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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밀리 어페어

알 수 없는 사용자 2011. 5. 16. 05:33

  그런 건 세상에 흔히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여동생의 약혼자가 애당초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그런 남자와 결혼할 결심을 하기에 이른 여동생 자체에 대해서도 적잖은 의문을 품기에 이르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주 낙담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런 느낌을 갖는 것은 나의 편협한 성격 탓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여동생은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드러내어 그 화제를 입에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가 그 약혼자를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는 건 여동생 쪽에서도 똑똑히 짐작하고 있었으며, 그런 나에 대해 그녀는 신경질을 부렸다.
  "오빠는 사물을 보는 눈이 너무 좁아."하고 여동생은 나에게 말했다.
  그때 우리는 스파게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실 그녀는 스파게티에 대한 나의 생각이 너무 좁다고 지적한 셈이었다. 그러나 물론 여동생은 스파게티 그것만을 문제로 삼았던 건 아니다. 스파게티 얘기를 하기에 앞서 그녀의 약혼자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고, 그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약혼자 쪽을 더 문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대리 전쟁이나 같은 것이었다.
  애당초 발단은 일요일 낮에 여동생이 같이 스파게티라도 먹으로 나가자고 나에게 말을 꺼낸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나도 마침 스파게티가 먹고 싶던 참이라 '좋지.'하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역전에 새로 생긴 아담한 스파게티 전문점으로 갔다.
  나는 가지와 마늘을 넣은 스파게티를 주문했고, 여동생은 바지리코 스파게티를 주문했다. 요리가 나올 때까지 나는 맥주를 마셨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5월의 일요일이고, 게다가 좋은 날씨였다.
  문제는 가져온 스파게티 맛이 '재앙'이라고 표현해도 될 만큼 형편없었다는 점이다. 면은 겉이 설익어 몹시 깔깔하고 속에 심줄이 남아 있었으며, 버터는 강아지라도 먹다 말 것 같은 '물건'이었다. 나는 어떻게 어떻게 절반쯤만 먹고서 단념하고, 웨이트리스에게 나머지는 치워 달라고 했다.
  여동생은 그런 나를 흘깃흘깃 보고 있었는데, 그땐 아무 말 않고 자기 접시의 스파게티를 마지막 한 가닥까지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먹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창 밖의 경치를 바라보면서 두 병째 맥주를 마셨다.
  "오빠, 뭐 그렇게 보란 듯이 남길 건 없잖아요."하고 자기 접시가 치워진 다음 여동생이 말했다.
  "맛없군."하고 나는 간단하게 말했다.
  "절반이나 남길 만큼 맛없진 않았어요. 좀 참으면 될텐데."
  "먹고 싶을 땐 먹고, 먹고 싶지 않을 땐 안 먹는다. 이건 내 위장의 문제지, 임마 네 위장의 문제는 아니야,"
  "'임마'란 말 쓰지 마세요. 부탁이니까. ...'임마'란 말을 하면 꼭 어디서 굴러먹은 건달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내 위장의 문제지, 네 위장의 문제는 아니야."하고 나는 정정을 했다.
  스무 살이 지나면서, 동생은 자신은 '임마'하고 부르는 걸 질색하면서 점잖게 부르도록 나를 훈련시켜 왔던 것이다. 그 둘의 차이가 어디 있는지 나로선 잘 모르겠다.
  "이 가게는 갓 개점한 참이라서 틀림없이 조리장이 아직 익숙하지 못한 거예요. 조금쯤은 너그러운 마음씨를 가져도 되잖아요?"하고 여동생은 아까 나온 스파게티처럼 보기만 해도 맛없는 싱거운 커피를 마시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맛없는 요리를 남긴다는 것도 하나의 식견이 아닐까"하고 나는 설명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도도해졌죠?"
  "더럽게 트집잡네. 생리중이냐 뭐냐?"
  "시끄러워요. 웃기지 말아요. 오빠한테 그런 소리들을 이유는 없으니까요."
  "별로 신경 쑬 건 없다구, '너'의 맨 처음 생리가 언제였던가도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퍽도 늦어서 어머니하고 함께 의사한테 갔었잖아?"
