리라고 했잖아. 나 지금..."
"아저씨 정말 대사관 직원이야? 한국 대사관?"
"그렇다니까 나참. 나 대사관 헌병이다 헌병."
"지금 누굴 잡을 건데?"

나루미가 다시 그렇게 묻자 이상운은 뺨이라도 한대 올려 쳐주고 싶은 욕구를 느꼈다. 하지만 그렇게는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아쉬워서 데리고 온 건데... 후... 이상운은 슬며시 나루미의 스커트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보았다. 이 여잔 역시 팬티를 입고 다니지 않는다...이게 마음에 든단 말야.

이상운은 체격조건이 좋았다. 안기부에 발탁되려면 우선 체격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 첫째조건이듯 이상운의 체격은 실버스타 스텔론을 무색케 했다.
게다가 오늘은 비번이었지만 권총까지 차고 나왔다. 여차하면 한방 날리겠다는 심산으로 이상운은 가나기원의 대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걸어가면서 이상운은 수갑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짤막한 목소리로 나루미가 떠드는 게 들렸다.
"화이팅 아저씨. 여기로 몰아주세용~~"

이상운은 얼굴이 빨개졌다. 어쩐지 자기가 정상이 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일본 여자는 분명 정상일 터이지만 말이다.

준은 펜티엄 본체에다 뜨거운 물을 끼얹었다. 커피포트의 물을 모조리 컴퓨터가 빨아들이고 있었다. 바쁠 때 흔적을 지우는 것은 이 방법이 최고였다.

그런 다음 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케이스 안에 넣었다. 그런 뒤 방안을 다시 둘러 보았다. 준은 씁쓸했다.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이틀전 그 경고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데 준은 그저 우습게만 생각을 했었다. 이미 그런 경험을 여러번 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예전과는 다른 상황이다.

지금은 실제상황으로 돌변하고 있었다. 어느 누군가가 준을 파멸시키려고 천천히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준은 마지막으로 콤퍼넌트에서 로저 워터스의 음악테입을 꺼내 자신의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 뒤 방 문을 열었다.
준꼬 그 꼬마아가씨는 아까 내가 귀가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제발 경찰에게 내가 돌아온 시각을 말하지 말아야 할텐데... 준은 자신의 발을 문지방 너머로 옮겼다.

순간 이상운은 날카롭게 자신의 주먹을 김준을 향해 날렸다. 춘해 형이 시킨대로 우선 때려눕히고 보자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주먹은 꼴 나쁘게 준의 몸을 스쳐 지나갔다. 김준은 어느새 2미터 뒤쪽으로 주춤거리며 물러서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이상운의 입에선 저절로 농담이 나왔다.
"이런... 역시 센츄리온이었나?"
준도 이상운의 농담이 재미있었는지 피식 웃으며 되받았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남자는 오랜만이군 친구."
"어쭈구리?"

이상운도 지지 않는 성미라 그렇게 되받아 쳤지만 실상 머리속은 날카롭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이 서있는 복도의 폭과 준이 도망갈 문이 있나 없나를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은 없었다.

이상운은 비로소 여유를 갖고,어깨를 들썩들썩 거렸다.
"얌전히 날 따라 오시죠. 김준씨."
준은 긴장했다. 아까 지하철역에서 만난 놈과는 분명 다르게 느껴졌다.
지금 바로 앞에 서 있는 이 놈은.

"따라가면 날 무슨 죄목으로 집어넣을 작정이요?"
"내가 알겠소? 춘해형이 잡아오라니까 잡아가는 게지."
"안 따라가면?"
"그럼 심각하지. 형씨는 우리 안기부하고 원수를 질 테니까."
준은 피식 웃었다.
"그럼 한판 붙읍시다... 안기부 양반."
그렇게 말한 뒤 준은 공격 자세를 취했다.
이상운도 어느새 럭비선수 포즈를 취한 채 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둘 다 빈틈이 없었다. 이상운이 천천히 몸을 움직일때마다 수갑 소리가 들려왔다. 어쩌면 열쇠고리가 부딪치는 소리인지도 모른다.
준은 긴장했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상운은 빈틈이 없어 보였다. 이곳에서 도망가려면 천상 이상운을 처치해야 했다. 하지만 무슨 수로,어떻게 처치한단 말인가.

그 순간 이미 이상운은 결심을 했다. 오른팔에 안 걸리면 뒤돌려 차기에 걸린다. 이상운은 잽싸게 오른쪽 주먹을 처 들었다.

그때였다. 준꼬가 복도로 나온 것이다. 나오는 동시에 준꼬는 들고 있던 CD롬 타이틀을 힘차게 거인의 뒤통수를 향해 내던졌다. 그것은 이상운의 목덜미에 보기 좋게 명중되었다. 이상운은 이게 뭔가 하는 심정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날카로운 바람소리와 함께 금속으로 된 노트북 케이스가 이상운의 어깨를 향해 날아왔다.

---퍽---

이상운은 심한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이렇게 아픈 건 생전 처음인 것 같았다. 온통 신경이 오른쪽 어깨에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운은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았다. 준이 자신의 머리를 넘어타는 순간 이상운은 잽싸게 준의 발목을 잡고 늘어졌다.

하지만 이것도 불행히도 형세를 역전시키지 못했다. 다시 그놈의 금속 케이스가 이상운의 팔목을 가격해왔기 때문이다.
이상운은 팔목에서 거의 기절할 정도의 통증을 느꼈다. 눈물이 울컥 쏟아질 것만 같았다.

준은 이상운을 뛰어 넘은 뒤 정원으로 나가다 말고 준꼬를 돌아다보았다.
준꼬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어린 아이는 이게 소꼽장난인줄 알고 있는게다. 준은 슬며시 비애를 느꼈다. 가끔가다 준은 밤중에 자신을 기다리는 준꼬를 본적이 있었다. 준꼬 자신은 그런 말을 한적이 없었지만,어린 아이의 마음은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준은 준꼬에게 슬쩍 손을 흔들어 보이다가 가나기원의 대문을 향해 뛰어 나갔다. 도망가자.

나루미는 짜증나는 시간을 참기 힘들었다. 불쑥 화가 나서 나루미는 그 인간 이상운이 몰고 온 차의 본 네트에 자신의 기다란 다리를 올려놓고 에어로빅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왠 남자가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루미는 순간적으로 긴장하고 남자를 돌아다보았다. ...미남이다...라고 나루미가 생각했을 때 남자는 나루미의 어깨를 우악스럽게 밀쳤다. 나루미는 그 자리에서 갈대처럼 휘청이다가 힘없이 넘어졌다.

나루미가 약이 올라서 고개를 바짝 쳐들었을 때는 이미 자가용에서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루미는 엄마야 소리를 지르며 뒤로 기어갔다. 차는 힘차게 도로끝으로 달려갔다.

이상운은 할 말을 잃었다. 팔목에서는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이상운은 팔목을 어루만지며 별안간 자신을 방해했던 그 꼬마 애를 쳐다보았다. 조명빛 때문인지도 모른다. 꼬마의 얼굴은 이상야릇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무엇이더라...

이상운은 주춤거리며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순간 이상운은 꼬마를 어디선가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탄의 인형인가...하는 공포 영화에서 본적이 있다는 생각.

이상운은 괴이한 생각을 하면서 가나기원의 대문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루미는 자신의 핸드백을 이상운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올려쳤다.

이상운이 다시 제정신을 차렸을때는 여자도,자신의 자가용도 그곳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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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 후꾸오와 벙어리 여동생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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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하야시는 자신의 다락방에서 모니터를 계속하고 있다.
이는 아침 9시까지 계속될 것이다.

하야시는 일본내에서 제일의 시스템 해킹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모니터하는 것은 대개 도쿄도 지하철 라인이었는데,지하실에 있는 철도 모형처럼 지하철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도쿄도 조차장을 사용하지 않고 터널 중간에서 철로를 변동시켜서 열차를 마구 뒤섞어 놓는 작업이 하야시의 전문 분야였다.

실상 하야시 후꾸오는 1년전만 해도 야마테山手라인의 관리자였다.
도쿄도 지하철 라인은 1995년을 기점으로 해서 완벽하게 컴퓨터 자동제어 체제로 들어갔는데,야마테 라인의 일부 지하철은 승무원 없이 무인으로 운행되고 있었다. 당연히 이들 무인지하철은 하야시의 밥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야마테라인에서 퇴직한 건 한가지 고질적인 병 때문이었다. 가끔가다 지하철에 올라타는 여자를 죽이는 버릇... 이것은 하야시의 못된 버릇 중 하나였다.
그는 최초에는 야마테라인의 6도어 지하철에서 이러한 계획을 시도해 보았다. 6도어 문의 개폐 시간을 임의적으로 조종해 문사이에 몸이 끼어 울부짓는 여자들이 생겨나는 빈도를 파악한 하야시는 본격적으로 심야 시간을 노리기 시작했다. 그런 뒤 3명의 여자 승객을 사고사를 위장시켜서 성공적으로 살해했다.
이러한 교묘한 숫법의 사고사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몇몇 동료들이 하야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하야시는 두려워 하지 않았다. 퇴직하면 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게다.

실제로 하야시는 자기 스스로 야마테 시스템 본부에서 퇴직을 했다. 그런 뒤 그가 구입한 것은 3대의 컴퓨터 본체와 7대의 모니터였다. 그 이전에도 이미 (살인마 bbs)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퇴직한 다음부터는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하야시로서는 사업을 확장해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야시가 모니터하고 있을 때 밑에 층 거실에서는 미나가 막 나이트 가운으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퇴근한지 채 20분이 되지 않았지만 미나의 얼굴은 왠지 생길발랄해 있다.

미나는 숏커팅된 단발 머리의 미녀였다. (졸업)이라는 시뮬레이션 게임의 여러 주인공처럼 미나는 풋풋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지만 육체는 의외로 상당한 글래머였다. 이건 미나의 장점 중 하나였다. 그녀는 같은 또래의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부담을 주지 않는 인상. 허나 파격적으로 섹시한 몸매를 가진 미나. 미나를 좋아하는 여자만큼 그녀를 좋아하는 샐러리맨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미나는 (에콜 드 신주쿠)에서 파트타임으로 춤을 추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야한 춤은 아니었다. 뱀춤이라니. 그건 시시하지 않는가.
그녀가 에콜 드 신주쿠의 스테이지에 올라가 흥을 돋구면 대개 오피스걸들이 흠뻑 도취되어 미나처럼 춤을 추기 위해 스테이지로 올라온다. 미나는 그러니까 호객 행위를 하는 디스코택의 영업사원이라 할 수 있었다.

제 춤을 보고 올라오세요. 용기를 가지세요. 여러 남성들이 당신의 춤을 지켜보고 있답니다...

미나는 춤을 출 때마다 자기 또래의 오피스걸을 이런식으로 유혹을 했다.
그러면 직장상사에게 성적 희롱을 당했거나,월급이 쥐꼬리만해서,맨션 임대비가 벅차서 고민하는 오피스걸들이 미나의 스테이지로 올라왔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그림이 좋은 여자는 미나 후꾸오 자신이었다.

미나가 하야시의 집안으로 양녀로 입양된 것은 실로 어처구니없는 유괴사건에서 시작되었다.
하야시의 할머니.
전쟁후에는 맥아더 사령부에서 허드렛 일을 했던 이 할머니는 늙어가면서부터 신문을 읽는 버릇을 챙겼다. 그러다가 마음에 안 드는 기사가 있으면 신문지를 돌돌 말아서 들고 다니곤 했는데,이때는 지나가는 개나,전신주를 신문으로 툭툭 치는 것이었다. 이 할머니의 별명은 이즈의 노파였다.

미나의 나이가 5살이었을때,노파는 거리에서 울고 있는 미나를 발견했다.
노파는 씁쓸한 생각이 들어 무심히 미나의 머리를 신문지로 뚝 쳤다. 그러자 미나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그쳤다. 노파의 마음이 움직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노파는 장바구니를 팽개치고, 미나를 등에 업더니,정신없이 집으로 뛰어왔다.
눈치 볼 것도 없는 일이었다. 동네사람들은 노파가 또 무슨 해괴한 일을 꾸미나보다 하고 그냥 지나쳤다.

그런 미나는 처음에는 말을 아주 잘했다. 그러다 어느 날 미나는 벙어리가 되었는데,이것은 어떤 강압적인 충격에 의한 실어증 증세였지만 노파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미나의 실어증 증세는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점차 심해졌는데,마침내는 입을 열지 않는 상황까지 도달했다. 표현하고 싶은 권리를 자기 스스로 버린 것이었다. 한참 후에야,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주일 전인 토요일 밤에야, 노파-미나를 줏어온 할머니는 미나가 왜 벙어리가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이 때문에 할머니는 그날밤에 살해당했고,토막토막 분시되었다.

미나는 오늘도 할머니의 시체가 들어있는 대형 냉장고의 문을 열어 본다.
어렴풋이 무엇인가가 미나의 머리속을 괴롭혔지만 미나는 그게 무엇인지 제대로 분간할 수 없다. 아니 미나는 할머니를 자신이 살해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다.
어쩌면...그땐 머리가 잠시 돌았던 게야.

하야시는 다시금 할머니가 잠꼬대를 하는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다락방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하야시는 담배를 입에 물고 생각했다.
이상해. 아무래도 할머니는...
요즘도 신문을 읽고 있는 걸까...

하야시는 담뱃불을 당겼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게 거의 2주일전 일이다. 어쩐지 할머니의 건강상태가 안 좋아 보였는데... 지금도 그놈의 좁은 방에서 시체처럼 잠을 자고 있을까. 시체처럼 말이다.
하야시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미나가 잘하겠지...

별안간 미나가 아까 한 행동이 하야시에게 떠올랐다. 10분전에 담배를 가져다 주면서 미나는 슬쩍 자신의 어깨를 툭 건들었다.
하야시 오빠...나 피곤해...

하야시는 미나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시는 미나와의 관계에 대해 이젠 신경을 끄고 싶었다. 할머니가 주워 온 아이. 미나는 지금 할머니처럼 미쳐가고 있는 게다.
별안간 하야시는 등골이 오싹했다.
아냐. 생각을 말자. 이런 생각은 미친 짓이야. 미나는...

하야시는 울컥 자신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미나의 육체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그리움이 다시금 되살아 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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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의 시스템에 전화가 걸려 온 것은 3일전이었다. 그날 의뢰자는 젊은 여자 사진 한 장을 전송해오며 그녀를 살해해 달라고 요구를 해왔다.
곧바로 하야시는 의뢰자가 전송해온 여자-후루겔스 게이꼬의 사진을 (에프원 파일)에 걸었다. 복잡할 건 없었다. 야마테 시스템라인의 폐쇄회로 카메라에 게이꼬의 얼굴을 심어 놓기만 하면 모든 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었다.

어쩌면,운이 나쁘면 게이꼬 대신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다른 여자가 죽을지도 몰랐다. 이 점에 하야시는 조심해야 했다. 하야시는 이미 7명의 여자를 죽인 바 있었지만,실수로 다른 이들을 살해한 적은 없었다. 그것은 하야시의 자존심과도 관련돼 있는 일이었다.

먼저 하야시는 C언어로 제작한 (암호크랙용 프로그램)으로 야마테 라인의 중앙컴퓨터에 걸려있는 암호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그런 뒤 게이꼬의 사진을 폐쇄회로 카메라의 검색 시스템에 걸어 놓았다. 한편으론 야마테시스템 컴퓨터를 전체적으로 재구성했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게이꼬 모습을 확인하면 동시에 무인지하철이 바뀐 선로를 타고 게이꼬를 찾아가야만 했으니까 이번 일은 지극히 세세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작업이었다.
모든 게 완벽하게 준비된 건 바로 어제 밤의 일이었다. 적어도 10분이면 상황은 끝나게 되어 있었다. 하야시는 기타를 튕기며 게이꼬가 나타나길 기다렸다.

운이 좋았다. 방금 두시간 전 새벽에 간다 역구내로 뛰어 들어오는 게이꼬의 모습을 폐쇄회로 카메라가 감지한 것이다. 기다리기 시작한지 겨우 다섯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미나는 다시마를 우동에 넣었다. 어디에서 이런 풍속이 전해져 왔는지 모른다.
미나는 쓴 맛의 우동을 좋아했지만,오빠 하야시는 다시마로 맛을 낸 우동을 즐겨 먹었다.
---아무래도 안되겠어. 냉장고안엔 할머니의 시체가 들어있단 말야....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을 때 미나는 냉장고를 새로 한대 구입할 생각을 했다.
그러다가 미나는 깜짝 놀랬다. 자기 자신이 어느새 할머니의 음성을 흉내 내며 중얼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나는 서둘러 뒤를 돌아다보았다.
하야시 오빠가 지금 내 목소리를 들었을까. 하야시는 신경쇠약인것 같던데...

미나는 젓가락으로 우동을 리드미컬하게 저어갔다.
무의식중에 미나의 입에서 또다시 죽은 할머니의 음성이 흘러 나왔지만, 이번에는 미나 자신도 그것을 깨닭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 원 투...킬...민나... 올...캉고구진와 민나...

(---모두...죽이고 싶어... 모든...한국인들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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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5시. 이상운은 터벅터벅 걸어서 지부로 귀가하는 중이었다. 어이가 없어 춘해형에게 무슨 말로 변명을 해야할지 대책이 없었다. 아니 변명이고 나발이건 간에 지금은 그저 실없이 웃음만 나왔다. 명색에 대한민국 안기부에 소속된 엘리트가 아닌가. 이런 수모를 당하다니.
이상운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잠시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찬바람이 차갑게 이상운의 귓가에서 어른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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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해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침 7시였다. 이상운은 싸우나를 끝내고 선박회사로 위장된 안기부 도쿄 3 브렌치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이때 임춘해는 퉁퉁 부은 입술 가를 계란으로 문지르고 있었다.
이상운은 비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도 당했나 보군요...?"
"넌 뭐하다 왔어? 핸드폰을 어디다 버리고 말야,응?"
"나참. 나 비번 아니오. 그래서 좀 놀아보려고 했더니 날 호출하오?"
"멍청한 자식. 한건 물게 하려고 했더니..."

춘해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이상운의 팔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운의 팔목은 붕대로 꼴나쁘게 감겨있었다. 춘해의 시선을 느꼈는지 이상운은 붉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놓쳤습니다... 미안해요 형."
춘해는 눈앞이 캄캄했다. 간밤에 안기부 요원 두 명이 김준에게 당했던 것이다.
이상운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곧 소식 있을 거요. 그 놈 내 차 몰고 다니잖아요. 지금."

춘해는 팩스용지를 가리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놈 자가용은 저기에 있다! 그래 차까지 놈에게 줬냐?"
이상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춘해가 가리키는 팩스용지를 집어 읽었다.

[도난 차량 발견. 아끼하바라 지서.]

이번에는 이상운도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저 실실 바람소리만 흘러 나왔다.
"이자식...겁먹었나 보군요. 벌써 차를 버리고 도망갔네요...?"
"겁먹은 게 아니라 똑똑한 거겠지!"
임춘해는 책상위에 걸터앉았다.
"이따 오전중에 경시청에 도움을 요청할 테니까 넌 아끼하바라를 훑어봐.
사람 모자르면 대사관에서 채우든 아니면 오사카에 있는 영진이를 호출해라.
영진이보고는 애들 다 데리고 오라고 해라. 알았냐?"
막상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래도 우리 애들론 안되겠어. 다섯명가지고 뭘 하라는 거야. 도데체가."

이상운은 고개를 끄덕여 보이다가 슬적 임춘해에게 질문을 던졌다.
"근데 그거,정말 그 친구가 한 겁니까?"
"뭘?"
"컴퓨터 말이요. 국방부에..."
"그 녀석이 했다. 분명해."
"그래요? 제 생각엔 전혀..."
별안간 임춘해는 눈을 부라리고 이상운을 노려보았다. 이빨 부러진 것만 해도 놈을 잡아들이고 싶은 욕구가 왕왕한데,지금 이 친구가 누구 약을 올리나 라는 생각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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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도쿄 외각에서 환상선 지하철을 집어타고 시내로 돌아오고 있었다.
쓰쿠바로 잠적을 하려고 했지만 우선은 한가지 알아둘 게 있었다.

거리로 나오자 준은 곧바로 도쿄도 인 호텔에 체크인 했다. 그런 뒤 노트북을 흔들어 보이며 중요한 작업을 할테니 방해하지 말라고 지배인에게 말했다.
호텔 52층에서는 벨보이가 할 일 없이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객실에 들어온 뒤 준은 곧장 TV를 켰다. NHK 방송이 지하철 사고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아침 7시 12분이었다.

룸서비스로 카푸치노 커피와 샌드위치가 도착하자 준은 우선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먹었다. 그런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샤워가 끝난 것은 그로부터 5분 뒤였다. 준은 타월로 머리를 닦으며 노트북을 금속 케이스에서 꺼냈다.
그런데 의외로 노트북에서도 그 놈의 경고문이 떠 다니고 있었다.
== 당신을 매장하기로 했습니다. ==

한동안 긴 충격이 준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3일전에는 데스크탑 컴퓨터에서 메세지가 떠올라 왔었다. 헌데 이번에는 노트북 컴퓨터에서도 이놈의 메시시가 떠 오른다. 준은 메시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가닥을 잡지 못했다. 해커와 해커간의 추격 공방전이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는 있다지만,그가 직접 이러한 상황에 접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무래도,메시지를 보내온 놈은 김준을 계속 추적하고 있는것 같았다.

준은 경고문이 다시 인스톨된 과정을 찾기 위해 성급하게 키보드를 두둘겼다.
원인은 스타트업(부팅과 동시에 특정 파일을 여는 프로그램)에 걸려있는 통 에물레이터 때문이었다. 준의 노트북은 부팅이 되면 통신 에물레이터가 우선적으로 떠올랐는데,이 에뮬레이터에는 에릭슨 핸드폰이 무선모뎀의 도움으로
자유롭게 연결돼 있었다.

아마 어젯밤 이상운과 한바탕 붙을 때 노트북에 충격이 발생 부팅이 시작되었던 모양이다. 그런 뒤,노트북이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놈은 다시금 경고 메시지를 날려온 것이다.
안되겠군...
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대로 계속 놈에게 당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준은 경고문이 떠있는 상태에서 곧바로 도쿄도 지하철망 조사를 시작했다.
7시간 뒤인 오후 3시경. 김준은 요금을 지불하고 호텔 밖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바탕 비라도 내리려는지 서북편 스카이 라인을 가르고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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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춘해는 경시청의 오니쓰라 경감과 함께 사건이 발생했던 간다 지하철역 구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춘해로써는 게이꼬가 죽은 이유가 왠지 모르게 심각한 의문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오후 2시부터 춘해는 오니쓰라 경감을 붙잡고 이것저것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야마테 시스템에 해커가 침투했다는 뜻이군요."
그가 다시 유도성 질문을 던지자 오니쓰라는 보기좋게 넉살을 부렸다.
"허허. 내가 어찌 알겠습니까? 춘해씨도 알다시피 난 전산요원이 아닌데요..."

춘해는 슬쩍 웃었다.
"이러지 맙시다. 내 다 알고 왔다고 하지 않소..."
"이런 춘해씨도 보기보단 끈질기시군 요."
춘해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 한개피를 오니쓰라에게 권했다.
"한번 밀어주쇼. 누구요? 침투했다는 그 해커는..."
"이거 말씀드리긴 곤란한데..."
오니쓰라 경감은 굳어진 얼굴로 춘해가 건네준 담배를 자신의 포켓안으로 집어 넣었다. 여긴 금연지역이었던 것이다.
"이건 대외비입니다...물론 다른 쪽으로 흘리시면 안됩니다."
"염려 놓으시라니까. 그 점은..."

"자랑하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죠. 야마테 시스템에는 3만여 종류의 바이러스에 대해 방비책을 획득해 놓고 있다고 합디다. 물론 3단의 암호코드가 걸려있기도 하지요. 헌데 어제 저녁에 침투한 놈은 굉장했대요. 채 몇 분도 안되어 선로 교란과 열차교대 시간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음..그래요?"
"그렇습니다. 그런 뒤,춘해씨가 추측했듯 그 놈도 자기 이름을 남기고 떠났죠.
요즘 신인류 해커들은 마구 두들겨 부셔 놓은 뒤 아이디를 남기는가 봅니다만."
"아이디가...뭐라고 합디까?"
"(동급해커)라고 하더군요. 꽤 유명한 악질 해커라고 합디다."

순간 춘해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동급해커는 김준이 가지고 있는 아이디가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김준은 대한민국 국방부 컴퓨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놈이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시시하게 야마테 시스템까지 침투했을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황으로 보아 후루겔스 게이꼬의 죽음은 계획적인 일이었다. 누군가가 야마테 시스템 라인을 혼란시키고 게이꼬가 걸려들길 기다렸을 터이다. 그런데 그자가 김준이라니...

이건 아무래도 앞 뒤가 안 맞아...
녀석은 게이꼬를 살해할 리가 없다.

춘해는 손수건을 꺼내 턱 아래쪽 상처를 다시 문질러 보았다. 오니쓰라 경감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춘해의 행동을 쳐다보고 있었다. 춘해는 고개를 돌려 사건현장을 응시했다. 이미 사건현장은 깨끗하게 페인트 칠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춘해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사건이 일어난 구석으로 걸어갔다. 이때 지하철이 춘해의 등뒤에서 들어와서 멈추었다.
동시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춘해가 서있는 쪽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런...빌어먹을 놈들...

춘해는 쏟아지는 인파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짜증이 났다. 어느새 손수건이 춘해의 손에서 떨어졌다. 춘해의 모습이 안쓰러운지 오니쓰라 경감이 서둘러 춘해가 있는 쪽으로 걸어 왔다. 춘해는 오니쓰라 경감을 쳐다보며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순간적으로 춘혜는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춘해는 손수건을 집다말고 서둘러 지하철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너..."

김준이었다. 김준은 지하철 문에서 나오다 말고 다시 문안으로 뒤돌아가고 있었다. 춘해는 흥분한 얼굴로 정신없이 외쳤다.
"경감. 놈을 잡으시오. 저 놈 말이요!"
아니 소리를 지를 필요는 없었다. 이미 임춘해는 잽싸게 몸을 던져서 지하철 안으로 뛰어 들고 있었다.

오니쓰라 경감은 정신이 퍼떡 들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춘해가 말한 인물을 찾아 시선을 옮겼다.
뒤쪽이었다.

지하철 뒤칸으로 훤칠한 키의 사내가 막 도망을 가는게 보이자 오니쓰라 경감은 바짝 긴장했다. 어느새 오니쓰라의 손에는 아내 하야꼬가 (대포)라고 지칭하는 그의 45구경 권총이 들려 있었다.
오니쓰라는 힘차게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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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이상운은 아끼하바라 거리를 내려오고 있었다. 하루종일 걸어다니며 탐문수사를 해서인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탐문수사의 결과는 예상했던대로 형편없었다. 김준이 자동차를 버리는 걸 본 증인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던 게다.
이상운은 편의점에 들어가 맥주를 한 캔 따 마셨다. 120엔이다.

이상운이 편의점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을 때 미나 후꾸오는 마쓰시다전자 양판점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전부터 눈여겨 본 냉장고가 있는 양판점이었다. 미나는 양판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점원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의 몸매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미나는 신경을 쓰지 앉았다.
흔한 거야. 저런 남자는...

미나는 한참동안 대형 냉장고 앞에서 냉장고의 사양을 읽었다. 그러다가 점원에게 걸어가 쪽지를 내 밀었다. 그제야 점원은 미나가 벙어리임을 알아 차렸다.

이상운은 캔맥주를 마시다 말고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미모의 여자가 건너편 마쓰시다 양판점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이상운의 눈에 들어왔다.
불현듯 어제밤 나루미와 있었던 정사가 떠 올랐다.
이런..주책없군...갑자기 왜...
이상운은 쓴 웃음을 지으며 도로로 나왔다.

방금 전 이상운이 보았던 미모의 여자 미나 후꾸오는 막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이상운은 택시가 떠난 방향과는 반대방향인 3번가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이슬비가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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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가는 남과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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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뒤쪽으로 뛰어갔다. 퇴근시간 전이었지만 지하철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죠오반선常磐線처럼 2층 차량이 아니었다. 그저 단순한 6도어 차량이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임춘해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신을 향해 뛰어오고 있다. 준은 순간적으로 몸이 듬직해 보이는 승객을 눈으로 찾았다. 바로 옆쪽에 있다. 준은 슬쩍 그의 다리 앞에다 발을 갖다 댔다. 그런 뒤 힘차게 임춘해를 향해 남자의 등을 밀었다. 곧바로 둘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사이에 준은 지하철 밖으로 몸을 굴렸다.

오니쓰라 경감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권총을 준에게 정확하게 겨누고 있었다.
빈틈이 없었다. 오니쓰라가 권총을 겨누는 것을 봤는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준의 뒤에서 물결처럼 갈라졌다.
헌데 이상했다. 오니쓰라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뭐라고 해야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실상 오니쓰라는 김준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임춘해가 체포하라니까 거들어 주는 것이다.
오니쓰라가 이 문제로 잠깐 주춤하고 있을 때었다. 별안간 김준이 전광석화같이 몸을 날려갔다.

이런...심한 보디체크가...
오니쓰라는 강한 충격을 받으며 뒤로 굴렀다. 동시에 권총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준은 오니쓰라의 45 구경 권총이 바닥을 뒹구는 것을 보았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방금 전만 해도 잡혔구나 라고 생각을 했었다. 헌데 권총이 현실적으로 준의 시야로 바짝 다가오자 준은 눈앞이 캄캄했다.
방금전 상황은 잡힐뻔 한게 아니라,시체말로 죽을뻔 했던 상황인 것이다.

오니쓰라는 약이 바짝 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권총을 집으려고 손을 더듬었다.
권총까지는 손이 닿지 안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니쓰라는 힐끔 준의 올려다 보았다.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며 얼빠진 채 서 있었다. 기회였다. 오니쓰라는 쏜살같이 자신의 몸을 옆으로 굴려 이동했다. 그런 뒤 권총을 잡았다. 아니 권총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빠르게 김준이 축구선수가 페널티킥을 차듯 사정없이 권총을 발로 차내고 있었다.

헛발질이었다.
그러나 권총은 약간 빌빌거리는가 했더니 그대로 지하철 문안으로 퉁겨 들어갔다. 동시에 자동문이 닫히면서 지하철은 그곳을 떠나 달려 나갔다.

이때 임춘해는 번개같이 몸을 날려 지하철에서 탈출해 나와 있었다. 그의 심장은 요란하게 고동치고 있었다. 숨소리가 심상치 않을걸 보니 또 청심환이라도 먹어야 하나 보다.
김준은 오니쓰라를 상대하느라 자신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때문에 춘해는 득의양양한 표정이 되었다. 춘해는 홀스트에서 권총을 꺼내들며 입을 열었다.
"이것 봐 김준... 이제 그만하지. 게임은 끝났네."

아차... 준은 바짝 긴장했다. 춘해가 지하철에서 뛰어 내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었다. 춘해 역시 권총을 꺼내 든게 분명했다. 준의 등뒤에서는 요란하게 사람들이 몸을 피하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한편으론 머리속을 재빠르게 회전시켜 보았다. 춘해가 요구하는 대로 뒤로 돌아설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되면 포기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놈이...놈이 내쪽으로 걸어올까...?
운이 좋았다. 김준이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서있자 임춘해는 그가 포기했다고 생각을 했다. 등을 보이고 있는 이상 놈도 어찌할 방법이 없는 게다.
춘해는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여가며 준을 향해 걸어갔다.
"뭐야? 뭐하자는 거야? 어서 뒤로 돌아서지 못해? 손 올리고 말야!"

순간 춘해는 보았다. 준의 한쪽 다리가 살짝 구부리는 것 같았다.
제길 뭘 하자는 거야...?
동시에 준이 몸을 돌리는 거 같았다. 춘해는 걸어가다 말고 잽싸게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사이에 김준의 노트북 케이스가 날카롭게 반원을 그으며 춘해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임춘해도 빨랐다. 그는 순간적으로 가슴을 뒤로 젖히며 준이 휘두르는 노트북 케이스를 피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준이 날카롭게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놓칠수 없었다. 임춘해는 권총을 반대로 잡고 달려드는 준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올려쳤다.
퍽-------
그것은 꼴사납게 준의 노트북에 의해 차단 당하고 말았다. 춘해는 아차 하는 심정으로 몸을 다시 뒤로 빼려고 했다. 순간 춘해의 시야 아래쪽에서 김준이 어퍼컷을 날려왔다.

퍽------!!

춘해는 어이쿠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벌써 두번째였다.
이거 또 이빨이 부러져 나간 게 아닌가 하는 황당한 생각을 하면서 춘해는 그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가슴이었다. 가슴에서 심한 통증이 급류치듯 올라오고 있다.
"경감...놈을 잡으시오, 놈이 동급해커란 말이요..."
춘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눈이 뒤집어 질것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이미 오니쓰라 경감은 김준을 쫓아가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겐쪼 경사. 그놈을 잡아! 잡으란 말야!"
오니쓰라의 지시가 끝나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겐쪼와 부하 경찰 두명이 건너편 계단에서 튀어 내려왔다. 50미터 전방이었다. 준은 뛰다 말고 그 자리에 우뚝 멈추었다. 노트북이 그의 오른손에서 심하게 흔들거렸다.

포위되었단 말인가...

준은 앞쪽에서 뛰어오는 겐쪼 일행을 바라보았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승객들은 수숫대처럼 통로 벽으로 몸을 바짝 붙이고 길을 터주고 있었다.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춘해는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고,오니쓰라는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 성난 사자처럼 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칙쇼...
오니쓰라 경감의 입에서 뱉어진 욕지거리가 준의 귀에도 들려왔다.

처참했다. 김준은 사건현장에 설치된 폐쇄카메라의 움직임을 육안으로 확인하고자 이곳에 온 것이었다. 그런데 임춘해에게 걸려들다니. 이젠 도망갈 방법이고 뭐건간에 꼼작없이 잡힌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피식 쓴웃음이 나왔다.
아쉬운 듯 준은 폐쇄회로 카메라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잡힐때 잡히더라도 그놈의 폐쇄회로카메라가 게이꼬의 죽음에 어떤 역활을 했는지 궁금했다.
그 순간이었다. 폐쇄회로 카메라가 스르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것은 분명히 김준을 향해 빙그르르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런 뒤 렌즈를 내보이며 김준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준은 불끈 심장이 터져나갈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저것인가?...게이꼬가 살해당한 건?...
후루겔스 게이꼬는 감시를 받고 있었단 말인가....?

몇초가 지났을까. 사람들은 모두 준의 시선을 쫓아 페쇄회로 카메라를 올려다
보기 시작했다. 겐쪼도. 춘해도. 오니쓰라 경감을 포함한 모두가...

이때 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시간을 헤아려보고 있었다. 1분 50초였다. 준은 호텔에서 검색했던 지하철 발차 스케줄을 머릿속에 기억해두고 있었다. 정확하다.
"이야압------"
준은 별안간 간다 지하철역 구내가 터저 나갈만큼 괴성을 질러대며 손에 들고있는 노트북을 철로 건너편 승강장으로 집어 던졌다. 춘해와 오니쓰라는 준의 괴이한 행동에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별명이 제비인 겐쪼 경사는 역시 눈치가 빨랐다. 겐쪼는 어느새 김준을 향해 한방 쏘아대고 있었다. 동시에 김준이 승강장 아래 철로로 뛰어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곧바로,1분 50초마다 연결되는 야마테 선 지하철 차량이 터널 속에서 녹색칸델라 등을 반짝이며 김준을 향해 돌진해왔다.

춘해는 황당했다. 권총을 바로 잡아 다시 겨누었지만 지하철 차량에 가려 건너편에 있는 준의 모습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귀신 같은 놈...어떻게 곧바로 지하철이 달려온다는 걸 알았을까...
춘해는 할말을 잃었다. 그저 끝없는 분노가 치솟아 오를 뿐이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은 춘해가 지하철역 밖 거리에서 혹시나하고 김준의 흔적을 찾고 있을 때였다. 김영진의 전화였다. 영진 일행이 도쿄에 방금 도착했다는 전갈이었다.

이미 김준은 가와사끼 호텔 꼭대기에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앉아 있었다. 폭우 너머로 도쿄의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준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비지니스맨을 위한 테이블이었기 때문에 그는 간단하게 요기를 때운뒤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도쿄도 지하철망이 아까부터 계속 떠 있었다.
아까 보았듯이 폐쇄회로 카메라는 야마테 시스템에서 무인관리 되고 있었다.
이것은 누군가에 의해 나쁜 목적으로 점유된 흔적이 남아 있었다. GIF파일이었다.
준은 게이꼬의 사진이 GIF 파일로 걸려 있는 것을 찾아내고 있었다. 분명 놈은 대단했다. 동서선 지하철 차량을 강제이탈시킨 프로그래밍 워크는 김준 스스로가 감탄할 만큼 간단하게 작성되 있었다.
준은 다시 처음부터 시스템 관리자 명단을 일일이 파악해 보았다. 하지만 특별하게 의심이 갈만한 인물이 없다. 누가 이짓을 했는지는 아직까지도 오리무중인 것이다.

밤 8시 40분이었다. 준은 손짓으로 웨이트리스를 부른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건네주었다. 창밖은 계속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계산대의 여자는 멍하니 준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이쪽으로 걸어오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었다.
준이 바로 앞에 멈추어 서자 이번에는 테이블 번호를 확인했다. 확실했다.
여자는 식은 땀이 나왔다. 왠지 불안했다. 여자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만... 손님의 신용카드는 허가가 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준은 힐끔 여자를 응시했다.
"무슨 뜻입니까?"
여자는 이지체크기와 연결된 단말기를 바라보았다.
"손님 카드는 사용할수 없는 겁니다. 모르셨나 보죠?"
준은 갑자기 숨이 막혀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사용할수 없다니.
"아... 그런가요... 그럼 다른 카드로 결제해 드리죠."

준은 그렇게 말한 뒤 지갑을 꺼내 펼쳤다. 지갑안에는 11장의 신용 카드가 빽빽이 들어있었다. 준은 카드를 꺼내 내밀다가 잠시 손을 멈추었다.
어느 놈이 카드에다가 기름칠을 한 것일까...?
별안간 그런 생각이 들자 준은 신경이 수축되었다. 준은 떨리는 손으로 지갑을 털어 11장의 카드를 계산대에 펼쳐 보았다. 그런 뒤 아무거나 손에 집히는 신용카드 2장을 여자에게 내밀었다.
"이것도 확인해 주시겠소? 어쩌면 이 두장도 문제가 있을지 모릅니다만..."
여자는 준을 올려다보았다. 별 이상한 사람이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더니 준이 건네주는 2장의 카드를 이지체크기에 통과시켰다. 역시 마찬가지다. 여자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둘 다 해지된 카드입니다. 묘하게도 오늘 오후 2시에 그렇게 된 것 같네요.
오늘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아닙니다. 실례지만 이 단말기는 어디와 연결돼 있습니까?"
"니프티서브의 뱅크조인트입니다만. 왜요. 무슨 일이죠?"
"니프티서브라면...?"

니프티서브는 PC-VAN사와 함께 일본의 양대 통신망을 구성하는 공룡급 통신서비스 회사였다. 그러니까 조회가 잘못될 리는 없었다. 분명 누군가가 준의 신용카드를 상대로 기름칠을 한 것이다. 아예 사용할수 없겠금...
준은 크게 한숨을 쉬면서 여자에게 미소를 흘려 보냈다. 그런뒤 쩔쩔매는 표정으로 안주머니를 뒤졌다. 지폐 2장이 야구장 입장표와 함께 꾸겨져 나왔다.
준은 그걸로 음식값을 지불한 뒤 밖으로 나왔다. 그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빌어먹을 자식...

이마가 후끈 거렸다. 오후 2시부터 구좌 농락을 시작했다면 지금 가지고 있는 12장의 신용카드는 모두 사용이 정지되었을 것이다. 누굴까.
어떤 자식이 내 구좌를 상대로 작업을 했을까.
이 자식은 분명 (뱅크 시스템 교란)에도 능란한 해커일 것이다.

호텔 로비로 내려와 거리를 내다 보았다. 당장 움직이려면 현금이 필요했다.
수중에 남아있는 돈은 고작 8천엔 밖에 없었으니까. 헌데 지금 이시간에 어디 도와줄만한 사람이 있을까...아니 지금 당장은 이놈의 폭우를 피할 거처도 없다.
불현듯 준의 뇌리에 나쓰에가 떠올랐다.
준은 공중전화부스로 들어갔다. 그런 뒤 미와자와 리에의 알몸이 그려져 있는 전화카드를 전화기에 삽입했다.
나쓰에는 맨션에 없었다. 단지 자동응답기 소리만이 흘러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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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밤 폭우를 뚫고 나리타 공항에 아시아나 항공기가 착륙을 하고 있었다.
밤 9시 7분경이었다. 나리타 국제공항 대합실은 갑자기 아시아나 항공으로 입국한 22여명의 감색 신사복들로 소란스러워졌다. 입국심사요원인 쓰쓰에 역시 어안벙벙이 되어 사내들의 여권을 일일이 검사했다. 사내들은 모두 같은 회사에 근무한다고 되어 있다.
서울 네트워크 리서치. 도대체 무슨 회사이기에...

22명의 사내들은 이미 공항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다. 쓰쓰에는 그저 멍하니 그들이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여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임춘해는 우산을 들고 공항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초초했다. 김영진의 전화가 있은 직후 곧바로 서울에서 아주국장이 전화를 걸어 온 것이다. 지원군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도대체 몇명이나 보냈을까.
춘해는 담배를 피다말고 입이 벌어졌다.
뭐야, 지원군을 투입한다더니...

개 사단병력을 보내왔잖아...?

감색 양복의 사내들 22명이 곧장 춘해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들중 가장 키가 큰 남자가 임춘해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에 익은 친구였다.
"반갑습니다,임춘해씨. 지금 김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임춘해는 얼굴이 후끈 거렸다. 두시간전에 놓쳤다고 말할수는 없었다.
잠시 머리를 빙빙돌리다가 임춘해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직은...오리무중입니다...하지만 김영진을 나쓰에의 맨션 앞에다 박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가나기원에도 이상운을 붙혀으니까 조만간 소식이 올겁니다... 그런데 이건...허."
춘해는 다시 22명의 감색신사복들을 두리번거리며 쳐다보았다.
"이건 너무 많군요... 서울에서 무슨 좋지 않은 정보라도 있는 겁니까?"
사내는 임춘해를 한번 쳐다보고는 시선을 먼곳으로 옮겼다. 그러더니 벌래씹은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오후 2시에 캠프 데이비드가 뚫렸소."
사내는 선글라스를 벗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김준 그 자식... 손 좀 봐줘야 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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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 12분. 서울 제일그룹 본사 섹션V실에서는 긴급 회의가 끝나고 있었다.
회의 브리핑은 유광남 과장이 하고 있었다. 고종수와 한일수 대리,전두완 대리의 모습이 보였다.
"틀림없는 정보입니다. 오산 미군 비행장은 오후 2시 32분에 뚫렸습니다. 물론 김준이 침투한 걸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며칠전과 같은 방법입니다만.
바이러스를 뭉탱이로 뿌린 뒤 자신의 아이디를 심어 놓은 겁니다. 이때문에 안기부 측에서 내일 오전중으로 전산요원 7명에 행동대원 15명을 일본 도쿄로 긴급특파한다고 하더군요..."
고종수는 싸늘하게 물었다.
"안기부 요원이 내일 아침에 출발한다고요?"
"그런것 같습니다..."
고종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지금 일본으로 날아가 있겠군요. 안기부 애들 하는게 그식이니까요."
유과장은 얼굴이 새파랗게 달아올랐다.
"허 어떻게 그런 말을...?"
"아닙니다. 대사관에 아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저에게 물어오더군요. 서울 네트워크 리서치라는 회사가 뭐하는 데냐고..."
"아 그거 안기부 아닙니까?"
"내 말이 그말입니다."
대답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고종수는 지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산 미 비행장. 안기부측에선 캠프 데이비드라는 암호로 부르는 이 장소.
아무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았다. 오산 비행장은 극동지역에서는 가장 큰 규모를 가진 미군 공군력의 주둔지였다. 무엇때문에 그놈의 해커는 그곳까지 침투했을까.
무언가 크게 벌어질 것 같은 예감이 종수의 뇌리를 스쳤다.
종수는 애써 그 예감을 떨쳤다. 유과장이 감을 잡았는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무얼 노리고 있는지는 지금도 파악할 수가 없다고 하더군요. 나이키 주스 미사일 시스템에도 접촉을 시도했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더군요."
고종수는 유과장을 응시했다.
"김준의 행방은 어떤것 같습니까. 파악된게 있습니까?"
"그게 말입니다...다른 건 모르겠고. 신용카드가 모두 거래정지 먹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거래정지요?"
"사은진 양의 조사에 의하면 김준 스스로가 카드해지를 신청한 걸로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김준 자신이 직접 구좌를 해지한 것이죠. 그리고 잔금은 이미 다 털어 간 걸로 되어 있습니다만..."
"그럴 리가 있나요?"
"이 점도 내가 보기엔 일본안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어떤 놈인지 모르지만 놈은 철저하게 김준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만약 그런자가 실제 있다면 말이죠."

"그럼 김준에겐...지금 돈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겠군요."
종수가 혼자말로 중얼거리듯 이 말을 하자 유과장은 눈을 휘둥그래 떴다.
"종수씨. 우린 이 사건에서 손 때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김준의 문제는 그가 스스로 해결하기로요. 이미 사장단 회의에서도 이문제는..."
"아뇨. 난 단지 개인적인 생각을 말한 겁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종수는 듣기 싫은지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만 합시다. 비서실에는 지금 이 정도 선에서 보고서를 작성에 올려 주십시오. 그리고 김준 문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도 그 밥통같은 놈은 싫으니까요."

종수는 그렇게 말을 한 뒤 굳은 표정으로 회의실을 나섰다. 곧바로 유과장 옆에 서있던 한일수 대리가 고종수의 뒤를 따라 나왔다. 나가면서 고종수가 살짝 신호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한일수는 헤프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다 잘될 겁니다,부장님. 근데 무슨 일로 저를...?"
종수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자네 동생이 있다고 했지? 한현희라고 했나?"
"예 그렇습니다만..."
"수배하게."
"수배라뇨...? 현희는 지금 도쿄에..."

한현희는 1992년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한바 있는 재원이었다. 지금은 일본 제일그룹 사업본부에서 할일 없이 텔렉스 감시나 하고 있지만 말이다.
종수는 어이가없었는지 잠시 자기 머리를 두들겼다.
"아 그렇군. 그럼 한대리만 일본으로 날아가면 되는군. 지금 당장 출발하게."
한대리는 벙찐 얼굴로 고종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고종수는 이미 저만치 걸어가고 있다. 한대리는 갑자기 얼굴을 붉혔다. 아마 처음일 것이다.
한일수가 자신의 속마음을 내 비친것은.
"부장님...어디 두명가지고 안기부와 싸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일본으로 날아가 부장님 친구분을 지키겠습니다. 진심입니다!"
그렇게 말한 뒤 한대리는 헥헥 거리며 기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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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진탕같이 힘든 날이였어...사뇨 나쓰에는 맨션 계단을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긴 블랙원피스는 빗물에 젖어 종아리에 달라붙어 있다.
나쓰에는 약간 취해 있었다. 쓰쓰무 과장이 치근거리는 바람에 아침부터 영 기분이 좋지 않았었다. 그런데 오후에는 오카자끼까지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다.
보기 좋은데 나쓰에 양 가슴은...
나쓰에는 계단을 올라가다 말고 불쑥 벽에 대고 주먹질을 했다.
꺼벙한 자식... 성불구자인 주제에... 흥...
나쓰에는 1년전엔가 배운적 있는 한국어 가요를 흥얼거리며 맨션 출입문에 열쇠를 꽂았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나쓰에는 의아한 생각을 하며 거실로 들어섰다.
사즈메가 왔다 간건가?
사즈메는 나쓰에의 여동생이었다. 고교 3년생. 놀때는 화끈하게 노는게 나쓰에와는 아예 성격 자체가 틀렸다.

사즈메는 없었다. 나쓰에는 거실을 한바퀴 돌아다보았다. 반쯤 열려져 있는 창문사이로 커텐이 바람에 사납게 날리고 있었다. 빗방울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
나쓰에는 별생각을 하지 않고 창문을 닫고 침대에다가 핸드백을 던졌다. 그제야 탁자위의 자동응답전화기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이 나쓰에의 눈에 들어왔다.
나쓰에는 응답기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준... 김준이 누굴까....?
나쓰에는 별 이상한 놈 다보겠네 라고 생각하면서 녹음된 내용을 지웠다.
그제야 어렴풋이 김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남자다... 무슨 일일까?
나쓰에는 젖은 원피스를 벗고 타월을 들었다. 그런 뒤 욕실문을 열었다. 순간 나쓰에는 깜짝 놀랬다.

흰색 와이셔츠 차림의 김준이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머리칼은 비에 흠뻑 젖어있고.
"어머 놀랬잖아요. 어떻게 된 거예요...?"
"죄송합니다. 방금 창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창문으로 들어오다뇨? 후후 그게 무슨 농담...?"
나쓰에는 그렇게 말했지만 실상 겁이 잔뜩 났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속옷만 입고 있다.
"아 잠시만요. 저... 옷 좀 걸쳐 입겠습니다."

막상 말은 그렇게 하고 나왔지만 나쓰에는 온통 신경이 수축되는 것 같았다.
술기운은 어느새 확 달아났다. 무슨 일일까. 정말 이상한 남자야.
나쓰에는 냉철하게 생각을 했다.
그날 야구장에서의 데이트야 그때 기분에 좀 취해있었다고 치자.
지금은 별 관심이 없다. 저따위 한국인 남자에게는.

나쓰에는 신경질적으로 옷장을 뒤졌다. 박스형의 니트가 보였다. 나쓰에는 브래지어를 벗고 얼굴위로 니트를 껴입었다. 젖가슴이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그런 다음에는 비에 젖은 머리를 말린 뒤,양손을 뒤로해서 머리칼을 슬쩍 허공으로 튕겨 보았다. 그러자 시세이도 광고모델처럼 나쓰에의 머리칼이 허공에서 펼쳐 지다가 부드럽게 가라 앉는다.
나쓰에는 히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술에 취해 있을때는 항상 자신을 시세이도 화장품의 광고모델이라고 착각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녀는 비틀거리며 좌우를 두리번 거렸다. 차분히 생각을 해보자.
치한 퇴치법은 여러가지가 있다고 하니까.
나쓰에는 탁자를 보았다. 무기가 될 거라곤 가스분사기 밖에 없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잔인해. 쓰러뜨린 뒤에는 맨션밖으로 끌고 나가야 하잖아...
나쓰에는 다시 옷장안을 들여다 보았다. 골프채가 있다. 나쓰에는 골프채를 집어들었다. 아직도 정신이 맹맹했지만 나쓰에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김영진은 체로키 지프안에서 맨션 도면을 보고 있었다. 오사카에서 날아온뒤 급하게 나쓰에의 맨션앞에 캠프를 차려놓고 있었다. 오종식이 말했다.
"옥상이 아직 불안하군요. 다른쪽은 다 안에서 잠궈 두었습니다만,A동은 바깥쪽 에서 잠기어 있습니다. 어쨌든 거기도 안쪽에다 자물쇄를 걸어 놨습니다만."
"거긴 계단에서 육탄으로 막으면 될 것 같으니까 상관하지 말지."
"만일을 위해 그러는데...컴포지션도 준비할까요?"
"아냐. 그냥 액화가스폭약을 사용하게."
"알겠습니다."
"이젠 대충 준비가 된건가? 하기야 4층이라...뛰어 내릴수는 없겠어. 종식이는 영삼이와 같이 옥상 비상구에 붙어있고 영범이는 나를 따르지?"
"그럽시다. 한번 움직여 볼까요?"
윤영범은 몸이 근질근질했다. 하지만 김영진은 어쩐지 썰렁했다. 자신을 포함해 동원 가능한 수는 총 4명이었다. 이 4명으로 김준을 잡을 수 있을까.
이번에는 김영삼이 말했다.
"허. 둘이 싸우고 있네요? 여자쪽이 김준에게 뭐라고 하는 뎁쇼?"
김영진은 고개를 들어 영삼이가 응시하고 있는 티악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옆에 있는 릴테입은 그들의 대화를 녹음하고 있었다.

대화소리를 듣다가 영진은 다시 김준의 사진을 응시했다.
제일그룹 정보팀이 제공한 사진이었다. 마지못해서 팩스로 전송해온 것을 임춘해가 가지고 있다가 브렌치 사무실에 보관해 둔 것이다.
영진은 사진을 응시하다말고 품에서 권총을 꺼내 손끝에서 빙그르 돌렸다.
임춘해와의 핸드폰 연락은 폭우때문에 불통이었다. 2시간째 연락이 닫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막상 철수를 준비하고 있었는데,그때 김준이 맨션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포착된 것이다. 10분전의 일이었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듯 퇴근해 돌아오는 사뇨 나쓰에의 모습도 보였다.
아무래도 안되겠어...춘해형을 기다리다간...
영진은 체로키 94년식 지프차에서 내려섰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준은 두번째 빰을 얻어맞고 있었다. 나쓰에는 아직도 잔뜩 화가 나 있었다.
"가세요. 이게 무슨 짓이죠? 내가 언제 당신을 초대했나요?"
준은 할 말이 없었다. 나쓰에는 많이 취해있었기 때문에 설명하거나 설득할 상대가 아닌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론 어디로도 도망갈 장소가 없었다.
준은 난처한듯 자신의 빰을 만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술을 많이 마신것 같습니다 나쓰에양."
준은 벌써 다섯번이나 이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뭐야,뭐야,뭐야? 나밖에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예요? 정말 이상해 당신. 우리가 몇번 만났다고 이러는 거죠? 나참... 두번인가요?"
나쓰에는 오른손에 골프채를 쥔 상태에서 이번에는 왼손으로 곰인형을 집었다.
골프채로 공격을 하고 곰인형으론 방어를 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상태로 나쓰에는 씩씩거리며 준을 노려 보았다.

이때 벨 소리가 울렸다. 나쓰에는 정신이 퍼뜩 들었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너무 흥분한 것 같기도 하다.
뭔가 이유가 있을 거야. 이 남자에겐.
나쓰에는 준을 한번 쳐다보고는 인터폰을 향해 걸어갔다. 김영진의 얼굴이 인터폰 화면에 떠 올라와 있었다.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실례지만 같이 있는 분을 지금 만날까 합니다만."
나쓰에는 갑자기 신경이 수축되어갔다. 대한민국 대사관이라니. 무슨 일일까?
나쓰에는 엉겁결에 잘하지도 못하는 한국말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무슨 일이신대요?"
"한국어를 하실 줄 아는 군요. 말 그대로 입니다. 김준에게 용무가 있습니다.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나쓰에는 화가 나서 바락 인터폰 스위치를 껐다. 그런 뒤 준을 돌아다 보았다.
"뭘 잘못한 거예요? 당신?"
준은 비쩍 웃었다. 설명할 방법이 없다. 아니 지금 당장은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준은 목례를 한뒤 창문가로 걸어갔다. 그러자 나쓰에가 빠르게 준의 등뒤로 따라 붙었다.
"이봐요 김준씨. 무얼 감추는 거죠? 무슨 일이 있는 거예요? 정말?"
"미안합니다 나쓰에 양. 다음에 만납시다."
순간 문쪽에서 무엇인가 타는 냄새가 풍겨왔다. 쇠가 녹는 냄새. 곧이어 작은 소리로 펑 소리가 들려왔다. 소형 액화가스폭탄이다. 나쓰에는 흠질 놀라며 문쪽으로 걸어갔다. 이미 문을 와락 열고 김영진이 성킁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당신들은? 정말 대사관이야?"
김영진은 잠자리같이 가날픈 나쓰에의 몸을 옆으로 밀었다. 나쓰에는 휘청거리며 벽에 몸을 부딪쳤다. 하지만 나쓰에는 지지 않았다. 별안간 그녀는 있는 힘을 다해 자신의 골프채를 김영진을 향해 올려쳤다.
나이스 샷이었다.
골프채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그대로 김영진의 허리를 파고들었다.

그 사이에 김준은 아까와는 반대로 창문 덩굴을 타고 옥상에 올라왔다.
그런 뒤 비상구 계단으로 뛰어 갔다. 하지만 그쪽 철문에서도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몸을 바꾸어 반대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빨리 B동으로 가요. B동에 가면 도망갈수 있어요!"
나쓰에의 목소리가 폭우속에서 가날프게 들려오자 준은 걸음을 멈추고 옥상 주위를 돌아다보았다. 맨션은 모두 12개동이나 있다. 이쯤되니 어느게 B동이고 C동인지 종잡을수 없다. 그때 철문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사내 두명이 비상구에서 뛰어 나왔다. 이때문에 준은 무작정 앞쪽에 있는 옥상으로 건너뛰었다.
B동이었다.

준은 B동 옥상에 있는 비상구를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
김영진의 지시에 의해 이미 오종식이 잠거 둔 것이다.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주위를 살펴 보았다. 나쓰에가 말한 걸 보니 비상구 말고 뭔가 다른것도 있을법 했다. 준은 빠르게 난간을 따라 뛰어가며 맨션 아래쪽을 내려다 보았다.
역시 4층 위였다. 제정신이 아닌곤 뛰어내릴수가 없는 높이다. 헌데...
수영장이 있었다.
옥상의 북쪽 끝에 도달하자 커다란 수영장이 내려다 보였다. 빗물이 준의 시야를 가려 재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폭우가 사납게 수영장에 채워진 물을 쳐대고 있는것으로 보아 수영장은 만수로 꽉 채워져 있는게 분명했다.
그때 처음으로 총소리가 들려왔다. 준은 빠르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막 사내 4명이 B동 이쪽으로 건너 뛰어 오고 있었다. 이대로 잡힐 수는 없었다.
준은 10여미터 정도 뒷걸음질을 하더니.이번에는 곧장 옥상 끝을 향해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준의 몸이 허공으로 붕 솟아 올랐을때,다시 두번째 총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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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다 지하철 역에서의 격투와 신용카드를 조회한 기록까지...
하야시는 오늘 하루종일 있었던 김준의 움직임을 손바닥 보듯 읽고 있었다.
웃음이 나왔다. 웬일일까. 의뢰자는 48시간이 지났는데도 김준을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고 있다.
하기야 하야시는 김준을 살해할 마음이 없었다. 단지 가지고 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저따위 무스나 처바른 한국인을 살해하다니. 그런 건 형편없는 작업이다.
하야시는 핸드폰의 스위치를 위로 올렸다. 그런 뒤 (뱅커마니아 BBS)에 접속을 시도해 보았다. 운영자는 지금 자리를 비웠는지 하야시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하야시는 벵커마니아 BBS에서 빠져 나온 뒤 자신의 전화라인을 도청하는 자가 있는지를 버릇처럼 찾아보았다. 다행히 그런 놈은 보이지 안았다. 요즘들어선 내각조사실 놈들이 가끔씩 무선 전화를 도청하는것 같던데...

하야시는 기타를 튕기기 시작했다. 헌데 영 재미가 없다. 이번에는 소형냉장고에서 기린 맥주를 꺼내 마셨다. 맥주를 마시다가 하야시는 자신의 치렁치렁한 머리칼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비듬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목욕 좀 하자...이게 뭔가...

하야시는 거실로 내려왔다. 대충 일주일만에 다락방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거실 안쪽으로는 마쓰시다의 R타입 대형냉장고가 새롭게 들어와 있었지만 하야시는 그걸 보지 않았다.
하야시는 골목길로 나왔다. 긴좌 3정목. 폭우가 세차게 하야시의 얼굴을 두들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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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수영장에서 기어 올라와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내 4명이 맨션 옥상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누군가 하나가 옥상에서 뛰어 내리려는지 양복상의를 벗기 시작했다.
준은 서둘러 덤불을 헤치고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을 지나가자 곧바로 비포장 도로가 나타났다. 주위를 살펴 보았다. 지나다니는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폭우. 그리고 정적. 길을 따라 준은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숨이 찼다. 이젠 더 이상 뛸 힘이 없었다. 사내들은 포기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다. 준은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않았다. 그때 맨션쪽에서 헤드라이트를 반짝이며 총알같이 자동차가 튀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건 너무 심한데...

아예 날 죽이지 그래....

준은 좌우를 다시 살펴 보았다. 맨션 뒤는 만주벌판보다 넓은 들판이라 이젠 숨을 장소도 변변치 않았다. 준은 마른 침을 삼키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이미 자동차는 준의 등뒤까지 바짝 따라 붙어왔다.
그런 뒤 곧바로 준을 추월한 뒤 준의 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덜컹------
자동차의 운전석 문이 열렸다.

준은 절망어린 눈으로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사뇨 나쓰에였다. 나쓰에가 폭우속으로 얼굴을 내밀고 준에게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있었다.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빨리 올라타요! 잡히고 싶어요?"

그 순간 준은 그자리에서 털썩 쓰려졌다.
나쓰에는 당황했다.
"어머,당신 다쳤군요?"
준의 오른쪽 넓적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해병대에서 사격교관을 했던 김영진.
그가 쏘았던 총알 한발이 김준의 오른쪽 다리에 계속 박혀 있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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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즈메 양의 폴 인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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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가 없다. 윤영범이 수영장으로 뛰어들겠다는 걸 제지하고 비상구로 돌아와보니 출입문은 안쪽에서 잠겨있다. 그제야 오종식이가 이 문을 잠궜다는 사실을 알고 김영진은 곧바로 A동으로 건너뛰었다. 자칫하면 놓칠것 같다.
김영진 일행이 맨션 밖으로 나왔을 때는 도요타 셀시오 자가용이 막 긴박하게 그곳을 떠나고 있었다. 영진은 체로키로 뛰어가며 나쓰에의 맨션 발코니를 올려다보았다.
불이 꺼져 있다.
영진은 급히 체로키의 문을 열었다. 순간 야릇한 냄새가 차안에서 갑자기 튕겨 나왔다.
"뭐야 이거..."
영진은 삽시간에 마비된 코를 틀어막고 급히 체로키 밖으로 얼굴을 돌렸다.
가스총을 몇발이나 쏘아 댔는지 몰라도 차안은 온통 신경마비제로 가득차 있었다.
젠장할...
영진은 실실 웃음이 나왔다. 그는 해병대 출신이었다. 해병대 요원이 신디 클로포드처럼 빼빼 마른 여자 하나를 못 이긴 것이다. 쓴 웃음이 나왔다.
종식이와 영범이는 허탈한 듯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눈앞에 있는 적을 못 잡을 걸 보니 이게 특정직 7급 출신자들의 한계인가 보다...
안기부의 특정직 7급 요원들은 책상에 앉아 정보를 관리하는 직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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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면은 비를 맞고 거리에 서 있다. 새벽 2시다.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게 언제였지... 3일전이던가. 아냐 그보다는 오래되었을 것이다.
경면은 오늘밤에도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조바심이 났다. 아침엔 꼬박꼬박 출근을 해야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이렇게 그녀를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순찰을 도는 경찰은 없었다. 지금 이시간에는 주차단속을 하지 않는 것이다.
경면은 자신의 자가용을 향해 다시 발길을 돌렸다.
그녀를 위한 장미꽃....
자가용안에는 경면이가 며칠전부터 준비한 장미꽃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고딕풍으로 녹아나듯.
그녀를 처음 봤을 때 경면의 가슴은 마냥 뛰기 시작했다. 꿈에 그리는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그날 얼굴이 화끈거리고 입안이 말라갔지만 경면의 머리 속은 온통 윙윙거렸다. 경면아. 넌 그녀를 처음 본거야. 헌데 그녀는 벙어리라고 하는 구나. 사랑을 속삭일 때 신음 소리가 없다는 거야. 그런데도 넌 그녀에게서 빠져 나올수가 없는 거냐. 이런 게 사랑이더냐.
경면은 혜숙이를 생각했다. 혜숙은 경면이가 군에 입대하는 날 고무신을 바꿔 신은 아가씨였다. 하지만 지금도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산다지 아마.
경면은 비를 맞으며 자동차에 몸을 기대었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이 상태로 누군가가 자신을 잡아가길 경면은 바라고 있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떤 공간속으로 빨려 들어가길 진심으로 원했다.
이때 후꾸오 미나가 에콜 드 신주쿠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경면은 나즈막히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나 다시 경면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경면은 자신의 자가용으로 미나를 뒤쫓아갔다. 그런 뒤 미나의 옆쪽에서 핸드브레이크를 걸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미나양... 댁까지 바래다 드리고 싶은데..."
사랑이란 이런 거다. 처음보는 여자에게 말을 붙일수 있다는 용기...
경면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미나를 응시했다. 미나는 흠짓 놀란 표정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천천히 경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남자라서 그런 게 아니다.
미나는 당황하고 있었다. 경면의 얼굴은 오빠 하야시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미나는 잠시 거리 좌우를 살펴보았다.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발음을 보아 이 남자는 일본인이 아닌것 같은데.
붉은 색 스커트가 비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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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영진 일행은 아크힐스 오피스센터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고 있었다.
춘해와 이상운은 33층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다. 영진은 김준을 놓쳤다는 죄책감보다는 아연 다른 것에 놀라고 있었다.
"흥미 있는데요. 우리가 언제 이렇게 부자가 되었습니까?"
"입닥쳐. 진광섭이가 기다리고 있다."
순간 영진 일행은 더럭 겁을 먹었다. 이젠 죽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광섭은 출판업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란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가 어찌해서 안기부 요원으로 발탁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대학시절부터 군납출판업자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일본과 북한정보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김현희 사건전만해도 그는 보잘것없는 인물이었다. 헌데 마유미...이른바 김현희의 정보를 입수하는 일에서부터 그의 실력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족집게처럼 김현희에 대한 정보를 찾아내는데 발빠르게 움직인 것이다.
특히 진광섭은 치고 빠지는 일에 능숙했고,안기부장배 검도대회에서 우승할 만큼 체력도 강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조직력과 통솔력이 우수했다. 그런 진광섭의 별명은 독사였다.

그라면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영진의 뇌리에 스쳤다. 아크힐스가 아니겠지. 진광섭이라면 뉴욕무역센터 빌딩도 통째로 임대할 남자인 것이다.

아크힐스는 10여년전에 건축된 복합 미래형 도시였다. 산토리生뮤직홀과 全日空호텔 등이 근처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데 개중 가장 세련되고 국제화된 공간이 바로 이곳 아크힐스 오피스빌딩이다. 그런 만큼 임대비도 비쌌다. 그런데 이 장소에다가 진광섭은 보란듯이 안기부 캠프를 세운 것이다. 역시 독사다운 행동일까. 아니면 무식한 것일까.
진광섭은 이날 아침 6시까지도 복도에 서있는 춘해 일행을 부르지 않았다.
그냥 사무실안에서 바쁘게 왔다갔다하면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6시 30분경이 되어서야,커피 타임이라고 말한 뒤,광섭은 춘해 일행을 호출했다. 그런 뒤 광섭은 책상 위에 앉았다. 다시 그의 콧등에는 이사벨 아자니 선글라스가 올라가 있다.
영진 일행은 떱떨한 표정을 지으며 춘해를 따라 진광섭 앞까지 갔다. 춘해가 진광섭에게 그 동안 있었던 실적을 보고할 시간이 결국 도래한 것이다.

진광섭은 예상외로 나긋나긋하게 춘해 일행을 맞이했다. 선글라스 양쪽 꼬리는 오만하게 위로 향해 있는데,그 너머로 흰머리가 히끗히끗 보였다. 광섭이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는 그의 매서운 눈 때문이었다. 부하들 사이에선 진광섭의 서슬 퍼런 눈빛에 여자 몇이 감전사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지만 광섭은 그런 소문을 일축하고 있었다. 광섭의 부인이 딸을 낳자마자 죽었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17일부터 브렌치 3이 깨진 것입니까?"
"미안하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소이다."
춘해는 광섭 앞에서 그저께 밤부터 있었던 일들을 조목조목 설명해 나갔다.
그날 아침 춘해는 서울의 연락을 받고 가나기원의 김준을 감시하러 갔다.
당시까지만 해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기 때문에 서울도 김준 문제를 처리하는 것에 많은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하여튼 그날 오전중에 김준은 은행에 들렸다. 뭔가 일이 안 풀렸는지 그는 하루종일 고민을 하는 듯했다. 오후가 되자 김준은 잠시 가나기원으로 돌아갔다. 10분후에 그는 빈손으로 나왔는데 이때 사뇨 나쓰에에게 야구장 입장표를 홈쇼핑 통신망을 통해 우송했던 것으로 보인다. 오후 5시경에 준은 도쿄돔으로 갔다. 이때 춘해는 그의 뒤쪽에 앉아있었는데 김준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잠시 후 퇴근한 나쓰에가 준을 만나러 왔다. 평일이었기 때문에 야구장 관객은 그리 많지 않았다....

보고가 끝나자 진광섭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갑자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뭐 그리 복잡해? 그러니까 송환 지시가 있은 이후로 오늘까지 모두 4차례나 그 놈을 놓쳤다는 거 아냐?"
진광섭이 대쪽같이 물어오자 춘해는 등골이 오싹했다. 식은땀이 났다.
"송환지시는...밤 11경에 있었습니다. 녀석이 방송국 리포터인 게이꼬를 만나러 미나미 주점안으로 들어갈 무렵인데..."
진광섭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안쪽 포켓에 손을 넣었다.
"아,화를 내서 미안하오. 게이꼬의 죽음이 이상하다고 했었나?"
진광섭은 포켓안에서 꺼낸 구강향수를 입안에 치익 뿌렸다. 박하향이 났다.
그는 씹어먹을 듯 입을 놀리고 있었다.
"게이꼬는 그만두고 사뇨 나쓰에가 궁금한데,그녀에 대해선 아는 게 있소?"
"없,없습니다. 아직 채 조사할 시간이..."
진광섭은 그럴줄 알았다는 미소를 흘린다. 진광섭은 책상에서 일어났다.
그런 뒤 사무실 안을 둘러보며 손뼉을 딱딱 쳤다. 이미 7명의 전산요원들은 서울에서 공수해온 노트북 컴퓨터를 밴케이블로 연결한 뒤 작업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봅시다. 전산팀은 24시간 내에 일본통신망을 확보하시오. 김준이 관련된 인덱스가 있다면 모조리 뒤집어 놓으란 말이요! 그리고 그 자식이 놀고 간 흔적이 있다면 끝까지 추적하시오. 그 놈의 작업 스타일을 24시간 내에 파악하란 말이요. 아시겠소?"
그런 뒤 진광섭은 자신이 깔고 앉았던 책상위의 서류를 손으로 집더니 그것을 응시하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사뇨 나쓰에는 임소봉 자네가 확보하게. 김영진씨가 임소봉을 지원해 주었으면 좋겠소. 아참 나쓰에에게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여동생은 이상운이 확보하면 좋겠군. 상운이완 오랜만에 같이 뛰는 건가. 요즘도 땅바닥에 헤딩하고 다니나? 자넨 여잘 너무 밝혀서 탈이야. 하기야 자넨 버벅기는게 특기지. 황영달 자네는 가나기원에서 탐문수사를 시작해보게,그리고... 누구야 떠드는 게,엉? 김팔봉이 자네 셔트 내리지 못하겠나? 자네 말야,계속 그런식으로 나오면... 아냐 그만하지. 김팔봉이 넌 경시청에 가 있게. 알겠나?"
요원들은 겁먹은 표정으로 진광섭의 선글라스를 응시했다. 이상하게 선글라스가 조명빛을 반사하지 않는다.
"그리고 김우종이는 제일그룹 일본지사에 박혀 있어. 정해도 넌 사뇨 나쓰에의 셀시오 자가용을 수배하고. 김팔봉이 넌 정해도를 도와주라구. 경시청에서 일본어를 연습한다고 깝죽대지 말고 말야,알았나?"
김팔봉이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면서 임춘해는 입안이 바짝 타올랐다. 광섭이가 자신에게는 좀처럼 임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춘해는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난 어떻게 하면 좋겠소? 나도 뭔가 해야 할게 있을 거 같은데..."

진광섭은 사람을 돌리는 스타일이 아니다. 사리분별이 정확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아까 성질을 부리긴 했지만 춘해는 자신과 동갑내기 동료였다.
"아...춘해씨는 TV도쿄를 가보시오. 혹 죽은 후루겔스 게이꼬의 동료들중에 김준을 아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까 말이요."
그런 다음에 진광섭은 다시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천천히 시작해 봅시다. 다들 덜럴덜렁 뛰어 다닌 뒤 오후 7시 까지 보고서를 제출하시오, 아시겠소?"
덜렁덜렁이란 남자의 성기를 말하는 게다. 광섭의 유머는 재미없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중 덜렁덜렁은 가히 압권이었지만 이 말만 나오면 부하들이 실없이 웃음을 터트리는 게다. 임춘해도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셔트 내린 뒤 뒤늦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요원이 있으면...한강 다리에서부터 버벅 기어올 각오를 하시오. 자 그럼 시작합시다."
지루한 커피 타임은 끝났다. 이날 아침 7시 정각. 안기부 최고의 팀워크를 자랑하는 진광섭 팀이 작업을 개시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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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뇨 사즈메. 사즈메라는 이름보다는 사유리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좋아하는 방년 18세의 소녀.
사유리라는 이름은 어감상으로도 부드럽다. 하지만 언니는 반드시 사즈메라는 이름으로 부르곤 한다.
오늘도 그 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사즈메가 아침 일찍 세이신聖心 여고에 등교하기 전에 말이다. 사즈메는 히풋 웃으며 전화를 받았다. 창 밖에선 풋풋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즈메는 창밖을 응시하며 통화를 계속했다.
이제 봄이야...
불현듯 사즈메의 뇌리에 아련하게 봄 빛깔이 퍼져 나갔다. 통화가 끝나자 사즈메는 세라복형의 교복을 마저 입었다. 가슴이 타이트하게 사즈메의 교복 상의에 알맞게 달라붙는다.
난 요즘 완전히 지쳐 있단 말야...
사즈메는 금년만 넘기면 성인이 될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더 빨리 올지 모른다.
사즈메는 교복 상의 아래로 귀신같이 페이저(삐삐)를 집어넣었다. 이쯤 되면 언니가 원하건 원하지 않든 만반의 준비가 되는 게다. 사즈메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을 불끈 쥐었다.
오늘은 어쩐지 좋은 일이 있을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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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야시는 욕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쳐 진 이웃집을 바라보았다. 이즈의 호랑이 할멈이 오늘 아침에도 보이지 않았다. 벌써 2주일 째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아침마다 저쪽 창문에서 자신을 향해 코를 풀던 할머니였는데.
고바야시는 토토 스위치를 눌렀다. 시원했다. 아내가 출근준비를 하느라 부산하게 거실에서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고바야시가 좌변기에 허리를 일으켰을때는 가볍게 천둥이 울려는지 거울이 고바야시의 눈앞에서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제 밤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봄비치곤 상당히 길게 내려질 것 같다.
고바야시는 샤워를 하기 시작했다. 샤워를 끝낸 뒤 고바야시는 타월을 꺼내 들었다. 그때 이웃집에서 가느다란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고바야시는 고개를 쳐들고 욕실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넛집에서 누군가가 울고 있었는데,분명히...
후꾸오 하야시의 울음소리였다.
하지만 만화가인 가미야 고바야시는 하야시의 울음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이날 오후 2시가 원고 마감 시간이었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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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벅지에서 심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다. 잠에서 방금 깨어난 김준은 자신의 허벅지를 내려다보았다. 붕대로 감겨 있다. 붕대 밖으론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준은 방안을 살펴보았다. 흔히 볼 수 있는 일본의 어느 별장인것 같았다.
침실 유리창으론 빗방울이 더덕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있다.
준은 침대위에 누워있는 자신의 몸을 다시 한번 내려다보았다. 온몸에서 무슨 마취제라도 맞은 듯 느릿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딘가에서 보글보글 물이 끓는 소리도 들려온다. 출입문 옆에 놓여 있는 필립스 원두커피제조기였다. 준은 원두커피제조기를 응시하다가 무심히 침대 옆에 있는 사이드 탁자로 시선이 갔다. 메모지가 놓여있다.

-- 저 출근해야 되거든요. 여기서 도쿄까지는 한시간 거리입니다. 사뇨 나쓰에가 메모 남깁니다... --

준은 간신히 왼팔을 들어올려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초침이 오후 2시 25분을 지나고 있다. 시간을 확인한 뒤에 준은 다시 한번 안간힘을 써 보았다.
하지만 아직도 영 마음 대로 되지 않는다. 몇 차례 시도를 한 끝에야 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수 있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침대 뒤편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하이. 사뇨 사즈메입니다. 하지만 사유리라 불러주세요 아저씨."
준은 깜짝 놀래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뇨 사즈메...아니 사유리가 교복차림으로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 그런 사유리의 눈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는데, 그녀의 소니 워크맨 해드폰에서는 뽕짝뽕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
김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사유리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허벅지에서는 통증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사유리는 히풋 미소를 흘리며 입을 열었다.
"무쓰를 얼마나 많이 바르세요?"
준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고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유리는 토라진 표정으로 준의 머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 머린 여간 정성이 아닌데요?"
이번에는 준의 머리를 가까이 들여다보는 척하기 위해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이는 사유리. 교복치마 자락이 가볍게 살랑거린다. 사유리는 짓궂게 말했다.
"지금도 철사처럼 뻣뻣하군요 이 머리카락은..."

으음. 아저씨라니.

사유리의 호흡소리가 가깝게 들려 오자 김준은 얼굴이 빨개졌다. 나쓰에의 여동생인 것 같다. 생김새가 비슷하다. 하지만 사유리와 나쓰에는 전혀 성격이 달라 보였다. 고개를 숙인 채 현미경을 보듯 준의 머리칼을 관찰하고 있으니
말이다. 저돌적인 게 이 소녀의 특징인가 보다.
"아직 아마추어이지만 말이죠. 다시 한번 주사를 놓아 드릴까요?"
사유리는 그렇게 말한 뒤 턱짓으로 주사기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사이드 탁자 위에는 메모지외에도 주사기가 몇개 놓여있다.
"적당한 마취제를 구할수가 없어서 에테르를 사용할까 했는데,언니가 토끼가 아니래요. 다친 사람은 남자,아니 아저씨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급하게 마취제를 구해왔어요. 효과는 꽤 있었던 걸로 아는 데..."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의사인가...? 사유리 양은?"
사유리는 히풋 미소를 흘렸다. 귀여운 미소다.
"아뇨. 흐...세이신 고교의 간호사 취업반입니다. 공부를 못하거든요. 그렇다고 무시하진 마세요..."
사유리는 해드폰을 귀에서 빼며 말했다.
"미스 저팬에 나가라면 언제라도 자신이 있으니까요. 진심이죠."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그 자리에서 몸을 한바퀴 돌렸다. 미끈하게 빠진 사유리의 몸매가 한눈에 다가온다. 사유리는 워크맨과 함께 삐삐를 허리뒤에 차고 있었다.
준은 비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런가? 그럼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심사위원을 하고 싶은데 사유리양."
사유리는 웃었다. 소리를 내지 않는 웃음이다. 준 역시 미소로 응답을 했지만 실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마취제를 투여했던 것일까. 온몸이 무겁다. 이러다가 몸이 엉망이 되는 게 아닐까.
아니 지금은 이따위 생각을 할 시간이 아니다. 준은 자신의 노트북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트북은 출입문 옆에 놓여 있다. 준은 손으로 노트북을 가리켰다.

별안간 사유리의 얼굴표정은 딱딱하게 긴장되었다. 힘겹게 사유리는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침에 전화로 나쓰에가 무조건 아저씨를 도와주라고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사유리는 힐끔 눈치를 보면서 원두커피제조기 옆에 놓여있는 노트북을 집었다. 사유리의 손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노트북을 두들겨 본 게 들통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사유리는 노트북을 집어들다가 무심코 말했다. 이까짓 가지고 용기를 잃을 사유리는 아니었다. 할 말은 하는 게다.
"아저씨는 집 잃은 개처럼 가련해요. 다리는 언제 다치신 거죠...?"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다른 쪽 손에 쥐고 있는 총알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이 총알 빼느라구 저 사실...눈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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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25분. 임춘해는 후루겔스 게이꼬의 뉴스보도를 반복해서 모니터하고 있다. 별다르게 의문 나는 내용은 없다. 곤바야 제작 1부장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아 마침 있군요. 이겁니다. 이 디스켓을 그날 게이꼬양이 가지고 왔었죠. 김준이란 기자분도 이 디스켓을 찾던 것 같던데요."
곤바야는 오니쓰라 경감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임춘해에게 협조를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디스켓이 어째서 문제가 있는 것일까.
곤바야는 식은 땀이 났다.
"혹시 마끼의 주소를 알 수 있을까요?"
춘해는 곤바야가 내민 디스켓을 지퍼백(비닐봉투의 일종)에 집어넣으며 물었다.
"글쎄요. 그건 보도부 기자들에게 물어보면 아마도... 필요하다면 알아 드리겠습니다만."
"그럼 명함에 있는 핸드폰 번호로 연락을 주시겠습니까? 이제 제가 할 일은 다 끝난 것 같군요."
"가능하다면 협조해 드리죠. 헌데 무슨 일로 구보 마끼 양의 주소가 필요한지.. 점점 이상한 생각이 드는 군요. 그 여잔 이미 자살한지가..."
이때 별안간 춘해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상운이었다. 이상운은 세이신 여고에서 비를 맞으며 사즈메를 기다리다가 그녀가 오전 수업중에 조퇴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때문에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을 받으며 상운은 춘해에게 전화를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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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에는 오늘 하루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앞으로 3일안에 고마쓰小松 강철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작업을 끝내야 했다. 한번은 버그가 발생한 바람에, 또 한번은 사용상의 결함으로 인해 클레임이 걸려왔다. 이때문에 나쓰에는 오늘 아침부터 과장에게 불려가서 호되게 질타를 받았다. 더구나 어제 밤에 봤던 체로키 지프차가 도로 저쪽 구석에서 한나절동안 주차해 있다. 어제 그 대사관 남자가 분명했다. 그는 나쓰에가 퇴근하기를 기다린다는 듯 지프차 옆에 서서 계속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다.

나쓰에는 창 밖을 내다보며 몇마디 알고 있는 한국어를 주절주절 반복해 보았다. 강도입니다... 남대문 시장에 가고 싶습니다... 어머...깍아주세요.
한국대사관에 전화를 해 본다면 무슨 일인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을 게다.
그렇지만 그녀는 왠지 겁이 났다. 김준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지금쯤이면 사즈메가 모든 걸 잘 해가고 있는 걸까.
아니 걱정하지 말자. 지금 당장은 이 지겨운 고마쓰건부터 처리하는 거야.
나쓰에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다시금 머리속은 김준의 대한 생각으로 돌아간다. 도와주고 싶었다. 도와줄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서류상자를 열고 휴가청원서를 내려다보았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그를 얼마나 안다고...

제대로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젠 결정할 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실상 나쓰에는 어젯밤의 그 대사관에서 왔다는 김영진에게 화가 나 있었다.
무식한 놈 같으니라구.
할수만 있으면 문짝 값이라도 배상 받을 생각이야 난.
마침내 나쓰에는 결심을 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휴가 청원서를 집어 들었다. 자연스럽게 그녀의 4번째 손가락에서 황금색의 엠버(호박)가 빛을 반짝였다. 그녀가 작년 여름에 <오피스걸 투어>때 들렸던 홍콩에서 큰맘 먹고 구입한 반지였다.
나쓰에는 과장에게 걸어갔다. 과장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쓰에의 휴가청원서에 사인을 했다.
"나쓰에씨. 벌써부터 3일이나 찾아먹다니 말야. 이제 겨우 초봄인데..."
그렇게 말하다가 과장은 얼굴 표정을 바꾸었다. 나쓰에가 자신의 말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열심히 해 오시오... 하지만 휴가 끝난 뒤에도 클레임이 걸리면 모든 건 나쓰에양이 책임져야 할 거요. 이번 휴가는 이 일때문에 신청한거니까 봐주는 것이오만."
"하이.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론 이런 일 없을 겁니다."
그렇게 말한 뒤 나쓰에는 일부로 헤프게 아양을 떨며 인사를 했다. 그러자 그녀의 스퀘어 네크라인 블랙원피스에서 은은하게 향수냄새가 풍겨 나왔다. 원피스 아래쪽은 미니 형태였는데,레이어드 스타일로 걸쳐입은 치렁치렁한 겉옷때문에 그녀의 아름다운 각선미는 보이지 않았다.
색상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검은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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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한일수 대리는 대한항공편을 이용 나리타 공항에 입국하고 있었다.
제일그룹 도쿄 사업본부에서 한현희가 마중나와 있다. 일본물이 좋기 좋은가 보다.
현희는 무척 컬러플한 투피스 정장으로 한대리를 기다리고 있다. 논노 잡지에서 본적이 있을지 모른다. 저런 패션은 말이야. 일수는 헤프게 웃으며 동생의 손을 잡았다.
"너 많이 예뻐졌다. 달라져도 이건 너무 다른데?"
"지시는 받았습니다. 부장님이 직접 팩스를 보내왔더군요."
"그래? 고부장님이 벌써 메시지를 보냈구나. 근데 이거 난 일본말을 몰라서리... 그럼 사업본부로 갈까?"
"아뇨 갈 필요 없습니다. 아침부터 안기부에서 한사람 나와 있습니다. 전 휴가를 받은 걸루 하고 점심시간에 빠져 나온 거예요 오빠."
"그래? 염병할 안기부,눈치하난 빠르군. 그래 뭔가 찾아보았니?"

한대리는 현희가 가지고 온 지프에 올라탔다. 계열사인 제일자동차가 생산한 4륜 구동의 뉴로맨서 지프다. 일본에까지 어떻게 공수해왔을까.
"혹시나 해서 김준의 ID가 남아있는 통신망을 오전중에 찾아보았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ID가 남아 있다니?"
"각 통신망을 연결해 인덱스파일에 기록된걸 검색해 본 겁니다..."
일수는 현희의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의심스런 눈으로 차안을 살펴보고 있었다. 동생이 요즘은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 궁금했다.
일본남자는 아니겠지...
"간단히 설명해봐. 이 오빠는 뛰는 거 밖에 모르잖아."
현희는 힐끔 한일수를 응시했다. 철없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로그인login은 접속을 한다는 뜻입니다. 이때부터 로그아웃logout할 때 까지의 움직임이 인덱스 DB(데이터베이스)에 자동으로 남아지게 됩니다."
"어. 그래...?"
"처음에는 유료업자들이 시작한 거죠. 사용료를 산출하기 위해서요."
"그럼 ID를 심는 다는 게 뭐야? 본사는 이 문제로 시끄럽던데..."
"ID를 심는다는 건 접속에 이용한 ID를 버리고 중간에 다른 ID를 사용했다는 뜻일 겁니다."
일수는 멀뚱멀뚱한 눈으로 현희를 바라보았다. 현희 이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 라는 심산인 게다.

"아 이런 뜻이에요 오빠. 만약에 말이죠. 제가 case란 ID를 이용해 통신망에 접속을 했다고 합시다. 제가 만약 이름난 해커라면 제 ID로는 접속을 시도하지 않습니다. 당연하지요 금방 추적당하게 되니까요. 그러니까 전 항상 타인의 ID를 사용하거나,아니면 ID를 사용하지 않고 침투합니다. 하지만 전 저를 알려야 합니다. 일을 완벽하게 완수했으면 곧 내 정체를 밝히고 싶겠죠. 그래야만 제 주가가 유지될수 있을테니까요. 그러니까 빠져나오기 전에 훔친 ID인 case를 기술적으로 제 진짜 ID로 바꾸는 작업을 하는 겁니다. <태양>이나 <ガイト(가이드)>등의 해커들이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하죠. 침투할 때는 타인의 ID로 침투하지만요,나오기 전에 자신의 ID를 심어 놓는 해커들인 겁니다."

일수는 한국에서 통신을 해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안시Ansi와는 다른 것 같다. 안시는 지극히 간단한 눈속임에 불과하다. 현희의 이야기 뜻은 접속에 이용한 ID를 표면적인 것 뿐 만 아니라 속성까지 바꾼다는 뜻일 게다.
일수는 현희의 말을 새겨들으면서 다시 그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보았다.
먼저 로그인 상태다. 이 상태에서 일수는 case란 ID의 활동을 중지시키고 동급해커라는 ID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때부터 동급해커가 활동한 것으로 기록이 시작된다. 그런 다음에 작업을 끝낸 뒤 다시 case란 이름으로 돌아온 뒤 로그아웃을 하면 어떡케 될까. 중간에 case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고 동급해커라는 ID가 활동을 한 것으로 기록이 남게 될 것이다. 이때문에 컴퓨터가 인덱스 작성에 심각한 곤란을 느끼게 될것이다.

하지만 몇 번 고쳐 생각해보아도 불가능해 보였다. 일수는 히쭉 웃었다.
"난 안되겠는데. 그게 가능한 이야기야?"
현희는 처음으로 밝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할 수 있어요 오빠. 제 ID를 버리고 오빠 이름을 사용할 수 있죠."
그렇게 말하고 난 뒤 한현희는 핸드백에서 프린팅 용지 한장을 꺼내 일수에게 내밀었다. 곧바로 지프차의 실내등이 켜졌다. 일수는 현희가 건네준 용지를 손에 쥐고 뚫어지게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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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名 Glory1 Login at 無限 Txt/2938 ### 東京 2938
.............................................................
index name 接觸/回 index 接觸時間/分
陸上 7部 2 arm 7 12:10
記錄室 1 rxt 01:02
航空部 1 fxs 45:01
防衛廳 1部 1 dep 01:01
調査部 ??? res ??## 東急Hack ##??
靑年 3聯合 1 bud3 02:10
彈藥庫 0 boll/chatin 00:00
安全局 5 bis 21:34
女性 1局 1 syster 1 09:19
建國記念同志會 1 ourland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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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수는 프린팅 용지를 읽는 뒤 이윽고 입을 열었다.
"믿을 수 없군. 이건 어느 단말기의 인덱스 기록이지?"
"방위청 컴퓨터중 하나입니다. 오빠."
일수는 눈이 뒤집어졌다.
"뭐? 방위청이라고?"
"네. 혹시나 해서 오전중에 방위청 컴퓨터에 들어가 보았죠. 그런데 방위청에도 동급해커가 침투한 흔적이 있더군요."

이해할 수가 없다. 놈은 무슨 이유로 일본 방위청까지 침입해 갔을까.

한일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때문에 가슴을 억지로 진정시키고 다시 인덱스 기록을 살펴보았다. 접속에 이용된 아이디는 글로리1이라는 ID였고,호스트는 무한無限이다.
첫째줄을 읽어보면 글로리1이 육상 7부에서 12분 10초 동안 접속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아래쪽 기록실에 접촉한 걸 보자. 한차례 접촉에 1분 2초간 접촉 했다는 게 기록돼 있다. 그런데 좀 더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별안간 불쑥 <동급해커>라는 ID가 떠 올라와 있다. 그렇지만 접촉한 횟수와 접촉한 시간은 알 수가 없다. 인덱스가 기록상에 착오를 불러 일으켰거나,글로리1에 의해 ID가 동급해커로 바뀐 뒤 점유시간이 모조리 해킹되었다는 뜻일 게다.

한일수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냐. 이건 김준이 한 게 아냐. 다른 녀석이 한거라구..."
현희는 일수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에 스테인리스처럼 차갑게 말했다.
"그래요. 김준이 한 일이 아닙니다. 글로리1이라는 해커가 방위청 컴퓨터에 침투한 뒤 동급해커라는 ID를 그곳에 심어 놓은 겁니다. 그 때문에 인덱스 기록상에 별안간 <동급해커>라는 단어가 떠있는 거죠."
"언제 건데 그래? 이 방위청 인덱스는 얼마나 오래된 기록이지?"
현희는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오빠. 놀라지 마세요. 그건 4시간 전 기록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현희의 입술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현희는 알고 있었다.
글로리1은 제일그룹의 일본지사가 소유한 <방위청 방문용 ID>라는 것을.
바로 한현희 자신도 가끔가다 사용하는 ID였던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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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뇨 나쓰에의 엑셀런트 어드벤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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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아타미熱海 해안가 별장 안에서 김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다. 김준이 접속한 통신망은 니프티서브. 준은 니프티서브사에 합법적으로 kimjun이란 ID를 등록해 놓고 있었다.
니프티서브사 메일박스에는 그 동안 날아온 메일이 없었다. 그때문에 김준의 눈은 실망으로 가득차 있었다. 허벅지에서는 아직도 통증이 계속되고 있었다.
준은 로그아웃을 한 뒤 곧바로 jsko라는 ID로 재접속을 시도했다. jsko는 고종수가 인터넷망에 등록시킨 그의 개인 ID였지만 김준이 간혹가다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인터넷 망에도 접수된 메일이 없다. 준이 위기에 빠졌을때는 고종수가 자신의 아이디 jsko 앞으로 비밀리에 전자메일을 보내왔는데 말이다.
준은 인터넷 망을 빠져 나오려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인덱스 기록을 검색해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2시간 전에 누군가가 들어와서 마음껏 헤집고 다닌 흔적이 기록돼 있다. 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고종수의 이 ID는 김준과 종수 외에는 암호를 아는 자가 없는데.
누굴까...
준은 인터넷에서 이번에는 피시밴사로 접속을 시도했다. 이번에 사용한 아이디는 Glory12. 글로리는 제일그룹 일본사업본부가 가지고 있는 통신망 접속용 ID였다.
초창기에는 jeill이라는 아이디를 쓰려고 했으나 지나치게 한국 냄새가 난다고 해서 사업본부장이 강제적으로 아이디를 바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글로리>와 <제일>이라는 아이디가 일본 각 통신 망에 등록되어 있다.
준은 피시밴 안에서 곧바로 해커 포럼으로 이동을 한뒤 사설비비에스 명단을 검색해 보았다. 마침 적당한 비비에스의 전화번호가 곧장 나타났다.

>> Sec BBS --- 各種 代行業 專門 --- 東京 3928-3031

세크 BBS는 사설 BBS중에서 가장 덩치가 큰 단체였다. 주로 인터넷 정보를 퍼와서 판매하는 게시판이었는데 나중에는 전문 심부름센터로 발전해갔다.
현재는 세크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직업 프로그래머만 해도 300명에 달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준은 피시밴사에서 로그아웃을 끝낸 뒤 곧바로 세크 BBS로 접속을 시도했다.
세크의 초기화면은 심부름센터 기능이라 그런지 아주 간단했다.

>> 귀하의 지불 방법은? 1 card 2 giro 3 cash
>> 귀하가 필요한 정보는?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준은 주문표를 응시하다가 문득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거실에서 전화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는가 했더니 사유리가 전화를 받는것 같았다.
나쓰에가 전화를 걸어온 것일까...
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사이드 탁자에 올려놓고 침대아래로 오른쪽 다리를 천천히 이동시켜 보았다. 그러다가 다시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허벅지에서 아직 고통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준은 한숨을 쉬면서 손목시계를 보았다.
5시 10분전. 피곤했는지 머리가 아파왔다. 도데체 얼마나 많은 마취제를 나에게 투여했던 것일까. 아직도 온 몸이 지끈거리고 무겁다.
준은 다시 노트북의 액정화면을 응시했다. 그런 뒤 자판 위에다 오른손을 올려 놓고 한손으로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1. 지하철 사고 사례
2. 지하철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해커와 작업 가능한 해커 명단
3. 구보 마끼 준사히에 대한 전체적인 정보

막상 필요한 정보를 타이핑했지만,김준은 대금 지불방법 문제로 고심이 많았다.
지갑을 꺼내 펼쳐 보았다. 국제면허증과 가짜로 만든 기자신분증. 2장의 증권카드와 12장의 신용카드는 다시 조사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기껏해야 8천엔이던가...
푼돈이 들어있다.
준은 대금지불 방법을 카드로 선택했다. 최소한 이럴 경우에는 카드로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다는 사실만 미리 밝혀두면 정보조사를 시작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야 그때가면 어떻게든 구해볼수 있을 것이다.
준은 지불방법을 카드로 선택한 뒤 엔터 키를 눌렀다. 그러자 잠시 웅웅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메시지가 불쑥 떠올랐다.