  "입 다물지 않으면 백을 던질 거예요!"
  동생이 정말 화내고 있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도대체가 말예요, 사물에 대한 오빠의 견해는 너무나 편협하다구요."
  동생은 커피에다 크림을 추가로 넣으면서-필시 맛이 없나 보다-말했다.
  "...오빠는 사물의 결점만 끄집어내어 비판하지, 좋은 점을 보려고 들지 않는단 말이에요. 무언가 자기 기준에 맞지 않는다 싶으면 일절 손도 대려 하지 않는다구요. 그런 걸 곁에서 보고 있자면 굉장히 신경에 거슬린단 말이에요"
  "하지만 그건 내 인생이지, 네 인생은 아니야."
  "그래서 남을 다치게 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곤 하나 보군요. ...마스터베이션만 해도 그렇죠."
  "마스터베이션? 무슨 소리냐, 그게?"하고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오빠는 고교 시절에 툭하면 마스터베이션을 해서 시트를 더럽혔잖아요. 다 알고 있다고요. ...그걸 빠는 게 얼마나 힘들다구요. 마스터베이션쯤 시트 더럽히지 않게 하면 어때요? 그런 걸로 남에게 폐를 끼친 말이에요."
  "명심하겠어. 그 점에 대해선 말야. ...하지만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나에게 내 인생이 있고, 좋아하는 것도 있고 싫어하는 것도 있어. 별수 없잖아."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해요. 어째서 노력하려 하지 않죠? 어째서 사물의 좋은 면을 보려고 하지 않는 거예요? 어째서 조금이라도 참으려 들지 않고, 어째서 성장하지 않는 거죠?"
  "성장하고 있어."하고 나는 좀 기분이 상해서 말했다.
  "참기도 하고, 사물의 좋은 면도 보고 있어. 너와 같은 데를 보고 있지 않을 뿐이야."
  "그게 오만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스물 일곱 살이나 되어서도 제대로 된 애인도 생기지 않는 거라구요."
  "여자 친구는 있다구."
  "잘 때만 필요한 여자 말이겠죠. 그렇죠? 1년마다 자는 상대를 갈아대면서, 그래도 즐거워요? 이해심이라든지 애정이라든지 헤아려 줌이라든지 그런 거 없이는, 그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요. 마스터베이션이나 다를 바 없죠."
  "1년마다 갈아대지는 않았어."하고 나는 맥없이 말했다.
  "다른 게 뭐가 있어요? 조금쯤은 건전한 생각을 갖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 게 어때요? 조금만 어른스러워진다면?"
  그것이 우리 대화의 끝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동생은 거의 대꾸를 하지 않았다.
  어째서 동생이 나에 대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나로선 잘 납득이 가지 않았다. 바로 일년 전쯤만 해도 동생은 나의 확고한 '되는 대로의 생활'을 함께 즐겨왔으며, 나에 대해-내 느낌이 틀리지 않았다면-어떤 의미에선 동경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조금씩 비난하게 된 건 그 약혼자와 사귀게 되면서부터였다.
  그건 공정하지가 못해,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와 동생은 이제까지 23년이나 사귀어 왔단 말이다. 우리는 온갖 것을 정직하게 서로 이야기 할 수 있는 사이 좋은 남매였으며, 싸움도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동생은 나의 마스터베이션 같은 걸 알고 있으며, 나는 동생의 초경 같은 걸 알고 있다. 동생은 내가 처음으로 콘돔을 샀을 때-나는 그때 열 일곱 살이었다-의 일을 알고 있고, 나는 동생이 처음으로 레이스 속옷을 샀을 때-동생은 그때 열 아홉 살이었다-의 일을 알고 있다.
  나는 동생의 친구와 데이트 한 일-물론 자지는 않았다-도 있으며, 동생은 내 친구와 데이트한 일-물론 자지 않았었다고 믿는다-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자라왔단 말이다. 그런 우호적인 관계가 단 1년 사이에 후딱 변하다니.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차츰 분한 생각이 치밀었다.
  역전의 백화점에서 구두를 구경하겠다는 여동생을 남겨 놓고, 나는 혼자서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이건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다. 일요일 오후 2시에 갑작스레 전화를 걸어 여자아이를 꼬여 봤자 제대로 될 리가 없다.
  나는 수화기를 놓고, 수첩의 페이지를 넘겨 딴 여자아이 집에 전화를 돌려 보았다. 어느 디스코장에서 알게 된 여대생이다.
  그녀는 집에 있었다.
  "뭐 마시러 가지 않을래?"하고 하는 유혹했다.
  "아직 오후 2신걸요"하고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시간이 무슨 문제야. 마시다 보면 저물걸. 실은 석양 보는 게 제격인 좋은 바가 있어. 오후 3시까지 가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못 잡아."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구"하고 그녀는 말했다.
  그래도 그녀는 나와 주었다. 필경 친절한 성격일게다. 나는 차를 운전해 해안을 끼고 달려 약속대로 요코하마 해변에 있는 바에 들어갔다. 나는 거기서 IW하퍼의 온 더 록을 네 잔 마시고, 그녀는 바나나 데이키리-'바나나 데이키리'다!-를 두 잔 마셨다. 그리고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술 마시고 차 운전할 수 있어요?"하고 그 아이가 걱정스레 물었다.
  "염려 마. 난 알코올에 관해선 언더파(표준이상)란 말야."
  "언더파?"
  "네 잔 정도는 보통이야. 그러니까 무슨 걱정이야. 문제 없다구."
  "아휴."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요코하마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차 안에서 키스를 했다. 나는 그녀에게 호텔로 가자고 유혹했지만, 그녀는 안된다고 했다.
  "글쎄, 탐폰이 들어 있다구요."
  "빼면 되잖아."
  "농담 마세요. 아직 이틀째인걸."
  어이쿠, 하고 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게 뭐냐. 이럴 바엔 애당초 여자 친구하고 데이트를 했더라면 좋았을걸, 오랜만에 여동생과 여유있게 하루를 지내려고 하는 이번 일요일에 아무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꼴이란 말이다.
  "미안해요, 하지만 거짓말이 아니에요." 하고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괜찮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네 탓은 아니야, 내 탓이지."
  "내 '생리'가 당신 탓이에요?"하고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 여자아이가 말했다.
  "아니야, 무슨 운명이냔 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당연한 말이 아닌가. 어째서 내 탓으로 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여자아이가 '생리'를 하게 되냔 말이다.
  나는 그녀를 세타가야의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었다. 도중에 클러치가 달깍달깍, 작기는 했지만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이러다가는 수리 공장으로 가야겠군, 하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나가 제대로 안되면, 연쇄적으로 무엇이나 다 나쁜 방향으로 흘러가는 전형적인 하루였다.
  "가까운 시일 안에 다시 만나자고 해도 되겠어?"하고 나는 물었다.
  "데이트하러? 아니면 호텔로"
  "양쪽 다"하고 나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건, 그렇지, 표리일체 그거야. 칫솔과 치약처럼..."
  "그렇군요, 생각해 보겠어요."
  "그래, 생각한다는 거 머리가 늙지 않아서 좋지."
  "당신 집은 어때요? 놀러 가도 돼요?"
  "안 되겠는걸. 여동생하고 살고 있거든. 규칙이 있단 말야. 난 여자를 끌어들이지 않고 여동생은 남자를 끌어들이지 않는다는."
  "진짜 여동생?"
  "진짜구말구, 다음 번에 주민등록 등본을 갖다 줄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녀는 웃었다. 그 여자아이가 자기 집 대문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고 나서 나는 차에 엔진은 넣어, 크러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아파트로 돌아왔다.
  아파트 안은 캄캄하기만 했다. 나는 열쇠로 문을 열고 전등을 켠 후 여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동생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밤 10시에 어디에 갔단 말이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 동안 석간 신문을 찾았는데, 신문은 없었다.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잔과 같이 거실로 가져와 오디오 스위치를 넣고, 턴테이블에 허비 핸콕의 새 레코드를 얹었다. 그리곤 맥주를 마시면서 스피커에서 소리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제서야 나는 오디오가 사흘 전부터 고장 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원은 들어오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텔레비전도 볼 수가 없었다. 내가 갖고 있는 건 모니터용 텔레비전 수신기로, 오디오를 통하지 않고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 장치가 돼 있었던 것이다.