>> 귀하의 정보사용료는 120,000엔 입니다.
>> 귀하가 주문한 정보는 6시간 내에 준비 가능합니다.
>> 6시간 후 재접속을 해 주십시오.

그런 뒤 자동으로 접속이 끊긴다. 경험없이 세크 BBS에 접속을 하는 이용자라면 기분이 나쁠 정도로 일방적으로 접속을 끊는 것이다. 그만큼 고객이 폭주하는 지 모른다.
접속을 끝낸 뒤 준은 다시 인터넷 호스트로 들어가 보았다. 역시 전자메일은 없다. 어떻게 된 걸까. 가끔가다 전자메일로 아내 자랑을 하던 팔불출이 아쉬울 때는 연락조차 없는 게다. 지금쯤이면 한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종수 이 자식 아무래도 날 너무 부려먹는단 말야...
인터넷에서 빠져나오다가 김준은 무심코 인터넷에 접속한 전체 이용자수를 확인해 보았다.
1996년 3월 21일 오후 4시 59분 44초 현재. 세계각국 인터넷 호스트에 접속을 하고 있는 총이용자의 수는 34,729,722명에 달하고 있었다.

준이 인터넷 호스트에서 접속을 끊는 순간 사유리가 침실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아저씨 나 어때요? 이거 나쓰에 언니 옷인데...아참 언니는 좀 늦을 거래요. 대사관인가 뭔가에서 자길 쫓는다고 하네요. 전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요."
준은 사유리를 바라보며 비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유리는 교복을 벗어던지고 배꼽 티를 입은 상태였다. 배꼽이 살짝 보이는 티셔츠. 하체는 알몸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진바지. 아마 사유리가 여기서 조금만 더 노출에 신경을 썼으면,김준의 머리는 맥가이버 바이러스에 걸린 것처럼 모든 사고능력에 장애가 발생했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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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사 진광섭은 보고서를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이미 보고서를 제출한 이상운은 광섭의 옆에 앉아 그가 구술하는 것을 메모하고 있었다. 보고서가 잘못되면 족족 짜르고 다시 일을 시키고 있다. 상운은 그런 광섭의 모습에 식은땀이 났다.
자동차 창밖으로는 빗방울이 굵어지고 있었다. 상운은 광섭의 핸드폰 통화를 들으면서 차창 밖 거리 상황을 체크했다. 퇴근길 러시아워가 시작될 조짐이다.
상운은 손목시계를 보았다. 오후 5시 정각. 사뇨 나쓰에가 퇴근을 하려면 아직 한시간가량이 남아 있었다. 나쓰에가 속아줄까...상운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아 임대 헬기는 어디에 있나?"
갑자기 진광섭은 통화를 끝낸 뒤 상운에게 물어왔다. 상운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르켰다. 자가용 앞 유리창 너머로 55층의 최첨단 인텔리전스 빌딩인 저팬 인포메이션 센터가 올려다 보였다. 헬기장은 55층 꼭대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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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 1시간전이었지만 사뇨 나쓰에는 서둘러 디스켓과 노트북을 박스에 집어 넣고 있었다. 아무래도 불안했다. 지금 퇴근을 서두르는 게 좋을것 같았다.
체로키 지프의 사내는 자신이 퇴근하기를 기다리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쪽에서 선수를 치는 게 유리할 것이다. 아마 미행해 오겠지.
나쓰에는 동료들에게 적당히 둘러 댄뒤 과장앞으로 걸어갔다. 과장은 못마땅하게 나쓰에의 5시 퇴근을 허락했다. 3일 휴가에 1시간 일찍 퇴근이라니. 김준만 아니라면 지금 이 순간은 분명 멋진 순간일텐데.
나쓰에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상쪽으로 걸어가 이즈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 옆에 놓여 있는 20인치 소니 모니터에는 도쿄도 도로망이 검색되어 있었다.
나쓰에가 점심식사 시간에 달달 외우다시피한 도로망이다.

나쓰에의 셀시오 자동차가 빌딩 지하주차장에서 스타트를 하는 그 시각.
김영진은 체로키의 운전석에 앉아 추적장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발광체가 처음으로 깜박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하자 영진은 자신의 쿼츠손목시계를 보았다.
역시 겁을 먹은 것일까? 예상보다 1시간 일찍 퇴근을 서두르고 있다.
영진은 싸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람보 원. 나쓰에가 방금 출발했다. 예상대로 C 출구로 빠져 나갔소."
"방금 떠올랐습니다. 람보 원. 아무래도 릿카 미술관 방향인것 같은데..."
응답을 한 요원은 윤영범이다. 윤영범의 자동차는 체로키와는 다르게 빌딩 뒤편 도로에 숨어 있었다. 그러니까 곧장 셀시오 자동차가 도로로 올라오는 모습이 윤영범의 눈에 포착된 것이다.
이날 동원된 자동차는 모두 3대였다. 각 자동차에는 도쿄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춘해의 부하들이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윤영범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셀시오를 뒤따라 미행하면서 힐끔 백미러를 응시했다. 바로 뒤에서 람보 쓰리가 멍청하게 뒤따라오고 있다.
"람보 쓰리. 뭐하나? 이 밥통아. 여긴 내가 맡을 테니까 넌 요요끼 공원으로 달려가란 말야!"
그러자 람보 쓰리인 오종식의 음성이 느리게 무전기를 타고 넘어왔다.
"거 대게 그러네.... 지금 이시간이면 요요끼 공원이 영...헌데 영진형은 어디에 있는 거요. 도대체?"
오종식은 영진을 호출하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영진의 체로키 지프차가 아슬아슬하게 두대의 버스 사이로 빠져나오더니,곧장 긴좌쪽으로 방향을 꺾고 있었다.

체로키를 운전하고 있는 영진의 표정은 아직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새벽부터 나쓰에가 체로키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문제로 체로키에 부착된 추적장치를 분해해서 다른 차에다 옮기려는 작업이 있었다. 하지만 작업 도중에 서너명이 기술부족으로 나가 자빠졌다. 체로키 지붕에 보이지 않게 설치된 추적용 레이다를 다른 자동차로 온전하게 이동시키는 게 불가능했던 게다.
이젠 어쩔수가 없다. 나쓰에는 이미 자신이 미행 당하는 걸 알고 있을 게다.
밀어 부칠 수밖에. 하지만 러시아워 시간에 이런 지겨운 레이스를 시작하다니.
영진은 전방을 주시하다가 다시 상자형의 추적장치를 응시했다. 전파장애 때문인지 붉은 색 불이 깜박이다가도 눈앞에서 사라진다. 아무래도 제국극장으로 방향을 잡은 것 같다. 그쪽이라면 사방팔방으로 이동할 수는 있는 로타리가 있다.
영진은 신경질적으로 크락숀을 누르며 서행하는 자동차들 사이로 끼여들었다.

나쓰에는 교통체증때문에 숨이 막혀 왔다. 벌써 20분째 릿카 미술관 앞 도로에서 꼼짝을 하지 못한다. 더구나 어제오후부터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사정이 평소와는 다르게 전혀 소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러다간 어떻게 약속 시간까지 상지대학까지 갈 수 있을까.
나쓰에는 점심시간에 외우다시피 한 도쿄 지리를 다시 머리속에 떠 올려보았다.
체로키 지프는 근처 어딘가에서 비밀리에 미행을 해올 것이다. 최소한 상지대학에 도착할 때까지는 눈치를 채게 하면 안된다. 나쓰에는 자신의 어설픈 계획을 체로키 일당이 알아차릴까봐 은근히 겁이 났다.

체로키 지프의 김영진은 다시 빨간불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역시 추측대로 나쓰에의 셀시오는 제국극장 로타리로 이동을 하고 있다. 그런데 로타리 부근에서 갑자기 우측으로 방향을 튼다. 영진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전혀 예상 밖의 이동이다. 그쪽은 국립근대미술관 방향인데...
요요끼 공원에서 지금 대기하고 있을 람보 쓰리는 허탕을 친 것이다.
영진은 기가막히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오종식을 국립근대미술관으로 돌리기 위해 서둘러 무전기를 들었다.
그때 옆좌석에 앉아있던 임소봉이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국립근대미술관이 아니요. 산토리 미술관으로 돌리시요. 아무래도 그 여자 수상하구만..."
영진은 힐끔 임소봉을 쳐다보았다. 오늘 하루종일 같이 붙어다녔지만 처음으로 임소봉이 입을 열었던 게다. 영진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임소봉은 히쭉 웃으며 허공에다가 손가락으로 S자로 그렸다. 셀시오가 지그재그로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고보니 임소봉의 추리는 맞는 말이었다. 역시 독사 진광섭이 아끼는 부하라 하더니 문무가 겸비되 있다. 영진은 그런 임소봉을 바라보며 머리속에 산토리 미술관 부근을 떠올려 보았다. 근처에는 눈에 띄는 장소가 없었다. 상지대학이 있을 뿐이다. 그러고보니 상지 대학 뒤편으로는 고속도로가 연결되고 있다.
나쓰에는 어젯밤에 김준을 지방도시로 빼돌린게 분명했다. 점심에 주차장에 들어가 조사를 해 본 바 셀시오 자동차의 타이어 바퀴는 온통 진흙투성이었다.

상지대학의 이즈모는 기가 막혔다. 벌써 20분이나 지나고 있다. 다시 뒤를 돌아다보았다. 이즈모의 사브 자가용은 상지대학의 쌍둥이 건물 사이에 있는 좁은 주차장에 서 있다. 좌우로 건물이 있기 때문에 주차장이라기 보다는 골목같은 느낌이 드는 그런 장소다.
사브 자가용은 이즈모가 인턴생활을 시작하자,그의 형들이 융자형식으로 빌려준 돈으로 이즈모가 구입한 차였다. 이때문에 사브안에는 이즈모가 수집한 카 액세서리로 가득차 있었다. 더구나 카폰까지 달려있고,축구선수 노정윤의 사인이 그려진 축구공도 하나 뒷좌석에 놓여 있었다.
노정윤은 이즈메가 가장 좋아하는 운동선수였다.
어쨌든 이놈의 축구공이 몇 차례 문제를 일으키긴 했다. 간혹 카섹스 도중에 축구공이 난데없이 고무줄처럼 퉁겨 올라 이즈메의 얼굴을 찼던 것이다.
하지만 이즈모는 그런데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건 여자위에 올라간 상태에서,신경을 분산시키지 않고,조심스럽게 발끝으로 카스테레오의 녹음버튼을 누르는 일이었다. 그러고 난 뒤,여자의 귀에 입을 대고 허스키하게
속삭이는 것이다.
...흥분 해봐.... 난 신음소리가 좋아...
별다른 실수가 없는 한,파트너의 신음소리는 완벽하게 녹음되는 날이 많았다.
그렇게 녹음된 카세트에는 <카섹스 뮤직>이라는 라벨이 붙혀진 후 박스에 차곡차곡 보관이 되었다. 그런뒤 아침 저녁 출퇴근 시간에 그걸 듣는 것이다.
이즈모의 이 증세는 아무래도 좀 심각한 편이었다. 간호사들이 진단서를 떼어줄 정도로.
이즈모는 얼굴을 찡그렸다. 6시 30분에 만나 아타미 별장으로 가기로 했는데 나쓰에의 차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다. 누가 다쳤다고 하던데. 남자는 아니겠지.
이즈모는 쓴웃음을 지으며 캠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방금 캠퍼스를 가로질러 올라오는 셀시오 자가용 한대가 이즈모의 시야에 들어왔다.

김영진은 상지대학 후문쪽 도로에서 셀시오 자가용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영범이의 자동차가 나쓰에를 뒤따라 상지대학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급히 후문쪽으로 체로키를 몰고 왔는데 그 사이에 영범이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아무래도 예감이 좋지 않았다. 영진은 다시 추적장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발광체는 3분 정도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있다.
영진은 불안한 듯 옆좌석에 앉아있는 임소봉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전체적으로 홍금보처럼 둥글한 임소봉. 제법 점잔하게 보이지만 성격은 여간 깐깐해 보이지 않았다. 아마 머리회전도 좋을 것이다. 소봉이가 지시한대로 아까 상지대학쪽으로 3번 차를 미리 돌려놓은 덕분에 나쓰에를 놓치지 않았다. 최소한 지금까지는, 임소봉이가 추리한대로 나쓰에는 S자형으로 움직이고 있다. 도대체 김준을 어디에다 감추어 둔채 저러고 있을까.

윤영범은 셀시오가 골목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뒤에 차를 인도옆에 붙히고 셀시오가 다시 움직이길 기다렸다. 헌데 나쓰에는 셀시오에서 내려 왠 사내녀석을 만나고 있다. 나트륨등이 켜져 있기 때문에 윤영범은 그가 김준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식별하수 있었다. 5분이 지났을까. 빗방울이 점점 거칠어져가면서 시야가 정확하게 구분이 되지 않았다. 영범은 초초하게 나쓰에와 사내놈을 응시했다. 순간 별안간 나쓰에가 영범이 쪽으로 손가락질을 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미행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챈 건가?
영범은 씁쓰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동차를 스타트시켰다. 그런 뒤 쌍둥이 건물을 돌아가는 산책길로 자동차를 몰고 갔다. 영범이가 쌍둥이 건물을 한바퀴 돌아 뒤쪽 광장으로 나왔을 때는 막 셀시오가 주차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영범은 깜짝 놀랬다.
뭐야 이거? 아무것도 아니었나?
영범은 이상했다. 무슨 일로 상지대학안까지 들어왔다가 그냥 나가는 것일까.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도대체 감을 잡지 못하겠습니다. 여긴 람보 투. 모두 듣고 있습니까?"
김영진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을 했다.
"글쎄 여기선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람보원이 뒤따를 테니까 람보 투는 연금회관을,람보쓰리는 청산공원으로 이동하시오."
영진은 불안했다. 이러다간 김준이 있는 위치를 오늘중으론 파악하지 못할것 같았다. 아까부터 나쓰에의 셀시오는 계속 도쿄 외각을 돌고 있다. 마치 여우처럼.

엉망이었던 교통사정은 저녁 7시 30분을 넘어서자 시속 30Km까지 가능해 보였다.
천천히 자동차의 물결이 분산되고 있다. 영진은 계속 앞쪽에서 달려가는 셀시오를 응시하고 있었고,임소봉은 도쿄 도로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이제부터는 도로가 외각으로 거미줄처럼 퍼져나가기 때문에 셀시오가 어느 방향으로 갑자기 튀어 도망갈지는 소봉이도 추측을 못하는 것 같다. 잠시후면,아니 지금 갑자기 셀시오 자동차는 미행자를 따돌리기 위해 튀어 도망갈 것이다.
"어디 이거 더러워서 해 먹겠습니까? 그냥 잡아서 족쳐 봅시다."
영진은 별안간 화가 나서 그렇게 외쳤다. 해병 근성이 조용히 잠자다가도 별안간 튀어나오는 것이다. 영진이가 그렇게 말하자 소봉은 그제야 고개를 들고 영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영진은 무안했는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런뒤 눈을 가늘게 뜨고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셀시오의 운전석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둑컴컴해졌기 때문에 셀시오에 누가 타고 있는지 이제는 식별이 되지 않는다. 소나기는 점점 거친 빗방울로 바뀌어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영진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바로 뒤에서 따라 붙어 다니고 있는데도 셀시오가 서두르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나쓰에라면 체로키 지프차를 알아 보고 도망을 칠 판인데 말이다.
"안되겠습니다. 한번 따라 붙어 봅시다."
그렇게 말한 뒤 영진은 곧장 핸들을 꺽었다. 동시에 그의 발이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셀시오는 도쿄 대학 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위해 수도고속화 도로로 진입을 하고 있었다. 체로키가 갑자기 튀어나간 건 그 순간이었다. 어느새 체로키 지프는 셀시오를 추월하기 시작했다. 아슬아슬했다. 두 자동차는 서로 보디를 대고 달리기 시작했다. 임소봉도 뭔가 불안했는지 유리창을 내리고 셀시오 운전석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임소봉은 발작적으로 외쳤다.
"뭐야? 나쓰에가 아니잖아?"
어느새 임소봉은 영진의 무전기를 낚아채더니 정신없이 외치고 있었다.
"그 년이 상지대학서 차를 바꿔 탔다! 모두 내 말 듣고 있나,지금?"

이때 영진은 튕기듯 핸들을 풀어헤치고 있었다. 화가 났다. 미행이라는 방법을 선택하는게 아니었다. 그냥 잡아 들인뒤 족치면 김준의 행방을 알수 있었을텐데 이게 뭔가. 제기랄. 영진은 엑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차체가 둔탁하게 튕기며 속도를 내자 옆에 붙어서 달리던 셀시오 자가용은 뒤쪽으로 미끄러지듯 멀어져갔다.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 셀시오를 운전하고 있는 개자식을 잡아 족치자. 영진은 안전거리가 확보되었다고 생각이 들자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그런뒤 브레이크를 밝았다. 셀시오의 진행방향을 앞쪽에서 미리 막아 버린 것이다.
셀시오 자동차는 날카롭게 브레이크를 밟으며 급정거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임소봉이가 권총을 꺼내 들고 체로키 밖으로 튀어 나갔다.
"뭐,뭐야 당신들?"
이즈메는 더럭 겁을 먹고 임소봉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운전석 문이 열리는가 했더니 이즈메의 몸이 자동차 밖으로 끌려 나왔다.
"야 짜샤 뭘 겁을 먹고 쳐다 봐? 네 놈 차는 어딨어 엉? 빨랑 말 안할래?"
임소봉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이즈메의 뒷덜미를 잡고 질문을 퍼붓고 있었다. 헌데 임소봉의 이 말은 이즈메와 같은 일본인들은 알아 들을 수 없는 서울 표준말이었다. 이 때문에 이즈메는 영문을 모른채 임소봉과 영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소봉이는 다시 화가 났다. 그는 어느새 이즈메의 뒷덜미를 잡은 상태에서 권총을 홀스트에 돌려넣더니,빈손으로 이즈메의 하체 중요부분을 와락 거머 쥐었다. 이건 임소봉이가 즐겨 사용하는 코브라 트위스트. 서 있는 상태에서 구사하기 때문에 폼이 나지 않았지만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이즈메는 켁켁 거리며 자신의 자가용 넘버를 말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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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해는 방송국을 떠나온 뒤 지하철사고 현장조사를 다시 하고 있었다.
춘해가 집중적으로 조사하는 것은 페쇄카메라의 움직임이었다. 페쇄카메라는 소형의 구동모터가 뒤쪽에 달려있는것으로 보아 좌우로 움직이며 피사체를 찾아다닐수 있다. 춘해는 몇몇 유능한 해커들이 폐쇄회로 감시망을 악용한다는 소문을 들은적 있었지만 그게 현실적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영화같은 이야기가 아닌가.
춘해는 이번에는 게이꼬의 몸이 산산조각 났던 지하철 터널쪽으로 걸어 갔다.
춘해의 뇌리에 별안간 일본속담이 떠올랐다.
犬も 步けは 棒にあたね...
(개도 쏘다니면 몽둥이에 맞는다던데...)
후루겔스 게이꼬가 불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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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시각. 오종식의 람보 쓰리 요원들은 허탈했다. 람보 원이 나쓰에가 차를 바꾸어 타고 도망갔다는 정보와 자동차 넘버를 알려왔지만 이젠 추격이고 나발이고 일할 맛이 나지 않았다. 설상가상 이쪽 도로상황은 아직도 교통체증이 게속되고 있었다. 비까지 내리는 날이었으니 직장인들이 일찍 퇴근을 서두는 것이다. 유일하게 시원스럽게 달리수 있는 도로는 건너편 수도 고속화도로 상단부밖에 없었다.
오종식은 옆좌석에 앉아있는 작은 체구의 동료에게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다시 상지대학쪽으로 돌아가 볼까요? 혹시 아직도...."
그러자 그 작은 체구의 사내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앞차는 뭐요? 번호판이 방금전 들은 그 번호 아닙니까?"
오종식은 깜짝 놀란얼굴로 고개를 돌려 전방을 주시했다.

東京 70 あ 29-30

종식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바로 방금전 임소봉이가 알려온 자동차 번호판이 행운의 복권처럼 자기 앞에 펼쳐진 것이다. 이게 무슨 기적인가.
오종식은 급히 무전기를 입에 대고 외치기 시작했다.
"람보 투. 사브 자동차를 발견했습니다. 수도고속화도로요. 외각 고속도로로 빠져 나갈 생각입니다. 정확합니다!"
순간 빗물에 미끄러진 냉동차가 갑자기 종식의 자가용쪽으로 붙어 왔다.
행운 뒤에 불행이라더니 가벼운 접촉사고가 일어났던 것이다. 종식은 뒤에서 따라오던 자동차들이 멈추어 서있는 가운데 트럭운전사를 향해 욕을 한사발 한뒤 다시 엑셀레이터를 밝았다.
그 사이에 나쓰에가 운전하고 있는 사브 9000은 수도고속화 도로를 타고 넘은 뒤 외각 고속도로로 총알같이 달려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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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식들 다들 뭐하고 있었나 엉? 너희들 도대체 뭐하는 놈들이야?"
진광섭은 임소봉과 두번째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울그락불그락 화가 나 있다.
"너 소봉이 이자식. 내 날아갈테니까 나쓰에를 당장 찾아! 한놈은 고속도로를 타고 두놈은 기어가던지 날아가던지 해서 나쓰에 앞에서 다리벌리고 기다리란 말야! 니네 그래 세팀이나 되면서 여자 하날 미행 못해? 앙?"
이상운은 벌개진 얼굴로 진광섭을 응시했다. 간신히 이상운은 입을 열었다.
"과장님. 지금 가셔야 겠습니다. 기상상태는 염려할 단계가 아니라는데요?"
"알았어 임마,나 지금 통화하는 거 안보이나?"
상운은 더럭 겁을 먹고 뒤걸음질을 쳤다. 진광섭은 상운을 노려보더니 다시 정신없이 핸드폰에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너네들 말야. 나쓰에를 놓치면 모두 죽을 각오하라고. 남산에 집어넣고 3년동안 버벅기도록 만들겠어,알겠나?"
그렇게 버럭 외친 뒤 진광섭은 일방적으로 핸드폰을 꺼 버렸다. 그러더니 귀신같이 핸드폰을 자신의 안쪽 포겟에 집어 넣었다.
상운을 포함해 5명의 부하들은 그런 진광섭의 번개같은 행동을 겁먹은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진광섭은 싸늘하게 그들을 돌아다 보았다.
"뭐하고 있나? 도대체 헬기는 언제 준비된다는 거야?"
그러자 이상운이 다시 앞으로 걸어나왔다.
"30분전부터...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과장님..."

헬리콥터는 요란하게 소리를 내며 이륙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소음사이로 날카롭게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진광섭은 걸어가다 말고 부하들 곁을 떠나 난간 쪽으로 걸어갔다. 난간 한쪽 구석에는 <東京 스카이라인 에어 서비스>라는 작은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정확하게 55층 높이를 가진 인포메이션 센타의 옥상에 있는 헬기장. 진광섭은 소나기속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도쿄 야경을 보았다.
체포하는 건 시간문제겠군...
진광섭은 몸을 돌려 헬기쪽으로 뛰어갔다. 이상운이 헬기 옆에서 후쭐하게 비를 맞으면서 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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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에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았다. 사즈메가 김준의 허벅지에 박혀 있는 총알을 뺐다고 하는데 진심일까. 사즈메의 말로는 살점이 반쯤 떨어져 나간 상태에서 총알이 육횬막 보였기 때문에,(언니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모험을 해 봤다는 것인데 아무래도 믿을수가 없는 이야기다.
이즈메에게도 미안했다. 류오시 이즈메는 상지대학 의학부 외과과장이 인정하는 촉망받는 인턴이었다. 더구나 이즈메에는 매너가 좋았다. 고향친구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도 데이트 신청을 하듯 전화를 건뒤 김준을 치료하기 위해 무조건 아버지의 별장으로 이즈메를 데리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도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차를 바꾸어 타자고 말했을때 갑자기 놀라던 이즈메의 표정.
이런...벌써 사랑이 식은 건가. 할수 없지. 단 조건이 있어. 사브를 돌려줄때는 기름을 꽉 채운 뒤 발로 밟아서 돌려줘야 해. 나 오늘 나쓰에씨 별장에 가고 싶었는데 말야. 너무 섭섭하군.

이젠 아버지 별장이 아니었다. 별장은 아버지가 사망함으로써 나쓰에에게 고스란히 상속되었다. 평생을 작은 도시 구역소(구청) 관리에 만족하면서 홀애비로 두 딸을 키웠던 아버지. 나쓰에에게 아담한 별장을 유산으로 상속하고 돌아가신 게다. 나쓰에는 별안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게 무슨 꼴이람...
갑자기 우동이 먹고 싶어졌다. 지금 이시간은 퇴근한 뒤에 다누끼(너구리)나 기즈네 종류의 우동을 먹으면서 친구들이랑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는 시간인 게다. 나쓰에는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보니 학창시절 이후로 나쓰에의 별명는 여우였다. 기즈네 때문에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여우처럼 머리가 잘돌아 가는 건지. 나쓰에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렇게 까지 김준을 도와주려는 노력하는 것일까. 그는 정리되지 않는 이방인인데...
불현듯 테마마크에서의 첫 데이트가 나쓰에에게 떠 올랐다. 김준 그 사내.
그땐 그랬지. 신비할 정도로 클리퍼 프로그래밍에 대해 설명을 했던 것이다.
나쓰에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차안을 살펴 보았다. 사브 9000 시리즈는 그녀가 처음 운전을 해보는 차종이다. 한달전에 구입했다고 했던가.
나쓰에는 차안을 살펴보다가 운전석 옆으로 금속상자가 있는 걸 알았다.
그녀는 백미러를 한번 힐끔 쳐다본뒤 상자를 열어 보았다. 카세트 테입이 가지런히 들어있다. 나쓰에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테입 하나를 꺼내 카스테레오에 삽입했다. 그러자 무언가 이상한 소음이 들렸다. 그러더니 여자의 신음 소리가 흘러 나오고,시트가 쿵작쿵작 리듬을 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쓰에는 얼굴을 붉히고 급히 테입을 꺼냈다.
나쓰에는 전방을 주시했다. 이젠 폭우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도로사정이 영 않좋아 보였다. 자동차들도 그 수가 현저하게 줄어들어 있다. 여유가 있다고 생각이 들자 나쓰에는 핸들에서 양손을 떼었다. 그런 뒤 상자속의 테입들을 하나하나 꺼낸 뒤,감겨진 자기 테입을 끄집어 냈다. 그런 뒤 돌돌말아서 힘차게 뒷좌석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에 갑자기,뒷 쪽에서 해드라이트 불빛이 계속해서 사브안으로 쏘아 들어온다는 걸 깨닭았다.
나쓰에는 화들짝 놀래 뒤를 바라 보았다. 아까는 별로 이상하지 않았는데 별안간 왜 이런 생각이 들까.
나쓰에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뒤쪽에서 따라붙는 자동차는 아까 가볍게 접촉 사고를 냈던 그 자동차인것 같았다. 왼쪽 보디가 찌그러져 빛을 어지럽게 난사하는것이 백미러로도 쉽게 식별이 되었다. 분명 수도고속화 도로로 진입할때 바로 뒤쪽에서 접촉사고를 냈던 그 자동차다.
나쓰에는 설마하는 심정으로 다시 뒤를 돌아다 보았다. 자동차는 전조등을 상향으로 켠채 계속 따라 붙고 있었다.
나쓰에는 고개를 돌려 전방을 응시했다. 이미 고속도로는 충분하게 넓어지고 있었다. 폭우가 거칠어지자 몇몇 자신없는 운전자들이 갖길에 자동차를 주차시키는 모습도 보였다. 그래. 충분했다. 나쓰에는 생전처음으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해보자구...
나쓰에는 무의식중에 아토매틱 기아를 만졌다. 나쓰에가 모르는 사이에 사브 9000의 기아는 그 순간 스포츠타입으로 바뀌었다. 나쓰에가 까마득히 모르는 장치. 스포츠카를 컨셉트하기 위해 사브가 고심끝에 내놓은 시스템이다.
나쓰에는 기아가 바뀐 걸 확인하고 가볍게 엑셀레이터를 밟아 보았다.
순간 사브의 둔탁한 차체가 속도를 내기 시작하면서 밑으로 쭈욱 가라 앉기 시작했다.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신음소리를 흘렸다. 10초도 되지 않았는데 속도계가 시속 150Km까지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쓰에는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이건 너무 다른다.
나쓰에는 삽시간에 수십대의 자동차를 추월해갔다. 뭐가 어떻게 된건지 나쓰에는 알수 없었다. 마치 수중양륙장갑차안에 앉아있다는 느낌. 믿을수 없었지만 계기판의 속도계는 나쓰에의 눈앞에서 계속 올라가고 있었다.
시속 220Km의 속도.
폭우가 앞 차창을 대포알처럼 처대고 있었지만 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차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나쓰에는 온통 신경을 전방을 향해 주시하면서 엑셀레이터를 밟아갔다. 이미 사브 9000의 최고속도인 시속 250Km의 한계점까지 속도계가 올라가고 있었다.

나쓰에는 숨을 몰아 쉬었다. 이제 뒤따라오던 그놈의 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손에서는 저절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라앉았던 차체가 이번에는 반대로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차체는 아직도 흔들리지 않는다. 나쓰에는 손수건을 꺼내들고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그런 뒤 다시 전방 어두운 공간을 바라 보았다.
트럭 한대가 앞쪽에서 달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우측으로 인터체인지가 보였다.
후지산 방향으로 연결된 고속도로였다. 그쪽에서 차들이 느릿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나쓰에는 실내등을 켜고 손목시계를 보았다. 고속도로를 탄지 벌써 40분이 지났다. 사즈메가 잘하고 있을까. 아니 사즈메는 9시에 도쿄로 돌아 간다고 했다.
별장에는 먹을 음식이 없었기에 사즈메를 시킨 것인데 아예 지금은 병간호까지 하고 있을 것이다. 사즈메. 어린게 남자를 너무 밝혀서 탈이야 말야.
나쓰에는 다시 사즈메와 통화를 하기 위해 카폰을 손에 쥐었다. 이때 후지산쪽 인터체인지에서 무서운 속도로 달려내려오는 자동차가 보였다.
바로 김영진의 체로키 지프차다.
나쓰에는 깜짝 놀란 눈으로 인터체인지에서 튀어나오는 체로키를 바라 보았다.
믿을수가 없었다. 나쓰에는 잔뜩 겁을 먹고 순간적으로 핸들을 꺽었다. 실수였다.
핸들은 반대로 꺽이면서 차체는 급작스럽게 진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빗길을 미끄러지면서 고속도로 가운데에서 보기 나쁘게 한바뀌 회전을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체로키 지프가 나쓰에의 사브 자동차를 덮쳐왔다.
쾅 소리와 함께 사브 9000은 다시 도로 저쪽 끝으로 밀려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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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스페이스 헬기는 고속도로 상공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러다가 헬기는 허공에서 20각도로 비스듬히 자세를 잡더니 어느 한공간에서 머물고 있었다.
진광섭이었다. 광섭은 헬기 뒷좌석에 앉아 사브와 체로키가 접촉사고를 일으키는 광경을 경마구경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앞좌석에 앉아있는 이상운이 응얼거리고 있었다.
"뭡니까,저건..? 영진이 저 녀석이 일을 다 망친거 아닙니까...?"
진광섭은 이상운의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헬기 조종사를 향해 빠르게 뭐라고 외쳤다. 그러자 조종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후에 헬기에서 서치라이트 빛이 고속도로를 향해 떨어져 나갔다. 불빛을 받으며 나쓰에가 급히 사브 밖으로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찬가지로 체로키에서도 김영진과 임소봉이가 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진광섭은 그들을 내려다 보았다. 일 치고는 상당히 빌어먹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잡아 들이다가는 여자쪽에서 아무것도 불지 않을 것이다.
광섭은 허탈했다. 보아하니 접촉사고는 나쓰에 때문에 발생한 것 같았다.
임소봉이나 김영진 정도면 땅바닦에 헤딩을 할 친구가 아닌 것이다. 광섭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 뒤 아크힐스의 전산팀 요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야? 아직도 모른다고? 사뇨 나쓰에가 소유한게 아니라도 좋아! 친인척이 소유한 도쿄 남쪽 방면 부동산은 모두 조사해보란 말야. 이 새끼들아!"
그렇게 말한 뒤 진광섭은 핸드폰 통화를 끊었다. 그런 뒤 다시 접촉사고가 일어난 고속도로 현장을 내려다 보았다. 여기서 다시 나쓰에를 놓아주라고 지시할수는 없었다. 김준 놈을 만나러 가는 나쓰에를 안전거릴 확보하며 미행을 해야 했던 것인데....
그때 별안간 이상운이 핸드폰을 진광섭에게 내밀었다.
"빠르군요. 전산팀 연락입니다. 나쓰에에게 별장이 있다고 합니다!"
광섭은 힐끔 놀란 얼굴로 이상운의 핸드폰을 받았다. 폭우가 세차게 헬기의 창틀 안까지 치고 들어왔다.
광섭은 비로서 히쭉 웃었다. 그는 입에 소형 후레쉬를 물고 있는 상태에서 무릅팍에 놓여있는 지도를 펼쳤다. 그런 뒤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지명을 더듬어 가기 시작했다. 그런뒤 그는 입에 물고 있던 후레쉬를 손에 쥐었다.
진광섭은 버럭 외치고 있었다.
"이봐 조종사 양반! 수고스럽지만 지금 당장 아타미 해안으로 날아갑시다!"
체포는 싱겁게 끝날것 같았다. 아타미 해안까지는 헬기로 단 5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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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전화수화기를 손에 쥐고 울먹이고 있었다. 나쓰에가 오면 자신은 도쿄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나쓰에 언니는 오지 않고 방금전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오다가 접촉 사고가 났다고 하던데...언니 나쓰에가 말하는 도중에 카폰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었다. 이즈메 오빠의 사브 자동차였을 것이다. 그런데 잠시후에는 누군가가 자동차문을 여닫는것 같았다. 그런 뒤 들려온 나쓰에의 날카로운 비명소리.
사유리는 창백한 표정으로 전화수화기를 다시 귀에다 대 보았다. 이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환청처럼 방금 전 언니의 목소리가 반복될 뿐이다.

김준은 충열된 눈으로 계속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세크 BBS에 접속을 해보니 아까 주문한 자료는 이미 조사가 끝난 상태였다. 헌데 자료를 읽으려면 돈을 지불해야했다. 돈을 지불하지 않고 48시간이 지나면 조사한 자료는 자동으로 삭제 된다는 경고문이 떠 있다.
준은 난감했다. 당장은 돈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종수에게 어떻게 도움을 구해볼까 생각했지만 그 친구도 많은 곤란을 느끼고 있는것 같았다.
준은 우울한 마음으로 세크 BBS를 빠져 나온 뒤 곧장 인터넷으로 접속을 했다. 5분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전자메일 한통이 고종수의 ID 앞으로 수신되 있다.

.......................................................
Mail version 4.18 02/31/96. Type ? for help.
"/usr/spool/mail/student": 1 messages 1 new
>N 1 hanhh Tue March 21 21:42 ??/??? "letter"
.......................................................

준은 물끄러미 hanhh이라는 아이디를 응시했다. 처음보는 아이디였다. 누굴까.
수신시간을 보니 바로 15초 전에 수신이 된 편지다. 준은 초초한 마음을 억누르고 폴더를 열어 놓은 상태에서 V키를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전자편지의 내용이 개봉되어 떠 올랐다. 놀랍게도 영어문장 아래로는 한글이 떠 있다.
인터넷에서 한글이라니 여간 반갑운 일이 아니다.

................................................
Date: Tue 21 March 1996 21:21:42
From: 'hanhh' <hanhh@akirajpn.com>
To: jsko@jeill.net
Subject: letter

이제 인사드립니다. 한현희입니다.
이 메일은 자체 소각됩니다.
...............................................

IP(주소)를 보니 한현희는 제일그룹 제펜지사의 직원인것 같다.
아키라제펜은 일본에 있는 수백개의 인터넷 호스트중 하나였는데 제일그룹 일본지사가 인터넷과 연결할때 주로 이용하는 호스트였다.
어쨌든 준은 한현희를 만나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화면을 응시했다. 다시 담배를 고처 물고 두줄 짜리에 불과한 편지 내용을 읽어 보았다.

>> 이제 인사를 드립니다. 한현희입니다.
>> 이 메일은 자체 소각됩니다.

편지 내용치곤 참으로 이상하다. 단 두줄 그것도 인사말 밖에 없다. 장난을 치는 건가? 이게 뭔가...형사 가제트를 흉낸 내고 있는 이 여자. 제법 엉뚱하다. 폰팅을 하자는 건 아닐텐데. 도대체 무슨 의미로 한현희는 이 편지를 고종수에게 보내온 것일까.
준은 씁쓸하게 액정화면을 쳐다보다가 전자메일을 빠져 나왔다. 순간 갑자기 노트북 컴퓨터가 진동하듯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니 노특북이 진동한게 아니다. 스카시 하드디스크가 윙윙 거리며 돌아가는가 했더니,곧바로 액정 화면에서 빛이 세어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한현희의 얼굴이 화면 중앙에서 부웅 떠 올랐다.

한현희는 히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놀라셨군요...머 저도 실력있는 해커라면 해커라고 할수있죠. 이 정도는 기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만..."
아름다운 그래픽이다. 한현희가 아름다운 건지 그래픽이 아름다운 건지 김준에게는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본사 고부장님의 지원이 시작됩니다."
여기까지 말하다가 잠시 스크롤이 멈추는 것 같더니 다시 하드 디스크가 윙윙 돌아가면서 현희의 메시지가 이어진다.
"교수님 이름으로 구좌를 만들었습니다. 1만 2천불입니다. 시티뱅크에 가서 구좌번호를 제시하시면 현금이 준비 될 겁니다. 그럼 연락 부탁드립니다."

그런 뒤 한현희의 얼굴은 사라졌다. 그리고 곧바로 시티뱅크 구좌가 화면 상단부에서 떠 올랐다.
체 김준이 외우기 전이었다. 구좌는 그대로 불태워지듯 화면 안으로 사그라 들어갔다. 준은 멍한 눈으로 텅 빈 화면을 응시했다. 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때는 고퍼 안에 있었다. 고퍼쪽에다가 메크로를 잔뜩 걸어놓았던 것 같다... 이건 너무 하잖아...

이런 영특한 해커가 나말고 제일그룹에 또 있었단 말인가.

준은 현희처럼 아름다운 여자를 본적이 없었다. 그때문에 구좌를 외우기 보다는 그 여운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때 사유리가 침실 문을 열고 들어서고 있었다. 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사유리를 바라 보았다. 사유리는 오만상을 찡그리더니 간신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도망치래요... 방금 전 언니의 전화가 왔었어요..."
사유리는 베꼽 티 위에 분홍색 우비를 걸치고 있었다. 아예 도망 갈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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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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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가 처음 미나를 보았을 때 그녀는 할머니의 등 뒤에 서있었다. 커다랗고 서글서글한,그때문에 왕방울만한 눈으로 미나는 하야시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하야시가 손을 내밀자 미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얌전히 손을 주었다.
그때 하야시의 손은 미나의 손길을 피해 그녀의 머리위로 올라가더니,머리카락을 장난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하야시가 9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하야시는 눈물을 흘리다 말고 맥주를 마셨다. 밤 9시 55분이었다. 아직까지도 미나는 귀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겁먹은 얼굴로 다락방 아래로 귀를 기울었다. 하지만 아무런 소리도 없다. 계속 불길한
폭우가 내릴 뿐.
하야시는 초조한 마음으로 다시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은행간 온라인 망에 연결된 펌뱅킹firm banking의 차가운 화면이 눈이 시릴 정도로 하야시의 앞에서 어른거렸다. 하야시는 지금 일본 각 기업 망과 연결된 펌뱅킹이라는 법인용 금융서비스 망을 감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작업은 하야시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뱅크마니아 BBS>와 접속된 상태에서 그쪽에서 진행중인 작업이 생방송처럼 하야시에게 중계되고 있었던 게다.
물론 그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모니터에서 문자가 올라갈 때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머리 속에 재빨리 해킹 기법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김준의 은행구좌는 없었다. 아직까지는.

하야시는 FX로 연결된 화면에서 빠져 나왔다. 이제 자신의 작업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그가 지금 접속하려는 통신망은 방위청이 일반인을 위해 구축한 통신망중 하나였다. 오전에 작업을 끝낸 뒤 다시 들어가는 것이었지만 아직까진 추적을 당하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지카데쯔地下鐵라는 ID를 가지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전 작업보다는 신경을 써야 했다. 하야시는 담배에 라이터불을 당기는 상태에서 한자어 地下鐵를 또박똑박 타이핑했다. 곧바로 모니터가 암호를 물어온다.

제기랄... 등록된 아이디도 아닌데 암호를 물어온다...
하야시는 불쑥 화가 나서 무의식중에 키보드의 F12 키를 눌렀다. 그러자 소프트아이스가 호출되어 나타났다. 소프트아이스는 램상주형 해킹 프로그램이다.
하야시는 별안간 놀란듯 소프트아이스를 멍히 응시했다. 그의 입에서 비음이 터져 나왔다.

뭐하고 있나... 지금 필요한 건 소프트아이스가 아니잖나...!!

하야시는 속으로 뇌까리면서 다시 빠르게 키를 눌러갔다. 마치 손끝에 모터를 단듯한 인상이다. 모두 12개의 키. 이 12개의 핫키에는 각각 매크로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하야시가 핫키를 모두 누르자 곧바로 암호를 물어오는 박스가 하야시의 눈앞에서 종적을 감추었다. 삽시간에 암호박스를 구동시키는 프로그램을 역추적해 완전히 날려 버린 것이다.
소프트아이스라니...그건 2HD 디스켓을 해킹할 때나 사용하는 게다.
하야시는 자신이 미나 때문에 하마터면 실수를 할 뻔했다는 걸 알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식은 땀이 났다.
하야시의 기억으로는 미나가 외박을 한적이 없었다. 헌데 오늘 처음으로 새벽에 귀가를 하지 않고 있다. 20시간동안이나... 전화 한통화 없다.
하야시는 다시 울컥 울음이 나오려고 하는 걸 참았다.
그런 뒤 모니터를 노려보았다.

멍청한 계집. 또 어디 가서 춤이나 추겠지. 오피스 걸을 유혹한다고...
그게 아니야. 너의 춤은 남자를 유혹하는 춤이다. 그게 너의 약점이지.
아무나... 멍청한 남자들이 네 곁에 꼬이는 거야.

하야시는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소형냉장고에서 다시 기린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런 뒤 충혈된 눈으로 모니터를 응시했다. 이미 후꾸오 하야시는 방위청 자체 통신망 중에서 가장 대중적이라는 무한 호스트 안에 들어가 있다.
차가운 맥주가 몸안에 흡수되자 그는 다시 제정신을 차렸다. 작업을 중단할 수 없었다. 이미 의뢰자는 상당한 금액을 송금해왔다. 무엇인가를 해 보여야 했다.
예의인 것이다.

하야시는 조심스럽게 <地下鐵>이라는 ID를 김준이 사용하는 <동급해커>로 바꾸어 보았다.
순간 모니터 화면 왼쪽 하단부에서 슬래시가 급작스럽게 역회전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빨랐다. 하야시는 불끈 호흡을 멈춘 상태로 슬래시의 회전력을 추측해 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하야시는 컴퓨터의 파워 스위치를 내렸다.
분명...수상직속의 내각정보국이 역추적을 개시한 게다.
하야시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눈빛은 교활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이클 히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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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사유리를 따라 별장 뒤로 걸어 나왔다. 폭우가 몰아치며서 바다쪽에선 태풍이 불어오고 있다. 밤 10시였다. 찌그러진 알미늄 캔들이 요란스럽게 별장 주위에서 날아 다녔다. 준은 별장 뒤에서 방수포를 찾아낸 뒤 자신의 노트북을 포장하고 사유리를 따라 걸어갔다. 왼편 해안가에서 검은 바다 파도가 세차게 춤을 추며 올라 오고 있다. 악몽 같은 밤이다.
"어딜 가는 건가?"
준이 묻자 사유리는 힘차게 다시 준의 손목을 잡았다.
"도쿄로 안 가세요? 전 내일 학교에 등교해야 하죠."
"도쿄?..."
"도쿄요. 아참 아저씬 그곳에 도망온거라 했나요?"
사유리는 앞장서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어떻게 하실 거죠?"
그녀의 이마에 알게 모르게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사유리양은 도쿄로 돌아가시오. 난 다른 곳으로 가야겠소..."
"어딘 데요? 어딜 가겠다는 거예요? 그 다리로?"
이제부턴 반말이 나온다. 사유리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겨난 것이다.
"오토바이가 있소?"
준이 묻자 사유리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타신 거예요. 이 별장 사실 고향집이에요. 아버지가 정년퇴직하신 뒤 별장으로 개조된 거죠. 필요하세요? 그 오토바이라는 게?"
"사유리는 어때?"
"전 상관없어요. 택시를 불렀으니까 택시가 오면 역으로 가야죠. JR을 잡아타고 도쿄로 돌아가면 되는 데요."
"그렇군. 오토바이 키를 주시오. 난 아무래도..."
"잠깐만요. 그건 별장 안에 있어요. 저 창고 안에서 기다리세요. 오토바이는 창고 안에 있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별장으로 다시 뛰어갔다. 준은 사유리를 쳐다보다가 창고로 걸어가서 문을 열었다.

혼다 제니 50 cc

그는 오토바이를 내려다보다가 기가 막혔는지 실없이 웃음을 흘렸다. 혼다 제니 50cc는 가정주부가 타는 스쿠터였다.
우선 폼이 나지 않았다.
이걸 타고 도망가란 말인가...

준은 다리를 절뚝이며 스쿠터 주변을 맴돌다가 인기척 소리에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유리였다.
"그건 뭔가?"
사유리는 준에게 열쇠고리를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아저씨가 원하는 열쇠죠."
준은 눈을 반짝이며 사유리가 건네주는 열쇠를 낚아챘다. 독수리 문장. 준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하레이다비죤 95년식이군. 이 최신형 오토바이는 어디에 있지?..."
사유리는 히풋 미소를 흘렸다.
"제 등뒤에 있어요. 푸들이라고 이 동네 친구 거에요. 고향친구죠. 게도 공부를 못해요."
"내가 빌려 타도 되나?"
"그럼요. 벌써 빌려왔는 걸요. 대신 저를 역까지 바래다 줘야 합니다. 역전 주차장에 세워 두기로 했으니까요."
"고맙군...사유리양."
"고맙긴요. 언니에게 키스 한번 해주세요. 나쓰에는 그 문제에선 좀 멍청이죠."

음. 키스라니...

그 시각. 에어로스페이스 SA330 푸마 헬리콥터는 야트막한 구릉을 넘어오고 있다.
원래 프랑스군의 진중 수송헬기였던 SA330 푸마 헬기는 기동성이 좋았다. 하지만 폭우가 심상치 않자 조종사는 아까부터 잔득 겁을 먹고 있었다. 라디오 트렌스미트(항공기간 무선통신)는 이미 동작도 되지 않았다. 기상레이다로 체크한 현재의 기상상태도 불안하긴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착륙을 한 뒤,한시간후에 리테이크옵(re-take-off 재이륙)을 시도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몇 번인가를 이문제를 요구했지만 진광섭은 싸늘하게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붉은 색 지붕을 찾으면 되었다. 아타미 경찰서의 도움으로 나쓰에의 별장이 붉은색 지붕이라는 것은 가까스레 알아냈지만,이놈의 해안 주택가는 도대체 뭐가 먼지 모를 지경이다. 계속 서치라이트 아래로 주택가 지붕들이 어른거렸지만 모든 지붕이 같아 보인다. 진광섭의 입에선 다시 욕설이 흘러나왔다.
"조종사 양반. 좀 더 밀착 비행을 할 수 없겠나? 도대체 뭐가 뭔지 알아야지 않겠나?"
"불가능합니다. 해안수목림이 울창합니다. 이 이상은 접근이 불가능합니다!"
조종사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헬기 밑으론 나뭇가지들이 미친 듯이 춤을 추고 있었다. 어느게 높고 낮은 나무인지 육안으론 도저히 파악되지 않는다.
"안되겠군! 상운이 넌 애들을 데리고 뛰어 내릴 준비를 해라."
"알겠습니다. 여기서요?"
"그래 임마,자꾸 말 두번 하게 할래?"
진광섭은 온통 신경이 곤두선 모습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다시 임소봉을 호출하기 위해서였다.

임소봉과 김영진은 오종식의 차로 바꾸어타고 아타미 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쓰에는 오종식이가 일본 경찰의 도움으로 도쿄로 압송해간 후였다.
임소봉은 광섭의 연락을 받은 뒤 곧바로 윤영범을 호출했다. 윤영범의 차는 바로 뒤에서 무섭게 쫓아오고 있다.

헬리콥터가 지면 1미터까지 하강하자 이상운은 서둘러 부하 둘과 함께 화물칸에서 뛰어 내렸다. 헬기의 주主로터가 펑펑거리며 폭우를 튕겨내고 있었다. 상운은 물벼락을 피해 곧장 헬기의 앞쪽으로 뛰어 갔다. 그때 골목 저쪽에서 한대의 오토바이가 그곳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운은 오토바이를 쳐다보다가 내리막길을 뛰어 내려갔다. 그런 뒤 무턱대고 눈앞에 보이는 집 대문을 두들겼다. 어부인듯한 촌노가 부스럭거리며 나와서 나쓰에의 별장을 손으로 가리켰다. 방금전 오토바이가 떠난 그 집이다.
제기랄.
그는 빗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별장으로 뛰어 올라갔다.
옆 오솔길로 오토바이가 도망간 흔적이 보였다. 상운은 서두르며 핸드폰을 품에서 꺼냈다. 헬기가 상운의 머리 위에서 서치라이트를 내려 쏘고 있었다. 서치라이트 빛을 의식했는지 상운은 헬기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방금 그 오토바이입니다! 과장님 제 말 들리십니까?"
그러자 곧바로 진광섭의 욕설이 핸드폰이 터쳐나갈듯 튀어나오는가 했더니, 헬기는 하늘로 수직상승을 했다. 그런 뒤 내리막길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잠시후에 저쪽 끝으로 날아가는 헬기의 항법등이 상운에게 보였다.
상운은 물끄러미 헬기를 바라보다가 부하 둘을 데리고 별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창고안에는 오래된 혼다 제니 스쿠터가 있었다. 상운은 버럭 화가 나서 스쿠터를 발로 걷어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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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의 하레이다비죤 Tx-990은 폭우속을 무섭게 질주하고 있었다. 오토바이뒤에는 사유리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배꼽 티 아래로 빗방울이 치고 들어오자 야릇한 쾌감에 젖어 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언니 나쓰에의 소식이 궁금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토바이가 이처럼 빨리 달린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더구나 폭풍처럼 몰아치는 빗방울이 사유리의 몸을 감쌓자 온몸이 붕 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사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준의 등에 고개를 댔다. 그의 체온이 차갑게 느껴지고 있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사유리는 붕붕 뛰는 가슴을 간신히 억누르고 큰 소리로 준에게 물었다.
"아저씨 노트북 컴퓨터요. 아까 점심에 잠깐 쳐보았어요!"
준은 대답을 할수 없었다. 빗방울에 노출된 오른쪽 허벅지가 통증을 전해오고 있었다. 몸도 생각보다 맘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도로에 미끄러지지 않기위해 온 정신을 전방에 응시하고 있었다.
"뭐죠? 그 노트북은 정말 굉장하던데요. 사양이 어떻게 되나요?"
준은 그제야 사유리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얼굴을 뒤로 돌려 사유리를 응시했다.
준의 코등에는 황색의 고글이 걸려있다. 야간운전중에는 황색을 써야했다.
황색의 선글라스가 신호등을 안전하게 식별할 수 있으니까.
준은 전방을 다시 주시하며 대답했다.
"100Mhz DX4 저전력 프로세서야. 팩스모뎀은 PCMCIA 카드를 이용하는 거지. 하드디스크는 1.2기가 스카시야! 내말 알아듣겠나,사유리?"
"그럼요. 언니가 전산쟁이잖아요. 굉장하네요. 또 다른 것도 있던데...."
"기본적으로 압전마이크로폰이 부착돼 있어. 녹음 가능하고 32비트로 음악을 재생할수가 있지. 그리고 커버는 양쪽으로 벌어지게 되어 있지!"
"맞아요. 그건 무슨 장치죠?"
"칼라스캐너. 복사기라 할 수 있지."
"흐...정말 굉장한 노트북이군요. 기자님들 컴퓨터는 다 그렇게 좋은 가요?"
기자라니.
해커니까 컴퓨터가 좋을 수밖에.
"그건 아니야,나만 예외인 것 같아. 월급타면 컴퓨터에다 부니까 그럴 수밖에.."

일본에 오기 전에 김준은 용산 상가에서 한달동안 생활하면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조립하려고 많은 고민을 했다. 통상적인 아키텍처를 모조리 무시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준에겐 필요했다. 하지만 케이스마저 튼튼한 것을 구할수 없었다.
밧데리의 수명도 가장 긴 것이 고작 15시간 정도 유지되는 것 밖에 없었다.
할수없이 준은 IBM 싱크패드 최신형을 구입하기로 계약을 했다. 미국에서 막 출시되는 제품이었기 때문에 따로 우편주문을 해야 했다. 그런데 어느새 고종수가 김준이 사용할 수 있겠금 노트북 컴퓨터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일명 히드라 77.
제일전자 산하 연구소가 2년동안 애플과 아이비엠 두 기종을 교묘하게 짜 맞추어서 조립한 히드라 77 노트북... 준에겐 컴퓨터가 아니라 자신의 몸이나 다름없었다.

준은 불현듯 미소를 지었다.
어쩌다 이렇게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나.

지난 1년동안 일본내에서 준의 삶은 참으로 조용했다. 고종수가 작업을 지시해 오면 하루나 이틀동안 핵킹할 준비를 한 뒤 10여분 정도를 투자해서 정보를 복사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뒤에는 불쑥 자가용을 타고 심야드라이브를 나서곤 했다.
드라이브가 싫으면 리무진 택시를 호출하거나,벨로드롬장을 찾아갔고, 모터사이클링을 즐기거나,경정 도박을 구경갔다.

하지만 아무래도 드라이브가 준에겐 가장 보편한 취미였다. 항상 심야 드라이브 말미에는 도쿄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들,예를 들자면 마이 시티의 8층에 있는 에드호크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거나,소바(모밀)집에 들려 밤참을 먹곤 하였다.
간혹 가다가는 에드호크에서 내려와서 1층 뿌띠 파크로 곧장 입장하곤 했다.
뿌띠 파크는 지금은 고전이 된 DJ가 있는 신인류를 위한 시끄러운 디스코장이었다.
그는 아무나 붙잡고,대개는 풋풋한 소녀들이었지만,부담없이 어울려 춤을 추었다.

도쿄는 지난 1년간 그런 식으로 김준과 밀접해지고 있었다.

준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박같은 폭우가 자신의 얼굴을 치고 있었다.
고글이 없었다면 아마 앞을 보지 못할 상황일게다. JR 상행선이 들판 저쪽에서 아타미 항구로 달려가고 있다. 준은 우울했다. 아타미 역에 도착하면 자신은 또 어딘가로 피신을 해야한다. 스쿠바로 가야 할까. 아무래도 그 쪽엔 아는 사람이 몇명 있을 것 같다.
"아저씨 헬기가 뒤따라와요..."
별안간 사유리가 뒤에서 외쳤다.

준은 오토바이 핸들을 잡은 상태에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에어로스페이스사에서 제작한 중형 헬리콥터가 긴박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1천미터 정도 후방이었다.
준은 침을 삼키고 헬기의 정체를 파악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이 폭우 속에 헬기라니.

"하레이다비죤 모르나? 영진이 너. 코앞에 달려오는 거 있잖아! 미제 사이카를 잡으란 말야!!"
김영진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진광섭의 음성을 듣고 전방을 주시했다.
어두웠다. 영진은 잽싸게 전조등을 상향으로 올렸다. 순간 앞 도로에서 무서운 속도로 오토바이가 튀어 나오고 있었다. 임소봉이 외쳤다.
"저거다! 잡아!"
영진은 거칠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콰콰콰----------!!!
일제 시빅 자동차는 왼쪽으로 휘청이는가 했더니 그 자리에서 30도 각도로 급회전을 했다. 그 사이에 하레이다비죤은 건너편 차선에서 스쳐 지나갔다. 영진은 급히 후진 기아를 넣고 자동차를 뒤로 뺐다. 이미 윤영범의 자동차가 차선을 바꾸어 타고 오토바이를 쫓아가고 있다.

"저 자식들 말야! 뭐하는 거야? 저놈들 안기부 맞아?"
진광섭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헬기 창밖을 내려다 보며 외쳤다. 심장이 터질듯 울렁거렸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김준을 잡는가 했다. 빠른 시간안에 놈을 서울로 압송해야 했다. 그런 뒤 업어치든 족치든 놈이 가진 불순한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했다. 놈은 전과 1범의 범죄경력이 있는 자였다. 앞으론 전업범죄자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 녀석인 게다.
더구나 외동딸 혜숙이가 아침마다 밥을 먹지 않고 혜화중학교로 등교를 한다고 생각을 하니까 광섭은 복장이 터졌다.
진광섭은 집에 돌아가면 인자한 가장이었다. 혜숙이에게 엄마가 없기 때문에 간혹은 다시 재혼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진광섭은 첫부인을 사랑했다.
안기부 초창기였을 때부터 말없이 눈물만 삼키곤 했던 부인을 광섭은 잊을 수가 없었다. 시류가 그랬던 것인데...역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아마 몇번인가를 미끈하게 잘빠진,고양이 눈처럼 따분한 눈빛을 가진 노처녀와 맞선을 보았을 것이다.

눈이 호리호리해서 좋아 보이네요....
어머 아저씬 선글라스
잘 어울려요...

광섭에 대한 여자들의 평은 제법 관대했다. 하지만 막상 광섭의 직업에 대해 말이 나오다보면 여자 쪽에서 지레 겁을 먹었다. 안기부이셨군요...
진광섭은 다시 핸드폰에다 입을 대고 날카롭게 외쳤다.
"너 이 자식들. 이번에 놓치면 두번 죽는 줄 알아! 각오하라고!"
그런 게 말한 뒤 광섭은 헬기조종사에게 버럭 외쳤다.
"넌 뭐하는 거야? 택시도 못 타나? 너 헬기 조종사 맞아?"
헬기 조종사는 찔끔했다. 아까부터 저 한국녀석이 반말이다.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둠속에서 택시Taxi를 감행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었다. 택시는 조종사들간의 은어로 지상활주를 의미했다. 지면에 바짝 붙어서 저공으로 비행하는 일.
지금은 기압조차 불안했다. 선더스톰하에서는 모든 것을 조심해야 했다.
조종사는 패널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전방을 응시했다. 엄청난 폭우였다.
이런 폭우속에 비행을 하는 건 프랙티스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참담한 일인데 택시를 타라니. 아직도 어이가 없었다.
다시 번개가 지평선 저쪽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앞쪽에서 냉동차가 달려오자 조종사는 급히 레버를 잡아 잡아 당겼다. 그런뒤 헬기는 지상 30미터 허공에서 서서히 메디엄 턴(40도 경사각)으로 회전을 했다.
300미터 앞쪽에서 도망가는 오토바이가 보였다.
제발... 스핀을 잃고 폭우에 휘말리지만 말아다오.
조종사는 침을 삼켰다.
신문에 나긴 싫으니까.
조정간을 잡아당기자 헬리콥터는 주로터 소리를 둔탁하게 토해내며 아까보다는 빠르게 어둠속을 전진해갔다. 다시 서치라이트가 오토바이를 쫓아가고 있다.

"뭐예요? 우릴 쫓아오는 거 같은데요?"
사뇨 사유리는 겁을 먹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우비가 출렁이듯 날개를 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머로 헬기의 서치라이트 빛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사유리는 현기증이 일어났다.
"맞아요? 헬기가 아저씨를 쫓아오는 건 가요?"
"그래 맞아..."
준은 힐끔 백미러를 응시했다. 서치라이트 빛 때문에 헬기의 형체가 제대로 식별되지 않았다. 그리고 오른쪽 뒤에서는 두대의 자가용이 맹추격을 해오는 모습이 보였다. 걸려도 된 통 걸린 모양이다.
"야쿠자인가요?"
"아냐. 한국인이야."
"아......"
사유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야쿠자가 아니라니까 우선 다행이었다. 사유리는 야쿠자라는 말만 들으면 왠지 오금이 저렸다.
사유리는 준의 허리를 안아 잡은 상태에서 고개를 옆으로 내밀어 앞을 보았다.
폭우가 사유리의 얼굴을 때렸다. 이미 JR 열차는 시내 안쪽으로 들어갔는지 여기서는 꽁무니가 보이지 않았다. 차츰 항구 건물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시내로...시내로 들어가세요! 그러면 헬기가 뒤쫓아오지 못할 거예요!"
"어느쪽으로 가야 하지?"
"조금 더요. 곧 교차로가 나와요. 거기서 왼쪽으로 타세요!"
"탱큐, 사뇨 사유리..."
준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서서히 늦추기 시작했다. 뜨겁게 열을 받은 엔진에 빗방울이 불꽃처럼 튀고 있었다.
"저거군?"
위험하게 보였다. 교차로가 아니라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인터체인지의 초입구로 여겨졌다. 준은 긴박하게 왼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어느사이 그의 왼발이 아스팔트 지면을 긁으며 중심을 잡고 있었다. 미끄러웠다.

임소봉은 앞쪽에서 달리는 오토바이를 바라보며 뇌까렸다.
"저 자식 저거 안되겠군..."
그런 뒤 임소봉은 영진을 힐끔 바라보았다.
"영진씨가 가진 건 무슨 총이요?"
"왜 묻소?"
"롱보디 없소? 이럴 때는 한방 날려야 하는데 말야."
"전 짧은 겁니다. 헌병들이 차는 껄렁한 총이죠."
"아,콜트구만. 할수 없지. 난 롱보디가 취미요. 안기부에서는 총 두 자루 가지고 다니는 놈이 나밖에 없을 거요."
그렇게 말한 뒤 임소봉은 무릎에 놓여 있는 자신의 007가방을 열어 젖혔다.
임소봉의 총은 말 그대로의 롱보디가 아니었다.
러시아제 저격총.
드라그노프 (Samozariyadnyia Vintovka Dragunova)가 분해되어 가방안에 들어 있다.

구경 : 7.62mm (0.3 inch)
길이 : 1,225mm (48.23 inch)
총신길이 : 547mm (21.53 inch)
속도 : 초속 830미터 (2,723피트)

가스피스톤식의 반자동인 드라그노프는 임소봉이가 소련에서 근무할 당시 단골창녀에게서 구입한 총이었다. 스코프는 4배율이었나 소봉이가 개량한 것을 부착한 뒤로는 100미터 전방에 있는 개미까지 보이겠금 배율이 높아졌다.
소봉이가 드라그노프를 조립하는 모습을 보며 영진은 저절로 탄성을 질렀다.
해병대 사격 교관이었을때 영진이 조차 한번 밖에 만져 보았던 유명한 저격총이었다.
그런데 소봉이는 자유자재로 귀신같이 조립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상자형으로 생긴 탄창안에 총알 10발을 채운 뒤,드라그노프에 삽입했다.
완전히 조립이 끝난 드라그노프는 완벽할 정도로 스마트했다. 총신만 소봉이의 말대로 롱보디-여자의 다리처럼 길어 보였지만,전체적으론 상당히 가볍게 여겨졌다.
총신도 제법 정성을 드렸는지 깨끗이 닦여 있다. 아니 러시아에서 돌아온 뒤 겨우 두번 정도 사용했을 것이다.
임소봉이가 지난 겨울 휴가때 오대산에서 곰을 잡을 생각을 했는데 곰 대신 멧돼지 두마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때 이미 확인해 보았기 때문에 성능에는 자신이 있었다. 임소봉은 힐쭉 웃으며 영진을 응시했다. 그 얼굴에는 미소가 저절로 떠오른다. 한방이면 된다.
영진은 차갑게 입을 열었다.
"김준을 죽일 생각이요?"
"아니지. 그냥 겁을 줄 생각이요. 내 생각엔 오토바이를 좀 못쓰게 만들 생각인데 잘 될라나 모르겠소."
임소봉은 파워윈도우를 열어 젖힌 뒤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폭우가 매섭게 소봉의 얼굴을 때렸지만 그는 신경을 쓰지 않고,드라그노프를 전방을 향해 겨누었다.
그러자 앞서 가던 영범이의 차가 잽싸게 2차선 쪽으로 피해주고 있다. 이미 영진이가 핸드폰으로 자리를 비켜달라고 요구했던 게다.
임소봉은 스코프에 눈을 댔다. 스코프는 매우 작고 접안식 고무패드가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약간 고생을 하는 듯했다.
타앙-------!!
그가 처음 한방을 쏜 것은 오토바이가 교차로에서 왼쪽으로 꺽어 들어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준은 가슴이 뜨끔했다. 방금 뒷쪽에서 날카롭게 무엇인가가 튕겨올라왔기 때문이다. 준은 서둘러 뒤를 돌아다 보았다. 사유리가 울쌍이 된 표정으로 준을 올려다보고 있다. 그러더니 말한다.

"아저씨... 나... 맞을뻔 했쪄..."

"뭐라고??"
"방금 저 뒤에서 나를 향해 총을 쏘았단 말이에요!"
사유리는 이글루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아스팔트에 총탄이 박히면서 튀어 오른 흙더미가 사유리의 배꼽 티 아래쪽에 붙어 있었다. 사유리는 아까보다 더 힘차게 두 팔로 준의 몸을 감싸고 있다. 이제 사유리도 본격적으로 겁이 났던 게다.
사유리가 축은하게 느껴졌다. 준은 오토바이를 운전하다 말고 오른손을 뒤로 돌려 사유리를 자신의 등으로 바짝 끌어 당겼다. 기다렸다는 듯 사유리는 준의 등에 달라 붙었다. 곧바로 준은 오토바이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안되겠습니다. 더이상 시내로 접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제 회항을..."
헬기 조종사가 지레 겁을 먹고 진광섭에게 외치자 광섭은 덥석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런 뒤 손아귀에다 살짝 힘을 주었다. 광섭의 이빨은 으드득 소리를 내고 있었다.
조종사는 황당하다는 듯 뒤를 돌아다 보았다. 기다렸다는 듯 진광섭의 손바닥이 조종사의 볼을 토닥토닥거리고 시작했다. 마치 밀가루 반죽하듯 진광섭은 조종사의 빰을 어루만지는 게다.
"한번 해봅시다. 내 체면도 생각해 주어야지...시내 중심부로 들어가 봅시다."
"큰일납니다. 시내는 비행금지 구역입니다..."
헬기 전방으로 NHK 지방 방송국의 송신탑이 보였다. 송신탑은 항구 중심가에 공룡처럼 떠 있었고,그 위로 낙뢰가 내려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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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후꾸오 하야시는 다락방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번개가 다시 한번 울려치고 있다. 하야시는 아직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오늘 작업은 전체적으로도 윤곽 보기 좋았다. 김준을 보기 좋게 함정에 집어 넣은 것이다.
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하야시는 거실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다시금 미나에 대한 분노가 치솟아 오르고 있다.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불쑥 미나의 침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로겐 전등을 켰다. 컴퓨터 책상 하나에 서가. 왼쪽으로는 침대. 그 옆으로는 붉은색의 티크 가구. 방바닦엔 미나가 자주 읽는 문에춘추 잡지가 놓여 있다.
하야시는 미나의 방에서 그녀의 체취를 느끼자 다시금 온 몸이 떨려왔다. 우디 향의 향수. 그녀가 잘 사용하는 냄새를 맡으며 하야시는 사물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떤 놈인가. 미나를 유혹한 남자는 어떤 놈인가. 분명 무엇인가 남아 있을 게다.
하야시는 울컥 울음이 넘어 오르는 것을 참고 미나의 데스크탑 컴퓨터를 응시했다.
별안간 시시하게도 미나의 컴퓨터에 무엇이 저장되어 있는지 하야시는 궁금했다.
그는 재빠르게 컴퓨터를 부팅 시켰다. 초키 화면은 윈도우 시카코 버전. 하야시는 스타트업 프로그램이 오픈되자 입을 벌리며 놀랬다.

이게 뭔가.... 왜 내 자료가...미나의 컴퓨터안에 들어가 있는 거지?

하야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의자에 그대로 털썩 기대어앉았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키보드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키보드의 F12 키를 눌렀다. 그러자 곧바로 모니터에서 소프트아이스가 떠 올랐다. 마치 자신의 컴퓨터에서 떠오르는 것처럼.
하야시는 의심스런 눈으로 미나의 컴퓨터를 두둘기기 시작했다. 똑같았다.
완벽하게 복제한듯 자신의 컴퓨터와 미나의 컴퓨터는 똑같았던 것이다.
불안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의자에서 일어나 컴퓨터 본체의 뒤쪽을 확인해 보았다. 랜 선이 포트에 꽃혀 있다. 그리고 전기줄로 위장이 되어 방 천정으로 올라가 있다. 다락방 바로 자신의 방으로.
미나가 나를 감시했던 말인가.
하야시는 울컥 구토가 넘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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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고도 1천미터 상공에서 아타미 항구를 내려다보고 있다.
밤 10시 30분인데도 도시는 불야성이다. 개미떼처럼 자동차들이 움직이고 있다.
아직까지도 김준의 오토바이는 쉽사리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동양의 나폴리. 아타미 해안을 내려다보며 광섭은 분통이 일으나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헬기로는 도저히 추적할 수 없는 곳에 김준이 숨어 있는 게다. 조종사 역시 다시 회항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광섭의 독사 눈은 아직도 계속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김준을 찾고 있었다.

김영진은 불안했다. 시내로 들어서면서부터 오토바이를 추적하는게 예상밖으로 어려워 지고 있다. 영업용 택시들이 많았다. 항구와 온천지대가 같이 끼어 있어서 그런지 행인들도 모두 관광객이거나 선원들이었다.
임소봉은 아예 침묵이었다. 도시는 대낮같이 밝은 네온싸인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니 거리에다 대고 함부로 총을 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는 저격총을 손에 쥔 채로 윤영범을 호출했다.

윤영범의 자가용은 좌회전을 하고 있었다. JR 열차가 막 요코하마를 향해 발차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타미역 앞이었다. 그는 역전을 응시하며 자동차를 천천히 몰았다. 역전 앞 광장에서는 폭우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다.
쥐죽은듯 조용했다. 아니 그에게만 그런지 모른다. 영범은 어두운 표정으로 옆좌석에 앉아있는 김영삼을 바라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둘 다 떠난 거 같은데... 아무래도 이곳엔 없는 거 같아."
그때 영범의 눈에 광장 한복판에서 키스를 하는 남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영범은 침을 꼴깍 삼키며 서서히 자가용을 광장 옆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시계탑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하레이다비죤 오토바이가 눈에 들어왔다.
영범은 차 문을 박차고 뛰어 나왔다. 어느새 김영삼은 권총을 손에 들고 시계탑으로 뛰어가고 있다. 영범은 그런 영삼에게 뒤쪽으로 돌아가라고 버럭 외쳤다.

준은 아타미 역 광장에 도착한뒤 오토바이의 시동을 끄고 있었다. 그때 사유리가 뒤좌석에서 내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행운을 빌께요. 전 도쿄에 돌아가면 나쓰에 언니를 찾아 봐야해요. 아까 너무 걱정이 되던데..."
"맨션에 돌아오지 않았으면 대한민국 대사관에 전화를 해보시오. 어쩌면 그쪽에서 소식을 알려올 것이오."
"대사관이요? 시간 남으면 그렇게 하죠. 전 경시청에 신고할 생각이었거든요."
그렇게 말하던 사유리. 별안간 김준의 가슴에 낙지처럼 안긴다. 그리고 기습 키스.
김준 역시 엉겹결에 사유리를 껴안았다. 사유리는 작게 헐떡이고 있었다.
사유리는 키스가 끝나자 히풋 웃으며 말했다.
"이건 언니 몫이예요. 제것은 세이신 고교를 졸업하면 해 주세요. 제 졸업식날 오실 거죠? 이 오토바이 또 타고 싶은데... 흐..."

음. 그때까지 기다리고 싶지 않은데.

"아저씨 먼저 떠나세요. 전 이 오토바이 적당한 데다 팔아먹고 갈께요."
"팔아 먹다니? 이건 친구 오토바이가 아니었나?"
"친구라뇨? 이거 훔친 거예요. 아까 나오다가 별장 앞에 오토바이가 서있길래 애라 모르겠다 하구 굴려온 거죠... 흐."
그 순간 사유리의 뒤쪽에서 별안간 윤영범이 뛰어 들었다. 준은 순간적으로 사유리를 옆으로 젖히고 달려드는 윤영범의 복부를 향해 어퍼컷을 날렸다. 영범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그 자리에 무릅을 꿇었다. 영범의 품에서 권총이 떨어 졌다.
준은 영범을 내려다 보다가 또다른 동료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측이었다.
우측에서 갑자기 김영삼이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왔다. 준은 살짝 몸을 뛰로 빼면서 영삼의 공격을 피했다. 그런 뒤 광장바닥에 떨어진 윤영범의 권총을 집어드는 순간이었다.

하늘에서 서치라이트 빛이 김준을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진광섭을 태운 에어로스페이스 헬기가 착륙할 공간을 찾다가,역광장에서 부하들과 격투중인 김준을 발견한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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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양의 하드보일드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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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위를 둘러보았다. 광장 안에서 하나 둘 걸음을 멈추어 서는 사람들이 보였다. 해상자위대 군복 차림의 패거리들도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허공에서는 강렬한 서치라이트 빛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까부터 폭우는 세차게 준의 얼굴을 때리고 있고.
준은 현기증을 느끼며 권총을 겨누었다. 하지만 적이 누군 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무슨 이유로. 난. 이 권총을 집어든 것일까.
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들고 있던 권총을 광장 바닥에 크게 팽개쳤다.
그러자 고영삼이가 권총을 겨누면서 걸어오다 말고 우똑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더니 영삼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권총을 자신의 홀스트에 집어넣었다.
2 대 1.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영삼의 뇌리에 스쳤다.

"뭐야 저 자식들. 지금 쇼하는 거야,뭐야. 야 너. 빨리 헬기를 착륙시켜!"
헬기 조종사는 겁을 잔뜩 먹고 진광섭을 돌아다 보았다.
"하지만 여기는..."
"입닥쳐 이 자식아! 너 자꾸 어보트할래? 내가 어소라이즈 한다고 했잖아? 너 도대체 두티 정신 있는 놈이야,없는 놈이야?"
팍팍팍-----
에어로스페이스 푸마 헬기는 7.5톤의 육중한 덩치를 회전시켰다. 폭우로 인해 생긴 물안개가 꼬리날개의 로터에 힘차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헬기는 총연장이 15미터에 달했기 때문에 마땅하게 착륙할 장소가 없었다.
헬기는 다시 아타미역 광장 상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그런 뒤 레프트 턴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광섭은 조종사에게 착륙장소를 지정해 준 뒤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김준을 내려다보았다. 아파치 헬기였다면 스트레이프(기총소사)라도 갈기고 싶을 정도로 진광섭은 화가 나 있었다.

준은 다시 헬기를 올려다보았다. 폭우 속에 헬기의 소음이 심하게 들려왔다.
아찔했다. 준은 자신의 체온이 시속 백마일로 급강하하는 것을 느꼈다.
싸움이라면 자신이 있었다. 컴퓨터를 만지기 전에는 복싱도 해보았고,태권도에도 심취해 고등학교때 3단 자격증까지 따기도 했다. 하지만 앞의 두 남자는 빈틈이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허벅지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불안했다. 준은 다시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대로 도망가는 방법은 없을까.
윤영범은 김준을 노려보다가 그가 한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음을 알았다.
그제야 영범은 맨션옥상에서의 일을 떠 올렸다. 이놈은 김영진의 총에 부상을 당했던 게다.
준은 노트북으로 앞 가슴을 가린 상태에서 영범이와 영삼을 바라보았다.
둘은 식식거리며 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아무래도 영범이 쪽이 화가 잔뜩 난 것 같다. 그는 땅바닥에 팽개쳐진 자신의 권총을 발로 차 낸뒤 양복 상의를 벗어 젖혔다. 이브생로랑 와이셔츠 밑에서 짤막하지만 튼튼한 근육이 움직이고 있다.
"뭐야! 한판 붙자는 거야? 그럼 그 상자는 치워!"

상자라니...
이건 노트북이다...

준은 묘한 기분에 미소를 지으며 영범을 쏘아보았다. 그 옆에서 사뇨 나쓰에는 잔뜩 당황한 눈으로 헬기를 쫓아 시선을 움직이고 있었다. 빗방울은 그녀의 창백한 얼굴 위에서 잘게 부서지고 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아저씬 범죄자에요?"
"몰라. 넌 이곳에서 피해라. 가서 다이어트 해야 할 시간이잖아."
"싫은데요, 저보고 사내들 눈요기 감이나 되라는 건 가요?"
급할 때는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려 보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그럼 싸울 수 있겠니?"
"당연하죠."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준의 앞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뒤 당수도인지 공수도인지 헷갈리는 포즈를 취했다. 허리는 휘청이듯 가녀렸지만 앙칼지게 힘이 들어가 있다. 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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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어지러웠다. 연거푸 구역질이 나왔다.
미나가 자신의 작업을 지금까지 지켜보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시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가느다란 입에서 흘러 나왔다.
하야시는 불쑥 얼굴을 들더니 타월을 꺼내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무지개 빛을 보이며 등 뒤에서 출렁거렸다.

꼴 보기 싫다. 이런 모습은.

하야시는 칫솔질을 시작했다. 시간이 느릿하게 흐르고 있다. 잠이나 잘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한숨도 자지 않았다. 피곤했다. 하야시는 욕실의 불을 끈 뒤 변기 뚜껑을 내려놓고 그 위에 걸터앉았다. 쉬고 싶었다.
차임벨 소리가 들렸다. 그런 뒤 누군가가 거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야시는 알았다. 닥치는 대로 어둠 속에서 손에 집히는 것을 집어들었다.
50센치 길이의 백블러시(등 닦는 솔)가 손에 잡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일어나 욕실 문을 안에서 열었다.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미나가 막 거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붉게 홍조를 띈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오빠 나 왔어...
하야시는 충혈된 눈으로 미나를 노려보면서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이 때문에 거실용 스탠드 등이 와락 소리를 내며 쓰려졌다. 그러자 별안간 하야시의 눈에 스탠드 대가 바짝 다가왔다. 그는 스탠드 대를 내려다보다가 백블러시를 버리고 1미터 길이의 스탠드 대를 집어들었다.
오빠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미나는 와락 겁을 먹고 뒤로 물러났다. 소파가 발에 걸렸다. 그녀는 소파 뒤쪽으로 도망을 가려다가,안되겠는지 조심스럽게 소파 위로 올라섰다. 그런 뒤 무릎을 꿇었다. 두 눈은 가늘게 떨리고 있다.
하야시는 미나를 응시하다가 스탠드 대를 휘둘렀다. 무섭게 허공을 갈랐다.
"뭐하다 온 거야?"
"말해봐!"
"어느 놈을 만난 거지?"
뭐가...?
"이게...어디다 대고 눈알 부릅뜨는 거야!"
다시 하야시가 힘차게 스탠드 대를 야구방망이처럼 내려쳤다. 스탠드 대는 곧장 미나의 옆쪽 소파에 걸렸다. 퍽 소리가 났다. 그제야 미나는 안색이 변했다.
냉혹하게. 미나는 하야시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오빠와 비슷한 남자와 데이트를 했을 뿐이야. 이게 잘못인가...잘못이냐구..."
하야시는 별안간 겁을 먹고 뒷걸음질을 쳤다.
방금전 할머니의 음성이 들려왔던 게다. 그것도 실어증에 걸린 미나의 입에서 들려왔던 게다. 하야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거실 벽에 몸을 납작하게 붙였다. 어쩌면 환청을 들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멍하니 미나를 쳐다보다가,급히 몸을 돌려 할머니가 누워있는 방 문을 열고 뛰어 들어 갔다.
할머니는 없었다.
출입문 앞에는 그녀가 즐겨보는 마이니찌 신문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신문 하나를 집어들었다. 15일전 신문이다.
하야시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거실로 걸어 나왔다. 미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탁자 위에서 쪽지가 발견되었다.

출근할 겁니다. 오빠.
용서해 주세요.
잘못했어요.

하야시는 두 눈을 부릅떴다. 욕설이 다시 하야시의 입에서 튀어 나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실 벽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며 하야시에게 붙어오고 있었다.
잠을 자지 않아서 그러는 게다.
하야시는 현기증이 일어나는 것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다시 스탠드 대를 집었다. 그런 뒤 마구 스탠드 대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야시의 앞에서 부서져 내려갔다.
하야시는 땀을 억수같이 흘리며 숨을 몰아 쉬었다. 별안간 할머니의 행방이 궁금했다.
하야시는 거실 안을 둘러보았다. 주방 앞에 있는 신형 냉장고가 하야시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안쪽 옆으로 서 있는 구형 냉장고.
하야시는 냉장고를 향해 걸어갔다. 마쓰시다 제품의 신형 냉장고는 포장지만 뜯겨진 상태로 아직 전기콘센트가 꽂혀 있지 않았다. 하야시는 연두색 냉장고 표면을 바라보다가 거실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구형 냉장고가 있는 주방 안쪽으로 뒤돌아 걸어갔다. 차가운 음료수가 마시고 싶었다.
하야시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순간 하야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검은 비닐봉투에 담겨 냉장고 안에 있다.
하야시는 잔뜩 겁을 먹은 눈으로 검은 비닐을 응시하다가 슬며시 오른손으로 봉투를 잡아 당겨보았다.
툭-----!!
토막 난 사람의 손 하나가 하야시의 발 밑으로 굴러 떨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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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범은 돌려차기를 하다가 우뚝 멈추었다. 사유리가 자신의 발끝에서 휘청 이며 쓰러지고 있다. 어린 여자를 때리다니. 무식한 남자라는 소리를 듣겠군.
영범은 미안했는지 빙그레 미소를 지어 보이며 사유리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순간 사유리가 벌떡 일어나면서 날카롭게 영범의 손을 입으로 물어왔다.
아악----!!
영범은 깜짝놀란 표정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손에서 피가 흘러 내렸다.
"뭐야,이거! 미친 여자 아냐?"
"나 미쳤다. 어쩔래? 한번 세이신걸 솜씨 보여줄까?"
사유리는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서 뒷걸음질을 치는 영범을 향해 자신의 몸을 이동해 갔다. 영범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재차 뒷걸음질을 쳤다. 사유리의 눈은 아까 와는 다르게 예사롭지가 않았다. 잔뜩 독기를 품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역시 여자는 때리는 게 아닌데...
어느 순간에 사유리의 오른손이 영범의 와이셔츠 깃을 잡는가 했는데 날쌔게 잡아 당겼다. 동시에 쿵 소리와 함께 영범의 몸이 사유리의 어깨 위에서 가위를 그리며 굴러 떨어졌다. 귀신같은 솜씨였다.
준은 얼빠진 얼굴로 사유리의 공격을 지켜보았다. 사뇨 사유리. 그 소녀가 이번에는 김영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녀의 발은 뱀이 기어가듯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있었는데,유도선수가 최상의 컨디션으로 시합에 임하는 자세 같다.
영삼은 갑자기 다크호스가 나타났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겁을 먹을 영삼이가 아니었다. 어린 여자가 아닌가.
영삼은 다리를 뒤로 뺀 상태에서 갑자기 앞쪽으로 몸을 던졌다. 순간 번개같이 몸을 옆으로 이동한 사유리가 영삼에게 안장다리 공격을 시도했다.
쿵---- 소리와 함께 영삼의 몸은 땅바닥으로 굴렀다. 동시에 사유리의 음성이 묻어 나왔다.
"뭐해요? 빨리 시동 거세요! 이 녀석들은 제가 상대할께요!!"

읔...이래도 되는 거야?

김준은 잽싸게 사유리가 던져 주는 열쇠를 한 손으로 낚아 챈 뒤 오토바이 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또다시 등위에서 사유리의 공격에 누군가 한명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곧바로 하레이다비존의 시동을 걸었다. 부다닥 소리가 머플러를 통해 힘차게 튀어 나왔다. 폭우때문에 엔진이 잠시 먹통인 것 같았는데,곧바로 시동이 걸렸다.
꽈쾅-----
오토바이가 그 자리에서 스타트를 끊는 동시에 사유리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와 뒷좌석에 올라탔다.
"잡아! 놈을 잡으란 말야!"
윤영범이 버럭 외치자 영삼은 다시 홀스트에서 번개같이 권총을 꺼냈다.
그런 뒤 다짜고짜 한방 쏘아 대었다.
"엄마야-----!!"
사유리는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서 화들짝 놀래 뒤를 돌아다보았다. 총알 한발이 뒷바퀴 옆으로 스쳐지나갔다. 다시 윤영범이 연거푸 권총을 쏘아대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 총알은 광장 바닥에 질퍽하게 고여 있는 물에 박히면서 요란하게 네온 싸인 빛을 토했다.
다시 한방.
윤영범은 사격을 멈춘 뒤 입을 벌린 채 앞쪽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진광섭의 헬기였다.
헬기는 광장 앞 도로에 있는 상가 빌딩을 끼고 허공 3시방향에서 급속하게 하강을 하고 있었다.
"헬기예요! 아저씨!!"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준은 바로 머리 위에서 헬기가 하강하는 모습이 보이자 급히 브레이크를 잡았다. 그런 뒤 잽싸게 브레이크를 풀어헤치는 동시에 다시 엔진 출력을 높였다. 다행이었다. 뒷바퀴에 두가지 동작이 그대로 흡수되면서 일제 혼다 CBR 오토바이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아니 그것보다는 좀 더 육중했을 것이다. 준이 핸들을 돌리며 자신의 몸무게를 옆으로 굴리자, 하레이다비존 오토바이까지 그림같이 옆으로 쓰러져 내려갔다. 그런 뒤 헬기의 좌현항법등 아래로 날카롭게 빨려 들어갔다.
그 순간에도 헬기는 아래쪽 사각을 죽이며 착륙을 시도하고 있었다. 지면까지는 공간이 1미터 남짓했을 것이다. 진광섭의 눈에 하레이다비존 오토바이가 귀신까지 도로를 긁으며 쓰러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녀석이 충돌하기 전에 포기했단 말인가?
광섭은 권총을 손에 쥔 상태에서 반대편으로 달려가 창 밖을 내려다보았다.
아니었다. 오토바이는 도로 바닥에 몸통을 붙인 상태로 일직선을 그으며 이쪽으로 미끄러져 나오는가 했는데,그대로 휘청이듯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그런 뒤 인도 위의 쓰레기통을 박차고 아타미 역전 왼편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헬기의 뒤쪽이었다.
광섭은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자식 저거...어쩐지 잘 탄다고 했더니...오토바이 선수였구만!

사유리는 방금전 경험한 것이 믿을 수 없는지 준의 목덜미를 와락 안은 상태에서 외쳤다.
"아저씨,나 죽는 줄 알았어요!"
온몸이 긴장되었는지 사유리는 어느새 뒷좌석에서 엉거주춤 일어선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헬기와 충돌한 게 아니었나요?"
"아냐! CBR 400cc 오토바이보다는 나쁘군. 이 오토바이 말야!"
"어머. 오토바이 레이서였어요?"
준은 히쭉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냥 폼이야! 할리와 말보로맨을 재밌게 본 적이 있었어. 그걸 흉내내려고 경부고속도로를 효성 크루즈를 타고 달린 적이 많았지!"
"뭐라고요? 안 들려요!"
"아,사유리는 한국지리를 모르나? 맞아. 고속도로를 탈수는 없어. 하지만 일부 특권층은 그게 가능했어!"
"특권층이라뇨!"
"음. 몰랐나? 나 폭주족 출신이야."
한동안 김준은 오보바이레이스에 미친 적이 있었다. 남들보다 멋있어 보이려고 소바를 30센치나 높여보기도 했다. 그런 뒤 번쩍번쩍하는 안개등을 달고,경찰 사이렌 소리가 나는 경적기를 달아보기도 했다.
9년전 서울에서의 일이다.

진광섭의 헬기는 역전 앞 도로에서 회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왕복 2차선 도로. 폭이 15미터 될까 말까한 공간에 끼어 있는 상태에서 헬기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다. 아무래도 그대로 착륙을 감행해야 했다.
광섭은 화가 났다. 앞 뒤에서 자동차들이 빵빵거리기 시작하자 광섭은 헬기를 이륙시키라고 조종사에게 버럭 외쳤다. 그때 번개가 내려치는 모습이 보였다.
광장 시계탑이 크게 흔들렸다.
광섭은 헬기에서 내렸다. 이미 순찰차가 사이렌 소리를 내며 대기 중이었다.
여경찰 한 명이 광섭에게 다가와 경례를 했다.
광섭은 잽싸게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개의 신분증 중에서 인터폴 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인터폴은 상시하는 경찰조직이 아니라 그때그때마다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간에 조직하는 국제경찰이었다. 여순경은 증명서를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헬기를 응시하더니 입을 열었다.
"선생님의 헬기가 주차위반을 했군요. 벌금을 얼마나 먹일까요?"
"차라리 헬기를 끌고 가시오! 저 놈의 조종사를 교도소에 처 넣을 수 있다면 내 대사관까지 동원해서라도 협조를 하겠소만!"
그렇게 말한 뒤 광섭은 성큼성큼 광장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윤영범과 고영삼이가 비를 후쭐하게 맞으며 광섭을 기다리고 있다. 광섭의 주먹에 빰을 맞은 쪽은 고영삼이었다. 영삼의 빰에 면도칼 자국이 날 정도로 광섭은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니네들 안기부 맞아? 엉? 어느 나라 사람이야? 애국심은 있는 거냐? 엉?"
"죄,죄송합니다. 저희가 놓쳤습니다..."
"면목없습니다."
"몸을 그 따위로 아끼다니 말야! 굴려. 이 노무 자식들! 당장 굴리지 못해?"
진광섭이가 그렇게 외치자,광섭의 직속 부하가 아닌 영범은 와락 겁을 먹고 광장바닥에 덥석 엎드렸다. 그러더니 잔뜩 겁을 먹은 표정으로 몸을 굴리기 시작했다.
김영진과 임소봉이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피곤죽으로 엉망이 된 영범이가 혼자서 기다 있었다. 이미 진광섭은 아타미항구를 떠나 도쿄로 이동한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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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미나의 춤은 이날 밤 왠지 달라 보였다. 그것을 아는 건 그녀 뿐만이 아니다. 경면은 좌측 복도 끝 테이블에 앉아 미나를 관찰하고 있다.
어제 밤부터 한숨도 자지 않았던 경면. 미나와의 뜨거운 정사가 떠오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경면은 오늘 회사에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미나는 애프터 신청을 받아 주었고,저녁에 자신을 만나러 오라고 했다. 그 때문에 경면은 이미 4시간 전부터 미나를 지켜보며 그녀의 퇴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면은 다시 손목시계를 보았다. 새벽 3시 30분... 미나가 퇴근할 시간인 게다. 경면은 아까 4시간 전에 정문 출입문에서 만났을 때 미나가 슬며시 건네 준 라이터의 광고 문안을 다시 읽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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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끼 러브 호텔
초특급 걸프렌드가 아이스맨을 녹인다.
각종 섹스 용구 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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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끼 러브 호텔은 어젯밤부터 오늘 오후까지 경면과 미나가 함께 투숙했던 호텔이다. 벽 천장에 거울이 붙어있고,소니 오디오와 뉴저지에서 가져왔다는 인디언 양탄자가 바닥에 깔려 있는 아늑한 호텔로 <저팬 팬트하우스> 잡지에 자주 소개될 정도로 그 방면에선 정평이 난 호텔였다.
그곳에서 간밤에 미나와 경면은 몇번을 같이 몸을 섞었는지 모른다. 미나는 미친 여자였다. 최소한 경면의 상식으로는 말이다. 처음에 경면은 그녀를 칵테일 글라스에 스티어 하듯 접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옷을 벗기자 그때 부터는 상황이 달라졌다. 오히려 미나가 할딱이며 경면을 압도해온 것이다. 경면도 미친 듯 그녀를 탐했다.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아무래도 좋았다. 아까 오후에 헤어질때 경면은 미나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깨달았다. 행복했다.
이 몸이...정력맨이란 걸 안 거지.
경면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소파에서 일어났다. 타탄체크 무늬의 스코틀랜드 풍 유니폼을 입은 웨이트리스가 경면의 앞쪽에서 걸어갔다.
경면은 슬쩍 웨이트리스의 히프를 손가락으로 찔러 보이고는 바글바글 사람들이 모여있는 스테이지를 통해 <에콜 드 신주쿠>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이틀동안 폭우로 도시는 온통 습기에 차있다.
경면은 주차장안에 있는 자신의 차 앞에서 미나가 나오길 기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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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햄머드릴로 바닥 콘크리트를 부수고 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상체에 붙어있다. 벌써 몇번째인가. 하야시는 자신의 몸이 쓰러지려는 것을 간신히 이겨내가며 바닥을 햄머드릴로 부수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적당한 크기가 완성된 거 같다. 하야시는 삽으로 바닥 밑으로 보이는 흙을 파 올리기 시작했다. 이틀동안 비가 내려서인지 흙은 물기로 촉촉했다.
흙을 다 파 낸 뒤 하야시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할머니의 시체를 구덩이 안에 쏟아 부었다. 그런 뒤 흙을 다시 덮기 시작했다. 삽질을 하다 말고 하야시는 고개를 쳐들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었지만 눈빛만은 긴장과 불안으로 가득차 있다.
할머니 시체가 온전하게 들어가자 하야시는 시멘트 가루를 흙더미 위에 부어 덮었다. 밀실 안은 시멘트가루로 자욱했지만 하야시는 하던 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이건 하야시가 할 수 있는 친할머니에 대한 최대한의 예의였다.
그리고 미나를 위한 최선의 배래인 게다.
이제 하야시는 미나를 증오하지 않았다. 미나가 무슨 이유로 할머니를 살해했는지도 궁금하지 않았다. 깨끗이 잊자. 할머니가 가족이듯 미나 역시 그에겐 하나 밖에 남지 않은 가족인 게다.
일을 하는 게다.
하야시는 온몸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태초의 그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 그가 서있는 장소가 다락방과는 다른 새로운 장소라서 그런 건 아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장소는 다락방보다 아늑했다.
하야시는 콘센트에 전기코드를 꽂았다. 그런 뒤 컴퓨터를 켜 보았다.
그러자 10평 남짓한 지하공간에서 그의 작업도구인 컴퓨터 3대가 요란하게 작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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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 20분. 경면은 불안한 듯 자신의 카시오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이틀동안 줄기차게 내리던 비는 서서히 이슬비로 바뀌면서 주차장안은 고즈넉한 정적이 감돌았다. 미나는 오지 않았다. 경면은 다시금 자신의 자가용에 몸을 기대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어떻게 된 걸까...
경면은 물끄러미 에콜 드 신주쿠를 바라보았다. 옆문은 잠겨 있다. 네온사인도 멈춘지 벌써 20분이 지나가고 있다. 하지만 미나는 나오지 않고 있다. 기다리는 걸 포기하고 곧장 호텔로 가볼까... 어쩌면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는지도 모른다. 경면은 아무래도 약속장소가 헷갈리는지 고개를 갸웃 뚱했다.
경면은 담배를 자동차 본 네트에 비벼 끄고 자동차 문을 열었다. 그런 뒤 운전석에 올라탔다. 순간 등 뒤에서 날카롭게 무엇인가가 경면의 뒤통수로 날아왔다.
날카로왔다.
경면은 자신의 머리가 쩌억 소리를 내며 양쪽으로 갈라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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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손도끼를 핸드백 안에 넣었다. 그런 뒤 면장갑을 벗어 얼굴에 튄 핏방울을 닦았다. 붉은 색의 원피스였다. 그 때문에 옷에 뭍은 피는 눈에 띄지 않았다. 어차피 옷에 뭍은 피는 신경을 쓸 필요가 없었다. 빗방울이 다시 거세지고 있었기 때문에 긴좌까지 걸어가다 보면 깨끗이 닦여지리라.
미나는 흥얼거리며 새벽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하야시 오빠에게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바로 자기자신에게 있었다고 그녀는 깨달았다.
미나는 슬펐다. 아까 보았던 오빠의 모습. 그때문에 오빠에게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무슨 짓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리고,그것을 증명하기 위해,미나는 지금 방금전에 이경면을 살해한 것이다.

새벽 6시 20분. 미나는 마이니찌 신문을 사들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서고 있다. 그런 뒤 언제나 그랬듯 마일드세븐 한 보루를 거실 탁자에 올려놓고 샤워를 시작했다. 오늘은 보통 때보다는 많이 신경이 쓰였다. 미나는 자신의 몸을 정성 들여 닦기 시작했다. 비누거품속에서 그녀의 알맞게 익은 젖가슴이 출렁거렸다.
미나는 알몸으로 욕실 밖으로 나왔다. 그런 뒤 나이트 가운으로 옷을 갈아 입고 우동을 끓이기 위해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런 뒤 10여분 정도 지났을까.
미나는 탁자위의 담배를 가슴에 품고 다락방으로 연결된 계단을 올라갔다.
노크를 했다. 대답이 없었다.
미나는 야릇한 흥분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다락방 출입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하야시 오빠도. 7대의 모니터도. 3대의 컴퓨터 본체도...
다락방은 황량하게 비어 있었다.
미나는 울컥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서둘러 계단을 타고 뛰어 내려와 자신의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뒤 곧장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천장 구멍으로 연결된 랜 케이블 선이 끊어져 있다.

"이런 나쁜 자식...!"

미나는 화가 버럭 났다. 이마가 후끈거렸다. 그녀는 닥치는 대로 차단스를 잡아 당겼고,그러자 차단스는 미나 쪽으로 와르륵 무너져 내렸다.
아냐,오빠가 날 배신할 리가 없어,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어느새 미나는 눈 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미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거실로 나온 뒤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뒤 냉장고문을 와락 열었다. 역시 추측했던 대로 였다. 검은색 봉투에 담아 있어야 할 할머니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시큼하고 역겨운 냄새가 냉장고 안에서 흘러 나왔다.
이번에는 서둘러 냉동실 문을 열어 보았다. 냉동실 안에서 할머니의 얼굴이 힌 서리가 낀 채 두 눈을 부릅뜨고 미나를 노려보고 있다.

"당신 때문이야. 당신은 죽은 뒤에도 내 사랑을 망친 거야!"

미나는 냉동실 문을 꽈당 닫고 다시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그런 뒤 닥치는 대로 발에 걸리는 책들을 걷어차면서 전기 콘센트를 찾았다.
잠시 후. 미나의 구형 486 컴퓨터는 웅 거리며 부팅을 시작했다.

컴퓨터는 오랜만이었다. 오빠의 솜씨를 지켜보 좋아했는데도 말이다.

미나는 생각나는 데로 키보드를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후꾸오 미나.
그녀는 오빠 하야시보다 뛰어난 해커였지만 그 사실을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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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시는 쥐 죽은 듯 놀란 얼굴로 지하실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미나가 귀가한 게 분명했다. 거실을 뛰어다니는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다락방 출입문이 꽈당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때문에 하야시는 손전등을 들고 다시 지하실 출입문으로 올라갔다. 강철로 된 지하실 출입문은 하야시가 아까 걸어 놓은 대로 튼튼하게 잠겨있다.
비로소 안심이 되었는지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조심스럽게 손수건으로 닦기 시작했다. 그런 뒤 컴퓨터가 설치된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의 발끝 에서는 새벽 4시에 편의점에서 배달되어온 인스턴트 식품들이 걸리적거렸다.
하야시는 물끄러미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다가 다시 천장으로 귀를 기울였다.
미나가 자기 방으로 들어간 모양이다. 하야시는 식은 땀을 흘리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번 작업이 끝난 뒤에는 미국이건 어디건 미나를 피할 수 있는 곳으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그게 그녀나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자신만 일본에서 사라진다면 미나가 할머니를 살해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일본 안에 존재하지 않을 터이니까 말이다.
하야시는 의뢰인이 보내온 작업 목록이 프린팅된 용지를 집어들어서 다시 처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번 작업은 아무래도 좀 난해한 일이었다. 그는 담배를 입에 물고 터보라이터 불을 붙이다가 별안간 쥐색 눈을 번쩍였다.
갑자기 4번째 모니터에서 이상한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4번째 모니터 화면에는 니프티서브 통신망이 연결되어 톱화면이 펼쳐져 있는 상태였다.
그 톱화면 상단부에 별안간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문자가 떠 올라와 있었다.

== 오빠. 돌아와 주세요. 어디에 있는 거죠. ==

하야시는 서둘러 키보드를 두들겨 보았다. 어떻게 미나가 니프티서브의 톱화면에 메시지를 남겼는지 궁금했다.
인바운드 서비스였다.
미나는 MIT 인터넷망에 침투 한뒤,그곳을 경유해 일본 국내 통신망 전체에,동시다발적으로 문제의 메시지를 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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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 마끼 준사히-히드라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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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오니쓰라 경감은 담배를 입에 물고 현장검시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살인치고는 지독한 살인이다. 두개골이 깨져 있었기 때문에 얼굴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게 불가능했다. 겨우 시체의 양복안에서 신분증을 찾아냈다. 李慶勉. 그럭저럭 한국어를 한다는 부하가 있어서 시체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읽을 수가 있다. 67년생. TM KOREA라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다.
피는 자동차안에서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첫눈에 손도끼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사망 추정시각은 이날 새벽 4시부터 5시 사이. 이미 사후경직이 시작되고 있다. 오니쓰라는 코를 틀어막고 다시 자동차안을 들여다보았다.
후루겔스 게이꼬 문제만 해도 두통인데 이게 뭔가. 오니쓰라는 과학수사반에게 커피라도 마시면서 쉬라고 말한 뒤 주차장 밖으로 걸어나왔다.
에콜드 신주쿠의 아침 풍경이 시작되고 있다. 평소와 다른 게 있다면 출근을 서두르는 샐러리맨들이 가끔 고개를 돌려 오니쓰라 일행을 지켜본다는 점이다.
오니쓰라는 부하가 뽑아다 준 종이커피를 한 손에 쥐고 입으로 훌훌 불었다.
도로 건너편에서 윤춘해가 이슬비를 맞으며 건너오는 모습이 보였다.

윤춘해는 오니쓰라를 만난 뒤 비를 맞으며 아크힐스 빌딩까지 걸어갔다.
간밤에 김영진의 연락을 들어보니 진광섭이가 깨져도 한참 깨진 모양이다.
오늘은 대체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까. 춘해는 오니쓰라 경감이 방금전 건네준 디스켓 지문에 대한 자료를 다시 머릿속으로 정리하며 길을 걸었다.
전산 팀이 작업중인 아크힐스 북동편 사무실로 들어갔을 때는 복잡하게 엉켜있는 사무가구 사이에서 상당히 아름다운 여자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사뇨 나쓰에였다. 그녀의 몸에는 레이어드 스타일의 검은 색 옷이 비에 젖어 찰싹 달라붙었고,앞이마에는 생머리가 엉켜 있었다. 하지만 핑크색 입술은 오만하게 닫혀 있다. 입술만 보아도 나쓰에의 라이프스타일이 어떤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보통 오피스걸들이 그렇듯 절약할 때는 악바리처럼 절약하고,무너질 때는 하룻밤에 무너지는 부류인 게다.
춘해는 그런 생각을 하며 나쓰에의 옆을 지나가다 말고 문득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검게 멍 자국이 나 있다. 맞은 건지 다친 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춘해는 안타까운 기분에 담배를 꺼내 나쓰에에게 내밀었다.
"한대 피워 보겠소?"
춘해가 그렇게 물어보자 나쓰에는 순순히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춘해는 뭉툭한 손으로 라이터 불을 당겨 나쓰에에게 내밀었다.
"조심하시오. 우리 팀장은 독사라고 하오만..."
"독사요?..."
나쓰에는 그렇게 되물어보며 춘해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아저씨는 곰 발바닥이군요."
춘해는 빨개진 얼굴로 나쓰에를 응시했다. 춘해의 별명이 영락없이 곰발바닥였던 게다.
춘해는 허탈한듯 한기를 느끼며 다시 나쓰에를 응시했다. 꽉 다문 입에 눈빛이 써늘한 것을 보니 라이프스타일을 하나꼬(여성용 상품정보 잡지)족이라고 단정할 수만은 없는 거 같다. 무엇인가가 머리속에 든 여자일 게다.
하지만... 독신녀는 국력낭비란 말야.

왼편으로 연결된 사무실로 들어가자 진광섭 앞에 16명의 신사복들이 일렬로 쭈욱 서있다. 양복은 각기 취향이었지만,버튼다운 셔츠와 붉은 색 넥타이를 통일해서 매고 있는 부하 16명의 모습은 완전히 그림같은 풍경이다. 역시 진광섭팀이라서 그러는 것일까. 광섭은 부하들의 복장중에서 넥타이만은 일일히 통제하며 다니고 있었다. 넥타이에 자존심이 걸린 남자처럼.
진광섭은 이만저만 화가 난 게 아니었다. 하나하나 광섭의 앞으로 불려나와 어젯밤 움직임을 문책 당하고 있다. 춘해는 식은 땀을 흘리며 사내들 맨 뒤에 걸어가 섰다. 문책이 끝나자 광섭은 요코하마로 두명,고베로 두명,쓰쿠바로 7명, 각각 인원을 분배하여 다시 투입을 하고 있다. 김준이 도망갈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 지시가 끝낸 뒤에도 광섭은 애들보고 움직이라는 지시를 하지 않고, 계속 벌 세우듯 부동자세로 서있게 했다. 잠시후에 이상운을 향해 광섭은 걸어갔다.
그러더니 난데없이 이상운을 향해 쪼인트를 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광섭의 입에서 신랄하게 욕설이 터져 나왔다.
"너 이 자식. 헬기 한대 구해보라고 했더니 그래 그따위 헬기를 구한 거냐? 이 세상에 몇 종류의 인간이 있는지 알아? 네 종류야. 근데 넌 그래 팔푼이 조종사가 딸린 헬기를 구할 수밖에 없었냐? 너 애국심은 있는 거냐? 엉?"
쿠욱,하고 이상운은 진광섭의 발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쪼인트를 가하는 줄 알았는데 동시에 복부에 더블 펀치를 날려온 게다. 통증이 와도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다.
"황영달이 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이야? 왜 어제 연락이 없었나? 앙?"
진광섭이 묻자 가나기원을 감시하러 갔던 황영달이가 총알같이 튀어나와 보고를 시작했다.
"가나기원은 문제없습니다. 24실 다다미 방이 있는 평범한 하숙집입니다. 모리타 가나에라는 여주인,그저 평범한 미망인입니다. 남편은 전산쟁이 였다는데,2년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더군요. 이들 사이에 딸 하나가 있는데 준꼬라고 합니다만..."
광섭은 두 눈을 부릅뜨고 황영달을 노려보았다.
"뭐야...지금 나에게 말한 게 밥상이야 보고서야? 너 정말 안기부 요원 맞아?"
동시에 진광섭은 번개같이 황영달의 뺨을 돌려 쳤다. 황영달은 붉어진 얼굴로 뒤로 주춤 물러서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밥,밥상이 아니라...보고서입니다. 면목없습니다."
"까불지 말고,밥상 계속 해봐!"
"예. 김준 옆방에 마에다라는 일본인이 살고 있습니다...역시 프로그래머입니다. 아니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도메인 운영자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어떤 도메인domain인데 그래?"
"방위청 도메인을 관리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27세의 나이. 인터넷용으로 오픈된 방위청 컴퓨터 하나를 관리한다고 합니다. 유닉스도 빠삭한 녀석인데, 이 녀석의 유일한 취미가 AV(adult video)에 심취하는 거랍니다. 이 때문에 하루에도 서너편씩 빌려 보는 괴짜라는 군요. 제생각입니만,아마 그 나머지 시간을 컴퓨터작업에 투자하는 걸로 느껴집니다."
이때 윤춘해가 앞으로 걸어나오며 말했다.
"광섭씨. 이 디스켓 말이요. 이 디스켓에도 마에다 그 친구의 지문이 찍혀 있습니다. 아무래도 마에다가 이 디스켓과 연관이 있는거 같은데..."
"디스켓이라뇨? 그건 뭐요? 춘해씨?"
"김준이 찾아 다녔던 디스켓이오. 어제 오후에 TV도쿄 보도실에서 발견했는데,간밤에 혹시나 해서 경시청 도움으로 지문을 추적해 보았소.
사망한 후루겔스 게이꼬의 지문과 함께 마에다의 지문도 있더군요."
"그런데요?"
"마끼 준사히의 지문도 발견되었습니다. 헌데..."
"마끼라면 자살한 여자가 아닙니까?"
"마끼 준사히 그 여자 자살한 게 아닌 거 같소. 오늘 새벽에 미국에서 귀국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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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 김준은 시티뱅크 요코하마 지점 현관에서 사유리를 기다리고 있다. 사유리가 돈 봉투를 들고 걸어 나왔다. 붉게 홍조를 띈 얼굴이다.
"아저씨. 이거 정말 아저씨 돈이에요?"
"그래."
"음... 넘 많다. 흐."
"카드는 만들었니?"
"옜썰. 이거죠. 너무 빨리 만들었나요?"
사유리는 푸른색으로 빛나는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를 흔들어 보였다.
드디어 카드가 생긴 게다. 준은 사유리와 함께 다운타운거리로 향했다.
"비밀번호는?"
"말해줄께. 키스 해주면."
또 키스라니...
"자요. 이렇게요."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잽싸게 김준의 입술을 낚아챘다. 이쯤 되니까 김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어이가 없는 지경이었다. 사실 이런 데이트는...
얼마나 고대했던 데이트인가.
가만히 있어도 여자 쪽이 알아서 해주다니 말야...
준은 붉어진 얼굴로 카드를 받아 지갑에 챙겼다. 사유리는 이미 아침에 세이신 여고에 전화를 걸었다. 그런 뒤 준을 돌아다보며 하는 말이 몸이 무지 아프걸랑요,며칠 쉴게요,라고 말한다. 준은 그런 사유리를 쓴 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일본 교육제도가 이젠 타락할 만큼 타락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정말 날 따라 다닐 생각이니?"
"하이."
"난 너같이 어린 애는 질색인데?"
"이런 데이트는 일생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하니까 놓치고 싶지 않아요. 학교야 뭐 월요일부터 다시 나가면 되죠. 사실 전 현금가방,아차...돈 많은 남자가 좋아요."
"난 현금가방이 아니야... 이 돈도 친구가 꿔준 돈이지. 죽지 말라고."
찔끔 이마를 찡그리는 사유리.
"그런 건 관심 없어요. 하여간 나쓰에가 왜 아저씨와 데이트를 했는지 알겠네요. 우리 언니,남자 무지 가리죠. 그러니까 나쓰에가 고른 파트너는 그냥... 제가 집어삼키는 경우가 많아요. 헤헤."
"그래. 강요하지는 않겠어. 다 자기 마음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나 옷 사줘요. 이 배꼽티 입고 거리 돌아다니기 싫어요. 근사한 미녀로 만들어 주세요. 저 오늘 새벽에 고생 많이 했으니까 보답은 하셔야죠."
"그보다는 먼저 병원에 가봐야 겠는데. 난 지금."
"먼저 옷부터 사주세요."
"그럼 책을 사주지. 저기 서점이 보이는 군."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사이에 김준은 휴게실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오른쪽 허벅지에서 신사복 바지를 타고 핏방울이 흘러내린 자국이 보인다.
통증이 심했다. 걷는 것은 지장이 없을 거 같았지만 아무래도 이대로 놔두면 상처자국이 악화될 거 같다. 준은 쇼윈도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폭우 대신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다.
피곤했을 게다. 김준은 끄덕끄덕 졸기 시작했다.
잠깐 졸았다가 깨어났다. 날카롭고도 속삭이는 듯한 여자 앵커의 음성.
서점 쇼윈도에 설치된 TV에서 스파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준은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자살극을 벌리고 미국으로 도망갔던 마끼 준사히에 대한 뉴스였던 게다.
준은 급히 서점 밖으로 뛰어 나와 쇼윈도 앞에 붙어 섰다.
마끼 준사히. 창백하게 생긴 여자가 조용히 인터뷰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다시 서점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그런 뒤 노트북을 무릎에 올려놓고 파워스위치를 올렸다. 부팅과 동시에 준은 곧바로 세크 BBS에 접속을 시도했다. 그런 뒤 지불방법을 카드지불로 선택하고,방금전 사유리의 이름으로 만들었던 아멕스 카드의 구좌번호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세크 BBS가 조사한 자료가 준의 눈앞에서 떠올랐다. 준은 서둘러 조사된 자료를 다운 받았다. 사유리가 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가 구입한 책은 <完全自殺マニュアル> 이라는 책이었다.
<자살 매뉴얼> 정도로 해석해야 할까.
사유리는 자살 매뉴얼을 심각하게 들쳐 보며 걸어와서는 준의 옆자리에 앉았다.
사유리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자살하려고 안달이 난 소녀같은 표정이다.
서점 점원들이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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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거실로 나왔다. 간밤에 오빠가 무슨 짓을 하고 이곳을 떠났는지 한눈에 느낄 수 있다. 정원에서 들어오는 빛이 난장판이 된 거실을 싸늘하게 비치고 있다. 미나는 반쯤 깨진 탁자로 걸어갔다. 두께 10미리의 탁자유리는 데칼코마니 형으로 금이 가 있다. 그녀는 탁자 위에서 마일드세븐 담뱃갑을 집어들었다.
복잡해...
실로 오랜만이었다. 담배를 피기 시작한 것은 여중 3학년 때부터였다.
오빠가 해킹하는 것을 몰래 지켜보다가 자신의 머리가 나쁘다고 생각하면서 생긴 흡연 습관이었는데 그만 여고 1학년때 오빠 하야시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부터 3일 동안 하야시는 미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래서 끊었던 담배인데...
다시 하야시때문에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것이다.

복수하겠어!

미나는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도마질을 시작했다. 배가 고팠다. 뭔가 먹어야 했다. 새벽에 귀가한 이후로 입에 음식을 대지 않았다. 미나는 요리를 하다말고 주방 창밖을 내다보았다. 건너편 집 욕실창문에서 만화가 고바야시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다. 미나는 버럭 화가 났다. 그녀는 주방 문을 열고 뒷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손에는 칼이 쥐어져 있다.
고바야시는 화들짝 놀라며 욕실 창문에서 고개를 내렸다. 뭔가 잘못 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가 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다니 말야. 고바야시는 면도질을 그만 두고 잠시동안 거울에 비친 자신의 뚱뚱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라도 한참이나 놀란 모양이다. 고바야시는 떨리는 손으로 손거울을 찾았다. 그런 뒤 창 밖을 향해 손거울을 비쳐 보았다.
미나가 요리용 칼로 뒷마당에서 무엇인가를 사정없이 쑤시고 있다.
무엇을 할까...
고바야시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실로 나왔다. 아내는 이미 출근을 한 모양이다. 아니군. 벌써 오전 10시나 되었나?
고바야시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외쳤다.
"네로. 네로야? 너 어디에 있는 거냐?"

고양이는 미나의 발아래쪽에서 단말마의 신음을 토하고 있었다. 고바야시의 고양이었다. 가끔은 미나네 집으로 넘어와서 놀기도 했는데 오늘은 재수가 없었다. 미나가 분노했을 때 하필이면 이쪽으로 산책을 나왔던 게다.
고양이는 부르르 몸을 떨면서 숨이 끊어졌다. 미나의 눈은 다시 조용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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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10분. 김준과 사유리는 신간선을 타고 고베로 이동을 하고 있다.
작년 1995년에 큰 지진이 발생했던 도시라 아직도 어수선할 분위기일 것이다.
고베쪽이 유리했다. 가까운곳애 간사히 국제공항이 있었으니까,여차하면 외국으로 곧바로 튈 수가 있다.
그보다는 마끼 준사히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게 궁금했다. 무슨 이유로 자살극으로 위장했을까. 준은 아까 서점안에서 작업을 했던 노트북 컴퓨터를 무릅팍에 올려놓고 세크BBS가 조사한 내용을 오픈했다. 사유리는 시름시름 앓는 거 같더니 준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고 잠을 자고 있다. 호흡소리가 세액세액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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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하철 사고사례
>> 도쿄도 통근전차는 출 퇴근 피크시에 정원의 2배를 넘는 대단한 포화 상태에 있다. 도쿄도 도심부로 들어가는 통근자 중 6할이 통근하는 데에 60분 이상 걸리고 있음을 생각할 때 통근사정의 개선은 초미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미 도쿄도 지하철은 최고 1분 10초 간격,최대 20량 편성으로 운영되고 있고...기존노선에서는 1본의 증발도 1결의 증결도 할 수가 없는 한계상황이다...
>> 복합적으로 지하철신선,신교통시스템,통근신선,복복선화 등의 건설공사도 진행되고 있지만 모두가 완성까지는 수년이 소요될 것이다. 이 때문에 도쿄도 지하철 망은 난잡한 상황에 빠져 있고,절묘한 사고나,사고를 위장한 조직적이고 불합리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다...
>> 특히 94년,95년 양해에 투입된 2종류의 테스트차량 야마테 선의 6도어 차량과 죠오반선의 2층 차량에서는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 그리고 러시아워 시에는 좌석이 들어가고,러시아워가 지나면 좌석이 나오는 아이디어 차량에서도 의문의 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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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다가 자료 검색을 중단하고 신간선 창 밖을 내다보았다.
꽃이 무리 지어 피어있는 농촌지역을 통과하고 있다. 빗방울이 며칠째 날리고 있던차라 꽃잎은 대부분 만개하던 중 떨어져 버렸다.
준은 첫 번째 자료를 크로즈한 뒤 두 번째 자료를 읽어 들였다. 내용은 지하철 파괴를 전문으로 하는 해커와 작업가능한 해커의 명단.
총 37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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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太陽 (도쿄도 야마테선 발착시간 조작 2회)
>> 孔雀王 (군마현 제3섹터선 연착 조작 33회)
>> MKj (아이디어 차량 상대로 조작 1회)
>> 地下鐵 (도쿄도 야마테선 연착 4회. 도쿄도 죠오반선 조작 2회)
>> カウンタ (산요오 신간선 연착 117회. 도쿄도 죠오반선 연착 47회)
>> ...
>> 東急HACK (야마테선 조작 1회)
>> morina (도오카이도오 신간선 사건 조작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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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단에는 김준의 닉네임인 <동급HACK>도 들어가 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세크BBS가 동급해커에 대해 조사한 세부내용을 오픈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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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急HACK
>> 국적: -- 성별: -- 추정나이: --
>> 작업 목적 : 후루겔스 게이꼬 살해
>> 작업 내역 : 야마테선 조작 1회
>> 동 1996년 3월 17일. 도쿄도 지하철망중 하나인
>> 야마테선 컴퓨터에 침투 선로변경을 성공적으로 시도.
>> 니혼바시 역을 통과할 동서선 지하철 차량에 긴밀하게
>> 선로변경을 시도한 뒤 동 차량을 긴좌선 지하철역중
>> 하나인 간다역으로 이동하는데 성공.
>> 엽기적 조작의 맨 후루겔스 게이꼬 사망
>> 작업 방법 : 경시청 파일대장 290383호 참고.
>> 야마테선 본부 자체 조사에 따르면
>> 야마테선 중앙 컴퓨터에 후루겔스 게이꼬의 사진을
>> 입력,유사 방법으로 폐쇄회로 카메라를 제어한 뒤,살해했다.
>> 작업 도구 : Sourcer V6.09
>> ASMtool
>> Converts OBJ files to ASM
>> View-It
>> Turbo Debuger
>> C언어 프로그램 File 1. Gif File 1
>> 12개의 판별 불가능한 File
>> 침투 경로 : 모두 3개의 핸드폰 번호 사용
>> 참고 : 악질해커중 하나. 동급HACK의 본국내 첫 작업은
>> 1994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판명.
>> 최초에는 산업데이터 해킹 범죄자로 간주되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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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흐릿하게 미소를 흘렸다. 자신이 고급 산업스파이에서 졸지에 야마테선을 해킹한 3류 해커로 추락했다고 생각을 하니 할 말이 없다.
준은 다시 일일히 작업가능한 해커들의 활동내역을 읽기 시작했다.
신간선이 시즈오카에 도착하기 20분전에 김준은 구보 마끼 준사히에 대해 조사된 내용을 읽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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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예춘추 93년 7월 - 구보 마끼 준사히. 자살시도하다가 실패하다
>> 논노 95년 기사 3회 연재 - 구보 마끼 준사히. 패션계에 진출하다
>> 문예춘추 96년 1월 - 구보 마끼 준사히. 미야자야 리에와 절교 선언하다
>> 문예춘추 96년 2월 - 구보 마끼 준사히. 자신의 동성애설 극구 부인.
>> 주간 화제 96년 2월 - 구보 마끼 준사히. 인기 만회 위해 자살극 시도하다
>> 은행원 25시 - 은행원 독신남성들. 인기여성으로 구보 마끼 준사히 선택.
>> ...
>> 마이니찌 96년 3월 7일 - 구보 마끼 준사히. 이즈반도에서 자살하다.
>> 요미우리 96년 3월 8일 - 경시청. 불에 탄 마끼의 시체를 요트안에서 발견하다.
>> 일간스포츠 96년 3월 8일 - 구보 마끼 자살. 20대 청년들을 공황상태로 만들다.
>> 니혼게이자이 96년 3월 9일 - 경시청. 구보 마끼 유서를 찾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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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이 가는 내용은 없다. 마끼는 구보 부동산 회장의 외동딸로 수수하게 성장한 여자였다. 대학시절 모델 에이전시에 소속되어 활동을 시작한 것이 마끼 준사히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지적인 동시에 수수했다. 화장을 안하는 게 그녀의 매력이었다. 아마 화장을 하였다면 놀랄 정도로 이미지업을 할수 있을 것이다.
준의 뇌리에 마끼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언젠가 한번 TV에서 본적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저 덤덤하게 여겨졌는데...
준은 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흥미 있는 기사 하나를 찾아냈다.
마끼 준사히가 매거진하우스를 통해 발표한 인터뷰성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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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Q: 취미는?
>> A: PC통신이에요. 아시죠? 제 아이디는 저보다 유명하던데...
>> Q: 아. MK라는 아이디 유명하죠. 그런데 왜 하필 피시통신을 취미로...
>> A: 외로운 거죠. 이야기할 상대를 그때 그때 조달할 수는 없으니까요. 간혹은 그래요. 밤 4시경에 일어나는 경우가 많아요. 아니죠. 아마 술을 마시고 돌아온 뒤 무턱대고 컴퓨터를 켜는 버릇이 있어서 그런 지도 모릅니다만. 어쨌든 환상이 보인답니다.
>> Q: 본지가 알기로는 마끼양의 통신생활은 꽤 난잡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 A: 아,그 점은 피시밴에서만 그래요. 저팬서브나 다른 통신망에선 비교적 얌전하게 활동을 하죠. 채팅이나 머드 게임중에 만난 파트너들은 제가 마끼라고 하면 놀라죠. 전 그 점이 재미있었어요. 어쩌면 그것에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지도 모르겠죠.
>> Q: 그럼 피시밴에 올려놓은 자료는 소문이 아닌 사실입니까?
>> A: 결국 오늘 인터뷰의 중심이군요. 네 사실입니다. 전 피시밴에 글을 올려 보기도 했습니다. 헌데 사람들은 제 글을 안 읽어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이미지파일을 올려본 겁니다. 다음날 밤에 전 놀랬어요.
>> 제 이미지 파일을 다운 받아간 사람이 무려 7천명이나 되더군요.
>> 기뻤죠. 그날 하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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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잠시 검색을 중단하고 폴더를 전환했다. 노트북 화면에 피시밴 통신망이 곧바로 떠올랐다. 자료실로 이동을 했다. 마끼 준사히가 올려놓은 이미지 파일이 검색되어 나타났다. 인터뷰 내용대로 마끼는 3개의 이미지 파일을 피시밴 자료실에 등록시켜 놓았다.

>> mkjsexy1.exe 마끼 준사히의 봄입니다
>> mkjsexy2.exe 마끼 준사히의 나른한 오후입니다
>> mkjsexy3.exe 마끼 준사히의 해변입니다

이미지 파일답지 않게 EXE형식의 실행파일로 올라가 있다. 애니메이션 파일을 아예 실행파일로 바꾸어 놓은 모양이다. 다운 받아 가는 사람들에게 편리함을 주려 했는지 모른다.
준은 3개의 EXE 파일을 자신의 노트북컴퓨터로 다운을 받았다. 그런 뒤 하나하나 실행을 시켜 보았다.
mkjsexy1.
파일을 실행시키자 곧바로 노트북 화면은 영화화면처럼 바뀌었다. 음성지원도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마끼는 어느 호화로운 거실에 앉아 있다. 도쿄도 전문학원 출신인 자신의 과거를 나른하게 고백을 하고 있다. 그러다가 무엇인가 말하는 듯 했는데 곧바로 옷을 벗기 시작한다. 마끼의 젖가슴이 화면 가득 떠올랐다.
준은 자신도 모르게 흥분을 하기 시작했다. 이마가 뜨거워졌다.
섹시 2 파일도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번에는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자신의 모습을 여러 가지 각도로 변화시키고 있다. 탁월한 실력이었다.
전혀 패치 할 구석이 없다. 아주 깨끗했고 화려하고,섹시한 마끼의 모습이 영화처럼 준의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렇지만 섹시1과 마찬가지로 일정한 톤을 유지하고 있다. 아니 감탄할만한 여자였다. 마끼 준사히는 저급 포르노그래픽 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섹시 3에서 보이는 마끼의 모습은 예상외로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마끼는 자신의 남자 파트너들과 난교파티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뒤 이미지 파일로 전환시킨거 같다. 과연 이런 내용까지 공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준은 온통 혼돈을 느끼며 신간선 밖을 내다보았다. 그날 밤,후루겔스 게이꼬가 가지고 왔던 디스켓안에는 마끼가 작성한 유언장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마끼는 죽은게 아니다. 자살극으로 위장하고 유언장을 남겼던 게다. 그런뒤 오늘 새벽에 갑자기 그동안 숨어 지냈던 미국에서 귀국한 것이다.
왜 하필이면 마끼의 디스켓에 걸려 있는 암호 LOVE가 제일그룹 중공업 컴퓨터망인 사라사테 시스템의 암호와 동일했을까.
누굴까. 나를 괴롭히는 해커는.
해커를 잡는 데는 해커밖에 없다. 이건 준 스스로의 문제인 것이다.
준은 액정화면을 응시하다가 문득 <해커 명단>을 다시 오픈시켜 보았다.

>> MKj (아이디어 차량을 상대로 조작 1회)
>> 地下鐵 (도쿄도 야마테선 연착 4회. 도쿄도 죠오반선 조작 2회)
>> カウンタ (산요오 신간선 연착 117회. 도쿄도 야마테선 연착 47회)

마끼 준사히가 피시밴에 등록한 아이디인 MK...
그것과 유사한 아이디 MKj가 준의 동공 안으로 바짝 다가왔다.
준은 다시 마끼에 대해 조사된 자료를 읽어 보았다.
그런 뒤 사유리의 허벅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열차 안에 설치된 공중전화부스로 걸어갔다.
마끼 준사히의 매니저가 전화를 받았다.
후지산 별장. 오후 5시.
마끼 준사히가 오후에 후지산 별장으로 간다는 사실을 알아 낸 준은 시즈오카 역에서 뛰어 내렸다. 어느새 자고 있는줄 알았던 사유리가 뒤따라 뛰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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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운과 황영달은 가나기원 앞에서 마에다가 귀가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오전에 나갔다던데 어디로 갔는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다. 이상운은 다시 불길한 생각에 가나기원 주인인 가나에를 만나러 정원안으로 들어섰다.
가나기원은 고풍스러운 일본풍의 저택이었다. 좌우로 정원이 있고,우측 건물 앞쪽으로 연못과 정자가 있다. 주변은 도심지에서는 볼 수가 없는 울창한 관상목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말그대로 이상운은 금빛 찬란한 정원안에 자신이 서있다는 착각을 받았다.
확실히 사흘전 밤과는 다른 상황이었다. 이상한 정적과 장엄함 속에서 상운은 등뒤를 돌아다보았다. 세우細雨가 연못 표면에 떨어지고 있다. 가나기원의 대문은 신사식으로 높은 지주가 좌우로 설치되 있기 때문에 울컥 괴물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운은 불길한 생각을 애써 떨치며 정자로 걸어갔다. 가나에가 딸 준꼬의 등을 토닥이며 정원을 응시하고 있다. 이슬비를 보고 있는 것일까. 가나에는 혼혈아답지 않게 기모노 차림으로 서 있다. 기모노는 4월 8일 佛陀誕生祭(석가탄신일)를 준비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미망인이라니. 믿을수 없단 말야. 신은 불공평한 거야. 내겐 저런 여자가 손짓을 하는 법이 없어. 다. 날나리들이나 손짓을 하지.
상운은 가나에의 미모에 반해있었기 때문에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다시 정원 구경을 하러 왔습니다. 가나에."
"예. 알고 있습니다. 아직 마에다 군이 귀가를 하지 않는 군요."
"전화 연락은 없었습니까?"
"네. 없었습니다. 마에다 군은 저에게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대개는 이곳에서 생활하니까,특별하게 전화를 해 올 이유도 없겠죠. 하지만 오늘은 이상하군요.
마에다 군은 이토록 오랜 시간 방을 비운 적이 없었는데요."
"아. 그렇군요..."
이상운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머릿속을 굴렸다. 그의 일본어 솜씨는 일본인들이 놀랄 정도로 탁월했다. 그러나 가나에의 일본어는 알아듣기 힘들다. 혼혈아.
어쩌면 북구쪽인지 모른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일까. 유럽악센트에 불교적인 냄새가 가미돼 있다.
상운은 조심스럽게 휠체어에 앉아있는 준꼬 앞에 멈추어 섰다. 빈말이라도 준꼬를 칭찬해 주고 싶다. 미망인에게 점수를 따는 최고의 방법인 게다.
"아. 아가씨. 나 또 왔어요. 나 기억나지요?"
별안간 준꼬는 고개를 바짝 들어 상운을 노려보았다.
상운은 오싹했다.
애가 나한테 무슨 감정이 있나?
상운은 두려움을 느끼며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김준을 잡으러 왔을때 방해를 했던 이 꼬마...준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그렇지만 그날 문제때문에 나에게 감정이 있을까...음. 다른 방법을 시도해봐야 겠군...
상운은 주머니에게 지폐를 꺼내 준꼬에게 내밀었다.
준꼬는 와락 분노한 표정으로 상운의 손에 침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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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정보국 에이전트인 하라다 게이조는 닛산 임해공장에서 생산한 신형 맥시마 자동차안에서 껌을 질겅질겅 씹고 있다. 그의 눈 앞으로는 후지산 산록에 위치한 마끼의 거대 별장이 올려다 보였다. 오후 4시였다.
비는 계속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산자락 너머 하늘 끝에선 반달형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이때문에 마끼의 별장 4만평은 마치 18홀 골프장을 보는 듯 장엄한 분위기에 빠져 있다.
벌써 1시간전부터 마끼 준사히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다. 유명인을 만나다니.
더구나 마끼는 게이조가 좋아하는 직업 모델이다.
상부에서 지시한 몇가지 작업을 조사하던 중 후루겔스 게이꼬가 마끼의 유서가 들어있는 디스켓을 입수하는 과정이 의심이 되었다. 이문제로 5시 정각에 마끼와 후지산 별장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이곳은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는 장소였다.
어쨌든 약속시간까지는 1시간 가량이 남아 있다.
아무래도 좋았다. 자동차도 고급이라고 할수 있는 닛산 맥시마로 골라온 터였다.
데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더구나 미국에서 돌아온지 채 하루가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흔쾌히 내각정보국 사건조사에 협조를 하고 있는 게다.
게이조는 논노 잡지에 실린 마끼 준사히의 얼굴을 응시했다. 부드럽다.
작고 앙증맞은 얼굴이었지만 퍼머넌트의 풍부한 머리칼을 가지고 있다.
이 작은 요정 때문에 남자들이 흥분을 하는 게다.
마끼의 장점은 화장을 하지 않는 데에 있었다. 화장을 하면 어떻게 변할까.
작은 얼굴은 가꾸기 나름이니까 요부가 되던가 지성적인 여성이 되는가는 그녀의 마음에 달려있을지 모른다.
게이조는 뒷좌석에서 졸고 있는 두명의 동료들을 돌아다보다가 다시 자동차 전방을 응시했다. 택시가 멈추어 서고 있다. 두 남녀가 택시에서 내려서고 있다.
가까운 거리였다. 게이조는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걸쳤다. 두 남녀는 게이조의 세단을 힐끔 응시하더니 별장 쪽으로 걸어올라 가고 있다.
게이조는 그들중 남자가 별장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을 보다가 백미러를 응시했다. 도로를 타고 날카롭게 달려오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터 스포츠카의 모습이 들어왔다. 게이조는 흥분한 얼굴로 선글라스는 벗어 젖혔다. 승차정원 2명의 2도어 쿠페형 스포츠카인 람보르기니는 최고속도가 시속 320Km를 넘는 골때리는 자동차였다. 게이조는 벌어지는 입을 간신히 참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여러분... 마끼 준사히양이 오고 있습니다. 환영을 나가 봅시다."
게이조가 그렇게 말하자 뒷좌석에 졸고 있던 두명의 신사복들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마끼를 실제로 볼수 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게다.

마끼 준사히는 람보르기니 안에서 물끄러미 전방을 응시하고 있다. 올이 고은 그녀의 머리카락은 스무스하게 콧 등에 걸려있다. 마끼는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녀는 별장 정문에 서있는 사람들을 쳐다보다가 힐끔 운전을 하고 있는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이제 됐어. 너. 내려."
"뭐?"
"됐어. 걸어가던지 뛰어가던지 알아서 해.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 복잡하겠어."
"너 정말 내 성질 돋굴래?"
"성질 나게 한건 내가 아니라 너야. 두번 말하지 않겠어. 당장 내려."
그런 뒤 마끼는 손에 쥐고 있던 카라이터를 사내의 얼굴을 향해 힘차게 던졌다. 라이터는 톡 소리를 내며 핸들 밑으로 떨어졌다.
사내는 운전을 하면서 히쭉 뇌까렸다.
"알았어, 우리 공주님. 하지만 람보르기니의 소유자는 나라는 걸 모르나?"
"선물이라고 했잖아? 내가 미국에서 돌아온 게 눈물겹도록 고맙다고 하지 않았나?"
"그래 이 스포츠카는 너에게 주는 선물이다. 하지만 핏자맨처럼 별장 앞까진 배달해 주고 가야겠어! 이게 내 진심이지."
"웃기고 있군. 너 제법 귀엽구나. 누가 너를 핏자맨으로 캐스팅 한다던?"
"알았어. 좀 참아보자. 정문 앞까지만 같이 가자. 저기 사내들중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운전대 맞기라면 맞기겠어. 하지만 말야. 내 사랑은 변하지 않아."
"사랑 좋아하시네. 핏자맨씨."
"야? 너 정말 이럴래? 분위기 좀 잡아보자. 내 체면도 생각해 주어야지?"
"알았어. 나 방금 분위기 잡았어. 그러니까,너 당장 이 차에서 꺼저!"
사내는 얼굴이 벌개진 채로 핸드 브레이크를 잡아당겼다. 이미 별장의 철문이 자동으로 열리고 있다. 사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마끼를 껴안았다. 마끼는 저항하지 않았다. 가볍게 둘 사이에 키스가 오고 갔다.
마끼의 입에서 가느다랗게 음성이 흘러나왔다.
"고마워. 3천만엔밖에 안하지만 이 람보르기니 선물은 영원히 잊지 않을께."
"고맙긴...앞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 안돼. 자살은 위대한 일이지."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람보르기니의 운전석에서 걸어나왔다.
람보르기니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두 패거리가 서있다.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그들을 훑어보았다. 별장문 왼쪽으론 베꼽티에 롱코트를 걸친 소녀와 키가 훤칠한 남자. 오른편엔 신사복 사내들 3명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있다.
사내는 시선을 닛산 맥시마 자동차를 향해 옮겼다. 아마 신사복들이 타고 온 자동차인 거 같다. 사내는 허탈한 듯 다시 람보르기니 안으로 고개를 들이댔다.
마끼는 이미 람보르기니 밖으로 걸어나오고 있다.
마끼는 말했다.
"어느 쪽이십니까? 내각정보국에서 오신 손님은?"
게이조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등뒤에 서있는 신사복 2명도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끼는 게이조를 응시하다가 시선을 왼편으로 옮겼다.
배꼽티를 입은 불쌍한 소녀와 제법 미남인 남자가 서있다.
마끼는 부드럽게 미소를 흘렸다.
"당신들은 뭐죠? 제 사인이 필요하신가요?"
준은 비쩍 웃었다. 아까 신간선에서 내릴 때 이발을 하고 워셔블 신사복을 구입한 건 잘한 일인지 모른다. 준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으로 여유가 있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도쿄 특파원입니다. 별안간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합니다."
순간 마끼는 긴장했다. 한국에서 기자가 방문해 온다고는 전혀 에상하지 못했던 게다. 의심이 갔다.
"신분증은 있으신 가요? 기자님이시라면..."
"아. 제가 실례를 했군요."
준은 급히 명함을 꺼내 마끼에게 건네주었다. 마끼는 명함을 읽은 뒤 땅바닥에 흘리듯 버리면서 준의 왼손에 들려있는 노트북 케이스를 바라보았다.
"뜻밖이군요. 저에 대한 소문이 한국에까지 알려지다니요. 설마 해외토픽감으로 초라하게 다루어지는 건 아니겠죠?"
김준은 거짓말을 잘한다.
"데스크는 일본 신세대 모델을 중점으로 특집 기사를 준비중입니다. 그중에 마끼 준사히 양이 1번으로 당첨되었군요. 죄송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데스크는 당신이 자살한 원인을 중점으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지요. 헌데 오늘 보니까..."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꽤 급하시겠군요. 그럼."
마끼는 그렇게 말하다가 사유리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이 아가씨는 누구죠? 정말 대단히 추워 보이는 아가씨군요."
사뇨 사유리는 얼이 빠져 있었다. 마끼 준사히. 유명하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별관심이 없었던 모델이었다. 헌데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같은 여자라도 질투가 날 정도로 미인이다. 사유리는 질투심을 억제하며 히풋 미소를 지었다.
"아...전 사뇨 사유리... 통역담당입니다. 아르바이트걸이죠. 흐..."
마끼는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그러시구나. 그럼 사유리양도 같이 들어 가실까요. 그리고..."
마끼는 게이조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회색 빛이 도는 동공이다.
"미안하군요. 내각정보국 손님들과는 1시간 뒤에 만나뵙고 싶군요. 가급적이면 이분들과 빨리 이야기를 끝내보도록 하겠어요."
"그러십시오. 오히려 저희가 방해를..."
게이조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끼의 음성은 부드러워졌지만 총알같이 게이조의 뇌리에 파고들고 있었다.

게이조는 람보르기니가 별장 정원을 가로질러 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적적했다.
하지만 잠시 후의 만남을 위해선 그 어떤 고통도 참을 수 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끼와 같이 왔던 사내는 철문이 닫힌 뒤에도 계속 람보르기니 자동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가까운곳에서 왔는지 사내는 와이셔츠에 멜빵 차림이다.
람보르기니가 별장안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에야 사내는 게이조 일행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맥시마 자가용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량한 들판에서 보리 싹이 나고 있다.
사내는 침을 딱 뱉더니 바지 뒷주머니에서 악어가죽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러더니 게이조에게 말했다.
"이 똥차 가격이 얼마지? 지금 당장 시내로 들어가야 하는데 걸어가기가 귀찮군. 나에게 팔지 않겠나?"
게이조는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게이조는 육상레인저 출신이었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 법이다.
"전화를 빌려드릴테니 쓰시지? 아니면 걸어가시던가."
"아,카폰까지 설치되 있나? 이거 똥차는 아니었구만?"
울컥 화가 나는 걸 참으며 게이조는 운전대 옆에 부착된 무선팩스기의 수화기를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사내는 곧바로 콜택시를 호출했다.
10분 후에 택시가 도착했다. 사내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다.
게이조 일행은 그런 사내를 바라보며 쓴 웃음을 지었다. 돈 많은 부자들. 아니 재벌 2세들이 이 나라를 망치는 게다. 우리같은 레인저 출신의 정보원들은 그저 후지산에서 생존술이나 익히다가 저런 놈 지랄하는 거 구경하는 게지.
게이조는 다시 별장을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뒤에 서있던 동료가 자동차 안으로 기어들어가고 있다. 게이조는 힐끔 동료를 돌아다보았다. 열린 자동차 창 사이로 팩스가 수신을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게이조는 급히 운전석 문을 열었다.
츠츠츠....
캐논 Rx 무선팩스는 불길을 토하듯 감열지 4장을 토해내고 있다.

== 동 수배자 사진 전송 1. 김 준 2. 사뇨 사즈메 3. 사뇨 나쓰에 ==
== 1. 2. 3. 이하 몽타쥬 사진 참고 ==

감열지를 뚫어지게 응시하다가 게이조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별장 앞에 서 있던 두남녀였던 것이다.
게이조는 눈알이 뒤집어 질것 같이 흥분한 얼굴로 버럭 외쳤다.
"빠가야로! 동급해커다! 놈이야 놈!!"
게이조의 외침소리를 듣고 두명의 동료는 긴박하게 별장 철문으로 뛰어들었다.
그런뒤 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별장 철문은 철통같이 잠겨 있었다.
오후 5시 정각. 빗방울이 점점 거칠어 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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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내각정보부 시나노 곤베이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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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현희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앉아 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비쩍 마른 입술을 달착 거렸다. 그녀의 시선은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며 두시간째 김준을 찾고 있지만 그의 자취는 보이지 않았다.
비련.
고부장이 보내온 핸드폰 번호는 이미 통화정지된 번호들이었다. 이 때문에 김준의 노트북안으로 직접 치고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어쩌면 노트북의 파워스위치를 끄고 다니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릴 수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김준에게 현상황을 알려 주고 싶었다. 복잡하고 난해한 현 상황을.
그녀는 주스를 홀짝이며 다시 IBM형 컴퓨터를 응시했다. 일본에서 널리 사용되는 컴퓨터는 NEC가 독자적으로 개발한 PC-9801 기종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애플 컴퓨터며 IBM 클론(복제)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현재도 일본안에서는 NEC형 컴퓨터가 강세였다. 이 때문에 현희의 컴퓨터안 확장 슬롯에는 NEC-9801 카드가 삽입되어 있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 골치 아프게 두 종류의 컴퓨터를 놓고 사용할 수는 없으니까 IBM과 NEC용 소프트웨어를 동시에 구현시키는 카드를 끼어놓은 것이다.
오빠 한일수는 아까부터 요란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다. 가뜩이나 좁은 아파트인데 불편한 게 이만저만 아니다. 불현듯 한현희는 저 양반도 여전하다는 생각을 했다. 장가나 제대로 갈 수 있을지 몰라.
현희는 오빠가 땀을 흘리며 자는 것을 알았다. 의자에서 일어나 타월을 손에 들고 오빠가 누워있는 소파로 걸어갔다. 그런 뒤 조심스럽게 이마의 땀을 닦아주었다.
그런 뒤 양 팔을 워밍업 하듯 흔들어 대다가 다시 컴퓨터 의자에 앉았다.
집요하게 그녀를 괴롭히는 일이 있었다. 그녀는 급히 노벨도스 화면으로 빠져 나온 뒤 곧바로 피시밴 통신망으로 접속을 시도했다.
오늘 새벽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문자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떠오른다.

>> 오빠. 돌아와 주세요. 어디에 있는 거죠.

현희는 파도치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통신망에는 예절이라는 게 있었다.
저따위 이상한 문자를 퍼트리는 여자는 누굴까. 겁대가리를 상실한 여자가 분명해.
현희는 문자를 퍼트리고 돌아다니는 여자의 정체가 궁금했다. 왠지 라이벌 의식이 느껴졌다. 야릇한 환상과 도전 욕이 일어났다. 현희는 일수가 잠들어 있는 모습을 힐끔 응시하다가 다시 키보드 위의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홈뱅킹 화면이 떠올랐다. 오전중에는 보이지 않았는데,지금 들어가 보니까 시티뱅크 요코하마 지점에서 돈을 찾아간 흔적이 있다. 김준이 돈을 찾아간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 찾아간 것일까. 호기심을 억제할 수가 없다.
급히 접속을 끊고 사설 BBS인 <뱅크마니아>로 재접속을 시도했다.
<뱅크마니아>는 노무라野村종합연구소가 별도로 연구를 했다는 소문이 날 정도로 은행 해킹분야에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정보망을 가진 BBS였다.
접속이 되면서 암호를 물어오자 현희는 야릇하게 눈빛을 반짝였다. 이까짓것 쯤이야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주스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런 뒤,말 그대로 암호를 뽀작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녀의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바쁘게 움직였다. 마치 타자수같은 손가락 놀림이다. 그만큼 그녀는 머리가 좋은 지도 모른다.
10분정도 지났을까. 오후 5시 40분이었다.
크랙작업중에 초인종 벨이 울렸다. 현희는 급히 멀티태스킹(다중작업)으로 통신망 화면을 뒤로 감춘 뒤 의자에서 일어나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어지러웠다.
감기에 걸린 듯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왔다. 오빠가 부시시 잠에서 일어나는 모습이 보였다.
문을 열었다. 3명의 사내가 서 있다.
"한현희 씨입니까? 일본 내각정보부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저희 사무실로 가실까요?"
현희는 등골이 오싹했다. 아찔한 현기증이 머릿속을 제트기처럼 파고 들었다.
내각정보국까지 김준을 추적하기 시작한 것일까. 그렇다면 일본 방위청에도 동급 해커가 침투했다는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은 이날 새벽에 서울의 고종수가 알려온 정보였다.
현희는 억지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옷을 갈아입어야겠어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약간 추운데요?"
그렇게 말한 뒤 현희는 뒤를 돌아 거실 안으로 걸어갔다. 오빠 한일수는 번개같이 20인치 TV뒤에 몸을 구부리고 숨어 있다. 현희는 슬쩍 윙크를 했다.
그런 뒤 가까이에서 손에 잡히는 코트를 무턱대고 집어들었다. 지체할수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의혹을 주면 사내들이 거실안까지 치고 들어올 것이다.
현희는 실쭉 웃으며 반코트를 걸치며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가시죠. 하지만 두시간후엔 저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데이트가 있어요."
"그러시죠. 협조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간단하게 끝날 겁니다."
사내들과 밖으로 나가면서 현희가 현관문을 닫자,일수는 곧바로 전화통으로 걸어갔다. 본사 정보팀의 고부장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하지만 전화수화기를 거머쥐다가 일수는 다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도청될 가능성이 있었다. 아무래도 공중전화가 안전했다. 일수는 긴박하게 양복상의를 걸쳐 입고 현관문을 열었다. 순간 누군가가 갑자기 일수의 복부를 가격해왔다.
퍽----------!!
한일수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몸을 굴렸다. 사내 한 놈이 울부짖고 있는 한현희를 엘리베이터 쪽으로 강제로 끌고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을 두명의 사내들이 포위하여 짓밟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빠가야로! 내각정보부를 속이려고 했나! 우리가 멍청인줄 알았나! 너희 남매가 함께 있는 걸 알고 왔단 말이다!"
정말이지...한일수는 정신이 없었다. 구둣발에 의해 앞 이마가 찢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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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수상직할 내각정보부 특별 수사팀은 긴급 회의를 하고 있다.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시나노 곤베이와 무로부시 데쓰로 방위청 정보과장, 간료 무라다 내각정보부 정보수사과장이었다. 이들 중 시나노 곤베이는 육상자위대 동북방면대 제1공정단의 육군 육좌 출신이었다. 제1공정단은 유사시에 방위청 직활로 운영되는데,이번 경우에는 내각정보부와 방위청이 합동작전을 준비중이었다.
이 때문에 방위청안에서 최고의 두뇌라 불리는 곤베이가 배치되었다.
시나노 곤베이는 지능지수뿐만 아니라,컴퓨터에 대해서도 귀신같은 자였다.
그 자 역시 젊은 시절 대부분은 컴퓨터에 인생을 허비한 자이기도 했다. 한때 훗가이도 남동쪽 섬에서 말도 안되는 세어웨어 프로그램을 만들어 통신망에 배포하기도 했는데 그 실력이 아직도 유감없이 남아있다. 하기야 그건 10년전 과거의 일이다. 현재 나이 35세. 4년전에는 북한의 전방부대에 위치한 저격여단에서 6개월간 특공훈련을 받았는데 이때도 그의 머리는 녹슬지 않았다. 아니 나이가 들어 가면서 그의 두뇌는 구두약으로 광을 낸 것처럼 반짝임을 더해갔고, 완숙미를 더해갔다.
곤베이는 세계적인 명성을 구가하는 GIGN(de Groupe d'intervention de la gendarmerie nationale)이라는 프랑스 국가헌병특공대 내에서도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여기서 훈련중 습득한 GIGN 시스템은 내각정보국에 영향을 주었다.
내각정보국 일부 파트는 자위대 공정단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유사시에는 헬리콥터와 소형 제트기로 구성된 소탕 조를 구축할 수 있게끔 조직체계화를 시작했는데,이는 모두 곤베이 자신의 활약에 의해서였다.
이 시스템이 오늘 새벽에 갑자기 구축되었다. 그리고 팀장은 <황태자>라는 별명을 가진 시나노 곤베이 자신이었다.
곤베이가 한가지 아쉬워하는 점은 한국측에서 대쪽같은 <진광섭 팀>을 투입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의문이었다. 진광섭이라면 북조선에서도 인정하는 탱크이자,대쪽이었다. 진광섭과 경쟁하는 것은 불도자 앞에서 삽질하는 일이라는 소문까지 파다하게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곤베이 자신도 만만치 않았다. 곤베이는 자신을 칼이라고 생각했고,일본을 국화라고 생각하는 자였다. 국화를 지키기 위해 서라면 칼이라도 뽑겠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만큼 자만심이 강했는데,일처리에 있어서도 분명 남다른데가 있었다.
어쨌든 정보수집에 혼란이 많았다. 지난 이틀동안 불합리한 정보가 많이 입수되고 있었는데 이 중 <동급해커>가 한국 국방부 컴퓨터에도 침투했다는 설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동급해커>는 이미 무한 시스템을 경유 이날 새벽부터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 경유,해상자위대와 오끼나와 미군 사령부의 컴퓨터망안에 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워게임War Game이란 말인가.

곤베이의 보고가 끝나자 데스로와 무라다는 식은 땀을 흘렸다. 곤베이의 브리핑 대로라면 지난 이틀 동안 <동급해커>는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 완전히 박살냈다는 뜻이다. 그런 뒤 쥐새끼처럼 숨을 죽이고 있다. 어떡게 된 일일까.
동급해커가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곤베이는 간단하게 사건을 다시 설명하기 위해 소니레이저비젼의 스위치를 눌렀다. 이때 곤베이의 양복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한현희를 체포 압송중이라는 보고였다. 통화를 끝내자 다시 5초 뒤에 핸드폰 벨이 울렸다.
몽타쥬 사진을 전송한지 채 10분도 되지 않았는데 하급 부하가 김준의 행방을 포착했다는 전갈이 날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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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 준사히는 자신이 흠뻑 취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생각보다 인터뷰가 길어지고 있었다. 집사가 접대용으로 가져온 정통위스키 잭 다니엘을 사유리에게 권한 것이 일을 점점 복잡하게 만들어 가고 있었다. 슬며시 미소가 나왔다.
어린 계집이 제법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술에 취한 사유리는 헤프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누구에게 아양을 떠는 건지 횡설수설 떠들고 있었다. 마끼 역시 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예외가 있다면 테이블 앞쪽 소파에 앉아있는 남자밖에 없었다. 그는 피곤한 표정이었지만, 레코딩 기능이 있는 노트북 컴퓨터를 조작해가며 마끼의 대답을 하나하나 녹음해 가고 있었다.
손가락마디가 가느다랗다.
마끼는 준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응시하다가 불현듯 사유리가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귀여운 아가씨였다. 뭐라고 탓할 개재는 아닌 것이다.
별안간 재미있는 생각이 들어 마끼는 인터뷰 도중에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짧게 박수를 두번 쳤다. 번개같이 늙은 집사가 달려왔다.
"모모와. 저 아가씨에게 맞는 옷이 있나 찾아다 줄래요? 그래요,2층 의상실에 가서 적당한 옷이 있나 찾아봐요."
마끼의 말에 준은 고개를 쳐들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마끼는 창백한 얼굴로 사유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사유리는 어안 벙벙이 되어 마끼를 올려다보고 있다.
약간 당황을 했는지 빈 이마를 찡그린다.
"옷이라뇨? 전 이거면 되요. 옷은 필요없다구요. 흐..."
사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빈 술병으로 자신의 머리를 툭툭 쳤다. 이거란 술을 말하는 것이다.
"아니에요. 아가씨. 잠깐 일어나 봐요. 사이즈가 어떤지 알 수 있을지 모르 겠군요. 32-23-31 인가? 풀 사이즈는 아니시구나. 하지만 보기 좋은 몸매에요."
그렇게 말한 뒤 마끼는 감탄한 듯 말을 덧 붙였다.
"키도 상당히 크구나. 머리 모양만 바꾸면 정말 예쁘겠어요."
그 사이에 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거실 안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다. 붉은색 벽난로 위로 거대한 창이 있다. 창 밖으로는 밤하늘이 한눈에 올려다 보였는데, 도시가 결코 단일案에 따라 제한된 시간 안에,한번의 역사로서,건설되지 않는 것처럼 마끼의 별장은 서양건축 양식과 일본 풍토성이 교묘하게 융화되어 있다.
웅장했다. 준은 난생 처음으로 자신이 무덤같은 공간안에 서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작은 연회 홀에 들어와 서있는듯 했다. 준은 시선을 벽난로 반대쪽,현관문의 우측으로 옮겼다. 나무 결이 살아있는 조그만 가구가 준의 시야로 들어왔다.
가구가 아니라 컴퓨터였다.
준의 시선에서는 컴퓨터의 본체 뒷면이 보였는데,그 앞쪽은 교묘하게 서재라는 공간이 꾸며져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다크그린의 융통성 있는 서재였는데, 서가의 장서들이 대부분 가구인지 아니면 별장 자체의 부속품인지 알수가 없다.
서재안의 조명은 주름이 잡힌 아트지 밑에서 날카롭게 빛을 토하는 할로겐 전등 하나 밖에 없는듯 했다.
준은 비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컴퓨터를 구경할 수 있을까요? 마끼씨의 컴퓨터 라이프는 상당히 매력적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여러가지 소문을 듣고 오셨군요. 한국분들 준비성이 이렇게 대단한지는 미처 몰랐는데요."
준이 대답을 안하자 마끼는 다시 말을 계속 했다.
"구경하고 싶다면 구경하세요. 디렉토리 몇개는 암호가 걸려 있을 겁니다.
남자 친구들이 컴퓨터를 자주 만지길래 암호를 걸어 놓았죠."
"흥미 있군요."
마끼는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김준이 당황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마끼는 사유리에게 손을 내밀며 다시 김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TSR(램상주)해킹 프로그램을 만져 보셨나요?"
"글쎄요. 그런 것이 있다는 소문은 들었습니다만..."
"소문만 들은 게 아닌 거 같군요. 유능한 기자라면 TSR 해킹 프로그램 정도는 기본적으로 만질 줄 안다고 생각해요. 아무래도 선생은 엘리트인거 같아요. 좋아요. 정식으로 제 컴퓨터를 만지는 걸 허락하겠어요. 그동안 전 이 아가씨와 함께 2층 의상실에 다녀오지요. 이 아가씨,아니 아르바이트 걸에게 옷 한벌 기증할 능력은 있으니까요. 이 아가씨는...직업관념이 없는 걸 보니 선생이 거리에서 줏어온 여자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사유리는 마끼가 자신의 팔목을 잡고 몸을 일으켜 세우자,히풋 미소를 지었다.
상당히 취해 있었기 때문에 사유리는 마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계단을 올라가는 두 여자는 분명 취해 있었다. 어느 쪽이라고 따질 필요가 없이.
준은 여자들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 급히 노트북 케이스안에서 소형 무선 랜LAN 발신장치를 꺼내 마끼의 컴퓨터 프린터포트에 연결했다.
말할 것도 없다. 먼저 마끼의 가구같이 생긴 컴퓨터를 부팅시킨 다음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는 자신의 노트북을 부팅시켰다.
하나 둘. 하나...둘...
다시금 어워드 바이오스가 램용량을 읽어가다. 무선 랜 장치의 도움으로 마끼의 컴퓨터 내용은 준의 노특북 화면에서도 똑같이 떠오른다. 준은 재빠르게 암호가 걸려있는 디렉토리를 찾아 나섰다.
문제의 암호가 걸려있는 디렉토리에는 사설 BBS망처럼 S/Key라고 하는 휘발성 패스워드가 걸려있다.

S/key로 암호를 걸다니...이 여자 역시 엘리트인가.
아니면 패킷 스니핑Packet Sniffing에 대항하고자 하는 것일까.

S/key는 메인 호스트가 하부 클라이언트 컴퓨터를 감시하는 체제의 일종으로,각각의 클라이언트 컴퓨터는 메인호스트와 랜으로 연결된 상태에서 암호를 지니지 않는다.
하부의 각 클라이언트 컴퓨터에 암호가 없다고 해서 불안전한것은 아니다. 클라이언트 컴퓨터는 자신에게 접근을 시도하는 사용자에게 우선적으로 암호를 물어보는데,그런뒤 메인 호스트에 암호를 문의하는 작업을 거친 뒤 사용자의 접근유무를 결정하는 것이 S/key였다. 일종의 리모트콘트롤 체제라고 할수 있다.
즉 클라이언트 컴퓨터에 접근한 해커는 메인 호스트에 저장된 암호를 알아야만 예의 클라이언트 컴퓨터로 로그인이 가능했다. 이때 메인호스트,리모트 호스트는 수시로 암호를 바꾸어가면서 하부 클라이언트 컴퓨터로 해커들이 침투하는 것을 사전에 예방해 나간다.
준은 다시 디렉토리에 접근을 시도해 보았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S/key가 걸려 있다. 마끼의 가구같이 생긴 컴퓨터는 준이 암호를 입력할때마다 어딘가에 있을 리모트 호스트로 암호문의를 반복하고 있었다.
준은 서둘로 탁자형으로 생긴 컴퓨터 책상 밑을 들여다 보았다. 하지만 랜 케이블은 보이지 않는다. 리모트 호스트와 연결되어 있다면,랜케이블선이 분명이 보일텐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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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조는 불안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이미 2시간 가량이 지났다. 동료가 다가와 마끼와 통화를 시도하라고 요구해왔지만 게이조는 무표정하게 별장을 올려 보았다. 인터뷰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끼의 디스켓.
디스켓 때문에 김준은 이곳에 나타난게 분명했다. 정황으로 보면 확실했다.
다시 시티즌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15분. 게이조는 초조한 눈으로 산자락을 올려다보았다. 칙칙한 어둠 속에서 빗방울이 점차 거세지고 있다. 뿌연 물안개가 사납게 아스팔트 위에서 야릇한 소리를 내며 피어오르고 있다. 비는 게이조의 머리위로도 퍼붓고 있다.
게이조의 팬티까지 젖게 하는 폭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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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암호가 걸려있는 디렉토리로 접근하는 것을 중단하고 하드디스크 안을 샅샅이 조사하기 시작했다. 성과는 없었다. 마끼의 모습이 디지타이즈로 처리된 그래픽 파일이 발견되었고,워크방안에서는 누가 사용하는지 몰라도 랭귀지 소프트웨어가 상당하게 많이 발견된다. 소프트아이스나 인터넷 암호크랙용 프로그램도 여러종류 발견되었다.
준은 다시한번 모뎀 테스트를 시도해 보았다. 모뎀을 통해 랜이 연결되어 있을까.
그렇지는 않았다. 준은 녹초가 된 몸을 의자에 푹 기대어 앉았다.
"당신은 기자가 아니었군요."
별안간 마끼의 음성이 들려오자 준은 서둘러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느새 이브닝 드레스로 갈아입은 마끼가 서있다. 스커트는 복사뼈까지 내려와있고,아이보리색 브라우스를 껴입은 쉬크한 포멀(정장). 그녀의 오른쪽 손은 올드패션 글라스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올드패션드 칵테일. 버본 위스키에 붉은 마라스키노 체리의 황홀.
"정체가 뭐죠? 난 댁같은 사고뭉치를 많이 보았지만 댁은 매우 이질적이군요."
지오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마끼를 올려다보다가 계단으로 시선을 옮겼다. 계단 중간쯤에서 사유리는 내려오다 말고 일본 빅터사에서 시판한 리모콘의 스위치를 누르고 있었다. 곧바로 거실 우측 벽에 설치된 80인치 HD비젼 화면에서 로봇고양이 <도라에몬>이라는 만화영화가 떠 올랐다.
사유리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일까. 어디에다 스피커를 감추어 두었는지 거실 사방에서 꽝꽝거리는 소음이 들려왔다.
사유리 역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파티복이라기 보다는 외출 겸용의 간편한 드레스로 허리가 꽉 조여 있었다.
"어떤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준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마끼에게 물었다. 마끼는 휘청 였다. 다시 지오의 은은한 향기가 준의 후각을 마비시켰다.
"몇 개의 대답이 준비되어 있기에 그렇게 묻는 거죠? 날 기쁘게 하는 대답은 기자라는 말 밖에 없다는 거 모르시나?"
"그럼 기자라고 믿어주십시오. 난 인정받는 기자가 되는 게 꿈이었으니까."
"농담이 지나치시군."
"아닙니다. 당신에 대한 기사는 이미 方雌曼胄 되어 있소. 농담이 아니요."
"그러지 말고 원하는 게 뭐죠? 무얼 훔치러 온 건가 말해봐요."
식은 땀이 났다. 이젠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준은 의자에서 일어난 뒤 마끼의 눈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후루겔스 게이꼬 문제로 왔소. 당신이 작성한 유서 디스켓을 가지고 있던 여자 말이요."
"경찰인가? 시시하군. 왜 내 디스켓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후루겔스 게이꼬를 아십니까?"
"내가 그런 여자까지 알아야 하나?"
그렇게 말한뒤 별안간 마끼는 부드럽게 미소를 흘렸다. 뇌쇄적인 미소. 김준의 심장은 갑자기 마라톤 주자처럼 뛰기 시작했다.
"당신이 건네 준 것이 아닙니까?"
마끼는 다시 말투를 바꾸었다. 변신에 능한 것일까.
"내가 아니겠죠. 난 게이꼬가 누군지도 몰라요. 내 디스켓이 어째서 그녀에게 넘어갔는지도 모르죠. 난 경시청에서 디스켓을 찾기를 바랬어요. 사실 그걸 원했어요. 싸구려 리포터보다는 하급 경찰이 영향력이 강하니까."
준은 지오향수 때문에 자신이 혼란되는 것을 느꼈다.
"컴퓨터는 누구에게 조종당하는 겁니까? 다지점공유회선 방식으로 다른 호스트에 접속된 거 같지는 않군요."
"눈치가 빠르신 줄 알았는데 아직도 랜 케이블을 찾아내지 못했나요?"
"그렇소. 내가 보기엔 랜이 아니군요."
"랜 케이블이 아니에요. 전선이죠. 일반 전기를 송전해오는 전선을 통해 랜이 연결되어 있어요. 이런 거 처음 보았나요?"
준은 비쩍 미소를 흘렸다. KIST 연구진에 의해 전기콘센트를 통한 랜이 성공했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아직까지는 실용화되지 않고 있었다. 기껏해야 무선 랜이 개발되고 실용화되는 단계였는데,이미 전기선을 통한 랜시스템이 사용 되고 있다. 믿어지지 않았다.
"무슨 방법으로 호스트가 클라이언트 컴퓨터를 찾아내죠? 컨버터인가요?"
"정확하군요. 호스트는 도쿄에 있어요. 채팅 프랜드입니다. 그 친구가 말하길 전화번호나 랜케이블이 없어도 클라이언트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호기심이 생겼어요.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아답타라고 그러나요,저 전기콘센트를 한번 보시겠어요?"
준은 고개를 돌려 컴퓨터 파워 케이블이 꽂혀있는 전기콘센트를 응시했다.
검은색의 소형 블랙박스가 콘센트와 컴퓨터 케이블을 연결하고 있다.
"재미있군요."
"그런 셈입니다. 위성 TV로 친다면 컨버터나 혹은 수신기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도쿄의 친구는 저 컨버터 번호를 찾아 제 컴퓨터로 들어옵니다. 전화보다 간편하고,불성실한 무선 랜보다는 확실하게 두대의 컴퓨터를 연결해 주죠."
만화영화 도라에몬이 끝나고 있었다. 준은 HD비젼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화면은 NHK방송으로 막 바뀌고 있었고,사유리는 하품을 하며 HD비전을 바라보고 있다.
"도쿄의 친구는 누굽니까?"
"아직도 당신에게 중요한 문제인가요?"
"리모트 호스트의 운영자가 당신을 얼마나 도와주는지 궁금하군요."
"알고 싶어요?"
"그렇소."
"그럼 여긴 불편하네요. 내 방으로 올라가시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 말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마끼는 다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뒤 올드패션드를 입에 갖다 댔다. 술에 취해 있었다. 화가 나는 것을 억지로 참는 거 같기도 했다. 준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남자를 놓쳐본 적이 없는 여자 분 같군요. 당신."
"남자들이 나를 안 놓아주는 거겠지. 당신의 눈빛 역시 부정하지는 못하는데."
슬며시 마끼의 가느다란 손이 준의 머리를 스쳐갔다. 그러더니 벌래처럼 준의 얼굴 선을 타고 내려온다.
"왜 불쌍한 추적자 역에 만족하는 거지? 후루겔스 게이꼬가 당신 애인이었나?"
"아니요."
"실망이 크군요. 장대 같은 남자가 무슨 이유로 내 디스켓을 찾아 다닐까 생각해 보았어요. 거짓말로 오욕이 된 내 디스켓을? 군중이 열광하는 디스켓? 난 즐겨요. 나의 자살극을 즐기고 있지요."
준은 마끼의 손을 뿌리치며 입을 열었다.
"게이꼬는 살해되었소."
갑자기 마끼는 준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그런 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희뿌연 무언인가가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거 같다.
"말이 안 통하는 군요. 난 어느 누구의 죽음에도 개의치 않아요. 내가 궁금한 건 지금 내 기분을 당신이 어떡케 처리해주냐는 거야."
준은 의자에 털석 앉았다.
마끼...
대단한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스트가 누군지 알려주십시오. 당신의 컴퓨터를 리모트하면서 당신의 컴퓨터 라이프를 도와주는 친구 말입니다. 그 친구 역시 살해될지 모릅니다."
꽝. 갑자기 올드패션드 글라스가 준의 의자를 향해 날아왔다.
"내가 말해 준다고 생각했나? 이 건방진 한국인아! 당장 여기서 꺼지지 못해?"
툭 소리를 내며 글라스는 거실 양탄자로 떨어졌다. 마끼는 이미 뒤로 돌아 거실 중앙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화가 난 건지 일부로 그러는 건지 종잡을 수 없다. 준은 힐끔 사유리를 바라보다가 마끼를 따라 걸어갔다.
사유리는 HD비전을 응시하다가 졸린 눈을 손으로 비볐다. 머리 속이 띵했다. 이렇게 계속 계단에 앉아있을 수는 없다. 몸을 일으켜 계단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입어보는 정장 차림이었다. 기분이 붕 뜨고,옷감도 이만 저만 촉감이 좋은 게 아니다. 사유리는 TV화면을 응시하며 내려오다가 어지러운 정신을 가다듬었다. 비싼 술이기에 욕심을 내고 마음껏 마셨는데 흠씬 취해 버렸다. 울컥 눈물까지 나오려고 했다. 사유리는 계단을 다 내려온 뒤 서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김준과 마끼 준사히가 키스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유리는 얼굴이 빨개졌다.
질투심이라는 거...
팡팡걸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사유리는 포기한 지 오래였지만 이젠 정말이지 참을수가 없다.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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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나쓰에를 오후 2시부터 신문하고 있었다. 다섯 시간째. 도중에 커피 타임을 빼면 아마 4시간 이상 신문을 하고 있을 게다.
그 사이에 몇가지 의심스러운 일이 있었다. 마끼의 디스켓 내용을 분석한 전산 팀의 보고서도 이상했고,마에다를 잡으러 가나기원으로 출동한 이상운과 황영달에게서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건은 무언가 장기전 양산을 띄고 있었다.
오후 5시에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역시 별다른 게 없었다. 정적. 상황은 물속으로 요동치듯 잠수하고 있었다.
나쓰에는 계속 묵비권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당장은 이 여자와 김준이 어떤 관계인지 궁금했지만 그녀의 설명으로는 이해되지 않은 게 많다. 게이오 대학에서 만났다는 것과 김준이 클리퍼 프로그래밍 천재라는 말. 이건 바보자식도 아는 내용이다. 그리고 진광섭은 바보가 아니었다.
한가지 의미심장한 일이 있었다. 방금 전에 들어온 소식 중에 내각정보국이 긴박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정보. 특히 시나노 곤베이의 등장.
시나노 곤베이라면 진광섭과는 원수 같은 사이였다.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광섭은 식은 땀을 흘리며 선글라스를 벗었다. 나쓰에는 차가운 눈으로 광섭을 노려보고 있다.
7시 20분까지도 광섭은 나쓰에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리고 막 7시 20분이 지났을까.
전산요원 한 명이 급히 프린팅 용지를 들고 광섭에게 뛰어왔다.
사뇨 사즈메...
사유리의 모토롤라 익스프레스 캡 삐삐 번호가 프린팅 용지에 적혀 있었다.
광섭은 히쭉 웃으며 나쓰에에게 용지를 내 보였다.
"여동생 삐삐 번호가 맞습니까?"
나쓰에는 흠질 놀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섭은 빙그레 웃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맙소. 내 1시간 내에 김준과 당신을 만나게 해주리다."
광섭은 몸을 돌려 전산팀이 있는 사무실로 걸어갔다.
"어딘가? 연락은 왔나?"
전산팀 팀장이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후지산입니다. 구보 노스케라는 사내가 소유한 별장 전화로 연락이 왔다가 황급히 전화를 끊어버리더군요."
"눈치를 챈 건가? 뭐하고 있나! 당장 구보 노스케를 확보해 봐!"
그렇게 묻자 뒤따라 들어온 춘해가 잽싸게 입을 열었다.
"구보 노스께라면 마끼의 아버지요. 구보 부동산 회장."
춘해의 말에 진광섭은 얼굴표정이 경직되었다. 그의 얇은 입술사이로 가느다랗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10분 뒤. 아크힐스는 급히 출동하는 진광섭 팀으로 긴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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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팀이 아크힐스 빌딩을 떠나자,이 정보는 곧바로 곤베이에게 전달 되었다. 곤베이는 방위청 빌딩 로비에서 핸드폰 보고에 응답을 하고 있었다.
이미 동북 항공자위대 기지에서 사브엔진을 장착한 제트기가 나리타 공항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급조된 스태프만도 70명에 달하고 있고,아래 지하센터안에도 40명이 넘는 전산요원들이 <동급해커>의 행방을 추적하고 있었다.
선데이 리스크 Sunday Risk.
이날 새벽부터 시작된 놈의 난동에 대비하는 사상 최고의 비밀 작전이었다.
곤베이는 재차 산하 부하를 통해 오키나와에 긴급 투입된 공정단의 상황을 체크하며 지하 전산실로 방향을 바꾸었다. 7시 20분이었다. 곤베이는 계단을 내려서자 우측 복도로 향했다. 할로겐 빛이 복도 좌우 천정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해치형 자동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위청 전산실의 살벌한 분위기가 한눈에 느껴졌다. 곧바로 히로세 전산실장이 곤베이를 알아보고 뛰어왔다.
"이겁니다. 정확합니다. 확실히."
곤베이는 로그인 데이터가 프린팅된 용지를 읽어보았다.

17차례나 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오늘 하루만도 15군데의 방위청 컴퓨터에 침입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동급해커> 라는 아이디를 심어놓았다. 접속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2시 사이에 집중되었다. 그 이후로는 활동한 흔적이 없다.
곤베이가 로그인 데이터를 다 읽었다고 생각을 했는지 히로세가 입을 열었다.
"도오카이도선인거 같습니다. 작년말에 투입된 노조미望선을 타고 이동한 거 같습니다. 보십시오. 시즈오카 역에서 200여명이 신간선을 갈아탔는데,거기에 파 묻혀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아침에는 아타미 해안에서 요코하마로 이동한 뒤 시티뱅크에 들렸습니다. 이건 아타미 경찰서의 보고입니다. 방금전 보고에 의하면 시티뱅크 폐쇄회로 카메라에 사유리의 얼굴이 잡혀 있다고 합니다.
은행에서 아멕스 카드를 새로 만들었다는 군요."
"알았어. 방위청 컴퓨터는 어떤가?"
"10분전에도 다시 들어왔습니다. 인바운드(유닉스를 통해 자국으로 침투하는 작업)로 들어와서 곧바로 오키나와 기지로 이동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암호크랙에 실패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 새벽부터 이미 15차례나 시도했는데 번번히 실패를 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이쪽에서 옵라인으로 전환해 버리니까 놈도 별수 없더군요. 어쨌든 피해가 막심합니다. 펜타곤에선 이 문제로 지금..."
"미사일 발사 시스템에 벌써 접촉한 게 아닐까? 그쪽에다가는 자신의 아이디를 남길 필요가 없겠지. 그러다간 추적을 당할 테니까 말야."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우리가 새벽부터 추적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을지 모릅니다만."
"다시 들어올 가능성은?"
"지금은 휴식이겠죠. 아마 또 다시..."
"역시 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노리고 있는 거 같나?"
"정확합니다. 놈은 미사일 발사 시스템을 노리고 있습니다."
별안간 곤베이의 핸드폰이 울렸다.
항공자위대에서 투입한 제트기가 날아오다 말고 선회를 했다는 보고였다.
통화를 하면서 곤베이는 기상상황을 모니터했다. 센다이 현 이북 지방 상층부에서 비구름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때문에 제트기 사용은 어쨌거나 접어두어야 할 상황이다. 그렇다면 말이다. 제트기가 없다면,별수 없이 육로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뜻인데.
두시간이 더 경과된다는 뜻이다.
곤베이는 컴퓨터 모니터에 떠오른 시간을 보았다. 현재시각 7시 35분. 진광섭 팀은 밤 10경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곤베이는 핸드폰으로 헬기를 수배했다.
그런 뒤 다시 확인할 생각으로 전산실 안쪽으로 걸어갔다. 소니 모니터에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중앙컴퓨터가 떠 올라와 있었다. 시간을 보았다. 아직까지는 오키나와 기지의 미사일 발사시스템이 크랙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곤베이는 다시 히로세 실장의 보고를 들으면서 오키나와 미군기지가 소유한 미사일 체계를 주의 깊게 검색했다. 어느거 하나 크랙에 성공하지 않은 이상 접근이 불가능했다. 도대체 놈이 노리는 미사일이 무언지 궁금했다. 하기야 이제
놈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곤베이는 전산팀 스테프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뒤 전산실을 성큼성큼 빠져 나왔다. 1층 로비로 나왔을때는 사나운 폭우가 도쿄 시가지를 때리고 있었다.
곧바로 방위청 간부용 차량이 곤베이가 서있는 현관 앞에서 멈추었다.
"헬기가 뜰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국립자연교육원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만."
"알았어. 당장 가지."
곤베이는 자동차에 올라타면서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곧바로 후지산 별장에 있는 게이조가 호출되어 나왔다.
"상황은 어떤가?"
"예. 7명의 지원군이 방금 도착했습니다. 총 10명입니다. 부족하지만 별장을 완벽하게 포위하고 있습니다. 고공침투조는 언제 오는 겁니까? 여긴 정말 폭우가 지독합니다!"
"알았어. 진광섭팀이 올지도 모르니까 나타나면 즉시 연락하게."
"알겠습니다. 그런데 계속 기다려야 합니까? 이 놈의 별장 철통같기는 하지만, 경비견 정도는 우리가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아냐. 별장 크기가 7만평이라고 하지 않았나. 10명가지고 놈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아직은 두들기지 마. 놈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놓치지만 말아. 그런데 도청 상황은 어떤가?"
"도청은 폭우때문에 불가능합니다. 장비를 가져오긴 했는데 이거 말고 고급 장비가 필요합니다. 전화선은 이미 잡았습니다."
"통화량을 계속 파악해. 컴퓨터를 사용한다고 생각되면 잽싸게 짤라버리고. 핸드폰은 방해전파를 쏘아대면서 막을 수 있는대까지 막아 봐. 알겠나?"
곤베이는 식은 땀을 흘렸다. 위험한 도박이었다. 지금까지 17차례나 오키나와 기지 컴퓨터가 뚫리고 있었다. 어쩌면 자정 안에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았다.
혹은 잠시 후에,바로 머리 위에서 어떤 음모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곤베이는 핸드폰을 놓고,코트 오른쪽 주머니에서 PDA를 꺼내 들었다. 소니가 개발한 매직 링크에 파나소닉의 플루언스를 교묘하게 연결해서 조립한 휴대용 통신단말기였다. 4MG 롬에는 방금전 전산센터에서 히로세가 잡아 준 메시지 2개가 떠 있다. 동급해커가 오키나와 사령부 컴퓨터에 남긴 메시지 17개중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

>> 오키나와 사령부의 미사일 시스템이 인상적입니다.
東急HACK
>> DSCS-2 위성의 8기가 헤르츠 SHF를 잡았습니다.
FLTSATCOM이나 AFSATCOM 채널을 이용해 오늘 밤 다시 들어오겠습니다.
東急HACK

DSCS는 미美 펜타곤 전용의 위성통신체계를 말한다. 미 국방부는 전세계와 유동적인 통신망을 구축하기 위해 공군 산하 우주국으로 하여금 1단계로 모두 26기에 달하는 통신위성을 발사했다. 2단계에서는 6기의 통신위성을 발사했고,1982년부터 시작한 3단계 기간 중에는 총 12기의 통신위성을 발사했다. 이중 지금도 사용되는 것은 DSCS-2에서 4기,DSCS-3에서 4기 등 총 8기의 통신위성이 사용되고 있었다.
이중 일부는 미 해군의 함대통신용(FLTSATCOM)으로 운용되고 있지만,다른 일부는 공군용 회선(AFSATCOM)으로 사용된다. 이 위성만 잡을 수 있다면 구차하게 전화선을 이용해 미군 기지로 침투할 필요가 없다. 곧장 전세계 미군기지 안으로 마음껏 치고 들어갈 수 있는 테니까 말이다.
녀석이 과연 위성통신망을 잡았을까...
곤베이는 자동차 창밖을 내 보았다. 도쿄의 밤하늘도 다른 여타 지방과 마찬가지로 산더미같은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곤베이의 자동차가 경찰 사이렌을 울리며 국립자연교육원으로 진입했을 때는 주차장안에서 3대의 가와사끼川綺 MBB 118 헬기가 이룩을 준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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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라 불리는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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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는 어떡케 된 건가. 앙?"
진광섭은 달리는 자동차안에서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이상운과 통화 중이었다. 밤 7시 55분. 아직도 마에다가 가나기원에 귀가를 하지 않았다는 보고였다. 진광섭은 울화통을 터졌다. 통화를 끝낸 뒤 다시 임소봉을 호출했다.
임소봉 일행은 후지산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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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는 준의 손을 뿌리쳤다. 간신히 긴 키스를 끝낸 것이다. 마끼는 홀 중앙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지금 상황은 자기 자신도 이해 할 수 없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마끼는 입술에 조금 미소를 띠고 준을 향해 돌아다보았다. 개가 짓고 있었다.
"아. 이제야 당신이 누군지 알겠어요."
준은 방향을 바꾸어 사유리에게 걸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음성이 들렸다.
"울프인가요?"
마끼는 억울한 듯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울프 맞겠죠? 울프라는 아이디를 사용한 적이 있겠지?"
준은 가볍게 한 숨을 쉬었다.
"내가 사용하는 아이디는 12개나 있소. 어쩌면 울프라는 아이디가 있는 지도 모르겠군요."
"울프라는 아이디를 들은 적이 있어요. 우익 정보를 입수하려다가 실패한 산업스파이라고 하더군요. 그 때문에 이쪽 우익단체 사이에서 비상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 게요?"
"당신이 울프인가 아닌가 그걸 물었을 뿐이에요."
"난 울프가 아니오."
"그러신가? 그럼 도와주려고 했던 걸 철회할 수밖에 없군요."
"도와주겠다니?"
"울프는 한가지 실수를 했어요. 아니 실수를 한게 아니죠. 너무 많이 파고 들어왔던 거죠. 그는 겁도 없이 정보를 수집했어요. 수집한 게 아니죠. 파괴 했어요. 45종 92건의 정보를 파괴했어요. 그게 울프였어요."
"언제 그랬소?"
"95년 여름이었을 거에요. 울프 때문에 문제가 많았죠. 이 때문에 우파 단체에선 디펜스 막을 설치했어요. 하지만 울프를 잡지 못했어요. 그는 정확하게 세달 동안 활동한 뒤 사라졌으니까."
"그런데?"
"금년 초에 내 보이프랜드가 그러더군요. 울프를 찾았다고. 그가 사용하는 모든 전화선을 찾았고,로그인 방식을 분석했고,그가 하던 작업을 샅샅히 연구했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이유가 뭐지?"
"울프는 우익단체의 신경조직을 건들었어요. 명백히 반칙을 구사하였고, 일본의 자존심을 건들었어요."
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체온이 급속히 냉각되어갔다.
"그가 하던 작업은 중단되었소. 울프가 우익단체의 자존심을 건들었다고 생각 하오? 울프는 단지 방어를 했을 뿐이오."
"그렇군요. 울프. 당신이 사용하는 12개의 아이디중에는 울프가 있는 것이 분명하군요."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하지 않는게 아니겠지. 할 수 없었겠지요. 겁이 났을 테니까."
"겁이 난 건 사실이오. 난 많은 정보를 입수했소. 하지만 효과적으로 이용한 건 몇종류의 산업정보 밖에 없었소. 그것도 작업 중에 중단하는 경우가 많았소. 대개는 급속히 철수를 하는 일이 허다했으니까."
"그러시나? 그럼 일본강관(NKK)과의 싸움에서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죠? 2백20억 엔에 상당하는 제철플랜트 공사를 울프 당신은 가느다란 열 손가락으로 막았어요. 데이터를 하루 전에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뒤에 거미줄처럼 짜놓은 팩스 망까지 당신이 직접 컨트롤했어요. 그 결과가 어땠죠?"
"제일중공업이 말레이지아 국유 제철플랜트의 수주권을 따냈소."
"기억하는 군요. 그 때문에 당신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어요. 울프. 당신은 최고였어요. 해킹에 관해서는. 하지만 모든 게 제일그룹의 농간이라는 건 곧바로 들통이 났어요. 이익을 보는 자가 항상 의심을 받게 되니까."
"오버 센스군."
"그 때문에 당신은 실패한 거에요. 3달 동안 당신이 한 작업은 모두 제일 그룹에 도움을 주었어요. 이 때문에 우익계 기업들이 제일그룹을 견제하기 시작했지. 당신을 잡아내지를 못했지만 배후에 제일 저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어요. 그건 당신을 추적하는 것보다 쉬웠을 겁니다만."
"당신은 어느 단체의 팬이지? 대비회(大悲會;일본우파테러단체)인가 아니면 국민위원회 소속인가?"
"재미있군요. 난 나를 믿어요. 내가 시시하게 다른 이들과 어울려서 그들이 말하는 이야기에 도취되어 흥얼거리는 여자로 보이나?"
그렇게 말한 뒤 마끼는 뒤로 돌아 걸어갔다. 복사뼈가 보였고,맨발이었다.
페르시아 양탄자가 조용히 소리를 냈다.
"아니요. 마끼 당신은 여러가지로 잘못 알고 있소.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기억도 없소. 두번 다시 그런 실수를 할 생각도 없소."
"어쩔 수 없군요."
"궁금하군. 대비회가 아니라면 어떤 경로로 내 이야기를 전해들었소?"
"보이프랜드가 방위청 기술연구본부에 근무합니다."
방위청 기술연구본부라면 일본 방위청 산하 정보분석팀이다. 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쉰 목소리였다.
"그쪽에서 나온 정보인가? 당신 보이프랜드 이름을 알고 싶은데?"
"하사 마에다. 아까 말한 채팅 프랜드죠."
김준은 마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마끼를 쫓고 있었다.
그녀는 거실을 가로질러 사유리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준은 마끼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노트북컴퓨터를 챙기기 위해 서재로 방향을 바꾸었다. 아찔하게 현기증이 일어났다.
하사 마에다.
하숙집 가나기원에서 바로 옆 방에 살고 있던 일본인 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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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햄버거를 씹어먹으며 후꾸오 하야시는 이번주중에 두 번째이자 마지막 살인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위험하지 않을까. 똑같은 작업을 또 다시 시도할 수 있을까 라는 야릇한 생각이 들었다.
변전소라면 가능할지 몰랐다. 지하철이 스타트할 때 변전소의 전원을 끊어버리는 작업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이건 마지막 작업이었다. 미나를 위해서라면 이 작업을 끝으로 영원히 일본을 떠나고 싶었다. 그쯤까지 생각이 가자 하야시는 욕심이 생겼다. 열차를 통째로 전복시키는 것이다.
마지막 작업치고는 화려하게 끝나게 될 것이다.
추적을 해와도 의심을 받을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동급해커가 의심을 받을 것이다. 사건은 확대되가겟지만,자신은 그저 캐나다로 튀어 버리면 된다.
골치 아픈 것은 이번에 살해해야 할 사람이 여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하사 마에다. 방위청 도메인을 관리하는 자. 어지간해서는 방바닥을 떠나지 않는 자인데 이 자를 과연 지하철을 이용해 살해할 수 있을까.
이번에는 거금이 걸려 있었다.
어느때에 마에다가 폐쇄회로 카메라에 걸려들지는 하야시 자신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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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노트북을 케이스 안에 집어넣었다. 손끝이 떨렸다. 아직도 준은 납득을 하지 못했다. 하사 마에다가 자신을 괴롭힌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것이다.
노트북 케이스를 닫은 뒤 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마끼가 술에 취해 쿨럭이고 있는 사유리에게 걸어가더니,조심스럽게 그녀의 몸을 어루만지고 있다. 대단한 애정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일까. 준은 두 여자를 관찰하다가 고개를 돌려 마끼의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불현듯 또다시 의문이 시작되었다.

하사 마에다가 후루겔스 게이꼬를 살해했을까.

하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없다. 게이꼬를 통해 협박을 해 온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게이꼬를 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
한참 만에야 준은 하사 마에다가 3개월전에 갑자기 가나기원으로 이사를 해온 것을 깨달았다. 다시 처음부터 날짜를 조심스럽게 따져 보았다. 분명했다.
하사 마에다는 준은 감시하기 위해 파견되었는지 모른다.
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1년전 고종수의 기분이 어땠는지 헤아려 보았다.
처음에 고종수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었다. 뒤집어 놓을 수 있으면 무엇이든 해보라고 독촉을 했다. 그날부터 김준은 울프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 3개월 동안 준은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아니 무엇을 알았던 것일까.

1년전 봄에 김준은 가와사끼 제철의 컴퓨터 망을 조사하고 있었다. 일본안에서 시작한 처음 세 번째 작업이었다. 이 때문에 해킹중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발생했다. 그 와중에 걸려든 것이 방위청 컴퓨터였다.
준은 호기심을 느꼈다. 어떤 이유로 해서 방위청 안으로 치고 들어가려고 했는지는 그 자신도 몰랐다.
준이 알아낸 바에 의하면 그 당시 일본 방위청의 <자국 방위비밀>은 9,722건 165,000점에 달했다. 이는 일본 방위를 위한 중대한 비밀로 이중 <극비>는 762건 3,290점이었다. 호기심을 떨칠 수 없었다. 준은 대개의 낮과 밤을 일본 방위청 컴퓨터와 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과도했는지 모른다.
어느날 준은 불현듯 위기감을 느꼈다. 그는 작업을 중단하고 곧바로 고종수에게 보고를 했다.
고종수는 당황했다. 김준이 의외로 재미없는 정보를 수집해 왔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종수 역시 겁을 집어먹었다. 방위비밀이라는 것이 알면 안되는 정보였고,그것을 알자 이제는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누어 가지기에는 너무 크나큰 비밀이었다.
고종수는 준에게 이 사실을 둘 사이의 비밀로 하자고 다짐을 했다. 그 뒤 울프라는 아이디는 사용이 금지되었다. 준은 다시금 본래의 작업을 진행했다.
일반적인 산업기밀 입수에 치중했고,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거나, 밤에는 무작정 드라이브를 나서곤 했다.
하지만 3개월동안 파악했던 정보는 이미 잊기 어려운 정보들이었다.
처음부터 기묘한 호기심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정보였는지 모른다. 한 꺼풀 벗겨진 비밀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이쇼핑은 서서히 실제상황으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것들이 김준 자신의 개인적 호기심인지 아니면 두 민족간 혼란에서 비롯되었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저 두들기다 보니 문이 열린다,라는 심정이었다. 준은 다시금 밤마다 금지된 영역을 침입해 들어갔다.
운이 나쁘게 주일미군 사령부까지 김준의 해킹 대상으로 떠 올랐다.
바로 한달 전만 해도 김준은 함대통신망 통신위성을 통해 서태평양 함대항공부대 휘하의 오키나와 가테나 해군기지 컴퓨터를 조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김준의 개인적인 호기심 때문이었다. 미일안전보장 조약과 관계된 방위청 극비 사항중에는 이에 대한 좋지 않은 내용이 다분히 있었다. 준은 혼란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거래가 양국간에 진행중이었다.
어쩌면 우익단체의 교묘한 공작이었는지 모른다.
첫 3개월동안 입수했던 초기 서류들은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모든 서류들은 한가지 사실에서부터 여러가지 추측을 유발하게끔 교묘하게 작성되어져 있었다. 그런 뒤 극비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재차 확인하는 과정이 준에게 필요했다. 아니 사실을 알아낼때까지 준은 전세계 미군기지를 모두 뚫고 들어가고 싶었다. 그날도 준이 사용한 아이디는 울프였다. 9개월전 사용을 중단했던 아이디로 준은 다시금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이 작업은 이미 그만 두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이제 누군가가 김준의 정체를 알아챈 것이고,지금 하사 마에다를 통해 김준을 추적해오는 것이다.
준은 식을 땀을 흘리며 마끼의 컴퓨터를 응시하다가 뒤로 몸을 돌렸다.
마끼가 걸어오고 있다.
"일본에서 떠나요. 지금 당장. 아니 내일 아침 첫 비행기를 타고 가시죠.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에요."
"떠나지 않겠다면?"
"이곳에서는 이제 더 이상 당신이 할 일이 없어요. 더구나 당신은 이미 정체가 발각되었어요. 야쿠자를 동원해 당신을 살해하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알아요. 아니 오히려 이쪽에서는 즐기고 있을지 모르겠군요. 최소한 내 친구는 그런다고 하더군요."
"몇명이 붙어 있소? 나를 공격하는 사람은?"
"최소한 2명...아니 그보다 많겠군요. 거미줄처럼 얼키설키 움직이고 있을 테니까..."
사유리가 별안간 끼어 들었다.
"김짱. 작년 봄에 일본에 왔다고 했나요?"
"그건 왜?"
"그럼 고베 지진 때 오셨군요...?"
"그래."
"뭘 했어요?"
준은 마끼를 응시하다가 사유리의 손목을 잡았다.
"가야겠소."
사유리가 앙탈을 부렸다.
"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거죠? 기자가 아니라구요? 정말 산업스파이에요?"

사유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작년에 한 건 지진으로 박살 난 8비트 CPU를 연구한 거 밖에 없어. 내가 산업스파이로 보이나? 사유리 눈에는?"
사유리가 졸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런건 상관없어요. 그런데 8비트 CPU가 뭐에요?"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공중전화 롬(ROM)이야."
마끼가 싸늘한 음성으로 끼어 들었다.
"당장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게 어때? 이 별장을 어떤 방법으로 빠져 나갈 건지 생각해보세요."
"무슨 뜻입니까?"
마끼는 준의 말에 대답을 하지 않고 창밖을 응시했다.
"창 밖을 봐요. 저들은 내각정보조사실 사람들이죠. 한시간 후에 만나기로 했는데...3시간이 지나도록 저곳에 그대로 서 있습니다.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나요?"
"저들이 당신을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이요?"
"당신과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게이꼬에게 디스켓이 전해진 과정을 궁금해 하더군요."
준은 벽난로로 걸어갔다. 대형 유리창 너머로 별장 아래가 내려다 보였다.
무엇을 뜻하는 가. 폭우가 쏟아지고 있지만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뜻일까. 어떡케 상황이 바뀌었을까.
준은 씁쓸하게 말했다.
"저 친구들도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모양이군."
사유리는 깜짝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김짱. 또 도망가야해요?"
준은 벌래 씹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 한평생 뻐꾸기 시계나 만들면서 살고 싶었는데 말야. 이렇게 도망다니는 게 내 인생인가봐."
사유리는 몸을 떨었다. 아니 사실상 겁이 났다. 사유리는 처음으로 진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나도 이제 지쳤어요. 김짱 마음대로 하세요."
"마음대로 하다니? 무슨 뜻이야. 사유리?"
"끝까지 저를 책임지라는 소리죠. 흐."

발목 잡혔군...
벌써부터 기어오르는 구나.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출입문으로 걸어갔다. 마끼가 저쪽에서 걸어왔다.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도망갈 수 있을 거 같나요?"
"나를 도와줄 생각이오?"
"원한다면. 내가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면 좋을까요?"
"저들을 유인해 주시오."
"보답은?"
"일본을 떠나겠소."
"이제야 겁을 먹었군요."
"물론이요. 하지만 내 일은 내가 해결한 뒤에 떠나겠소."
"자신만만하군요."
준은 비쩍 웃으며 마끼를 응시했다. 마끼의 검은 드레스가 바스락 거리면서 움직였다.
"핵이군요. 사회당이 난동을 부리는 것처럼 당신도 어쩔 수가 없나 보군요."
"난 아는 게 없소."
미끼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잡아 땔 필요 없어요. 핵에 대한 소문은 예전부터 있었으니까."
그렇게 말한 뒤 마끼는 자신의 손을 앞으로 내 밀었다. 팔찌에 걸려있는 무엇인가가 빙그르 돌아 마끼의 손끝으로 올라왔다.
"이게 필요할 거에요. 살아서 이곳을 탈출한다면 나에게 두배로 보상을 하세요."
마끼의 손끝에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터 스포츠카의 시동키가 대롱 대롱 매달려 있었다.
"왜 나를 도와주는 것이오?"
준이 자동차키를 받지않고 되묻자 마끼는 히쭉 웃었다.
"부자들의 여유입니다. 난 당신이 살아나가는데 50%를 걸겠어요. 당신은 얼마?"
"난 100%요."
준은 짧게 대답한 뒤 마끼의 손끝에 걸려있는 자동차 키를 날카롭게 낚아챘다.
어느사이에 마끼의 몸이 빙그르 당겨왔다. 그런 뒤 키스.
마끼는 어이가 없었는지 멍히 두 눈을 뜬 상태로 준을 응시했다. 준은 비쩍 마른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호의에 대한 답례요. 이 정도면 되나?"
마끼는 싸늘하게 표정이 굳었다.
"형편없군요. 겨우 이 정도인가?"
"그만하시고 떠나요 김짱. 소녀 사유리는 더 이상 참을수 없다구요!"
그렇게 말하며 사유리가 별안간 준의 다리에 테클하듯 뛰어들었다. 반쯤 씩씩거리는 것이 이제부턴 도저히 못봐주겠다는 심정이다. 준은 붉어진 얼굴로 사유리에게 이끌려 거실 옆문으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자 마끼는 싸늘히 굳은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집사가 뛰어오자 마끼는 불쑥 말을 내 뱉었다.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쩌지?"
"우선은 연락을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연락할 필요 없어. 우선은 저 친구들이 이곳을 빠져 나갈 수 있는지 구경하고 싶어..."
"도와줄 생각입니까?"
"어느 쪽도 나와는 관계가 없어. 그런데 지금 산책을 나갈 시간인가?"
"그렇죠. 우비를 준비하겠습니다. 자동차는 어떤 걸로 준비할까요?"
"이즈 숲에 자동차가 있다고 있지?"
"예."
"그 자동차를 타고 싶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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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조는 적외선 쌍안경으로 별장을 관찰하고 있다. 두개의 그림자가 별장 우측 문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45분. 게이조의 몸은 온통 젖어 있었다.
게이조의 등 뒤에는 두대의 노란색 밴이 서 있다. 그중 하나는 내각정보 조사실 4부 <통신정보팀>에서 긴급특파한 요원 두명이 타고 있다. 그들은 계속 핸드폰 통화에 대응하는 방해전파를 쏘아 올리고 있다가 게이조의 지시가 내려지가 급히 방해전파 발사를 중단했다. 놈이 움직이는 동안은 핸드폰 사용을 자제할게 분명했다.
별장 동쪽 담벼락 너머의 밤나무 줄기 사이에는 방위청 <별실>에서 특파된 요원 한명이 올라가 있다. 저격요원이다. 그 역시 게이조와 마찬가지로 적외선 망원경으로 별장 안을 관측하고 있다. 어두었다. 그의 좌측 허벅지에는 저격용 라이플이 놓여 있는데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게이조는 밤나무의 사내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적외선 쌍안경을 눈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별안간 별장 현관문에서 두명이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게이조는 급히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뭐야. 현관문 감시조! 방금 나온 두 사람이 누군가 당장 알아봐!"
좌측에서 타닥 뛰어가는 소리가 폭우에 파 묻혀 들려왔다. 게이조는 식은 땀을 흘렸다. 무언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시나노 곤베이가 도착하려면 아직 30분 가량이 남아있다. 시나노 곤베이. 방위청 육상막료감부의 조사부 출신으로 내각정보조사실 6부의 중추적 인물로 부각된 괴물. 곧이어 차장급 으로 승진한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행동대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그가 여기까지 날아온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서두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슴이 탔다. 밤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저격수가 커다랗게 외쳤다.
"별장 카고입니다. 자동차가 한대 빠져 나오고 있습니다!"
게이조는 정문으로 뛰어 갔다. 1천미터 전방 어둠 속에서 자동차 한대가 천천히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뭐야! 누가 탄 건가?"
찰칵 소리가 들려왔다. 게이조 우측에 서있는 요원이 줌렌즈가 부착된 카메라를 박고 있었다.
"로드스타입니다. 이상한데요. 여기 자료에는 없는 자동차입니다."
불쑥 현기증이 일어났다. 게이조의 뇌리에 아까 마끼가 타고 왔던 스포츠카가 떠올랐다.
"마끼 준사히양인가?"
"모르겠습니다. 현관에서 나온 두 사람이 별장 왼쪽 이즈 숲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숲 앞에는 또 다른 자동차가 보입니다. 미치겠는데요. 한쪽은 우릴 유인하려는 생각인거 같습니다."
염병할...
게이조는 얼굴이 빨개졌다. 부하의 말대로 한쪽이 유인을 하는 것이 분명했다.
게이조는 힘차게 별장의 철제 대문에 몸을 부딪쳐 보았다. 철문은 둔탁한 소리를 냈지만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서 나타났는데,갑자기 경비견 두마리가 껑껑 거리며 빗속을 달려 나왔다.
"빠가야로. 저 똥개 당장 처리해! 그리고 너! 당장 밴으로 바리케이트를 쳐!"
풋슈---- 소리와 함께 게이조의 옆에서 소음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동시에 두 마리의 개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풀쩍 쓰러졌다.
곧바로 뒷쪽에서 밴 자동차가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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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입이 벌어졌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장 정문 밖에서 두대의 밴이 바리게이트를 치는 모습이 보였다.
"김짱. 무슨 일이에요? 저들이 내각정보실 그 사람들인가요?"
"몰라. 이상하군. 다 들 난리인데 왜 그런 거지?"
사유리의 입에서 알코올냄새가 풍겨 왔다.
"흐응...제 소견이지만 영화 촬영이라고 생각해요. 그보다는 이 시트 너무 부드러워요 흐..."
그렇게 말하며 사유리는 준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준은 얼굴을 붉히며 사유리의 몸을 떼어놓았다. 사유리는 싫은 표정으로 준을 올려다보았다.
거실에서야 마끼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다. 입이 딱 벌어지는 80인치 HD비전이 있는 거실은 말 그대로 마끼의 홈그라운드였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김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반발심리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무조건 앙탈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유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준은 차갑게 말을 내 뱉었다.
"마끼가 준 리모콘은 어디에 있지?"
"이거요?"
사유리는 토라진 얼굴로 왼손에 쥐고 있는 리모콘을 준의 코앞에 불쑥 내밀었다. 그런 뒤 천천히 앞쪽으로 리모콘의 방향을 바꾸었다. 동시에 리모콘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가녀린 소리를 내며 별장 정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150미터 전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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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김영진과 임소봉,고영삼은 두대의 렌트카로 후지산 동쪽 능선 도로를 넘어오고 있었다. 폭우가 심했다. 오는 도중에 다리 하나가 끊어져 내렸다. 이 때문에 30분여 시간을 우회 도로를 타는데 소비했다. 이제 막 후지산 초입부에 도착하고 있었다.
이미 임소봉은 두차례나 진광섭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진광섭의 말대로 라면 아무래도 심각했다. 소봉은 진광섭의 말을 되세기며 수첩을 꺼내 펼쳐 읽었다.
시나노 곤베이.
곤베이는 방위청이 내각정보조사실에다 박아 둔 일급 베테랑 수사요원이었다. 이해할수 없지만 내각정보조사실은 공식 직원 수가 111명에 불과한 소규모 단체였다. 그렇지만 경시청,자위대,외무성에서 인원이 파견되어 풍부한 자금력으로 외곽단체를 이끌어 가고 있었다. 이중 시나노 곤베이는 걸작이었다.
임소봉과 곤베이는 몇번 안면이 있기도 했다. 진광섭을 따라 다니며 진광섭과 곤베이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지켜 보았던 것이다. 용호상박. 진광섭과 곤베이는 불과 물같은 사이였다.
곤베이는 분명 조심해야할 인물이었다. 이 때문에 이 자가 지금 이곳으로 날아온다는 게 임소봉은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김준 놈이 무슨 짓을 했던 것일까.
진광섭의 설명에 의하면 내각정보조사실 직할단체인 <세계정경조사회>의 제2부 5반에서 특공조가 투입되었다는 정보가 있다. 세계정경조사회 2부 5반은 외따로 떨어져 남북한의 공개자료를 조사 분석하는 팀이었다. 여기다가 법무성 외청의 하나인 <공안조사청> 외사팀까지 김준을 쫓고 있다고 한다.
이쯤되면 일본의 모든 정보단체가 김준 하나를 잡기 위해 얽히고 설켜 있다는 뜻이 된다. 김준이 그토록 중요한 인물이란 말인가.
임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딸가닥 소리가 들렸다.
"어찌된 거요. 김형. 빨리 좀 갑시다."
"저도 서두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셋으로 되겠습니까?"
"낸들 아나."
임소봉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패니즈 시크리트 서비스(일본정보단체를 말함)끼리 싸우라고 그래.
우리야 뒤쪽에서 구경하다가 빼 오면 되는 거지만 그 친구들 왜 이리 뒤집어진거지?"
"글쎄요. 녀석이 본국 국방부 말고 일본 방위청에도 침투를 했다면 문제가 정말 심각해 지겠지요."
"혹시 이러다 북한까지 꼬여드는게 아닌지 모르겠어."
"주한미군에...주일미군 기지까지 가지고 논 것은 확실한가 보군요. 정말 이상한 녀석이군요. 김준이란 놈 한번 연구해보아야 할거 같은데."
말은 그렇게 했지만 김영진이나 임소봉은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식은 땀이 났다. 상황이 교묘하게 꼬여가고 있었다. 도대체 놈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임소봉은 다시 자신의 저격총을 만지작거렸다. 일본 정보팀 앞에서 이런걸 함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곧바로 대사관으로 항의문이 날아들 것이다.
임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왈셔권총. 다람쥐같이 작은 총이다.
"살 맛 안 나는군..."
임소봉은 창밖으로 침을 탁 뱉으며 뇌까렸다. 빗방울이 잠시 자동차안으로 치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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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카가 후진하고 있습니다!"
나무 위에서 저격요원이 버럭 외쳤다. 게이조는 다급히 열려진 정문으로 뛰어 갔다. 확실했다. 150미터 전방에서 내려오던 스포츠카가 이번에는 뒤쪽으로 후진을 하고 있었다. 게이조는 서둘러 무전기를 빼들었다.
"이즈 숲 속의 차는 어디에 있나? 찾을 수 있나?"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안 보입니다. 후문 방향입니다."
제기랄.
게이조는 화가 났다. 어느쪽 자동차에 김준이 타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는 서둘러 뒤를 돌아다 보며 손짓을 했다. 바리게이트 형으로 정차해 있는 밴 두대가 곧바로 시동을 걸기 시작했다.
"쫓아가. 쫓아가서 잡으란 말야!"
시동소리와 함께 빗속을 뛰어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헤드라이트 빛이 날카롭게 별장 건물 아래로 펼쳐진 융단같은 잔디밭을 더듬어 올라갔다.
겨우 10명이었다. 이들중 4명은 후문 밖에서 진을 치고 있다. 역부족이었다.
이놈의 별장은 고래처럼 크다. 고래의 배를 가르면 1겔론의 피가 나온다고 하지. 게이조는 레인저 시절에 읽었던 소설 <모비 딕>의 내용을 더듬다가 다시 적외선 쌍안경에 갖다 댔다. 빗방울이 안구까지 치고 들어왔지만 게이조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 서 있다.
"후문 감시조! 지금 듣고 있나?"
"예! 어떻게 할까요?"
"문 부셔! 치고 들어가서 앞 쪽서 달려드는 자동차를 잡아! 되도록 빨리 확인한 뒤 연락 바란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동시에 이즈 숲 너머 후문 부근에서 날카롭게 섬광이 번쩍였다. 컴포지션이었다.
생각같아선 육상자위대 탱크라도 동원하고 싶었다. 18홀 골프장 크기의 별장이라 할지라도 육상자위대의 MLRS(다연장 로켓 시스템) 한대면 충분히 커버할수 있다.
게이조는 온몸을 부르르 떨며 자신의 옆에 멈추어 서는 밴에 서둘러 올라탔다.
그런 뒤 다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저격요원. 놈이 정문으로 접근하면 무조건 잡아! 곤베이가 올 때까지 놈을 잡아둔다. 알겠나?"
"알겠습니다!"
게이조는 응답을 들은 뒤 곧바로 무전기를 양복 상의 안에 집어넣었다.
밴 자동차는 털털거리며 발장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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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저거 보세요. 앞에서 두대나..."
"알아. 보고 있어."
준은 그렇게 대답한 뒤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을 천천히 놓았다. 로드스타 내부는 사유리가 켜놓은 카스테레오때문에 시끄럽게 음악이 흐르고 있다.
"안전벨트는 맺니?"
"넵."
사유리는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붕붕 뜨는 거 같았다.
무조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좋았다. 더구나 꽉 조여지는 마끼의 옷이 사유리를 묘하게 흥분시키고 있었다. 사유리는 자신의 각석미를 의식하다가 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준은 콧등에 황색 고글을 걸치고 있었다. 그런 뒤 어디다 감추어두었는지 박하 냄새가 나는 네모난 민트 껌을 하나 꺼내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얼굴빛은 창백했다.
사유리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화석같이 굳어있는 얼굴표정의 남자. 갑자기 한 남자의 본성을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유리는 자신도 모르게 준의 팔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뿌리치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할 거죠? 김짱?"
"그 문제는 사유리가 걱정할게 아냐."
"왜요?"
"난 잡혀본 경험이 없어. 자수한 적은 있지만 말야."
"잉?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음. 별거 아니야. 해커의 생활신조지."
"잉잉잉... 말해줘요. 뭐에요? 아저씨 산업스파이 맞죠?"
윽...들켰구나...
"히잉...그래도 상관없어요. 날 사랑해주면 되자나."
윽...
"안전벨트 맺나 다시 확인해 봐."
"자요. 아저씨가 직접 확인하세요. 응?"
준은 전방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사유리를 보았다.
"훌륭하구나. 사유리."
"흥."
준은 스포츠카를 세운 상태에서 기어를 바꾸었다. 아래쪽에서 두대의 밴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다시 사유리를 보았다. 사유리는 밴에서 토해져 나오는 헤드라이트 빛에 눈이 부신 지 고개를 돌리다가 김준과 두 눈이 마주쳤다. 사유리는 이글루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사유리의 볼에 얼굴에 갖다 댔다. 가벼운 키스가 끝났다. 그런 뒤 브레이크를 풀어 헤쳤다.
동시에 준의 손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꺽었고,오른발은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부르릉.....
람보르기니 로드스타는 뜨겁게 엔진을 가열하더니 오른쪽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최고 출력이었다.
사유리는 자신의 몸이 흔들리는 것을 가만히 구경하다가 별안간 김준을 향해 외쳤다.
"아저씨? 무얼 알고 있는 거죠? 도대체 무엇때문에 저들에게 쫓기는 거죠?"
"쫓기다니? 난 아무것도 몰라."
"정말이에요?"
"그러니까 도망다니는 거지. 몰랐나?"
사유리는 준의 대답을 음미하다가 어지러운 머릿속을 가다듬고 다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알수 있을거 같았다. 아니 사유리는 자신이 지금 한 남자에게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저 좋았다.
스포츠카가 무섭게 잔디밭 위로 날아오르자,둔탁하게 사유리의 몸도 좌석에서 떠올랐다. 그러자 잽싸게 준의 손이 사유리의 몸을 잡아 주었다. 이 남자는 친절한 것이다. 사유리는 행복했다.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그래. 19살의 나이. 드디어 고대하던 행복이 찾아온 것이다.
한국인이면 어떻고 필리핀 남자인들 어쩌랴.
사랑하는데.
사뇨 사유리는 진지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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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소봉은 차에서 내려 쌍안경으로 마끼의 별장을 관찰했다. 어두웠다. 별장안 왼쪽 언덕에서 한대의 자동차가 도망을 가고 있었고,그 뒷쪽으로 두대의 밴이 따라 가는 모습이 보였다. 임소봉은 싸늘하게 표정이 굳어졌다.
"이게 별장이야,골프장이야? 후지산 산록을 전세 낸 모양인데?"
영진은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도 누군가가 있군요."
소봉은 김영진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커다란 나무였다. 나무 중간쯤에서 적외선 레이저 빛이 잠시 반짝였다. 저격라이플이다. 총구는 40도 각도로 땅바닥을 향하다가 다시 별장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피라미임에 분명했다.
"어떻게 할까요? 기다릴까요?"
"글쎄...곧 있으면 과장님이 올텐데 말이야. 이대로 곤베이에게 넘겨 줄 수는 없지 않나. 안 그런가?"
소봉은 어젯밤 실수를 의식했다. 오늘은 김준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왔군요."
김영진은 서둘러 자신의 야광시계를 보았다. 밤 9시 정각. 북쪽하늘에서 헬기 3대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시나노 곤베이 일행이었다.
동시에 양쪽에서 펑 소리가 들려왔다.
영진과 소봉은 급히 별장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폭우 속이었다. 조명탄 한발이 별장 상공에서 태양처럼 뜨겁게 불길을 토하며 작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으로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스포츠카가 미친 사자처럼 별장 정문을 향해 돌진해오고 있었다.
이미 곤베이 팀의 체포작전은 시작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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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 스피드 웨이 富士 Speed w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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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유리의 몸이 붕 떴다. 와락 겁이 났다. 사유리는 준의 품에 안겨 붙었다. 심장박동이 들려왔다.
준은 백미러를 보았다. 잔디밭을 내려오다가 밴 한대가 기우뚱하는 거 같았다. 밴은 쓰러지지 않았다.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조명탄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다.
"김짱. 정문을 닫고 있어요. 방향 바꾸세요!"
사유리는 화들짝 놀래 비명을 질렀다. 준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공처럼 차체가 튀어 오르며 왼쪽으로 방향이 꺾였다. 오른쪽 창으로 급속하게 조명탄 빛이 파고 들어왔다. 빗방울이 튀었다.
"어떡할거죠? 자신 있어요?"
"뭐가?"
"탈출하는 거요."
"그럼 스터디인줄 알았나? 정신 차려!"
"나 참,누가 정신을 차려야 할지 모르겠네. 어머!"
사유리는 입을 벌렸다. 김준이 이번에 또 다시 후진 기어를 넣고 있었다.
람보르기니는 수동 5단 기어를 가지고 있었다. 보디는 굉음을 토하며 뒤로 달려갔다. 잔디가 타이어에 먹혀 빨려 올라왔다. 오르막길이었다.
"피해!"
게이조는 잽싸게 외쳤다. 동시에 두대의 밴은 언덕 위에서 좌우로 갈라져 내리며 스키 고글에서 굴러 떨어지듯 곤두박질을 치기 시작했다.
사유리의 몸도 마찬가지로 곤두박질 쳤다.
"흐...이거 ABS나 에어 백은 있는지 몰라. 정말 캡 무섭네!"
"겁먹을 건 없어! 측면 에어 백까지 장착되어 있는 걸 모르나?"
"정말요??"
사유리는 우측으로 갈라지는 밴을 돌아다보며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난 작가의 파이프이에요.
아비시니아 또는 카프라리아 여자와 같은
새카만 내 얼굴 들여다보면
우리 주인이 골초인줄 당장 알지오...
주인 양반 고민이 막심하면은,
나는 뻐끔뻐끔 연기를 품지요.
일하고 돌아오는 농부를 위해
저녁밥 준비하는 초가집처럼요...

흙더미가 날카롭게 튀어 올랐다. 그것은 람보르기니의 차체를 타고 앞으로 날아 오르다가 폭우에 의해 파편처럼 세력이 약화되었다. 계속 람보르기니는 괴물같은 힘을 발휘하며 후진으로 언덕길을 치고 올라갔다.

불타는 내 입에서 솟아오르는...
흐믈거리는 푸른 빛 그물은
그분의 넋을 껴안고 재워주지요...

별안간 람보르기니의 앞 차체가 둔탁하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또 다시 시작된 요동이었다. 우측으로 보디가 기우뚱했다. 사유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운전대를 잡은 상태에서 창백하게 백미러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옆 얼굴 너머로 무지개 포물선을 그으며 진흙과 잔디가 뿌리째 밤하늘로 복잡하게 튀어 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준은 털끝 하나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잔인할 정도로 냉정한 표정이었다.
사유리는 가까스레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녀는 잠시 콜록이다가 외우던 시의 나머지 부분을 조심스럽게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세찬 향기 감돌게 하여...주인 마음 황홀케 해요...고달픈 그분 머리 어루만지며...

사유리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준의 팔을 잡았다. 이번에는 뒷트렁크 쪽이 붕 떠오르고 있었다.
사유리는 비명을 지르며 와락 준의 품에 안겼다. 그 상태로 사유리는 사색이 되어 방금전 외운 시를 다시 반복했다.
준은 고개를 숙여 사유리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사유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준을 올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제 시를 알고 있군요...?"
준은 고개를 돌려 자동차 후방을 바라보았다. 별장까지 람보르기니가 급속하게 치고 올라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전방을 응시했다. 조명탄은 빛을 잃고 어딘가에서 자취를 감추었고,두대의 밴이 방향을 트는 모습이 보였다.
"보들레르를 좋아하나?"
준은 핸드 브레이크를 걸며 입을 열었다. 사유리는 별안간 눈물을 글썽였다.
"네. 유치하다고 하지만 전 좋아해요...좋은걸 어떻해요...캡 재밌잖아요."
준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정문 가까이 가면 리모콘을 눌러. 문이 열리면 동시에 이 정글에서 빠져나갈 생각이야."
"정말이요?"
"그래. 나의 귀여운 마르그리뜨."
준은 그렇게 말한 뒤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유리는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마르그리뜨...실국화...보들레르의 시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가을의 소네트. 나의 쌀쌀한 마르그리뜨여...

사유리의 가느다란 손에는 다시 리모콘이 쥐어 졌다. 아래쪽 1천미터 전방에 별장 정문이 있었다. 날개를 단 듯 벤 자동차 두대가 언덕으로 치고 올라 오고 있다. 폭우에 꺽인 헤드라이트 빛은 발퀴레적인 환영을 만들고 있었다.
다시 준의 음성이 들렸다.
"우측으로 이동하면 밴이 곧바로 뒤따라 붙을 꺼야. 저쪽 숲으로 들어간 뒤 후진을 하겠어. 그러다 기회가 닿으면 방향을 바꾸어 곧장 정문으로 치고나갈 생각이야. 명심해. 날 거미줄에 걸린 잠자리로 만들지 말라고. 알았니?"
"히잉...알았쪄."
막상 대답은 그렇게 했다. 하지만 그녀의 시야로 이쪽 별장으로 치고 올라 오는 벤 두대가 바짝 당겨오자 별안간 덜썩 겁이 났다. 무서운 속도였다.
불안하고 섭섭하고 황당한 기분이었다. 다시 준의 음성이 들렸다. 비쩍 마른 미소. 이 남자는 오딘계열의 신神 중 하나일까.
"아,정문이 아니라 후문이야. 후문으로 탈출할 생각이니까 머릿속에 외워 두라고. 알겠나?"
"후문요? 후문으로 도망간다고요?"
이번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두대의 헬기가 별장 정원에 착륙을 시도하는 모습이 보였다. 준은 싸늘히 헬기를 바라보다가 별장 우측으로 람보르기니를 움직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스테인리스 쓰레기통이 넘어졌다. 곧바로 이즈 숲 너머에 있는 별장 후문이 보였다. 후문쪽에는 어둠 속에 두대의 차가 서 있다.
준은 심호흡을 한 뒤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는 별장 앞에서 U턴을 한 뒤 중앙도로로 미끄러지듯 내려갔다. 시속 100Km 속도까지는 단지 5초 정도의 정도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저 놈,돌았군!"
게이조는 두 눈을 부릅뜨고 급히 무전기를 빼 들었다.
"뭐하나! 당장 갈기지 않고! 이즈 숲으로 들어가기 전에 놈을 박살내란 말야!"
곧바로 정문 밤나무 위에서 불꽃이 번쩍였다. 요란한 총성이 폭우에 파 묻혀 들려 왔다. 빗나갔다.
"개자식! 어디다 갈기는 거야? 후문이다. 후문!"
게이조는 그렇게 외친 뒤 차 창 밖을 내다보았다. 오른편으로 헬기 한대가 낮게 가라앉고 있었고,밴 전방으론 헬기 두대가 다시 떠오르고 있다. 그중 오른편 2호 헬기에서 쏟아져 내리는 서치라이트 빛이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를 쫓아가고 있었다. 게이조는 문을 열고 벤 밖으로 뛰어 내렸다. 폭우가 세차게 그의 얼굴을 때렸다.
"곤베이 육좌님. 늦었습니다!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후문입니다!!"
다시 총성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붉은 선이 날카롭게 어둠을 가르며 람보르기니의 꽁무니로 달라붙었다. 요란한 소리였다. 이틈에 특공요원 두명이 헬기에서 뛰어 내리고 있었다. 그들은 밴 자동차를 향해 뛰어 오더니,냅다 운전석의 사내를 끌어내리고 밴에 올라탔다. 게이조 역시 서둘러 올라탔다. 시동이 걸렸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3호 헬기가 다시 조명탄 한발을 2시 방향 허공으로 쏘아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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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는 조명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숲 너머였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집사가 우산을 받쳐주고 있었고,두명의 사내가 얼굴을 붉힌 채 자신의 몸을 더듬어 보고 있었다.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도대체 알 수 없다. 사내 하나의 얼굴은 불행해 보였다. 그가 그녀를 향해 걸어 왔다.
"죄송합니다. 작전 중에 벌어진 일입니다. 양해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마끼는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페라리 스포츠카로 시선을 옮겼다. 꼴 나쁘게 앞 본 네트에 총알 몇발이 박혀 있다. 쓴웃음이 나왔다. 숲에서 나오는 순간 어이없게도 총탄 몇 발이 날아오며 유리창을 크게 부수기 시작했다.
죽는 줄 알았던 게다. 서늘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마끼는 피다 만 담배를 손끝에 걸었다. 담배 꽁초가 그녀의 손 끝에서 빙그르 돌아갔다. 손가락 놀림이 좋았다. 사내는 마끼의 손놀림을 경탄한 듯 바라 보고 있었다.
틱.
어느새 담배꽁초가 포물선을 그으며 사내의 얼굴로 날아들었다.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슬쩍 웃으며 땅바닥 고인 물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집어들었다.
그런 뒤 이번에도 마끼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숲 너머에서 헬기 두대가 날아 오는 모습이 사내의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게이조의 음성이 무전기에서 터져 나왔다.
"그 놈 잡아! 람보르기니를 잡으란 말야!"
사내는 서둘러 앞쪽으로 뛰어갔다. 동시에 이즈 숲이 크게 울려 퍼지면서 람보르기니 한대가 잣나무 사이에서 총알같이 튀어 나왔다. 우측에 서있는 사내가 번개같이 권총을 꺼내 한방 쏘았다.
타앙----------
람보르기니의 오른쪽 백미러 부근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때문에 람보르기니는 방향 감각을 잃었는지 둔탁하게 급정거를 했다. 사내들은 총격을 멈추고 람보르기니를 조용히 응시했다. 사내 하나가 조심스럽게 접근을 시도했다.
사유리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뿌연 수증기가 백미러 부근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왜 브레이크를 밟았어요? 네?"
"마끼에게 인사는 하고 가야지."
사유리는 수축되었다. 잘못 들은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은 오른편을 응시하며 슬며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멀리 페라리 앞에 서 있는 마끼는 다시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당기고 있었다. 그녀의 젖가슴은 빗물에 젖어 투명한 굴곡을 내 비치고 있었다. 또 다시 서치라이트 빛이 람보르기니를 찾아 떨어지자 사유리는 당황스레 입을 열었다.
"김짱...인사는...다 하셨겠지요?"
"인사를 안 받아주는 군. 다시 출발해 볼까? 이놈의 12기통 벨브가 말을 잘 들어주어야 할텐데 말야."
준은 전방을 응시했다. 급하게 다이하쓰 자동차 한대가 후문 중앙에 바리게이트를 치고 있었다.
"어머? 다이하쓰까지 난리네? 우린 포위된 건가요?"
"포위된 게 아니야. 다이하쓰 알토 자동차가 분명하지? 3기통이던가?"
"히잉. 손톱만한 차라고 무시하는 건가요? 아니면 여기서 어머니라도 만날 생각이신가요? 빨리 도망이나 가자구요. 저 죽고 싶지 않아요. 다이 영. 지금 죽기에는 사유리 넘 젊어. 흐..."
준은 사유리가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유리 양. 두려움은 의식할 필요가 없어. 의식을 하는 행위는 스스로를 굴레에 가두어 두는 행위가 되니까 말야."
"흥.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제가 백치라는 거 아시잖아요."
"백치 아가씨. 내 말이 어려운가?"
"히잉. 캡 어렵다니까 그러시네."
"캡은 무슨 뜻이지?"
라고 되물으며 김준은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그러자 곧바로 총소리가 연거푸 들려오면서 우측 보디를 시끄럽게 두들기기 시작했다. 염병할. 콩알볶이듯 총탄이 날아오고 박히고 있었다.
사유리는 우측 보디쪽 좌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심장마비에 걸린 듯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돌비 서라운드 입체 음향이 실감날 지경이었다.
총을 벌집 쑤시듯 쏘아대다니 말야. 사유리는 허리를 굽혀 좌석 아래쪽으로 몸을 숨기다 말고 다시 비명을 지르며 준의 옆꾸리에 엉겨 붙었다. 하지만 이것도 곧 끝이 났다. 사내 4명이 좌우에서 걸어오며 권총을 쏘아대고 있었지만 달려나가는 람보르기니를 멈추게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후문 앞에 정차해 있는 다이하쓰 옵티 자동차를 그대로 들이 박고 있었다.
쾅-------------------
다이하쓰 옵티는 허공으로 튕겨 나가고 있었다.
마끼는 담배를 피다 말고 입이 벌어졌다. 자신이 선물 받은 차가 벌집 쑤시듯 당하는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설사 소형차라고 하지만,3기통 엔진을 장착한 다이하쓰 옵티가 충돌에 의해 밤하늘로 붕 떠오르는 모습은 생전 처음보는 광경이었다. 놀란 건 마끼 뿐만이 아니었다. 권총을 정신없이 쏘아대던 사내 넷도 난데없는 광경에 입이 쩌억 벌어졌다. 두 자동차가 충돌했는데 한쪽이 저렇게 일방적으로 박살나다니. 도대체가 믿을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 사이에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는 다이하쓰 옵티를 일방적으로 KO 시킨뒤,별장 뒷길을 따라 쏜살같이 도망을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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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를 끌끌 차는 저격요원을 응시하다가 곤베이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가고 있나?"
헬기 조종사가 대답했다.
"고텐바 방향입니다."
"고텐바라면 후지고원이 아닌가?"
시나노 곤베이의 질문에 우측에 앉아있는 사내가 서둘러 후지산 지도를 펼쳤다.
얼굴이 싸늘히 굳어 있었다. 불안했다.
"이상하군요..."
사내는 마른 침을 꼴깍 삼키더니 곤베이를 올려다보았다.
"스피드 웨이인거 같습니다. 아니 스피드 웨이가 분명합니다!"
사내의 말에 곤베이는 안면근육이 차갑게 경색되었다. 오른손이 떨렸다. 어느새 핸드폰을 꺼내 오른쪽 귀에 갖다 댔다.
"이봐! 오늘 야간경기가 있나 조사해 봐. 스피드 웨이야!"
핸드폰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랜드 챔피언 쉽 경기가 있었습니다만 주간 경기입니다. 이 경기는 오후 6시에 끝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관중이 있겠나? 정확하게 체크해 봐!"
"조사해 보겠습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헬기 밖으로 내다보이는 동쪽 산자락을 응시했다. 야마나카코 산정 호수가 내려다 보였다. 호수를 끼고 자동차의 행렬이 보였다. 폭우는 지랄같이 후지산을 괴롭히고 있었다.
"챔피언쉽 출전선수들은 모두 스피드 웨이 경기장을 떠났다고 합니다! 확실합니다. 이 자식. 폭우라 이놈의 진행요원도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 폭우속에 바로 4시간 전에 자동차 랠리가 있었다는게 믿어지지 않았다. 울컥 화가 났다. 다 잡아 놓은 김준을 놓쳤다는 사실이 좀처럼 실감나지 않던 차였다. 후문을 봉쇄해야 했던 것인데.
곤베이는 핸드폰을 바지 뒤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에는 벨소리가 울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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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터는 잠수정처럼 빗길을 달리고 있다. 속도계는 준의 눈앞에서 계속 올라가고 있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밤 9시 34분 정각.
준은 속도계를 응시하다가 힐끔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헬기 한대가 뒤따라 날아오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거에요? 여긴 후지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인데요?"
"스피드 웨이야."
"스피드 웨이?"
사유리는 불안한 눈으로 뒤를 돌아다보았다. 헬기는 계속 거리를 두고 날아 오고 있었다.
"오늘 경기가 있나요? 이 밤에?"
"아니. 하꼬네로 빠져나갈 생각이야."
"하꼬네라고요?"
"그쪽이 편하지. 곧바로 138 국도와 연결돼 있어."
"그렇군요...아,참..."
"왜?"
"오늘 페라리 미팅이 있어요. 마쓰다 페라리 콜렉션 주최로 열린다는데요?"
낙뢰가 내리 쳤다.
㏏ⁿ 호이에산寶永山의 화산재를 뒤집어 쓴 자갈들이 앙상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준은 힐끔 호에이산을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페라리 미팅이 있다는 거 사실인가?"
"아까 마끼가 그랬어요. 의상실에서 옷을 갈아입는데 오늘 밤에 페라리 미팅이 있다고 하더군요."
"이상한 여자군."
"페라리 미팅은 정말인가 봐요. 오늘 밤 미팅엔 페라리끼리 야간 서키트 경기가 있데요. 나보고 운전할 수 있냐고 물어오더군요."
"운전?"
"흐. 운전을 할 수 있다니까 자신의 페라리를 빌려줄까,라고 했어요. 난 믿을수 없었어요. 운전이야 할수 있지만 페라리를 몰다뇨. 그러다보면 제 몸 값까지 천정부지로 올라가겠더군요."
"페라리 때문에 사유리의 몸값이 올라간다는 뜻인가?"
"그렇죠 뭐. 저같이 변변치 않은 여자가 뭐 몸값이 있겠어요? 하지만 페라리 스포츠카만 있다면 저도 공주로 변신할수 있죠. 흐."
"아까 의상실에서 무엇을 했지?"
사유리는 별안간 안색이 창백해졌다.
"김짱. 무슨 의도로 그 질문을 하는 거에요?"
"아냐. 난 단지."
"흥. 그 여자 레즈였어요. 솔직히 당황했지요. 레즈는 처음이었거든요."

윽...
처음이라니.
무엇이 처음이라는 것일까.

"자신과 놀아주면 페라리 스포츠카를 준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필요없다고 했어요. 히잉. 전 레즈가 아니잖아요. 별 미친여자 다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준은 얼굴이 빨개진 채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발랄한 건지 머리가 나쁜 건지 도대체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준은 백미러를 응시하다가 다시 자동차 전방을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의 페라리 미팅...
후지산 기슭에 있는 마쓰다 페라리 박물관은 매년마다 유명차 미팅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중 람보르기니 미팅과 페라리 미팅은 전설적으로 유명한 미팅이었다.
미팅은 대개 토요일 오후에 시작되었다. 그날 오후중에는 간단한 티파티를 즐긴 뒤 일요일 오전중에 하꼬네나,스피트 웨이에서 친선경기로 서키트 레이스를 벌이는 게다. 이 때문에 페라리 미팅에는 일본의 부유층이나,혹은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며 페라리를 유지하는 괴물들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다.
준은 예전에 한번 스피트 웨이에 온 적이 있었다. 1년 전 이었다.
아마 원 메이크One Make 자동차 경기에 참가했을 것이다.
원 메이크 자동차경기란 출고된 차량이 다르게 개조를 하지 않고 참가하는 자동차 경기를 말한다. 포뮬라Formular나 그룹 A,그룹 C,투어링카Touring Car,랠리 등의 경기에 참가하는 자동차는 대부분 여러 각도로 개조가 허락 되었다. 하지만 원 메이크 경기는 말 그대로 개조가 허락되지 않은 상황에서, 같은 동종의 자동차끼리 레이스 경쟁을 펼치는 경기였다.
불현듯 1년 전 일본에 도착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준이 구입한 자동차는 르노 아르헨티나 공장에서 생산한 르노 R 21였다. 중고차였다. 준은 이 자동차를 가지고 스피드 웨이 주 경기장에서 열린 르노 원 메이크 경기에 참가를 했다.
2.5Km 구간을 15분 동안 달렸는데 이날 가장 좋은 랩타임은 1분 12초 34 였다. 참가한 선수중 김준의 기록은 2위였다. 직업적인 카레이서가 아니었지만 김준은 다재다능했다.
그 뒤로는 스피드 웨이에 온 적이 없었다. 서키트 전용 경기장이 새롭게 건설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것도 그만이었다. 준에게는 한국돈으로 2억원에 달하는 스포츠카를 구입할 능력이 없었고,구입할 생각도 없었다. 그 때문에 마쓰다 박물관에서 열리는 명차들의 미팅이나 친선경기에 대한 신문기사도 그저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페라리 미팅이라고 했던가.
김준이 지금 운전하고 있는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는 1.7톤의 육중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지만,그럭저럭 빠른 차였다. 아니 상당히 빠른 차였다.
준은 다시 한번 백미러를 응시했다. 헬기는 택시 자세로 람보르기니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머지 두대의 헬기는 어디론가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준은 마른 침을 삼켰다. 스피드 웨이까지 무사히 간다면 뒤쫓아오는 헬기를 따돌릴 묘안이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반격을 해야 했다.
이 상태로 계속 도망 다닌다. 이젠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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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모리야마는 나지막이 휘파람을 불었지만 그의 늘씬한 팔등신 애인은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페라리 F 512 M 안에서 옷을 반쯤 벗어제치고 누워 있었다. 모리야마는 웃음이 나왔다. 이 여자는 섹스를 거절하고 있었다.
잠시후면 친선 서키트 레이스가 시작될 것이다. 1주 4.2km. 코너 20개의 후지 서키트 경기장은 직선코스에서 시속 300Km까지 속도를 올릴 수 있다.
누가뭐래도 일본이 자랑하는 멋진 경기장이었다.
더구나 트랙 안쪽으론 짐카나 경기장과 오토바이 선수들을 위한 모터크로스 코스까지 구비되있다.
모리야마는 여자의 젖가슴을 내려다보다가 우측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측 피트pit안에서 경기진행 스태프들이 일렬로 서 있다. 피트 박스는 레이스중에 경주차의 세팅과 정비,타이어 교체,연료공급 등을 하는 장소였지만 오늘은 폭우 때문에 스태프들이 우왕좌왕 몰려들어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공식 경기였기 때문에 대부분 긴장하다기 보다는 갑자기 몰려온 70여대의 페라리 오너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폭우까지 을씨년스럽게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하지만 1년에 한번 있는 모임이었기 때문에 누구도 폭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지 않았다. 그들은 대부분 즐기고 있는 눈치였다. 야간 서키트 경기. 충분히 매력적인 스포츠였다.
메디컬 센터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패독 안에서 검차요원들이 차의 안전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스탠딩 스타트 라인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비 차림에 손에 후레쉬를 들고 있었다.
이날 밤 경기는 분명 친선 경기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검차요원들은 용의 주도하게 각각의 페라리 스포츠카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막상 서키트 레이스가 시작되면 모두 두 눈을 부릅뜨고 우승을 차지하려고 혈안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사고가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니 검차는 세심하게 거행되었다.
하꼬네까지 138 국도를 타고 달린 뒤 다시 되돌아오는 경기인데,스타트 라인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이 매력. 이 점이 서키트 레이스의 매력이었다.
모리야마는 이번에는 좌측으로 시선을 돌렸다. 메인 스탠드 위에서 서치라이트 빛이 날카롭게 경기장 안으로 떨어지고 있다. 관중은 없다. 100여명 남짓한 기자들이 후쭐그리하게 비를 맞으며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간간이 카메라 후레쉬가 터지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기분이 좋았다. 여자가 어느 정도 자신의 뜻을 파악하고 조용히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가 빈 게 안타까웠지만 이 점이 이 여자의 매력이었다. 골치 아픈 여자를 붙잡고 인생을 즐길수는 없었다. 파트너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그가 원하는 파트너는 머리가 나쁘면 만사 오케이였다. 그중 이번 여자가 가장 나았다.
모리야마는 여자와 1년 전에 약혼을 했다. 결혼할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를 잡아두자는 생각에서 했던 약혼이었다.
그 1년동안 여자는 모리야마의 뜻대로 잡히는듯 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 여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모리야마는 추측을 할 수 없었다. 건전하지 않는 게 여자와 말馬이라는 동물이라고 했던가?
사무라이의 말이다.
어쩌면 이젠 떠날 때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럭저럭 한 여자를 상대로 1년 동안 만나고 있었다는 게 모리야마 자신은 믿을 수가 없었다. 모리야마는 무엇이든 빨리 해결하고,끝장을 내는 성격이었다. 그의 천성적인 성격.
어쨌든 기분이 좋았다. 오늘 페라리 미팅에서 가장 빠른 차는 바로 자신이 타고 온 F 512 M이었다. 눈부실 것이다. 슬쩍 개조를 해 놓았으니까 오늘 그의 페라리는 당연히 가장 빠를 스포츠카였다. 아마 시속 330Km까지 가능할지 모른다.
혹은 모른다. 갑자기 부가티 스포츠카가 나타나지 않을까 모리야마는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저 단순한 고민일까. 오늘은 말 그대로 페라리 미팅인데 말야. 페라리 미팅에 부가티나 카운타크가 별안간 나타날 리 없다.
모리야마는 의식하고 있었다. 부가티가 없다면 그의 페라리가 전세계에서 가장 빠른 스포츠카라는 사실을.
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몇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 74대의 페라리가 스탠딩 스타트 라인에 뒤죽박죽 정차해 있었다. 전국에서 논다는 친구들이 이번 미팅에 모두 참석했는지 훗가이도 출신의 뚱보 카미야의 모습도 보였다. 카미야는 3대의 페라리를 가진 오너였다.
모리야마는 다시 애인의 육체 위로 자신의 몸을 실었다. 그런 뒤 긴 키스를 즐기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대로 그저 이 여자를 안고 시간을 죽이고 싶었다. 모리야마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런 뒤 여자의 젖가슴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가냘프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모리야마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5분 뒤였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다고 생각을 했다. 애인이 고개를 젖히고 창밖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손을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모리야마는 애인의 손가락을 따라 자동차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동쪽 어둠 속에서 한대의 헬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그런 뒤 헬기는 허공 한 지점에 멈추었다.

저게 뭐야? 중계 방송용 헬기인가?

모리야마는 고개를 갸웃 뚱하다가 서둘러 자신의 노란색 페라리 승용차 안에서 내렸다. 그런 뒤 뒷주머니에서 빗을 꺼내 머리를 빗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의식하는 것은 지성인의 품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헬리콥터가 중계방송용 헬기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뻘개진 얼굴로 다시 페라리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여자가 옷을 추스리고 있다가 그에게 불쑥 말을 내 뱉었다.
"저 임신했어요."
"뭐?"
여자는 잔뜩 독이 올랐는지 양미간을 꿈틀거렸다.
"우습더군요. 멀대같이 누워 있었는데 그만 당신 아기를 가졌어요.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섹스는 불건전해요. 당신은 그 맛에 사는 거겠지만."
"어떻게 할거야?"
"아기를 낳고 싶어요."
"무슨 이유지?"
"내 마음은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하지만 내 육체가 아이를 원하는 군요. 난 우리 관계는 아이가 있으면 사랑으로 승화될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거 이상하군. 정신 이상자의 논리인가?"
말은 엉겁결에 그렇게 했지만 모리야마는 당황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어났다.
약혼은 했지만,아버지가 된다고는 추호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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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임소봉의 연락을 받고 등골이 오싹했다. 헬기 3대가 김준을 쫓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서키트 경기장이 뭐야? 여기 아는 사람 있나?"
임춘해가 뒷좌석에서 대답했다.
"고텐바 북쪽에 있는 스피드 웨이를 말하는 겁니다. 138번 국도와 연결돼 있지요."
"스피드 웨이라? 그거 국제 레이스장 아니오?"
"그렇소. 헌데 이상하군요. 다시 도쿄로 돌아갈 생각인가? 그쪽은 온통 산악지방이라고 알고 있소만..."
"이거 하꼬네 아냐? 스피드 웨이에서 곧바로 하꼬네로 빠져나갈 생각인가본데."
진광섭은 핸드폰을 빼 들었다. 그런 뒤 요코하마에 있는 요원 두명을 하꼬네로 불러 들였다. 밤 10시 10분이었다. 진광섭 일행이 분승한 자동차 2대는 막 고텐바 페밀리랜드 앞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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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다시 백미러를 응시했다. 왼쪽에서 한대의 헬기가 따라붙으면서 뒤따라오는 헬기는 두대로 늘어나 있었다. 준은 숲 길로 방향을 바꾸었다.
자작나무가 터널을 만들고 있는 조용한 도로였다.
핸들을 돌리자 숲이 사라지고 곧바로 스피드 웨이 주경기장이 나타났다. 준은 고개를 바짝 처 들었다. 사유리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거 봐요. 또 헬기에요! 스피드웨이 상공이 떠 있어요. 김짱!"
준은 전방에 떠 있는 헬기를 바라보다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런 뒤 후진기아를 넣었다. 람보르기니는 곧바로 숲 안쪽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빗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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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졌습니다!"
"뭐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잣나무 숲으로 쥐새끼처럼 숨었습니다!"
"이런 망할 자식..."
곤베이는 핸드폰을 급히 껐다. 그런 뒤 조종사에게 버럭 외쳤다.
"138 국도로 이동한다. 통신요원은 지금 이 시각부터 반경 2Km안을 모두 커버한다. 알겠나?"
조종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스피드웨이로 비상착륙을 해야 합니다. 육좌님!"
"입 닥쳐! 놈이 하꼬네로 탈출하는 걸 보고 싶나?"
곤베이는 불안했다. 10분전에 내각정보실 차장의 직권으로 수송 헬기 10기가 후쿠오카에서 나하 방향으로 향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전산팀이 무언가 불길한 것을 감지한 거 같은데 자세한 내용은 알려오지 않고 있었다. 이때문에 곤베이는 잔뜩 혼란되고 있었다. 자위대 별반別班이 무언가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애써 그것을 떨치고 있었다.
곤베이는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다가 퍼뜩 정신이 차렸다.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스피드웨이에서 갑자가 74대의 페라리가 쏜살같이 스타트를 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곤베이는 눈알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너.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구별할 수 있겠나?"
부하는 당황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글쎄요... 제 눈엔 다 똑같이 보입니다만."
빌어먹을.
늦었군...
곤베이는 씁쓰레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꼬네를 봉쇄한다. 경찰서 인원을 증원시켜. 지금 당장!"
곤베이는 식은 땀을 흘렸다.
"그리고 당장 고공 침투조 조장에게 전화 연결해. 지금 어디에 있나?"
그렇게 물으며 곤베이는 PDA를 두들겼다. 곧바로 고공침투조 조장과 전화가 연결되었다.
"뭐야? 이 자식들! 당장 하꼬네로 이동하지 않겠나? 외각도로를 봉쇄하란 말야. 알겠나?"
곤베이는 그렇게 말한 뒤 스피드웨이를 일주하고 경기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페라리 스포츠카들을 내려다보았다. 폭우 속. 나이트 게임으로 열리는 자동차 서키트는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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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리 일행이 스피드 웨이에서 138번 국도로 진입할 무렵이었다. 잣나무 숲에서 한대의 스포츠카가 슬며시 페라리 일행에 끼어 들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모리야마는 후방 맨 뒤에서 달려나오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여자가 아기를 가진 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충분히 보아왔던 터였다. 그러나 막상 자신의 여자가 임신을 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었다. 당혹스러웠다. 우리 관계는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양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제시를 사랑하기도 했고,후리꼬를 사랑하기도 했다.
하지마 그것은 잠시 머무는 관계였다. 결코 익숙한 관계가 아니었다. 익숙한 건 섹스밖에 없었다. 모리야마의 신조였다.
제시가 가장 좋았다. 그녀의 풍만한 가슴이 모리야마의 눈에 어른거리자 모리야마는 쓴 웃음을 지었다. 정신을 차리자. 지금은 서키트 경기인 것이다.
모리야마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백밀러를 응시했다. 페라리 F 512 M의 둥근 리어 램프 뒤로 눈에 익은 스포츠카가 보였다. 불안했다. 아까부터 무엇인가가 모리야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다시 전방을 응시했다. 모리야마의 페라리는 이미 대여섯 대의 다른 차들을 추월해가고 있었다. 점점 가속이 붙고 있었다.
아마도 고텐바 인터체인지에 도달할 무렵이면 선두자리를 차지할 것 같았다.
지금부터 하나하나 떨구어 가면 가능했다. 모리야마는 여자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엑셀레이터를 밟다가 백미러를 응시했다. 순간 모리야마의 희고 고운 얼굴이 서서히 납빛으로 변해갔다.

악마...

람보르기니 디아블로(이태리어로 악마라는 뜻)...
그러고보니 바로 뒤에서 쫓아오는 스포츠카는 페라리가 아니었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 로드스타가 분명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빠른 차.
모리야마는 삽시간에 안색이 창백해졌다. 모리야마는 꺼지라는 심정으로 리어 램프를 몇번 반복해서 깜빡여 보았다. 그러자 뒤에서 따라 붙는 람보르기니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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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텐바 7정목의 지서장인 이시야마는 선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아내 히로꼬가 불쑥 팩스 용지를 내밀고 있었다. 이시야마의 단추 눈이 팩스 용지를 향해 불안하게 움직였다. 밤 10시 35분이었다.
이시야마는 정복으로 갈아입고 우비를 걸쳤다. 아내가 우산을 들고 정원까지 따라 나왔다. 주책바가지 아내가 또 키스를 원하는 것이다. CNN 영향인지 케이블 TV의 영향인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이시야마는 아내의 볼에 가볍게 키스를 한 뒤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말이 주차장이었지 두대의 자전거와 한대의 스즈끼 알토 자동차가 있다.
이시야마는 스즈끼 알토 자동차를 볼때 마다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이웃 한국에서 알토를 쏙 빼 닮은 국민차라는 것이 굴러다니는 것을 며칠전 TV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 애국심이 불쑥 솟아올랐다. 일본인으로 태어난 게 그때처럼 자랑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이시야마는 후레쉬를 들고 주차장안을 살펴보았다. 경찰 습성은 어쩔 수가 없다. 달라진 것이 없다고 확인한 뒤 이시야마는 자전거에 올라탔다. 요즘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MTB 산악 자전거였다.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팩스 용지에서 보았던 사내의 얼굴을 머리 속에 외우며 집결장소인 인터체인지로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그의 허리 뒤에서 차갑게 권총 한 자루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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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야마는 페라리의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어갔다. 그러자 옆차선으로 람보르기니가 따라 붙었다. 모리야마는 윈도우를 열고 버럭 외치기 시작했다.
"꺼져! 너 무례하지 않는가! 오늘은 페라리 미팅이라는 걸 모르나?"
대답이 없었다. 운전석의 그림자는 힐끔 모리야마 쪽을 응시하더니 갑자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곧장 람보르기니는 모리야마의 페라리를 제치고 앞쪽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모리야마는 화가 났다.
헤드 램프를 상향으로 올린 뒤 신경질적으로 깜박였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응답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돌아버릴거 같았다.
흥분하면 안된다...
람보르기니는 당연히 나보다 빠르다...
막상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모리야마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창밖으로 침을 탁 뱉고는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곧바로 개조한 엔진이 뜨겁게 달구어져갔다.
시속 150Km. 폭풍처럼 속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페라리의 속도체크 센스가 자동으로 타닥거리며 광폭타이어의 움직임을 체크했다. 불길하게 빗방울이 차 창을 튕겨 왔다.
람보르기니가 탱크라면 페라리는 장갑차라고 할 수 있었다. 후발주자인 람보르기니에게 당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모리야마는 차분함을 잃었다.
그는 람보르기니에 따라 붙는다 생각이 들자 곧바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었다. 옆 보디에서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람보르기니는 반대편 차선으로 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겁을 먹고 속도를 갑자기 올리기 시작했다.
좌측에서는 다른 페라리들이 겁을 먹고 뒤로 빠지고 있었다. 뒤쪽에서는 다른 차들이 헤드라이트 빛으로 요란하게 신호를 보내 왔다. 모리야마는 신호를 무시했다. 그는 도망가는 람보르기니를 향해 속도를 올렸다. 곧바로 페라리는 람보르기니의 꽁무니에 바짝 다가섰다.
이번에도 람보르기니가 눈치를 챘는지 또다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파워윈도우를 뚫고 굉음이 빨려 들어왔다. 왼쪽 벼랑 아래로 고속도로를 타고 달려오는 거북이 행렬이 보였다.
욕심이 생겼다. 인터체인지에 도달하기 전에 모리야마는 끝장을 내고 싶었다.
모리야마는 다시 힘차게 속도를 올렸다. 이번에도 앞에서 달려가는 페라리 대여섯 대가 잔뜩 겁을 먹고 도로 왼편으로 몸을 감추기 시작했다. 어지러웠다.
아까부터 어린 아기의 형상이 모리야마를 괴롭히고 있었다.

내가 아버지가 된단 말인가.
그것도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를 위해.
이게 사랑이란 말인가.

모리야마는 하드보일드 했다. 당연히 그랬다. 결혼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니 아버지가 된다는 생각도 애초부터 없었다. 추호도.
모리야마는 독기를 뿜은 눈을 반짝이며 람보르기니 옆으로 바짝 다가갔다.
이번에는 놈이 겁을 먹고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람보르기니가 겁을 먹고 있는 게 모리야마에게 느껴졌다.
R-30 각도의 회전도로였다. 모리야마는 람보르기니와 똑같이 템포를 죽이며 바짝 람보르기니 옆으로 페라리의 차체를 붙였다. 그런 뒤 다시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아차하면 허공으로 날아오를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꽝 소리가 들렸다. 람보르기니는 중심을 잃고 잠시 기우뚱하는 거 같더니 도로 가운데에서 한바뀌 회전을 했다.
모리야마는 희열을 느끼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백밀러로 람보르기니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헤매는 모습이 보였다. 모리야마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잠시 숨통이 막혀오는 거 같았다. 다른 차들은 잔뜩 겁을 먹고 주행을 포기한채 후방에 정차해 있었다. 모리야마는 득의양양하게 미소를 지으며 전방을 응시했다. 인터체인지와 함께 왼편으로 하꼬네 시가지로 연결된 도로가 보였다.
모리야마가 담뱃불을 붙힐때 백밀러로 람보르기니 디아블로가 다시 시동을 거는 모습이 보였다. 모리야마 역시 시동을 걸었다. 아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분명 람보르기니의 운전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 그것도 어린 여자.
모리야마는 시내로 진입하기 전에 람보르기니를 박살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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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김준은 고텐바 역 앞에서 길을 건너고 있었다. 아직도 오른쪽 다리에서 통증이 왔다. 그는 방금전 자신을 태워준 노인과 헤어진 뒤 고텐바 역전 冗 20분 뒤에 도착하는 로컬 선 패스를 구입한 뒤 길을 건너고 있었다. 길을 건너며 김준은 포켓안에서 모토롤라 삐삐를 꺼내 들었다.
사유리가 헤어지기 전에 준에게 준 선물이었다. 아니 선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무사하다면 이 삐삐에 메시지를 남기겠다고 말하며 사유리가 강제로 떠 넘긴 삐삐였다.
그러다 어찌 하다가 키스를 했다. 사유리와 그쯤까지 가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사유리는 아직 어린 소녀였다. 그렇지만 능숙하게 혀를 놀렸다. 오히려 준이 압도당했다. 장자 말대로 김준이 나비 꿈을 꾼 건지,나비의 꿈속에 그가 있는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사유리와 다시 만날런지는 장담할수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시원스레 보답을 하고 싶었다.
김준은 우선 간사히 공항 부근에 숨어 있을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작업을 할 공간이 필요했다.
20여분 정도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준은 역 건너편에 있는 간이 식당에 들려 간단하게 우동 한그릇을 주문했다. 그런 뒤 돈을 지불하는데 등 뒤에서 자전거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정복 차림의 경찰이 투덜거리며 포장 안으로 들어왔다.
준은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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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씩씩거렸다. 헬기를 따돌려 본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페라리가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었다. 화가 났다. 삐삐와 바꾼 스포츠카.
도쿄까지 끌고 간다고 김준과 약속을 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하꼬네에 도착하면 람보르기니를 버리고 곧바로 온천에 숨어들 생각이었다. 그런 뒤 모래 아침에 조용히 학교에 등교하면 그만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참을 수가 없다.
하꼬네에 가지도 전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설 것 같았다.
"좋아. 누가 이기나 보자. 너. 각오하라고."
한편으로 사유리는 무작정 차 밖으로 도망을 가고 싶었다. 그런 뒤 이 폭우속에서 마음껏 울고 싶었다. 미친듯이.
사유리는 브레이크를 밟은 상태에서 가방을 열어보았다. 가방안에서 자살가이드가 흘러 나왔다.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은 인기 6위의 자살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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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 VS 방위청 별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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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최고야."
사유리는 행복한지 불행한지 알지 못했다. 액셀레이터를 부드럽게 밟았다.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빗방울이 부서져 나갔다. 후방에 정차해있는 페라리들이 사유리의 람보르기니를 따라 시동을 걸었다.
왕복 6차선도로였다. 사유리가 움직이자 전방에서 기다리던 페라리 F512 M도 후미 램프를 깜박이며 느릿하게 직진을 시작했다.
"저게 뭐하는 건가?"
곤베이는 헬기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치라이트가 138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면서 두 자동차중 하나가 뚜렷하게 식별이 되었다. 노란색의 스포츠카였다.
"어느게 람보르기니야? 양쪽 보디에 빗살무늬가 있는 게 람보르기니인가?"
"글쎄요. 제 눈엔 둘 다 빗살무늬가 없는 걸로..."
부하는 쌍안경으로 페라리를 관찰하고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싸움이 붙었나 봅니다. 아까부터 티격태격하는 거 같습니다만."
"뒤에 있는 게 람보르기니 맞나? 누구 아는 사람 없나?"
반대편 차선에서 두대의 차가 날카롭게 지나가고 있었다. 진광섭 일행이었지만 곤베이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가 쉽게 보이니? 응?"
사유리는 잔뜩 약이 오른 얼굴로 모리야마에게 외쳤다.
"흥미있는 말이군. 다시 한판 붙겠다는 거야. 아가씨?"
"그런 너는? 철저하게 망가지고 싶니? 너?"
모리야마의 써늘하게 두 눈을 반짝였다.
"몸을 망치는 건 아가씨야. 정식으로 초청하지. 속도경쟁에 자신 있나?"
"사업을 도모해보겠다고요? 음냐. 난 아저씨 같은 임포텐스 환자에겐 관심 없는데 어떻하지? 어린 여자에게 치근거리는 것을 보니 아저씬 임포텐스가 분명해. 그러니 덤벼 봐. 응? 어서? 히잉."
사유리는 따분한 눈빛으로 말을 하더니 곧바로 액셀레이터를 거칠게 밟았다.
둔탁하게 차체가 튀었다. 동시에 헬기 한대가 남쪽 끝으로 긴박하게 날아가는 모습이 사유리의 눈에 들어왔다. 곤베이가 자리 배치를 다시 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한대. 하꼬네 야경을 향해 세번째 헬기가 빨려갈듯 날아가고 있었다.
사유리는 침을 꼴깍 삼키면서 전방의 헬기를 쫓아 시선을 움직였다. 좌측에 붙어서 달리는 페라리가 사유리의 눈에 다시 들어왔다. 사유리는 신경질적으로 기어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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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텐바 역 대합실로 걸어가면서 준은 뒤를 돌아다보았다. 경관이 우동집에서 걸어나오다가 술에 취한 행인과 부딪치고 있었다. 자전거가 넘어 졌다.
한바탕 요란하게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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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번 국도 아래로 246번 국도가 흐르고 있었다. 두대의 스포츠카가 동시에 그곳을 통과하자 138번 국도는 곧바로 두갈래로 나누어졌다. 왼쪽 도로는 어두었고 오른쪽은 밝았다. 모리야마는 급히 브레이크를 밝았다. 그 때문에 우측에서 달리던 람보르기니가 총알같이 앞으로 튀어 나가고 있다. 겁이 없었다.
대담한 것인지,누군가에게 쫓기는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폭우속에 또다시 뇌전이 밤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사유리의 람보르기니는 두갈래 길 중 왼쪽 도로를 탔다. 오른쪽 길은 복잡하게 보였다. 모리야마는 곧바로 람보르기를 쫓아 방향을 바꾸었다. 180Km의 속도 였다. 폭우가 둔탁하게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와이퍼가 복잡하게 차창을 닦아 나갔지만 역부족이었다. 모리야마는 기아를 바꾸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후방에서 뒤따라오던 페라리들은 한결같이 오른쪽 도로를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왼쪽 도로가 외각도로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대나무 숲 길이었다. 아스팔트 한 귀퉁이가 부서져 나간 곳을 거칠게 달리면서 람보르기니는 허공에 붕 떴다. 그 영향으로 대나무 숲이 연거푸 무너지고 있다.
사유리는 쓰러지는 대나무를 보다가 뒤를 보았다. 어느새 바로 꽁무니까지 모리야마의 페라리가 따라 붙고 있었다. 핸들이 무거웠다. 폭우속을 이런 속도로 달리다니. 속도계 바늘이 시속 190을 가리키자 사유리는 와락 겁이 났다.
아무래도 취해 있는 게 분명했다.
모리야마는 람보르기니의 꽁무니에 차를 바짝 갖다 대놓고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행선 JR 열차가 고텐바 역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액셀레이터를 밟고 있는 발에 슬쩍 힘을 가했다. 쾅 소리가 들리면서 전방에서 람보르기니가 한번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있었다.
사유리는 덜컥 겁을 집어먹고 후방을 돌아다보았다. 종아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 했다. 온 신경이 다리에 집중되었다. 조금만 삐끗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사유리는 발에 힘을 준 상태에서 핸들을 조심스럽게 비틀어 보았다.
간신히 페라리의 진행방향에서 바깥으로 람보르기니를 빼내는데 성공한 거 같았다.
고텐바 시내까지는 4Km정도 여유가 있었다. 사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조심스럽게 속도를 늦추어갔다. 이 틈에 페라리가 람보르기니의 좌측을 치고 올라왔다. 사유리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불현듯 언니 나쓰에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동차는 좋은 것을 타야 해. 자동차는 튼튼한 게 좋지. 셀시오는 빠르잖아.
안 그러니?
사유리가 처음 운전을 배운 것은 2년전이었다. 나쓰에는 셀시오를 활부로 구입하는 날 사유리와 함께 도쿄 남쪽 가나가와 지방으로 드라이빙을 나섰다.
바로 그 첫날부터 사유리는 자동차를 겁도 없이 몰기 시작했다. 처음이었는데, 사유리는 요코하마까지 제트기 조종사처럼 액셀레이터를 밟아보았던 것이다.
나쓰에가 겁을 먹다 못해 험악하게 화를 낼 정도로.
지금은 달랐다. 셀시오는 오토매틱 기어였지만 람보르기니 디아블로는 수동 5단 기어였다. 이 때문에 미쯔비시 트럭으로 운전을 배우지 못한게 사유리는 후회가 되었다. 고급 자동차일수록 수동기어를 달고 있다는 게 사유리는 믿어지지 알았다.
잠시 사유리가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에 고텐바 시가지가 복잡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사유리는 잔뜩 수축이 되어 람보르기니의 속도를 늦추었다.
여전히 모리야마의 페라리는 좌측에 바짝 붙어서 달리고 있었다.
히잉. 난 지금 취해 있나 봐...
그녀는 우울하게 미소를 지으며 백미러를 응시했다. 헬기 한대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는데,사유리의 눈에는 헬기가 보이지 않았다.
모리야마의 페라리도 보이지 않았다. 울컥 울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사유리는 서둘러 페라리를 찾았다. 우측으로 꺽어지는 도로였다. 페라리는 이미 람보르기니의 뒤를 돌아서 오른쪽의 바늘같은 공간으로 다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사유리는 잔뜩 긴장한 채 급히 좌측으로 핸들을 돌렸다. 그러자 뒷바퀴가 허공에 뜬 상태에서 트렁크가 페라리를 향해 쏠려 갔다. 아차 하면 충돌할 위기였다.
황당한 일이었다. 재빠르게 모리야마의 페라리는 인인아웃 주법을 구사하며 충돌을 피해가고 있었다. 인인아웃은 코너를 돌 때 안쪽으로 돌다가 바깥쪽으로 추월하는 주행법인데,이번에는 드리프트Drift까지 겹쳐 있었다. 페라리는 앞 차체를 안쪽으로 향하고 뒤 차체는 바깥쪽으로 향한채 람보르기니의 뒤쪽으로 밀려가면서 코너링을 하더니,삽시간에 람보르기니의 좌측으로 달려 나왔다. 사유리는 겁을 먹고 속도를 120Km 아래로 떨구었다. 그틈에 페라리가 번개같이 람보르기니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반대 차선에서는 버스가 지나가다 말고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고 있었다.
사유리는 시가지 끝에서 페라리를 쫓아 좌측으로 핸들을 돌렸다. 왜 그랬는지는 사유리 자신도 알지 못했다. 도망갈 생각은 염두도 나지 않았다. 그저 견인되듯 페라리를 멍하니 쫓아가고 있었다.
가만이 보니까 138번 국도로 다시 돌아온거 같았다. 이미 다른 페라리들이 저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것이 사유리의 눈에 들어왔다.
진광섭은 뒤늦게 138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오다가 시내 쪽에서 튀어나온 람보르기니를 울그락불그락 화가 난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람보르기니에는 김준이 타고 있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건 나쓰에의 동생인 사뇨 사즈메가 분명했다. 이때문에 진광섭은 불이나게 핸드폰을 뽑았다. 붉은 넥타이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허공으로 튀었다.
"뭐야.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김준이 없잖아!!! 앙?"
"그럴리가요!! 김준이 없다뇨?"
인터체인지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 임소봉이 대답했다. 아까부터 인도 옆에 자동차를 대놓고 페라리 일행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말야! 안기부에 들어오기 전에 시력테스트를 하긴 했냐? 앙? 그래,여자와 남자도 구별못하냐? 머리가 길면 여자고 치마를 입으면 여자지만 서서 오줌을 누면 남자란 말야,이 새끼들아!"
"면,면목없습니다. 과장님."
"당장 철수해! 놈은 이곳에 없다! 없단 말이다,이 밥통들아!"
다시 핸드폰에서 진광섭의 음성이 터져 나오자 소봉은 얼굴이 빨개진 채 자동차에서 급히 뛰어 내렸다. 첫 번째 페라리가 그의 앞을 지나갔다. 무서운 속도였다. 임소봉은 달려오는 페라리 일행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다시 핸드폰을 귀에 댔다.
"형님. 이대로 끝낸다 말입니까? 빗속에 죽도록 고생을 했는데 물러나라고요?"
"너 이 새끼. 넌 거기 박혀 있다가 사즈메를 잡아오면 될 거 아냐! 곤베이에게 뺐기지 말고 사즈메를 잡아 들여! 내 말 알겠나?"
곤베이의 헬기는 진광섭의 머리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시가지가 기우뚱하게 곤베이의 눈에 들어왔다. 기가 막혔다. 아까부터 스포츠카 두대가 레이스를 거듭하고 있었다. 분명 둘중 하나에 김준이 타고 있는 거 같았는데 둘 다 노란색이라 번번히 헥갈리고 있었다.
울화통이 터지는 것은 밴 두대가 어디에 처 박혀 있는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4기통 밴으로 12기통 스포츠카를 추적하라고 했으니. 말이 안되는 일이었다.
곤베이는 우측 창으로 이동하다 말고 다시 고텐바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시가지 북쪽과 남쪽에서 열차가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는 하행선이고 다른 하나는 상행선. 곤베이는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뭍은 빗방울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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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기차 시간표를 보았다. 요코하마행 JR 열차가 같은 시간때에 교차하고 있다. 11시 8분. 그는 우측주머니에서 1만원엔 권을 꺼내 요코하마행 기차표를 구입했다. 몇몇 사람들이 대합실에서 서성이다가 온 몸이 비에 젖어 있는 준을 응시했다. 폭우가 대합실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준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역무원이 플랫폼으로 나와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동시에 스테인리스 같은 여자 음성이 열차의 도착을 알려왔다.
이시야마는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며,준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빗속에 우산도 없이 007 가방을 들고 다니는 자. 그제야 이시야마는 사내가 팩스용지에 그려져 있는 몽타주의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시야마는 서둘러 공중전화박스로 걸어갔다. 도중에 다시 역전을 보았다. 11시 8분 정각. 상행선 JR선이 역전안으로 들어가는게 보였다. 이시야마는 10미터 전방에 있는 전화박스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서둘러 역전 앞 도로를 건너뛰었다. 대합실 문을 막차고 뛰어 들었을때는 놈이 플랫폼을 통과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야마짱. 무슨 일입니까? 도둑입니까?"
역무원이 이시야마에게 말을 걸어왔다.
"방금 전 그 남자 목적지가 어디였소?"
"요코하마행입니다만 왜요?"
이시야마는 잽싸게 뒤주머니에서 팩스 용지를 꺼냈다.
"여기로 전화를 걸어 주시오. 이 자가 고텐바에 나타났다고 말이요. 부탁하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한 거 같았다. 이시야마가 철로로 나왔을 때는 요코하마행 JR선이 승객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포켓에서 호루라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우비가 거추장스러웠다.
사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시야마는 식은 땀을 흘리며 재빠르게 김준을 찾았다. 남자 몇이 우산을 접은 뒤 열차에 올라타고 있었지만 놈과 비슷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어두웠다. 할로겐 등이 열차를 따라 드문 드문 비추고 있었지만, 폭우때문에 제대로 식별이 되지 않았다. 빗방울은 팔뚝보다 굵었고,바람까지 미친듯이 불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방향을 잡지 못하고 1분정도 멍청하게 그 자리에 꽂혀 있었다.
그때였다. 이시야마의 바로 등 뒤. 어둠속에서 갑자기 김준이 튀어나오면서 이시야마의 등을 떠밀었다. 동시에 이시야마의 곤봉이 노련하게 허공을 한바퀴 그렸다. 빗방울이 튀었다. 열차안에서 승객들이 두 사내의 격투를 지켜보았다.
우비를 입은 쪽이 덩치도 작았고 힘도 없었다. 우비가 중심을 잃고 쓰러지는 모습이 보이더니,키 큰 남자가 서둘러 열차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야마는 비틀거리며 바닦에서 일어 섰다. 김준이 열차에 올라탄 뒤 앞쪽으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이시야마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열차를 따라 뛰어갔다.
이번에는 권총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이시야마는 3번째 칸에서 급히 열차에 올라탔다. 안내방송이 흘러 나오면서 저쪽 선로에서 오사카행 하행선이 들어오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거 같았다. 이시야마는 진흑으로 범벅이된 우비를 쳐다보는 승객들 사이를 식식거리며 헤쳐갔다. 마지막 칸이었다. 놈은 보이지 않았다. 이시야마는 뒤로 걸어나오다가 화장실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왼손에 권총을 쥔 상태에서 무턱대고 화장실 문을 잡아 당겼다.
잠겨있는줄 알았는데 문이 의외로 손쉽게 열리고 있었다. 이시야마는 이게 웬일인가 싶어 화장실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순간 손 하나가 튀어나오더니 이시야마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 당겼다.
퍽--!!!
이시야마는 입에서 피를 흘리며 화장실 안에서 무릎을 꿇었다. 팩스용지에서 보았던 사내가 이시야마를 내려다보고 있더니,그의 손에 쥐어 있는 권총을 낚아 챘다. 이시야마는 겁을 집어먹었다.
"그건...경관 총이야...그걸 가져가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일본경찰은 너를.."
그러자 이번에는 금속으로 된 가방이 이시야마의 얼굴로 떨어졌다. 아찔했다.

가방인지 10톤 짜리 햄머인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시야마는 정신을 잃었다.
김준은 이시야마가 기절한 것을 보더니 그의 품에서 신분증을 꺼내 보았다.
그런 뒤 품속을 뒤졌다. 총알 12개가 쏟아져 나왔다. 준은 물끄러미 총알을 내려다보더니 그 중 3개를 집어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런 뒤 화장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반대편 선로로 뛰어 내렸다. 오사카 행 JR 열차가 김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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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숲이 있었다. 아까부터 폭우속에서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왔기 때문에 임소봉은 소리의 정체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으려 했다. 헬기였다. 소봉의 느낌에는 헬기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곤베이의 작전이 이 근처에서 벌어진다는 뜻이 된다.
불안했다.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폭우 사이로 헬기 두대가 날아오다가 멈추고,날아오다가 멈추는 모습이 보였다. 나머지 헬기 한대는 분명 이 근처에 숨어 있는 거 같았다.
이번에는 한꺼번에 6대의 페라리가 임소봉 앞을 지나갔다. 그 뒤로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쌍둥이처럼 달라붙은 채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임소봉은 적외선 쌍안경을 자동차안으로 냅다 집어 던졌다. 분명했다. 둘 중 하나는 별장안에서 미친 말처럼 날뛰던 그 스포츠카였다. 임소봉은 화급히 자동차에 올라탔다.
김영진이 핸드 브레이크를 풀었다.
"저기야! 우선은 저 산으로 올라가 봅시다."
영진은 급히 후진기어를 넣었다. 톨게이트 옆으로 후진해서 올라가자 우측으로 고속도로가 내려다 보였다. 자동차는 곧장 방향을 바꾸어서 비포장 도로를 올라 가기 시작했다. 숲 중간쯤에서 별안간 꽝 소리가 들려왔다. 소봉은 급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람보르기니와 페라리가 달려오다 말고 서로 보디를 부딪치고 있었다. 소봉은 창 밖으로 침을 탁 뱉었다. 저것들이 무슨 지랄을 하나,라는 생각에서였다.
모리야마는 크게 흔들리는 람보르기니를 응시하며 묘한 흥분감에 젖어 있었다.
충격이 컸는지 좌측의 람보르기니가 이번에는 속도를 20Km 아래로 늦추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시끄럽게 경적을 눌렀다.
"뭐야? 포기하는 거야? 얌전한 공주 아가씨. 이제야 겁이 났나 보지?"
그렇게 말하다가 모리야마는 전방을 응시했다. 이정표가 보였다. 인터체인지였다.
그제야 모리야마는 람보르기니가 아까부터 속도를 늦춘 이유를 알았다.
람보르기니는 하꼬네가 아니라 고속도로로 나가는 것을 원하는 것이다.
모리야마는 써늘하게 미소를 지으며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쨉싸게 차체가 앞으로 튀어 나가자 동시에 왼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턱.
보기좋게 페라리는 람보르기니의 진행방향을 가로막고 달리기 시작했다.
모리야마는 히쭉 웃으며 백미러를 응시했다. 이렇게 하면 중간에 인터체인지 쪽으로 방향을 틀지 못할 것이다. 그때였다.
꽝--------
처음으로 람보르기니쪽에서 페라리를 공격해오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다보았다. 사유리가 써늘하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모리야마는 등골이 오싹했다. 뒤에서 박히기는 처음이었다. 저 꼬마가 미친게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모리야마는 마른 침을 삼키며 핸들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손이 떨렸다. 잠시 한눈을 팔았던거 같았다. 이번에는 람보르기니가 모리야마의 우측을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모리야마를 추월한 뒤 왼쪽으로 다시 들어오겠다는 계산이었다. 톨게이트 입구는 50미터 전방 왼쪽에 있었다.
톨게이트를 내 줄 수 없었다. 모리야마 역시 람보르기니를 따라 속도를 높였다.
"미첬군...저것들..."
헬기안에서 곤베이는 양미간이 수축되었다. 하꼬네에 진입하는 순간 체포할 생각이었다.
"왜 저러는 건가?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군요. 그 한국 놈이 아닌 거 아닙니까?"
"그럴 리가 있나?"
곤베이는 서둘러 부하의 쌍안경을 뺐어 들었다. 서치라이트가 스포츠카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운전석은 보이지 않았다. 모호했고 참담했다. 이번에는 왼쪽의 스포츠카가 우측 스포츠카를 향해 보디를 움직여 가고 있었다. 폭우속에 붉은 불꽃이 스포츠카 사이에서 발생했다.
"이상한데요?"
"뭐가?"
"람보르기니가 인터체인지로 진입하려는 생각인 거 같은데요? 그걸 알고 페라리가 방해하는 거 아닙니까?"
아차 하고 곤베이는 놀랬다. 급히 헬기 앞쪽으로 뛰어갔다. 발 아래로 톨게이트와 인터체인지가 한꺼번에 내려다 보였다. 곤베이는 불끈했다.
"막아! 고속도로를 진입하는 것을 막으란 말야!"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놈이 고속도로를 타기 전에 갈기고 싶었다.
"고공 요원은 지금 어디에 있나? 앙?"
"246번 국도 10Km 남쪽에서 상승중입니다! 10분 정도 더 필요합니다!"
"이 자식들! 게이조라는 놈은 어디에 있는 거야?"
곧바로 게이조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텐바 시내입니다. 밴이 펑크가 났습니다. 이 차로는 역부족입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핸드폰을 와락 집어 던졌다. 그런 뒤 헬기 조종사의 교신기를 뺐어 들었다.
"3번 헬기 듣고 있나! 당장 인터체인지를 방어해. 지금 당장!"
"잡겠습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잡앗!! 람보르기니가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싶으면 타이어에다 대고 갈기란 말야! 알겠나?"
그렇게 말한 뒤 곤베이는 발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미 스포츠카 두대는 사이좋게 인터체인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 안쪽으로는 노란색 톨게이트가 반파되어 바람에 뒹굴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군...저것들. 아예 톨게이트를 깔아 뭉게 버린거 아냐?"
곤베이는 교신기를 열어 놓은 상태에서 귀를 기울였다. 곤베이의 헬기는 로터 소리를 내며 20도 각도로 회전하며 아래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러자 상행선 인터체인지의 교각 밑에 숨어있는 3호 헬기가 곤베이의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 내가 지시한다! 뒤로 움직여! 1미터 뒤로 후진한 뒤 내 지시가 떨어지면 놈을 잡는다. 절대 사고 일으키지 말아. 놈을 생포해야 한다. 알겠나?"
번개가 치고 있었다. 톨게이트를 지나면서부터 두 스포츠카는 속도를 높이며 달려가고 있었다. 둘 다 미친 게 분명했다. 인터체인지의 급커브가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이다! 준비해!"
곤베이가 교신기에 대고 신경질적으로 외치고 있을 때 모리야마는 다시 왼쪽으로 핸들을 꺾고 있었다. 쾅 소리가 들려 오면서 람보르기니가 인터체인지 교각 왼쪽 난간에 보디를 부딪치는 모습이 보였다. 동시에 하늘에서 조명탄이 연커퍼 터지면서 사방이 대낮같이 밝아왔다. 모리야마는 어안벙벙이 되어 조명탄이 터지는 밤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순간 펑 소리가 들려오면서 모리야마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급히 액셀레이터에서 발을 떼며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람보르기니는 왼쪽 난간을 긁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상했다. 모리야마는 식은 땀을 흘리며 앞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자 50미터 전방에서,인터체인지의 교각 아래쪽에 숨어있던 가와사끼 헬기 한대가 유령처럼 떠오르는게 보였다. 황당했다. 저격총을 겨누는 사내의 모습이 바짝 당겨오자 모리야마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시 속도를 올리려고 액셀레이터를 힘차게 밟았다. 그제야 좌측 앞 바뀌에 펑크가 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늦었다.
오른발이 브레이크를 발작적으로 밟고 있었지만 페라리는 허공으로 붕 떠 오르며 한바퀴 몸을 굴리고 있었다. 그런 뒤 난간 쪽으로 밀려나갔다. 곧이어 큰 충돌이 있었다.
모리야마는 입에 거품을 물었다. 페라리는 거꾸로 뒤집어진 채 달려가고 있었다.
시트를 꽉 잡은 상태에서 모리야마는 힘겹게 뒤를 돌아다 보았다. 이번에는 난간을 긁으며 달려오는 람보르기니가 페라리의 꽁무니를 힘차게 박아오고 있었다.
페라리는 다시 크게 하늘로 솟아올랐다.
"아악---!"
모리야마는 뒤집어진 페라리 운전석 안에서 두 눈을 부릅떴다. 페라리는 난간 상단부를 부수며 인터체인지 밖으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런 뒤 헬기의 저격병을 향해 세차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콰쾅-------------!!!!

모리야마는 믿을 수 없었다. 그의 크게 뜬 두 눈안으로 눈부신 화염이 황홀하게 몰려왔다. 동시에 헬기가 폭발하면서 생겨난 파편들이 모리야마의 얼굴을 향해 복잡하게 날아왔다. 아직은 살아있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불이 붙은 쇠붙이 하나가 모리야마의 목에 사정없이 박혀오는거 같았다. 눈깜짝할 사이였다. 모리야마의 머리는 부서진 차창 밖으로 수박덩어리처럼 튕겨져 날아갔다. 큰 폭발이었다.
동부 고속도로 상공은 삽시간에 불덩이에 휩싸였다.
사유리는 불똥을 피해 람보르기니의 핸들을 돌렸다. 화염을 피할수는 있었지만 이번에는 람보르기니가 반대편 드리프트 현상에 말려 들었다.
팍팍팍-------

요란한 소리를 내며 도로 위를 구르기 시작했다.
사유리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우측 잔디밭 끝에 람보르기니가 박혀 있었다.
사유리는 밤하늘의 헬기를 올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람보르기니 안에서 기어 나왔다.
폭우가 사유리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사유리는 급히 가까이에 있는 숲으로 몸을 숨겼다.
곤베이는 허탈했다. 지금 무슨 사건이 있었는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곤베이는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을 떨구었다. 빌어먹을 역무원 자식이 이제야 연락을 해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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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 안은 축축했다. 하사 마에다는 헌책이 수북하게 쌓여있는 책방 안의 비좁은 구석에 앉아 있었다. 그의 뿔테 안경은 야릇하게 반짝였다. 와세다 대학 앞에 있는 헌 책방 중 하나였다.
하사 마에다는 원래부터 소심한 남자였다. 형이 운영하는 헌 책방에도 자주 오는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오늘은 오전부터 헌책방에 찾아왔다. 그런 뒤 책방 문을 안에서 걸어 잠갔다.
오전 11시에 눈을 떳을때 마에다는 마끼 준사히가 살아 돌아온 뉴스를 처음 접했다. 믿을 수 없었다. 마끼가 자살극으로 위장했다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녀가 다시 돌아온 것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미칠거 같았다. 그녀를 한동안 사모했기에 이제는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즈반도의 요트에서 마끼를 만났을때 그녀는 야릇하게 웃고 있었다. 그런 뒤 불쑥 디스켓 하나를 마에다에게 내밀었다. 지금 읽을 필요는 없어요.
나 당신을 잊지 않을 거에요. 당신은 좋은 친구였지요.
왜...나에게 이것을 주는 거지?
당신을 믿기 때문이에요.
그렇지 않아요. 마끼. 너무 과분하군요.
필요한 시기가 되면 디스켓을 읽어 보세요. 사람들에게 공개해야 합니다.
요트에서의 만남은 행복했다. 로마의 휴일 같은 만남이었다. 마끼가 자신을 불러 준 것 자체가 마에다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채팅 프랜드로써는 이렇게 가까워질수 없는 법인데.
마에다는 마끼와 키스를 나누었다. 그런 뒤 요트에서 내려 해안 도로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그런 뒤 버스에 올라타는 순간이었다. 요트가 등 뒤에서 폭팔을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새벽에 자살한 줄 알았던 마끼 준사히가 일본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마에다는 텔레비젼 뉴스를 보면서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울컥 겁이 났다. 게이꼬의 죽음까지 겹처서 문제가 보통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숨어 지내고 싶었다. 이대로 책방안에서 화석처럼 굳어 있고 싶었다.
마에다는 일어서다 말고 몸을 비틀거렸다. 그제야 한 가닥 흐름이 잡혔다.
자위대 별반이 역조종을 한다는 뜻일까...
마에다는 온 몸이 떨렸다. 이건 이해하느냐 마느냐의 수준이 아니었다.
설사 자신이 이용당한다 하더라도 군에 대한 충성은 포기할수 없었다. 실상 누가 뭐라고해도 하사 마에다는 육상자위대 1위(대위) 계급을 달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별반 요원중 가장 뛰어난 프로그래머였다. 한국인 하나를 지옥속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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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상한 숲은 본 적이 없었다. 사유리는 숨을 할딱이며 언덕을 걸어 올라갔다. 처음 입어 보는 정장 투피스가 진흙에 더렵혀지고 있었다.
울컥 울음이 나왔다. 시끄럽게 헬기 소리가 들렸고,왁자지껄 자위대 요원들이 자신를 찾아 숲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페트롤카의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사유리는 무작정 덤불을 헤쳐 갔다. 테니스화가 벗겨졌다. 맨발이었다.
사유리는 화가 나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들오들 몸이 떨려왔다. 폭우가 세차게 젖가슴 사이로 흘러 내렸다.
발자국 소리에 사유리는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녀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바로 앞에서 사내 둘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오른쪽 키 작은 사내의 손에는 저격용 라이플 총이 들려 있었다. 시큼한 비냄새와 함께 화약냄새가 풍겨왔다.
"당신들은...누구죠?"
"대한민국 안기부요."
"저희는 대한민국 대사관에서 나왔습니다."
키 작은 사내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을 하자,옆에 있는 사내가 일어로 통역을 하고 있었다.
"그 새끼 드럽게 아가씨를 괴롭히더구만."
"페라리 그 친구가 당신을 괴롭혀서 걱정이 되었습니다."
"잘못하다간 아가씨가 변을 당할 거 같아서 그 자식 내가 혼내줬지."
영진은 소봉의 말을 통역하다가 소봉을 돌아다보았다.
"임형. 지금 이 말도 통역해야 합니까?"
"알아서 하쇼. 영진씨가 어떻게 통역을 하건 난 알아들을 수 없지 않소?"
"임형은 러시아어 외에는 자신있는게 없다는 뜻입니까?"
"워 웨이런 쩡즈 하오쌍 주쯔. 르원 타오엔. 아,쩌 쓰 쭝원."
(내 성격이 대쪽같아서 말이요.일본말은 싫어죽겠다 이거요. 아,이건 중국어요.)
영진은 슬며시 웃으며 다시 사유리를 바라보았다.
"경제적인 제의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지켜 드리지요.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설마...? 당신들이 타이어를 펑크 냈나요?"
그렇게 말한 뒤 사유리는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와락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사내 중 키가 큰 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와 같이 가시죠. 언니를 만나게 해 드리겠습니다만."
"나쓰에를 요?"
"저희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언니를 위해서라도 우리와 같이 가시는 게 좋을 겁니다..."
소봉은 쓴 웃음을 지으며 영진을 응시하다가 인터체인지로 시선을 옮겼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총알 하나로 헬기와 스포츠카를 동시에 박살내다니 말야.
한국에 돌아가면 신사동의 미스 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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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3시 25분. 준은 택시를 타고 오사카 비지니스 파크로 향했다. 폭우가 택시 차창을 두들기고 있었다. 오는 도중에 신간선 노조미로 바꾸어 탔기 때문에 당분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창 밖으로 오사카 성이 보였다. 성 위로 폭우를 뚫고 간사이 국제공항에서 이륙하는 비행기의 테일라이트가 보였다.
비지니스 파크는 오사카 성 뒤에 있었다. 친구는 없었다. 오사카에 기반을 둔 일본 기업의 정보를 전문적으로 훔치는 한국인 동료들는 이미 이곳을 떠나 본국으로 귀국한 뒤였다. 실상 몇년전부터 한국측 스파이의 활동은 상당히 세련되게 변해갔다. 일본친구들 하는 식으로,한국도 <관측 임무를 띈 상사원>을 파견하는 것이다. 이들은 팀을 만들어 특수한 기술을 가진 일본 기업에 접근을 한다. 그런 뒤 구매의사를 먼저 타진한 뒤,카메라와 녹음기를 들고 공장을 방문한다. 이때부터 구입할 물건을 관측한다. 카메라 후레쉬가 요란하게 터지고 한편으론 네고세이션(협상)에 들어간다. 물론 실제 협상이 아니다. 협상은 지루하게 진행되다가 펑크가 난다. 결과적으로 보면 한국측은 다량의 사진과 녹음테입을 소유하게 된다. 오사카에 있는 김준의 친구들은 대개 이런 식으로 활동하는 정보원들이었다.
준은 다시 택시를 잡아타고 우메다梅田로 향했다. 동료들이 잘 가는 술집이 소네자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쪽으로 가면 누군가 안면이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 같았다. 삼성이나,현대에서 투입한 스파이들 말이다. 어쩌면 지금은 모두 쓰쿠바나 도쿄로 무대를 옮겼을지 모른다. 오사카에 기반을 둔 거대 기업들이 서서히 도쿄로 이주하면서부터 정보원들도 철새처럼 이동을 시작했을 터이니까.
신소네자끼 거리에 도착하자 지금과는 다르게 지저분한 유흥가 야경이 준의 눈앞에 펼쳐졌다. 도쿄의 긴좌 못지 않은 유흥가인 신소네자끼. 폭우속에 행인들이 꾸역꾸역 몰려다니고 있었고,그중 이상하게 깨끗하게 보이는 클럽 바
아메리칸이 보였다.
준이 아메리칸에 들어섰을 때는 베리 메닐로우의 <코파카바나>가 홀안에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붉은 융단에 캐나다산 목재 장식,쇼걸은 없고 술냄새도 나지 않는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다면,무대 위에서 베리 메닐로우처럼 금장 옷을 입은 일본인 가수가 되지도 않는 혀를 놀리며 코파카바나를 영어로 부른다는 점이다.
준은 DAT 워커맨의 스포츠타입 해드폰을 귀에 꽂았다. 그런 뒤 한국 상사원으로 보이는 남자를 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없었다. 김준이 스탠드로 다가서자 미국인 바텐더가 그를 알아보았다. 준은 해드폰을 귀에서 뺀 뒤 조용히 입을 열었다.
"놀랍군요. 지금도 여기서 근무하고 있었나?"
"지난 여름 이후로 처음이지요? 여기도 물이 바뀌었습니다. 많이 지저분해 졌지요..."
준은 슬며시 웃으며 투박하게 생긴 잔을 가리켰다. 바텐더는 슬며시 웃었다.
그런 뒤 준이 지난 여름에 즐겨 마시던 마티니를 만들었다.
나디아라는 호스티스는 없었다.
오가타 나디아는 유일하게 김준과 같이 잠을 잔 일본여자였다. 잠을 잔 것은 아니었다. 제일그룹 지사 직원이 오사카를 처음 방문한 김준에게 호텔을 잡아 주면서 22살의 나디아를 객실에 집어넣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나디아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가슴이 작았다. 바에 있는 여자들은 대개 체리짱이나 캔디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길 좋아했기에,나디아라는 예명은 준의 기억에 남았다. 준은 물끄러미 나디아를 응시했다. 그녀는 팁은 이미 어젯밤 받았다고 말한 뒤 객실을 나갔다. 그날 밤을 어떻게 지냈는지는 준 자신도 알지 못했다.
나디아...
왜 하필 그녀는 흑인 여자 이름을 예명으로 사용했을까.
클럽 아메리칸은 1년전과는 다르게 확실히 변해 있었다. 간사이 국제공항때문에 탈바꿈을 했는지 병맥주도 작은 것이 2,500엔으로 가격이 올랐다. 준은 작은 병 하나를 더 마시고 클럽 밖으로 나왔다. 한국식으로 하면 소주와 맥주를 섞어 마신 셈이다. 진을 소주로 친다면 말이다.
새벽 4시 23분에 김준은 호텔 니코오사카日航大阪 로비에 서 있었다.
21층. 더블 침대.
산업 스파이 습성이 붙은 뒤로는 호텔에 투숙을 해도 항상 더블룸에 투숙했다.
더블룸은 의심을 받을 확률이 그만큼 적었다. 준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카운터에다 찾아오는 여자는 적당히 돌려보내라 말한 뒤 엘리베이터로 걸어갔다.
물론 여자가 찾아오는 경우는 없다.
간혹은 준 스스로가 지하 바에 내려가 여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지만 그것은 바에서 끝난다. 바에서 만난 여자는 바에서 해결하고 헤어지는 것이다.
온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준은 노트북 컴퓨터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샤워를 시작했다. 샤워를 끝낸 뒤에는 지갑의 돈을 확인해 보았다. 5천불 정도 여유가 있다.
부피가 나갔기 때문에 내일 아침에 수표로 바꾸어 두는 게 좋을 거 같았다.
룸서비스가 도착해 있었다. 서둘러 테이블 위를 보았다. 노트북을 만진 흔적은 없다. 단지 그 위에 올려놓았던 2천엔을 팁으로 알고 눈치 것 가져가 버렸다.
주문했던 대로 폴로 와이셔츠와 내의,워셔블 양복이 도착해 있다. 준은 와이셔츠를 입으며 음식을 응시했다. 계란 스크램블 접시와 치킨 누들 스프,야채 샐러드.
샌드위치는 두 종류였다. 준은 안심스테이크 샌드위치를 밀어 두고 참치 샌드위치를 집어들었다. 이번 참치는 일본산이었다.
계속 비가 내리고 있었다.
도쿄 신주꾸에는 준의 단골 샌드위치 바가 있었다. 한번은 그곳의 주인이 고래 고기를 샌드위치에 넣어 준의 미각을 시험한 적이 있었다. 준은 그때 일을 생각하며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일본산 참치가 돌처럼 씹혀 왔다.
준은 침대에 앉아 오른쪽 허벅지의 상처를 살펴보았다. 어제 오전 중에 병원에 들려 다시 치료를 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상처가 아물고 있다. 살가죽은 빗물에 부어 있었지만 염려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린 여자와 키 큰 남자. 그러고 보니까 의사는 총탄 자국에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저 야쿠자 하수인 정도로 알았을지 모른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겼다. 우선은 한국 국방부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다.
사다 마에다가 국방부 컴퓨터를 상대로 모호한 공작을 했다면 이건 김준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어쩌면 마에다 그 친구가 김준의 핸드폰을 이용해 사라사테 시스템을 경유 국방부 컴퓨터로 침투한 놈인지도 몰랐다.
준은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한 손으론 트랙볼 마우스를 조작했다. 곧바로 그가 입력한 인터넷 도메인 네임 2천개가 컬러 액정화면에서 빠르게 스크롤 되었다.

amto.co.jp <日,아지노모토> bpc.co.uk <英. 영국석유>
duksung.ac.kr <덕성 여대> dwe.co.kr <대우 통신>
fanuc.co.jp <日,파낙> goldstar.co.kr <금성>
hyundai.co.kr <현대> dabo.postech.ac.kr <포항 공대 도서관>
jeil.co.kr <제일전자> kaist.ac.kr <카이스트>
ring.kotel.co.kr <하이텔> microsoft.com <美,마이크로소프트사>
nce.nm.kr <한국전산원> nec.re.jp <日,NEC 연구소>
nkk.co.jp <日,일본강관> nowcom.co.kr <나우컴>
rhone.re.fr <佛,롱프랑 연구소> samsung.co.kr <삼성>
spacelink.msfc.nasa.gov <美,NASA> stis.nsf.gov. <美,과학기술정보>
............

제일그룹과 마찬가지로 금성,대우,삼성,현대 등 기업들은 자체 인터넷 도메인을 가지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대개의 대학도 자체적인 인터넷 도메인을 보유하고 있고,각 연구소도 마찬가지다. co는 회사를,ac는 학교를 의미했고,re과 gov는 연구단체와 정부기관을 의미한다. 뒤에 있는 kr은 코리아,즉 한국에 있는 도메인을 뜻한다.
준은 도메인 이름을 훑어보았다. 국방부로 침투할때 걸어 놓을수 있는 도메인을 찾고 있었지만 다시금 쓴웃음이 나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한국 국방부에 침입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에다가 무엇을 했는지 궁금했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아예 화이도넷Fido-Net에 돈을 퍼주고 의뢰할 수 있었다. 자생적으로 생겨난뒤 유닉스라는 OS(오퍼레이팅 시스템)을 공유하면서 형성된 통신망인 인터넷은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것이 아니었다. 인터넷은 자의건 타의건 유닉스라는 공통분모로 구축된 게릴라적인 통신망이라 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화이도넷은 그 의미가 달랐다. 화이도넷은 사설 BBS의 하나로,전세계에 퍼져있는 사설 BBS중 가장 영향력이 강한 사설 BBS였다. 한국에서는 주로 미 8군에 의해 화이도넷망이 형성돼 가고 있었는데,아쉽게도 화이도넷 망에는 김준의 친구가 없었다.
실제적으로 말하면 김준은 화이도넷과는 견원지간이라 할수 있었다. 10년전만 해도 김준은 하이도넷을 놀이터로 알고 있었으니까.
준은 현기증이 일어났다. 인간관계에는 적당한 인터벌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적을 너무 많이 만들었어...
준은 머리를 식힐 겸 고종수에게 전자편지를 보냈다.

>> jsko$jeil.co.kr
>> 현 상황을 빠른 시간 내에 설명해 주시오.
>> +<:-( <난 수녀처럼 울고 있다...>

준은 타이핑을 끝낸 뒤 창 밖을 보았다. 한현희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사유리의 상황도 궁금했다. 무사히 탈출하면 삐삐를 쳐 오기로 했는데 삐삐는 울리지 않았다. 비쩍 입천장이 말라갔다.
준은 노트북을 덮고 양복을 걸친 뒤 객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곧바로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32층으로 올라갔다. 제트 스트림에서 시끄럽게 음악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는 오사카 야경은 상당히 좋았기 때문에 준은 오사카에 올때마다 이 호텔에 투숙한 뒤 제트 스트림으로 산책을 나왔다. 더구나 제트 스트림은 롯본기에 있는 일류 디스코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아침. 6시.
준은 고글을 걸친 뒤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고글을 쓰는 습관은 모니터에 눈을 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일반 사람들은 모니터에서 튀어나오는 전자파를 의식하는데 실상 전자파보다는 자외선이 오히려 나쁜 것이었다. 자외선은 시력을 급속도로 악화시킨다. 이 때문에 UV 코팅이 된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모니터를 응시하는 버릇이 어렸을 때부터 생겨났는데,이게 후에는 오토바이 취미와 맞물리면서 고글로 바뀌었다. 그러니까 고글을 착용한다는 것은 준이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작업은 오사카 스카이라인 위로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는 가운데 한시간 가량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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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시마 3위(소위)는 방수(傍受:도청)장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호리시마는 자위대 육상막료감부 조사 2부 별실의 전파방수요원이었다. 교대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안타까운듯 신음을 토하며 어젯밤 도청한 내용을 중간중간에 컴퓨터에 입력을 했다.
북한,러시아의 동태를 감시하는 미호 통신소나,한국정보를 전방위로 체크하는 다치아라이 통신소처럼 호리시마 3위가 소속된 기카이지마喜界島 통신소는 고유한 목적이 있었다. 중국 육해군의 움직임을 방수하는 작업이다. 이것은 해상자위대가 소유한 해저고정형 청음기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에 의해 잠수함의 움직임까지 파악 분석하는 것이다.
하늘에서는 전수방위라는 개념에 의해 YS-11전자첩보기와 RF-4c 정찰기가 각종 카메라장비와 나이키 등 지대공 미사일의 전파를 방해하는 장비를 실고 떠 다녔다.
그렇게 육해공 자위대가 날려오는 정보를 종합적으로 관리 분석하는 것이 호리시마의 임무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호리시마는 이날 오후부터 8시간 동안 기존 임무와는 다르게 캠프 슈와프를 비롯한 캠프 한센,캠프 코토니 등 오키나와 주둔의 주일 미군기지를 집중 방수하고 있었다. 성과는 없었다. 동급해커가 주일 미군기지에 침투한다는 정보가 있은 뒤로 계속된 방수작업이었다. 하지만 동급해커는 어잿밤 이후로 나타나지 않았다.
호리시마는 졸린 듯 창 밖을 내다보았다. 3개소의 안테나 어레이(CDAA)가 회색빛을 발하고 있었다. 안테나 어레이 3개가 복잡하게 교차하면 통신발신지는 물론 통신내용까지 파악할수 있었는데,이는 1983년에 발생한 소련의 대한항공기 격추 사건에서 이미 입증이 되었다. 아니 일본 자위대의 전파 도청 능력은 세계 최고라 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이미 1905년 이전에 동해에서는 마르코니식 통신장비를 사용하는 일본 해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러시아 함대간의 통신을 도청해 내기도 했다.
따분했는지 호리시마는 좌우로 근무중인 10명의 동료들을 살펴보다가 다시 자신의 방수장비를 응시했다. 그때 낮익은 전파 파형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단파라고 생각했지만 단파 파형이 아니었다.
급히 호리시마 3위는 전화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는 신속하게 내각정보국 전산실로 연결되었다. 이 전화는 자위대 별반이 도청할수 없는 전화였지만 그는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용히 입을 놀렸다.
폭우가 내리고 있었다. 코끼리라 불리는 안테나 어레이 사이로 시린 바다가 보였다. 아침 7시를 기해 태풍은 서서히 물러가고 있었다. 그 바다 위로 날렵하게 생긴 시 해리어가 날아오다가 호리시마의 머리 위로 지나갔다. 필리핀 클라크 기지에서 오키나와 가테나 기지로 이주한 미 18 항공단 소속의 수직이착륙기였다.
아침 폭우때문에 항로를 잃은 것 같았다.
통화 중간에 호리시마는 엉겁결에 컴퓨터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는 눈을 휘둥그래 떴다. 인터넷의 텔네트Telnet를 이용한 원격 시스템 접속Login. 누군가가 리모트로 호리시마가 응시하고 있는 컴퓨터에 침입한 뒤 데이터를 급속하게 먹어 오고 있었다. 호리시마는 그저 멍하니 모니터 화면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짧게 신음을 토했다.
"동급해커다...!!"
호리시마는 급히 컴퓨터의 전원을 껐다. 그런 뒤 동료들을 돌아다보았다.
그들도 모두 얼굴이 빨개진 채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동료들 컴퓨터도 모두 동급해커의 기습을 받고 있었던 게다.
그로부터 10분 뒤. 한국정보를 강압적으로 도청하는 다치아라이 통신소에서도 같은 현상이 벌어지기 시작하자,기다렸다는 듯이 방위청 지하센터 스태프 70명이 동시에 동급해커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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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위성 모양의 아이콘이 반짝였다. 준은 긴급히 하던 작업을 중단했다.
1년전 과는 뭔가 달랐다. 어느 쪽에서 추적을 해오는지 김준은 알지 못했다.
아마 조금만 늦었다면 이번에는 자위대 통신소가 핸드폰 발신지를 서슴없이 추적해 왔을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다치아라이 통신소는 지금 이 시각 일본 국내에 있는 모든 핸드폰의 움직임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을 것이다.
준은 식은 땀을 흘렸다.
시간을 다시 채크해 보았다. 이들은 김준이 남긴 아이디를 곧바로 발견했을 것이다. 그 사이에 다른 쪽에서 동급해커가 움직이고 있었다면 이들도 동급해커가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마에다. 한방 먹이고 싶었다.
준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방금전 했던 작업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키보드를 두들겼다. 극히 일부이기는 했지만 극동지역을 포괄적으로 감시하는 자위대 통신소 자료가 차갑게 액정화면에 떠올랐다.
눈에 띄는 내용은 없었다. 다치아라이 통신소는 며칠전부터 대한민국 상황을 매우 정밀하게 관측하고 있었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인 비상사태인지 구분할수는 없었다. 매우 정밀했기 때문에 준은 등골이 오싹했다. 어쩌면 미 8군과 연합으로 한국 상황을 관측하고 있는 거 같기도 했다.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다.
비로소 준은 자신이 철저하게 함정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아이디 12개는 철저하게 누군가에 의해 이용되고 있었는데,그중 일부는 대한민국 국방부를 공략했고,다른 일부는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그리고 다른 일부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를 공략하는데 이용되고 있었다. 이것이 지난 이틀동안 벌어진 일인거 같았다.
준은 난감했다. 머리 속이 지끈거렸다. 온 몸이 피곤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배후에 사다 마에다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숙집에서 한두번 얼굴을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마에다는 그릇이 큰 친구가 아니었다.
준은 마에다의 아이디가 있는 지 알아보기 위해 니프티서브에 접속을 시도했다.
접속하자마자 화면 하단부에 <오빠. 돌아와 주세요...> 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준은 20도 각도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게시판으로 이동해보니까 메시지에 대한 항의성 게시물이 어제 아침부터 올라와 있다.
준은 의문을 접어 둔 채,하사 마에다를 찾기 시작했다. 불행히도 니프티서브에는 그의 아이디가 존재하지 않았다.

방위청 직원이라면...

준은 마끼의 말을 뒤늦게 생각하며 급히 접속을 끊었다. 곧바로 방위청 컴퓨터 플랫폼이 준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준은 바짝 긴장한 채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고글을 벗으며 짧게 들어오시오,라고 말했다. 그의 왼손은 어느새 권총을 쥐고 허리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여차 하면 한방 쏠 기분이었다.
크림색 모피 코트에,입술은 분홍색. 크고 맑은 눈을 가진 가진 여자가 불쑥 출입문을 열고 들어 왔다.
나디아였다.
"하이. 오랜만이군요. 저 기억나시나요?"
준은 허탈하게 미소를 지으며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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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저 이야기 SOLDIER'S T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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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이 오카다 나디아의 급작스런 방문을 받고 있을 때 아크힐스 33층의 국가 안전 기획부 임시캠프는 뜨겁게 돌아가고 있었다. 심상치 않았다. <처단자> 바이러스를 안기부 망에 유포한 해커를 역추적해서 실제로 처단했다는 7명의 전산 요원들은 각각 A,B,C조로 나뉘어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A팀은 한국 정세를,B팀은 일본 정보를 조사중이었고,C팀은 북경대학 단말기를 경유해 북한의 평양정보센터(PIC)와 접속을 시도하고 있었다. 이쯤 되면 가히 안기부 최강의 메이저리그 전산팀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라핑버드 작전((operation laughing bird:안기부가 미국,일본을 상대로 벌인 산업스파이 공작중 하나.) 이후로 가장 강력한 전산팀인지 모른다.

== 경고. 그런 아이디는 없습네다. ==

C조 전산요원 두명은 아까부터 평양정보센터에 접속하기 위해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예전에 사용해 본 <인민무력>이라는 아이디가 계속 먹통이었던 것이다.
식은 땀이 났다. 이것들이 우리들이 안기부라는 것을 눈치 챈 건가?...

== 경고. 동무의 당성이 의심스럽습네다. ==

이 친구야. 그건 당연한 거야. 우린 남조선 안기부라니까 그라네...
C조 전산요원 두명은 바짝 긴장했다. 가끔씩 평양정보센터 전산망에 침투할 때마다 떠오르는 엉뚱한 문구들...60대식 문구였지만 함부로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다가 갑자기 뒤통수를 처 오는 것이 여간 신기한 게 아니었다.
10여분정도 흐르자 이들은 아이디 하나를 해킹한 뒤 북한의 평양정보센터로 침투할 수 있었다. 5분 정도 여유가 있을 거 같았다. 왼쪽에 앉아있는 요원은 초속 100마일로 로그 파일을 추적하기 시작했고,오른쪽 요원은 감시를 했다. 그런 뒤 막 작업이 끝났을 무렵이었다. 초침이 돌아가는 가 싶더니 별안간 모니터 하단부에서 붉은 문자가 불쑥 떠올랐다.

== 동무의 하드디스크를 접수하겠습네다. ==

의외로 빨랐다. 오른쪽에 앉아있는 요원이 번개에라도 맞은 듯 입을 벌리고 있자, 왼쪽 요원이 잽싸게 전화선을 뽑았다. 동시에 평양정보센터 측에서 하드디스크를 먹어오다가 차단되는 것이 보였다.
같은 시각. 진광섭은 엘리베이터에서 축축한 양복차림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그의 등 뒤로 윤춘해와 다른 기관원이 따르고 있었다.
광섭은 사무실로 들어가다 말고 걸음을 멈추었다. 남쪽 복도를 따라 요원 둘이 이곳에서 잠을 잔 뒤 깨어난 나쓰에를 데리고 오고 있었다. 광섭은 나쓰에를 바라보다가,다시 아까부터 머릿속을 괴롭힌 것을 정리해 보았다.
오늘 새벽 후지산에서 돌아오던 중에 7과 과장의 긴급 연락이 있었다. 북한측에서 지역공작을 강화했다는 소식과 함께 북한의 군사력이 이틀전부터 은밀하게 전방배치 되어 왔다는 연락이었다. 이로 보아 북한측에서도 한국 측 사정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가까운 시간 내에 남한 쪽이 미사일 하나를 날려 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는지 모른다.
진광섭은 불안했다. 일본에 오기 전 장관 면담시에 확언했었다. 사건이 확대되기 전에 김준을 송환하겠다 했는데. 점점 미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젠 김준이 동급해커인지 아닌지 조차 단정할수 없었다.
오늘 아침 마이니찌 신문 내용도 그랬다. 한반도 상황을 조심스럽게 예측했다는 기사인데 해커 이야기를 슬며시 암시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별 시답지 않은 기사도 다 보겠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놈이 쥐새끼 같은 건지, 아니면 운이 좋은 건지 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더구나 일본과 과장의 말로는 일본 측 컴퓨터 망에도 <동급해커>가 야릇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광섭은 쓴 웃음을 지으며 예의 이사벨 아자니 스타일의 선글라스를 콧등에 착용했다. 나쓰에가 끌려가다 말고 그에게 불쑥 말을 던져왔다.
"사즈메는...내 동생은 어떻게 된 거죠?"
광섭은 물끄러미 선글라스 너머로 나쓰에를 바라보다가 그녀를 무시하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나쓰에는 한방 맞은 듯 진광섭을 바라보았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마구 비명을 지르며 소동을 부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어제 차력인가 뭔가를 했다는 안기부 요원 하나가 나쓰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팔을 꺾었다가 다시 온전하게 펴는 기술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쓰에는 주눅이 들어있었다.
광섭은 나쓰에가 잔뜩 독이 오른 얼굴로 좌측 끝방으로 끌려가는 것을 본뒤, 몸을 돌려 전산실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곧바로 오른쪽에서부터 전산요원 7명이 스프링처럼 일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서울에서는 연락 없었나?"
"없습니다. 국방부나 캠프 데이비드는 지금도 비상이 걸려있는 상태입니다.
어제는 다시 10명의 전산 요원이 투입되어 총력전을 벌였습니다만 국방부 라인은 여지껏 먹통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별 잡범까지 다 들락날락한다고 합니다만."
광섭은 벌래 씹은 듯 얼굴을 구겼다. 선글라스가 야릇하게 빛을 반사했다.
"새벽에는 오산 미군기지에 들어 왔다더니,아까 일본 컴퓨터 망에도 침투했다는 것은 어떻게 된 거야? 인덱스 데이터를 분석해 보았나?"
"방금 끝났습니다."
서둘러 B조 요원 하나가 프린팅 용지를 읽어 내려갔다.
"동급해커는 모두 5군데에다 순차적으로 아이디를 남겨 놓았습니다. 시간대로 분석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6시15분 정각에 미호 통신소 주컴퓨터에 침투 아이디를 남겼고,6시 25분에 고후나토통신소로 이동,2분 뒤에는 경시청 컴퓨터로 이동한 뒤 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다가 45분 경에는 기카이지마 통신소에 침투한 뒤 아이디를 남겼고,53분 경에는 다치아라이 통신소로 급히 이동한 뒤 아이디를 남겼습니다."
다시 얼굴이 후끈거렸다. 광섭이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까 이건 모두 자위대가 소유한 전파도청시설이었다. 무슨 목적으로 한국 국방부를 노리고 일본 자위대를 노리는 것일까.
어쩌면 두사람이란 뜻도 있는지 모른다.
"혹시 두사람 아냐? 하나는 진짜고,하나는 가짜 아냐?"
윤춘해가 끼어 들었다.
"그럴 가능성이 있겠지요. 다른 사람이 김준의 아이디를 사용 안한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그럼 문제가 더 커진다는 건데. 김준의 정체를 알고 그의 아이디를 마음대로 사용하는 해커라면 김준보다 뛰어나다는 뜻이 아니오?"
"글쎄요. 거기까지는..."
전산요원이 말했다.
"이건 다른 각도입니다만. 트로이목마(위장 파일)를 사용하면 한사람이 동시에 양쪽 컴퓨터에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시한폭탄을 걸어 논다는 뜻인가?"
"그런 셈입니다. 비디오의 예약녹화처럼,시간을 정해놓고 아이디가 자동으로 인덱스에 걸리게금 하는 잔기술이 있습니다. 물론 전문가나 할수 있습니다만..."
"그럼 그 가능성도 찾아봐. 그런데 가나기원에서는 아직 연락 없었나?"
"있었습니다만. 마에다는 지금까지 귀가를 하지 않았답니다."
"이상운 그 자식,또 그 잘난 전봇대 자랑하려고 터키탕에 간 거 아냐? 그 자식 당장 호출하지 못하겠나? 앙?"
광섭은 마음속에서 알 수 없는 동요가 일어났다. 하사 마에다가 복잡하게 관련된 거 같은데 어제 오전부터 오리무중이었다. 윤춘해가 뽑아온 디스켓에 마에다의 지문이 있는 이상 그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혹시 방위청에서 마에다를 뒤로 빼돌린 것이 아닐까.
다시 이마가 후끈 달아올랐다. 그렇다면 일본 자위대 청년장교단이 관련된다는 이야기다. 이쯤 되면 일본 극우파까지 사정거리가 된다. 진광섭은 식은 땀을 흘렸다.
아무래도 정밀한 함정이 입을 벌리고 있는것 같았다.
광섭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임소봉을 호출했다. 임소봉과 통화를 끝낸 뒤 이번에는 윤춘해를 불렀다.
"윤형이 한번 더 수고해야겠소. 하사 마에다의 가족관계를 파악한 뒤,다른 각도로 수배를 해 보시오. 적어도 11시까지는 끝내 주어야겠소만."
"노력해 보겠소. 하지만 별 기대는 하지 마시오."
그렇게 말한 뒤 춘해는 서둘러 손목시계를 보았다. 7시 20분. 11시까지는 4시간 정도 여유가 있다. 그 4시간 안에 하사 마에다를 잡으라니 이건 엿먹으라는 소리다.
춘해는 손수건을 꺼내 잔뜩 부어있는 입가를 문지르며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런 윤춘해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광섭은 몸을 돌려 전산실 왼쪽 벽에 있는 정수기를 향해 걸어갔다. 종이컵에 물이 가득 찼다. 차가웠다.
역시 김준의 불규칙적인 움직임이 불안했다. 놈이 한국과 일본 방위청 컴퓨터를 상대로 동시에 농간을 부리는 것은 아무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았다. 매우 불길한 일이었다. 어쩌면 북한 측 컴퓨터에도 접근을 했는지 모른다.
진광섭이 종이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나쓰에가 앉아있는 사무실로 발을 옮길 무렵이었다. 아까부터 평양정보센터와 씨름을 하던 C조 전산요원중 한명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과장님! 북한 쪽도 이상한데요?"
"뭐야?"
"방금 평양정보센터 중앙 시스템을 잡아 보았는데요. 그쪽에도 동급해커가 놀다 간 흔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있는 거 같습니다!"
"그럴리가 있나!!"
광섭은 C조 요원이 앉아있는 책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양정보센터 컴퓨터에 기록된 인텍스파일이 그의 눈앞에서 빠른 속도로 스크롤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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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물끄러미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나디아는 20평 남짓한 객실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는 다리는 하이힐의 굽을 이기지 못하는지 묘하게 흔들렸다. 10여분 정도 그렇게 말이 없더니 나디아는 소파로 걸어가 털썩 앉았다.
"오랜만에 만나니 잠깐 어색했던거 같군요."
"지난 겨울 이후로는 처음인것 같군. 마지막은 바에서 만난 걸로 아는데."
준은 슬며시 권총을 허리 뒤 벨트 안에 감추었다. 나디아는 보지 못했다.
"이 호텔이었죠. 3번...아니 4번 정도 만났던가요."
"요즘은 어때? 아직도 바에 출근하나?"
준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로 걸어갔다. 나디아는 준의 움직임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왜 나를 부르지 않았어요? 어젯밤은 술 마실 기분이 아니었나 보죠?"
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노트북이 그의 등뒤에서 윙윙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친구가 비지니스 파크에 없더군. 사실 나디아를 만날 시간이 없었지만."
"그 분은 이곳을 떠났어요. 본국으로 돌아가 무역업무를 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럼 어떻게 내가 오사카에 온 것을 안 거지? 바텐더가 알려 주었나?"
"이번에는 아니에요."
"비지니스 파크에 있는 오피스텔은?"
"짐을 옮겼어요."
준은 나디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는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있을거야. 아침식사를 안했으면 같이 한큐에 가볼까?"
"그럴 시간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준은 망치로 얻어 맞은 듯 나디아를 보았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나디아는 차갑게 얼굴을 찡그렸다.
"저 제일그룹 일본지사에서 보내서 왔어요. 이틀 전부터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라고?"
"한현희라는 분이 메시지를 보내왔더군요."
준은 둔기에라도 얻어맞은 듯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나디아가 제일그룹이 포섭한 현지 스파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던 것이다.
나디아는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기 술집 여자들은 대개 각국 스파이로 포섭되는 경우가 많아요. 그리고 저는 바 여자가 아닙니다. 처음에 교육받기를 술집 여자로 교육을 받은 거지요.
그것보다는 우선 식사를 하죠. 사실 저 역시 배가 고프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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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동해에서 이동해오는 먹구름 대가 지나가면서 비를 뿌리고 있었다.
고종수는 이날 아침도 일찍 출근하자마자 정보팀 자신의 의자에 앉아 인터넷에 접속을 했다. 메시지가 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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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Sun 24 March 1996 04:56:17
From: 'wolf' <wolf@sexygirl.co.jp>
To: jsko@jeil.co.kr
Subject: letter

현 상황을 빠른 시간 내에 설명해 주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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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뭔지..
고종수는 울컥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이를 악 물었다. 종수는 마우스를 잡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런 뒤 <수녀가 울고 있다>라는 뜻을 가진 인터넷 용어 +<:-( 를 크릭했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감추어 진 편지가 떠 올랐다.
10초 간격을 두고 전자메일을 겹쳐보내는 수법은 김준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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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Sun 24 March 1996 04:56:27
From: 'wolf' <wolf@sexygirl.co.jp>
To: jsko@jeil.co.kr
Subject: letter

오늘 오후에 네덜란드로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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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수는 초록색 와이셔츠에 물기가 촉촉하게 젖은 상태에서 두번째 메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런 뒤 멜빵을 풀어 책상 서랍안에 넣고 머리 속을 정리했다.
한현희 남매와는 이틀째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한대리를 통해 준을 도와줄 만한 인물들 명단을 보내긴 했지만 이 전자메일을 보내올 때까지는 아직 접촉을 하지 않은 거 같았다. 불안했다. 한대리같이 여린 친구를 믿어야 했을까.
고종수는 모니터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튼튼한 체격을 가진 장년 두명이 사무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고종수는 급히 모니터 전원을 끄고 두 장년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기부 측에서 이틀전부터 파견한 기관원이었다.
"네덜란드로 간다는 메시지,옆방에서 보았소. 근데 그거 속임수 아니요?"
종수는 울컥 화가 나려는 것을 참았다.
"글쎄요. 그 친구 생각을 제가 알겠습니까."
"이러지 맙시다.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아요. 이젠 송환하는데 협조를 해 주시오."
"말하지 않았소? 난 그 친구 연락처를 알 수 없소. 그 친구가 무엇을 하는지 모른단 말이요."
갑자기 오른쪽에 서있는 키 큰 사내가 발길질을 해왔다.
"이 새끼. 이거 제정신 있는 거야? 너 지금 상황이 어떤지 알아? 전쟁이 일어난다 뭐한다 하는 그런 상황이란 말야!!"
고종수는 키 큰 사내를 올려다보다가,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앞으로 내 책상을 차려면 구두나 닦고 차시오."
이미 고종수는 젊잔은 무늬가 있는 트위드 재킷을 걸친 뒤 사내들 사이를 걸어 나오고 있었다. 두 사내는 종수가 나가는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키 작은 쪽이 불쑥 키 큰 사내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구두가 더러운 그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형. 지금 내 구두를 쳐다볼 때입니까? 아침에 연락 안 받았어요? 김준 그 자식이 어젯밤에도 국방부 컴퓨터에 들어왔다는 거 말이요."
"김준이 아니야. 우린 고종수만 밀착 감시하면 되."
구두가 깨끗한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한 뒤 고종수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그런 뒤 수첩을 꺼내 <멜빵> 이라는 단어를 썼다. 그 외에는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윽고 조사가 끝나자 그는 안기부 7과에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전자메일의 내용이 자세하게 보고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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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하루 사이에 각 통신망에서 사냥을 나오고 있었다.
한두명이 아니었다. 기술적으로 그물을 걸고 그녀가 걸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피시 밴에 뿌린 바이러스는 이미 제거된 후였다. 미나는 손가락을 신경질적으로 꺾었다. 화가 났다. 또 다시 그녀의 입에서 할머니의 음성이 흘러 나왔다.
"이꾸쯔가노 히토타치가 와타시다지오 센노오시타. 와다시와 막가사아노 가와다따. 지붕다치오 지세키사세,미즈카라노 진세이오 다메니시타.
(몇 놈이 우릴 세뇌시켰어. 맥아더와 손잡고 우릴 자책시켰고,내 인생을 망쳤지.)
미로,고노박가야로메! 니혼노 GNP와 아지아가크코크노 GNP오아와세타요리 삼바이모스른다. 니혼가 세까이이찌다. 신지라레루모노와 오사노 세스께 시카이나이...
(보라,멍청이들아. 일본 GNP는 아시아 각국의 GNP 전부를 합친 것의 3배에 달하고 있다. 일본은 최고다. 믿을 사람은 오사노 세스케 밖에 없다.)
니혼와 한세이스르리유우가나이. 와다시와 소우신지테이루..."
(일본은 반성할 이유가 없다. 난 당연히 그렇게 믿고 있다....)
미나는 잔뜩 열을 받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화가 났다. 키보드를 두들기다 말고 미나는 라이터를 던졌다. 팍,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서있는 차단스가 다시 흙더미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고노박가야로메...고노박가야로메...
미나는 머리카락을 미친 여자처럼 산발한 채 쉴새 없이 욕설을 퍼부었다.
누구를 향한 욕설인지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저 죄의식이었는지 모른다.
아니면 할머니의 의식이 그녀에게 이미 옮겨갔는지도 모른다.
후꾸오 미나는 그렇게 울었다. 오빠 하야시를 찾고 싶었다. 이 사랑은 오빠에 의해 시작된 것이었으니까 오빠가 해결해 주어야 한다고 었다. 만약 그가 거절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를 죽이는 수 밖에 없었다.
미나는 불끈 고개를 처 들었다. 우선은 하야시가 숨어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야 했다. 미나는 풍만한 몸을 비틀거리며 다락방으로 올라 갔다.
라면박스. 기타....작은 냉장고...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쓰레기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니고 있었다. 미나는 다락방 내부를 빠른 속도로 훑어 보았다. 그러다가 냉장고 위에 구겨져 버려져 있는 프린팅 용지를 발견했다. 미나는 서둘러 프린팅 용지를 펴 보았다.

하야시는 귀를 쫑긋했다. 쥐처럼 그의 눈알이 반짝였다. 소화불량에 걸린 거 같았다. 어제 오전부터 먹어온 밀가루 음식이 몸에 맞지 않았다. 더구나 바닥에 물기가 고이면서 지하실은 습기가 가득차 오고 있었다.
하야시는 어제 하루종일 미나가 걸어 놓은 덧을 피해 니프티서브 통신망안을 돌아 다녔다. 미나는 교묘하게 하야시가 이용하는 전화선을 알아내 그것에다가 역추적 소프트웨어를 걸어놓고 있었다. 이때문에 하야시는 또 다시 다른 핸드폰 하나를 해킹해야만 했다. 그런 뒤 니프티서브사 자료실을 돌아다니며 지하철 철로망에 관한 자료를 뒤지기 시작했는데,불현듯 작년에 발생한 진리교 사건이 떠올랐다. 지하철 전복이 불가능하다면 화학가스로 하사 마에다를 공격하는 것은 어떨까. 이 때문에 하야시는 이날 새벽부터 작업방향을 전향했다. 우선은 수십종의 서적을 다운 받기 시작했다. 법의학,생화학,추리소설,만화. 그리고 매춘과 관계된 책자였다.
매춘과 관계된 책자를 다운 받을때는 다시 미나가 뿌려 놓은 메시지가 하야시의 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야 하야시는 그 이유를 알았다. 미나가 하야시의 취미를 알고 <매춘 파일>을 다운 받는 사람들을 하나 하나 추적하는것이 분명했다. 집요한 추적이었다.
"미나. 내가 미운가..."
하야시는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런 뒤 철문에 귀를 기울였다. 항상 들려오던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지 않고,얇게 비를 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미나가 다락방을 내려와 자기 방으로 걸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꽝꽝거리는 발소리였다.
하야시는 계단에서 내려온 뒤 책상 위에 놓여있는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제야 하야시는 또 다른 날의 아침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밖으로 나가보고 싶었다. 시체가 썩어가는 냄새가 풍겨오는데...
하야시는 모니터를 응시하다가,얼굴을 발작적으로 찡그렸다.
하사 마에다.
그를 살해하지 못한다면 난 이 지하실에서 나가지 않을 것이다.
하야시는 다시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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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성 공원안은 노란 개나리꽃 유니폼을 입은 유치원 원아들이 이슬비를 피해 뛰어다니고 있었다. 준과 나디아는 한큐 3번가에서 아침을 먹은 뒤 이곳으로 왔다. 아까부터 나디아는 현상황을 김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빗방울이 미세하게 걸려 있었다.
"한국은 지금 준 전시상태에요. 새벽판 마이니찌 신문 읽지 않았어요? 심상치 않은 조짐이 있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요. 이는 3일전부터 보이는 거라는 군요,"
"지사 상황은 어떤거 같소?"
"제일그룹 도쿄지사는 엉망이에요. 한현희는 그저께 밤부터 행방불명입니다.
나에게 연락을 한 뒤 3시간 후에 사라진 거 같아요. 그리고 지금 제일지사는 안기부쪽이 장악했다는 거 같아요. 저도 그 이상 알아내지 못했어요."
"한현희가 나에게 알려주라는 메모는 없었소?"
"세가지였어요. 첫째 괌에서 미 8군 항공모함이 이쪽으로 이동중이라고 하는군요. 둘째. 이러한 미 8군 병력이 어느쪽에 투입이 될지 모른다고 합니다.
세째. 북한 컴퓨터에도 해커가 준동을 한다고 해요. 그쪽 컴퓨터에도 당신 아이디가 이용되고 있다고 했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언제 연락을 받았다고 했소? 정확하게 알려 주겠소?"
"이틀전 오후였어요. 어떻게 내 전화를 알았는지 전화를 걸어왔어요. 그런 뒤 팩스를 날려 왔었죠."
"당신이 알아낸 정보는 없소?"
"글쎄요. 당신이 오사카에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을 뿐이에요. 하기야 이 정보를 전달하는 조건으로 난 50만엔을 이미 받았어요. 돈은 챙겼고,이젠 저도 할 일이 없는 거군요."
"내가 배팅을 높인다면?"
"내가 가진 정보를 사겠다는 건가요?"
"그런 의미가 아니요. 나를 도와달라는 뜻이요."
"좋아요. 그럼 배팅을 한번 걸어보시죠."
"두배..."
"마음에 안드는 군요. 하지만 계약을 하지요."
"고맙소. 이제 당신이 조사한 것을 알려주시오. 아니 감추고 있는 것을..."
"눈치가 빠르군요."
"난 눈치로는 먹고 살 능력이 없는 남자요."
"한현희씨가 알려준 메시지로는 상황을 정확히 알수 없었어요. 그래서 이틀동안 개인적으로 조사를 해 보았어요. 첫쩨. 제가 알기로 괌에서 이동중인 미 8군 함대는 이지스급이에요. 그러니까 막대한 화력이라는 거죠. 이 화력이 움직이는 이유를 나름대로 조사해 보았어요. 공식적으론 어제 밤에 미 국무부쪽에서 브리핑이 있었지요. 10일전에 끝났어야 할 일미연합훈련을 연장한다는 발표였지만 그것만은 아닌거 같아요. 내가 보기엔 일종의 참전 의사로 보였어요. 그러니까 극동사태를 미리 준비한다는 거에요. 즉 곧 전쟁이 발발한다는 생각인거 같았어요.
둘째. 한현희씨는 미 8군이 어느쪽에 투입되는지 모른다고 했지요. 저는 이게 무슨 말인가 궁금했어요. 그래서 도서관을 들어가 뒤져보았지요. 이유는 간단하더군요. 남북한이 개전했을때 미국의 입장이 갈라지는 거 같았어요. 무슨 말이냐면 미 8군은 현재 북조선이 일본을 공격할 가능성을 염두한다는 뜻이지요. 이걸 한현희씨가 미리 알아낸 거 같았어요. 똑똑한 여자지요. 해커가 북조선 미사일을 한국에만 날리는 것이 아니라,일본에다가도 여차하면 날린다고 계산한 거에요. 그 이유를 알수 없지만 한현희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았어요."
셋째. 북조선 컴퓨터에도 당신 아이디가 남아 있다고 했는데,이것은 제가 조사를 할수 없었어요. 제 전공이 국제정치학이라는 것을 알아주기 바래요."
준은 물끄러미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을 잘하는 여자를 술집 여자라고 오해했던 자기 자신이 이상했다. 그땐 아마도 머리가 돌았던 게야.
"내 아이디가 그런 방향으로 이용된다고는 생각 못했는데?"
"확실해요. 그 해커는 당신 아이디를 빌려 공작을 하고 있어요. 그가 곤란을 느끼는 것은 어느쪽 미사일을 먼저 발사시켜서 이 단추전쟁을 시작하는 거냐는 것이죠."
준은 나디아를 보았다. 어디서 정보를 얻어 왔을까. 준은 씁쓰레하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결국 미치광이 해커 때문에 소동이 벌어지고 있는거군."
"그래요. 하지만 이해할수 없어요. 무얼 잘못했길래 당신 아이디가 이용되는 것이죠?"
"호텔로 가 봅시다. 내가 그들의 비밀을 알고 있기 때문이오."
준은 택시를 잡았다. 나디아가 먼저 택시에 올라탔다. 이슬비가 택시 차창을 가볍게 두들겼다. 나디아는 창 밖을 멍하니 내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전에 한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궁금한 거라니?"
"그날밤 저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요?"
"모르겠는데. 난 기억이 나지 않소."
"술집 여자를 싫어하나요?"
"솔직히 가슴이 작았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소. 탁구공 만했거든."
나디아는 얼굴이 빨개진 채 준을 응시했다. 준은 나디아를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친구가 배팅을 걸었는데 난 참는 쪽에 걸었던 거 같소."
"난 당신을 흥분시킨 뒤 거절하는 쪽으로 배팅을 걸었어요."
"그럼 어떻게 된 거요? 난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모르겠는데."
"당신은 종마처럼 덤벼 들었어요. 술에 잔뜩 취한 상태라 불현듯 겁이 나더군요.
그래서 욕실에 들어가서 수면제를 탔어요. 당신은 곧바로 기절했지요."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우울한 눈은 나디아를 바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디아의 작은 가슴으로 이동을 했다. 새근새근 숨을 쉬고 있다.
"결국 당신은 돈을 받아 냈나? 나를 잔뜩 흥분시킨 뒤 그냥 나갔을 테니까."
"아니에요. 당신이 그 친구에게 돈을 주는 바람에 난 돈을 받아내지 못했어요. 그 친구는 아직도 내가 당신과 잠을 잔걸로 알고 있어요."
"그랬구만."
준은 비쩍 웃으며 다시 나디아를 바라보았다.
"어디 출신이요? 아무래도 한국계인거 같은데?"
나디아는 짧게 대답했다.
"부모님이 북조선 출신이에요. 조총련계."
준은 왼쪽 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북한은 공기가 좋은 건가?"
그러자 나디아의 음성이 준의 귀에 들려왔다.
"물이 좋아요. 하지만...남조선도 물이 좋은가 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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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연한 봄이었다. 이슬비가 축축하게 내리는 가운데 윤춘해와 이상운을 태운 랜드 크루즈 한대가 빠른 속도로 와세다 대학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춘해형? 사실이요? 북한에서 군대를 전방 배치한다는 거 말이요."
이상운은 잔득 피로한 얼굴로 운전대를 잡고 있는 춘해에게 물었다.
"몰라. 이거 그 자식 때문에 나라 꼴이 영 말이 아니란 말야."
"마에다를 잡아들인다고 되겠소? 한놈 잡는 다고 이거..."
"본국만 문제가 있는게 아닌거 같아. 이쪽 방위청도 지금 비상사태야. 이거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마에다 이놈 잡으면 당장 요절을 내서라도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내야겠어..."
랜드 크루저는 오전 11시 정각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서점 앞에 멈추었다.
윤춘해와 이상운,황영달은 서둘러 랜드 크루저에서 뛰어 내렸다. 그런 뒤 서점 문을 꽝꽝 두들겼다.
같은 시각. 하사 마에다를 태운 르노 에스파스 밴은 고속도로를 타고 도쿄 외각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하사 마에다는 에스파스의 뒤좌석에 앉아 있었고, 에스파스 운전석에는 단발머리의 여군이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육상자위대 중부방면대 제1교육단 소속의 호리시마 란조 2위였다.
란조 2위가 마에다를 찾아 온것은 오전 9시경이었다.
"란조 2위. 나보고 에스파스 안에서 작업을 하란 말인가...?"
마에다는 봉고차처럼 생긴 에스파스 밴에 올라타면서 군인 정신을 되찾았다. 불쑥 화가 났다.
"별반 지시입니다. 한국측에서 1위님을 추적한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런가? 거기 뿐만 아니겠지."
"그렇습니다. 내각정보국도 곧 1위님을 추적해 올 겁니다."
마에다는 싸늘하게 식은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는 란조 2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란조 2위와는 3년만에 대면하는 거였다. 별반 전산팀이 한참 주가를 높이고 있을 때 란조 2위는 그의 파트너였다. 그런 그녀가 3년만에 갑자기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마에다는 다시 에스파스 안을 둘러보았다. 뒷좌석에는 휴대용 위성송수신망을 비롯해 중형 컴퓨터 시스템이 거미줄처럼 들어차 있다. 우울했다. 이제 여기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마에다는 느낄 수 있었다. 마에다가 죽지 않는다면 지하철이 그를 죽일 것이고,그렇지 않는다면 지금 운전하고 있는 여자가 그를 죽일 것이다.
마에다는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를 중형컴퓨터와 연결했다.

그래.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다시 발발하는 것은 하사 마에다가 진정으로 바랬던---
메이저리그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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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는 김준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그의 가느다란 손은 DAT 워커맨의 밧데리 케이스를 열어 젖힌 뒤 무엇인가를 그 안에서 뽑아내고 있었다.
휴대용 하드디스크에서 볼 수 있는 케이블선이었다.
"그걸 컴퓨터에 연결한다는 것인가요?"
나디아는 어안벙벙이 된 얼굴로 준에게 물었다.
"그렇소. DAT 백업 드라이브요. 유닉스를 사용하는 프로그래머들은 대개 DAT 테입을 백업 드라이브로 사용하오. 일반 광자기 디스켓보다 작으면서 용량도 무시 못하니까 말이요."
준은 워커맨에서 나온 케이블을 노트북 컴퓨터 뒤에 있는 프린터 포트에 연결했다. 그런 다음에 노트북 케이스 바닥 부분을 손으로 열었다. 조그만 상자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DAT 녹음테입이 들어 있었다.
준은 작고 정밀하게 생긴 DAT 테입을 워커맨에 삽입한 뒤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노트북 화면으로 문자가 스크롤되어 올라갔다.
"믿을 수가 없군요. 이건 정말..."
"백과사전 한권 분량의 문건이요. 방위청 일급 비밀 중 몇가지를 필요에 의해 백업을 받아 놓았소. 1년 전 일입니다만."
"일미 방위협력 가이드라인이군요."
"일미 안보합동위원회는 95년도 중반까지 회의를 한 뒤 해체되었소. 그 다음에 생긴 게 일미 안보강화협의였소. 지금 이 서류는 그들이 남긴 조약중 일부요."
그렇게 말을 이으면서 준은 계속 키보드를 두들겨 나갔다. 모호하고,판독이 어려울거 같은 서류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은밀하게 화면 위로 올라갔다.
그러다가 초록색 문건에서 화면은 갑자기 정지했다.

>> 한반도 사태가 일본으로 파급되는 경우
>> 극동사태에 대비하는 일미 방위체계는
>> 연합전쟁지도회의의 조정하에
>> 핵에 의한 자위 책임을 갖는다.

"핵을......"
"일본이 핵폭탄을 공식적으로 소유하겠다는 뜻이요."
나디아는 준을 바라보았다. 한참 북조선 핵 문제가 시끄러웠던 95년도에도 이런 이야기를 정식으로 요구하는 일본인은 없었다. 그런데 이미 일본과 미국간에는 내부적으로 합의가 되었다는 것일까.
"이미 결정이 난 문건인가요?"
"결정 난 게 아니요."
"왜죠?"
"이건 가짜 서류요. 누군가가 문장 여러군데를 수정을 했소."
"설마..."
준은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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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다카大高 회의 유보留保 ------------ 방위청 극비極秘
--- 이 회의록은 이시바시 고이치 청장과 청년 자위대원간의 신년 만남에서 이어진다.

>> 청장 : 일본은 진정 핵을 가질 수 있겠는가?
>> 대원 : 질문이 이상하군요. 우린 핵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 청장 : 제군들. 난 핵을 가지고 있지 않다네. 내 아내도 그런 건 없지.
>> 대원 : 하하... 대단한 위트이십니다. 고이치 청장님.
>> 청장 : 실상 명문이 있어야 해. 옆에서 창으로 찌르는 사람이 많으니까.
>> 대원 : 청장님. 이건 제 의견이 아닌 별반 내에서 논의중인 내용입니다.
>> 청장 : 어디 말해 보게.
>> 대원 : 1..2년후면 북조선과 수교를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전에 한반도에다 위기 조장을 하자는 내용입니다.
>> 청장 : 그걸로 핵을 소유할 명분이 되겠는가?
>> 대원 : 별반내에서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 청장 : 그렇다면 지금 자세하게 논의를 해 보지. 그럼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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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의 두 눈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믿어지지 않는 군요. 이건 지금 벌어지는 상황하고 똑같군요."
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렇소. 중요한 것은 일미 방위조약이 한국 유사사태에서 지휘력을 박탈당하면 곧바로 가이드라인 체제로 돌입하게 되는데,극동지역 모두를 포기해서라도 일본만은 사수하겠다는 미국측의 이 전략도 핵 소유권까지는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았소. 이때문에 별반은 아주 복잡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소."
"그렇군요. 1995년을 기해서 극동지역은 어느 정도 긴장감이 해소되었지요. 이 기회에 일본은 자위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활용하고자 했었지만,그것은 뜻대로 할수가 없었지요. 일본 우파 쪽은 핵을 소유할 명분을 찾고자 난리를 치고 있고."
"그렇소."
"그래서 자위대 별반이 비밀리에 움직이고 있었군요."
"그건 예전부터요."
"정말 별반 대원중에서 한반도 전쟁을 원하는 미친 놈이 있을까요?"
그렇게 물으며 나디아는 김준을 응시했다. 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도박이요. 가장 빠른 시간안에 일본이 핵무장을 할수 있다는 도박...자위대를 더 이상 위축시키지 않겠다는 도박..."
다시 나디아는 시선을 돌려 액정화면을 바라보았다.

== 핵에 의한 자위 책임을 갖는다. ==

"누구에 의해 수정된 것이죠? 단언할수 있어요?"
"단언할 수 있소. 하사 마에다라는 자위대 별반 요원이 했을 것이오만."
"그것으로는 부족하군요."
준은 비쩍 웃었다.
"서류가 수정되기 전부터 난 서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소. 95년 4월 27일부터 우연히 접근중이었으니까. 서류가 바뀐 것은 6월 29일였소. 미 펜타곤에 보관된 문건 내용 역시 감쪽같이 새롭게 바뀌어 있었소. 그로부터 3일 뒤에 위 서류를 작성했던 양국 책임자는 하루 간격으로 사망했소. 하나는 교통사고 였고,다른 한쪽은 등산중에 낙반사했소. 우연이라고는 할수가 없었소. 서류 내용을 바꾼 자위대 별반 요원들이 조직적으로 그들을 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소."
"당신 말고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본사 정보팀의 고종수 부장이요."
"왜 막을 생각을 안했죠? 충분히 막을 수 있었잖아요?"
"나로써는 막을 방법이 없었소. 단지 언제 시작되느냐 그것을 기다렸을 뿐이요."
"그럼 이제부터는?"
"당연히 막아야지. 자위대 쓰레기 쯤이야 그들이 슈퍼컴퓨터 10대로 나를 공격 해와도 난 눈썹 하나 끄덕하지 않소."
나디아는 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축축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여자들은 국가의 장래를 양어깨에 짊어지고 있는...키 큰 남자를 좋아하죠..."
준은 비쩍 미소를 지어보이더니,나디아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벽시계를 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새벽에 고종수 부장에게 일본을 떠난다고 전자메일을 보냈소. 지금 곧바로 공항으로 갈 생각인데 어떻게 하겠소? 나를 계속 도와줄 생각이요?"
"어디로 갈 생각인데요?"
"네덜란드요."
나디아는 호텔 창 밖을 올려다보았다.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가 개어 가는 조짐이다.
"막아보겠다면서 네덜란드로 도망갈 궁리를 하다니...일본 정보팀을 네덜란드로 유인하겠다는 뜻이 되겠군요."
"그렇소. 난 일본에 머무를 수가 없소. 양쪽 에서 나를 찾고 있소. 안전기획부야 편법을 사용하면 오해를 풀리게 할수 있겠지만,자위대 별반이나 수상정보국은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오. 아마 죽이려 들겠지."
"좋아요. 당신을 도울수 있다면 도와 보도록 하지요. 그럼 보수를 다시 책정해 볼까요?"
"나디아..."
준은 나디아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말을 이었다.
"난 돈이 없소."
나디아는 고개를 들었다. 두 눈이 촉촉하게 반짝였다.
"왜 돈이 없는 거죠? 은행해킹은 당신 같은 남자에게는 간단한 일일텐데."
"난 남의 돈을 가로채지 않소."
"정보는 공유하는 것과 돈을 공유하는 것은 다른 의미인가요?"
"그렇게 말하니...당신이 별안간 지적인 여성으로 보이는 군."
"그럼 옷을 벗어요."
준은 얼굴이 후끈거렸다. 나디아가 벌떡 일어나 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는 갈대처럼 휘청이면서 오데코 향수를 풍겨냈다.
"난 와이셔츠 차림이요. 오히려 당신의 모피코트가 더 무겁게 보이는 군."
"여자가 먼저 벗기를 원하나요?"
"난 로맨스를 바라는 남자임을 밝히고 싶소."
"미 투."
"사실 비행기 표를 아직 끊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정확한거 같소."
"비행기 표 끊지 않았어요?"
"카운트에 들어갔소."
"빈 자리가 있으면 올라탄다는 뜻이군요."
"그렇소."
"이봐요. 김준씨. 작년 이후로 나도 빈 자리에요. 이렇게 말하는데도,아직도 내가 먼저 옷을 벗기를 바라나요?"
준은 아직도 내가 먼저 옷을 벗기를 바라나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껴안았다.
창 밖으로 보잉 747이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위로 나디아의 스타킹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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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쳤습니다!"
곤베이는 간사이 공항에 파견한 요원이 보고를 해오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간사이 공항에다만 지방 경찰서 지원을 받아 총 40명을 풀어놓은 상태였다. 믿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야? 몽타쥬,인력 부족한게 있었나? 그런데도 놈을 놓쳤다는게 말이 되나?"
"저희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방금 이륙했습니다. 네덜란드행 보잉 747입니다. 귀신입니다! 좌석이 꽈 차있었는데도 귀신같이 예약 취소된 좌석을 집어타고 일본을 탈출했습니다!"
"몇시야? 경유지는?"
"7시 40분 홍콩 경유입니다. 그 다음은 네덜란드까지 논스톱입니다!"
"알았어. 너희들은 빨리 귀대한다. 알겠나?"
속이 시원한 건지 씁쓸한 건지 곤베이는 자신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네덜란드에 있다 해도 인터넷을 경유해 다시 치고 들어올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 모른다. 시나노 곤베이는 홍콩 지부로 곧장 전화를 걸었다. 곧바로 40명의 정보요원이 긴급 소집되었다.
홍콩에서는 김준을 잡아야 했다.
이 지겨운 레이스 끝장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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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상공은 빗방울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일본쪽 기상과는 반대 현상이다.
먹구름이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이동하면서 부터 이번에는 한국이 폭우에 휩싸이고 있었다. 때아닌 봄 장마였다.
순례와 정숙이는 비를 맞으며 귤나무 단지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다. 순례는 바닥에 떨어진 귤을 집어들었다. 지난 겨울에는 한창이었는데 봄이 되면서 귤 농장은 을씨년스럽게 변해갔다. 순례는 귤을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쪽 하늘에서 날카롭게 F 16 전투기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한대도 아니고 다섯대. 아주 낮게 하늘을 날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 보잉 747 비행기가 날아오고 있었다. 순례와 정숙은 의아한 얼굴로 뒤따라 날아오는 비행기를 보았다. 마치 고비에 매인 소처럼 보잉 747은 다섯대의 전투기에 포위되어 제주공항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순례가 조금만 의젓했다면 그 비행기는 일본에서 홍콩으로 날아가다가 한국공군에 의해 나포되는 비행기라는 것을 알았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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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는 다시 김준의 가슴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디아가 위에 있었다. 나디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젖가슴이 부드럽게 출렁거렸다.
김준의 노트북은 아까부터 시끄럽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디아는 알고 있었다.
김준이 항공기 예약망을 자동실행 파일로 해킹 한뒤 747 보잉기로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이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디아가 다시 허리를 숙이자 그녀의 웨이브된 머리카락이 준의 얼굴로 부드럽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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뫼비우스 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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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잉 747기는 녹음을 뚫고 제주공항에 착륙했다.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곧바로 4대의 페트롤카와 한국산 4WD 자동차가 보잉 747의 앞문으로 접근해 왔고,동체 우측으로는 서치라이트를 높게 매단 조명차가 접근해오고 있었다. 그 뒤로 군수송 차량이 따라 붙고 있었다.
네덜란드인 기장 칼은 당황한 얼굴 빛이었다. 처음에는 국제항공협회에 제소를 해서라도 비행기를 강제 착륙시키는 이유를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군수송차량에서 제주방위국 소속의 완전 무장 병사들이 속속히 뛰어 내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겁이 났다. 공항 상공에는 다섯 대의 F-16 전투기가 계속 선회를 하고 있었기에 어쩐지 살벌한 기분까지 들었다.
기장이 앞문으로 걸어나오자 빗방울이 거칠게 그의 하얀 유니폼에 타닥타닥 떨어졌다. 그의 왼쪽 어깨로 KLM 마크가 선명하게 보였다.
"왓 더 뻑 이즈 고잉 온. 왓아 난센스!"
"프리즈 셧업! 위아 서칭포 어 테러리스트."
김달영 안기부 차장은 기장의 말을 재빨리 자르고 기내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뒤따라 갈색 양복을 입은 안기부 기관원들이 쫓아갔다.
"A-9번 좌석. 비지니스클래스야! 김준을 잡아!!"
김달영의 음성이 기내 안에서 울려 퍼지자 기관원 셋은 서둘러 비지니스 클래스로 뛰어갔다. 빠른 몸놀림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김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A-9번 좌석은 오른쪽 창가의 날개 앞 편에 있었는데,웬 시커먼 흑인이 앉아 있었다.
"차장님 이게 뭡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요원 셋은 기가 막힌 듯 붉은 색 양복을 입은 흑인을 응시했다. 서둘러 스튜어디스가 승객 명단을 들고 김달영 안기부 차장을 향해 뛰어 왔다. 달영은 승객명단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입술이 떨렸다.
"뭔가 이거는...승객명단에는 분명 김준 이름이 올라가 있지 않나? 그런데 이놈 어디에 있는 거야?..."
믿어지지 않았다. 차가운 한기가 김달영의 목덜미를 타고 넘어왔다. 달영은 서둘러 기내 안을 훑었다. 몇몇 승객이 겁먹은 얼굴로 그들 일행을 바라보자, 달영은 비로소 첩보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김준에게 속았던 것이었다. 놈은 항공기 예약체계에 침투한 뒤 이 비행기에 올라 탄 것처럼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울화통이 터졌다.
"진광섭이 자네. 이게 뭔가,이게 무슨 창피한 일인가?"
김달영은 핸드폰을 입을 대고 분노를 억누르고 말했다.
"이 친구야,자네 때문에 나 후두암 또 재발하겠어. 그 새낀 아직 일본에 있는거 같아. 그러니까 풍선을 날려서 당장 놈을 찾아봐. 알겠나?"
사상 최악의 미스였다. 현 국방부 사태에 밋밋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안기부 사상 최고의 총력전을 펼친 것인데 놈에게 보기 좋게 속아넘어간 것이다.
진광섭은 김달영 차장의 전화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우스운 건지 아니면 자신이 한심한 건지.
전산요원 7명은 겁을 잔뜩 먹고 진광섭을 응시했다. 잘못이 있었다면 전산팀에 있었다. 전산팀은 진광섭의 지시를 따라 꼬박 세시간 동안 일본 항공 망을 뒤지다가 예약취소된 빈자리를 잡아 탄 김준의 이름을 발견했던 것인데,이건 오히려 김준에게 속았던 것이다.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광섭은 다시 쓴 웃음을 지으며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백설처럼 하얀 그의 옆머리가 이상하게 흔들렸다.
"사뇨 나쓰에와 사즈메를 이리 당장 끌고 와. 아니다...내가 가지."
광섭은 걸어가다 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자 다시 기운을 내보자. 12시간 안에 놈을 송환해 보는 거야."
진광섭이 예상외로 나긋나긋하게 말하자 윤춘해와 요원 20여명은 영문을 모르고 진광섭을 응시했다. 그러자 광섭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사무실안을 갈랐다.
"아니,이 시끼들 뭐하나? 지금 당장 풍선 띄우지 못하겠나? 앙?"
풍선을 띄우자는 이 말. 말하자면 인공위성을 포함해 동원할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해 총력전을 펼치자는 뜻이다. 그만큼 상황이 악화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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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미나는 크게 숨을 몰아 쉬었다. 다시 그녀의 눈동자가 불안스럽게 움직였는데,그 눈동자에서는 푸른 광채가 쇠를 녹일 듯 강하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매서웠다.
미나가 다락방에서 발견한 A4 프린팅 용지에는 모두 3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미나가 아는 사람은 없었다.

후루겔스 게이꼬
하사 마에다
김준

미나는 오빠 하야시가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는지 줄곧 지켜보았기 때문에 첫눈에 이들이 오빠의 사냥감이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더구나 후루겔스 게이꼬라는 여자...
그녀의 죽음은 며칠전 TV를 통해 이미 접하고 있었다.
미나는 키보드를 두들겼다.
추추추...
소리가 들리더니 김준의 프로필이 적힌 <외국인등록증명서>가 화면에 떠올랐다.
미나는 불안한 눈으로 김준의 상륙허가일上陸許可日과 체류자격滯留資格 등을 빠르게 훑어 보았다. 동시에 우측 윈도우 화면에 떠있는 마에다에 대한 기록도 머릿속에 외우기 시작했다. 마에다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모두 9명에 달했기에 전부를 외울수는 없었다. 미나는 김준에 대한 자료를 읽다가 다시 오른쪽 화면으로 눈동자를 옮겼다. 하사 마에다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중 8번째 인물...
어쩐지 어디선가 본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직업도 평범하지 않았다.

>> 8. 하사 마에다 육상자위대 1위. 현 방위청 파견 전산 요원

미나는 거실로 걸어 나왔다. 사흘째 거실은 정리되지 않고 난장판으로 어지럽혀 있었다. 미나는 거실을 지나 몽유병에라도 걸린 듯 신주쿠 거리로 나왔다.
얇게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로 도시의 석양이 황량하게 펼쳐졌다. 미나는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긴뒤 휘청이듯 신주쿠 거리를 걸어갔다. 펑크족 사내들이 그녀의 풍만한 가슴을 응시했다. 미나는 우측 골목으로 걸어갔다.
다시 우측 길로 접어들자 골목 안쪽으로 하숙집 가나기원이 보였다. 미나는 걸음을 멈춘 뒤 가나기원의 울창한 나무를 올려다보다가 이번에는 좌측 빈 골목으로 걸어갔다. 왕복 2차선 도로 건너편에 있는 비디오 숍이 눈에 들어왔다.
미나의 몸유병은 거기서 깨어났다. 뿔테 안경을 쓴 스웨터 차림의 남자가 비디오 숍을 빠져 나와 가나기원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미나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미나는 당황스러운듯 입술을 묘하게 일그러뜨렸다. 갑자기 거리를 핥으며 세차게 역풍이 불어오자 그녀의 머리칼이 어깨쪽에서 하늘의 빈공간으로 스산하게 퍼져 올라갔다. 그러자,골목 안쪽에서 사내 하나가 제풀에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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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리는 울먹이듯 말을 하고 있었다.
"언니 나 결백해. 김짱하고 잠 안 잤다니까 그러내."
"그렇겠구나. 네 성미에 잠 안 잤을려구."
"히잉. 자면 머 안되나. 그게 뭐 언니 건가? 먼저 자는 게 임자지."
"그만 뚝. 잤다고 해도 난 안 믿으니까...그래 어디 다치지는 않았니?"
"다칠 뻔했어. 오다가 휴게소에서 도망치려고 하는데 세번이나 실패했쪄."
"세번이나? 넌 도대체 어떻게 되먹은 아이이기에 겁도 없는 거니?"
"두 남자가 나를 잡았는데 휴게소에서 뒤따라오는 자동차에다가 나를 인계 했어. 저 치."
나쓰에는 사유리가 가리키는 남자를 보았다. 눈이 작은 고영삼 요원이 출입문 앞에서 코를 킁킁거리다가 얼굴을 돌렸다.
"어휴. 저 남자가 다리를 만지잖아. 참을 수가 있어야지. 만지는 건 좋아. 하지만 저 얼굴로 더듬으니까 캡 기분 나쁘더라."
"농담 그만하구. 그런데 너 그 옷은 어디서 났니?"
징징 짜던 사유리. 금방 눈빛을 반짝인다.
"음냐. 언니도 눈이 제법 높네?...흐...이 옷은 말야. 마끼 준사이라는.... "
"저 아가씨인가?"
사유리는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진광섭이가 이상운과 함께 들어오면서 불쑥 말을 던지고 있었다.
"으...언니,저 독사는 누구야?"
사유리는 잔뜩 겁을 먹고 그렇게 말하다가 진광섭과 두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체온이 영하 10도로 내려가는 거 같았다.
진광섭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두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한쪽은 그저께부터 잡혀 있던 여자고,다른 한쪽은 앙증맞게 생겼는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아가씨는 삐삐를 김준에게 줬나?"
광섭의 선글라스가 사유리의 몸에 꽂히자 사유리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난 아가씨의 삐삐가 어디에 있냐고 물었다."
사유리는 뭐가 뭔지 도대체 알 수 없었다. 눈물부터 나왔지만 사유리는 간신히 겁이 나는 걸 참아냈다. 그런 뒤 흐느끼듯 말했다.
"흐엉...난 삐삐 같은 거 안 키워요..."
철썩----!!
소리가 들렸다.
진광섭의 손에 의해 사유리의 얼굴이 반 바퀴 회전을 했다. 곧바로 사유리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 흥분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손부터 나가는 것이 진광섭이었다.
광섭의 쇠소리같은 음성이 곧이어 들려왔다.
"인간은 네 종류가 있어. 첫째는 팔불출이고,둘째는 바보. 셋째는 백치이고 넷째는 정신이상자야. 너희들은 그 중 어느 부류의 속한다고 보나?"
두 여자는 겁을 먹고 대답을 하지 못했다. 광섭은 나쓰에에게 시선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들이 감춘 김준이란 사내는 이웃 나라의 국시를 위협하는 범죄자다.
그걸 모르는 걸 보니 너희들은 우선 바보라고 할수 있다. 더구나 그자와 같은 범죄자를 계속 옹호하는 것을 보니 너희들은 팔불출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신사답게 대했는데도 아직 내 정성을 모르는 것 같다. 이 점은 백치와 일맥상통한다. 이제 나로써는 간단한 제안을 할수 밖에 없다. 나한테 맞은 뒤 정신병자가 되고 싶나,아니면 맞지않는 선에서 정신을 차리겠나? 앙?"
두 여자는 황당하다는 듯 광섭을 올려다보았다. 뭐 저런 인간이 있나 싶었다. 그리고 잘못 본 게 아닌것 같았다. 광섭의 머리 위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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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긴 잠이었다. 준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5시 55분이었다.
나디아는 원목으로 된 작은 탁자 앞에 앉아 있었다. 준의 노트북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는 거 같았다.
준은 와이셔츠를 집어들고 나디아에게 걸어갔다. 석양 빛이 창을 통해 부챗살처럼 떨어졌다.
"컴퓨터를 다루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래저래 남들 하는 만큼 다루기는 해요."
"인터넷인가?"
"백악관 브리핑을 웹(WWW)으로 검색하고 있었어요."
"그런가?"
준은 나디아의 등 뒤로 다가섰다. 나디아의 손이 올라왔다.
"저 있죠...아까 괜찮았어요..."
나디아는 고개를 돌려 준을 올려다보았다.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기분이 좋았어요."

으...???

"아무래도 국방부로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거 같아요. 그쪽 사정을 먼저 파악하는 게 여러모로 상황판단에 도움이 될 거 같아요."
"좋은 생각이군."
"국방부에 접근해 보았어요?"
"아니 한번도 없어."
"그럼 길을 모르겠군요. 침투 경로..."
준은 슬쩍 웃으면서 나디아의 허리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나디아는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사이에 준이 의자에 앉아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곧바로 화면이 바뀌더니,무엇인가를 찾는 듯 복잡한 스크롤을 일으켰다.
"뭘 하는 거지요?"
"군수업자를 먼저 찾아내는 거야."
"군수업자라..."
"일종의 추측항법이라고 할 수 있어. 국방부로 직접 침투할 경로를 모르니까 우선은 국방부와 관련된 방위산업체를 찾아낸 뒤 접속을 시도하는 거야..."
"믿을수 없네요. 좀 엉터리로 보여요."
"엉터리도 가끔은 통하지. 하지만 사라사테 시스템이 뚫린 뒤 국방부가 뚫린것이 감히 엉터리라고 할수 있겠나?"
"당신을 믿느니 차라리 방울뱀을 믿는 게 낳겠어요."
"내가 방울뱀이야."
그렇게 말하며 준은 고글을 걸쳤다. 이미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은 모터를 단 듯 키보드 위에서 움직였다. 마치 타이피스트의 손놀림 같았다. 사실 문자 타이핑이 아닌 상태에서 이토록 빨리 키보드를 두들겨대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에 나디아는 입을 벌린 채 준의 손놀림을 응시했다. 그만큼 준의 머리가 빨리 돌아간다는 뜻인지 모른다. 그리고 당연히,이때 김준의 뇌는 전광석화같이 회전하고 있었다.
김준이 한국 국방부로 진입을 시도하고 있을 때 하사 마에다의 손가락은 잔잔하게 키보드 위에서 구르고 있었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프레이즈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 위에서 왼손이 멜로디를 치고 오른손이 불규칙한 반주를 넣듯 그의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었다.
에스파스 안에는 존 케이지의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끝나면 빌 에반스가 시작될 것이고,듀크 엘린턴과 마일즈가 이어질 것이다. 이것은 란조 2위가 좋아하는 재즈곡이었다. 그녀는 운전중에도 가끔 등 뒤를 돌아다보며 마에다의 작업을 감시하고 있었다.
란조는 우울했다. 3년전의 마에다와는 많이 달라 보였다. 란조는 깊숙이 한숨을 몰아쉬고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한손은 핸들을 잡고 있었다.

>> telnet milim.ac (미림공과대학)

마에다는 재즈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신경이 거슬렸다. 그는 물끄러미 란조 2위의 목덜미를 응시하다가 다시 노트북 액정화면과 17인치 모니터를 번갈아 응시했다. 평양정보센터를 빠져 나온 뒤 곧바로 인민무력부 산하의 미림대학 중앙컴퓨터로 원격 접속을 시도하는 것이 모니터에 표시되고 있었다.
중간에 평양정보센터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추적하는 것을 느끼고 마에다는 역추적을 시도해 보았다. 도쿄였다. 도쿄에서 누군가가 <동급해커>를 추적하고 있는 것을 마에다는 감지했다.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마에다가 지금 접근하려는 북조선 미림대학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각별하게 애정을 기하는 대학으로 노동 미사일 계열의 장거리 탄도 미사일을 개발한 대학이었다.
전쟁을 유도할 수 있을까.....
마에다는 미림대학 플랫폼이 눈에 들어오자 다시 한번 그 생각을 머리속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약간은 겁이 났다. 그때문에 마에다는 전쟁을 유도하는 쪽으로 마음을 정하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쪽 단추에 우선권이 있는지 그 문제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남한에서 북쪽으로...아니 북한에서 남쪽으로... 그리고 일본국.
이 선택이 마에다에게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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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를 태운 리무진이 내각정보국 주차장 안에서 멈추었다.
"전산실 상황은 어떤가?"
곤베이가 리무진에서 내려서며 묻자 기다리고 있던 부하 장교가 설명을 시작했다.
"고요합니다.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컴퓨터 망은 완전히 뚫렸습니다. 실제로 미군용 DSCS-2 통신위성을 이용해 치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건 수습할 차원이 아닌 거 같습니다..."
"한국 상황도 마찬가지 인가?"
"그쪽도 갈때까지 간 모양입니다. 북조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거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는 아까 전투기까지 동원해 김준을 잡으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알아. 놈은 일본 어딘가에 있어. 나도 깜박하면 속아넘어갈 뻔했지."
"그 놈이 실제로 미사일을 쏜다고 보십니까?"
"오늘 밤에는 쏘게 될지도 모르지... 이미 작업은 다 끝난거 같으니까."
"네? 육좌님은 어떻게 남 이야기하듯이 말씀하십니까? 혹시...무언가 알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이봐. 내가 아는 것은 한가지 밖에 없네. 우리가 김준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네.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는 말게."
그렇게 말을 했지만 곤베이는 김준이 어디에 있는지 감을 잡을수 없었다.

지하벙커의 차가운 형광등 빛이 화면에 떠올랐다. 그러다가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화면은 우측으로 반쯤 기울어졌다. 곧바로 초점이 좁혀 지면서 한대리를 깨우는 현희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한대리는 이마가 절반쯤 찢어진 상태로 현희를 올려다보았다. 입술은 꼴나쁘게 퉁퉁 부어 올라 있다. 현희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국말이다.
"오빠 괜찮아요?"
"어떻게 된 거냐...내가 얼마만큼...?"
"24시간 동안 잠을 잤어요. 어제 저녁부터요. 이들이 무슨 조치를 취하는거 같았는데...많이 아팠어요?"
한대리는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와이셔츠가 더렵혀져 있다.
"넌 어때...설마 놈들이 무슨 짓을 한 것은 아니겠지?"
"걱정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었어요..."
현희의 얼굴은 헬쭉하게 말라 있었다.
"고부장님은...? 고부장과는 연락이 되었니?"
"아니에요. 전화를 걸지 못하게 해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가게 하네요."
"그럼...어떻게 된 거야? 김준과는 전혀 연락이 안 된 거야...?"
"오빠 불어 알아듣지요?"
한대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희는 기다렸다는 듯이 카메라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한대리의 귀에 입술을 대고 짧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곤베이는 모니터로 보이는 현희 남매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반복해봐..."
곤베이가 짧게 끊어서 말하자 담당요원이 다시금 현희 남매의 대화를 리와인드한 뒤 재생 버튼을 눌렀다. 분명 불란서어였다.
"불가능합니다. 불어에다가 목소리까지 낮게 깔아 판별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 해석했나?"
"대충...오사카... 라는 것만 파악했습니다. 그 이상은 전혀..."
"자네. 여자의 입을 확대해 봐."
"알겠습니다."
곧바로 모니터에 한현희의 입술이 확대되었다. 작게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속삭이고 있었다. 그런 현희의 입술을 곤베이는 뚫어지게 응시하더니,조심스럽게 현희의 입모양을 따라서 자신의 입술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어와 불어... 양쪽을 섞어서 말하는 게 분명했다. 언어분석팀의 요원하나가 곤베이가 과거에 프랑스와 북조선에서 활동한 것을 기억해내고 물었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육좌님?"
"이게 저들의 대화인가?"
"예. 어제 오후 대화입니다. 그 뒤로는 전혀 대화를 하지 않습니다. 저 대화도 간신히 잡아낸 것입니다만."
"한번 더 느린 속도로 재생해 봐."
한현희의 얼굴이 다시 크로즈업 되었다. 곤베이는 양미간을 꿈틀거리며 한현희의 입모양을 관찰하더니 불쑥 말을 내뱉었다.
"나...디...아... 나디아가 뭔가?"
"예?"
"나디아가 뭐냐고 물었다."
"글,글쎄요...나디아는 만화영화의 여주인공 이름인걸로 압니다만..."
"그런가?"
곤베이는 양미간을 찔끔거렸다. 아까부터 무엇인가 감이 잡힐 듯 말듯 하면서도 무어라고 자신할수가 없었던 것이다. 곤베이는 가까스레 입을 열었다.
"오사카에 있는 비지니스 파크에 요원을 지금 당장 투입시켜. 그리고 그 근처에 나디아라는 여자가 소유한 오피스텔이 있는지 확인하고. 북조선 여자라고 말하는 거 같으니까 공안조사청 2부 협조를 구해 조총련계도 샅샅히 뒤져봐. 나도 곧 뒤따라 오사카로 날아가겠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한 뒤 곤베이는 모니터실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아까 리무진을 기다리고 있던 부하 장교가 복도 반대편에서 급히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육좌님! 진광섭 팀이 방금전 오사카로 향발했습니다. 8시 40분 간사이 공항착 입니다."
"뭐야? 벌써 진광섭이가 알아냈단 말인가?"
"그런거 같습니다. 간사이 공항에다가는 급히 경찰인력을 풀었습니다만."
곤베이는 식은 땀이 났다. 헬기 한대를 날려가면서 추적했던 김준. 다시 겨우 김준의 위치를 어림잡은 거 같은데 진광섭 팀이 이미 오사카로 향발했다고 한다.
진광섭에게 준을 넘겨줄수는 없었다.
상황이 복잡미묘했다. 처음부터 김준에게는 동기가 없었다. 이 때문에 별반의 음모일 것이라는 감을 잡았지만 이도 저도 못하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았다. 별반을 들쑤실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생각보다 한국측에서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점이 불안했다. 만약 김준이 한국측으로 넘어간다면 차후 어떻게 되겠는가. 이 사태는 일본과 한국간에 중대한 외교파국으로 비화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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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킨 뒤 정원으로 걸어 나왔다.
가나에 모녀가 뚫어지게 자신을 응시했다. 미나는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영락없이 비디오숍 배달원 모습이었다.
미나는 가나기원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 뒤 마에다가 빌려 본 비디오의 제목을 다시 한번 보기 위해 종이 백에서 비디오 테입을 꺼냈다.
<펜트하우스의 금발 여성들 3부>
이 자는 금발 취향인가. 미나는 울컥 피가 거꾸로 솟는 거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어둠속에 괴물같이 입을 벌리고 서있는 가나기원의 정문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신경질적으로 허리 뒤에 차고 있는 리모콘을 뽑아 들었다. 그런 뒤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하사 마에다의 방에 있는 컴퓨터가 윙윙거리며 작동을 시작했다.
동시에 프린터포트에 꽂혀 있는 무선랜 장치가 붉은 등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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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추측항법이 통할 때가 있군요."
"여긴 쑥대밭인데...?"
나디아는 활짝 열려있는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을 응시하였다.
"어떤 것을 보고 쑥대밭이라고 하는 거지요?"
"여길 봐. 엔지니어1 부터 30까지의 아이디를 가진 사람들. 한꺼번에 30명이 움직이고 있는 게 보이지?"
"그렇군요...."
"대책반인거 같아. 아무래도 요 며칠동안 갱신된 파일이 있는지 찾아 봐야겠어. 절반은 해커들이 농락을 했을 테니까."
"갱신된 파일을 어떻게 알아내죠?"
"GIF 파일을 사냥하는 솜씨야. 예전에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야한 그림을 찾아다녔던 경험이지. 솔직히 말한다면 내 실력은 그때부터 늘어났어. 지금은 노턴데스크탑보다 내가 더 빠르지."
"심하군요. 야한 그래픽 파일을 찾아다니다가 해커가 되었군요."
"말하자면 그렇지. 무엇이던지 호기심이 있어야 해. 난 어떻게 보면 건강한 편이었어. 내 호기심은 대부분 여자쪽으로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솔직해요. 당신은."
"나디아가 더 솔직하지."
"난 외로운 거에요."
"외롭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군. 당신처럼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하늘의 별을 따다 받치는 남자가 많았을텐데..."
"길게 말하지 않겠어요. 당신을 만나려고 23살이 될 때까지 외로움과 싸워야 했나 보죠."
준은 고개를 돌려 나디아를 보았다.
"사랑 고백치곤 매우 심오하군. 내 인상이 그토록 강렬했나. 나디아?"
"그래요. 그것도 처음 만난 날부터..."
"어떤 인상이? 난 그날 이후로 당신을 만나면 조심해야 했는데."
"그날 수면제를 먹이기 전이었어요. 당신은 취해 있었고,제가 들어가자 노래를 부르라고 했어요. 저를 보고 술집여자처럼 복잡하게 생겼다면서 걸쭉하게 18번 노래를 한번 뽑아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나디아는 노래를 불렀나?"
"제가 그랬을 리 있나요. 노래를 부른 건 오히려 당신였어요."
"내가 노래를 불렀다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나디아는 준의 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가는 입술이 움직이고 있었다.
"......"
여기까지 노래를 부르다가 나디아는 준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당신이 그날 부른 노래였어요. 당신은 술에 취해서 침대에 누워 있었죠. 그 상태에서 남조선 국가를 신나게 불러 젖히더군요... 당신은 정말 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어요."
"꼴불견이었군. 술에 취한 상태 애국가를 부르다니...난 비애국자가 분명해."
"그게 당신 모습이겠지요."
준은 모니터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역시 마찬가지야. 지금 당신 모습도 유난히 마음에 드는군. 그러니까 이따위 작업 집어치우고...우리...다시 빠방 할까?"
"빠방이라뇨?"
"<푸코의 추>라는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야. 여자와 자고 싶을 때는 그녀에게 손가락을 권총모양으로 쥐고 빠방이라고 말하면 돼."
"난 그런 빠방은 하기 싫어요."
"비싼 외교술이 안 먹히는 군. 여자들은 문학도를 좋아하는데 말야."
"푸코의 추가 문학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그건 오락소설이야."
나디아는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렸다. 그녀는 다시 김준의 머리를 안으려고 하다가, 문득 준의 머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신 머리도 오락소설 같군요. 뻐꾸기가 집을 짓겠어요."
"잠깐만..."
준은 서둘러 모니터를 향해 바짝 다가앉았다. 무스를 잔득 처바른 그의 머리가 철사처럼 부르르 떨었다.

>> 동급해커 > 위치 > 제 3 자료실 - 미사일 시스템부

국방부 컴퓨터 접속자 명단에서 <동급해커>라는 한글 아이디가 떠올라오고 있었다.
"뭐에요? 저건?"
"침투 전화선을 추적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김준은 재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화면이 갈라지면서 영문자가 스파크를 일으키듯 스크롤을 일으켰다. 눈부신 속도로 추적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개자식!
준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 나왔다.
"귀신같은 녀석이군. 어디로 도망간 거지?"
"설마?"
"시스템 버그가 아냐. 아까는 사용 중이었는데 지금은 없어. 이 자식,시스템을 제법 농간할 줄 아는 놈이야. 추적해온다는 것을 눈치채고 도망을 간 거 같아."
"당신 아이디를 이용해 대한민국 국방부를 농락했다는 사람이 있는 건 사실였군요."
준은 비쩍 마른 미소를 흘렸다.
"그런 거 같아."
"어떻게 할 거에요? 이렇게 당하고만 있을 거에요?"
"녀석에게 메모를 남겨야 겠어."
"메모를 남긴다고요?"
"전달된다고는 자신할 수 없지만 말야."
"누구에게 남긴다는 거에요?"
"동급해커 앞으로 남기는 거야. 그 친구가 다시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사용한다면 메모가 전달될 거야."
준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 하사 마에다군. 나를 흉내내는 가?
>> 너를 찾아내겠다.

"무척 험악한 경고문이군요..."
"험악한 게 아냐. 진지한 거지."
"화났군요?"
"화 안낼 사람이 있을까. 내 아이디를 몰래 사용하는 자를 내 눈으로 목격했는데 말야. 이건 자동차를 빌려주었더니 교통사고를 낸 것과 같은 이치야."
"흥분하지 말아요. 저까지 놀라잖아요..."
준은 화가 났다. 직접 자신의 아이디가 행동하는 것은 난생 처음 보았던 것이다.
"준..."
"왜?"
"정말 화가 났나요."
"심각하지 않아. 하지만 내 눈은 이미 뒤집어져 머리 뒤에 붙어있는거 같군."
"위로해 줄까요?"
준이 대답이 없자 나디아는 그의 몸을 등뒤에서 안았다.
"아까 저를 원한다고 했지요? 좋아요... 우리... 빠방 해요."
윽...
나디아의 손이 조심스럽게 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 위에서 재킷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당연하겠지만,사랑에 빠진 이 두 남녀는 알 수가 없었다. 방금 전에 하사 마에다가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이용해 미사일에다 발사시각을 지정했다는 사실을.
목표는 백령도 이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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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40분 정각. 진광섭은 기내 안에서 긴급 전문을 받고 마른 침을 삼켰다.
등골이 오싹했다. 전문내용은 간단했다.

7기의 발사 시스템에 <동급해커> 접근
상황 정밀 파악중

광섭은 오한을 느끼며 일행 10명과 함께 비행기 트랩에서 내려왔다.
어둠속에서 40여명의 일본경찰이 진을 치고 광섭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뜩이나 바쁜데 어이가 없었다.
"누가 시킨 건가."
"상부의 지시입니다. 여권과 소지하고 있는 총기류를 압수하라는 지시입니다."
"상부라니? 어떤 상부를 말하는가? 대한민국 상부인가,아니면 그대들 상부인가?"
"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조치에 응하시지 않으면 강제 송환 하겠습니다."
설마하는 심정이었지만,진광섭은 곤베이가 시킨 짓임을 눈치했다.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다. 지금 당장 곤베이의 얼굴이 눈 앞에 보이면 아작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곤베이건 누구건 아작 낼 시간이 없었다. 급했다.
"어이 이상운 무관. 자네 권총 가진 거 있으면 인계해. 아 뭐해? 춘해씨도 수류탄 뒷주머니에 넣고 다니잖아. 그거 이 친구들에게 주라구."
춘해와 이상운,몇명의 부하들이 썩은 벌레를 씹은 표정을 지으며 홀스트에서 권총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이 끝나자 몸수색이 시작되었다. 경찰 둘이 기관원 한명에 붙어 정밀하게 몸수색을 하는 것이다.
"좋습니다. 더이상 소지한 총기류가 없는 거 같군요.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오사카에서는 며칠동안 머무를 생각인지 미리 귀뜸을 해 주시는게 좋을겁니다."
이상운이 멋모르고 끼어 들었다.
"이거 너무 하는군. 물 좋으면 놀만큼 놀다 갈거요. 돈 좀 뿌리라면 오사카가 잠길 정도로 뿌려 볼텐데 시간이 중요하겠소?"
"상운이 너! 가만히 있지 못하겠나!!"
진광섭이 일갈하자 상운은 금방 꺼내온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광섭은 어느새 책임자로 보이는 일본인 경찰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죄,죄송합니다. 이해를 해 주십시오. 우리도 이러고 싶지는..."
이미 진광섭의 햄머펀치가 뒷걸음치는 경관의 얼굴을 토마호크 미사일처럼 따라 붙더니,그의 콧등에서 크게 작열하고 있었다.
"이 새꺄!! 니네 이러면 뭐 좋을 줄 알아? 인터폴 공조수사면 총기류 소지하는건 당연한건데 이렇게 수사 방해해도 되는 거야? 너희 일본놈들 말야. 이런식으로 내 목 조이면 말야. 특전단을 투입해 오사카를 통째로 점령해 버릴 거다. 알아듣겠나!!!"
40여명의 일본경찰은 영문을 모르고 진광섭을 응시했다.
진광섭은 한국말로 미친 듯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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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쓰라 경감은 머리가 아팠다. 신주쿠 3정목 쓰레기통에서 문제의 손도끼를 발견한 후 만 이틀이 지났다. 오니쓰라 경감은 이미 <야마테선 사건>에서 손을 떼고 <신주쿠 도끼살인사건>에 치중하고 있었다. 이미 경찰인력 30명을 투입해 이 근방을 샅샅이 조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날 새벽에 손도끼를 버린 범인을 목격한 증인은 없었다.
오니쓰라 경감은 허탈한 마음으로 다시 보고서를 들쳐 읽기 시작했다.
신주쿠 3정목 지서 안. 아까부터 자신을 만화가 고바야시라고 주장하는 한 남자가 부하 경찰을 붙잡고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었지만 오니쓰라는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오니쓰라는 보고서를 다 읽은 뒤 지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이슬비 속에 30명의 경찰이 도열해 있었다. 모두 피곤하거나 상당히 허기진 얼굴이다.
오니쓰라는 입을 열었다.
"좋아. 오늘은 이만하지. 내일 아침에 다시 모이도록 하고. 모두 귀가한다."
가벼운 탄성이 들려왔다. 경찰들은 오니쓰라 경감 앞에서 개미떼처럼 뿔뿔이 흩어졌다. 오니쓰라는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보다가 우측 빌딩 숲을 올려다보았다. 8시까지는 경시청에 들어가야 했다. 오니쓰라는 페트롤카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 만화가 고바야시가 지서에서 걸어나오는 모습이 오니쓰라 경감의 눈에 들어왔다. 오니쓰라는 무의식중에 고바야시를 불렀다.
"이봐. 당신."
"아...예?"
"당신 정말 만화가 고바야시 맞아?"
"아,예...그렇습니다. 소학사 만화잡지에 연재를 하지요..."
오니쓰라는 약간 놀랬는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그에게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이거 사인 한장 부탁드립니다. 제 딸아이가 선생님 만화를 좋아합니다만."
"그러시군요. 저도 영광입니다."
고바야시는 오니쓰라가 내미는 수첩에 사인을 하기 시작했다. 오니쓰라는 그런 고바야시의 얼굴을 살펴보고 있었다. 뭔가 주눅이 든 표정이다.
오니쓰라는 궁금했다.
"아,본의 아니게 아까 이야기를 옅들은 거 같은데...그래 옆집에 사이코가 산다고 말씀하셨나요?"
"벌거 아닙니다. 요즘 스트레스를 계속 받다보니..."
"옆집에 누가 살기에 그런 말을 하시는 지요. 제가 도와드릴수 있을까 하는데."
고바야시는 구세주를 만난 듯 고양이가 죽은 이야기며,옆 집 노파가 3주일째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세세히 설명해갔다.
"흥미 있군요."
오니쓰라 경감은 수첩에 깨알같이 글씨를 써넣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네로라는 고양이가 죽었는데 이웃 집 아가씨가 믿을수 없을 정도로 광폭했다는 이야기군요. 그리고 3주전부터 이즈의 할멈이란 노파가 보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인데...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전에는 조용한 집안이었는데...하지만 네로가 그 집 뒷마당에서 처참하게 죽어 있는 게 목격이 되니까 기분이 상당히 묘했습니다. 분명 칼입니다.
그 집 손녀딸이 주방용 칼로 제 고양이를 마구 찔러 죽였습니다."
"수사를 진행해 보지요. 그밖에 말씀해줄 내용은 없습니까?"
"제 고양이를 살해한 여자는 후꾸오 미나라는 아가씨입니다. 그녀의 오빠는 후꾸오 하야시라고 하지요. 전에 야마테 라인 전산요원였다고 합니다만..."
"그렇군요. 야마테 라인때문에 저도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만. 그건 그렇고 미나라는 아가씨는 직업이 없는 겁니까?"
"글쎄요...디스코장에 나가 춤을 추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에콜 드 신주쿠 라는 디스코장입니다."
갑자기 오니쓰라 경감의 눈이 반짝였다. 에콜 드 신주쿠라면 <손도끼 살인사건>이 발생한 바로 그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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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해저드 페리급인 미사일 프리킷 함정이 보였다. 종래의 호위함과는 달리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함정에는 대공,대함 미사일인 Mk13 미사일 발사기 1기가 추가되어 있다. 후미쪽으로는 다목적 헬기인 SH-60B 두대가 어둠속에 잠을 자고 있는데,이 헬기는 유사시에 대잠수함 공격용으로 활용된다.
길은 멀었다. 평갑판형인 선체 압부분에서 전방을 보면 어두운 바다가 한눈에 들어 온다. 사방이 어두었고,함정은 속도를 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병은 바다쪽으로 바지 자크를 열어 재치고 소변을 보았다. 美日 연합훈련이 연장된다고 했는데 분위기가 영 아니올시다 였다. 소문을 들으니 한반도쪽에서 개전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것 같다.
수병은 소변을 다 본뒤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우측에서 따라오던 이지스함에서 서치라이트가 강하게 그의 몸을 포착하다가 돌아 간다.
수병은 얼굴이 후끈 거렸다. 저 자식들이 아까부터 보고 있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지스 함에는 대개 여군이 숭선한다고 했다. 수병은 다시 바지 자크를 내리고 소변을 보는 시늉을 했다.
이번에는 7시 방향 어둠속에서 시 헤리어 전투기가 날카롭게 괴음을 토하며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수병은 졸린듯 시 헤리어기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시 해리어기는 올리버 해저드 페리급 함정 후미쪽에서 뒤따라오는 두척의 항공모함중 오른쪽 항모에 부드럽게 착륙을 하고 있었다. 각 항모마다 평균 50대의 시 해리어기가 대기중이었으니까,분명 미일연합훈련이라고 보기에는 예사롭지 않은 엄청난 화력이 지금 극동으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수병은 항공모함의 위용을 천천히 관찰하다가 밤 하늘로 얼굴을 들었다.
별빛이 황량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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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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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엄 승용차는 숲 끝에서 달려 나오고 있었다. 불야성을 이루는 서울 시가지가 내려다 보이고 있었다. 폭우가 내렸다. 브로엄은 거기서 100미터를 더 달리다가 단층의 비밀스런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곧이어 헌병 둘이 저택의 서터문을 올리기 위해 허겁지겁 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회의는 이미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김달영은 안기부 장관 서석재에게 눈인사를 한뒤 그 옆으로 포진해 있는 국방부장관과 각 군 사령관을 응시했다. 모두들 며칠동안 잠을 자지 못했는지 푸석푸석한 얼굴들이다.
달영은 이곳에 오기전 공항에서 받은 서류를 조심스럽게 서석재에게 내 밀었다.
서석재의 입에서 가날프게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서석재는 보고서를 읽다 말고 바짝 긴장한 얼굴로 방탄 유리로 된 회의실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막 헬기 한대가 폭우를 뚫고 느리게 착륙을 하고 있었다.
곧이어 남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대통령 각하께서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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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의자에서 얼른 일어섰다.
이건 좀 거친데...
많이 거칠단 말야...
미나는 혀를 핥다가 자신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나오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 때문에 미나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혀를 움직이거나,입을 오므리거나 하는 동작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은 부족한 게 많았다. 의도하는 데로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다.
미나는 다시 의자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겼다. 하사 마에다가 긴급히 지운 파일들을 복구하는데 걸린 시간은 고작 30분 가량이었다. 그후부터는 무선랜을 이용 이쪽 컴퓨터에다 잔뜩 카피를 떴다. 그런 뒤 작업을 시작한 게 벌써 한시간
가량이 지났다.
처음에는 하사 마에다가 어떤 작업을 했는지 간파할수 없었지만,지금은 달랐다. 미나의 머리는 이미 여러 각도로 해결점을 찾고 있었는데,이 때문에 다시 마에다가 했던 방식으로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이번에는 10분전과는 달리 손쉽게 침투가 가능했다.
미나는 국방부 전산망 화면을 3분의 1 크기로 축소한 뒤 오른쪽에 떠있는 두개의 화면과 일렬로 배열을 했다. 그러자 왼쪽부터 순서대로 한국 국방부와 일본 방위청,주일 미군 전산망이 한 화면 안에서 사이좋게 자리를 잡는다.
미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띄우며 화면을 왼쪽부터 주의 깊게 읽어 나갔다.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이상야릇한 호기심이 생겨나고 있다.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방향이 있었는지,그녀는 하사 마에다가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이용해 모종의 작업을 하였다는 것을 정확하게 추리해 냈다.
그러고 보니 몇년전에 보았던 <워게임>이란 영화가 떠올랐다. 오락게임인줄 알고 버튼을 눌렀는데 실제로 핵폭탄이 발사되었다던가,아무튼 그런 내용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미나는 화면 셋을 닫고 뒤쪽에 웅크리고 있는 화면을 앞쪽으로 잡아 당긴 뒤 마우스의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김준의 얼굴이 떠올라왔고, 하사 마에다가 입수한 김준에 대한 정보들이 붉은 문자로 나타났다. 그제야 <동급해커>라는 아이디의 원래 사용자가 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미나는 깨달았다.
오빠가 무슨 이유로 이들을 노리고 있을까.
미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기야 그건 오빠의 작업이니까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미나는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옅은 푸른색 조명등을 따라서 담배 연기가 스산하게 날아올랐다.
오빠의 행방을 가장 빠른 시간 안에 찾는 방법은 한가지밖에 없었다.
오빠 대신에 미나 자신이 이들을 찾아내 처리하는 것이다. 아니면 이들을 오빠 하야시가 있는 곳으로 몰라 세우던가 하면 될 것이다.
그전에 좀 더 조사가 필요했기 때문에 미나는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 하사 마에다가 했던 방법을 따라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 안에서 아이디를 <동급해커>로 리메이크remake했다.
그러자 난데없이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하사 마에다 군. 나를 흉내내는가. ==
== 너를 찾아내겠다... ==

미나는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경고문을 불안스레 응시했다. 갑자기 머릿속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니 무엇인가 감이 잡힐 듯 말듯 했지만 선뜩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미나의 얼굴은 별안간 붉게 경색되어 갔다.
"빡가야로!!!"
그러고 보니 이 두남자는 오빠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들만의 유희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해커 대 해커.
미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오빠 하야시만이 그녀에게는 유일한 해커였다.
그런데 이 두 남자는 오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워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그녀는 성난 살쾡이처럼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두들겨갔다. 이미 하사 마에다가 조사해둔 자료를 읽었기 때문에 이들 남자간의 공방전을 방해하는 것은 식은죽 먹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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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40분이었다. 나디아가 발코니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오면서 그녀의 스커트가 커튼처럼 휘날렸다.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한 남자를 소유하는 게 나디아는 어떤 건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기분을 알 것 같았다. 나디아는 사람들이 너무 빠른게 아닌가,라고 물어오기를 바랬다. 진정으로 빠를수록 좋다고 나디아는 생각했다.
사실 나디아는 알고 있었다. 김준이 자신의 품에서 안주할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나디아는 지금 이 행복을 지속하고 싶었다.

준은 셔츠 차림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그는 인공위성을 경유해 이번에는 오키나와 미군 전산망으로 침투를 하고 있었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이미 7기의 미사일 시스템이 해킹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북한 쪽도 마찬가지였다. 마에다는 평양전산센터와 미림대학 루트를 복합 침투루트로 이용해가면서 각 전방부대 컴퓨터 망으로 침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곳곳에서 지뢰가 부설된 것처럼 <동급해커>라는 아이디가 발견되었는데 모두 하사 마에다의 짓이었다.
북한에도 역시 오키나와 주일미군기지와 마찬가지 방식으로 7기의 미사일 시스템이 해킹되어 있었는데,각각의 시스템에는 하나의 타임지정 파일과 하나의 트로이목마 파일이 중복되어 걸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타임지정 파일에는 발사시간이 지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필요한 시기에 패치(patch:수정)를 하려는 계산인지 모른다. 아니면 <아메바 파일>일까.
<아메바 파일>이란 스스로를 변형시키고,자체 번식을 하고,롬바이오스가 기록 하는 시간을 측정하면서 자체 성장을 하는 고지능형 파일을 말한다. 이 때문에 준은 식은 땀이 났다. <아메바파일>이라면 전산망이 차단되어도 작동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치 시한폭탄과 같은 이치이다.

나디아는 준의 커다란 등을 응시하다가 이번에는 발코니로 걸어 나갔다.
마쓰리 경영대회가 오사카 밤거리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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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옵니다."
진광섭은 자동차 안에서 오사카 지도를 보다가 운전사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상운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다. 광섭은 자동차 문을 열었다.
"확실합니다. 각 호텔마다 내각정보국 요원들이 쫙 깔려 있습니다. 도로 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마쓰리 행렬을 보호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김준이 이 근처 호텔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삐삐를 눌러보죠. 그 자식,분명히 사즈메가 삐삐를 친 줄 알고 응답을 해 올 겁니다."
"좋아. 전산 팀에게 연락해서 당장 시작하라고 해."
지시는 그렇게 했지만 진광섭은 한풀 꺽인 상태였다. 10분전에 갑자기 걸려온 김달영 안기부 차장의 전화때문이 아니었다. 대통령까지 직접 나섰다고 하니 그저 송구스러웠을 뿐이다.
너...진광섭이 너는 역적인 것이다...
진광섭답지 않게 울컥 눈물까지 나오려고 했다. 딸 혜숙이까지 갑자기 보고 싶어 지니 이건 미칠 지경이다.
진광섭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예의 이사벨 아자니 선글라스를 포켓에서 꺼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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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 육좌님. 찾았습니다!"
사내는 니코오사카 호텔 앞에서 곤베이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사내의 시선은 계속 21층 발코니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여자를 감시하고 있었다.
보고를 끝낸 뒤 사내는 곧장 왼손을 치켜세웠다. 그러자 호텔 현관에 주차해 있는 두대의 밴에서 10여명의 신사복들이 사삭거리며 뛰어 내렸다.
모두 내각정보국 오사카 지부가 자랑하는 베테랑 기관원이었다.

나디아는 발코니에서 밑을 내려다보다가 두대의 밴에서 검은 양복들이 내리는 것을 보았지만 별다르게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니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도오톤보리 운하를 바라보았다. 운하 중심가를 중심으로 붉은 제등과 인파가 집중되고 있었다. 흐릿한 가로등 사이로 몰려다니는 조그만 점들은 이번 마쓰리 경연대회를 구경하러 일본 곳곳에서 몰려온 관광객이 분명한데 대충 어림잡아도 10만명이 넘는 인파인거 같았다. 도오톤보리와는 다르게 이곳은 너무도 조용해 나디아는 슬며시 웃음까지 나왔다.
그러고보니 30분 가량을 발코니에 나와 있었다. 갑자기 한기가 일어났다. 나디아는 발코니 창을 닫고 거실로 들어왔다. 문득 나디아의 눈에 준이 전화 수화기를 놓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인가 불안했다. 나디아는 한참만에야 방금전 들린 소리가 삐삐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누구에요? 아는 사람인가요?"
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준의 시선은 멍하니 책상 위에 놓여있는 사유리의 모토롤라 삐삐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 나가야 겠어."
"네?"
"호텔이 발각된 거 같아. 당장 나가자구. 어서!"
"설마...."

이상운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과장님. 찾았습니다. 니코오사카 호텔입니다!"
"알았어! 스탠바이 됐나? 당장 출발해 모두!!"
그러자 4대의 승용차가 동시에 시동을 걸었다. 주 오사카 한국영사관 안이었다.

"뭐라고? 2138호실을 볼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나?"
사내는 호텔 모니터실 안에서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자 보안담당자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으론 카메라가 닿지 않습니다. 죄,죄송합니다."
"이런 제기랄! 육좌님. 2138호 객실은 볼 수 없답니다. 어떻게 할까요?"
곧바로 곤베이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각 엘리베이터마다 인원을 배치해. 비상계단도 틀어막고. 내가 곧 갈테니까 1시간만 막아봐. 알았나?"
"알겠습니다."
"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고 얌전히 감시하란 말야!"
"명심하겠습니다. 육좌님."
사내는 써늘하게 굳은 얼굴로 핸드폰 통화를 끝냈다. 다시 사내의 눈이 부챗살처럼 펼쳐져 있는 22개의 모니터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2138호실 객실과 가장 가까운 장소에 설치된 카메라는 어느 건가?"
사내가 묻자 보안요원이 대답했다.
"맨 왼쪽 화면입니다. 21층 비상계단 앞에 설치되어 있습니다만."
"카메라를 콘트롤할수 있겠나? 저걸로 2138호실을 볼 수 있나 이 말이다."
"글쎄요...여기 객실은 격자형으로 위치하고 있는데...한번 해보죠."
보안요원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사내의 얼굴은 계속 화면 하나를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다.
키보드를 치는 소리와 함께 사내가 응시하고 있는 모니터의 내용물이 조심스럽게 떨리면서 앞으로 당겨졌다. 흐릿했다. 다시 몇 초가 흐르자 뚜렷하지는 않지만 멀리 2138호 객실 출입문이 화면에 잡혀 들어왔다.
그때 모니터를 응시하던 사내의 입에서 갑자기 신음이 터져 나왔다.
"뭐야? 저건..."
놈이다....
사내는 깜짝 놀란 얼굴로 무전기를 급히 빼 들었다.

준은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다가 2명의 양복이 서성이는 것을 보았다.
나디아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저 사람들인가 봐요. 아까 밴에서 내리던데..."
준은 나디아의 입을 틀어막고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붉은 양탄자가 깔려있는 복도였다.
"어떻게 알았을까요?"
"글쎄...난 가명을 사용했는데...혹시 오후에 식대를 무엇으로 지불했지?"
"카드요."
"그것때문에 들킨 거 같군."
"미안해요. 전 부자가 아니잖아요..."
비상계단으로 연결된 출입문이 보였다. 준은 빠른 속도로 복도와 비상계단을 훑어보았다. 별안간 준은 수축되었다. 비상계단 출입문 위에 설치된 감시카메라가 묘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고 있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준은 손에 들고 있는 노트북 가방을 카메라를 향해 잽싸게 날렸다. 쨍그랑 소리를 내며 카메라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 하는 군요. 그래도 되는 거에요?"
"나디아도 알잖아? 난 영화배우가 아냐. 개런티도 없는데 카메라에 찍히란 말야?"
"그럼 전 영화배우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 난 여자라 이거군요."
"저 뒤쪽으로 가야겠어."
등뒤에서 무전기 교신음이 들려왔다. 두 남녀는 모퉁이를 돈 뒤 이번에는 우측 복도로 달려갔다. 뒤쪽에서는 사내들의 발자국소리가 숨가쁘게 들려오고 있었다.
"완전히 갇혔군요. 미로 같아요."
"이 점이 니코오사카 호텔의 장점이야."
"이 호텔 잘 알아요?"
"나디아가 아는 만큼은 알지. 저 앞쪽에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
나디아는 준의 말을 듣고 오른쪽 모퉁이를 돌았다. 곧장 화물 엘리베이터가 나디아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모니터를 올려다보면서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보안요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물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내는 묘한 신음을 흘렸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집어들었다.
"화물 엘리베이터다. 모두 15층에 집결한다. 지금 당장 눈썹 날리란 말야!"
"15층이요? 왜 하필 15층을?"
"입 닥치고 15층에다가 엘리베이터를 묶어 주시오. 지금 당장!"
"해,해보겠습니다."
보안요원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키보드 위에 양손을 올렸다. 순간 화물엘리베이터가 20층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뭡니까? 20층에서 내린 겁니까?"
"아냐. 잠깐만..."
사내는 무전기를 손에 든 상태에서 엘리베이터 상황이 체크되고 있는 화면을 응시했다.
어이가 없었다. 화물엘리베이터는 각층마다 멈추고 있었다. 그것은 17층까지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21층으로 다시 기어올라가고 있었다.
"제기랄? 어떻게 된거야? 왜 내려오다가 올라가는 거지?"

나디아는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이정도 체력이면 올림픽에 나가도 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디아는 등 뒤에 서있는 준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호텔 로비로 고개를 돌렸다. 로비는 한산해 보였다.
나디아가 먼저 호텔 현관 쪽으로 걸어나갔다. 무사히 빠져나오자 나디아는 주차장에서 김준을 기다렸다. 잠시 후에 준이 호텔을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둘은 곧바로 도로 쪽으로 뛰어갔다.
도로 앞까지 나오자 나디아는 식은 땀을 흘리며 호텔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불쑥 준에게 물었다.
"왜 안 쫓아오는 거죠? 이상하네요."
"그 친구들 지금쯤이면 17층이나 21층에서 사우나를 하고 있을 거야."
"아....! 그렇겠군요...."
준은 피곤한 표정으로 거리 주위를 살폈다.
"무슨 일이 있나? 택시가 보이지 않는데?"
나디아가 말했다.
"마쓰리 때문인가 봐요. 아까 보니까 운하건너편에서 마쓰리 경연대회가 있었어요."
"그럼 그쪽으로 가자구. 거기서 택시를 기다리려면 당구대가 필요하겠어."
준과 나디아는 한적한 도로를 일직선으로 건너뛰었다. 건물 숲 사이에서 마쓰리 패의 함성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사내 3명은 울쌍이 된 얼굴로 엘리베이터 단추에 꽂혀있는 드라이버를 빼 집었다.
"빠가야로. 드라이버로 우릴 안전히 속여 넘겼군!"
화가 잔뜩 난 사내를 뒤로 두고 다소 멍청하게 보이는 사내 하나가 급히 창 쪽으로 다가 섰다. 그러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했다.
"저 놈들 아닙니까?...아 뭐합니까?.... 아까 그 놈들 저 밑에 있다니까용??"
그런 사내의 눈에 호텔 현관 앞을 긴급히 달려나가는 두 남자가 보였다.
아까 모니터 실에서 명령을 내리던 오사카 지부의 팀장이었다.
사내가 다시 김준과 나디아를 찾아 시선을 옮기고 있을 때는 호텔 우측에서 정체불명의 자동차가 긴급히 멈추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는 모두 4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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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란의 마쓰리 축제였다.
김준과 나디아는 인파에 밀려 도로 중앙에까지 걸어나왔다. 마쓰리 행렬은 도오톤보리 운하를 끼고 거리 좌우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뒤쪽으로는 니혼마쓰 제등 행렬을 따라 후지 TV 중계차가 따라오고 있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여기가 바로 중심이었다.
앞쪽으로는 일본 3대 마쓰리중 하나인 간옹마쓰리 패가 거대한 미꼬시(가마의 일종)를 메고 거리를 올라오고 있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도로 양쪽 마쓰리패까지 합쳐서 일본의 명물 마쓰리 패가 모두 이 장소로 올라오고 있는 것이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분명 김준과 나디아가 서 있는 교차로 한복판이 집결장소 인거 같았다. 나디아도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지 차갑게 외쳤다.
"저쪽으로 가야해요!"
"덴덴타운?"
도로 중앙에 몰려있던 관광객들은 마쓰리 패를 환영하기 위해 다시 도로 좌우로 물결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일대 혼란이었다.
"거기 알아요?"
"알아. 오사카의 아끼하바라."
"그래요. 잠시 후에 거기서 만나요."
"아가씨?"
"갑자기 왜요?"
"코트는 벗고 가야지. 녀석들이 알아보잖아."
나디아는 주춤 멈추어 섰다. 그러더니 오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 벗으라는 말로 들려요."
"난 아무래도 좋아."
"마음 약해지니까 제발 유혹하지 말아요. 자요."
준은 나디아가 벗어 던져주는 밍크코트를 잡아챘다. 순간 사내 하나가 갑자기 인파 사이에서 총알같이 뛰어 나오며 준을 향해 달려들었다.
퍽-----!
준이 빨랐다. 준의 뒤돌려차기가 전광석화처럼 반원을 그렸고,사내는 꽈다당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그러자 축제를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김준을 응시했다. 나디아는 이미 인파 사이로 뛰어들고 있었다.
준은 나디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좌측에서 나타난 또 따른 사내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그는 아까 모니터 실에서 곤베이와 통화를 하던 바로 그 사내였다.
그는 묘한 포즈를 취하며 말을 시작했다.
"김준씨. 우린 수상 직할 내각정보국 소속 수사요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나? 이 사실을 알면서도 일본국 수상을 상대로 문제를 일으키고 싶나?"
준의 얼굴에서 갑자기 독기가 품어 나왔다.
"문제는 이미 발생했네. 요즘 내각정보국에 필요한 건 소방관이란걸 모르나?"
"시시한 말은 집어 치시지. 넌 소방관이 아냐!"
"뚜껑이나 열어 둬. 3분 뒤에는 너의 뇌에서 쥐가 날테니까!"
"건방진! 빡가야로!!!"
한순간에 사내는 김준을 덮쳐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준은 구둣발을 사삭거리며 옆으로 몸을 이동했다. 그 틈에 사내의 몸이 붕 떠오르는 거 같더니 뒤로 사라지는 거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된 건지 사내의 손이 곧바로 김준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있었다.
"빡가야로---------------!"
사내는 준의 뒷덜미를 잡은 상태에서 몸을 한바퀴 앞으로 굴렸다. 준의 몸은 꼴 나쁘게 허공에서 반원을 그리면서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사내는 땅바닥에 누워있는 김준의 몸위로 자신을 날렸다. 싸움을 구경하던 행인들 사이에서 경탄의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후...소방관 나리. 내가 좀 빨랐지...?"
사내는 비열하게 웃으며 준에게 농담을 던졌다. 그런 뒤 준의 하복부를 무릅팍으로 누른 상태에서 엉덩이 쪽에 있는 수갑을 꺼내 들었다.
순간 권총이 사내의 이마를 겨누었다.
사내는 간덩이가 떨어지는 줄 알았다.
"뭐,뭐야?"
준은 권총을 사내의 이마에 겨눈 상태에서 비쩍 미소를 지었다.
"뚜껑이나 열어 두라고 했잖아."
"이런 제길!!"
사내는 잔뜩 겁을 먹고 뒤로 몸을 움직였다.
퍽-----------!!
기다렸다는 듯이 김준의 구둣발이 사내의 턱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왓쇼이! 왓쇼이!!"
함성이 양쪽에서 들려오자 그제야 후지 TV 중계차는 싸움이 일어난 사실을 알고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서 싸움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다.
준은 코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내를 쳐다보다가 도로 가운데에 나동그라져 있는 노트북과 밍크 코트를 집어들었다. 그때 갑자기 인파 사이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게가히또가 이마스!"
인파 쪽에 파묻혀 있던 수녀였다. 그녀는 피를 흘리는 사내를 보호하기 위해 보도블록에서 뛰어 나왔다. 그러자 몇몇 행인이 준을 불안한 눈으로 노려보며 덩달아 걸어 나왔다. 준은 아차 하는 생각으로 손에 들고 있는 권총을 양복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우측 마쓰리 행렬에서 왓쇼이 왓쇼이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스테레오였다. 깃발이 보였고,부모를 따라 나온 어린 아이들이 준의 얼굴을 향해 손전등을 들이대기 시작했다. 준은 손전등 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다가 현기증을 느꼈다.
수녀가 이번에는 가볍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저 자가...이 남자를 습격했어요. 저 남자를 잡아요. 권총을 가지고 있어요!"
준은 비쩍 마른 미소를 지으며 수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얼굴을 바짝 치켜세우고 준을 노려보더니,성호를 그었다. 준은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미 험악한 인상을 가진 사내들이 준을 포위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북소리가 들려 왔고,우측에서는 간온마쓰리 패가 춤을 추면서 서서히 진군해오고 있었다. 이때문에 도로에 모여있던 인파가 다시 파도처럼 좌우로 갈라지고 있었다.
"당신들에겐 볼 일 없소. 길을 막지 마시오."
준이 말하자 스모 선수 체격을 가진 사내가 앞으로 걸어나와서 말했다.
"너 조선인 아냐? 관광객이면 관광객답게 굴어! 어디서 싸움질이야?"
준은 울컥했다.
척!
어느새 준은 다시 권총을 꺼내 들고 사내의 이마에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자네도 뇌에 쥐가 나고 싶나?"
사내는 그만 오줌을 질질 흘렸다.
준은 오줌을 싸는 사내를 손으로 가볍게 밀고 인파사이로 뛰어 들었다. 그때 좌측 기온 마쓰리 패의 깃발이 밤하늘을 찌를 듯 높이 흔들리는 거 같더니 좌우로 물결처럼 갈라지면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형 알토 자동차였다. 교통순경이 타고 다니는 소형 경찰차가 축제 행렬을 뚫고 갑자기 달려나온 것이다.
동시에 요란하게 총성이 울려 왔다.

나디아는 골목길로 접어들다 말고 총소리를 들었다. 움찔 겁이 났다. 나디아는 뒤를 돌아다보았다. 아까 첫번째로 준을 습격했던 사내가 계속 그녀를 쫓아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뛰어가다 말고 쓰레기통을 발로 차 골목길을 막았다.
냄새가 나는 골목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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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데...
하사 마에다는 작업 도중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한국 측에서 이미 4개의 시스템을 성공적으로 차단한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7개의 작업파일중 6개는 유인용이었으니까 시시한 프로그래머 두놈만 붙어도 간단하게 해결을 볼수 있으리라 짐작을 했다. 문제는 나머지 하나였다. 이른바 트로이목마 형식을 가진 아메바파일였는데 누군가가 그것을 눈치채고 만진 흔적이 있었다.
"설마..."
마에다는 떨리는 손으로 암호를 입력했다. 그러자 <File Update(갱신)>이라는 문구가 별안간 떠올랐다.
믿을 수 없었다. 마에다는 거친 숨을 몰아 쉬며 재빠르게 접속자 명단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빠가야로.
화면에서 갑자기 <동급해커>라는 아이디가 붕 떠올라 오고 있었다.

누굴까....
마에다는 커튼을 열어 젖혔다. 에스파스 창 밖으로 저팬 알프스의 산자락이 올려다 보였다.
시모노세키로 간다던데...지름길인가...?
마에다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뒤 담배를 입에 물고 운전석에 앉아있는 란조 2위를 바라보았다. 이번 음악은 스윙 풍이었다.
마에다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다 말고 조수석 뒤쪽 선반에 있는 17인치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두 눈을 17인치 모니터에 고정했다.
오사카 마쓰리 대축제가 후지 TV를 통해 생방송 되는 장면이었는데 무엇인가 못볼것을 보았다는 불길한 예감이 마에다의 뇌리에 스쳤다.
마에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세이브된 화면을 다시 읽어 들였다. 그의 다른 한 손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기며 대한민국 국방부 전산망으로 다시 재침투를 시도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방금전에 후지 TV 카메라에 김준의 모습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인파들에 포위되어 잔득 지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마에다는 어떻게 된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한참 후에야 자막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마쓰리 대축제에 괴한 난입. ==

마에다는 강한 승리감을 만끽했다.
어디로 도망갔나 했는데...오사카에서 들개처럼 헤매고 있었단 말인가...
마에다의 두 눈은 다시 야비하게 반짝였다. 느낌이 이상했는지 란조 2위가 핸드 브레이크를 걸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1위님. 방금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란조 2위. 지금 당장 오사카로 갈 수 있겠나?"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침에 말했듯 이 차는 시모노세키로..."
"란조 2위... 난 감시를 받고 싶지 않아..."
란조는 움찔 놀란 눈으로 마에다를 바라 보았다. 하사 마에다는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머리가 크고,돗수 높은 안경안에서 괴이한 눈을 내보이고 있는 마에다는 어딘가 다르게 별세계에서 날아온 인간 같았다. 아니 독종이었다.
란조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지만,그녀의 손은 어느새 홀스트에서 콜트 권총을 꺼내 마에다에게 내밀고 있었다.
"방법이 잘못되었습니다 1위님... 권총으로 저를 협박해 주십시오."
란조는 비감했다.
"그렇게 해주신다면 후에 보고서를 제출할때 저는 정당한 사유를 달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지금 당장 저를 협박하십시오. 그럼 오사카로 방향을 바꾸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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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이마에 맺혀있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고 있었다. 그녀는 방금전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미나는 자신이 했던 작업을 세이브한 화면을 다시 불러 들인 뒤 읽고 있었다.
처음에 보이는 화면은 마에다의 컴퓨터에 남아 있는 정체불명의 미사일 탄두의 설계도면이었다. 화살표는 미사일 탄두의 몸속에 있는 소형 컴퓨터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복잡한 난수표를 화살표가 찾아내고 있었다.
그런뒤 미나가 마에다의 컴퓨터에서 보았던 작업계획표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진행했던 파일 패치 광경이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패치는 쉬웠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었다. 미나는 식은 땀을 흘리며 화면과 벽시게를 번갈아 보았다. 벽시계의 바늘은 밤 10시 45분을 가르키고 있었다.
벽시계에서 눈을 뗀 그녀는 마에다의 작업 파일을 다시금 컴퓨터 화면에 불러 들였다. 어쩐지 겁이 잔뜩 나기도 했지만 이제는 두려움도 없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미사일 발사시각을 4시간 앞 당겨 입력을 했다.
바로 15분 뒤였다.
마침내 미나는 엔터키를 눌렀다.
그러자 화면 우측 하단부에 있는 작은 화면에서 갑자기 붉은 화살표가 빙글빙글 회전을 시작했다.
동시에 대한민국 컴퓨터 안에 도사리고 있던 <아메바파일>도 눈부시게 작동을 시작했다. 아니 미나가 지금 보고 있는 <아메바파일>은 실상 컴퓨터 안에 있는 파일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하사 마에다가 제작한 <아메바파일>은 전산망에 걸려있는 것이 아니라 미사일 몸체안에 장착되어 있는 고성능 컴퓨터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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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캠프 데이비드의 초소 탐조등이 맹일병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측 비행장쪽으로 탐조등이 방향을 바꾸었다.
맹일병은 탐조등을 힐끔 쳐다보다가 내무반을 행해 다시 발길을 재촉했다.
산 하나를 타고 넘어야 했으니까 아직도 10여분을 더 걸어가야 했다.
이슬비가 가볍게 내리고 있었다. 맹일병은 오솔길을 접어 들다가 우측 숲 속에서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맹일병은 불빛을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군화 밑창으로 자갈돌이 밟혀왔다.
츠츠츠츠.....
맹일병은 술이 아직 덜 깬 상태였다. 그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소리가 들려 오는 방향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작은 언덕이 있었다. 접근 근지 구역.
맹일병은 잡풀을 밟으며 언덕 쪽으로 걸어갔다. 순간 맹일병은 움찔 놀랐다.
언덕쪽에서 10여명의 미군 전산요원들이 우중에 야간 작업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무슨 대형사고가 발생한 거 같았다.
캠프 어딘가에 신병기가 있다고 하던데.....
언덕아래 쪽에 있었나?...
맹일병은 몸을 뒤로 돌렸다, 빗방울이 그의 얼굴을 때리는 가운데 그는 소변을 보기 시작했다. 순간 다시 미군들이 와짝지껄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맹일병은 서둘로 언덕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맹일병이 보는 앞에서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더니,별안간 잔디의 일부분이 허공으로 붕 솟아 오르고 있었다.
맹일병은 긴장한 얼굴로 급히 가까운 나무로 기어올라갔다.
그때 별안간 지축을 흔드는 큰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동시에 언덕 한편에서 붉은 불꽃이 용광로처럼 솟아 오르는 것이 보였다.
퍼싱 2 미사일였다.
한때 유럽배치 당시에 실용성을 의심받은바 있었던 퍼싱 2 탄도 미사일이 지축을 흔들어대며 밤 하늘로 무섭게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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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산악지대의 1만미터 상공이었다. 한대의 비행기가 6시간째 휴전선을 따라 왕복하고 있었다. B707 몸체에 미 웨스팅 하우스사가 제작한 원반을 탑재한 미 공군의 조기경보기(AWACS)였다. 조깅경보기는 긴급 전문을 받자마자 후미 날개를 뒤로 잡아 당겼다. 곧바로 반원을 그리며 조기경보기는 백령도로 방향을 틀었다.

같은 시각. 대전 공군 기지에서는 폭우를 뚫고 5대의 전투기가 긴급 발진을 하고 있었다. LANTIRN(야간저고도 항법장치)가 부착된 C/D block 50 기종의 F-16 전투기였다.

마하 0.7의 속도였다. 조기경보기가 철원 상공을 통과할 무렵 오른쪽에서 북한의 미그기가 따라 붙었지만 잠시 후에 그것은 짙푸른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런 뒤 3분이 지났을까. 조기경보기의 첨단장비는 퍼싱 투 미사일의 진행방향을 포착한 뒤 진행방향을 산출해내고 있었다.
그것은 오산과 나와 미군기지,대전 공군기지로 긴급 전송되었고,대전 공군기지에서는 그것을 또 다시 5대의 F-16 조종사에게 재빠르게 전송을 했다.
조기경보기가 속도를 늦춘 것은 백령도 상공에 도달할 무렵이었다. 낙뢰가 조기경보기의 버섯모양 원반 바깥으로 튕겨 나가면서,한번에 600대의 적기를 포착할 수 있는 조기경보기의 첨단 레이더망에 정체불명의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퍼싱 투가 아니었다. 대전에서 날아오는 5개의 점은 F-16이 분명했지만,지금 보이는 3대의 비행물체는 백령도 서단 자유항공 지역에서 손살같이 올라오고 있었다.
다시 낙뢰가 떨어지자 비행물체 3대의 윤곽이 똑바르게 식별되었다.
미국산 조기경보기보다 성능이 우수한 E-767 조기경보기였다. 그리고 나머지 두대는 미쯔비시산 F-1 지원전투기로 한국 상황을 긴급 관측하기 위해 제주도 남단을 우회하여 서해로 올라오는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 정찰비행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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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호차. 용의자를 포착했다. 다카시마 백화점 앞이다!!"
경찰차의 확성기에서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곧이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경찰차가 급정거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준은 지하 쇼핑가 앞 도로를 건너가고 있었다.
심장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존은 도로 한가운데에 멈추어 서 있었다. 먹이를 발견한 하이에나가 사방에서 나타나듯,경찰차들이 급정거를 하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지축을 흔들었다. 등 뒤로는 3대. 그리고 백화점 방향으로는 5대의 경찰차가 김준의 길목을 차단하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는 가방을 버려라. 가방을 버려라."
우측 3번째 경찰차에서 내린 사내가 확성기를 통해 김준에게 지시를 하고 있었다. 동시에 약속이나 한 듯 앞 뒤로 10명의 경찰이 모두 김준을 향해 권총을 겨누어 왔다.

진광섭의 자동차는 나니와 전철역 앞에 막 도착하고 있었다. 광섭의 눈에 붉은 경관등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도로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내의 모습도 보였다.
"미쳤군요...!"
진광섭의 옆좌석에 앉아있는 이상운이가 어이가 없었는지 탄식을 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거 눈감아야 합니까,아니면 도와주어야 합니까?"
이상운이 다시 묻자 광섭은 얼굴을 잔득 찡그렸다. 김준을 빼내오기 위해 일본경찰을 곧장 덮칠 수는 없었다. 자동차 넘버만 보면 영사관 자동차라는 것을 손쉽게 알아낼 터이니까.
하지만 눈앞에서 김준이 내각정보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준을 강력송환하라는 김달영 안기부 차장의 지시 때문이 아니라 이건 진광섭 자존심과 관련된 일이었다.
광섭은 골치가 아픈지 잔뜩 구겨진 얼굴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다무라구미田村組는 어디에 있나?"
"10분 거리에 있습니다만. 다무라구미를 투입할 생각이십니까?"
"그래. 지금 연락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이상운은 곧바로 핸드폰을 품에서 꺼내 들었다. 다무라구미는 대외적으로 공개할 수 없는 작업을 할 시에 안기부측에서 고용하는 야쿠자 조직이었다.
실상 강력 안기부라고 하지만 해외에서의 수사활동은 많은 제약이 있었다.
특히 일본 경찰과 맞불을 할 경우에는 많은 조심을 해야 했다. 이 때문에 가끔 한국계 야쿠자를 동원해 수사를 하거나,일본경찰의 수사를 방해하곤 했는데 이중 다무라구미는 광섭과 몇 차례 손을 잡은 적이 있었다.
광섭은 섭섭한건지 화가 난 건지 자신의 감정을 알수 없었다. 방금전에 미사일 한발이 북쪽으로 발사되었다는 전갈을 들어서인지 타이슨에게 한방 맞은 기분이 들어 있었다. 이 어려운 순간에,용의자로 지목된 김준은 일본 경찰로 넘어갈 위기에 빠져 있다. 그걸 알면서도 빼 내지를 못하는 건 어쩌면 국력의 차이인지 모른다. 대쪽 진광섭마저 이럴때는 머리가 바이러스에 걸린듯 활동을 하지 못했다.
이상운도 광섭의 기분을 아는지 조용한 음성으로 다무라구미의 한국인 보스와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통화가 막 끝나갈 무렵이었다.
갑자기 다카시마 백화점 저쪽에서 초스피드로 트럭 한대가 달려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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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가 마에다의 파일을 패치한 뒤 미사일을 발사시킨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니쓰라 경감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신주쿠 주택가를 올라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를 했는지 2층 양옥으로 된 고바야시의 저택은 멀리서도 분위기가 색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미나의 집은 고바야시의 저택 뒤쪽이었다. 재래식 일본 가옥으로 비온 뒤에 바라보는 것이라 한층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오니쓰라는 미나의 집을 한바퀴 돈 뒤 자신의 구두를 내려다보았다.
구두를 신고 오다니....아식스를 준비하는 건데 말야...
오니쓰라는 사복 차림이었기 때문에 어쩐지 기분이 썰렁했다.
오니쓰라는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 쓰레기통 위로 올라섰다. 밤 11시경인데도 뒷마당 쪽에 있는 방에만 불이 켜져 있다. 푸른색이었다.
오니쓰라는 미나의 의붓오빠인 하야시가 기거한다는 다락방을 눈짐작으로 찾아 보았다. 다락방 불은 꺼져 있었다. 오니쓰라는 길게 호흡을 조종하고 주위를 살피더니,홀스트의 권총을 허리뒤 벨트 안으로 삽입했다. 문득 북쪽 주택가 너머로 유서 깊은 하숙집 가나기원의 울창한 정원수가 보였다.
오니쓰라는 가볍게 호흡을 조종하더니,40대 답지 않게 잽싸게 담벼락을 타고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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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뭐야?"
경찰 하나가 등뒤에서 달려오는 트럭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트럭을 막아! 막으란 말야!!"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트럭 한대가 백화점 뒤쪽에서 손살같이 튀어 나오는가 했더니,곧장 경찰차를 향해 폭풍노도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에서 총구가 불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숫자를 10발을 헤아리기도 전에 경찰들의 공격은 중단되었다.
"흩어져! 미친 놈이다!!!"
콰콰콰--------
이미 두대의 경찰차가 트럭에 들이박혀 뒤집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트럭은 도로 중앙에 서있는 김준의 코앞에서 급정거를 했다.
준은 황당한 얼굴로 트럭을 올려다보았다.
척!
트럭 문이 준의 눈앞에서 열렸다.
나디아였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자는 나디아가 분명했다.
"김준씨. 여자를 속타게 하는 게 장기인가 보군요. 어서 올라 타시죠."
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트럭의 좌우를 보았다. 두대의 경찰차가 꼴 나쁘게 부서져 있었고,10여명의 경찰들은 권총을 겨눈 상태에서 이것도 저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준은 서둘러 트럭에 올라탔다. 아니 유유히 올라탔을 것이다. 준이 트럭에 올라 타자 나디아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다시금 트럭은 두대의 경찰차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이번에는 불도저처럼 우악스럽게 경찰차를 밀고 나가며 길을 만들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측에서 경찰차 한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발랑 뒤집어 졌다.
준은 멍한 눈으로 백미러를 응시하다가 어쩐지 무엇인가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명의 경찰중 쫓아오려고 생각을 가진 경찰은 한 사람도 없어 보였고, 모두 블랙마술에라도 걸렸는지 잔뜩 웅크린 채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해할 수 없군. 왜 총을 안 쏘는 거지? 나디아가 경찰들에게 최면술이라도 걸었나?"
나디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짧게 말했다.
"왕자님. 이 차 유조차에요. 저라면 유조차를 상태로 총을 쏘지는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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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렉터 콜렉터 콜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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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랐다. 3대의 경찰차가 우당탕거리며 유조차 뒤를 따라 붙는다.
우측으로는 오사카 사카이선 고속도로가 보였다.
"어떻게 된 거에요? 내가 방금 일본 수상이라도 살해한 거에요?"
신속하게 따라 붙는 일본 경찰들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나디아는 백미러를 응시하며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그녀의 입술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이번에는 자책을 하는 거 같다.
"어휴,이상하네! 난 콘도를 사겠다고 꼬박꼬박 저축을 했는데...왜 경찰에게 쫓겨야 하는 거지?"
그 사이에 따라 붙는 경찰차는 7대로 늘어나고 있었다.
"아니 지금 공부를 하는 거에요?"
이 와중에도 컴퓨터다.
김준은 라이터 점화기와 노트북을 카잭으로 연결하고 있었다. 그런 뒤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빠르게 굴러갔지만 나디아는 약이 바짝 올랐다.
"나 피곤해요! 운전을 대신 해주던가,아니면 제트기를 예약해 주세요!"
유조차 우측에서 막 경찰차 한대가 긴박하게 달려나오고 있었다. 준은 경찰차를 보다가 나디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도로 상황을 파악했어! 가다가 우측으로 꺾으면 오사카 만이 나온 다는 군."
"그건 나도 알아요! 지금 필요한 건 그게 아니라 경찰차를 따돌릴 방법이에요!"
나디아가 말하자 준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노트북에 연결된 마이크로폰의 볼륨을 높였다. 곧바로 복잡한 교신음이 마이크로폰에서 터져 나왔다.
"제트기가 없다는 군. 대신 경찰 교신을 도청했는데 이건 어때?"
그러고보니 경찰 교신음이 노트북을 통해 들려오고 있다.
"설마? 지금까지 경찰 교신을 도청하고 있었어요?"
나디아는 깜짝 놀랬다. 이제 보니까 김준은 오른쪽 귀에 워커맨 헤드폰을 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헤드폰 선은 노트북의 마이크로폰 단자에 달려 있는 잭과 연결 되어 있었다.
"경찰들은 마쓰리 축제때문에 모두 도오톤보리 운하에 몰려 있어! 이 때문에 항구 쪽은 텅텅 비어 있을 거야."
지금도 김준은 핸드폰을 이용해 경찰 교신음을 도청하고 있었다. 우선은 경시청 컴퓨터에 접속을 한 뒤,오사카 교통 관리 시스템과 오사카 경찰청 무선 관리국 전파를 잡은 것이다.
"자신할 수 있어요? 오사카 항에는 경찰이 없는 거?"
준은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뒤에는 경찰이 많군."
"그래요. 정답이네요. 여기서 도망가는 게 급선무에요!"
"그런가?"
김준은 차 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두대의 경찰차가 유조차를 추훨해가고 있었다. 추월한 뒤에는,꼴 나쁘게도 유조차의 진로를 가로막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경찰차 뒷좌석에 앉아 있는 경관 두놈이 권총을 꺼내는 모습이 준의 시야에 들어왔다.
"우릴 벌집으로 만들 생각인가?"
준은 나디아를 응시하며 비쩍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정말 해커가 된 게 후회가 되는 군! 차라리 뻐꾸기 시계나 만들면서 사는 건데 말야!"
나디아는 슬며시 미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영화 <제3의 사나이>에 나오는 대사가 떠올랐던 모양이다.
"인간이 한 것은 뻐꾸기 시계를 만든 거 밖에 없다는 거에요? 그런 말 이제 하지 마세요. 나 정말 뚜껑 열 거에요!"
나디아는 그렇게 말을 한 뒤 신경질적으로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이번에는 좌측에서 시속 90Km의 속도로 경찰차 한대가 따라붙고 있었다.
시나노 곤베이를 태운 헬기는 막 오사카 상공에 진입을 하고 있었다. 곤베이의 눈에 오사카 야경이 내려다 보였다.
"막아! 속도를 떨구어 놓고 내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란 말야! 곧 고공침투조를 투입할 것이다!"
곤베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등 뒤 어둠 속에서 4대의 헬기가 복잡하게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곤베이는 헬기를 돌아다보다가 다시 핸드폰 스위치를 올렸다. 곧바로 방위청 지하에 있는 전산실이 연결되었다.
궁금했다. 한국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던데...어떻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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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님. 미사일의 벡타가 지금도 수상합니다!"
"이해할수 없군. 아직도 벡타를 산출하지 못했단 말인가?"
오산 미군 기지 안은 계속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30명이나 되는 기지 요원들이 퍼싱 투 미사일을 추적하고 있었지만,벡타때문에 아직도 미사일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속도 때문이었다. 마하 12까지 가능한 퍼싱 투 미사일이 지금은 마하 0.2에서 마하 3 사이를 왕복하면서 저속 비행을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자동 네비게이트 화면이 미사일의 목적지를 추적하다가도 5초 간격으로 착오를 보이고 있었다.
음성이 들려 왔다.
"처음부터 비행 속도가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날아가는 속도가 빨랐다 느렸다 하기 때문에 도무지 미사일이 떨어질 장소를 파악할수 없습니다!"
탄도 미사일의 표적지는 벡타에 의해 찾아낼수 있었다. 벡타란 탄도 미사일의 발사속도를 말하는 것으로 속도가 빠를 수록 큰 포물선을 긋기 때문에 먼거리까지 날아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덕저도와 연평도 중간 밤하늘 어딘가에 있을 퍼싱 투 미사일의 비행 속도는 전혀 일정하지가 않았다. 더구나 퍼싱 투는 관성 유도방식과 레이더 유도방식을 복합적으로 채용하는 골치덩이였다. 이 때문에 벡타를 측정해 보았자,예정 목적지가 어디인지 제대로 가늠이 되지 않는다.
"저러다 정말 평양에 떨어지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
사령관이 일갈을 하자 다시 기지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평양으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전쟁이 일어나는 것일까.
"개미떼가 나타났습니다!!"
중앙 모니터는 23시 45분부터 서해 상공에 나타난 일본 국적기의 움직임을 쫓고 있었다. 그러다가 방금 휴전선 저쪽에 나타난 30대의 미그기를 쫓기 위해 화면이 바뀌었다.
"공군 사령부는 뭐하고 있소? 미사일을 찾아낸다고 하지 않았소?"
뒤에 서 있는 공군 소장이 대답했다.
"그게 말입니다. 폭우속에 미사일을 찾아 나선다는 것이..."
모두 잔득 긴장을 하고 있었다. 아니 사실상 불안했다. 이미 전방 부대는 데프콘 2의 강경 비상 체제에 돌입을 했는데,탄현에 있는 9사단 포대의 대포들 역시 임진강 건너를 겨눈 상태에서 혹시나 벌어질지 모르는 개전 상황에 대비를 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미사일의 향방이었다. 지금은 어디로 떨어지느냐가 아니었다.
구차했다.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북쪽 영공으로 들어가기 전에 요격에 성공해야 했다. 그게 한국 대통령의 지시었다.
사령관이 침묵에 빠져 있을 때 요원 하나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퍼싱 투 미사일을 콘택트contact했다는 연락이 공군사령부에서 왔습니다!"
아연 사령실 안은 회색 빛이 돌기 시작했다. 사령관은 기쁨에 넘쳐 외쳤다.
"미사일을 무링(mooring:항공기 용어.계류)할 방법이 있으니까 게속 콘택트 비행을 하라고 전해!"
"공군사령부를 연결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군사령부 회선이 연결되고 있었다. 그러자 F-16 조종사 간의 교신이 들려 왔다.
"퍼싱 투는 전방 7.5NM 우측에 있습니다. 로저."
7.5NM이면 약 12Km 정도의 거리였다.
"웅진 반도입니다. 미사일이 곧 휴전선을 넘어 갈 거 같은데요..."
조종사들간의 교신이 들려 오면서 중앙상황판은 곧바로 TACAN이 모니터링되기 시작했다. 전투기가 발사한 전파를 잡은 대전 공군 사령부가 그 전파를 이용해서 현재 전투기의 방위와 위치를 산출해 내는 화면이었다.
퍼싱 투 미사일의 움직임도 오른쪽 화면에서 잡혀 오고 있었다. 이 화면은 다섯대의 F-16 전투기가 잡은 퍼싱 투 미사일의 움직임이었다. 폭우가 심한 거 같았다. 다시 조종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지금 35노트의 남동풍이 불고 있습니다. 계산해 주십시오!"
조종사의 음성이 끝나자 사령관은 공군 소장을 돌아다보았다.
"계산해 달라니,무슨 뜻이오?"
소장이 대답했다.
"바람 때문에 미사일에 글라이드(동력 없이 비행하는 일)가 걸린다는 뜻입니다. 바람이 강하면 바주카폭탄도 날아가다가 방향이 꺾이는 경우가 종종있지요."
"그럼 어떻게 되는 것이오?"
"국방부가 결정했던대로 입니다. 폭우때문에 열추적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레이저 추적도 신뢰를 할 수 없으니...모든 방법을 동원해 보아야겠지요."
"좋소. 계속 콘택트 플라잉을 하라고 지시하시오!"
콘택트 프라잉Contact Flying이란 조종사가 지상참조물에 의해 비행 자세나 위치를 결정하여 공중 조작을 수행하는 비행행위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퍼싱 투 미사일을 눈으로 쫓아가면서 비행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럽시다. 이제 위치를 알았으니까 빨리 요격기를 발진시켜 봅시다."
사령관은 소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령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있었다. 미사일이 아니라 지금 같아선 미사일 할아비라도 쫓아가서 잡을 수 있을 거 같았다. 하기야 한갓 해커때문에 전쟁이 발생한다면 이 또한 무슨 창피인가...
사령관은 전화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전화는 곧장 용산 국방부로 연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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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미나는 콘택트렌즈를 교체하다가 불안스럽게 두 눈을 움직였다.
아까부터 그녀의 입에서는 괴이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지금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녀의 수영 선수같이 딱 벌어진 어깨가 흔들 거렷다.
첫번째 방해 공작은 생각보다 만족할 만했다. 비록 미사일의 표적지를 해킹하는 일은 실패를 했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그때는 단지 시간만 당겨보겠다는 생각을 했었을 뿐이니까.
미나는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나는 북한의 평양전산센터 전산망을 재빠르게 찾아갔다.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두 눈은 욕구불만으로 꽉 차 있었다.
평양전산센터로 들어가는 일은 간단했다. 역시 하사 마에다가 만들어 놓은 프로그램은 사방으로 통하고 있었다. 이미 그가 길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미나는 한시간전과 마찬가지로 아이디를 <東急HACK>로 바꾸었다.
이때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거실에서 들려 왔다. 미나는 깜짝 놀란 눈으로 거실로 나 있는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오니쓰라 경감은 정원 옆쪽에 있는 목조건물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기침소리가 들려 왔지만 다시 조용해진다. 오니쓰라는 소리를 쫓아 몸을 손살같이 움직여 갔다. 거실 유리창이 보였다. 오니쓰라는 마른 침을 삼키며 거실 안을 살피다가 다시 본체 뒤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뛰어가다 말고 오니쓰라는 냄새를 맡았다. 지하실 환풍구였다. 나무 판자로 막혀 있는 지하실 환풍구 안에서 담배 냄새가 올라오고 있었다.
오니쓰라는 재빠르게 45구경 권총을 꺼내 들었다.

후꾸오 미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거실의 어둠속에서 오니쓰라 경감의 움직임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니쓰라가 뒤쪽으로 사라지자 주방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녀는 주방에서 뒷마당으로 나 있는 문을 유령처럼 응시하다가 그 우측에 있는 다용도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잡아 당겼다. 식은 땀이 흘러 내렸다.
처음에는 자잘한 공구박스가 미나의 손에 만져지고 있었다. 미나는 화가 났는지 신경질적으로 손을 움직였다.
"아얏!"
미나는 눈을 부라렸다.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고,유방이 수축되었다. 손가락을 치켜세우니까 검지손가락에서 핏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입에 문 상태에서 이번에는 다른 쪽 손으로 공구실 안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곧바로 긴 줄이 달려 있는 낫이 그녀의 손에 잡혀 왔다. 그 아래쪽으로는 자동 못박는 기계가 있었다.
미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낫 손잡이에 달려 있는 줄을 잡았다.
츄릿릿릿릿-----
낫은 경쾌한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갔다. 그러다가 요요처럼 미나의 손으로 다시 뒤돌아 온다. 마치 부메랑이 날아가다가 돌아오는 것과 흡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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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이었다. 고작 10여대에 불과했던 경찰차는 이미 20여대로 늘어나 유조차를 거미줄처럼 포위하며 달려가고 있었다. 이들중 유조차의 진행방행을 막으며 달려가는 경찰차는 4대였고,유조차의 좌측과 우측에도 경찰차가 진로를 막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아마 누군가가 신호를 했던 모양이다. 유조차의 앞쪽에서 달리던 4대의 경찰차가 동시에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동시에 좌측과 우측에서 달리던 경찰차도 속도를 늦추면서 간격을 좁혀 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더럭 겁이 났다. 이상했다. 전방에서 달려나가는 경찰차들이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속도를 늦추고 있었는데,이제 보니까 경찰차들이 사방에서 병풍을 치듯 포위하면서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왜 속도를 늦추는 거죠?"
경찰차와 충돌하지 않기 위해 나디아는 유조차의 속도를 시속 70Km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우리를 완전히 잡을 생각인거 같은데?"
"어떻게 하죠?"
"그대로 돌파할 수 있겠어?"
"자신이 없어요. 지금 생각을 해 보니까,난 뻐꾸기 시계를 만들어 본 경험도 없어요."
한국에서는 뻐꾸기 시계를 만들다가 도산한 기업이 많다.
"방법이 없어. 앞 차를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농담하지 마세요. 앞 차는 경찰차란 말에요."
"아까는 경찰차가 아니었나?"
"아까는 내 정신이 아니었죠. 그리고 행운이 두번 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난."
경찰차가 앞 뒤에서 거리를 좁혀 오자 나디아는 겁을 먹기 시작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전방에서 달려나가는 경찰차는 다시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나디아 역시 경찰차와 보조를 맞추기 위해 유조차의 속도를 급격하게 늦추고 있었다. 그녀는 곤베이가 파 놓은 함정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 같다.
간사이 공항에서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있었다. 나디아는 비행기를 힐끔 올려다보다가 비쩍 마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 이젠 그만 항복할까요?"
나디아는 속도계를 내려다보았다. 속도는 시속 40Km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뭐해요? 또?"
나디아는 내심 불안한지 김준을 돌아다보았다. 준은 컴퓨터를 두들기고 있었다.
"나,죽을 때까지 책임지라는 말은 안하겠어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책임을 져야 해요. 제발... 그 컴퓨터 오락은 그만 하세요..."
그렇게 말을 한 뒤 나디아는 슬며시 액셀레이터를 밟아 보았다. 뒷바퀴에서 요란하게 자갈 하나가 튀어 오르더니,우측에서 달리는 경찰차의 유리창을 두들겨 댔다.
준은 우측에서 달리는 경찰차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한데....한국 말이 들려 오는데? 어떻게 된거지?"
"예?"
준은 빠르게 마이크로폰의 볼륨을 높였다. 이상운과 동료들 간의 핸드폰 통화가 혼선되어 들려 오고 있었다.
"아는 사람이에요?"
"글쎄..."
준은 고개를 가웃뚱했다. 그러고보니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음성이다.
불쑥 가나기원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안기부가 오사카에 와 있단 말인가....?
나디아의 음성이 들렸다.
"설마 안기부가...?"
"이 근처에 있는 거 같은데?"
"그렇군요. 그렇다면 우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모르겠어. 그 친구들을 찾아봐야겠어."
그렇게 말을 하다가,준은 생각을 바꾸고 키보드를 빠르게 두들겼다. 곧바로 서울에 있는 안기부의 인터넷 사이트 IP(주소)가 떠올랐다.
"뭐하는 거에요?"
나디아가 되물었지만,준은 대답을 하지 않고 워커맨의 DAT 테입을 바꾸어 끼고 있었다. 그런 뒤 노트북의 프린터포트에 워커맨을 연결했다. 나디아가 다시 물었다.
"설마...자료를 보낼 생각이에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김준은 빠르게 자신의 54,400bps 파워 모뎀을 가동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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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싱 투 미사일은 대연평도 상공을 이제 막 벗어나고 있다. 자정 정각. 곧장 탄두 아래로 청린도 지역이 내려다 보였다.
이 상황은 오산 기지 상황판에 나타나고 있었다. F-16의 자동카메라가 미사일의 스테인리스같은 후미 불꽃을 계속 찍어 가고 있었는데,그 자료를 전송받은 컴퓨터는 계속 미사일의 위치를 스크랩하고 있었다.
계속 팽팽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대기권밖에 있는 미제 군사위성이 퍼싱 투의 정확한 항로를 추적해낼때까지는 이 긴장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사령관의 시선은 다시 웅진반도 지역이 모니터되는 화면으로 이동했다.
웅진반도는 흡사 배부른 임신부처럼 아래쪽으로 튀어 나와 있다. 그곳을 향해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니...사령관은 도무지 믿을수가 없었다. 꿈인가.
불안했다. 그대로 떨어진다면 웅진반도는 반쯤 날아갈 것이다. 아니 실제로는 단 몇 킬로그램 밖에 안되는 폭약이 장착되었다고 했다. 다행히 퍼싱 투 미사일은 핵폭탄을 유동적으로 장착할 수 있는 미사일였다. 핵은 없다고 했었지...분명히 그렇게 전해 들은거 같다. 국방부 장관 말로는 오산기지에는 핵이 없다고 했었다.
"아직 소식이 없나?"
"지금 이동중이랍니다!"
"몇 분 남았나?"
"45초입니다. 45초 뒤면 퍼싱 투는 북한 영공으로 진입을 합니다!"
사령관은 바르르 입술을 떨었다.
"요격은 언제 시작되나?"
"15초 뒤입니다!"
부관의 말이 끝난 뒤 5초가량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대기권밖에 떠 있던 군사위성이 사방에서 전달받은 자료의 연산을 막 끝내고 있었다. 이중에는 조기경계기가 잡은 전파자료와 5대의 F-16 전투기가 콘택트한 화상자료가 있었다.
2초 뒤. 이번에는 대연평도 상공 폭우속에서 느리게 비행을 하던 5대의 F-16 전투기 밑에서 별안간 검은색 물체가 불쑥 떠올랐다. 한시간전부터 휴전선을 따라 잠행을 하던 두대의 A-10 선더볼트 공격기였다. 이들이 나타나자 F-16 전투기는 약속이나 한 듯 우측으로 뱅크비행에 들어갔다. 그들이 폭우 속으로 종적을 감추기에는 채 1초도 필요하지가 않았다.
동시에 두대의 선더볼트기중 오른쪽에 있는 공격기의 하드포인트 미사일 런처에서 불꽃이 튀는 게 보였다.
세미액티브 유도방식의 미사일.
장갑차를 뚫을 수 있다는 API(철갑소이탄)이 매분마다 4,200발 자동발사되는 장치가 교묘하게 부착된 세미액티브유도방식의 이 미사일은 퍼싱 투 미사일을 찾아 폭우속을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55초 뒤.
연평도 북방 휴전선 너머의 밤하늘에서 스테인리스 불꽃이 잠깐 작렬했다.
세미엑티브 유도방식의 미사일이 북한 영공으로 진출하는 퍼싱 투 미사일을 쫓아간 뒤에,4,200발의 철갑소이탄으로 퍼싱 투를 무차별하게 요격한 것이다.
요격에 성공하자 오산 기지안은 떠들석한 환호성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야간에 벌어졌던 최첨단 추격전에 성공을 하다니.
모두들 믿을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얌전하게 생긴 한 사내는 자신의 모니터를 묵묵히 응시한채 불안한듯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던 거 같았다.
사내의 별명은 숏다리였다. 소심한 건 아니었는데,사내는 이 별명이 싫었다.
이 숏다리라 불리는 사내가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사령관님... 방금 그놈이 나타났습니다... 동급해컵니다!!!"
갑자기 상황실 안은 찬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갖은 고생끝에 미사일을 잡았는가 했더니,이건 또 무슨 날벼락인가.
이미 상황실에 있는 30대의 모니터는 동시에 같은 동화상을 불꽃처럼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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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은 작업을 끝낸 뒤 DAT 워커맨에서 테입을 꺼냈다. 나디아는 운전을 하다말고 불안한 듯 DAT 테입을 응시했다.
"한국으로 전송했어요?"
준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유조차는 시속 30km로 달리고 있었고,이제는 속도가 만만했는지 가끔씩 경찰차들이 보디를 부딪쳐 왔다.
"정말 난리군요. 이젠 정말 포기해야 할까 봐요."
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콘도를 구입할 생각을 포기할 생각인가?"
"농담이 아니에요. 이러다 유조탱크에 불이라도 붙으면...."
"지금부터 내가 운전을 하지."
나디아는 허탈했다. 김준이 운전을 하겠다고 해서 자리를 바꿀 형편도 아니었다. 좁았다. 유조차 꼴도 말이 아니었지만,사람 꼴도 말이 아닌 것이다.
사람의 팔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도 아닌데 조수석에 앉아서 운전을 하겠다니...
"필요없어요. 운전은 나도 할수 있고,지금까지 해 온것도 바로 나에요!"
나디아는 화가 났는지 급하게 엑셀레이터를 밟았다. 곧바로 콰쾅 하면서 앞쪽에서 달려나가는 경찰차 한대가 땅콩처럼 퉁겨 올랐다.
"앞이 아니야!"
준이 서둘러 핸들을 잡아왔다. 그런 뒤 옆으로 꺾었다.
이번에는 유조차의 우측에서 악착같이 버티면서 따라오던 경찰차 한대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더니,쟁반처럼 뒤집어지고 있었다. 황당했다. 여유를 가지며 뒤따라 오던 경찰차들이 급하게 경관등을 반짝이며 싸이렌을 울리기 시작했다.
"멈춰! 너희들은 도망갈 수 없다! 차를 멈추란 말이다!!!"
요란하게 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좌측에서 따라 붙는 경찰차에서는 권총을 급하게 뻬어드는 경관의 모습이 보였다.
나디아는 우울했다.
"틀렸어요...이젠 총을 사용할 생각인가 보네요. 왜 지금까지 안쏘는지 모르겠네요. 그쵸?..."
나디아는 전의를 잃은거 같았다. 그녀는 유조차의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웬일인지 웃음이 나왔다. 나디아는 씁쓰레한 눈으로 전방을 응시했다.
그때 갑자기 나디아의 얼굴이 후끈 달아 올랐다.

퍼엉--------------------!!!!

믿을수 없는 광경이었다. 갑자기 앞쪽에서 달리던 경찰차 한대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화염을 토하고 있었다.
"뭐에요? 저건?"

나디아가 입을 벌리며 놀라고 있을 때 이상운은 오사카 페리터미날 앞에 주차한 자가용안에서 쌍안경으로 어둠 속을 내다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았다.
이상운은 풀이 죽은 얼굴로 진광섭을 향해 돌아다보았다.
"여기서는 안보입니다. 설마 우리 때문에 상황이 더 복잡해 진 것은 아니겠지요?"
진광섭은 대답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무릎팍에 올려져 있는 노트북을 차가운 눈으로 응시하다가 구강향수를 꺼내 입안에 치익 뿌렸다.
"다무라구미 조장에게 두번째 로켓탄이 장탄 되었나 물어 봐."
이상운이 대답했다.
"예. 이미 준비했습니다.."
"한방 더 쏘라고 해라."
광섭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상운은 핸드폰에 대고 크게 외쳤다.
"파이어!"

다시 밤하늘을 가르는 무쇠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퍼엉-------------!!!!!
미제 RPG 7 대전차 로켓 발사기에서 날아온 82mm 히트탄이 이번에는 유조차의 오른편에서 달려가는 경찰차의 보디에 힘차게 박혀 왔다.
동시에 경찰차는 요란하게 타이어 바퀴를 토해 낸다. 화염은 방금 전보다 컸다.
밤하늘을 향해 무섭게 불꽃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저게 뭐에요? 누가 로켓탄을 쏘아 대고 있어요!!!"
나디아는 겁을 먹고 핸들을 좌측으로 꺾었다. 불꽃이 유조탱크를 덮쳐 오고 있었다.
"안기부의 지원이야."
준은 비쩍 미소를 지으며 옆쪽에서 불이 붙은채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경찰차를 보았다. 그러다가 눈길을 사카이 고속도로로 옮겼다. 로켓탄은 사카이 고속도로를 달리는 콘테이너 트럭 상단 부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정말 안기부에요?"
"그래. 제법 빠른데?"
준은 히쭉 웃으면서 이상운의 얼굴을 떠 올렸다. 그러다가 노트북의 핸드폰 전화 라인을 열어 놓았다. 곧바로 마이크로폰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를 걸어온 것은 이상운이 아니라 진광섭였다.
"과장님. 깨 부십시다! 더 깨부숩시다!"
이상운은 무전기에서 들려 오는 폭발음을 들으며 신나게 외치고 있었다.
진광섭은 그 옆에 서서 김준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김준. 길은 자네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한가지 확인할게 있어."
광섭은 자세 그대로 말을 계속했다.
"자네가 날려 온 방위청 극비는 사실인가?"
준의 음성이 들려왔다. 광섭은 묵묵히 김준의 설명을 들었다. 그의 선글라스는 야릇하게 빛을 반사한다.
"왜 이제야 알려 주는 것인가? 그동안 나에게 손을 내밀 기회는 충분히 많았을텐데?"
광섭은 그렇게 말을 하다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아냐,좋아. 이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는 게 좋겠군."
광섭은 느린 속도로 핸드폰 스위치를 내렸다. 밤하늘에서 헬기 다섯 대가 긴급히 날아오는 것이 진광섭의 선글라스에 비치고 있었다.

곤베이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헬기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조종사의 음성이 들려 왔다.
"4시방향,사카이 고속도로 위에 있는 콘테이너 트럭입니다. 육좌님!"
빡가야로...
곤베이는 이마가 후끈거렸다.
방위청 전산팀이 미군 함대통신망을 도청한 결과,한국 측에서 미사일을 교묘하게 요격을 했다는 소식을 방금 들은 터였다. 하지만 오키나와 시스템은 생각과는 달리 7개의 시스템중 6개를 건졌고,1개의 내용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아메바> 파일인거 같은데 아무래도 오산에 심어져 있는 것과 같은 종류였다. 이 때문에 곤베이는 슬며시 겁이 나던 차였다.
아메바 파일까지 동원하다니. 이건 장난이 아닌 것이다.
곤베이는 종잡을 수 없었다. 별반 음모가 아니라 미치광이 프로그래머가 개입되었다는 생각도 들었고,이제는 김준이 지독하게 유희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니면 또다른 전문가가 붙어 있던지...
어쩌면 오키나와 기지에 심어져 있는 아메바 파일 역시 미사일을 실제로 발사시키는 프로그램인지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오사카로 날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뒤 김준인지 뭔지 하는 한국놈을 잡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자신의 눈 앞에서 두대의 경찰차가 불태워지고 있었다.
화가 났다.
"지시 변경한다! 고공침투조는 양쪽으로 분산 이동하라. 하나는 콘테이너 트럭을 커버하고 다른 한 팀은 유조차를 쫓아! 뭐하고 있나, 당장 시작하지 않고!"
그렇게 말을 한 뒤 곤베이는 자세 그대로 헬기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손엔 핸드폰,왼쪽손엔 무전기가 들려 있고 혁대 뒤로는 삐삐가 보인다.
4대의 헬기는 곤베이의 지시가 끝나자마자 복잡하게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측 두대는 레프트 턴으로 돌았고,다른 두대는 라이트 턴으로 긴박하게 하강을 했다.
라이트 턴으로 돌았던 두대의 헬기는 곧장 유조차를 쫓아 비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다시 82mm 히트탄의 모터가 날카롭게 밤하늘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12초 뒤. 이번에는 유조차를 쫓아가던 두대의 헬기중 오른쪽에 있는 헬기가 화염에 휩싸이는 것이 곤베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할 말이 없었다.

이상운은 입이 벌어졌다. 아니 이제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진광섭이 곤베이와 맞불할때 끝까지 간다는 소문을 들어왔지만 이정도일줄이야. 이젠 슬며시 겁이 났다. 이상운은 밤하늘에서 크게 작렬하는 헬기를 못내 떨구며 진광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광섭은 자판기에서 종이커피를 뽑아 오고 있었다.
"과장님...지금 너무 일이 커지고 있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수습을 하시려고 내각정보국 헬기까지 잡으십니까?"
광섭의 흰머리는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됐어. 이제 다무라구미 애들에게는 철수를 하라고 해라. 나도 이쯤에서 끝내는 게 좋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트륨 등 때문인지 모른다. 상운의 눈에는 광섭의 모습이 이상하게도 희미하게 보인다.
"알,알겠습니다..."
상운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콘테이너 트럭에 연락을 했다.
잠시 뒤,이번에는 콘테이너 트럭이 고속도로 위에서 크게 폭발을 시작했다.
정확했다. 항상 다무라구미가 하는 수법인 것이다.
진광섭은 폭팔하는 콘테이너를 응시하다가 자가용으로 걸어갔다. 이상운이 한발자국 앞서 뛰어가서 뒷좌석 문을 열어 준다. 광섭은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면서 중얼거렸다.
"하사 마에다라...어쩐지 이상하다 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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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니쓰라 경감은 뒷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방에 있는 방의 불이 꺼져 있었다. 아까는 분명이 불이 켜져 있었는데...
미나라는 아가씨의 방이었을 것이다.
오니쓰라는 커튼이 내려져 있는 창을 응시하다가 다시 인기척 소리를 들었다.
등 뒤였다. 지하실로 내려가는 철문 안에서 들리는 소리다. 누군가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다가 멈춘 게 분명했다.
오니쓰라는 권총을 두손으로 쥐고,철문으로 조심스럽게 접근을 했다.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가 무언인가가 드르륵 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쥐였다. 쥐새끼가 앞 발톱으로 철문을 갈아대고 있었다.
오니쓰라는 포켓에서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이때 이번에는 주방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니쓰라는 잽싸게 벽에다가 몸을 붙였다.
그런 뒤 포복을 하듯 주방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가 걸음을 멈추었을 것이다.
바로 앞에는 만화가 고바야시의 집이 있었다. 욕실 창이었다. 욕실 안에서 고바야시가 이쪽을 본다고 했던가...?
그렇다면...등 뒤가 바로 이즈의 할멈 방이라는 뜻인데...
이상했다. 바람이 오니쓰라의 등 뒤에서 흐믈흐믈 불어오고 있었다. 머리 위였다. 겁이 났다. 창문이 열려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오니쓰라의 뇌리에 떠올랐을 것이다. 그때 철커덕하는 소리가 오니쓰라의 귀에 들려왔다. 곧바로 오니쓰라의 다리 밑으로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뒤 한참이 지났다.
오니쓰라의 몸은 벽에 그대로 붙어 있었고,그의 권총 역시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붙어 있지 않았다.

미나는 방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오니쓰라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뒤,미나는 그것을 축구볼 차듯 맨발로 툭툭 차기 시작했다.
그런 뒤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걸어갔다. 아무래도 평양전산센터 일이 더 궁금했다.
미나가 평양전산센터로 다시 접속을 했을 때는 이미 누군가가 다녀가 흔적이 있었다. 하사 마에다가 북조선 미사일에 심어 놓은 아메바 파일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욕설이 나왔다. 그녀는 피가 뭍어있는 손으로 키보드를 두들겨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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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안개가 끼어 있는 가운데 에스파스 밴이 급정거를 하고 있었다.
하사 마에다의 낌새가 이상했다. 호리시마 란조는 잔득 긴장한 얼굴로 뒤를 돌아다 보았다. 흐릿한 실내등 아래로 마에다 1위의 모습이 보였다.
"왜 그러십니까? 어디 아프십니까?...."
란조가 묻자 마에다는 충혈된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다시 뜨거운 국물같은 신음소리가 그의 목에서 흘러 나왔다.
"란조 2위... 지금 어느 놈이 별반 계획을 망치고 있다..."
"설마...? 그럴리가요?"
란조는 서둘러 마에다가 응시하고 있는 17인치 모니터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노트북 컴퓨터의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 ACCESS OK
>> 3928-2927
>> 신주쿠 3정목...

란조는 모니터 화면에 떠있는 전화번호를 응시하다가 잔득 수축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그...전화번호는 누구 것입니까? 아는 사람입니까?"
"모른다."
"그,그럼...?"
"내가 아는 것은 이 개자식이 내 계획을 망치고 있다는 것이다!"
퍼억-----
마에다의 음성이 끝나기 무섭게 17인치 소니 모니터가 란조의 눈앞에서 크게 작렬을 했다.
마에다의 주먹이 소니 모니터를 뚫고 들어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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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지막으로 본 김준의 모습
============================================================
5개의 날개 로터를 가지고 있는 소련제 밀 후크 헬기가 폐쇄된 해주항로를 날아오는게 보였다. 군인들은 용당포 포구에 도열해 있었다.
잠시 뒤. 헬기는 2.5톤의 동체를 비스듬히 꺽으며 폭우속에 임시가설된 헬기장으로 내려 섰다. 곧바로 헬기안에서 인민무력 부장 윤철의 음성이 들려왔다.
"미사일 잔해를 건졌다 이 말이지?"
"그럽습네다. 1시간 20분 가량 되었습니다!"
"그래,수고했다. 어느 동무가 건졌는지 이리 와보라고 하라우."
헬기에서 인민무력부 부장 윤철이 내려서자 곧바로 국방위원회 위원인 하평좌와 김광진이 따라 내렸다. 우측으로는 잭 니콜라우스 골프 파라솔을 받쳐주는 부관이 뒤따라 내리고 있었다.
정각 아침 7시였다.
미사일 잔해를 건진 문제의 경비선은 포구 앞 50미터 전방에 떠 있었다.
폭우는 다소 잠잠했지만 아직도 빗방울이 굵었다.
"그래 사상자는 없었나? 내래 그게 궁금해. 빤스보단 빤스 속이 더 궁금한 거 아니갔어?"
그렇게 말을 한 뒤 윤철은 부관이 건네 주는 쌍안경을 양미간에 갇다 댔다.
희뿌연 어둠속에서 탐조등을 밝힌 어선의 후미 갑판이 당겨왔다. 갑판 위에는 잠수복을 입은 인민무력부 산하 해군특수부대원들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었다.
폭우가 세차게 그들을 때리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대원 하나가 사색이 되어 윤철에게 경례를 해왔다.
"남조선 아새끼들 대단하구만. 그래 날아가는 미사일을 뒤쫓아가서 잡았다 이 말이가?"
윤철은 히쭉 웃었다. 하지만 그의 충열된 눈은 붉은색 항공도료가 칠해져 있는 쇠조각에 고정되어 있었다.
저게 4시간 전에 휴전선을 넘어오다가 격추된 퍼싱 투 미사일의 잔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하평좌의 음성이 들렸다.
"큰일날 뻔 했지요. 저 물건이 웅진반도를 때리면 큰일이라면서 간밤에 호위총국 대장이 눈깔 뒤집어 진 거 모르오? 나도 간이 다 떨어지는 줄 알았소만."
"글쎄 말이오. 저도 사실은 좀 놀랬지요."
"그런데 어떻게 된거요? 소문을 들으니까 이쪽에도 그 싸가지없는 해커 쌔끼래 들락달락 한다는데...평양전산센터는 정말 무사한 것이오?"
"이쪽은 문제 없시요. 어잿밤 무사히 해체 했수다. 그건 그렇고 그 새끼래 일본 방위청에도 들어갔다고 하더구만요. 참 신비한 놈이야요.
어쨌든 이 일때문에 간밤에 저와 대남사업담당비서,국가보위부 부장동무 이렇게 셋이서 지도자 동지께 불려가 질타를 당했드랬지요. 이젠 뚫리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저러라 빗방울이 너무 굵은데요? 동무 빤스는 괜찬소?"
그렇게 말을 하며 윤철은 신사복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그런 윤철의 얼굴엔 10년 감수했다는 표정이 남모르게 떠오르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8군단 아이들은 지금도 여차하면 남조선으로 밀고 내려가려고 긴급 대기중이었다. 못내 불안했다. 간밤에 미사일이 웅진반도를 때릴 경우를 대비해 8군단 경보병여단과 공수여단,저격여단을 휴전선으로 밀착 배치를 하지
않았던가?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윤철이 이끄는 인민무력부가 앞장 서야 했다. 한국군으로 위장한 공수여단을 군산에 투입해 남조선 허리를 자른 뒤,휴전선을 테니스 코트 옮기듯 밀고 내려가는 것이다. 아니 지금 당장이라도 대전까지는 밀고 내려갈 자신이 있는데...
윤철은 두려운 건지 아쉬운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쨌든 미사일이 웅진반도를 때리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스쳐갔다. 전쟁은...어찌되었던 간에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윤철은 입맛을 다시며 다시 쌍안경을 얼굴에 갖다 댔다. 그때 부관 하나가 헬기 안에서 뛰어 나오며 윤철에게 외치고 있었다.
"부장 동지! 그 남조선 해커 새끼가 또 평양전산센터를 뚫었다고 합니다! 빨리 급거 귀환하라는 지시입니다!"
윤철은 화가 났다.
"알았어! 통일전선부 쌔끼들은 뭐하는 거야? 아직도 그 해커 새끼를 찾아 없애지 못했나??"
"모,모르겠습니다. 어잿밤 일본 측에서 놈을 추적하다가 오사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소식외에는...아무래도 우린 정보가 좀 늦지 않습니까?"
"입닥치라우,우리가 뭘 늦다는 건가? 어쨌든 빨랑 갑시다. 이거 이번에는 우리쪽이 미사일을 쏘아대는거 아냐? 큰일인데?...."
윤철은 씁쓸하게 말을 내뱉은 뒤 헬기를 향해 걸어갔다. 군인들은 민첩하게 몸을 움직여가며 윤철을 보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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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사뇨 나쓰에와 사유리 자매는 랜트카 안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난 기분이었다.
그러고보니 아까 새벽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떠 올랐다. 2시경에 아크힐스에서 급작스러운 철수소동이 벌어졌는데,이들 남매는 고영삼이 운전하는 자동차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금 눈을 떠보니 렌트카는 청산학원 캠퍼스안에 버려져 있다. 나쓰에는 서둘러 손목시계를 본다.
동생 사유리의 음성이 들렸다.
"음냐라...언니...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징?"
사유리는 자못 추운지 징징 짜며 옷깃을 여미고 있었다. 나쓰에는 어이가 없었는지 쓴웃음을 지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니? 3일 휴가 받았다고 좋아했는데 말짱 황이네? 오늘 월요일 맞니?"
"응. 언니는 괜찮은 거야?...난 말야...흐엉...도무지 머가 먼지 모르겠쪄..."
사유리는 아직도 마취제에서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녀는 랜트카 뒷자석에서 맹맹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나쓰에는 사유리를 부축하면서 렌트카에서 내려섰다. 우스웠다. 지난 며칠동안 벌어진 일들이 도무지 어떤 일이었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화가 나기도 했다.
"넌 학교에 가야지? 이젠 땡땡이 치지 말아. 왜 하필이면..."
"김짱이 따라오라고 한 걸 어떻게 해. 머 김짱도 나에게 키스까지 해 주드라. 흐응."
"너 정말...?"
"흐...언니 것도 내가 대신 했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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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된거야? 오끼나와 기지가 또다시 구멍이 났다고?"
시나노 곤베이는 오사카 경찰정 내에 있는 무선관리국 복도를 걸어나오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아메바 파일>이 간밤에 자진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새벽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같은 놈입니다! 방금 6시 55분에 또다시 침투를 해왔습니다. 이번에는 미 8군 카테나 기지에다가 두번째 아메바 파일을 남겨 두었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 도대체가!!"
"지금 현재는 전혀 감을 잡을수 없습니다. 전부터 심어놓은 파일 같기도 합니다. 북조선에서도 같은 소식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남한 컴퓨터 망은 지금 조사중인데 여기도 심상치 않습니다!"
시나노 곤베이는 화가 나고 창피스럽기도 했다. 얼굴이 뜨거웠다.
지난 이틀동안 김준을 필사적으로 추적했었다. 그런데 떨어진 헬기만 해도 두대나 되었다. 속담에 있듯이 벼룩의 머리는 도끼로 쪼개는 것이 아닌데, 무리수를 두다가 화근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유조차를 놓친 뒤부터 곤베이는 오사카 경찰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새벽 4시 50분경에야 아크힐스에 있는 진광섭 팀이 이상하다는 전갈을 받고 뒤늦게 그들을 강제 폐쇄시키기 위해 도쿄 경시청 경찰을 긴급 동원했다.
하지만 진광섭은 이미 아크힐스 전산팀을 새벽 2시경에 패쇄한 뒤 지바 현으로 후퇴시켜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곤베이는 울화통이 터졌다. 진광섭이가 이젠 쥐새끼처럼 도망을 다니며 지 할일을 하겠다는 계산이다.
생각해보면 진광섭만큼 곤베이와 사이가 나쁜 친구도 없었다.
곤베이가 북한 저격여단에서 훈련을 받을때 진광섭은 곤베이를 밀착마크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일본에 귀국을 하니 곤베이의 책상 위에는 디자인이 제법 예쁜 독일제 탁상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저 별일이다 싶었지 누가 보낸 시계인지는 추호도 생각하지 않으며 곤베이는 자신의 방에서 회의를 진행해왔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보기좋게 도청을 당했던 것이다.
칙쇼...
그때 일을 회상하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첩보계에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신했는데 탁상시계를 누가 보내는 지도 몰랐고,도청장치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몰랐던 것이다.
어제 밤에 벌어진 일도 그렇다. 진광섭이는 바주카포까지 동원하고 있었다.
헬기가 눈 앞에서 떨어지는 순간 곤베이의 기분은 어땠는가.
이 따위로 엉키다니...
그저 눈 앞이 캄캄했고 화가 났었다.
10분전에는 곤베이가 대한민국 대사관으로 보냈던 항의서한의 답신이 날아왔었다. 내용은 안기부가 야쿠자를 동원한 것에 대한 항의성 서한이었는데, 날아온 답신은 그런 사실 모른다,라는 내용이다. 화가 났다.
그래서 분노를 억누르고자 잠시 무선관리국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덜컥 <동급해커>가 카테나 기지에 재침투를 해왔다는 소식이 날아온 것이다.
곤베이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임시 캠프가 설치된 4층으로 올라갔다.
7시부터 팩스가 요란하게 날아오고 있었다.
곤베이는 팩스 전문을 읽기 시작했다.
첫번째 소식은 내각정보조사실에서 날아온 것으로,일미연합 훈련이 이날 새벽 6시부터 다시 개시된다는 전갈이었다. 이건 충분히 예측했기에 곤베이는 쓴웃음이 나왔다. 훈련이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는 것일테지...
그로써는 짐작이 가는 바가 많았다.
두번째 팩스는 1과 특수부에 착출된 2부 <국외정보팀>과 4부 <통신정보팀> 요원들이 어잿밤에 한국에서 벌어졌던 퍼싱 투 미사일의 격침과정을 시물레이트한 서류였다. 그것과 함께 어제 하룻동안 있었던 진광섭 팀의 핸드폰 통화 내역이 분석되어 날아왔다.
진광섭 팀은 간밤에 한국으로 스물 두번,일본내에서 45차례 핸드폰 통화를 했는데 모두 구식 음향 스크래프토그래프와 신형 컴퓨터를 이용해서 성문聲紋 추적을 하고 있었다. 성문추적 결과는 9시에 나온다고 했는데,이 결과가 나와야만 자세한 통화내용을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곤베이는 핸드폰 통화내역이 적힌 서류를 읽으면서 김준과 진광섭이 어떤 방법으로 오사카 지역을 탈출할지 추리를 했다.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었다. 진광섭은 새벽에 도쿄로 돌아간 게 확실했으니까 그 부하중 하나가 김준을 픽업할 가능성이 컸다.
곤베이가 간단하게 식사를 떼우고 난 뒤 간사이 공항으로 향할때 시각은 아침 8시였다. 이번에는 방위청 전산실장이 긴급전문을 노트북을 통해 날려왔다.
동급해커가 10일 전에 있었던 일미연합훈련 당시에 자위대의 비밀훈련을 방해했다는 보고서다.
그러고보니 10일전에 발생했던 의문의 사건이 곤베이의 뇌리에 떠 올랐다.
북부 해안가에서 있었던 마지막 연합훈련중 방위청 장관이 보는 앞에서 다연장 로켓이 바이러스를 먹었던 것이다. 이때문에 밤하늘을 비행하던 30대의 전투기중 3대인가 4대인가가 그대로 다연장 로켓에 의해 격추된 참사가 있었다.
동급해커가 다연장 로켓에 바이러스를 먹였단 말인가?...
곤베이는 도대체 그의 속셈이 무엇인지 예측할수 없었다.
전산팀의 두번째 보고는 하사 마에다라는 인물을 추적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곤베이는 급히 하사 마에다의 신원이 적힌 팩스용지를 읽어 나갔다.
별반이었다.
별안간 곤베이는 눈 앞이 캄캄했다. 이제야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예측대로 별반의 짓인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래도 전체적인 구도가 이상했다. 이 이전에 날아온 보고에 의하면 항공자위대 참사에 바이러스를 먹인 자가 동급해커라고 했는데,이것도 별반이 꾸민 일일까? 쉽사리 연관되지 않았다.
곤베이는 잠시 머리를 돌리다가 핸드폰에 입을 대고 버럭 외쳤다.
"넌 언제 올꺼야? 지금 당장 날아오지 않고!"
전산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한두시간만 참아 주십시오. 컴퓨터를 젯트기에 설치하고 있는데 시간이 소요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금 세이신 여고에서 전갈이 왔는데..."
곤베이는 잠시 자신의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10분이었다.
"좋아. 10시 정각에 본다! 지원기 수배 건도 빨리 해결해! 성문추적 결과가 나오면 곧바로 연락해주고,하사 마에다라는 작자의 위치는 밝혀지는대로 나에게 연락한다. 이건 중요한 일이다!"
"알겠습니다. 육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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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방위청 전산팀이 추적을 시작했다는 사실을 모른채 하사 마에다는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14인치 모니터에서는 그가 준비한 12개의 아메바 파일이 Hex 형태로 펼쳐져 있었는데,화면 왼쪽 구석에는 후꾸오 미나가 보내온 전자편지가 떠 있었다.

>> 방해하겠어요. 난 당신이 누군지 알아요!

노트북에서는 <파이어데모fire-demo>가 흐르고 있었다.
파이어데모는 세컨드 리얼리티 팀의 주도로 생겨난 어셈블리 콩크르 대회에서 스페인의 반젤리스팀이 출품했던 작품이었다. 그는 방금 전에도 작업 도중에 월드와이드웹(WWW;윈도우용 인터넷 접속프로그램)을 이용 미국의 eng.ufl.edu에 접속을 했었다. eng는 어셈블리 데모 대회에서 우승한 작품을 받을수 있는 여러 사이트중 하나였다. 이렇게 사이트를 돌아다니면서 선 라이징 팀이라든가, 세컨드 리얼리티 팀 등 유명 데모팀들이 만든 작품을 수집하는게 그의 취미였다.
물론 이들 데모 화면은 그래픽이 아니었다. 오로지 어셈블리 언어를 동원한 리얼타임 캘쿨레이트real-time calculated로 작성된 것이지만 이런 데모작품들은 컴퓨터 그래픽을 보듯 화려한 영상미를 자랑했다.
이런 데모 작품중에는 음악도 좋은 것이 많았다. 실력이 없는 프로그래머들은 음악을 직접 샘플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우스운 일이었다. 음악 역시 컴퓨터 언어로 직접 코딩을 해야 했다. 그게 정석이었다.
하사 마에다가 유독 좋아하는 <파이어데모>는 불의 이미지를 표현한 작품이었다. 실행을 시키면 곧바로 모니터 화면에서 불이 일어나는 장면이 진행되는데,이것은 키보드를 중간에 만지지 않고,컴퓨터를 끄지 않는한 계속 연속되어 보여진다. 뭐니뭐니해도 반젤리스 팀은 이름값을 했다. 저음의 음악은 불길하면서도 박력이 있었다.
이 음악소리를 란조 2위는 싫어했다. 가득이나 이상한 임무를 띠고 있었는데 오늘 새벽 이후로 하사 마에다는 괴이한 데모 화면을 죽은 듯 응시하고 있다. 정말 미나라는 여자가 1위님의 계획을 방해한 것일까?
란조는 이브 몽땅의 고엽을 듣더라도 멜 토메가 82년에 마티클럽에서 불렀던 고엽을 좋아하는 자기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재즈가 아니면 만사 귀찮았는데,시체말로 총으로 갈기고 싶은 욕구를 가질 정도로 복잡한 여자였다.
그래...솔직히 지금 나오는 반젤리스 풍의 음악은 불길해서 듣기가 싫었다.
우선은 재즈가 아니었기에 듣기 싫었고,걸래처럼 부서져있는 소니모니터가 에스파스 안을 을씨년스럽게 만들기에 이 분위기가 싫었다. 란조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보니 아침 8시 20분이었다.
란조는 우측으로 인가가 있는 도로에 에스파스를 세우고 난 뒤 뒤를 돌아다 보았다.
"마에다 1위님. 식사를 하셔야겠군요.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이때 막 파이어데모 화면이 다른 것으로 바뀌는 것이 란조의 동공에 들어왔다. 화면 중앙에서 버섯 구름이 만들어지는 그림이었다.
란조는 다시 수축되었다.
설마...저게 오늘 새벽에 심은 아메바 파일은 아니겠지...
란조는 겁을 먹은 얼굴로 에스파스 안에서 내려섰다.
안개가 지독하게 끼어 있는 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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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꾸오 하야시는 담배를 급히 끈 뒤 지하실 철문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었다.
미나가 철문을 열려고 하다가 안되겠는지 꽝꽝 두들기고 있다. 아침인거 같았다.
하야시는 마른 침을 삼키며 모니터의 명암을 어둡게 했다. 그런 뒤 삽을 집어 들었다. 아니 삽을 집어 드는 것이 아닌데...
미나를 때릴 셈인가.
그럴수는 없었다.
하야시는 빠르게 지하실 안을 살펴보았다. 아직 이른 철인데 나방 몇마리가 어둠속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하야시는 나방을 손으로 처 올리고 몸을 돌려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걸을때마다 바닥에 고인 물이 질퍽거리기 시작하자,하야시는 걸음을 멈추고 자신의 발을 내려다 보았다.
갑자기 미나가 빠르게 본체를 돌아 앞 마당으로 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하야시는 넋이 나간 듯 미나의 발자국 소리를 따라 시선을 움직였다.
잠시 뒤. 지하실 왼편 벽 위에 있는 환풍구의 나무판자가 들썩이는게 하야시의 눈에 들어왔다. 하야시는 와락 겁을 집어 먹었다.
들통 난 것이다.
대비책이 없었다.
이번에는 미나가 후다닥 철문으로 뒤돌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문 열어...."
철문 밖에서 미나의 음성이 들려오자 하야시는 심장이 싸늘하게 굳어갔고,몸은 꼼짝할 수 없었다. 지금 들려오는 음성은 죽은 할머니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날 이후 처음으로 듣는 미나의 음성이었다.
미나가...실어증에서 벗어났단 말인가?
하야시는 현기증을 느끼며 휘청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가냘프게 하야시의 귀를 파고 들더니,어느새 가슴안에서 펌프질을 한다. 하야시는 참기 힘들었다.
"꺼져. 내 앞에서 당장 꺼지란 말야!"
하야시는 자신이 다시 삽을 집어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얼굴은 두려움과 욕망과 분노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이제 제발 내 앞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 미나."
"오빤 왜... 숨어 있는 거야?...난 오빠가 보고 싶어..."
"가란 말이다!"
"왜 그래... 난 다시 돌아온 거야. 이젠 아무렇지 않아. 오빠. 나랑 같이 살자. 응...?"
바보같은 계집.
하야시는 울컥 구역질을 했다. 썩은 시체에서 품어져 나오는 냄새는 지하실 안에 거미줄처럼 엉켜 있다가 하야시의 콧구멍으로 빨려오고 있었다.
다시 눈물이 울컷 쏟아지려는 것을 하야시는 가까스레 억제했다.
"왜 할머니를 그렇게 만들었지? 무슨 이유야...?"
음성이 들려왔다.
"알고 있었어... 할머니는 내가 임신할 걸 알고 있었어..."
하야시는 비통했다.
"멋있군! 그래서 할머니를 살해한 거냐?"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넌 바보다,미나! 몇번이나 경고했니! 아기를 임신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일을 이렇게 엉망으로 만드는 거지? 응?"
"바보자식! 넌 날 사랑한다고 했어! 우린 친남매가 아니니까 가능하다고 했어. 처음부터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은 내가 아니라 오빠였다는 것 몰라?"
미나는 불끈 화가 나서 하야시를 힐난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나의 음성이 아니라 할머니의 음성이 그녀의 입에서 쇠조각처럼 흩어져 나왔다. 할머니의 음성이 들리자 하야시의 얼굴에서는 핏기가 가셔갔다.
"입 닥쳐! 난 그런 말을 한적이 없어. 난 그런 말 한 적이 없다...네가 원했던 거야. 넌 욕심이 많았어. 알잖아. 너무 많았어..."
하야시는 의자에 털석 앉았다.
"난 두려웠다. 내 아기를 가졌다기에 이게 웬 바보같은 짓인가 생각을 했었어. 난 너와의 관계에 추호도 잘못이 없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말이다. 네가 아기를 가졌다고 말하니까 보기 싫었고 죽고 싶은 심정이었지."
꽝 소리가 들렸다. 철문이 와창창 부서질 것만 같았다.
"나쁜 자식,그랬구나! 할머니가 알게 된 건 오빠때문이구나!"
하야시는 피할수 없었다. 이젠 맞부딪칠 시간이었다.
"그래. 내가 말했다! 내가 말했어! 널 할머니의 도움으로 내 곁에서 쫓아내려고 했었다! 그게 바로 나다! 하지만 넌 할머니를 살해했어! 그럴수가 있었던 거냐!"
꽝-------!!!
다시 둔탁하게 철문이 흔들렸다.
"나쁜 사람! 넌 나쁜 놈이야,하야시! 나쁜 놈이라구!"
그렇게 말을 한 뒤 미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이젠 미나도 어쩔 수 없었다.
얼굴이 후끈거렸고,알수 없는 분노가 그녀의 몸을 휘감고 있을 뿐이였다.
처음 이 집에 양녀로 들어왔을때 미나는 하야시가 마냥 좋았다. 그는 친절했다. 그때문에 그렇게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러다 중 2 겨울이었을때였다. 미나는 처음으로 하야시의 앞에서 옷을 벗었다.
그녀 스스로가 결정한 일이었는데,순간 하야시의 손이 미나의 빰을 때려왔었다.
미나는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이게 아닌데...
후에 알았지만 그것은 하야시의 자기보호 본능이었다. 그는 내심 미나를 좋아 했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때문에 미나는 실어증에 걸렸다. 몇차례 하야시를 만났지만 그는 그녀를 피해 다녔다.
하야시는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원하고 있었지만 스스로 감추어야 했다. 하야시는 두개의 서로 틀린 자아와 싸움을 계속했다.
그렇게 의남매는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서로 눈치를 보면서 보냈다. 하야시가 무너진 것은 미나의 여고 졸업식이 있던 날이었다. 처음으로 하야시는 미나를 강렬하게 원했다.
미나가 하야시의 아기를 가진 것은 요 3개월전이었다.
철문 밖에서 미나는 계속 울고 있었다. 하야시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왜 우는지,왜 울어야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문을 열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렇게,이 상태로,서로는 떠나야 한다고 하야시는 생각을 했다.
하야시는 다시 컴퓨터를 부팅시켰다. 그 사이에 새로운 작업지시가 날아와 있었다.

>> 하사 마에다 청부살해 건 신속 해결 요망.
>> 김준의 현재 위치를 파악해 주시오.
>> vealy@vector.c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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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정각.
내각정보조사실의 의해 유조차의 행방이 일본 전국으로 확장 수배되고 있을때, 나디아가 운전하는 유조차는 간사이關西 학술문화연구도시의 피라밋처럼 생긴 건물 옆에 멈추고 있었다. 일본이 기초과학 분야에 충실을 기하기 위해 오사카,교오토,나라 3개 현 중심부에 건설하고 있는 것이 간사이 학술문화연구단지였는데,단지 내부는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이날 아침엔 안개까지 복잡하게 끼어 있었다.
준과 나디아는 짙께 깔려있는 안개를 살피다가 유조차에서 내려섰다. 그러자 원통형으로 생긴 건물의 주차장에 있는 미쯔비시 파제로에서 문이 열리면서 정장차림의 윤춘해가 걸어 나왔다.
윤춘해는 안개를 따라 두 남녀를 향해 걸어왔다.
"잠자는 귀에 물이 들어온다더니 섭섭하겠소. 내가 당신을 마중나왔소이다."
준 역시 춘해를 따라 비쩍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간다 지하철역에서 있었던 우스꽝스러운 격투가 불현듯 떠올랐다.
"일같지 않는 일로 우린 싸운적이 있지요. 좀 어떻습니까?"
준이 묻자 춘해는 손으로 준의 허벅지를 가르켰다.
"상처야 총 맞은 다리에 비하면 어디 비교가 되겠소. 어쨌든 지나간 과거는 잊읍니다. 김준씨도 대단하오. 막강 안기부를 상대로 프레쉬맨처럼 도망도 잘 다니더구만요. 그건 그렇고,어떻게 그 와중에 진광섭 손을 빌릴 수가 있었소?"
준은 춘해와 함께 파제로를 향해 걸어갔다. 미쓰비시 파제로는 쌍롱 무쏘보다 크기가 큰 7인승의 롱보디 버전이었는데,유리창은 검은색으로 코팅되어 있었다.
"진과장님의 송환조치에 응한다고 했습니다. 양쪽 정보팀이 벌떼처럼 덤벼드니 정신이 있어야지요."
"송한조치에 응했구만? 그래서 독사가 대포까지 동원한 것인가?"
춘해는 거기까지 말하다가 오만상을 찌뿌렸다.
"아,참.수갑을 채우라고 하던데...미안하지만 그 양손을 묶어야겠소."
갑자기 나디아의 음성이 들렸다.
"거래가 이상하군요. 김준씨가 범죄자라는 겁니까?"
"이건 송환의 한 절차요. 이해해 주기 바래요. 아직은 범죄자일지 모르니까."
턱.
"정 필요하다면 제가 대신 그 팔지를 차겠어요."
나디아는 잔뜩 억울한지 자신의 가날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춘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봐요 아가씨. 뭔가 착각하나 본데,이미 아가씨 것도 준비되 있단 말이요!"
“어머,왜 제가...?”
"당신도 한국으로 가는 거요. 여기 있어봤자 일본 놈들에게 시달림을 당할테니까 같이 가 봅시다. 잠시 피난을 가는 것이라 생각하시오."
나디아는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한국으로 가야 하다니.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술을 깨물며 준을 바라보았다. 준은 양손을 춘해에게 내밀고 있었다.
"이런 건 경험이 있는 사람이 차는게 좋겠지요. 나디아는 생략합시다. 헌데 나에게 하루 동안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지금 진과장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춘해는 김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우고 있었다.
"진과장은 하사 마에다를 잡겠다면서 새벽에 도쿄로 날아갔소. 물론 약속은 지킬것이오. 우린 내일 저녁에 쓰루가 항에서 한국으로 가게될 것이오. 그때 까지는 김준씨가 요구한 하루 동안의 시간을 줄수 있을 것이오."
수갑을 채운뒤 춘해는 파제로의 옆문을 열었다. 그러자 알카텔 알스톰사에서 제작한 휴대용 위성송수신 장비가 파제로 뒷좌석에 꽉 들어차 있는게 보였다.
"이건 당신이 수배해 달라는 장비요. 위성통신용 장비라는데 오늘 새벽에 오사카 브렌치가 필사적으로 구했소. 이거면 마에다를 저지할수 있겠소?"
이미 준의 눈은 자동차 안을 빠르게 훑고 있었다. 접이식 파라볼라 안테나와 햄HAM 장비도 보였는데,이 정도의 장비면 음성부터 텔레타이프,그밖에 전파 도청은 물론 인공위성 전파까지 곧장 장악할 수 있는 물건이라 할수 있었다.
아마 미 펜타곤이 공중파 통신망을 장악하기 위해 건조한 통신중계함 아나폴리스 1척과 비교가 되는 위력을 가졌으리라.
준은 춘해를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장비는 훌륭한데 수갑때문에 일을 못하겠군요. 이 수갑 게속 차고 있을까요?"
춘해는 멋적은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저걸 못만진다고 생각했는데...저걸 당장 사용 할 수 있다면 수갑을 풀어 주겠소. 무사히 마에다를 저지한다면야 훈장까지 줄수 있지."
"그럼 훈장 먼저 주십시오."
나디아가 먼저 파제로에 올라타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노태우가 앉아 있었다.
다시 준의 음성이 들렸다.
"몇가지 조사해줄수 있겠소?"
"말해보시오."
준은 춘해를 똑바로 응시했다.
"나에게 지하철 사고를 조작한 해커 명단이 있는데 그들을 한번 조사해 주십시오.
그리고 한현희 행방도 알아봐 주시면 고맙겠소. 한현희는 제일그룹 도쿄 지사 직원입니다. 또 뱅크 마니아 BBS의 의뢰자 명단이 필요하오. 그쪽 자료를 입수하면 내 은행구좌가 동결된 이유를 알아낼수 있을 것이오."
"꽤 복잡하구만. 하지만 협조를 할수 있을 것이오. 또 다른 것은 없소?"
"하사 마에다와 마끼 준사이라는 여자의 관계입니다. 하사 마에다는 방위청 직원인거 같습니다. 마끼는 아시다시피..."
춘해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자가 어떻게 안기부가 쫓고 있는 인물을 줄줄이 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소. 어쨌든 빨리 출발해 봅시다. 긴 여행이 될것이오만."
두 남자가 올라타자 파제로는 털털거리며 과학도시 진입로로 달려 나갔다.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진입로에는 비포장도로가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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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습니다! 감식반 직원중에 자동차에 빠삭한 놈을 붙혔더니 무연휘발류가 흘려 있는 것을 보고 금새 감지했습니다. 앞,뒤바퀴 간격과 4륜구동 스타트 자국으로 보아 미쯔비시 파제로 롱보디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곤베이는 공항 로비안에서 걸어가며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멋있군! 파제로라면 요 몇년 동안 가장 많이 팔린 7인승 지프차가 아닌가?"
"네. 그게 좀 걸리긴 하지만,랜트카 업소에도 문의를 해보았습니다. 오늘 새벽에 한국인 오파상이 미쯔비시 파제로를 랜트한 서류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항구를 이용해 탈출하겠다는 뜻인가? 항구는 봉쇄하고 도로에다 경찰을 깔아 봐! 혹시 산악지방으로 숨을지 모르니까 요소요소에 자위대원을 풀고.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아침 10시 정각이었다. 곤베이는 핸드폰 통화를 끝내고 난 뒤 활주로로 걸어 나왔다. 곤베이 일행이 나온 장소는 관제탑 아래쪽이었다.
활주로에는 아직도 안개가 뿌옇게 끼어 있었다. 곤베이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번에는 내각정보조사실로 전화가 연결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치토세에서 지원기를 투입한다더니 보낸 건가?"
곧 부하 요원의 음성이 들려왔다.
"불가능합니다. 치토세에 있는 제2 항공단은 오늘 새벽에 일미 연합작전에 긴급 투입되었습니다. 이때문에 지원기를 돌릴수가 없답니다!"
일본 자위대는 전투기를 지원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개자식들! 이건 군작전이란걸 모르나! 지금 당장 다른 지원기를 찾아봐! 북부 항공대가 아니면 다른데에다 연락해보란 말이다!"
"하쿠리에서 몇대 수배를 하고 있습니다! 하쿠리의 제7 항공대는 이번 훈련에 참가하지 않기 때문에..."
"말만 앞세우지 말고 지금 당장 항공막료감부에 압력을 넣어 F-16 3대를 요구하란 말이다!"
"알겠습니다. 육좌님!"
곤베이는 통화를 끝내고 난 뒤 길게 한숨을 쉬었다.
안개가 짙게 깔려있기 때문에 헬기로는 파제로의 도주로를 전체적으로 커버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지금 당장 서너대의 지원기가 필요했다. 그런 뒤 적외선 카메라로 산악지방을 활영하면 소득이 있을것 같았다.
실상 지금은 파제로가 오사카 북쭉에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일지 추리를 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아침 일찍 헬기 대신에 수색용 지원기를 요구했는데,지원기를 투입하기로 한 제2 항공자위대가 일미연합훈련에 갑자기 투입되었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곤베이가 활주로 중앙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자 이번에는 우측에서 요원 하나가 다급히 뛰어오면서 외쳤다.
"방금 윤춘해와 진광섭 간의 핸드폰 통화내용이 성문추적까지 끝났습니다.
간사이 학술도시에서 김준을 픽업한 자는 윤춘해라는 놈입니다. 목적지는 쓰루카 항이라고 합니다!"
"멋있군! 그럼 오사카 북부가 아닌가! 지금 당장 헬기수색팀을 오사카 북부로 돌려! 근데 10시에 오겠다던 이놈의 히로세 전산실장은 왜 안 오는 거야?"
곤베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젯트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뒤.
프로펠러식 젯트기가 안개를 뚫고 착륙하는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며칠전부터 미자와에서 대기중이었던 사브엔진을 장착한 제트기였는데,이날 아침 도쿄에서 방위청 전산요원을 급히 실고 날아온 것이다.
곤베이는 요원 10여명과 함께 급히 젯트기를 향해 뛰어갔다. 그는 젯트기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크게 외치고 있었다.
"여자는,여자는 어디에 있나!!"
철컥 문이 열리더니 사뇨 사유리가 요원 둘에 의해 끌려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뭐야? 다른 하나는 안 보이잖아?"
전산팀장인 히로세가 얼굴을 내보이며 크게 외쳤다.
"다른 하나는 픽업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여자,중간에 고마쓰 본사로 향했다고 하는데 모두지 시간을 맞출수가 없었습니다!"
"알았다. 뭣들 하나? 다시 이륙하라고 해. 오사카 북부다!"
사유리는 왕창 겁을 집어 먹은 눈으로 젯트기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눈깜작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세이신 여고에 등교하려고 교문을 들어서는데 사내들이 나타나 자신을 강제로 납치한 것이다. 그리고 젯트기 안에서 식사를 주길래 맛있게 먹고 있는데,수저를 놓기도 전에 오사카라고 한다.
이건 영 뭐가뭔지 모르겠다...
사유리는 정말 겁이 났다.
"아저씨,미리 자수하지만요...전 삐삐 같은거 안 키워요. 흐엉...엉엉엉."
"주둥아리 닥쳐!"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곤베이의 손이 사유리의 빰에 작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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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미쯔비시 파제로는 오사카 북부 산악지대를 관통하고 있었다.
음습한 안개가 끼어있는 산악지방이었다.
운전대는 노태우가 잡았고,중앙엔 윤춘해,그 옆 창가에는 나디아가 앉아있었다.
김준은 파제로에 올라탔을때 시작한 작업을 아직도 계속 하고 있다. 나디아가 김준을 힐끔 돌아다 보다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식은 땀이 났다.
"나 뒷좌석으로 가겠어요. 여긴 너무 좁아요."
"작업 방해 마시오. 저 친구는 지금 바쁘단 말이요."
윤춘해는 무뚝뚝하게 말했지만 젊은 여자가 도망을 갈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냄새가 좋다. 이런 여자는 보기 드믄데...
"어휴...여긴 꼭 닭장 같군요. 도대체 이 차 안에서 컴퓨터를 몇대나 돌리기에 이렇게 더운 거에요?"
"그건 뒤에 있는 컴퓨터때문이 아닙니다. 인간 컴퓨터...춘해 형님이 지금 흥분했나봐..."
노태우가 피식 웃으며 댓구를 하자 춘해는 씁쓸하게 웃었다.
"운전대나 잘 잡아. 내 나이 돼 봐라. 여자가 젖가슴으로 눌러도 흥분을 안하는 8비트가 된다...."
"미안하우. 농담 한번 했는데 거 대개 자책하네."
파제로는 기후지방에서 혼슈지방을 옆으로 끼고 달리고 있었다. 오전이었지만 울창한 숲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우는 산속이었다. 공기는 차가웠다. 짙게 깔려 있는 안개때문인것 같았다.
춘해는 은근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숲을 따라 이동을 하고 있고,안개까지 끼어있으니 여간 행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나마나 각 도로에는 경찰들이 깔려 있을 테니까 말이다.
"형님,힘들겠는데요. 우리 어디서 밥이나 먹고 갑시다."
"임마,여기에 밥 처먹을때가 어디 있다고 그래?"
춘해는 태우에게 핀잔을 주고 주위 경관을 바라 보았다. 자갈과 잡목이 뒤엉켜 있는 비포장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다. 어렴풋이 보이는 밭에서는 오전 일을 하는 아낙들이 보였다. 가끔은 식물원처럼 생긴 유리 돔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시형 재배단지가 이 근처에 많이 있는 모양이다.
춘해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히다 말고 나디아를 보았다. 나디아는 아까부터 비쩍 마른 얼굴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담배 피고 싶으면 마음껏 피세요. 저두 한대 주시구요."
춘해는 슬며시 웃으며 나디아에게 담배를 내 밀었다. 나디아는 잔뜩 화가 났는지 담배를 입에 물고 필터를 오물오물 씹기 시작했다. 춘해는 한참동안 나디아의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김준이 데스크 톱 컴퓨터와 자신의 노트북을 랜으로 연결하고 작업을 하는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하여간 꽤 복잡한 화면이 데스크톱의 모니터에 떠올라와 있었다.
궁금했다. 지금 저 놈이 무엇을 하는 것일까...
쓴 웃음이 나오기도 했다. 만나면 복수한답시고 하복부에 손이 들어갈만한 큰 구멍을 만들어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어렵소...
김준을 얌전하게 후송하라니. 진광섭의 지시가 무슨 청천벽력인지 몰랐다.
"정말 아무래도 안되겠다...네 말대로 저기 어디가서 식사를 할수 있나 물어보자."
파제로 우측으로 안개가 낀 호수가 보였다. 호수 옆으론 네델란드식 풍자를 달고 있는 식당이 덜렁 놓여 있다.
"알았어요. 내가 주문하고 오지요."
노태우는 파제로에서 내리다 말고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김준이 쳐다보고 있는 컴퓨터에는 손바닥 그림이 하나 떠 올라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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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지문이 아닙니다."
곤베이는 모니터 화면에 떠있는 손바닥 그림을 보고 있었다.
검지와 중지 지문이 화면 안에서 확대된 뒤 김준의 외국인 등록증에 기록된 지문과 대조가 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김준의 지문도 아닙니다. 지문 스위치의 일종입니다만 가공으로 만들어진 지문인것 같습니다. 이게 오늘 아침에 심어진 아메바 파일의 스위치입니다."
제트기 안은 복잡했다. 제 1 객실은 전산팀이 분주하게 작업을 하고 있었고, 전산팀 앞쪽 조종석 입구에는 추적팀이 위치했다. 제 2객실 안에는 곤베이가 아끼는 자위대 공정대원들이 좌우로 앉아있었는데,사유리는 그 중앙에서 오페라의 소녀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곤베이의 음성이 들렸다.
"아침에 심어진 아메바 파일의 내용이 뭔지 알겠나?"
"추적중입니다. 이 놈의 손바닥 지문이 있어야 개봉을 할수 있는데..."
다시 전산실장의 음성이 이어졌다.
"다른 방법으로 개봉해 보겠습니다. 약간 시간이 소요될 겁니다만."
"좋아. 계속 수고해 봐."
그렇게 말을 한 뒤 곤베이는 씁쓸하게 미소를 지으며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조종석 뒤쪽에 있는 추적팀이 작업을 하는게 보였다.
"F-16기 수배건은 어떻게 되었나? 하쿠리 건 말이다!"
"F-16 지원은 방금 시작되었습니다. 저쪽 히다 산맥부터 뒤져 나오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안개가 영 많은지라..."
"적외선으로 촬영한 뒤 전송하라고 해! 안개는 정오경에 개일 것이다!"
말한 뒤 곤베이는 제 2객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 놈 지문인지 모르지만...그 자식 손목이 필요하다면 잘라오고 말겠다...
어쨌든 김준의 지문이 아닌게 이상했다.
예전에는 낙타털로 만는 브러쉬나 건조한 분말이 있으면 지문을 채취해서 초등수사를 개시할수 있었다. 닌히드린을 사용하면 50년 전에 뭍은 지문까지 채취가 가능했다. 그런 뒤 경시청 지문대장과 대조를 하면 손쉽게 범인을 추적할수 있었는데.
하지만 지금은 컴퓨터만 있으면 뭐든지 가능했다. 위조지페는 스캐너로 스캔한 뒤 캐논 R-1938 컬러프린트로 프린팅하면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수 없었다. 지문 역시 스캐너로 잡은 뒤 그래픽 소프트웨어로 수정을 하면 가공의 지문을 만들수 있다. 암호 대신에 그런 식으로 만든 지문 스위치를 사용하면...
곤베이는 아메바 파일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미사일이 언제,어떻게, 어디로 날아가게 될지 그것도 의문이었다.
추적팀 요원이 벌떡 일어나 외친 것은 곤베이가 제 2객실로 들어설때였다.
"기후 지방에서 헬기팀이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아침에 파제로를 본 농부가 있다고 하는데요?..."
"뭐야?"
곤베이는 몸을 돌려 추적팀을 향해 걸어갔다. 방금 말을 한 요원이 컴퓨터를 두들기며 설명을 계속했다.
"산악지방입니다. 비포장 도로가 있다고 감안하고,시속 60Km를 평균속도로 잡아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이쪽...이쪽...이 부근 어딘가에 있겠군요!"
곤베이는 말없이 모니터를 응시했다. 파제로의 이동 반경이 추적되어 화면에 나타나고 있었다.
"지도에 나타난 붉은 색의 타원은 뭔가? 왜 붉은 색 타원이 있는 거지?"
"항공기 접근금지구역입니다."
"무슨 소린가? 항공기가 접근을 못하다니?"
"이 장소는 오늘 새벽에 시작된 일미연합 훈련장입니다. 정오경부터 저녁까지 지원기 방어훈련이 있기 때문에 접근 불가능한 장소지요."
"제기랄,하필이면?"
"혼슈 지방과 기후 지방 일부입니다. 그러니까 그전에 수색을 끝내 달라는 통보가 아까 새벽에 날아왔습니다."
곤베이는 울그락불그락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는 등 뒤로 돌아보며 외쳤다.
"전화 당장 연결해! 방위청이건 항공자위대이건 책임자에게 전화 연결하란 말이다! 그리고 넌 F-16에 연락해서 이쪽을 뒤지라고 해! 히다산맥 하단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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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 주인이 물고기 하나를 그물로 들어 올려 보이며 입을 열었다.
"사시미(회요리) 종류 밖에 없는데 준비할까요?"
태우는 오만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호수를 끼고 있는 식당이라 그런지 먹을 것은 회요리 밖에 없는것 같았다. 태우는 화가 났는지 뒤를 돌아다 보며 버럭 외쳤다.
"형님! 회 한접시 드시겠습니까? 이 친구가 회 전문가라 합니다!"
대답이 없었다. 흐믈흐믈 떠다니는 안개속으로 파제로에서 내려 서는 나디아의 모습이 보였다. 나디아는 파제로 뒷문을 열고 김준에게 뭐라고 말을 붙히고 있었다.
"몇 접시 준비해 주쇼. 아,가쓰돈 류도 있습니까? 덮밥은 들고 다닐수 있겠금 싸주면 좋겠소. 새벽부터 산악 여행을 하다보니까 배가 고프군요."
"하이. 곧 준비하겠습니다."
식당 주인의 목소리에 준은 고개를 들고 식당을 보았다. 고글 너머로 식당과 호수가 보였다. 나디아는 잠시 그를 지켜보더니 한숨을 쉬면서 파제로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준은 나디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등 뒤로 젖히고 자동차 천정을 올려다 보았다. 목덜미에서 식은 땀이 흐르고 있었다.
준은 씁스레하게 입을 열었다.
"춘해씨. 한국 국방부가 아침에 또 뚫렸다고 하는 군요."
"뭐라고요?"
"방금 임달영 안기부 차장님과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만 해도 일본 카테나 기지와 북한 평양센터,한국 태백에서 해커의 침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마에다 그 자식 미친 거 아냐?"
춘해는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았다. 안개가 끼어있는데 폭염인것처럼 날씨가 후끈거리고 있다. 다시 준이 컴퓨터 키보드를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 왔고,하드디스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왜? 뭔가 이상한게 있소?"
춘해는 준의 모습이 이상한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준의 음성이 들렸다.
"아메바 파일에 남겨진 스위치가 있는데...."
모니터 화면에서 손바닥 그림의 스위치가 떠 올랐다.
"지문이 좀 이상하군요. 위조된 지문을 가진 손바닥입니다."
"그게 왜 있는거요?"
준은 씁쓸하게 웃었다.
"암호 대신에 사용하는 거지요. 이 손바닦에 맞는 손을 대면 아메바 파일이 작동을 하나 봅니다."
"미쳤군....하사 마에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글쎄요...여기서는 실험을 할수 없군요. 제 컴퓨터는 터치스크린이 부착되지 않았는데....아마 감지기가 달린 모니터를 사용하나 봅니다."
"북한에도 그런 지문 스위치가 남겨져 있는 거요?"
"예. 똑같습니다. 한번 들어가 볼까요?"
준은 빠르게 평양전산센터로 접속을 했다.
잠시 뒤. 글자가 빠르게 떠 오르기 시작했다.

== 남조선 해커의 침입이 연일 계속되고 있습네다. 해커를 잡은 동무는 평양전산센터의 074-7000 직방 라인으로 소식 주시오. ==
== 공화국 전산망을 애뜻하게 사랑하시는 위대한 지도자 동지의 특별교시가 오늘 정오에 있습네다. 우리 전산원 동무들을.... ==
== 남조선 해커 새끼래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

윤춘해의 음성이 들렸다.
"남조선 해커라면...당신을 지칭하는 것 아니요?"
준은 비쩍 미소를 지었다.
"그런가 봅니다. 남조선에서 북한에 침투할 해커라면 저 밖에 없을테니까요."
춘해는 쓴 웃음을 지었다. 이 친구가 농담을 하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사 마에다를 찾을 방법은 없소? 남북한이 동시에 뚫렸다면 아무래도 미사일 쇼가 또 벌어진다는 뜻인데..."
"국방부 전산요원과 협동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정오경에는 소식이 있겠지요."
"그러지 말고 이 방법 어떻소? 우리가 직접 마에다를 유인하는 거 말이요."
"유인이라뇨?"
"며칠전에 보니까 피신밴에 웬 여자가 오빠를 찾는다는 호소문을 강제로 심은 것을 보았소. 그런 식으로 하사 마에다에게 메시지를 날려보면 어떻겠소?"
"니프티서브나 피신 밴에 유인 메시지를 남긴다는 뜻입니까?"
"그렇소. 다행히 우린 하사 마에다의 정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소. 광섭씨가 그를 찾고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요? 아예 유인을 해 봅시다."
"좋은 생각이군요. 정말 좋습니다."
"좋은 생각이라니 다행이요. 어디 한번 해봅시다."
"그럼 용산에 전화를 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준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압전마이크로폰을 작동시켰다.
"임차장님? 지금 제 작업광경 보입니까?"

임달영은 아까부터 열려있는 전화를 다시 귀에 댔다. 김준의 음성이 들리고 있었다.
"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무슨 작업입니까?"
달영은 그렇게 대답을 한 뒤 등뒤로 고개를 돌렸다.
용산 국방부 건물 지하에 있는 전산센터였다.
30명에 가까운 전산요원이 김준을 도와 작업을 하는 모습이 보였는데, 메인 모니터는 통신위성을 통해 일본에 있는 김준의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유인하겠다고? 어떻게 말이오?"
임달영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메인 모니터를 응시했다. 준의 설명과 함께 메인 모니터 화면에 김준이 지금 하는 작업이 떠 오르고 있었다. C 언어 프로그래밍인것 같았다.
한참동안 김준의 설명을 듣더니 임달영은 간신히 대답을 했다.
"알겠소. 그렇게 해 봅시다."
달영은 전화를 다시 탁자 위에 내려 놓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전산요원들을 향해 힘차게 외쳤다.
"함정을 만든다고 한다. 모두 전화추적을 대기할 것. 함정은 아침에 뚫린 태백 미사일 기지다. 자 모두 함께 가 봅시다!"

춘해의 음성이 들렸다.
"그게 뭐요?"
준은 키보드를 두들기며 대답을 했다.
"간단합니다. 피시 밴이나 니프티서브에 등록된 A라는 아이디를 찾아서 A의 프로필 내용을 메시지 내용으로 전환하는 작업입니다. 그런 뒤 프로필을 자동 공개시키는 작업인데...이러면 접속한 사람들은 모두 A의 프로필에 쓰여있는 메시지를 자연적으로 접하게 됩니다."
"생각보다 간단하구만?"
"전 뻐꾸기가 아닙니다,춘해씨. 사실 이런 건 용산 친구들이 잘합니다만..."
곧바로 김준이 만든 유인용 메시지가 화면에 떠 오르고 있었다.

>> 하사 마에다군.
>> 태백에 심은 두번째 아메바 파일 선물을 고맙게 받았다.
>> 아메바 파일에 대해 의문점이 있으면 연락 바란다.
>> kimjun@playboy.co.hk

"이제 어떻게 하는 것이요?"
춘해가 묻자 준은 슬며시 웃었다.
"이제 이 메시지를 일본 각 통신망에 배포 해야지요. 아마 소식이 있을 겁니다. 그 친구도 일본 통신망을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요."
준은 그렇게 말한 뒤 엔터키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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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사 마에다는 입을 벌린채 14인치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방금 미나를 유인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짜고 있었는데,피시 밴 화면에서 별안간 김준이 날려온 메시지가 떠 올라온 것이다. 마에다는 마른 침을 삼키며 손목시계를 봤다.
칙쇼...
태백에 심은 아메바 파일을 해체했단 말인가...?
kimjun@playboy.co.hk 이라는 IP 이름은 홍콩에 있는 성인전용의 인터넷 사이트였다. 그쪽에다가 연락을 해 달라는 뜻인데...
웃기지 마....
감히,나에게 덤비겠단 말인가---------!
마에다는 빠르게 욕지껄이를 내 뱉으며 충열된 눈을 액정화면으로 이동했다.
빠르게 태백 미사일 기지의 전산망이 개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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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번은 강원도 내부 전화라인입니다!"
요원 하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의 눈은 모니터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8번...9번....10번.... 원주,오산,용산과 연결된 전화라인입니다..."
태백기지에 접속된 전화선은 총 21개였는데 방금 22개로 늘어나고 있었다.
아까부터 전산요원들은 계속 접속상황을 추적중이었다.
"11번 라인은 미 8군으로 연결되 있습니다. 그 밑까지 계속 추적하고 있습니다!"
"좋아. 다른 건 어때?"
임달영은 그렇게 말한 뒤 우측에 있는 모니터를 응시했다. 태백 미사일 기지 플랫폼이 떠올라와 있다.
"사용자 아이디 검색은 지금도 변화가 없나?"
"아직 없습니다.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는 나타나지....어?"
22명의 접속자중에서 갑자기 <東急HACK>라는 아이디가 불쑥 떠 올랐다.
"잡았습니다! 방금 접속한 인물이 하사 마에다입니다!"
용산 전산실의 소란스런 분위기가 곧바로 핸드폰을 통해 김준과 윤춘해에게 들려오자 두 사람의 눈은 무섭게 모니터 화면으로 꽃혀 들어갔다. 화면은 곧바로 태백기지 플랫폼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에다가 들어왔단 말이요??"
"아직 장담할수 없습니다. 한번 붙잡아 볼까요?"
그렇게 말을 한 뒤 김준은 빠르게 태백기지에 접속을 했다. 그런 뒤 키보드를 두들겼다.

>> 마에다상. 담배를 피워도 되나...

마에다의 두 눈은 총알같이 모니터에 꽃혀 들어갔다.
"칙쇼...."
마에다는 두 눈을 부라리고 씩씩거리기 시작했다. 란조가 다시 겁을 먹었는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오고 있었다.
마에다는 모니터를 잡아먹을듯 노려보다가 접속자 명단을 확인했다.

>> user 23명
>> ......
>> 東急HACK
>> 東急HACK

분명 두개의 동급해커라는 아이디가 접속을 하고 있었다. 마에다는 이를 악물었다. 누굴까? 미나일까...아니면 김준일까?
마에다는 자세 그대로 생각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키보드를 천천히 두들겼다.

>> 환영하오. 담배 피우시오.

"차장님,이게 웬 일입니까? 동급해커가 한명 더 있습니다!"
임달영은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등 뒤에서 30대의 모니터가 같은 화면을 긴박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모두들 자석처럼 임달영 차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그건 일본에서 김준이 들어간 거니까 상관하지마! 다른 전화라인은 어떤가?
뭐하나? 나에게 고개 돌리지 말고 각 전화선의 출발지를 찾으란 말야!"
"아니,제 말은 그게 아닙니다! 동급해커가 방금 전에는 두명이었는데 지금은 3명이란 뜻입니다!"
"뭐라고?"
임달영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모니터를 쫓아 시선을 옮겼다. 3명이었다.
새로운 접속자가 있었는데 그자도 <동급해커>라는 아이디를 사용하고 있다.
"저 놈도 잡아! 사라지기 전에 잡으란 말야!!"
한 녀석이 더 있었단 말인가...
임달영은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흐른 땀을 닦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선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건 빅게임이다.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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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과 국방부 전산팀이 하사 마에다를 추적하기 위해 함정을 만들고 있을때 나디아는 파제로를 떠나 언덕 위까지 올라가고 있었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안개가 짙게 끼어 있었기 때문에 이젠 호수가 보이지 않았다. 나디아는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그런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비행기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디아는 비행기 소리를 따라 몸을 일으킨 뒤 다시 언덕 위로 걸어 올라갔다. 안개가 걷히고,뜨거운 태양이 올려다 보였다.
비행기는 F-16 계열의 지원기로 히다 산맥에서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오고 있었다. 목적지는 오사카 방향인것 같았다.
그녀는 지원기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다시 안개속에 파 뭍힌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불현듯 한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일까 궁금했다.
한국이라니...
이런 식으로 김준과 억매이는 것일까...
준과의 관계를 나디아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인지도 몰랐다. 실제로 그녀는 지난 지난 1년동안 말없이 그의 모습을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때는 이런 감정이 없었다. 그냥 아쉬울때마다 그냥저냥 생각나는 남자였을 것이다.
나디아는 한국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의 삶에 짐이 되기는 싫었다. 그런다고 스처지나가는 여자로 남는것도 싫었다. 아니 자신이 없었다...
그냥 여기서 떠날까...
그래 말없이 떠나는 것이 좋은지 모른다.
나디아의 자신의 복장이 의심스러워졌다. 이런 복장으로 산 아래로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경찰이 많이 깔려 있을텐데. 벌써 맨션에 침투해 내 사물들을 샅샅히 조사한 것은 아닐까...
아,참치를 줘야 하는데...내 고양이...
나디아는 긴머리를 뒤로 날렸다. 그런 뒤 올라왔던 언덕 아래로 몸을 돌렸다.
그때 갑자기 절벽 아래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포 소리인것 같았다.
어딘선가 쿵쿵 거리며 대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디아는 재빠르게 포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운무아래 저쪽 어딘가에서 검은 포연이 난무를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무슨 군대 훈련이 있는것 같았다.
나디아는 포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순간 절벽 아래쪽에서 시커먼 그림자가 붕 떠 오르고 있었다.
헬기였다.
"아악----------!!!!!!"
나디아의 비명소리는 회접시를 들고 걸어가던 노태우의 귓가에도 들려왔다.
태우는 걸음을 멈추고 파제로쪽을 보았다. 파제로에서 윤춘해가 긴박하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태우는 접시를 집어 던지고 파제로를 향해 뛰어갔다.
"뭡니까! 방금 나디아가 비명이...!"
"글쎄 말야! 이 근처에 훈련장이 있나? 이 대포소리는 또 뭐야?"
춘해는 손살같이 권총을 꺼내 들고 언덕 위로 몸을 움직였다. 이때 김준은 하사 마에다에게 <담배를 피워도 돼나>라고 막 질문을 던지고 있던 차였다. 준은 하사 마에다의 첫번째 대답을 뚫어지게 응시하다가,서둘러 파제로에서 뛰어 내렸다. 다시 나디아의 비명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나디아는 정신없이 안개속을 뛰어가고 있었다. 헬기는 로터 소리를 감춘 채 그녀의 등 뒤를 자석처럼 쫓아오고 있었다.
저격병은 헬기 안에서 그녀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다.
"저쪽입니다!"
준은 포 소리를 들으며 안개속을 헤쳐갔다. 사방이 시끄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나디아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헬기의 로터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다연장 포의 발사소리에 파뭍혀 판별이 되지 않았다. 불길했다. 준은 양복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앞서 올라가는 춘해를 바라 보았다.
"흩어져서 찾아 봅시다! 이건 도무지..."
그렇게 말을 한 뒤 준은 바위 하나를 훌쩍 뛰어 넘었다. 잠시 뒤. 다시 나디아가 음성이 들렸다. 준은 고개를 돌렸다. 나디아가 흐릿한 안개속에서 비틀 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또다시 대포 소리가 산자락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나디아는 안개속에서 흐믈거리듯 접근해오는 남자가 김준이길 바랬다.
아니 그가 아닌들 어떤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통증은 아까부터 그녀의 허벅지 에서 게속되고 있었다. 피가 흘러내렸는데,눈까풀도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안개속을 헤쳐 나왔을때 그녀는 김준이 자신에게 뛰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10미터쯤 전방이었다.
"준...나 여기에 있어요..."
그녀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것 뿐이었다.
나디아는 그 다음 말은 영원히 할수 없었다.
이미 저격병이 쏜 두번째 총알이 나디아의 허리를 둔탁하게 휘집고 들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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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용산 국방부 지하 전산센터 안은 침묵이 기묘하게 흐르고 있었다.
모두 한 화면을 물끄러미 응시를 했다. 이윽고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상한데요...? 김준이 접속을 끊은것 같습니다...."
"그럴리가 있나? 다른 사람이 아닌가?"
"맨 나중에 들어온 자도 방금 접속을 끊었습니다. 이젠 처음 그 아이디만 남아 있습니다."
"전화 추적은 어디까지 했나?"
"미 펜타곤이 가지고 있는 인터넷 사이트를 경유해 침투해 왔습니다. 그 전 전화는 일본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핸드폰입니다."
"그자가 확실한가? 처음부터 들어와 있던 놈인가?"
"그렇습니다! 20분째 머물러 있습니다!"
20분 동안 머물러 있다면 하사 마에다가 분명했다.

"차단해!"
"알겠습니다!"
임달영 차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요원들은 전산망 차단 작업에 들어갔다.

마에다는 전산망이 차단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귀에서 해드폰을 뽑았다. 그의 눈은 노트북의 액정화면에 꽃혀 있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14인치 모니터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14인치 모니터 옆으로는 위성송수신 장비가 놓여 있었다.
마에다는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몇초 동안 빠르게 키보드를 두들겼다.
곧바로 방금 끊었던 전화라인이 미공군 통신전용의 인공위성 단자로 접속이 되었다.
잠시 뒤. 손바닥 하나가 화면 중앙에서 떠 올아왔다.
마에다는 란조를 힐끔 쳐다보더니,노트북 케이스 안에서 장갑 한벌을 꺼냈다.
장갑에는 손금이 가는 열선으로 그려져 있다. 마에다는 장갑을 끼고 난 뒤
노트북의 모니터에 나타난 손바닥 그림에 장갑 바닥 부분을 그대로 맞추었다.
곧바로 아메파 파일의 입구가 풀리면서 프로그램 내부가 개봉되는 모습이 모니터에 투영되었다.
지시를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시작하자...
내일이나 오늘이나 마찬가지이다.
항상 내일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마에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메파 파일에다가 시간을 입력했다. 곧바로 화면이 바귀면서 다시 손바닥 그림이 노트북 화면에 떠 올랐다.
"지금 무슨 작업을 하고 있으십니까?
란조가 겁을 먹고 마에다에게 질문을 했다.
"아냐. 별거 아냐!"
"그런데 그건...?"
"난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어. 과연 3에서 4만명을 살해하고 더 큰 정의를 얻으면 누가 나에게 훈장을 줄 것인가...이런 게 난 궁금해."
"이상한 말씀이군요. 도대체 무슨..."
"아무것도 아냐! 한국 고성의 인구는 4만명 안팍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마에다는 그렇게 대답을 한 뒤 엔터키를 눌렀다.
그런 뒤 한참동안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란조는 불길한 생각에 마에다의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그녀의 눈에 이번에는 노트북 화면이 바짝 당겨왔다.
붉은 선이 지표면에서 솟아 오르고 있었다.
"한방 쏘셨군요. 1위님!"
란조는 슬며시 웃으며 다시 마에다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이상했다.
마에다의 얼굴 빛은 서서히 납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아니잖아! 이게 뭔가------!!"
소리와 함께 노트북이 꽝 소리를 내며 마에다의 얼굴 앞에서 허공으로 솟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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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는 두번째 연락을 받고 있었다. 나디아를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그는 젯트기의 우측 동채 창 밖을 내려다 보며 교신기를 꺼내 들었다.
"멋있군. 그 밖에 김준이란 놈은 어디에 있나?"
곤베이의 말이 채 끝나기 전이었다. 그의 등 뒤에서 갑자기 요원 하나가 붉게 물든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섰다.
"뭐야?"
"육,육좌님...이상한 소식이 있습니다. 이 전화...당장 육좌님을 바꿔달라는 내각정보 수사과장님 전화입니다."
"알았다. 이리 줘 봐!"
곤베이는 서둘러 핸드폰을 받아 쥐었다.
곤베이를 태운 젯트기는 웅장하게 펼쳐진 히다산맥 상층부에서 좌측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그 뒤로 30여대의 지원기 편대가 굉음을 토하며 날아오고 있었다. 일미연합 훈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된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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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나디아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총알은 그녀의 등을 뚫고 허리를 관통하고 있다.
울컥 눈물을 쏟으려고 했다. 비행기의 굉음까지 겹쳐 준의 청각은 여지없이 마비되어 있었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나디아를 안아 일으켰다.
우측에서 윤춘해가 안개를 헤지면서 걸어왔다.
"이건 뭐야? 대포 소리에 전투기 소리...게다가 헬기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은데? 도무지 앞이 보여야 말이지..."
춘해는 그렇게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준이 나디아를 부축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된거야?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나?"
춘해는 빠르게 권총을 홀스트 안에 집어 넣었다. 직감적으로 나디아가 죽었음을 춘해는 깨달았다. 그는 김준에게 빠르게 걸어갔다. 노태우는 뛰어오다 말고 다시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김준씨,빨리 갑시다! 빨리!"
여기까지 곤베이 일행이 추적을 해오다니...
춘해는 빠르게 준의 어깨를 잡았다. 그때 처음으로 헬기 소리가 자세하게 춘해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춘해씨가 이 여자를 데리고 가 주시오."
"데리고 가 달라니? 이미...."
춘해는 김준이 안고있는 나디아를 받아 안았다.
이 사이에 김준은 권총을 꺼내들더니,헬기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어딨나? 나와 봐! 나와서 나를 보란 말이다!!"
"미친거요? 가야 합니다. 김준씨. 빨리!!"
이미 늦은 것 같았다. 헬기는 이들의 머리 위에서 안개를 뚫고 천천히 하강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핸드마이크 소리가 들려왔다.
"김준! 손들고 꼼작마라!! 움직이면 쏜다! 반복한다. 넌 포위되 있다!!"
소리가 끝나기 무섭게 준이 쥐고 있는 권총에서 불꽃이 튀었다.
탕-----!
"제기랄!"
조종사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했다.
"저 자식 미친것 아냐? 총이다! 빨리 헬기를 상승시켜!!"
헬기는 30도 각도로 기울러지며 김준의 머리위에서 방향을 틀고 있었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기 때문에 시계가 정확하게 구별이 되지 않았다.

곧장 저격수의 모습이 준의 시야에 당겨오고 있었다. 그는 거미처럼 헬기 문짝에 매달려서 김준을 향해 저격총을 겨누고 있었다.
춘해는 나디아를 안고 걸어가다가 총소리를 듣고 등 뒤를 돌아다 보았다.
저격수의 모습이 바짝 당겨왔고,김준이 땅바닥에서 헬기 바닦을 쫓아 몸을 다람쥐같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춘해는 외쳤다.
"이 봐! 거기가 아니야! 헬기는 밑바닥이 제일 약해! 철판이란 말야!"
아니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었다. 춘해는 뭐가뭔지 몰랐다. 그저 저놈의 헬기를 박살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그는 나디아를 땅바닥에 내려놓고 곧바로 권총을 꺼내 들었다. 곧장 그의 눈 안으로 헬기 뒤쪽에 있는 나무가 바짝 당겨왔다. 안개가 잔뜩 끼어 있었다.
미부 날개였다. 그렇다. 바로 저거다!
속사였다.
춘해는 헬기의 미부尾部 로터를 향해 연커푸 권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당했다!"
조종사의 음성이 헬기에서 터져 나왔다. 이미 미부 로터 감속기가 파편을 토하며 회전력을 일어가는 것이 조종사에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옆에 붙어있는 수평 안정판마저 꼴나쁘게 휘어져 가고 있었다.
"상승하겠다. 꽉 잡아!"
팍팍팍팍팍--------!!!
조종사의 의지와는 다르게 헬기는 이미 추력推力을 잃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준의 머리 위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준은 식은 땀을 흘리며 바위 밑으로 몸을 굴렸다.
그 사이에 헬기는 허공에서 중심을 잃고 빙빙 돌고 있었다. 캐빈석 출입문이 덜컹이며 흔들렸고,저격수가 힘겹게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 상태로 헬기는 우측 3시 방향 안개속으로 방향을 잡고 있었는데,헬기의 주 로터는 안개를
무섭게 빨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자세 그대로.
팍팍팍팍팍팍 파 앙----------------!!!
헬기는 자신의 꼬리날개를 기다리고 있던 거대한 나무에 그대로 들이박고 있었다. 곧바로 물기를 머금은 나뭇가지가 대나무처럼 휘어지면서 헬기를 덥쳐 왔다.
텅.
윤춘해는 나뭇가지 사이에 걸려있는 헬기를 올려다보다가 깜짝 놀래 뒤를 돌아다 보았다. 노태우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서 있는게 보였다.
"너..너 방금 헬기를 향해 뭘 던지 거냐?"
태우의 대답이 들려왔다.
"화력지원입니다. 아무래도 부족할거 같아서,수류탄을 가져와서 던졌는데요?.."
동시에 요란한 소음이 들려왔다.
꽈-----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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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인민무력 부장 윤철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방,방금 미사일이 발사되었습니다. 노동 3호입니다!"
"어디야? 어디로 떨어지는 건가?"
"그게..."
"뜸들이지 말고 빨랑 말하단 말이다. 동무!"
"남,남조선이 아닙네다...! 일본으로 날아갔시요!"
"일본이라고? 아니,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 일본으로 날아갔다는...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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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는 납빛이 된 얼굴로 부서져 있는 노트북을 응시하고 있었다.
칙쇼!
마에다는 짐승처럼 포효를 했다.
"미나... 너 이년..... 네 년이...내 파일을......"
란조가 서둘러 뒷좌석 문을 열어 젖히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1위님? 무슨 일이기에?"
마에다의 음성이 들렸다.
"9번 아메바 파일을 그년이 앞당긴것 같아. 6번 아메바 파일을 없애고 9번 파일을 그년이 훔쳐서 이용했단 말이다!!"
"그게 무슨 뜻인지....?"
"무슨 말이냐고? 방금 발사시킨 북조선 미사일이 한국 고성으로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지금 일본을 향해 날아온다는 뜻이다! 아직도 내 말 이해 못하겠나,넌!!"
"그럴리가요?..."

이즈 반도에 가면 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나는 담배를 손끝으로 빙빙 돌리며 가냘프게 속삭이고 있었다.
춤을 춰야 하지요. 그 가려한 무희처럼...
그녀는 씁쓸히 웃으며 컴퓨터 모니터의 파워스위치를 내렸다. 그런 뒤 담배 연기로 도너츠를 만들어 허공에 내 뿜었다.
방금 미사일이 발사 된것 같았는데,어디서 어느 방향으로 미사일이 발사되었는지 그녀 자신은 알지 못했다. 그저 하사 마에다의 컴퓨터에서 발견했던 12개의 아메바 파일을 여러군데다 섞어 놓았는데...그 결과가 어떨지...
이제 이 문제에 그녀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녀는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하복부 아래쪽에서 통증이 왔지만 그리 심한 것은 아니었다. 아닐꺼야...아기가 벌써 발길질을 할까봐...
미나는 냉장고에서 참치 통조림을 꺼내 유리접시에 담았다. 그런 뒤 찬바람이 불고 있는 뒷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슬며시 야릇한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러는 거다.
오빠가 나를 싫어하면 평생을 지하실에 가두어 두고 고양이처럼 기를테다...
미나는 후끈 달아오는 얼굴로 철문을 천천히 두들겼다.
하야시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미나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자물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물쇠에는 이상이 없었다.
이번에는 신경질적으로 철문을 두들겼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오빠----!"
미나는 신경질적으로 자물쇠를 열어 젖혔다. 그런 뒤 철문의 손잡이를 잡아 당겼다. 아침 무렵에는 열리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신기하게 활짝 문이 열린다.
하야시는 없었다.
질퍽하게 고여 있는 물을 따라서 할머니의 손가락이 둥둥 떠나니고 있을 뿐이다.
미나는 생전 처음인것 같았다. 세상이 이토록 심한 악취가 나는 공간이 있을까.
미나는 임신한 이후로 가장 심하게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잠시 뒤.
난...너를 위해 최선을 다 했는데.
"넌 나쁜 놈이야,하야시------!!"
미나는 절규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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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라 로보스-브라질 풍의 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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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로 나오자 안개가 걷혀 가면서 뜨거운 태양이 작렬하고 있었다.
후꾸오 하야시. 그는 진홍빛의 거리를 절뚝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무리가 아니었다. 하야시의 긴머리는 이상하게 치렁치렁했는데,청바지는 흙으로 범벅이었다. 어쩌면 그의 매서운 두 눈동자가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을 것이다.
하야시는 옷차림 그대로 신주쿠 번화가에 있는 깅끼 은행에 들어섰다.
그런 뒤 카드를 꺼내 돈을 조회한 뒤 필요한 양의 돈을 찾았다. 필요한 만큼 찾은 것은 아니었다. 하야시가 현금으로 500만엔을 출금하자 등 뒤에 서있는 여자가 신음을 흘리며 하야시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하야시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여자는 사색이 되어 시선을 거둔다.
턱...
하야시는 야비하게 웃더니 여자의 얼굴을 향해 침을 뱉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여자는 울수도 없었고 비명을 지를수도 없었다. 그 사이에 하야시는 은행 밖으로 걸어나가고 있었는데,여자는 마냥 얼빠진 얼굴로 하야시가 들고 있는 노트북과 돈봉투를 응시할 뿐이었다.
여자가 울음을 터 트린 것은 하야시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을때였다.
도로에서는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하야시를 향해 사정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하야시는 무단횡단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파괴된 남자가 흔히 그렇듯 어깨를 웅크린 채 도로를 건너갔다. 이윽고,그의 눈에 러브호텔 간판이 보였다.
하야시가 호텔안으로 사라지자 황영달은 품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역시 수상했다. 출금한 돈의 액수가 많은 것도 이상했는데,은행 안에서 있었던 행동은 미친 사람의 그것이 아닌가?
어쩌면...저 놈인지 몰랐다. 저 놈이 후루겔스 게이꼬를 살해한 지하철 해커일 것이다.
황영달은 그런 생각을 하며 진광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진광섭은 이미 김준이 보내왔던 지하철 해커 명단을 기초로 기관원들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하야시가 세번째 중요 용의자였다.
황영달이 진광섭에게 보고를 할 때 정주영은 홀로 하야시의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전 10시 30분이 막 지났을 무렵이었다. 미나가 뒷마당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처음으로 정주영의 귀에 들려 왔다.
어찌나 등골이 오싹한 울음소리였는지,정주영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속한 채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황영달의 핸드폰은 통화중인지 신호가 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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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했어! 황영달 넌 하야시를 계속 감시하고,정주영에게는 집안을 뒤져보라고 해. 필요하다면 미나라는 여자를 엎어와도 좋다. 알겠나?"
진광섭은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방금 전 황영달의 보고에 의하면 하야시가 일시불로 500만 엔을 찾아갔다고 했다. 아무래도 의심이 갔다.
"전산팀인가? 후쿠오 하야시의 은행잔고를 조회해 봐. 그래 맞았어. 돈을 누가 보냈는지 찾아보고,놈의 여동생 은행잔고도 조사를 해봐. 아무래도 이들 남매에게 뭔가 있는것 같다."
진광섭은 발빠르게 작업 지시를 끝냈다. 이젠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섭은 다시 하야시의 신원조회서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자동차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때 별안간 핸드폰 벨이 울렸다.
서울의 임달영 차장이었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방금 북한에서 미사일이 발사되었는데 곧장 일본으로 날아갔다는 소식이다.
"그럴 리가 있나요? 해커가 한국으로 떨어질 미사일을 일본으로 진로를 바꾸었단 말입니까?"
"그래,바로 그거야! 멋있는 이야기지. 불똥이 일본으로 튀었으니 우린 장구나 치면서 기다리자구!"
"그,그래 봅시다. 하지만..."
"놀랄 필요 없어! 이건 김준의 복안이야. 가만히 보니까 그 친구 제법 믿을 만한 친구더군..."
"네? 무슨 뜻입니까?"
"잔말 말고,마에다는 김준이 찾아보겠다고 했으니까 넌 오늘 아침에 말했듯 곤베이를 유인해라! 오늘 밤 쓰루카 항에서 접촉하기 전에 넌 책임지고 곤베이를 잡아 보란 말이다!"
"그,그게 제 혼자서 되는 일이 아니잖습니까? 곤베이야 스테이션 호텔에 묶어 둘 수 있습니다만,그후 문제는..."
"이미 네 생각을 김준과 토의를 해보았다. 가능하다고 한다. 그러니 넌 곤베이를 잡아 두는 거야. 녀석은 지금 김준을 잡으려고 혈안이니까 네가 먼저 그놈을 묶어 두란 말야! 전에 박살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좋습니다. 그럼 형님을 믿겠습니다. 절 도와주셔야 합니다. 반드시!"
광섭은 묘한 표정을 지으며 통화를 끝냈다. 어이가 없었다. 곤베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테이션 호텔에다 엮어 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사일이 지금 이 순간 일본으로 날아온다고 하니까 믿어지지 않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한현희는 내각정보조사실에 잡혀 있다고 합니다."
옆좌석에 앉아있는 이상운이 갑자기 통화를 하다말고 광섭에게 말했다.
"그녀 뿐만 아니라 그녀의 오빠도 잡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근데 간밤에 다른 장소로 이송해 갔다는 군요."
"다른 장소로 이송해 갔다고?..."
"네. 지금은 도무지..."
"곤베이가 사용하는 안가를 탐문해 봐. 도쿄 북쪽에 많이들 있잖나!"
"알,알겠습니다..."
정리할 일이 많았지만 처음부터 차근차근 정리하기로 광섭은 생각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하사 마에다의 위치였지만 그 문제는 일단 김준에게 맡기기로 결심을 했다. 우선은 미사일이 문제였다. 지금쯤이면 어디까지 날아 왔을까. 실제로 북한 미사일이 일본땅을 두들길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곤베이를 스테이션 호텔로 유인하는 문제도 여간 골치아픈 일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곤베이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는데...
그래 그렇게 하는 것이다. 놈을 이번 기회에 요절내고 말테다...
광섭이가 주먹을 불끈 쥐고 있을 때 이번에는 후지산의 마끼 별장 앞에서 이틀째 마끼를 감시하던 임소봉의 전화가 걸려 왔다.
"마끼가 후지산 별장을 떠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뭐야? 갑자기 왜들 이래? 어디로 가는 거래?"
"글쎄요. 모르겠습니다. 전화 도청을 실패했습니다..."
"놓치지 말고 쫓아가."
그렇게 말을 한 뒤 진광섭은 잠시 머리를 숙였다.
"아니다,소봉이 넌 말야! 마끼를 대충 정리한 뒤 스테이션 호텔로 달려와야 한다. 아무래도 곤베이가 난리를 칠것 같아. 내 말 알겠나?"
스테이션 호텔로 곤베이를 유인하는 것은 바꿔말해서 곤베이를 잡겠다는 뜻이었다. 소봉은 영문을 몰랐다.
"갑자기 왜 곤베이를 잡으려고 하십니까?"
"미사일이 날아온다고 한다! 미사일이 실제로 일본 땅을 두들기면 곤베이 그 놈,머리가 돌아 버릴게 분명하다 이 말이다. 그러니 먼저 우리 쪽이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3시간 뒤에 뵙겠습니다!"
임소봉은 짤막하게 대답을 한 뒤 통화를 끝냈다. 그는 김영진이 운전을 하는 자동차 안에 앉아 있었다. 방금 마끼 준사히가 별장을 떠나는 모습이 보였지만,미사일 이야기때문에 임소봉을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리 걱정할 문제도 아닌것 같았다. 북한의 노동3호 미사일이라면 최대 사정거리가 800Km 안팍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니 날아온다고 하더라도 고작해야 일본 해안까지 도달하다가 도중하차를 할 것이다.
어찌되었는지 라디오에서는 미사일이 날아온다는 이야기가 없었다.
조용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클래식 프로그램과 증권투자의 진실이라는 대담프로가 흘러나온다.
별장을 나온 뒤부터 마끼의 스포츠카는 야마나카코 산정 호수로 향하고 있었다. 집사가 운전을 하는 모양인데 서두르는 기색이 아니었다. 영진과 임소봉을 태운 자동차는 안개속을 아슬아슬하게 비틀어 가면서 계속 그녀의 스포츠카를 추적해 갔다. 미행은 10여분 동안 계속되었다.
잠시 뒤. 마끼의 스포츠카가 야마나카코 산정 호수 옆에서 멈추는 것이 보였다. 호수 지역은 이쪽과는 달리 안개가 빠르게 걷히고 있다. 영진은 스포츠카가 보이는 후방 500미터 뒤에다가 자동차를 정차했다. 임소봉이가 내려선 뒤 쌍안경으로 마끼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안개가 걷히고 있군요..."
"우리 위치가 쉽게 들통난다는 뜻이기도 할꺼요. 근데 김형은 알고 있소?
저 여자가 말이오,무슨 이유로 이곳에 온 것 같소? 뭔가 집히는 것이 없소?"
"집사에게 접근해 녀석을 족쳐 보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럼 마끼가 이곳에 온 이유를 알수 있겠지요."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럼 빨리 시작해 봅시다. 여기서 지체하다간 스테이션 호텔까지 갈 시간이 없겠소."
그렇게 말을 하다가 임소봉은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바짝 긴장을 한 표정이었다.
"왜 그래요? 쌍안경 안으로 뭔가 이상한 게 잡혔습니까?"
"젠장할...!"
임소봉은 묘하게 신음을 흘리더니,잽싸게 쌍안경을 집어던지고 안개 속을 해쳐 나갔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이미 젠장할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마끼와 그녀의 집사가 대기하고 있던 수상비행정에 올라타고 있었던 것이다.
"제기랄,이래도 되는 거야? 되는 거냐구!!"
임소봉과 김영진이 선착장까지 뛰어왔을 때는,그들이 보는 앞에서 수상 비행정이 호수의 물살을 가르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서쪽이었다.
마끼가 수상비행정을 이용 서쪽 하늘로 종적을 감추고 있을때 진광섭을 태운 자동차는 도쿄를 떠나 마에바시 현으로 연결된 503번 국도를 타고 있었다. 이 자동차 역시 서쪽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곤베이 내 말 듣고 있나? 이제 시시한 숨바꼭질은 그만 하자. 니혼라인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에서 만나고 싶다. 네 녀석 머리 뚜껑이 열릴 만한 정보가 나에게 있단 말이다."
광섭은 차 창 밖을 가끔씩 내다 보면서 핸드폰 통화를 하고 있었다.
상대방은 곤베이였다. 대화는 5분여 동안 계속되고 있었는데,둘은 싸우는 것 같기도 했고 협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내 부탁을 들어줘서 고맙네. 그럼 오후 3시 정각에 보세. 난 지금 그쪽으로 달려가고 있지."
곤베이가 쉽게 승락을 하자 진광섭은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 진광섭였다. 그는 거드름을 피워가면서 곤베이를 유인하고 있었다.
통화를 끝내자마자 진광섭은 다시 차 창 밖을 내다 보았다. 때마침, 곤베이가 타고 있는 사브 제트기가 허공 1만 2천미터 상공에서 방향을 바꾸고 있었지만,진광섭은 그 사실을 몰랐다. 그는 차 창을 두들기는 제트기 소리에 물끄러미 귀를 기울이더니,선글라스를 콧 등에 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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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씨. 시간이 없소. 나디아를 두고 갑시다."
준은 걸음을 멈추고 윤춘해를 바라보았다. 춘해의 등 뒤에서 나디아를 안고 걸어오던 노태우가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였다.
준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 왼편으로 식당이 보였다.
"생각해 보시오. 나디아는 이미 죽었소. 죽은 여자를 건지는 것은 좋은데 이러다가는 우리까지 줄초상이란 말이요. 물론 그녀를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오."
노태우도 춘해의 말을 거들고 있었다.
"그렇게 합시다. 나디아는 여기에 두고 갑시다. 곧바로 오사카 영사관에 연락을 할 테니 추후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11시 20분이었다. 준은 차갑게 식어 있는 나디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시 안개속에서 헬기가 날아오는 소리와,포격 소리가 들려 왔다. 준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그녀를 저에게 주십시오."
준은 그렇게 말을 하며 태우에게 걸어갔다. 태우는 나디아를 안은 상태에서 준에게 걸어왔다. 준은 나디아를 받아 안았다. 자욱한 안개가 죽은 여자와 산 남자를 감싸고 있었다.
식당 주인은 덮밥을 만들다가 힐끔 고개를 들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던 것 같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덮밥을 하지 말라는 주문 같았다. 하지만 아까 그 사내의 음성이 아니었다. 주인은 도마질을 하다 말고 서둘러 주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저쪽에서 파제로가 스타트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식당주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칼을 휘두르며 뛰어갔다.
"이보시오! 돈을 주고 가셔야지. 난 흙을 파서 장사하는 게 아니란 말이요."
그렇게 말을 하다가 식당 주인은 걸음을 멈추었다. 저쪽 야외 테이블 쪽에 앉아 있는 여자의 뒷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는 멀리 떠나는 파제로 자동차를 바라보다가,호수 쪽을 응시한 채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를 향해 걸어갔다. 여자의 울이 고은 머리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돈은 그녀의 발 아래에 떨어져 있었다. 음식 값 치고는 상당히 많은 10만엔권 수표 한 장이었다. 주인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자의 모습을 본 순간 주인은 망치로 얻어맞은 듯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여자는 이미 싸늘하게 죽어 있었다. 주인은 여자를 멍히 바라보다가,바람에 뒹굴고 있는 종이 쪽지를 집어들었다.
"됐습니다. 대사관에 연락을 해 달라는 쪽지를 남겼으니까 잘 처리될 것이오. 이제 우리가 사는 방법을 강구해 봅니다. 헬기 소리 안 들립니까?"
춘해는 태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디아쪽으로 걸어가는 식당주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전방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하면 좋겠소? 우회도로를 타고 있다고 하지만 보시다시피 우리 위치는 이미 발각이 났소. 이와는 다르게 마에다 그 자식은 또 다시 미사일을 쏘았다고 하오. 공교롭게도 이쪽 일본을 향해 쏘아 댔다고 하는데..."
춘해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보니 무엇인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아침에...아침에 이쪽 산악지방으로 들어올 때 김준이 했던 작업이 별안간 춘해의 뇌리에 떠오른 것이다.
그래...아침에 김준은 북한의 노동3호 미사일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설마...
춘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뒷좌석에서 준이 창백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들기는 모습이 보였다.
"당신이 한 짓이요? 북한 미사일을 일본에다 쏘아 올린 사람 말이요!"
춘해는 더 이상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컴퓨터 작업을 하다 말고 김준이 춘해를 돌아보더니,슬쩍 고개를 끄덕여 보였기 때문이다. 춘해는 기가 차다는 듯 눈으로 준을 응시하다가,작업중인 컴퓨터로 눈길을 옮겼다. 준은 하사 마에다를 찾고 있었다.

>> 하사 마에다. 다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내 모습을 보고 있나?

하사 마에다는 고장난 노트북의 상태를 관찰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14인치 모니터에서 글자가 떠 오른게 보였다. 재미가 없었다. 방금 전 안기부측에 의해 핸드폰 번호가 들통난 것 같더니,김준이 메시지를 계속 날려오고 있다. 화가 나는 것은 김준이 사용하는 아이디가 <HASA>라는 아이디였다는 점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하사 마에다의 방위청 아이디를 그대로 도용해서 메모를 날려오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
마에다는 골치가 아팠다. 미나가 작업을 방해한 뒤로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10분전에는 난데없이 마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었다.
만나고 싶다고 했다. 나를 보고 싶다고 그녀는 말했다.
이 때문에 온통 머릿 속이 혼란 되고 있었다. 그래,죽기 전에,모든 작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면 마끼를 찾아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그녀 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그 문제로 마에다는 심각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핸드폰 번호가 발각나더니,새로운 핸드폰 번호를 텀블링(Tumbling: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번호를 만들어 사용하는 행위)하거나 복제하기도 전에,이 질문,방금 모니터에 떠 오른 질문이 계속 날아오고 있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 김준. 내 작업을 방해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바쁘다는 것 모르나?

마에다가 처 올린 문장은 춘해의 눈에도 보였다. 춘해는 컴퓨터 통신을 통해 이쪽으로 날아오는 마에다의 문장들을 읽어 가다가 김준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준의 얼굴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지만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반짝인다.

>> 방해할 생각은 없다. 만나는 것이 어떤가?

김준이 문장을 처 올리자,잠시 뒤,일본 어딘가에 숨어 있는 하사 마에다의 대답이 다시 이쪽 컴퓨터 화면으로 날아왔다.

>> 구로자와 아끼라의 영화를 같이 구경하고 싶다는 뜻인가?
미안하지만 이미 늦었어. 이젠 너 따위에게 신경 쓸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네 놈 같은 시시한 한국인이 아니야.
방위청 극비에 접근했을 때 난 네 놈에게 우리의 반격이 어떤 것인지 똑똑하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 똑똑히 보고 있을 것이다.
이제 나는 3번째 미사일을 발사할 생각이다. 끝장을 볼 것이다.

준은 모니터 상에 떠오르는 글자를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식은 땀이 났다.
파제로는 아직도 털털거리며 안개 속을 달리고 있다.
이제 도박을 해야 할 시간임을 준은 깨 달고 있었다. 아니,도박은 김준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다. 그는 마른 침을 삼키더니,키보드를 가볍게 두들겼다.

>> 아직도 미나가 북한 미사일을 해킹했다고 생각하나?

순간 하사 마에다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건 무슨 뜻인가...
녀석도 후꾸오 미나를 알고 있단 말인가?
마에다는 2만볼트 정도의 번개에 맞은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경색되었다.

>> 미나를 알고 있나?

>> 알고 있다. 민영화된 정보수집작업이 빠르다는 것은 너도 알텐데?

>> 네 녀석이 했던 일을 합리화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말해!
네 녀석이 해킹을 했단 말인가!
아메바 파일을 뒤죽박죽 섞어 놓은 놈은 미나가 아니라 네 놈였단 말인가?

>> 난 아메바 파일이 있다는 것은 모른다. 그건 돈으로 구입하지 못했으니까.
한가지 내가 한 일이 있다.

>> 칙쇼!
뭐야 뭐야? 네 놈은 처음부터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속였단 말인가?
말해 봐! 뭘 한 건가? 내 베이비 미사일에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준은 반대쪽에서 처 올리는 문장을 읽으면서 하사 마에다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분명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래. 이 자는 지금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준은 담배를 고쳐 물었다.

>> 이제야 나를 만날 생각이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
한가지 힌트를 주겠네.
35분 전에 발사된 노동 3호 미사일에 탑재된 Jx-6 파일은 사정거리가 바뀐 채 발사되었다.
물론 후꾸오 미나는 자신이 그 작업을 했다고 믿고 있다.
난 그녀를 속였지.
너 역시 속았어.
최초의 네 놈 계획은 쓰시마 섬이었지? 아니 대한민국 고성이었나?
난 모두를 속일수 있었다.

>> 입 닥쳐! 내 베이비 미사일에 무슨 짓을 했나?
지금 일본으로 날아오는 미사일에 무슨 짓을 했냔 말이다!

>> 대한해협의 폭을 생각해 봐. 일본은 전체가 위험해.

준은 여기까지 타이핑을 하다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다시 그는 타이핑을 계속했다.

>> 도쿄가 타켓이라면 내 말을 믿겠나?

마에다는 흠질 놀란 눈으로 모니터 상에 떠 오른 글자를 읽었다. 마른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건 농담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마음만 먹으면 반격을 해 올 것이고,도쿄를 해치우겠다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놈이 실제로 대한민국 고성으로 날아갈 미사일을 해킹한 뒤 도쿄를 향해 발사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 날 놀라게 하는 너의 상상력에 감탄을 한다. 하지만 너에겐 2천만 인구를 때릴 능력이 없어!

>> 전화를 끊겠다.
나는 지금 저팬 알프스를 오른쪽에 끼고 283번 국도를 타고 있다.
기다리겠다. 내 최종 목적지는 쓰루카 항이다.

>> 빡가야로! 전화 끊지마! 넌 날 속이는데 실패했어. 노동 3호의 비행 거리는 800Km에 불과하다! 노동 3호는 도쿄까지 날아오지 못한단 말이다!

>>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했다. 이제 10초 뒤면 대한민국 안기부가 너의 작업도구를 점거할 것이다. 그러니 불운한 행운이 연속되기를...
내 위치를 빠른 시간내에 찾아내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네 놈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 입 닥쳐! 약속장소는 내가 정한다! 283번 국도가 아니라 나고야다!
진정으로 나를 만나고 싶다면 나고야로 나를 찾아 와!
나고야에서 기다리겠다!

마에다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미친듯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짧은 비명이 그의 입에서 흘러 나왔고,마끼 준사히의 섹시한 몸매가 떠오르기도 했다.
마에다는 후회가 되었다. 왜 하필 나고야라고 타이핑을 했을까. 나고야는 마끼와 만나기로 한 장소가 아닌가...
그가 잠시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을때 14인지 모니터의 화면은 회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키보드 역시 먹혀 들어가지 않았다.
김준의 말처럼 대한민국 안기부가 입출력 포트를 점거했는지 화면은 회색으로 바뀌었고,어두운 심연속에 빠져들었다.
가만히 보니까 입출력포트가 강제적으로 제압된 것이 아니었다.
에볼라 형 바이러스였다.
입력과 출력이 먹히지 않는 상태에서 플로피 디스크와 하드디스크 드라이브,롬 바이오스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리는 신종 바이러스였다.
이 때문에 마에다의 컴퓨터는 키를 누를 때마다 삑삑 거리며 금속음을 토해 낸다.
빌어먹을. 완전히 당했군...
그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처음부터 대비를 했어야 했다. 핸드폰의 번호는 공중파였기 때문에 도용이 얼마든지 가능했고,추적도 당하기 쉬웠다. 그러니 전화번호가 들통난 상태에서 통신을 계속하다보면 중학 1년짜리 학생이라도 침투를 해 올수 있었다. 이런 것이 핸드폰을 이용한 컴퓨터 통신의 약점이었다.
마에다는 동작이 중단된 데스크탑 컴퓨터를 멍하니 바라보면서 신음을 흘렸다. 그가 쳐다보고 있는 알파칩을 채용한 데스크탑 컴퓨터는 초당 처리 속도가 200백만 밉스에 육박하는 괴물 컴퓨터였는데,1 바이트도 안되는 에볼라 바이러스에게 무기력하게 당해 버리다니...
그는 지치기 시작했고,화가 나기도 했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자신은 알지 못했다. 이미 대한민국 안기부는 그가 동급해커로 위장한 사실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김준을 도와주면서 협공을 해오는 것일 테지....
갑자기 상황이 비틀어진 것은 후꾸오 미나 때문이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전화 연락을 해 온 마끼 준사히...
두 여자를 정리하기 전에,김준을 먼저 만나야 한다는 것이 마에다는 아쉬었다. 하지만 지금은 별 뚜렷한 방법이 없었다. 그래 나고야로 가는 것이다. 그곳에 가서 이용가치가 없는 녀석을 먼저 제압하자.
왜 베짱을 부리지 못하는가.
마에다는 속으로 뇌까리면서 마지막 작업을 염두 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뜻대로 전개되지 않으면,그는 오키나와 기지에 있는 핵폭탄을 일방적으로 한국으로 날려 버릴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뒤 자결을 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별반 계획이 아니라 그 혼자만의 계획이었지만,이젠 그 가능성이 서서히 마에다의 머릿속에 자리를 잡아갔다.
넌 할 수 있다...
마에다의 생각은 가장 간단한 논리에서 파생되는 듯했다. 65년 6월 22일에 있었던 <한일간 기본관계에 대한 조약>에서 이미 일본은 한국에 대해 전후배상을 다했다고 마에다는 믿고 있었다. 아니 이것은 당시 일본측 협상대표인 구보다久保田의 말처럼 배상이 아니라 시혜에 가깝다고 믿었다.
총 10억 달러에 가까운 돈이 60년대 중반에 한국에 지불되었으니까 배상이 아니라 시혜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것은 마에다가 속해있는 별반을 장악하는 사상이었다. 그리고...
이젠 축구도 한국을 이기고 있으니까,한국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인 것이다. 그 식민지가 주권국가의 국방에 관여를 하려고 한다. 누가 뭐래도 용납이 되지 않는 일인 것이다.
일본이 핵폭탄을 제조하건 한국을 공격하건 그것은 어떤 나라도 간섭할수 없다. 보스니아와 체첸 공화국 사태를 보면 강자가 곧 정의라는 것은 얼마든지 눈으로 확인할수 있다.
마에다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강한 자가 살아 남는 것이 세상 이치이니까 그가 미사일을 쏘아 대도 탓할 사람이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에 흐믈흐믈 자리를 잡아갔다.
그의 시선이 컴퓨터에서 액정화면이 부서진 채 옆좌석에 놓여 있는 노트북으로 옮겨갈 때 란조의 음성이 들려 왔다.
"무슨 일입니까? 왜 갑자기 작업을 중단하십니까?"
"작업을 중단한게 아니다. 저쪽에서 에볼라 바이러스를 침투시켜 이쪽 컴퓨터를 장악한 것 같다."
"저쪽이라뇨?"
"대한민국 안기부야. 시시한 곰만 있는줄 알았는데 제법 민첩하게 대응하는 놈들도 있다."
마에다는 그렇게 말을 한 뒤 에스파스 밖을 내다보았다. 에스파스는 292번 국도를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는데,김준을 태운 파제로와는 달리 저팬 알프스의 산봉우리가 왼편으로 올려다 보인다.
"그럼 우리 위치는 어떻게 된 겁니까? 안기부에게 발각난 겁니까?"
"염려할것 없다. 안기부 녀석들이 알아 낸 것은 핸드폰 번호에 불과하다.
우리 위치는 내 자신도 모르니까 녀석들은 추적을 해 올 수 없다."
어쨌든 큰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이쪽 전화번호가 발각되었을 때 에볼라 바이러스를 날려올 것이라는 점은 예측했어야 했는데 한발 늦은 것이다.
"컴퓨터가 동작이 안된다면 큰일이군요. 이젠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노트북 컴퓨터는 액정화면을 교체하면 사용할 수 있다. 아니다. 액정화면 대신 일반 모니터를 노트북에 연결하면 다시 정상적으로 사용할수 있으니까 이 문제는 신경 쓸 일이 아냐."
"그럼 어떤 점에 문제가 있는 겁니까?"
"북조선에서 발사된 미사일이 지금 어느 쪽으로 날아오는지 확인해 봐.
내가 만든 프로그램에 의하면 지금 이 시간에 쓰시마 섬 앞에 있는 무인도에 떨어져야 한다. 헌데 도쿄로 발사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 문제를 알아볼 수 있겠나?"
"상부에 문의를 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문제는 없습니까?"
마에다는 란조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물끄러미 에스파스 창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저팬 알프스 자락을 품고 안개가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283번 국도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가?"
"왜 그러십니까?"
"283번 국도로 이동했으면 좋겠다. 내 명예를 걸겠다. 오늘 당장 한 놈 처 죽일 놈이 있으니까 지금 당장 283번 국도를 이용 나고야로 가자."
그렇게 말을 한 뒤 마에다는 노트북 컴퓨터를 집어들었다. 그의 왼손은 노트북 컴퓨터를 잡고 있었고,오른손은 조립식으로 부착된 액정화면을 노트북 본체에서 뜯어내고 있었다.
잠시 뒤. 마에다의 손은 14인치 모니터의 케이블 선을 노트북과 연결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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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브 2000 터보 프롭기는 나고야名古屋 공항에 착륙을 하고 있었다.
후퇴각 6엽식의 프로펠러를 가진 이 제트기는 50인승과 58인승이 있었다.
곤베이가 내려서자 그 뒤를 따라 레인저 부대원들이 내려섰다. 사뇨 사유리는 맨 뒤에서 히로세 전산팀장에 의해 기내 밖으로 끌려 나왔다.
이미 12대의 마쓰시다 MVP와 8대의 스즈끼 사무라이 벤,영국산 재규어 자동차가 곤베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곤베이는 재규어에 올라타기 전 후미에 서 있는 히로세 전산팀장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사뇨 사유리를 끌고 왔다. 곤베이는 휘청이듯 끌려오는 사유리를 바라보다가 운전석에서 튀어나온 사내를 보았다. 매처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사내였는데 곤베이의 오른팔였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고 알고 있다. 좋은 소식부터 말해!"
"미사일을 잡았습니다. 도쿄로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것을 노토반도 서북방 100Km에서 해상자위대가 잡았다고 하는데 아직은 미확인 보고입니다!"
"미쳤군. 실제로 도쿄로 날아오려고 했단 말인가? 북조선 놈들 어디가 어떻게 된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도쿄까지는 날아올 수 없었습니다. 컴퓨터 분석에 의하면 바다에 떨어지는 미사일 였다고 합니다. 그저 위협사격였던것 같습니다. 하여간 이 문제로 황제 폐하는 유럽순방을 중단하셨고,내각은 흥분하고 있습니다."
"알았다. 나 역시 채널이 복잡하기 때문에 입수된 정보를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 자위대나 방위청,외무성 장관 놈들이 미사일 때문에 무슨 난리를 부리고 있나?"
"아직은 별달리 말이 없습니다만 이 기회에 한반도를 예속시키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흥미 있군. 북조선은 어떤가? 뭔가 브리핑이 있었다고 하던데?"
"비합리적인 실수라는 코멘트가 10분 전에 있었습니다. 지지時事통신에 의하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사준한이가 직접 나와서 해명을 했답니다.
바람때문이라고 합니다. 일본해에서 노동미사일 실험을 하다가,순전히 바람 때문에 노토 반도까지 날아갔다고 하는데,이거 정말 억울하지 않습니까?"
"해커 이야기는?"
"공식적으론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새로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한국 측과 북조선의 김정일이 만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북경에서입니다."
"일이 커지기 전에 입을 맞추겠다는 뜻이겠군. 하여간 양국 간의 전례를 보아 지금 상황은 상당히 좋지 않다. 나쁜 소식이 있다는데 그것은 뭔가?"
"하사 마에다의 상관을 한시간 전에 체포했습니다. 이 문서를 읽어보시겠 습니까? 팩스 전문과 그 밖에 부수적인 문서입니다만."
곤베이는 사내가 내민 서류 3장을 재빨리 뺏어 들고 읽기 시작했다. 하얀 백지 위에 깨알같이 일본 글자가 타이핑되어 있었다. 직인은 없었다.
곤베이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류 밑에 있는 팩스 용지는 란조가 그녀의 상관에게 보내는 팩스전문인데 5분전에 수신된 내용이다.
"별거 아니었군. 이 서류를 읽은 사람은?"
"지금 현재론 세사람입니다. 아니 둘입니다. 육좌님과 저 밖에 없습니다."
"좋아. 마음에 든다. 그래 한시간 전에 잡았다던 마에다의 직속상관은 지금 어디에 있나?"
"자살했습니다."
"자살?"
"네. 란조 2위가 팩스를 날린 것을 역추적해서 잡았는데,의외로 피래미 였습니다. 동북방면대 6사단 소속의 1위(대위) 계급을 달고 있는 녀석인데, 우리가 치고 들어가자마자 총구를 자기 목구멍에 들이 박았습니다."
"그랬나? 아깝게 됐군...역시 별반 골수분자들은 하다가 안되면 스스로 자살을 한단 말야..."
곤베이는 그렇게 말을 한 뒤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제 사건의 윤곽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배후는 김준이 아니라 하사 마에다의 별반인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제는 결정을 해야 했다. 별반까지 치고 들어가느냐 아니면 지금 여기서 중단을 하느냐.
아니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별반이라는 것이 건들어 보았자 이익이 없었다. 오히려 국제적으로 망신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솔직히 말하면 곤베이는 별반을 수사할 용기가 없었다. 별반은 우파 최대의 실세 조직이니 곤베이로써는 매우 조심을 해야 했다.
곤베이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 서류는 내가 보관하는 게 좋겠군. 불태우던지 알아서 하겠네. 그런데 이 팩스는 뭔가? 마에다가 나고야로 이동을 하고 있다니 무슨 뜻인가?"
"란조는 자신의 상관이 자살한 사실을 모르고 팩스를 계속 날려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접수를 했던 겁니다. 팩스 내용을 보니까, 마에다가 김준을 나고야에서 만나려 하는것 같더군요. 어떻게 할까요?"
"재미있군. 지금 김준은 어디에 있는데 그래?"
"놈은 아직 츄부中部 지방 내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마에다는 근거리에서 추적중입니다만,김준의 움직임은 아직 윤곽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JR 노선엔 경찰병력을 깔았고,말씀하신 쓰루카 항구에도 해상 자위대를 동원해서 한국 어선을 감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완벽합니다. 저팬 알프스 등산로에도 육상자위대 예비 병력을 투입했으니까 김준이나 마에다는 이제 츄부 지방을 빠져 나갈수 없습니다."
곤베이는 방금 읽었던 팩스의 내용을 머릿속에 떠 올렸다. 이제보니 두 녀석이 나고야에서 만나려 하는 것이 분명했다. 바로 지금,내가 서있는 이 도시에서...
"멋있군. 10분전엔 다카야마高山 부근에 있는 음식점에서 나디아의 시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니까 그 쪽을 중심으로 부채꼴로 포위망을 좁힌다. 중간에 놈들 마음이 바뀔지 모르니까 가미코치,도야마,가나자와 방향도 물샐 틈 없이 막도록 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쪽 나고야 안에다가 김준과 마에다를 가두겠다는 뜻이겠군요..."
"3시까지다. 3시까지는 두 놈을 발견해도 모른척 해야 한다. 난 지금 당장 이누야마에 있는 니혼라인으로 가야하니까 그 이후에 보도록 하자. 헌데 니혼라인에 스테이션 호텔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
"예? 무슨 말씀인지?"
"만날 사람이 있어. 그 자가 스테이션 호텔에서 나를 보자고 하는 군."
"누군데 그러십니까? 그쪽은 지저분한 급류가 흐르는 실개천 지역입니다.
스테이션 호텔도 육좌님이 몸소 가시기에는..."
"진광섭이다. 그 자가 나에게 인사를 해 오겠다고 한다."
"놈...간덩이가 부어 있군요! 스테이션 호텔에서 보자고 한다면 한판 붙자는 뜻일 겁니다. 거긴 야쿠자들 놀이터이지요."
"그런가? 듣던중 반가운 소리군. 나역시 이 기회에 진광섭과 붙을 생각이다."
그때 히로세 전산팀장이 사유리를 재규어 뒷좌석에 집어넣고 곤베이에게 뭐라고 외치고 있었다. 곤베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히로세는 긴급히 제트기로 뛰어갔다.
다시 사내의 음성이 들렸다.
"혹시...진광섭이가 단합을 요구하는 것이 아닐까요? 놈도 마에다에 대해서 알고 있다면..."
곤베이는 재규어에 올라타고 있었다. 뒷좌석 안쪽에는 사유리가 앉아 있다.
"분명히 하지만 마에다나 별반은 이 일에 상관이 없다. 미사일을 쏘아대고, 오키나와 기지의 전산망을 해킹한 놈은 동급해커다. 우린 그렇게 알아야 한다. 알겠나?"
그렇게 말을 한 뒤 곤베이는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유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사유리는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아가씨는 우울한 표정이군. 우울할 필요가 없는데 말야. 잠시 뒤면 김준이 나고야로 온다니까 이 손수건으로 눈물부터 닦으라구."
"정말이에요? 아찌 말은 거짓말이 아니죠?..."
"그래. 아가씨는 우리 상품이니까 몸을 깨끗이 정화시켜 놓아야 해. 아가씨같이 귀여운 여자는 거래를 할때도 가격을 높게 책정할수 있지."
"흐음...거래라구요?...누가 저를 사는 건데요? 쯔압..."
"김준이 사는 거야."
사유리는 오싹 몸이 달아올랐다.
"싫어욧! 나 이 손수건 필요 없어요. 나 진흙탕에서 뒹굴거야. 밤새도록 뒹굴어서 내 몸 값 깎을 거란 말야!"
"진정해 아가씨. 아가씨를 판다는 게 아냐. 정 상황이 안 좋으면 아가씨를 이용 김준을 유인 하겠다는 거지. 그러니 어쨌거나 아가씨는 김준과 만날수 있을거야."
"그래도 싫어! 네가 뭔데 나보고 이래라저래라하는 거니? 응? 이 옆구리 터진 김밥아!!"
곤베이는 수축되었다.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사유리의 볼을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아가씨. 까부는 것도 정도가 있는 거야. 아가씨 나이라면 지금 아가씨가 처한 상황이 어떤것이라는 것 쯤은 알텐데? "
"흐응. 알았쪄. 까불지 안을껭...그러니 이 징그러운 손 치워,발퀴벌래야!"
재규어는 공항을 떠나더니,잠시 뒤 나고야 공항 전철역에서 방향을 바꾸었다. 나고야에서 이누야마의 급류 지역인 니혼라인日本line까지는 50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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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장님! 방금 곤베이가 나고야를 떠났다고 합니다!"
"수고했어. 역시 추측 대로군."
이상운과 진광섭을 태운 자가용은 마쓰모토 현을 통과하고 있었다.
"멋진 생각입니다만 녀석을 스테이션 호텔에 묶어 두기에는 역부족입니다.
레인저 부대원 10여명이 곤베이를 뒤따라가고 있다는데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다. 10명을 데리고 오라고 한 것은 바로 나다."
"알고 있습니다만... 과장님도 정말 스테이션 호텔에 가실 생각입니까? 전 걱정이 됩니다..."
광섭은 씁쓰레하게 미소를 지었다.
"유인이라고 생각했나? 놈은 내가 유인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나 놈이나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가 원하면 한 침대안에도 같이 들어가지. 그리고 이번엔 중대한 협상을 해야하니 나도 직접 가야 한다. 녀석도 마에다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면 김준을 더 이상 쫓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을...? 과장님답지 않게 슈베르트적인 발언을 하시는 군요. 윽...죄송합니다."
"난 곤베이를 피할 이유가 없어. 그러니 이 문제는 그만 접어두게."
"솔직히 말하십시오! 과장님은 단판지으려고 가는 게 아니잖습니까? 곤베이를 잡아 없애려고..."
이상운은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찝찔한 표정으로 자동차 밖을 내다 보았다.
정오를 지나면서부터 사태는 피상적으로 변하고 있었다. 북한에서 쏘아 올렸던 미사일을 일본 해상자위대가 바다 위에서 잡았다는 소식을 방금 들었던 터였다. 때마침 지저분한 안개도 정오를 지나면서부터 개고 있었는데 이 점이 그나마 좋은 징조였다.
여러가지로 불안한 점이 많았다. 쓰루카 항에서 대기중인 선박에 김준 일행이 올라타는 것도 내일 밤이 아니라 오늘밤이었다. 이 사실은 윤춘해와 이상운 그리고 진광섭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이 때문에 정오경부터는 눈코 쉴 수 없이 바빠지고 있었다. 무사히 윤춘해가 김준을 쓰루카 항까지 픽업한다 하더라도 언제 돌발 사태가 일어날지 몰랐다. 이것에 대비해 광섭은 곤베이를 스테이션 호텔에 묶어 두고자 노력을 하는데...
이상운은 시계를 보았다. 곤베이와의 약속시간은 오후 3시였다. 앞으로 1시간 30분 안에 스테이션 호텔에 도착해야 했다.
이상운과는 다르게 정작 진광섭 자신은 다른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육상 레인저라면 일본 자위대가 자랑하는 특수부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한번 운이 좋아 레인저 대원들이 훗가이도에서 동계 훈련을 하는 것을 한국 국방부 참관인 자격으로 구경을 한 적이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설동(雪洞:설상 주거지)이라는 것을 만들고 있었다.
설동은 이글루와 비슷한 형태였는데,이들 레인저 대원들이 만든 이글루는 눈더미 속에 만든 다다미 방과 유사했다. 이들은 음료수가 얼어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플라스틱통에 물을 담고 땅 밑으로 1미터까지 내려 판 뒤 저장을 했는데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설동 안의 환기구는 스키스톡을 이용해 뚫는것 같았다. 그런 뒤,최소 식량으로 3박 4일 동안 설동 안에서 견디어 내는 훈련을 한다.
광섭이가 4일후에 다시 훈련장에 갔을 때는 쓰레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광섭의 날카로운 눈 마저 설동이 어디에 있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 후에야,진광섭은 그 지옥훈련의 책임자가 곤베이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왜 이런 악연이 그 친구와 계속되는 것일까...
곤베이가 북한에서 연수를 받을때 광섭은 곤베이를 감시해야 했는데, 한일간 정보팀의 친선 체육대회가 있으면 그때마다 곤베이와 진광섭은 검도로 서로의 실력을 교환하기도 했다.
어느해에는 광섭의 외동 딸 혜숙의 생일을 곤베이가 케이크로 축하를 한적이 있었다. 그날 진광섭은 딸이 보는 앞에서 케이크를 발로 밟았다.
말하자면 광섭과 곤베이의 관계는 축소판 한일 관계라고 할수 있었다.
이상운은 생각에 잠겨 있는 진광섭을 바라보다가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자동차 두대에 분승한 부하 직원들 모습이 보였다. 상운이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윤춘해의 전화였다.
윤춘해...나쁜 소식을 전할때는 항상 이상운을 통해 소식을 전해오는 것이다.
이상운은 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절래 절래 저었다. 그는 통화를 끝낸 뒤 간신히 진광섭을 향해 입을 열었다.
"큰일났습니다... 윤춘해도 지금 나고야로 돌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나고야라니...
지금 진광섭과 곤베이가 만나기로 한 스테이션 호텔은 이누야마의 니혼라인에 있었는데,이는 나고야의 변두리 도시중 하나였다. 저팬알프스에서 나고야 방향으로 오다보면 그 길목에 있는 것이 바로 니혼라인였던 것이다.
"뭐야...?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곤베이의 시선이 김준에게 집중된 것을 차단하고자 내가 곤베이를 스테이션 호텔로 유인하는 것을 모르나?
춘해는 픽업을 어찌 그 모양으로 하는 거야? 다시 쓰루카 항구로 가라고 그래.
지금 당장!"
"그게 말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하사 마에다와 김준이 나고야에서 만나기로 했답니다! 이때문에 지금은 도저히..."
"이런 망할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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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마지막 대혼전 그리고 수상비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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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광섭은 흠질 놀랬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번갈아 날아온 것이다. 김준이 하사 마에다를 잡겠다는 생각은 훌륭했지만,왜 하필 나고야일까?  
광섭은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니혼라인이나,스테이션 호텔이나 모두 나고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으니 큰일이 나도 이만저만 큰일이 아닌  것이다.
지금까지 곤베이를 유인하려했던 계획이 다 수포로 돌아갈것 같았다.  
다시 이상운의 음성이 들렸다.  
"나디아라는 여자는...죽었다고 합니다...."  
"뭐?"  
광섭은 눈알이 뒤집어질것 같았다. 오전에 통화를 했을 때는 나디아가 죽었다는 내용이 없었는데...  
"다른 피해는 없었나?"   "곤베이 측에서 헬기를 날려 왔다고 합니다. 나디아는 산악지방에서  헬기에 타고있는 저격수에게 살해당했고,이들만이 간신히 빠져 나왔다고 하는 군요."  
"빌어먹을 자식!"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춘해 형은 쓰루카 항으로 가고 싶은데 김준이  나고야 행을 계속 주장한다는 군요. 지시 내려 주십시오."  
"아냐. 지시는 없다."   진광섭은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자신이 곤베이를 만나러 가듯,김준과 마에다는 나고야에서 합류를 하려고 한다. 
무언가 함정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이젠 이판사판이란 생각도 들었다.  
광섭은 이판사판끝에 오기가 발동했다.  
"안되겠군. 우리도 야구팀을 만들어야겠어. 선수는 몇명으로 구성하면 될 것 같은가?"  
"예...?"  
"아무래도 안되겠어. 곤베이가 니혼라인으로 오는 것은 내가 유인했기 때문이 아냐. 녀석은 뭔가 알고 있다. 그러니 우리 측에 불행한 사태가 발생할지도 몰라..."  
"선수가 부족하면 북한의 통일전선부 애들은 어떻습니까?"  
"통일전선부?"  
그러고보니 좋은 생각인것 같다.  
광섭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임달영 차장이라면 북한의 윤철과 전화 통화를 할수 있는 거물이었다. 그래. 한번 기대를 해보자. 통일전선부  애들이 도와준다면 스테이션 호텔에서 곤베이를 아작 낼 수 있을것 같았다.  
광섭은 핸드폰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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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는 모니터에서 떠다니는 메시지를 읽고 있었다. 한시간 전부터  메시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마에다가 날려 온 메시지는 아니었다. 마에다를 살해하라는 메시지였으니까 이는 다른 쪽에서 날려 온 메시지라고 할 수 있었다.  
미나는 메시지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지하실 안에 가득 들어차 있는 하야시의 컴퓨터를 마냥 쳐다보고만 있었다.  
어디에 있을까...  
미나는 온통 혼란되고 격앙된 상태였다. 볼에는 홍조가 떠올랐고,가슴은 호흡 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알 수  없었고,오빠를 사랑하는 건지 저주하는 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 미웠다.
요즘 들어선 스테이지 위에서 자신있게 춤을 출 수가 없었다. 춤을 추는  직업을 가진 여자의 무기는 가벼운 몸이 첫째였는데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들어선 몸이 무거워지고 현기증이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마음속으론 오빠 하야시만을 의지했고 오직 그만을 믿었는데....  
미나가 맨 처음 임신한 사실을 고백했을때 오빠의 반응은 이상했다. 창백 해진 표정은 식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래도 맨 처음 보였던 오빠의  반응은 줄곧 기억의 저편에서 미나에게 안도감을 주고 있었다. 아무 말이  없었던 오빠 하야시. 그것은 묵시적인 합의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오빠의 창백한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야비한 미소로 바뀌어 갔다.  
나쁜 자식.  
그녀의 임신을 그는 저주했던 것이다.  
화가 났다.  
도대체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거야?  
하야시. 말 해봐. 응?  
미나는 아직도 자신이 하야시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런 뒤 피로 범벅이 된 아이보리색 브라우스를 바스락거리며 지하실 밖으로 걸어 올라갔다. 진광섭이 보낸 정주영 기관원이 정원 한쪽에 숨어 있었지만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미나는 거실 차단스에서 CD 롬 타이틀을 찾기 시작했다. 언제였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하야시의 컴퓨터를 완벽하게 CD에 복사를 해 둔 적이 있었다. 맨처음,그러니까 6개월 전쯤에 오빠의 작업이 태반은 청부살인이라는 것을 안 뒤로 미나 역시 남자 하나를 오빠의 작업을 흉내내며 살해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 작업을 미나는 다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 것은 달랐다. 3남자중 두 남자가 죽건 말건 그것은 상광없는 일이었다. 중요한 것은 오빠 하야시의 행적이었다. 오빠를 찾아내려면...일본 안에 있는 모든 폐쇄회로 카메라를 자동으로 감시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미나는 CD를 찾아냈다.   이제 남은 것은 오빠 하야시의 사진이었다.  
사진은 어디에 있더라...   미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다락방으로 올라가더니,다시 거실로 내려왔고, 이번에는 뒷마당으로 나온 뒤 지하실로 내려갔다.  
정주영은 미나가 지하실로 내려가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의 입에선 짧은 한국말이 튀어 나오고 있었다.  
"정말 아까운데...저 여자는 미친 여자야... 미친게 분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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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베이는 기소가와木會川의 급류를 눈대중으로 훑어보았다. 총 연장은 13Km에 불과했지만,생김새나 물결의 흐름이 독일 라인강 협곡과 비슷 하다고 해서 일명 니혼라인으로 불리는 일본 3대 격류지역이었다.  
사방은 조용했다. 곤베이는 급류를 내려다보다가 몸을 돌려 스테이션 호텔로 걸어갔다. 말이 호텔이었지 스테이션 호텔은 폐가나 마찬가지였다. 목조건물을 라인강 근처서 볼 수 있는 그런 모양으로 건축을 한 모양인데 영업을 중단 한지도 벌써 3,4년은 되 보였다. 스테이션 호텔은 사람이 살고 있지 않는 말 그대로 유령의 집이었던 것이다.  
역시 진광섭의 전략은 이것이었나?  
곤베이는 스테이션 호텔을 응시하면서 생각에 빠졌다.  
이곳에서 한판 붙어 보자는 뜻이었겠군...  
곤베이는 비릿하게 웃으며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이미 스테이션 호텔 안에는 30여명의 레인저 대원들이 몸을 감추고 대기중이었다. 그리고 우측 숲과 좌측 숲에도 나머지 100여명이 매복을 하고 있었다.  
3시 정각이 되자 곤베이의 핸드폰 벨이 정확하게 울렸다.  
그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놈....  
그러고 보니 진광섭 일행은 이쪽 언덕에 없었다. 니혼라인 건너편,동쪽 계곡 숲속에서 3대의 자동차가 천천히 달려나오는 것이 곤베이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역시 진광섭답다는 생각을 하며 곤베이는 천천히 급류가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로 올라갔다.  
곤베이는 히쭉 웃었다.  
"여전하군. 약속 장소는 스테이션 호텔이 아니라 그쪽 숲이었나? 왜 나를 보자고 했나?"  
광섭은 자동차 밖으로 나온뒤,건너편 절벽 위에 서있는 곤베이에게 슬적 고개를 끄덕여보이고 있었다.  
"30미터 밖에 안 떨어져 있는데 뭐가 아쉬운가? 기다리느라고 수고했네."  
"허튼 수작 하지마. 한방 먹일 생각으로 날 유인한 것이라면 지금 포기하는 것이 좋을 것이네. 물론 상황은 자네가 더 빠삭하게 읽겠지."  
"내가 너를 만나고자 했던 것은 한가지다."  
"협상인가?"  
"다 알텐데? 김준과 하사 마에다...하사 마에다와 김준의 관계를 말야."  
"잘잘못을 따질 생각이라면 이야기를 중단하세. 난 협상을 할 생각이 없어!"  
"인사치레는 그만 하지. 본론으로 들어가면 우린 서로가 김준이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은 너희들 일본인들 우파의 계획이야. 충고하겠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수사를 정식으로 다시 시작해 보게."  
"협박인가?"  
"이건 협박이 아냐. 난 길을 만들어 달라고 정중하게 요구하는 것이네. 쓰루카 항까지는 무슨 이유가 있건 간에 김준을 데려가야겠어. 그러니 그쪽 항구에 진을 친 해상자위대도 모두 뒤로 돌려줬으면 좋겠어!"  
"대가는 무엇인가?"  
"하사 마에다를 한국 측이 잡으면 인도를 하겠네."  
"우습군. 마에다는 이미 우리가 확보했어."  
"반가운 소식이군. 그럼 모든 음모가 별반의 짓이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다는 뜻일텐데?"  
"그런 이야기는 아직 접하지 않았네. 내가 내 배를 스스로 칼로 째는 실수는 하고 싶지 않으니 조사할 생각도 없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겠지?"  
"이봐. 노력을 해 보게. 최신 정보를 들으니 너희들 정보팀이 방위청 관할로 통합된다는 소식이 있더군. 그곳에 별반 같은 쓰레기들이 끼어드는 것이 과연 좋겠나?"  
"말 함부로 하지 말게."  
"함부로가 아냐! 별반은 위험한 방법으로 핵폭탄을 소유하려고 하고 있어. 과연 그들이 저질렀던 일이 정당하다고 자넨 생각하나?"  
곤베이는 냉철했다.  
"이 봐,진광섭이. 핵을 일본국이 소유하건 말건 그건 일본 내부의 문제야. 너희들은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어. 도덕적으로 호소를 하는데 말야. 국제간 문제는 다자간 힘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게. 별반이 그런 음모를 꾸몄다면,일본인 사이에서는 우리가 핵폭탄을 소유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치들이 많다는 뜻이네. 아무도 방해할수 없지."  
곤베이는 거기까지 말을 했다. 생각해 보니,지난 며칠 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그는 신속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상황 판단을 잘못했고,전혀 관계가 없는 적을 쫓아다닌 것이다.  
하지만 그런다고 지금 모든 것을 까발릴 수는 없었다. 생각해 보니 곤베이 역시 핵폭탄이니 뭐니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런 일은 정책 입안자들이 결정하는 일이니,그 내밀한 문제까지는 관여하고 싶지도 않았다. 물론 핵을 소유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려 했던 점. 별반의 생각은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감추는 것이 수순이었다. 그러니 죄를 뒤집어 쓸 사람은 아직도 계속 필요했고,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되었다.  
곤베이는 입을 열었다.  
"하사 마에다를 잡을 수 있다면 잡아 보게. 대신 우린 김준을 포기하지 않겠네. 정부간의 협상이야 우리가 알 바 아니네. 너나 나나 밑바닥 인생이야. 옳은 게 뭔지는 알지만 그걸 실천에 옮기기에는 너무 밑바닥이란 말씀야."  
"난 밑바닥이 아냐. 네 놈이 길바닥 청춘였다는 것도 달갑지 않은 일이고."  
"재미있군. 이만 끝내는 것이 어떤가? 그저 운이 나쁘다고 생각하게. 난 너를 정리하고자 이곳에 왔다."  
역시 추측대로다. 진광섭은 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곤베이에게 물었다.  
"몇명을 등 뒤에 차고 왔나? 자네가 이끌고 온 선수의 숫자를 말해보게."  
곤베이는 야비하게 미소를 흘렸다.  
"200명. 이 쪽 숲은 내 부하들이 장악했네. 언제라도 명령을 내리면 그쪽 계곡을 치고 올라갈 씩씩한 놈들이다. 마침 장소도 훌륭해. 보는 사람은 없고,시체는 급류를 타고 떠내려가지."  
"그래,내 부하 10명을 잡으려고 200명을 달고 왔단 말인가? 자넨 멍청이인가?"  
"아가리 조심해서 놀리게. 좀 조용히 죽어 주면 안되겠나!"  
"그래,좋다. 하지만 한가지 알려줄게 있어. 숲 속에는 네 놈 부하만 있는 게 아냐. 내 부하들도 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는 나 자신도 알지못해. 하지만 숫자는 비스무리할것 같군. 내 야구팀은 막강해."  
"허풍이 심하군. 차라리 살려달라고 애원을 하는 것이 어떤가?"  
곤베이가 그렇게 말을 하자 진광섭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잠시후면 모든 상황이 종결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는 곤베이의 시선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내가 한가지 제안을 하겠네. 개인전은 어떤가?"  
"개인전?"  
"검도. 옛 추억을 되살려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일테니까...자네와 내가 다시 1대1로 솜씨를 겨루어 보는 것이네..."  
"그게 가능할까? 광섭이 넌 전에 한번 나에게 진적이 있었을 텐데?"  
곤베이가 불쑥 그렇게 말을 하자 진광섭은 별안간 화가 나서 핸드폰을 이상운에게 집어 던졌다. 그의 얼굴은 전기오븐에서 꺼낸 통닭처럼 울그락 불그락했다.  
"그때 일은 내가 진 게 아냐! 난 그때 일을 증명하기 위해 너와 또다시 1대1로 붙고 싶단 말이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검은 준비를 했나? 물론 내가 항상 죽도를 가지고 다닌다는 것은 알고 있을테니 자네도 검을 준비를 했겠군..."  
두 사내의 격투는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가을 한일韓日 정보 실무팀 간에 있었던 친선 검도 대회에서 곤베이와 진광섭은 양국 대표로 일전을 벌였는데 이때 승자는 곤베이였다.  
이것은 진광섭에게 남모를 상처를 주었다. 광섭이 생각하기에 그날 대결의 승자는 분명히 진광섭 자신이었다. 하지만 신판진은 편파적이었고,건장한 사내들이 꽥꽥 고함을 질러대며 곤베이를 일방적으로 응원을 했으니 도무지 헷갈리는 일이었다.  
광섭이가 계곡 아래로 내려왔을 때 곤베이는 이미 급류 중앙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광섭은 한국산 죽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곤베이는 검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곤베이가 짧게 무엇인가를 중얼거리자,갑자기 어딘가에서 추리릿 소리와 함께 죽도 한자루가 곤베이를 향해 날아왔다. 그는 날쌔게 죽도를 낚아챘다.  
비로소 곤베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메뉴에 1대1일 검술까지 준비되었다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는걸? 말하게. 자넨 우리 둘의 대결에다가 베팅을 걸고 싶어 하잖아?"  
광섭은 이를 우두둑 갈았다.  
"배팅은 네 녀석이 걸어! 내가 원하는 것이 뭐라는 것쯤은 쉽게 알잖아!"  
"흥분은 금물이네. 좋아 내가 베팅을 걸어 보도록 하지. 나를 꺽는다면 한시간 동안 이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시간을 죽이겠네. 그 사이에 김준을 남조선으로 데려가든지 북조선으로 데려가게나. 허나,내가 자네를 꺽으면 광섭이 넌 나에게 체포되는 거야. 혐의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  
"역시 편파적이군! 못된 송아지 엉덩이에 뿔난다는 듯이 말야! 넌 아직도 너희 나라가 핵을 소유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나? 그걸 위해 어떤 음모가 자행되고 있는데도 그것을 감추려 한단 말인가?"  
"나 곤베이는 그 문제가 네 놈이 관여할게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넌 외지인이야. 우리가 무엇을 하건 간에 넌 외지인에 불과하단 말이다!"  
"임마! 그래도 난 끝까지 간섭을 하겠다! 우리 우정을 위해,이웃 일본이 핵성냥 공장으로 전락하는 불행을 막기 위해,난 너에게 충고를 하는 거야! 아직도 모르겠나? 내가 장이면 장인 것이고 멍이면 멍이다! 내가 허락을 해야만 지구가 옳바르게 움직인단 말이다. 곤베이!!"  
다혈질인 진광섭은 그렇게 말을 한 뒤 날카롭게 죽도를 잡아챘다. 빠르게 광섭의 셔츠 위에서 그의 붉은 넥타이가 푸른 하늘로 솟아 오르고 있었다. 순간,광섭의 턱에 먼저 곤베이의 죽도가 그림같이 박혀 왔다.  
총알같이 빨랐고,위협적인 기습이었다.  
진광섭은 입에서 피를 흘리더니,맥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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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같은 시각. 밀실 밖에서 두 남자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리자 현희와 한대리는 귀를 쫑긋했다.
침입자의 작전은 신속하게 진행되고 있었는데,이들 남매는 그들이 누군인지 감을 잡을수 없었다.  
이윽고 문이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이때 한현희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있었다. 한대리가 그런 현희를 보호한 채 뒤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일본 말이 들려 왔다.  
"우리 의뢰자가 당신들을 보고 싶다는 군. 함께 가시겠소?"  
한대리는 식은 땀을 흘리며 그들을 올려다 보았다.  
뒷골목 야쿠자패거리라고 보기엔 단정한 신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한대리 남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어디요? 우릴 죽일 생각이요?"  
한대리가 그렇게 말을 했을 때 사내는 그에게 편지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오늘 밤 9시 비행기로 한국으로 가시오. 그런 뒤 아침에 출근을 하시오. 아시겠소?"  
"당신들은 누구기에...?"  
"그것까지 말해주면 곤란한데...? 우리가 누군지 궁금하오? 우린 무꽃피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란 일본 사람들이란 말요. 쩝...사실은 일본인도 아니고 중국인도 아니요. 민단계 야쿠자라고 할 수 있소만..."  
한대리는 영문을 모른 채 그들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들이 건네준 편지봉투를 보았다. 한대리는 자신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들은 일본 내각 정보 조사실 기관원도 아니었고,안기부가 투입한 야쿠자 조직도 아니었다. 서울에서,제일 그룹 본사에서 고종수 부장이 직접 투입한 특공대인 것이다.  
한대리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그 자리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이미 사내들중에서 건장하게 생긴 남자가 한대리의 동생인 현희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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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제로는 시속 90Km의 속도로 182번 국도를 달려나오더니 207번 국도로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김준의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 작업은 약간 이상한 것이었다. 안기부의 임달영 차장 부탁대로 김준은 일본 방위청으로 침투를 하고 있었다. 후배들을 위해 길을 만드는 셈이었지만 춘해는 준의 작업을 이해하지 못했다. 춘해는 궁금했다. 하지만 쉽사리 물어 볼 수가 없었다. 미사일을 일본으로 쏘아 댄 사람이 김준였다니. 이제는 김준이 어떤 인물일까 겁이 나기도 했다.  
파제로가 막 207번 국도로 진입을 할때 좌측에서 자동차 한대가 총알같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적어도 시속 200Km는 될 것 같았다. 노태우는 와락 긴장한 표정으로 브레이크를 밟았다. 이때 춘해의 음성이 튀어 나왔다.  
"뭐야? 저 차는 김영진이 운전하는 차 아냐? 어떻게 영진이가 이곳에 있는 거지?"  
춘해의 음성을 듣고,태우는 급하게 크락숀을 눌렀다.  
하지만 김영진은 크락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는 백미러를 물끄러미 쳐다 보다가 다시 전방을 주시했다. 옆좌석에 앉아 있는 임소봉은 저격총을 만지작 거리고 있었다.  
"저 친구들 귀가 먹혔나? 왜 저래? 크락숀 소리가 안 들리나?"  
춘해는 씁쓰레하게 미소를 지으며 뒤를 돌아다보았다. 김준이 담배를 바꾸어 물더니,입을 연다.  
"춘해씨. 앞에 가는 자동차가 동료라고 했습니까?"  
"그렇소만. 김영진과 임소봉이란 친군데 왜요?"  
"한번 따라가 봅시다."  
"갑자기 왜 그렇소? 나고야로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소?"  
"앞 차를 따라가 보십시오. 진과장님 일행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들과 함께 나고야로 가지요."  
"무슨 소리요? 진과장이라니? 진광섭씨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요?"  
"니혼라인이라고 하는군요. 저 자동차는 니혼라인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설마...?"  
운전대를 잡고 있는 노태우까지 믿어지지 않는지 피식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는 곧장 파제로의 속도를 높였다. 파제로 안은 아까부터 음악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브라질 풍의 바하. 뜨거운 태양 아래서 듣기에는 너무 가슴이 시린 음악...  
"이런 음악을 들으면서 일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준은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묵묵히 입을 열었다. 무언가 들떠 있는 것 같기도 했고,무엇인가 걱정을 하는 표정이기도 했다.  
"왜 그렇소? 음악 소리가 귀에 거슬리오?"  
준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뒤에 차 창 밖으로 멀리 니혼라인의 물결이 희미하게 햇빛을 반사하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김준은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에 불쑥 임달영 차장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해커란 무엇인가? 마치 톨스토이와 도스토엡스키에게 빵이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상한 질문였습니다."  
"근데요?"  
"저 자신도 잘 모른다고 했습니다. 해커와 데커,그리고 크랙커...해커는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우고 있지요."  
준의 눈빛은 우수에 젖어 있었다.  
춘해는 물끄러미 김준을 바라보다가 품 속에서 술 병 하나를 꺼냈다.  
"이거 괜히 센치해지는 군. 이게 다 일본 놈들 때문이요. 왜 벚꽃이 피다가 지는 꽃인지 아시오? 일본놈들이 가만 안 놨두거든. 원숭이 엉덩이가 붉은건 말이요. 일본놈들이 손으로 긁기 때문이요. 술 한잔 어떻겠소? 국화주요."  
"좋습니다. 술을 마시며 불구경을 하는 것도 좋겠지요..."  
"불구경이라뇨? 거 이상한 소리 작작하시오. 술 마시면서 불 구경을 하다니 누구 복장 터지게 할 일이 있소?"  
준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술병을 받아 쥐었다. 그런 뒤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국화주의 차가한 향이 그의 후각을 마비시킨다.  
해커와 크래커의 차이점은 구구절절했다. 해커란 순수한 의미로 컴퓨터에 미친 사람을 의미했는데,이와 다르게 크래커는 말 그대로 시스템을 마구 농락하는 사람을 의미했다.  
방금 김준이 한 작업은 크랙 행위에 가까웠다. 임달영 차장의 부탁을 거절할수 없었다. 이때문에 김준은 한국 국방부 전산팀과 공동으로 일본 방위청 전산망을 해킹하고 있었다.  
이제 작업이 끝나자 준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우선은 적당한 량의 알콜을 홉수함으로써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디아를 위해서도 그에겐 술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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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광섭의 우측 어깨에서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광섭은 급류에 몸을 척 박고 앉아 있었다. 셔츠가 물결에 흔들렸다. 급류는 그의 콧구멍안으로 사정없이 파고 들어왔는데,그는 제정신을 차릴수 없었다. 숨이 막혔다.  
안돼...너 광섭이 뭐하는 짓이냐. 이게 무슨 꼴이냐 말이다...  
진광섭은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그는 몸을 지탱하듯이 유지하며 급류에서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다시 곤베이의 죽검이 날카롭게 그의 복부를 파고 들어왔다.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는지,진광섭은 일방적으로 곤베이에게 난타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것은 연기였는지 모른다. 곤베이를 잡아두기 위한 연극...  
광섭은 죽도를 똑바로 일직선으로 세운뒤 처음으로 곤베이의 공격을 정확하게 막아냈다. 광섭의 모습이 달라졌다고 생각을 했는지 곤베이는 공격을 멈추었다.  
"이런,아직도 싸울 힘이 남아 있었나? 이제 약속을 지키시지? 넌 나에게 체포되는 거야. 약속대로 해야 하지 않겠나?"  
"진 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인가?"  
"약속을 먼저 어긴 것은 네 놈이다. 난 분명히 10명을 달고 오라고 했다. 10명!"  
"왜 그래? 내가 네 놈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질 것 같은가? 난 네가 전화를 걸어온 순간부터 네 녀석을 요절 낼 생각을 했다. 그걸 알아야 해. 지금 까지는 증거불충분으로 네 놈을 놓친 적이 많지만 말야. 오늘은 놓치지 않겠다. 아니,오늘은 법조문을 동원할 생각이 없어!"  
"착각하지 마!"  
소리와 함께 광섭의 독사같은 몸이 급류에서 솟아올랐다.  
터엉-----   하지만 곤베이는 귀신이었고,광섭은 역부족이었다. 곤베이는 상채를 옆으로 이동시키며 파죽지세로 떨어지는 진광섭의 죽도를 자신의 죽도로 막아내고 있었다. 그런 뒤 곤베이의 스트레이트성 어퍼 컷.  
어퍼 컷은 또 다시 광섭의 턱에 작렬했다. 광섭은 첨벙,소리를 내며 수면으로 굴러 떨어졌다.  
"칙쇼! 넌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여긴 내 홈그라운드야! 한반도가 아니라 대일본국 땅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 홈그라운드에서 네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아나? 내 귀중한 헬기를 3대나 말아먹었어! 내 얼굴에 똥칠을 했단 말이다!!"  
"입 닥쳐! 너라면 해커 한 놈이 나라 살림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을 가만히 참고 구경하겠나? 법이란 상황에 따라 유동적이고,난 한국인이라는 것을 명심해! 내가 너 따위 나라의 법을 준수할 것 같은가!!"  
"칙쇼! 칙쇼!! 칙쇼!!!"  
곤베이는 무섭게 죽도를 휘두렀다. 그것은 진광섭의 어깨와 허리와 팔을 무지게처럼 가격해 나갔다. 불을 보듯 훤했다. 광섭은 곤베이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황태자 곤베이. 항상 무표정하고,항상 조용하게만 보이는 이 사내는 실상 무서운 놈이었던 것이다.   
탕-----!   
총소리가 울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이상운이 총 한발을 쏘았고,3명의 기관원이 이상운을 따라 계곡을 뛰어 내려오고 있었다.  
"상운이...총을 쏘지 말라고 했잖아. 총을...!"  
진광섭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상운에게 버럭 호통을 쳤다. 앞쪽에서는 곤베이가 깜짝 놀란 듯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냥 위협사격 였습니다. 안 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상운은 곤베이의 눈치를 보다가 진광섭을 부추겨 안았다. 광섭은 싸늘하게 말을 내 뱉고 있었다.  
"빌어먹을...녀석은 정보국 소속이란 말야. 등 뒤에서야 머리에 칼을 찍어도 되지만 눈앞에서는 어떤 짓을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모르나? 넌?"  
곤베이는 잔인하게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이젠 끝났군. 자네들이 일본 정보국을 향해 총기를 휘두르는 것이 검증이 되었네. 이건 명확한 일이다. 너희들을 지금 이순간 모두 체포하겠다. 꼼짝하지 마!"  
광섭의 음성이 들렸다.  
"이건 실수야,곤베이. 눈감아 주게."  
"입 닥쳐! 다시 반복하지만 내 명령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다. 모두 꼼짝 말고 손들어. 한국인들!"  
사태가 이렇게 변하자 진광섭도 은근히 화가 난 모양이다.  
"이 친구야...황소도 뒷걸음질을 치다가 쥐를 밟는 법이야. 우리가 무슨 감정이 있다고 일본 정보원에게 총을 쏘겠나? 앙?"  
그는 그렇게 말을 내 뱉은 뒤 몸을 돌려 내려왔던 기슭으로 향했다. 지금 까지 피를 흘리며 당했던 것이 모두 연기였다는 듯이.  
빡가야로...!!!   곤베이는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건너편 기슭으로 올라가는 광섭 일행을 지켜보았다. 놓칠 수 없었다. 몇 번을 잡아 처넣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적당한 구실이 없어 진광섭 팀을 체포하지 못하던 차였다. 그는 서편 절벽 위로 빠르게 올라갔다. 그런 뒤 햇빛을 반사하는 급류를 내려다 보았다. 이미 그의 손은 무전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모두 송환해! 건너편 언덕에 있는 진광섭 팀을 모두 체포 송환하란 말이다!"  
동시에 곤베이의 등 뒤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 안에서 대기중인 레인저 부대원들이 총알같이 튀어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움직임은 서쪽 기슭 뿐 아니라 동쪽 절벽에 있는 숲 속에서도 벌어졌다. 곧이어,난데없는 육박전이 양국 정보원 사이에서 벌어졌다.  
이번에는 곤베이 측에서 위협사격을 해왔다. 총 소리가 다시 산자락에 울려 퍼지자 광섭 일행은 디귿 자 형으로 주차를 시킨 자신들의 자동차 안으로 몸을 감추었다. 곧이어 자동차에 요란하게 총알이 박히기 시작했다.  
"형님. 도와주십시오. 여긴 불바다입니다!"  
광섭은 자동차 사이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상태에서 한국으로 전화를 걸었다. 곧이어 임달영 차장의 음성이 핸드폰을 타고 넘어왔다.  
"뭐야? 왜 이제야 연락을 하는 거야?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이 놈아!"  
"형님,큰일났습니다. 곤베이 저 새끼가 글쎄 UN 다국적군을 끌고 온 모양 입니다. 제발 약속하신 구멍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  
"이런 멍청한 자식..."  
임달영은 수화기를 집어던지고 멍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한국에 있는데,일본에 있는 진광섭이가 자신을 도와달라고 한다. 처음부터 이럴 계획으로 곤베이를 유인하라고 했지만 왠지 얼굴이 후끈거리고 화가 났다.  
"저 여기서 죽습니다! 약속하신 지원사격은 어디에 있는 겁니까? 아침에 김준과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그 방법으로 저를 도와달란 말입니다!!"  
임달영은 수화기에서 튀어나오는 진광섭의 음성을 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엄살인지 실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구경할 것은 다 하겠다는 것이 진광섭의 속셈인 것 같아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그래. 더이상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임달영은 이제부터가 최고의 첩보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이테크 첩보전. 이런 걸 경험하기 위해 그 동안 수없이 많은 돈을 투자한 것이다.  
달영은 이마에 흐른 땀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힘없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확보한 자위대 병기는 무엇이 있는가?"  
"다연장 로켓 시스템(MLRS) 12문와 나이키 미사일 22기,203mm 자주포 등이 있습니다만,다연장 로켓 시스템과 나이키 미사일만이 원거리에서 해킹이 가능합니다."  
"사고사로 위장할수 있겠나?"  
"충분합니다."  
"하기야 당신들은 안기부 최정예 전산요원들이지. 좋소. 방위청 라인으로 침투해 들어갈 때는 <HASA>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것을 잊지 마시오. 
마에다가 김준의 아이디를 도용했듯 우리는 마에다의 아이디를 도용해서 방위청에 접속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포격 지역은 곧 일본에서 선정해 줄 것이요. 그럼 그 위치를 찾아서 포격을 개시하시오."  
"알겠습니다."  
곧바로 국방부 전산센터의 모니터는 일본 방위청 전산망을 화면에 담았다. 이윽고 누군가에 의해 마에다의 아이디인 <HASA>가 타이핑되었다. 그러자 방위청 전산망은 곧바로 열렸고,3초 뒤에는 타칸이나 레이저 추적,열추적 등의 레이더망이 화면에 떠올랐다. 한국산 병기가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일본어가 컴퓨터 화면에서 빠르게 스크롤되고 있었다.  
"설명합니다. 좌측으로 보이는 화면은 일본 방위청의 레이더망입니다. 그리고 우측 화면은 나고야 시가지와 이누야마 지역의 니혼라인의 급류를 인공위성으로 잡은 겁니다. 이 화면은 인공위성 단자를 이용해 입수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진지하면서도 들 떠 있었다.  
진지한 것은 진광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급류를 건너오는 레인저 대원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쪽 기관원중 몇 명이 그들과 엉켜 붙은 채 싸우고 있었는데 결코 밀리는 구석이 아니었다. 광섭은 희열을 느끼며 그들에게 외쳤다.  
"후퇴해! 아까 작전대로 뒤로 물러난다. 곧 포격이 있을 것이다,포격!"  
그렇게 외친 뒤 광섭은 시선을 건너편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쪽으로 옮겼다. 30여명의 레인저 부대원들이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광섭은 식은 땀이 흘렀다. 자칫하다간 부하들이 모두 개밥 신세로 전락할 것 같았다.  
그때였다. 불쑥 북서쪽 숲 아래쪽 간선도로에서 파제로 자동차가 총알같이 달려나오는 것이 보였다. 진광섭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신에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임소봉였다.  
광섭은 임소봉의 말을 들으며 슬적 건너면 기슭으로 시선을 옮겼다. 곤베이가 서 있는 서편 절벽 위에서 헬기 한대가 막 착륙을 하는 게 보였다.  
이번에는 등 뒤에 웅크리고 있는 이상운의 음성이 들렸다.  
"과장님,아무래도 안되겠습니다. 그냥 도망갑시다. 여기서 우물대다간..."  
"아냐! 이제부터가 본 게임이라는 것을 모르나? 그러나 저러나 저 영감탱이, 윤춘해는 어쩌다가 이곳까지 다시 굴러 온 거야. 앙?"  
파제로 자동차는 숲 길을 따라 날카롭게 달려 나오고 있었다. 총소리가 다시 요란하게 시작되었다.  
광섭은 파제로의 움직임을 쳐다보다 말고 자동차 사이에서 몸을 빠르게 일으켜 세웠다. 그러면서 파제로를 운전하고 있는 노태우에게 등 뒤로 꺼지라는 손짓을 빠르게 했다. 그런 뒤 잽싸게 몸을 굴리면서 급류가 흐르는 개천으로 방향을 잡았다.  
곧바로 좌측 급류 아래로 바위가 있는 것이 보였다. 광섭은 번개같이 바위 밑으로 몸을 감추었다. 이상운은 진광섭을 엄호하며 뒤따라 달려나오고 있었는데,기다렸다는 듯이 총소리가 진광섭과 이상운을 쫓아온다.  
바위 밑에서 적당한 엄호물을 찾아 몸을 감춘 뒤 광섭은 급류의 건너편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 뒤 핸드폰을 꺼내 들고 리다이얼 스위치를 눌렀고 다른 한손은 절박할 정도로 빠르게 지갑하나를 꺼내 들었다. 지갑 안에는 각도기가 들어 있었다. 그는 각도기로 태양의 각도를 잰 뒤 손목시계의 뚜껑을 열었다. 손목시계의 디지털 감응기는 이미 이곳 방위를 자동으로 측정하고 있었다.  
그런 진광섭의 행동을 이상운은 놀란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뭡니까? 정말 임달영 차장님이 우릴 도와준 데요? 한국에서 여기까지 120mm 대포라도 쏘아 주겠다는 겁니까?"  
"한국이 아냐!"  
광섭은 빠르게 지껄인 뒤,오랜지 색을 가진 리모콘을 품속에서 꺼내 들었다. 그런 뒤 스위치를 누르자 곧이어 리모콘에서 삑삑 거리는 발신음이 들려 나왔다. 분명 스테이션 호텔 서편 별관 지붕에 감추어 두었던 레이저유도 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광섭은 식은 땀을 흘렸다. 이젠 한방이면 상황이 종결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핸드폰으로 한국에 있는 임달영 차장을 다시 호출했다.  
"반응이 왔습니다!"  
전산요원 하나가 급하게 일어서며 외쳤다. 곧바로 30대의 모니터 화면은 인공위성이 잡은 이누야마 지역의 니혼라인 급류지역을 크로즈업했다.  
"붉은 점을 주시해 주십시오. 아마 저것이 스테이션 호텔인것 같습니다. 레이저유도장치인데,모든 게 100퍼센트 정상입니다."  
묘한 흥분이 흐르고 있었다.  
"사고사로 위장해야 합니다. 포격은 1회. 3대의 다연장포와 2기의 나이키 미사일이 동원되지만 나이키 미사일은 위장입니다. 조심하십시오. 우리 기관원이 있다고 하니까 포격은 단 1회로 끝내야 합니다."  
중앙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다른 전산요원이 입을 열었다.  
"사인 내려주십시오. 차장님."  
달영은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더니,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닦았다.  
"여러분들이 알아서 해주시오. 내가 사인을 내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라는 점은 여러분들도 알 것이오. 그저 최선을 다해 주기 바라오."  
"알겠습니다. 그럼 모든 작업을 비공개로 하겠습니다. 작업을 끝낸 뒤에는 반드시 바이러스를 뿌리고 탈출해야 합니다. 자,그럼 15초 뒤에 출발합시다!"  
발빠른 해킹이었다. 어떤 전산요원은 후지쯔 레이더만 5년동안 연구한 사람이었다. 그 옆에 앉아 있는 사내는 일본제 군수물자에 설치된 컴퓨터 레이더망을 역분해하는 작업으로 3년을 허송세월 보내듯 시간을 보낸 사람이었다. 그들이 30분전에 김준이 만들어 놓은 루트를 따라  3대의 다연장포와 2기의 나이키 미사일 컴퓨터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곧이어 OK 사인이 컴퓨터 화면에서 떠올랐다.  
"접근했습니다!"  
안기부 최정예 전산팀만이 구사할수 있는 난해하고도 눈부신 하이테크 해킹. 지금부터는 30명의 전산요원들이 각자 전담지역에서 개인전을 하기 시작했다. 몇은 역추적해오는 일본 전산팀을 다른 쪽으로 유인을 했고,몇은 인스턴스식 바이러스를 뿌리기 시작했고,그중 가장 뛰어난 몇은 곧장 일본 츄부지방에서 훈련중인 육상자위대의 전산망을 리모트로 제어했다.  
그리고 다시 15 초 뒤.   
퍼엉------   
츄부지방에 있는 육상자위대 마이즈루 경비구 합동 훈련장은 난데없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미 8군 트럭에 장착된 나이키 미사일이 갑자기 태양을 향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모두 2기였다. 그리고,그것이 날아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이번에는 육상자위대의 다연장 트럭에서 로켓 탄두가 요란하게 하늘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대낮에 벌어진 갑작스러운 참극이었기에, 텐트 안에서 식사를 끝낸 뒤 휴식을 취하던 병사들은 모두 혼비백산이 되어서 뿔뿔이 흩어졌다.   
팍팍팍팍팍-------------   
곤베이는 헬기에 올라타려다 말고 하늘을 가르며 떨어지는 다연장  로켓탄의 소리를 들었다. 곤베이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다연장로켓의  자탄들이 요란하게 스테이션 호텔 지붕에 처박히고 있었다.   
콰앙--------------------------------------------!!!   
엄청난 불덩이였다. 2천도는 될 것 같은 폭염이 한꺼번에 스테이션 호텔에서 터져 나왔고,삽시간에 뒤쪽 숲은 불바다로 변했다. 나무가 쓰려져 내렸고,레인저 대원들의 시체가 하늘로 떠올랐다.  
"뭐야? 저건 다연장 로켓탄이 아닌가?"  
곤베이는 폭염을 팔로 가리며 외쳤다. 붉어진 얼굴로 헬기 조종사가 대답을 했다.  
"모르겠습니다! 츄부지방에서 날아온 겁니다. 방금 육상자위대 훈련중에 다연장 로켓이 오발을 했다고 합니다! 오발이래요!"  
곤베이는 조종사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하늘로 고개를 바짝 처 들었다. 또 다시 같은 방향에서 같은 장소로 다연장 로켓탄이 떨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미친 자식들! 저건 오발이 아니다! 저건 레인저 대원들을 노리고 쏘아대는 것이란 말이다!"  
얼굴이 뜨거웠다. 곤베이는 좌측 숲이 흔들리자 급하게 자신의 몸을 굴렸다. 이번에는 대원들의 비명 소리가 아까보다 크게 들려 왔다.  
곤베이는 엎어져 있는 상태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믿을수 없었다. 나고야 현에서 북동쪽으로 120Km 전방에 있는 산자락에서 날아온 다연장 로켓이라고 한다. 그 미사일이 니혼라인의 서편 절벽에 있는 스테이션 호텔을 눈부시게 포격을 하고 있었다. 또다시 폭발음이 들려 왔고,계곡 하나가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다.  
"빡가야로! 너,진광섭이----!!!"  
아무리 생각을 해도 이건 우연한 사고가 아니었다. 광섭이 저 놈이... 놈이 계획적으로 한방 먹인 것이 분명했다.  
이젠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곤베이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스테이션 호텔 사방에서 처참하게 뒹굴고 있는 레인저 대원들을 향해 뛰어 갔다. 호텔 뒤편 숲 속에서 번진 화염은 이제 우측과 좌측 숲을 먹어 가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인지 모른다. 곤베이가 숲 가까이 접근했을때 이번에는 숲 안쪽에서 북한 사투리가 들려 왔다.  
"동무들 뭐하나? 남조선 동무들을 도와 사정없이 깨부시라우!!"  
이건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북조선의 통일전선부 친구들까지 숲 속에서 매복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총소리가 울리자,곤베이는 위기 의식을 느끼면서 다시 헬기를 향해 뛰어갔다. 이번에는 다연장 로켓이 급류 표면을 무차별하게 두들기는 것이 보였다. 눈이 부시다 못해 현기증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한편. 계곡 반대편 도로에서 노태우는 파제로의 브레이크를 잡다 말고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계곡 이쪽으로 진광섭과 이상운이 올라오는 게 보였는데 난데없이 계곡 건너편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들려 왔던 것이다. 태우와 춘해는 서둘러 파제로에서 뛰어 내렸다. 뒤따라서 김준이 뛰어 내리고 있었다.  
"넋 빼지 말고 빨리 도망가! 한시바삐 이 불바다를 빠져나가야 한다!"  
"북한 친구들은 뭡니까? 오다가 보니까 통일전선부 애들까지 숲 속에 있던데요?"  
"이 밥통아! 이럴때는 길림성 조선족도 딩가딩가 한 핏줄이라는 것을 모르나? 북한이 쥬라기 공원이라고 하지만 이럴 때 친구요 동료요 자매란 말이다! 뒤처리는 저 친구들이 해줄 테니 우린 이곳을 빠져나가면 되. 빨리!"  
광섭은 그렇게 말을 하다가 김준을 바라보았다. 김준과는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는 것이다. 광섭은 어디서 여유가 생겼는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준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김준의 오른손에는 노트북 가방이 쥐어져 있었다. 
"악수를 할 수 없구먼? 당신을 직접 만나니 기쁘오. 내가 진광섭이요. 질기기는 나이롱빤스보다 더 질기다고 소문이 난 안기부내 일본통이오만, 당신 때문에 나 솔직히 고생 많이 했지..."  
"대단하군요. 지금 이 광경은 서울에서 미사일을 해킹한 것이 아닙니까?"  
"뭘 놀라시오? 임달영 차장 말에 의하면 모두 당신이 힌트를 준 것이라는데. 어쨌든 이곳을 빠져나갑시다. 보시다시피 곤베이는 엿을 먹고 있소."  
그렇게 말을 한 뒤,진광섭은 준의 어깨를 잡았다. 준은 마지못해서 광섭을 따라 파제로를 향해 걸어갔다. 그때였다. 김준이 무의식중에 좌측으로 시선을 돌리자 서편 절벽 위에 서있는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스테이션 호텔 앞쪽에 있는 언덕.  
그곳에 서있는 여자는 사뇨 사유리였다.  
준은 번개에라도 맞은 듯 그대로 얼굴 표정이 굳어 버렸다.  
분명 사유리였다.  
확인을 시키듯 급류를 타고 그녀의 음성이 들려 왔다.  
"김짱,걱정 말고 한국으로 돌아가세요. 꼭 편지하세요. 전 정말 김짱 편지를 기다릴 거에요..."  
사유리의 음성은 진광섭과 이상운을 포함 윤춘해에게도 들렸는데,가장 빠르게 반응을 보인 사람은 진광섭이었다.  
"뭐야 저건? 어떻게 된거야? 저 기집애가 왜 저기에 있는 거야? 앙?"  
이미 김준은 급류 쪽으로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동시에 헬기의 핸드 마이크 소리가 귀가 터지게 들려 왔다.  
"사유리를 살리고 싶은가? 살리고 싶다면 김준은 이쪽으로 와라. 이쪽으로 오란 말이다!"  
곤베이의 음성이었다. 곤베이는 헬기 옆에 서 있는 상태에서 핸드 마이크를 빼 들고 말을 하고 있었다.  
"그쪽으로 가지 마시오! 가면 죽는단 말이요!"  
춘해가 흥분된 얼굴로 앞으로 뛰어 나가려 하자 진광섭이가 춘해를 제지했다.  
"춘해씨. 움직이지 마시오. 죽는 건 김준이 아니라 춘해씨란 말요!"  
"하지만..."  
광섭의 말처럼 헬기 우측으로는 두명의 저격 요원이 총구를 이쪽으로 겨누고 있었다. 사유리는 그들 사이에서 가련한 오페라의 소녀처럼 서 있고.  
그들은 자세 그대로였고,그 상태에서 곤베이는 헬기에 올라타고 있었다. 곧장 헬기는 이륙을 한 뒤 급류 중앙을 향해 날아왔다. 사유리는 아직도 절벽 위에 서 있었는데,울듯 말 듯한 그녀의 얼굴은 시커멓게 잿더미를 뒤집어 쓰고 있었다.  
준은 허탈했다. 그는 급류 가운데에서 멈추어 선 채 헬기가 날아오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은 앞으로 전진할 방법이 없었고,뒤로 도망갈 방법도 없었다.  
다시 사유리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지만 이젠 바로 앞 허공에 떠 있는 헬기 때문에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두명의 저격요원은 아직도 그 절벽 위에서 김준을 향해 저격총을 겨눈 상태였다.  
"사다리에 매달려! 도망갈 생각 말고 사다리를 내려 주면 잡아타고 기어오란 말이다! 알겠나?"  
소리와 함께 헬기에서 사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사다리는 허공에서 맴돌고 있는 헬기를 쫓아서 준의 얼굴 주위를 돌았다.  
이때 진광섭은 품 속에서 권총을 꺼내 들고 있었다.  
춘해가 식은 땀을 흘리며 광섭을 응시했다.  
광섭으로써는 한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곤베이가 김준을 이용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으니,김준이 사다리에 올라타면 총을 쏘아야 했다. 하지만 쉽사리 마음의 결정이 나지 않았다.  
상황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그로써는 알수 없었다. 하지만 김준의 신병이 곤베이 측에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것은 확실히 알수 있었다. 진광섭은 권총을 손에 든 채 무표정한 눈으로 김준을 응시했다.  
아니 그럴수는 없었다. 광섭은 마음을 독하게 먹을 수가 없었다. 그는 김준이 사다리를 잡는 것을 보면서 권총을 포켓안으로 집어 넣었다.  
순간 연거푸 두발의 총성이 울리면서 건너편 절벽 위에 있는 저격요원의 어깨에서 급류를 치듯 핏방울이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그것은 30미터나 떨어져있는 이쪽 언덕에서도 똑똑히 식별이 되었다.  
"됐다! 임소봉이다. 임소봉이가 저격병을 잡았다!"  
광섭은 주먹을 불끈 처 들더니,선글라스를 벗어 젖히고 급류로 뛰어 내려갔다. 숲 사방이 불타 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계곡 아래쪽은 연기가 자욱했다.  
그 연기를 뚫고,수상비행정 CL-415가 날아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산불이나,연안초계 등의 임무로 개발된 CL-415 수륙 양용기의 장점은 6피드 이하의 낮은 수면에서도 착륙이 가능하다는 점인데,이 수상 비행정이 굉음을 토하며 급류의 북쪽에서 남쪽을 향해 착륙을 하고 있었다.  
광섭은 별안간 벌어진 광경이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의 눈 앞에서 날카롭게 물살을 가르며 착륙하는 것은 분명히 수상비행정이었고, 곤베이를 태운 헬기는 갑자기 나타난 수상비행정 때문에 중심을 잃고 있었다. 광섭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는 정신없이 외쳤다.  
"무엇들 하나? 급류로 뛰어가서 김준을 보호해! 보호하란 말이다!"  
진광섭이 호통을 치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사방에서 기관원들이 급류로 뛰어내려 왔다. 마찬가지로 계곡 건너편에서 다람쥐처럼 급류를 건너오는 레인저 대원들의 모습도 보였고,북조선에서 보낸 통일전선부 애들도 보였다. 다시 그들 간에 육박전이 벌어졌다.  
모든 것은 난데없는 일이었다. 통일전선부 요원까지 온 것은 이날 오후 1시에 있었던 핫라인 통화에서 비롯되었다. 임달영은 1시 정각에 북한의 윤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 뒤 일본 별반의 계획과 그 증거물을 윤철에게 팩스로 날렸던 것이다.  
준은 이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온통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헬기에서 떨어져 내린 사다리를 올려다보다가 사방에서 뒹굴고 있는 건장한 사내들을 보았다. 사다리는 힘차게 춤을 추고 있었는데,사내들 역시 춤을 추고 있었다.  
준의 시야로 반대편 절벽 위에 서있는 김영진과 임소봉의 모습이 보인것은 그로부터 1분 뒤였다. 그는 임소봉과 김영진을 번갈아 보다가 그 두 남자 사이에 서있는 사유리를 봤다. 그는 그쪽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그렇다. 김준의 생각은 사유리를 우선 살려두고 보자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 불안당 같은 상황...사유리가 나디아처럼 죽어 가는 것을 그는 용납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김준의 마음을 방해한 것은 마끼의 스테인리스 같은 음성이었다.  
"이곳은 정말 대단하군요! 비행정에 올라타도록 해요.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나까지 위험하겠어요..."  
수상 비행정 문이 열리더니 마끼가 그에게 손짓을 하고 있었다.  
위험하니 당장 자신의 수상비행정으로 이곳을 탈출하자는 눈빛이었다.  
준은 묘한 현기증을 느끼며 마끼를 응시했다. 마끼는 차분한 아이보리색 컬러의 니트 폴오버에 롱베스트를 걸치고 있었는데,아마도 김준이 지금까지 본 여자중에서 가장 세련된 옷차림였을 것이다.  
준은 마비되었다.  
그는 노트북을 우측 손에 쥐고 있는 상태에서 언덕 편에 붙어 있는 진광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진광섭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 있었고,그의 손은 정신없이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준은 슬며시 웃었다.  
별안간 무엇인가가 그의 뇌리를 스쳐 갔다.  
누가 하사 마에다를 조종했고,지하철 해커를 조종했는지 그 배후를 알수 있을 것만 같았던 것이다.  
마끼다...  
배후에 있는 인물은 구보 마끼 준사히-바로 지금 내 눈 앞에 당당히 서있는 바로 저 여자인 것이다!  
"지금 당장 내 비행정에 올라타라고 했다! 어서!"  
다시 스테인리스같은 마끼의 음성이 준에게 들려왔다. 그녀는 어느새 권총을 빼들고 김준을 겨누고 있었다.  
권총을 보자 준은 이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수상비행정 위에서 맴돌고 있는 곤베이의 헬기를 올려다보다가,수상비행정의 옆구리로 몸을 이동해 갔다. 마끼의 수상비행정은 이미 이륙준비를 끝내 놓고 있었다.  
그가 막 수상비행정의 날개에 올라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수상비행정의 엔진소리를 뚫고 사뇨 사유리의 비명이 요란하게 들려 왔다.  
"나도 갈거야! 나도 저 비행정에 타고 싶어 미치겠단 말야. 씽~!"  
준은 고개를 돌렸다.  
사뇨 사유리.  
그녀가 서편절벽 위에서 수면을 향해 다이빙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재수가 나쁘게도 사유리가 다이빙을 한 장소는 이 근처에서는 볼 수가 없는 가장 물살이 쌘 지역이었다.  
어쩔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수상비행정 쪽에서,김준이 사유리를 구출하기 위해 날카롭게 다이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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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란조는 우측으로 검은 연기가 치솟는 산자락을 쳐다보며 에스파스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고야까지는 30Km 남짓 거리가 남아 있었다. 란조는 궁금했다. 산불이 일어난 이유도 궁금했고,10분전에 있었던 포격 소리도 궁금했다.  
그녀는 운전을 하다 말고 등 뒤로 고개를 돌렸다. 하사 마에다는 그의 마지막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란조가 다시 고개를 전방으로 돌렸을 때는 숲이 열리면서 니혼라인의 급류 지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그 급류 중앙에는 수상비행정과, 헬기와,사내들이 개미떼처럼 엉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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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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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뭐야!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곤베이는 헬기 안에서 급류를 내려다보았다. 헬기는 수상 비행정이 착수를 하면서 생겨난 바람 때문에 뒤쪽으로 밀려가고 있었다. 이제는 매캐하고도 이상한 냄새까지 수상 비행정에서 올라온다.
"연막탄입니다! 비행정에서 연막탄을 뿜어내고 있습니다!"
"시끄럽다! 저건 봄바디사의 CL-415다. 누가 빨리 비행정의 소유자를 확인해 봐! 그리고 너희들은..."
곤베이는 눈알을 부릅뜨고 급류 지역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개미떼처럼 엉켜 있는 안기부 요원들이 레인저 팀을 뚫고 빠르게 후퇴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레인저! 뭐하나. 쥐구멍을 틀어막고,나머지는 비행정으로 접근하란 말야!"
이번에는 비행정에서 붉은 색 연막과 푸른색 연막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곤베이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곤베이는 권총을 꺼내 들고,연막탄 아래로 보이는 비행정을 향해 권총을 겨누었지만 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간신히 비행정의 꼬리 날개가 그의 눈에 들어왔을 뿐이다.
"육좌님,이쪽입니다. 이쪽!"
곤베이는 목소리를 듣고 캐빈 반대편 창으로 뛰어갔다. 헬기 아래로 비행정의 발판이 내려다 보였는데,사내 하나가 사유리를 잡아 올리고 있었다. 김준은 발판 우측 아래에 있었다.
빙고...
곤베이는 총구를 정확하게 김준을 향해 겨누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때였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헬기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이런 제기랄!"
곤베이는 딸깍이며 떨어진 최루탄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눈두덩이가 부어오를 정도로 매캐한 최루가스 냄새가 품어져 나온다. 염화피크린였다.
"너 이 개 자식! 너 진광섭이--!"
곤베이는 눈알이 뒤집어질 정도로 화가 났지만 이도 저도 하지를 못했다.
그저 권총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급하게 최루탄을 헬기 밖으로 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순간 CL-415 수상 비행정은 이륙을 준비하고 있었다. 연막탄과 산림을 불태운 연기가 적당하게 구름 층을 형성하면서 비행정의 움직임을 차폐하고 있었는데,비행정의 프로펠러가 서서히 마력을 높여가자 이번에는 연기층이 무섭게 소용돌이를 긋기 시작했다.
빨랐다. 좌우 프로펠러가 돌아가자,기체는 수면을 박차며 앞으로 전진을 했다. 동시에 계곡 가운데를 장악한 연기는 비행정을 가운데에 두고, 좌우로 갈라졌다가 합치는 일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레인저 대원들도 마찬가지었다. 그들은 달려오는 수상 비행정을 피하느라 물결처럼 갈라져갔다.
동시에,연거푸 총소리가 들려 왔지만 수상 비행정의 육중한 동체는 날새게 급류를 박차고 허공으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남,남쪽이다! 히로세 전산실장은 내 말 듣고 있나? 앙?"
이미 비행정은 푸른 하늘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속수무책이었다.
곤베이는 잡아먹을 듯 수상 비행정을 노려보다가 이를 악 물었다.
널 잡겠다. 김준...항공자위대를 동원해서라도 네 놈을 잡고야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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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실 안에 설치된 콜린즈사의 프로라인 4 항공전자장비가 시끄럽게 곤베이의 음성을 토한다. 교신은 아까부터 계속되고 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곤베이가 찾았던 히로세 전산실장은 지금 하늘을 날아가는 사브 2000 제트기 내부의 조종실에 서 있었다.
레이더의 점이 불길했다. 이번에는 동쪽에서 붉은 점이 날아들고 있었다.
그러다가,레이더 화면의 절반이 붉은 점으로 가득 차자 히로세는 떨리는 손으로 교신기를 들었다.
"곤란합니다,육좌님. 지금 그 방향은 항공자위대의 훈련 지역입니다!"
"명령 불복종인가? 항공자위대엔 내가 연락을 할 테니까 넌 놈을 쫓아!"
"하,하지만..."
"반복하지만 CL-415는 수상 비행정이다! 수면을 따라 저공비행을 하면 레이더로는 쫓을 수 없으니까 반드시 네가 놈을 확보해야 한다! 곧 지원기를 투입하겠단 말이다!"
히로세는 고개를 절대 절래 흔들었다. 기체가 크게 진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교신기를 손에 든 채 식은 땀을 닦았다.
"지시대로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찾는 즉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한 뒤 히로세 전산실장은 기장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현재 비행 속도는 220노트. 기장이 조종간을 당기자,사브 터보프롭기는 1만8천 피트 상공에서 남서쪽 하늘을 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잠시 뒤부터 기체 아래로 동해의 푸른 물결이 내려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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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0분정도 뒤였다. 사유리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티크 무늬의 가구가 놓여 있는 밀실 안에 누워 있었다. 수상 비행정 안이었다. 바람이 기체의 표면을 강하게 때리고 있었다.
사유리는 팅팅 부은 눈을 한 채 반쯤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물줄기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렸는데,콜록 이며 기침까지 나왔다. 기다렸다는 듯이 어딘 가에서 마끼의 음성이 들렸다.
"오키나와의 아버지 별장으로 가라고 해! 연료는 충분하다고 들었다."
인터폰에서 들려 왔다. 사유리는 멍한 상태에서 인터폰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밀실 안에는 사유리 외에도 집사가 있었다. 집사,늙어 보였지만 사무라이처럼 싸늘하게 생긴 그가 객실 의자에서 일어서며 사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사유리 양.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이오. 조종실에 다녀오리다."
사유리는 물끄러미 집사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일어날 생각도 없었고, 집사를 때려눕힐 생각도 없었다. 그저 지쳐 있었고,지금 이 상황이 혼란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꿈같은 일이기도 했다. 무턱대고 급류로 뛰어 들었을 때, 사유리는 수렁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때 준이 나타났었다.
꿈이던가...
사유리는 히프를 양탄자에 붙인 상태에서,두 무릎을 안았다. 그런 뒤 무릎팍에 얼굴을 붙인 채 울먹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오는 것을 보니 꿈은 아니었나 봐...
어디에 있는 거징...
김준은 사유리가 앉아 있는 객실로부터 4칸이 떨어져 있는 메인 라운지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양쪽 눈은 넥타이로 감겨져 있었는데,팔은 의자 뒤로 돌려진 채 수갑으로 채워져 있다.
"인상적이에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군."
마끼는 바스락거리며 라운지의 우측에서 좌측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난 이 게임을 끝내고 싶었어. 이 이상 복잡해지면 나 자신마저 혼란을 느꼈을 테지."
준은 마끼의 음성을 쫓아 얼굴을 움직였다. 앞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정확하게 마끼의 움직임을 읽고 있다. 다시 그녀의 음성이 들렸다.
"마지막이 힘들었어. 난 네 녀석이 일본 밖으로 탈출하는 줄 알았으니까."
"이유가 무엇이오? 날 함정에 넣은 이유를 알고 싶소만."
"아직도 모르나? 난 알고 있다고 생각을 했는데?"
"몰랐소. 당신의 연기는 아주 훌륭했으니까."
"연기가 아니었어. 나에겐 당신 사진도 없었고,이름도 없었으니까. 고작 해야 내가 알고 있었던 것은 당신 아이디...울프라는 아이디와 동급해커라는 아이디 밖에 없었지."
"증권 때문이오?"
마끼는 수축이 되었다. 그녀는 걸어오다 말고 빙그르 몸을 돌려 우측으로 걸어갔다. 탬블러 컵이 놓여 있었다. 나무무늬가 살아 있는 목제테이블 위에.
그녀는 탬블러 컵에다 빨대를 꽂았다.
"이제야 눈치를 채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맞아. 증권 때문이었어.
일본강관(NKK)의 주식이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모두 965포인트나 떨어져 있었지. 닛케이 지수는 평균 200 포인트가 상승을 했는데도 말야. 어이가 없었지만,전쟁이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
"얼마나 손해가 발생한 거요? 20억엔? 아니면 30억엔?"
마끼는 창백했다. 그녀의 입술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340억엔 이야. 내 아버지와 나는 일본강관의 지배주주 자리를 놓고 무리한 매입을 하고 있었으니까 예상 밖으로 큰 손해가 발생했던 게지."
6개월 전이었다. 준은 95년 가을에 자신이 했던 작업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말레이지아의 국유 제철플랜트 공사권을 수주하기 위해 일본강관의 입찰가격을 체크한 적이 있었다. 그 외에도,서너 가지가 더 있었는데...
"기억나는군. 제일 중공업이 수주를 하는 바람에 우량주가 곤두박질을 쳤지. 그러다가 뉴욕의 합병 전문가들까지 나타나 일본강관을 해체 매입하겠다고 야단법석을 떨었지..."
"넌 실수를 한 거야. 그건 내 아버지 최고의 사업이었어. 우에노의 빌딩을 팔았고 하코네의 온천단지,훗가이도의 스키장까지 팔아가며 준비를 했는데 네 놈이 끼여든 거야. 게다가 끝장을 보려고 했는지 합병전문가까지 투입을 했어. 깨끗했어. 너무나 깨끗해서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지."
"내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은 언제였지?"
"금년 1월 초. 난 자살을 하려고 했어. 아버지의 부동산업은 이미 나에게 절반 이상이 넘어왔지만 쓰레기만 남아 있는 상태였지. 그 분이 불쌍하더군. 무남독녀 외동딸인 난 색광에다가 레즈비언 사이를 왕복했는데 투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던 무능아였어."
1월 4일에 있었던 파티였다. 마끼의 아버지 구보는 후지산 별장에서 정치계 거물들을 모아 놓고 파티를 했다. 그날,방위청 거물중 하나인 구보의 친구가 마끼에게 지나가는 말을 했다. 울프. 방위청 비밀에 접근한 해커인데,조사를 해보니 일본강관 증권을 교묘하게 조작했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말하더군. 울프를 용광로 안에 처넣고 싶은데 방법이 없다는 거야. 귀가 솔깃했지. 난 자청을 했고,그의 부하인 마에다를 소개받았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소..."
"마에다는 이미 가나기원에서 너를 감시하고 있었어. 하지만 나에겐 이야기를 하지 않더군. 지휘 계통도 혼란스러웠지. 방위청의 그 분이 너를 한방에 날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고 난 애걸하다시피 하소연을 해야 했지.
내가 울프를 잡아 보겠다고 했으니까."
"미사일은 어쩌다 관련이 된 거지?"
"그 문제는 나와 관련이 없었어. 난 미사일을 쏘아 올리겠다기에 핵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지. 이쯤 되니 심각하더군. 난 마에다에게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그는 대답을 회피했어. 고작해야 하숙집에 후루겔스 게이꼬라는 기자가 있다는 사실만 알아 냈지."
"교묘한 방법이군..."
마끼의 계획은 교묘하다 못해 절묘했다. 마에다가 김준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자,마끼는 김준 스스로가 자신을 찾아오도록 만들기로 했다. 우선은 함정이 필요했다. 그 점은 마끼와 별반의 음모가 일맥상통하고 있었다.
마끼는 유언장을 만든 뒤 제일중공업의 사라사테 시스템의 암호를 디스켓에 차용했다.
그 후 자살을 가장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 다음부터는 마끼의 집사가 떠맡아서 조작을 했다. 요트가 폭발을 하자 집사는 마끼의 대용품인 시체를 요트 잔해 속에 던져 놓고,시간이 흐르길 기다렸다. 예상했던 대로 마에다는 당황을 했다. 그는 통신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거리를 방황했고,그 틈을 노려 집사는 마에다의 컴퓨터로 침투해 들어갔다. 이미,게이꼬의 사진은 있었으니까,집사는 준의 사진을 재빠르게 찾기 시작했다.
사진이 입수되자,집사는 게이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옆 방에 있는 마에다라는 청년에게 마끼의 유서가 있으니 한번 기사화 해보라고 알려주었던 것이다.
게이꼬가 마끼의 유서를 요구하자,마에다는 당황했다. 그는 게이꼬가 마끼의 디스켓에 대해 아는 것이 이상했지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끼 자신이 그에게 유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지하철 해커는 어떻게 된 거지?"
"내가 고용한 것이라는 것을 알텐데? 아니,난 미국에 있었으니까 집사가 대신 작업을 했지..."
"그러다가 일이 너무 커진 것인가?"
"재대로 파악을 하고 있군. 마에다는 내가 콘트롤할수 있는 상태가 아냐. 더구나 중간에 다른 해커가 끼어 든 인상이 짙었지. 큰일났다 싶었어. 난 단지 돈을 복구하고 싶었는데 말야,실제로 미사일까지 날아다니는 것을 보니 황당하더군. 어쨌거나,난 마침내 내 돈을 찾을 기회를 만들었어. 난 네 놈을 다시 찾았으니까."
마끼는 준을 향해 걸어왔다. 한치의 흔들림도 없었고,얼굴 표정은 창백했다.
"기회를 주겠어. 어떤 식이었는지 모르지만 난 네 녀석이 증권을 조작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어. 물론 내가 이익을 얻는 한도에서 작업을 해야 해."
준은 마끼의 음성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가 천정을 향해 얼굴을 멍히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다시 마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난 스미모토 금속을 원해. NEC나 후지쓰도 나쁘지는 않아. 몇 포인트까지 가격을 떨어뜨릴 수가 있지? 가격을 올리는 것도 좋아. 난 현재도 1천억 엔까지는 현금을 동원할 수 있으니까."
준은 천정을 향해 얼굴을 고정한 채,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의 눈은 넥타이로 감겨져 있었는데,얼굴은 10년쯤 늙어 보였다.
"내가 거절한다면? 아니 난 증권 조작을 하지 못해. 그건 너무 위험해."
"사유리의 생명을 걸면 어떨까? 한가지 더 있군. 마에다를 내가 잡아 주지. 그는 미친 놈이야. 막을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자신하지."
준은 비쩍 웃었다.
"마에다는 우리도 잡을 수 있어."
"무슨 뜻이야?"
"마에다는 오후에 죽게 되어 있지."
"믿을 수 없는데?"
준은 창백하게 웃었다.
"대한민국 안기부는 깡통이 아냐. 이미 마에다를 잡기 위해 5명의 지하철 해커를 고용했어. 잠시 뒤면 소식이 있겠지."
마끼는 깜짝 놀란 듯 준을 응시했다. 템블러 컵이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그,그건 곤란해. 마에다는 이미 마지막 작업을 끝냈어. 그러니까 그가 죽으면..."
마끼는 거기까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와는 상관없겠군. 어쨌든 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것은 정해진 것 같으니까. 자 이제 네가 선택해. 나를 도와준다면,난 너에게 마에다의 전화번호를 넘겨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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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끼의 수상 비행정을 찾을 수 없답니다!"
이상운이 외치자 진광섭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준의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무슨 목적으로 비행정에 올라탔을까.
"알았어. 곧 연락이 오겠지. 이젠 그 친구에게 모든 걸 맞기는 수밖에 없는 것 같군."
파제로는 시속 100Km의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느새 준비를 했는지 운전중이던 윤춘해가 경관등을 운전석 앞 본네트에 올려놓고 삐까삐까 사이렌까지 울려 대고 있었다.
진광섭은 윤춘해의 옆 좌석에 앉아 있었다. 뒷좌석은 기관원들로 북새통이었는데,숨도 못 쉴 지경이었다.
이번에도 뒷좌석에 앉아 있는 이상운이 크게 외쳤다.
"과장님. 황영달이 연락을 해 왔습니다. 놈이 그놈이래요. 하야시. 놈이 게이꼬를 살해한 지하철 해커라고 합니다!"
"확실한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은행 구좌를 추적한 결과가 나왔는데...돈은 모모아라는 자가 보냈습니다. 바로 마끼 준사히의 집사입니다."
"뭐??"
"잡읍시다! 히트맨을 수배하고 있습니다. 월남치마를 동원할까요 아님 개구리 참외를 동원할깝쇼?"
진광섭은 전방을 응시하며 손가락을 우두둑 꺾었다. 그제야 김준이 마끼의 수상 비행정에 올라 탄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이제는 김준이 제법 마음에 들기도 했다. 녀석은 스스로 호랑이 굴로 들어간 것이다.
"좋아! 대충 감이 잡힌 것 같군. 시작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한가지 더 있다. 임달영 차장님에게 연락해서 제주도 남부로 전투기를 발진시키라고 해. 혹시 조난신호가 있을 지 모르니까 해군 구축함도 준비해주십사 말씀 드려!"
"알겠습니다. 과장님!"
광섭은 자신이 있었다. 자신은 하야시를 잡고 마에다를 잡으면 되는 것이었다. 마끼는 분명히 김준이 잡아다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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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은 아직도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아까와는 달랐다.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는 수갑이 미세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마끼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준은 마끼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말을 계속 하고 있었다.
"마끼. 작년에 했던 내 작업은 증권 조작이 아니었소. 난 시시한 자료를 수집해 건네준 것이고,대부분은 본사 정보팀과 뉴욕의 기업 합병 전문가들이 했소. 하지만 우린 실패를 했소. 일본강관,그 놈의 덤핑귀신을 해체하지 못했으니까 말이요."
준은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난 당신 돈을 복구할 능력이 없소. 설사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을 위해서는 일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당신이 지금 한 말은 내가 들었던 말 중 가장 잔인한 말이군."
그렇게 말을 한 뒤,마끼는 양탄자에 떨어진 탬블러 잔을 집어들고 준을 향해 걸어왔다. 그런 뒤,느닷없이 준의 얼굴을 향해 탬블러 잔을 휘둘렀다.
퍽 소리가 들려 왔다.
준의 얼굴은 뒤로 젖혀졌고,그의 코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난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마에다가 살해되어도 난 상관하지 않겠어. 분명한 것은 마에다가 이미 오키나와 미사일을 해킹했다는 점이야. 그걸 막을 사람은 지금 현재론 나밖에 없어. 내 제안에 동의를 하면 내가 마에다에게 전화를 걸어 줄 수가 있으니까 넌 선택을 해 봐."
그렇게 말을 한 뒤 마끼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준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고 있었다.
"결정해 봐. 10분 동안 생각할 여유를 줄 테니까."
준은 마끼의 손길을 느꼈다. 그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마끼를 찾아 고개를 들었다. 그런 준의 얼굴에서는 슬쩍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차라리 날 죽이는 게 어때?"
"그건 내가 결정해. 네가 나에게 어느 정도로 보상을 하느냐에 따라 함량이 결정이 되지."
"마끼. 난 나를 죽여 달라고 부탁했다. 안 그러면 후회를 할텐데?"
"정 원한다면 태평양 한가운데에 처박아 줄 수 있지. 하지만 모든 건 내 돈을 찾은 뒤의 일이야. 아니 말장난은 그만 하자. 이젠 결정을 해 보시지? 마에다가 서울을 불바다로 만드는 것을 보고 싶은가?"
마끼는 약간 취해 있었다. 후지산 별장에서부터 그녀는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준의 대답을 기다리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러다가 준의 바로 왼쪽 편에 멈추어 섰다.
그때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상태에서 김준이 오른발을 날카롭게 들어올리는 것이 마끼의 눈에 보였다. 그 다리는 마끼의 종아리를 보기 좋게 꺾고 있었다. 마끼는 종아리 뼈가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그자리에서 휘청거렸다.
"너...!"
마끼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고개를 들었다. 준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준의 손목에 채워져 있어야 할 수갑이 풀어 헤쳐진 채 그의 오른손에서 대롱대롱 춤을 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마끼는 깜짝 놀랬다.
"어,어떻게 수갑을...?"
준은 짤막하게 대답을 했다.
"내가 해커라는 것을 몰랐나?"
준은 그렇게 말을 하며 시야를 가리고 있는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마끼는 너무나 어이가 없는 나머지 잔뜩 수축이 되어 있다가,테이블에 놓여 있는 권총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끼는 번개같이 몸을 일으켜 세운 뒤 권총을 집어들었다. 순간,준의 구둣발이 이번에는 마끼의 옆구리로 날아오면서 마끼의 몸은 그대로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 사이에 그녀가 집은 권총이 이번에는 테이블 밑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준은 쓰러져 있는 마끼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뒤 마끼 앞에 멈추어 선 채 입을 열었다.
"마끼. 내 질문에 대답을 해 주시오. 마에다가 사용하는 전화번호를 알고 싶소 만."
마끼는 이를 악물고 준을 올려다보았다. 권총은 1미터 우측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같은 질문을 두번하기 전에 먼저 설명을 해 주겠소. 한국 전산팀은 마에다가 미사일을 해킹한다면 이번엔 오키나와에 있는 미사일을 해킹한다고 추측을 하고 있었소. 남북한은 오후부터 미사일 발사 체계를 모두 옵라인으로 차단한다고 했으니까,마에다에겐 남북한 미사일에 접근할 방법이 없었던거요. 그러니 그가 선택하는 것은 러시아제 미사일이나,중국,아니면 일본 땅에 있는 미사일이라고 할 수 있소."
"그래서?"
"마에다가 오키나와 미사일을 해킹하건 중국 산둥성 미사일을 해킹하건 안기부 해커전담반의 추적이 빠르게 시작될 것이요. 그런 뒤 역핵킹 작업이 시작될 것이오. 이 작업은 어쩌면 의외의 결과가 나올지 모르오."
"무슨 뜻이지?"
"마끼. 내가 일본의 핵미사일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그러니,마에다가 핵미사일을 쏘아 댈 계획이라면 한국 측은 필사적으로 대응을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요."
"과연 그럴까? 너희들이 과연 마에다를 막을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해. 그의 작업은 이미 끝났어. 끝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해."
"마끼. 아무래도 당신은 안되겠소."
"아무래도 안되겠다니?"
마끼는 당황했다. 김준은 어느새 얼굴에 고글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준의 눈빛을 읽을 수가 없었다. 차가웠다. 마끼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나에게...나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내 몸을 더럽힐 생각인가?"
"그래."
준은 차갑게 말을 내 뱉었는데,이미 그의 구둣발은 마끼의 얼굴로 날아들고 있었다.
퍽 소리와 함께 마끼의 고개는 45도 각도로 꺾여졌다. 자세 그대로, 마끼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아랫 입술에서 면도칼을 댄 듯 피가 터져 나왔다. 그런 마끼를,김준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눈으로 응시했다.
"비열한 자식!"
마끼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숨을 헉헉 몰아 쉬며 준을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마끼는 고통스럽게 기침을 해댔다. 준은 그런 마끼를 벌래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표현력이 나쁘군. 내 행동은 비열한 게 아니라 정당한 거야. 처음부터 수갑을 나에게 채우는 것이 아니었어. 난 수갑 푸는 방법을 본사에서 배웠지. 교육의 목적이 부정당한 것에서의 방어기술을 습득하는 것이라면, 내가 익힌 기술은 동물적이라고 할 수가 있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자에게 마음을 안 준다는 점이야. 그러니 가끔 내 주먹이 함부로 행동을 하곤 하지."
준은 그렇게 말을 내 뱉은 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마끼의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모토롤라 핸드폰였다.
"좋은 핸드폰이군. 리다이얼 번호를 50개까지 기억하는 핸드폰이라고 알고 있는데...맞소?"
"안,안돼!"
준은 마끼가 비틀거리며 걸어오자 핸드폰을 쥐고 있는 손으로 마끼의 몸을 미는 상태에서,떨어져 있는 권총을 집어들었다. 마끼는 겁을 먹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 사이에 준의 손가락은 핸드폰의 리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곧이어 노트북 컴퓨터가 펼쳐졌고,노트북은 핸드폰 신호를 읽어들이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암호는 3초 뒤에 노트북에서 푸른 글씨로 떠올랐다.
준은 짧게 말했다.
"별로 사용하지 않았군. 입력된 전화번호가 3개밖에 없는데 어느 것이 마에다의 전화번호지? 빨리 말해 주시오. 마에다의 컴퓨터를 찾아가려면 이 방법밖에 없으니까 말이요."
"넌 할 수 없어. 마에다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그것뿐이었다. 준은 빈틈이 없었다. 마끼는 그저 멍히 준의 작업을 지켜 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준은 고속모뎀을 이용해 서울에 있는 안기부 전산팀에게 마끼의 핸드폰에 기억된 전화번호를 전송하고 있었다.
막 전송 작업이 끝나 갈 무렵이었다. 라운지의 티크 출입문이 별안간 열렸다.
사유리였다. 사유리만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음성이 들려 왔는데,그건 집사 모모아의 음성이었다.
"이봐,한국인! 너무 심한 짓을 하지 않았나? 마끼 아가씨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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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가 사유리를 끌고 라운지로 들어갔을때,황영달 일행은 하야시가 투숙한 러브호텔로 들어가고 있었다. 준비는 완벽했다. 광섭은 방금 임달영 차장의 연락으로 김준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기에 이들에게 진압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도 쉽게 결정을 할 수 없었다. 외국에서 첩보 활동을 한다는 것. 더구나 사람을 없애야 하는 일에 직면했을 때는 상당히 조심을 해야 했다.
"여긴 마스크 원이다. 마스크 쓰리는 듣고 있나?"
핸드폰을 타고 진광섭의 음성이 들리자 황영달은 서둘러 대답을 했다.
"진압작전 완료입니다.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진광섭 음성.
"다시 한번 확인 과정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그놈이 게이꼬를 살해한 해커인게 확실한지 그것부터 확인하고 작업을 했으면 좋겠는 걸?"
황영달.
"이미 끝났습니다. 전산팀의 화면 도청 결과를 전송해 드릴까요? 필요하시다면 디지털 주파수로 전환해서 과장님 노트북으로 날려보내겠습니다. 놈,지금 이 시간에도 열차를 상대로 작업을 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래? 이거 혹시 우리가 고용한 지하철 해커 아냐?"
"아닙니다. 이 친구는 나고야 역을 중심으로 열차를 해킹하고 있습니다. 굉장합니다. 나고야 역을 아예 불바다로 만들 생각인가 봅니다!"
"염병할. 대낮에 역을 불태운다고? 하여간 일본엔 별 잡놈이 다 있다니까."
"저 잡놈,제가 잡겠습니다. 아니 잡을 테니 허락해 주십시오."
광섭은 입맛을 다시며 물끄러미 파제로 창 밖을 내다보았다. 그가 탄 파제로 벤은 나고야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 10여분만 더 달리면 나고야 영사관이 준비한 다른 자동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알아서 처리해. 그리고 작업이 끝나면 너희들은 모두 휴가를 간다!"
"예? 갑자기 웬 휴가입니까...?"
"곤베이가 열 받았어. 김준이 하늘로 떠 버렸으니까,이젠 너흴 잡으려고 안달을 할거다. 내 말 이해하겠나?"
"과장님은 요? 과장님은 어떡하시려고요?"
"내 밥은 내가 퍼먹는다. 난 마에다를 잡은 뒤 떠나겠다. 그게 속 편해!"
"알,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과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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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는 사유리의 머리에다 권총을 처박은 상태에서 서 있었다. 사유리는 완전히 얼어붙어 있다.
"내 말이 말 같지 않나? 아가씨에게 수건을 갖다 드려! 하인처럼 공손히 움직이란 말야!"
"아냐,필요 없어."
마끼는 양미간을 찡그리며 일어섰다. 입술 밑으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끼는 그 상태로 또각또각 걸어간 뒤에 준에게 손을 내 밀었다.
준은 쥐고 있던 권총을 마끼에게 던졌다. 똑바로 던진 것은 아니었다.
권총은 마끼의 바로 앞에서 양탄자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끼는 허리를 90도 각도로 숙인 뒤 권총을 집었다. 늘씬한 그녀의 다리가 잠깐 보였다.
"저 놈은 내가 처리할 테니 집사는 소파 뒤로 붙어 있어."
준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마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사유리는 반쯤 울먹이는 표정으로 라운지 우측에 있는 소파로 끌려가더니 소파에 주저앉듯 앉혀졌다. 다시 집사가 사유리의 이마에 권총을 겨눈다.
준은 쓴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춤이라도 추고 싶군. 이번에는 그쪽이 나를 잡은 것인가?..."
자세는 그대로였고,한치의 미동도 없었다.
사유리가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저번처럼 해요. 제가 김짱을 도울께요..."
사유리가 울먹이며 말을 하자 마끼가 분노하듯 외쳤다.
"저 계집애 말에는 신경 쓰지 말고 넌 어서 두 손을 들어! 내가 볼 수 있겠끔 똑똑히 들란 말야!"
준은 지시대로 두 손을 들었다. 마끼는 3미터 앞에 서 있었고,사유리는 우측으로 5미터쯤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소파 앞에는 테이블이 있었는데,테이블 위에는 스크류 드라이브의 재료인 보드카 병이 놓여 있었다.
"저도 할 수 있다니까요. 어서요..."
다시 울먹이는 듯한 사유리의 음성이 들려오자,준은 그제야 사유리의 속셈을 눈치챘다. 사유리는 아까부터 계속 보드카 병을 턱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준은 머리를 빠르게 돌렸다. 우선은 집사와 마끼의 시선을 잡아두는게 최선이었다. 준은 몸을 돌려 마끼를 똑바로 응시했다.
"담배를 피워도 되겠소?"
마끼는 권총을 겨눈 상태에서 준을 똑바로 응시했다. 화가 나기도 했고, 어이가 없기도 했다.
"피고 싶으면 피워도 좋다. 하지만 허튼 수작을 하면..."
그렇게 말을 하며 마끼는 담배를 자신의 발 아래로 떨어뜨리더니,라이터 역시 발 아래로 떨어 뜨렷다. 그런 뒤 발로 처 냈다.
준은 한 손을 든 상태에서 허리를 숙이고 담배를 집어들었다.
잠시 뒤. 라이터 불이 담배로 옮겨간 후,첫 한모금이 기내 안에 퍼저갈 무렵이었다. 준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공주님. 그럼 시작해 봐..."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김준의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이 사유리가 보드카 병을 집어들더니,있는 힘을 다해 등 뒤로 돌려 쳤다.
소리는 둔탁했다. 집사는 왼팔에 통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 순간 마끼의 시선은 집사에게서 준을 향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준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준은 이미 1미터 앞까지 근접해 오더니,마끼의 시야를 가린 상태에서,주먹을 날려 오고 있었다.
퍽----
해비급 복서의 주먹같은 강한 힘이 마끼의 턱에서 작열을 했다. 마끼는 휘청이며 라운지 벽에 몸을 부딪쳤다. 이때 사유리는 집사의 발 밑에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었고,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마끼의 손에서 떨어진 권총을 집어들고 마끼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마끼는 겁을 먹었다.
"이러지 마. 이성을 찾아. 전화를 원하면 걸어 주겠어. 설마..."
그 입에 준의 구둣발이 처박혔다. 마끼는 신음을 토하며 몸을 앞으로 굴렸는데,사유리는 깜짝 놀란 모양이다.
너무 심하다...저렇게 여자를 때릴 수 있을까?
이때 사유리의 눈을 피해 집사는 김준의 등 뒤를 날카롭게 파고들고 있었다. 나이프였다. 사유리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자,준은 몸을 돌렸다.
그러자 집사의 나이프가 준의 가슴에 날카롭게 파고들면서 피가 터져 나왔다.
휘청...
준은 쓰러졌고,사유리는 지구의 종말이라도 본 듯 당황을 했다.
"움,움직이지 마! 다 죽일거야! 개미새끼까지 다 죽일거랑 말야!!"
사유리는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권총을 집사에게 겨누다가,마끼에게 겨누더니,이번에는 김준을 향해 겨누기도 했다. 정신이 없었다. 집사는 마끼를 부축하다 말고 사유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우측으로보니, 준이 가슴에 난 상처때문에 무릎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5초 정도 여유가 있을 것 같았다.
집사는 사유리를 향해 걸어갔다.
"권총 이리 내 놔라... 그건 꼬마가 만지는 것이 아냐...!"
준은 나이프를 떨구고 있었다. 셔츠가 온통 피로 범벅이었다. 현기증이 일어났지만 정신을 차려야 했다. 준은 사유리를 찾았다. 집사의 모습이 먼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집사는 큰 손을 사유리를 향해 뻗은 상태에서 비열하게 미소를 보이고 있었는데,권총 소리가 요란하게 기내 안을 가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이미 집사의 골통은 반쯤 부서진 채 기내 천정에 철퍼덕 붙어 있었다.
처참했다.
제정신을 차린 마끼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이미 늦었어. 울프! 넌 아무것도 하지 못해!"
마끼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고,피투성이었다. 그녀는 권총이 준에게 있다는 사실을 깨달고,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찾았다.
이번에는 준이 담배를 마끼에게 던져주고 있었다.
그녀는 말했다.
"미사일은 5시 정각에 발사된다고 했어. 난 5시 정각에 나고야 역에서 마에다를 만나기로 했지. 하지만 말야. 지금 시간을 보라구. 4시 20분 이야. 어쩌면 미사일이 발사되었을지도 모르지."
"어디에 있는 미사일이지? 오키나와인가 훗가이도인가?"
"이미 늦었어. 핵미사일을 쏘아 올린다면 둘 중 하나겠지. 다이토아 3호나 어쩌면 퍼싱 투 미사일인지도 모르지."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아버지가 군납업체에 투자를 할 때부터 그런 소문은 듣고 있었지."
마끼는 담배연기를 짙게 내 품었다. 이제보니 그녀는 울고 있었다.
시체가,그녀를 그림자처럼 뒤따르던 집사의 시체가 그녀의 기를 모두 빨아먹은 듯했다.
"자위대 별반 조직의 생각은 한가지밖에 없어. 일본이 다시 아시아를 재패할수 있다는 생각이지. 이 때문에 훗가이도와 오키나와에 핵미사일을 비밀리에 배치를 했는데,여차하면 러시아와 인도차이나 그리고 중국 본토를 쑥밭으로 만들겠다는 의도야..."
"모두 알고 있었군."
"마에다는 골수분자야. 나 같은 나쁜 여자도 그의 본심을 읽을 수 없지. 그는 무슨 일이건 충분히 저지를 놈이야. 아니 일이 끝난 뒤에,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고 변명을 하겠지. 어쩌면 몰라. 그가 원하는 일인지도 몰라."
마끼는 피투성이었다. 그녀는 집사의 시체를 보면서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 상황에 진절머리가 났던 모양이다.
"내 잘못이겠지. 마에다는 내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것을 몰랐어.
아니 어쩌면 이해를 하려고 노력 중인 지도 모르겠지만..."
"미사일이 서울로 날아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나?"
마끼는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탁자로 걸어가 핸드폰을 집어들더니 그것을 김준을 향해 집어 던졌다.
"막을 수 있다고 한 사람은 당신이 아니었나? 난 할수가 없어. 난 5시 정각에 하야시를 이용 마에다를 죽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단 말야..."
준은 서둘러 손목시계를 보았다. 그의 쿼츠시계는 충격에 의해 멈추어 있었다. 스위스산 특제 시계였는데...
준은 빠르게 핸드폰의 단추를 눌렀다. 곧바로 수화기 너머에서 임달영 차장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준이 대화를 끝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유리의 음성이 들렸다.
"어떻게 해요? 제트기가 쫓아 왔어요. 김짱!"
증명이나 하듯이 라운지 창 밖으로 사브 제트기가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제트기는 수상비행정의 바로 옆까지 따라 붙고 있었다.
제트기를 보자,마끼는 응원군이라도 만난 듯 히쭉 미소를 지었다.
"이제 어떻게 할거지? 미안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데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나 보군."
준은 물끄러미 마끼를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고글을 벗더니 의자를 끌어 당겨 앉았다. 그런 뒤 키보드를 두들겼다.
"사유리? 기장보고 한국 영공으로 들어가라고 해. 필요하다면 권총으로 협조를 구해 봐."
그렇게 말을 하며 준은 노트북 키보드를 두들겼다. 헤밍웨이가 코로나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는 모습과 흡사했다. 나쁘게 말하면, 아돌프 히틀러가 소설을 쓰기 위해 타이프라이터를 두들기는 모습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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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명-하야시 진압 작전은 신속했다. 검은 복면을 한 사내 3명이 하야시가 투숙한 객실 문을 노크하고 있었다.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사내 하나가 소음기가 달린 권총의 총신을 객실의 열쇠구멍에 처박았다. 곧이어 짧은 불꽃이 발생했다.
문이 슬며시 열리자 하야시는 작업을 중단하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3명의 사내가 서있는 것이 하야시의 눈에 들어왔지만 그는 자세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그의 손가락은 아직도 노트북의 키보드 위에서 굴러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지구의 종말이 와도 중단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적은 10여초 동안 계속되었다. 입을 연 것은 하야시 자신이었다.
"왜 이제야 온 건가...?"
권총을 하야시에게 겨눈 사내의 옆에 서있던 다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미행하는 것을 알고 있었나?"
하야시는 치렁치렁한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때도 그의 왼쪽 손은 키보드 위에서 떠나지 않았다.
"안됐지만 난 당신들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어."
"제법이군. 알고 있으면서 왜 도망을 가지 않았냐고 물었다."
"일이 끝나지 않았으니까."
처음이었을 것이다. 하야시의 입가에서는 부드럽게 미소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그의 장발머리는 부드럽게 물결을 친다.
"작업이 끝나면 해외로 도피할 생각이었어. 하지만 당신들이 나보다 빨랐군.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지만 말야."
이 분위기...나쁜 분위기였다. 황영달은 자신들이 하야시가 파 놓은 함정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을 했다.
"일어서! 손을 들고 말야."
"늦었어."
하야시의 대답은 간단했고,몸 움직임은 번개같이 빨랐다. 그는 노트북의 엔터기를 재빠르게 누른 뒤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황영달은 당황한 눈으로 하야시를 응시했다.
하야시는 천천히 황영달 일행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었는데 얼굴엔 야비한 미소가 떠 있었다.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하야시는 그 상태 그대로에서 갑자기 두손을 번쩍 들고 포효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잠시 뿐. 10초 가량의 침묵이 다시 지나갔다.
"뭐,뭐야? 아무일도 안 일어났잖아?"
황영달 일행은 큰일이라도 벌어지는 줄 알고 깜짝 놀래 있다가 얼굴 표정을 풀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하야시 역시 당황하는 표정으로, 자신의 노트북 컴퓨터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아니야...이게 아니야...어떻게 된 거지...
이럴 수가 없어...이럴 수가 없단 말야....
하야시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했고,그의 입에서는 거품이 흘러나왔다.
"저 자식 아무래도 안되겠군!"
황영달의 오른쪽에 서있는 복면 쓴 사내가 입을 열었다. 히트맨이었다.
그는 하야시가 의자쪽으로 비틀거리며 앉는 순간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는 싱거웠고,예상보다 큰 효과를 보였다.
하야시는 쿵 소리를 내며 의자와 함께 무너져 내렸는데,간이 책상위에 놓여있는 그의 노트북까지 굴러 떨어져 내렸다.
복면을 벗고 호텔 밖으로 나오는 황영달 일행의 표정은 찜찜 그 자체였다.
아무래도 하야시의 마지막 모습이 왠지 불길했다. 총알이 옆이마에 박히는 순간에도 하야시는 절규를 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황영달은 자동차에 올라타기 전 히트맨에게 귓속말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그 사이에 정주영은 운전석으로 올라타고 있었다. 히트맨은 고개를 끄덕인 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자동차 뒤편으로 있는 횡단보도로 유유히 걸어갔다.
요요키 공원에서 새가 날아든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니 요요끼 공원만이 아니었다. 수백,수천마리의 비둘기가 요요키공원과 도청 빌딩,KDD 빌딩
에서 신주쿠 하늘로 솟아올랐다. 그리고,황영달의 차가 시동을 걸었을 때는 사람들의 아우성소리가 갑자기 천지를 진동했다.
황영달은 깜짝 놀래서 뒤를 돌아다보았다.
히트맨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는데,갑자기 그 도로 한가운데서 분수처럼 흙더미가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저,저럴수가?
황영달과 정주영은 채 비명을 지르지도 못했다.
폭팔은 4차선 중앙에서부터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는데 모든 것은 지진과도 흡사했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정주영은 액셀레이터를 급하게
밟았고 정신없이 핸들을 꺾었다. 하지만 이미 지하에서 튀어 올라온 지하철이 그의 자동차를 향해 무섭게 질주를 해 왔다.
간신히 피했을 것이다. 황영달을 태운 자동차가 달려드는 지하철을 간신히 피하자,이번에는 하야시가 투숙했던 러브호텔을 향해 지하철이 요란하게 처 박혀 갔다.
후꾸오 하야시...
일본 제일의 시스템 해킹 전문가의 마지막 작업은 1분의 허용오차를 가지고 뒤늦게 발생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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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각. 마에다는 붉게 달아 오른 얼굴로 나고야 역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난생처음 자신이 값어치 있는 일을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란조를 세워두고 마끼와 만나기로 한 제 1 플랫폼으로 걸어갔다.
마끼가 자신을 만나러 이곳에 온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믿고 싶었다.
도시인의 사랑이기도 하고,소시민의 사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는 이곳에 올 것이다.
오후 3시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니혼라인에서 마끼의 수상 비행정을 보았을때 마에다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김준을 태우는 것을 목격 했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는가?
죽이고 싶었다. 머리는 돌아버릴것 같았고,가슴속에선 다이너마이트가 작렬을 했고,피가 역류를 했다.
이제 확인하고 싶었다. 마에다는 담배를 입에 문 상태에서 신간센을 기다렸다.
당연한 거야. 마끼는 신간센을 타고 이곳에 온다...
마에다와 헤어진 란조 2위는 3층 화장실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 아래로 마에다의 모습이 45도 각도로 내려다 보였는데,그녀는 권총을 꺼내 들고 소음기를 부착하고 있었다. 그런 뒤 군복을 벗고 여행 가방에서 꺼낸 스커트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란조는 아쉬웠다. 마끼와 마에다를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것을 그녀는 달가워 하지 않았는데...아니 마끼라는 여자는 눈깜짝하지 않고 죽일 수 있었지만 마에다까지 그렇게 하기에는 차마 용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지시대로 해야 했다. 마끼가 도착하면 두 남녀를 멋있게 처리하는 것. 이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는데,서울이 불바다가 되는 순간에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4시 55분.
란조는 신간센이 도착할 시간이 되자,세면대에서 세수를 한 뒤 짙은 계통의 루즈를 입술에 발랐다. 그런 뒤 긴 차양이 달린 모자를 썼다.
권총은 핸드백 안에 감추기도 했다. 란조는 마지막으로 7cm 높이를 가진 하이힐을 가방에서 꺼냈다. 수에즈 가죽으로 된 고급 하이힐이다.
선로가 아무도 모르게 바뀐 것은 란쪼가 막 3층 화장실에서 2층 화장실로 자리를 바꾸었을 때었다. 신간센 히카리는 무서운 속도로 나고야 역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의자에서 일어섰고,가방을 들었고,담배를 휴지통에 버리면서 신간센 열차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정각 5시였다. 마에다는 담배를 버린 뒤 구둣발로 밟았다. 그런 뒤 플랫폼 가까이로 접근을 했다. 이미 열차가 100미터 전방까지 접근해오는 것이 그의 눈에 보였다.
그래. 정각 5시다...
마끼가 내 품에 영원히 안기는 시간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마에다는 주머니속으로 조심스럽게 손을 넣었다.
두발의 총알이 장착된 권총이 손끝에서 만져진다. 그는 호흡을 조종하고,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순간 50미터 전방에서 열차가 탈선하는 모습이 보였다. 아니,탈선이 아니었다. 달려오는 신간센 열차의 중간 측면을 뚫고 갑자기 또 다른 열차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 여파로 신간센은 두쪽으로 갈라지면서 강하게 뒤집어지고 있었다. 무서운 속도였다. 인파들은 괴성을 지르며 흩어져 갔지만,기둥이 무너져 내렸고 천정이 가라앉고 있었다.
뭔가. 저건...!!
마에다는 깜짝 놀란 듯 뒷걸음을 쳤지만 이미 전 폭이 20미터에 달하는 신간센 열차의 한 량이 그의 몸을 향해 덮쳐 오고 있었다. 그리고,마에다의 몸이 열차에 처박혀 등 뒤로 붕 떠 올랐을 때,란조도 타켓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정신없이 총을 쏘아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이번에는 신간센의 측면을 들이박았던 LPG 운반열차가 크게 폭팔을 시작했다. 삽시간였다.
나고야 역은 섭씨 1만도의 화염에 휩싸였다.
화염을 배경으로 이상운의 음성이 조용하게 들려왔다.
"결국 해 냈군요. 하야시,그 친구도 정말 대단합니다..."
광섭을 태운 자동차는 나고야 역이 보이는 도로 끝에 주차해 있었다.
나고야 역은 연쇄적으로 폭팔을 하고 있었는데,이때문에 진광섭이나 윤춘해, 이상운의 얼굴에선 안쓰러운듯한 표정이 떠 오르고 있었다.
"다행인지 모르지. 이런 식의 자멸이 원래 신이 계획했던 일이 아닐까?"
광섭은 그렇게 말을 내 뱉은 뒤 오마 샤리프를 입에 물고 라이터 불을 당겼다.
"웬일이십니까? 과장님이 천사표 같은 말씀을 다하시고? 우리야 돈 안 들어가서 좋지 않습니까요."
"하여간 시체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군. 방위청 그 놈은 한강 다리까지 끌고 가고 싶었는데 말야..."
상운은 광섭을 멍히 바라보다가 다시 전방에서 불타오르는 나고야 역을 바라보았다. 페트롤카가 빠르게 역전 앞으로 운집을 하고 있었다.
"대단하군요. 태양 앞에 서 있는 기분이 듭니다. 어서 피합시다. 선텐은 그만 합시다요."
"그러지. 이젠 어떻게 해야 한다...김준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건지.... 아직도 수상 비행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것일까?"
광섭은 자동차를 몰라고 신호를 보냈다. 춘해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는데, 화염 때문에 얼굴이 반쯤은 익어 있었다.
막 광섭의 자동차가 스타트를 할 때 또 다른 경찰차들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곤베이를 태운 경찰차가 달려갔지만,광섭이나 곤베이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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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1945년 이후로 한일간에 벌어졌던 일중 가장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마리의 새처럼 수상 비행정이 한국 영공으로 진입을 했을 때는 5기의 항공자위대 지원기가 수상 비행정을 쫓아 월경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들 항공자위대 지원기에 대한민국 공군의 경고신호가 날아든 것은 그로부터 5초 뒤였다. 언제부터 대기를 했는지 몰라도 황혼을 가르고 대한민국 공군 편대가 그들을 찾아 날아오고 있었다.
양쪽다 F-16 전투기. 항공자위대는 수상 비행정에 중대한 범법자가 있다고 주장을 했지만,한국 공군이 답신으로 날려온 것은 사이더 와인더 미사일였다. 미사일 한방의 효과는 지대했다. 항공자위대 소속 지원기중 한대가 그대로 바다로 척 박히고 있었다.
사태는 심상치 않았다. 화가 난 일본 방위청은 후쿠오카福岡에 있는 항공자위대 제 4사단 F-16 지원기 편대를 긴급히 투입을 했지만, 이젠 한국 영공으로 자신 있게 진입을 시도하는 지원기는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무력시위는 한국 쪽이 앞서갔다. 한국 공군은 수상 비행정이 제주도를 향해 북상해 올때까지 무려 300여대의 전투기를 동원,쓰시마 해협에서 주코쿠 지방까지 그로테스크한 위협을 가하고 있었다.
다행히 오키나와에서 미사일이 발사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 1시간 동안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안기부 전산팀은 줄초상을 준비하듯 오키나와 기지의 동태를 살폈지만 핵미사일이 발사되거나,그것이 갑자기 나타나고 있다는 징조는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상황은 그렇게 종결되는 듯했다.
태양은 서서히 황해로 떨어졌고,잠시 뒤 어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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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은 나고야 역 앞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곤베이는 어둠이 짙게 깔린 도로에서 담배를 입에 물고 아직도 불타고 있는 나고야 역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웠다. 수상 비행정을 추적하다가 지원기 한대가 격추당했다는 보고를 이미 접했고,숫검댕이로 발견된 시체중 하나가 하사 마에다의 시체라는 것도 검증이 되었다.
그리고,같은 시간 대에 도쿄를 비롯해서 나고야,오사카,요코하마의 지하철 라인에 전기를 대 주던 변전소에 과부하가 걸려 지하철 역마다 중대한 탈선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식도 접하고 있었다.
사상 최악의 사태였다. 곤베이는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손바닥 보듯 알 것 같았지만 손을 쓰거나 고함을 지를 수도 없었고,자결을 할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오키나와 기지가 해킹되지 않고,보안에 성공했다는 점이었다. 곤베이는 갑자기 10년쯤 늙은 것처럼 얼굴 가죽이 축 늘어졌다.
그저 지금 당장은 저 놈의 화재를 진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때문에 곤베이는 외투 깃을 세운 뒤,불길이 계속 번지고 있는 나고야 역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처연한 기분을 아는지,소방호수에서 품어져 나오는 물줄기가 그의 외투 자락을 향해 떨어져 왔다.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시시했다.
고작 화재 진압이나 하려고 내가 이곳에 왔단 말인가?
곤베이는 그대로 주저 않고 싶었다.
아니야...이대로 당할 수는 없지...
곤베이는 걸어가다 말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등 뒤로 몸을 돌렸다.
그런 뒤 어깨에 힘을 주고,자신의 자동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지막 가능성.
진광섭을 잡아 뼈를 바숴 버리는 것. 그것이 곤베이는 하고 싶었다.
곤베이는 페트롤카에 올라탔다. 그러자,기다렸다는 듯이 히로세 전산실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육,육좌님....긴급 상황입니다..."
곤베이는 뒷좌석에 편안하게 앉은 상태에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툴툴 털어 말리고 있었다.
"뭔가? 지하철이 황궁을 덮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아,아닙니다...미사일이 살아있었습니다!...오키나와에서 방금 전에 미사일이 발사되었단 말입니다!"
곤베이는 머리카락을 털다 말고 행동을 멈추었다. 처음에는 그저 잘못 들었겠다 싶었다. 아니 이제는 실없이 웃음까지 나왔다.
"결국 마에다가 해 낸 것인가?"
"글,글쎄요..."
"글쎄 라니? 무슨 뜻인가,히로세 실장. 정확하게 설명을 해봐."
"미사일은 한국으로 날아가지 않았습니다."
"뭐..?"
"미국으로 날아갔습니다! 미국으로 날아갔단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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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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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같은 어둠속에서 산더미같은 파도가 몰아치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별안간 동체를 덮쳐 온 파도때문에 여자의 몸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흔들림이 멈추자 여자는 남자의 상처가 난 가슴에 가볍게 키스를 했다.
그런 뒤 여자는 비틀거리며 출입문으로 걸어갔는데 그때 또 한번 객실이 요란스럽게 요동을 쳤다.
여자가 출입문을 열었을 때는 CL-415 수상비행정의 터보프롭엔진이 탁탁거리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을 가득 매운 암갈색 구름이 여자의 눈에 들어왔다. 이젠 틀린 것일까...? 여자는 아까부터 별빛이 보고 싶었지만 먹구름때문에 그것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여자는 실망하지 않았다.
기다릴께...난 기다릴 수 있어...
그렇게 생각을 하는 여자의 얼굴은 순결했고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여자는 객실 출입문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몸을 돌려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남자는 객실 의자에 등을 비스듬히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제발 한마디만...한마디만이라도 설명을 해 주세요..."
남자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씁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여자는 남자의 앞에 어색하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여자는 타이트한 스커트에 쇼트 베스트와 재킷을 입고 있었는데, 스커트는 앞부분이 플리츠로 처리되어 있어서 현대적인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여자의 옷은 절반정도가 물에 젖어 있었다.
"이야기해줄수 없나요? 전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죠? 마끼처럼 저도 한국에서 조사를 받아야 하나요? 아니 전 죄가 없다고 했었나요?"
여자가 애원하듯 남자를 바라보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여자의 볼을 더듬었다. 그런 남자의 가슴에선 지금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그 피는 여자의 스커트 자락과 재킷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남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을 때는,수상 비행정의 열려진 출입문 밖에서 붉은 빛 줄기가 밤하늘을 반쪽으로 가르고 있었다. 어쩌면 신기루였는지 모른다. 남자의 시선은 한참 동안 밤하늘을 맴돌았는데,결국은 다시금 어딘가에 있을 그 빛 줄기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빛 줄기가 밤하늘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남자는 생각을 했다.
그제야 비로소,남자는 안심이 되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핵미사일이 오키나와에서 발사되었어. 사유리..."
"정말요?"
"그랬을 거야... 스위치를 누른 것은 이 손가락이니까..."
"히잉...나 어떻게 해...핵 미사일을 발사하다니 김짱은 미친 거에요?"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물끄러미 여자를 응시하다가,고글을 꺼내 얼굴에 착용했다.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후,수상 비행정은 이틀 동안 바다 위를 떠 다녔다. 마끼는 두번이나 자해를 시도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성공하지 못했다.
그다음 10여일 동안 사유리는 무척이나 피곤했다. 그녀는 한국에서 시간을 보냈는데,그리 불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피곤했다.
생각해 보니,이것은 벌써 몇년전의 과거 일이었다.
아마도,그때 일들이 사뇨 사유리의 삶을 바꾸어 놓았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짧다면 짧은 인생은 여러 가지가 그 혹은 그녀를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으로 존재하는데,사유리는 자신을 생육시키는 추억들을 그해 1996년 봄에 경험을 했던 것이다.
지금 현재의 사뇨 사유리는 지극히 평범한 여자다. 그렇다고,수축되거나 성장을 중단했던 것은 아니다. 그녀는 줄곧 자신을 성장시켜 갔는데,이웃나라인 한국에 대해서도 적지 않게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물론 그녀는 자신이 가장 가까운 이웃나라를 사랑하는 건지 미워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조목조목 따져 볼 생각은 없었다. 조목조목 따지는 것은 아무래도 한국인들이 해야 할 일 같았기에.
계속 사유리의 마음중에서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오늘같이 크리스마스 이브가 될 때면,그날 이후로,그녀는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 것이다. 참 어처구니없는 만남인데도 말이다.
김준은 그녀의 생일을 꼬박꼬박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뒤 생일이 되면 어김없이 카드를 보내 오거나 단정하게 생긴 목각인형을 보내오기도 했는데, 대개는 프랑스 파리나 티벳 등의 우표가 붙어 있었다. 사유리는 울적했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그따위 우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언니 나쓰에는 이즈메라는 의사와 작년에 결혼을 했다. 지금은 의사의 부인이 되었으니 시집 하나는 잘 간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혼을 한 뒤에도 언니는 변하지 않았다. 사과 그림이 그려진 컴퓨터를 신경질적으로 두들겼는데,간혹은 밤마다 이즈메 몰래 드라이브를 나오곤 했다. 그리고,맨션에서 홀로 살고 있는 사유리를 찾아와서는 별안간 우동이 먹고 싶다고 성화를 부린다.
그 사이에 하야시의 여동생 미나는 정신병원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사유리는 딱 한번 준의 말을 기억하고,가나기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오는 중에 골목길이 복잡해 여러번 헤매야 했는데,그러다가 골목 제일 안쪽에 있는 미나의 집을 우연히 발견했다.
미나의 집을 본 순간,사유리는 그 해 봄에 읽었던 마이니찌 신문을 환기했다. 두구의 썩어 가는 시체가 발견되는 통에 마이니찌 신문이 한참동안 떠들었던 공포의 집. 집주인인 젊은 아가씨는 임신 8개월의 몸으로 미친 듯이 컴퓨터를 두들겼다고 했다. 경관 시체가 썩어 가고 있었고, 지하실에도 시체가 썩어 가는 통에 온 동네가 냄새로 진동을 했는데도 말이다.
물론 사유리는 미나나,러브호텔에서 죽은 하야시가 남매라는 사실을 몰랐다. 이들이 김준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도 그녀는 몰랐다. 그저,그날 같은 시간대에 벌어졌던 또 다른 사건 였다고 생각을 했다.
이제 그때의 여자,사뇨 사유리는 벌써 23살이 되었다. 그녀는 그녀의 계획대로 간호사가 되었고,일요일이면 신주쿠를 방황하는 여자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그날 오후에 왜 그녀가 절벽에서 뛰어내렸는지는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 남자를 그토록 좋아했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처럼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다른 이들이 모르는 한가지 사실 때문에 사유리는 아직도 김준을 잊지 못하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해 1996년 봄에,일본 정부는 미국 워싱턴에서 그들을 불러낸 미국인 각료들을 만 난적이 있었다. 회의는 길었는데,태반이 완벽한 보안속에서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단지,회의가 끝났을 때,일본 각료 들은 그들 자신이 최소한 향후 10년간은 국제적인 핵 감시단체의 감시하에 들어간다는 조약에 사인을 했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기억을 했다. 감히, 일본으로써는,거부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이야기가 이렇게 된 것은,마에다가 서울을 향해 날리려 했던 오키나와의 핵미사일이 예상과는 달리 불발탄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날 밤엔 분명히 핵미사일이 발사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서울이 아니라,하와이 앞 바다에 떠있는 무인도로 떨어졌다.
아무도 몰랐다. 제 2의 진주만 공습이라고 소문이 났던 이 사건 때문에 자위대 별반조직은 미친듯이 오키나와 미사일을 해킹한 인물을 찾아 나섰지만 누가,어떻게,어떤 방법으로 해킹을 했는지는 찾아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별반은 포기하지 않았다. 하와이 앞바다로 떨어진 핵미사일이 도화선이 되어,태평양 미 8군이 일본 본토에 강제 주둔되었고,자위대 조직은 50% 가량이 축소가 되는 수모를 격고,일본 경제가 10년 뒤로 후퇴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일본 자위대 최대의 우파조직인 별반은 자신들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정작 사건의 당사자인 김준은 1997년 봄에 김포국제공항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버튼다운 셔츠와 워셔블 신사복, 그리고 톰행크스 상표를 가진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이번에는 좀 더 보강이 된 노트북 컴퓨터가 그의 오른손 아래에서 멋없이 흔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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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프 제1부 동급해커 파워유저저팬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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