  별수 없이 나는 소리없는 텔레비전 화면을 노려보면서, 맥주나 마시기로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오래 된 전쟁 영화를 하고 있었다. 론멜의 전차대가 나오는 아프리카 전쟁물이었다. 전차포가 소리없는 포탄을 쏘고, 자동소총이 침묵의 탄환을 흩뿌리고, 사람들은 말없이 죽어 갔다.
  "으휴"하고 나는 그날 열 여섯 번째-아마도 그만큼 됐을 것이다-의 한숨을 쉬었다.
  내가 여동생과 함께 살게 된 건 5년전 봄이었다. 그 당시 나는 스물 두 살이었고, 여동생은 열여덟 살이었다. 즉, 내가 대학을 나와 취업을 하고, 그녀가 고등학교를 마치면 대학에 들어간 해다.
  부모님은 나와 함께 산다는 조건하에 여동생이 도쿄의 대학에 다니는 것을 허락했던 것이다. 동생은 그래도 괜찮다고 했다. 나도 좋다고 했다.
  부모님은 우리를 위해 제법 그럴싸한 방이 두 개 있는 넓은 아파트를 세 내 주었다. 집세의 절반은 내가 부담하기로 했다.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나와 여동생은 사이가 좋았으며, 둘이서 산다는 것에 나는 거의 불편을 느끼지 않았었다.
  나는 전자 제품 회사의 광고부에 근무하고 있었던 탓으로, 아침엔 비교적 일찍 출근했으며, 밤에는 늦게 돌아오곤 했다. 여동생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가고, 대개 저녁에 돌아왔다.
  그래서 내가 눈을 떴을 때 동생은 이미 없었고, 내가 돌아왔을 때엔 동생은 벌써 잠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뿐더러 나는 거의 대부분의 토요일과 일요일에 데이트를 했으므로, 동생과 제대로 말을 주고받는 건, 일주일에 한 두 번밖에 없었다. 하지만 결국 그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우리는 싸울 틈조차 없었으며,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 간섭하지도 않았다.
  동생에게도 아마 여러 가지 일들이 있겠지 싶었지만, 나는 거기에 대해서 일절 참견하지 않았다. 열여덟 살이 넘은 여자아이가 누구하고 자건 말건 그런 건 내가 알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꼭 한 번, 한밤중 1시부터 3시까지 동생의 손을 잡아 준 적이 있다. 내가 직장에서 돌아와 보니, 부엌 식탁에서 동생이 울고 있었다. 식탁에서 울고 있다는 건 필시 나더러 뭔가 알아 달라는 뜻이 아닐까 하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간섭하는 게 싫었다면 자기 방 침대에서 울면 그뿐인 것이다. 나는 편협하고 고집스런 인간일지 모르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옆에 앉아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여동생 손을 잡아 본 건, 국민학교 때 잠자리 잡으러 갔을 때 말고는 처음이었다. 여동생의 손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훨씬 크고 따뜻했다.
  동생은 아무 말도 없이 그렇게 2시간이나 울었다. 어쩌면 그렇게 많은 눈물이 몸속에 들어 있나 싶어 나는 감탄했다. 나 같으면 단 2분만 울어도 몸이 바삭바삭 말라 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3식 되자 아닌게 아니라 나도 피곤해져서 그럭저럭 끝맺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쯤에서 오빠로서 뭔가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건 질색이지만 하는 수 없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나는 너의 생활에 일절 간섭하고 싶지 않아. 네 인생이니까 좋을 대로 살면 돼."
  여동생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하지만 한마디만 충고하고 싶은데, 백 속에다 콘돔을 넣고 다니는 일만은 그만 두는 게 좋겠어, 매춘부로 착각하기 쉬우니까."
  그 말을 듣자 동생은 식탁 위의 전하번호부를 집어들어, 나에게로 힘껏 내던졌다.
  "왜 남의 백 속을 뒤지는 거야!'하고 동생은 소리쳤다. 동생은 화를 낼 때면 으레 뭐든지 내던지는 버릇이 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동생의 백 속을 뒤진 적은 한 번도 없다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그것을 계기로 동생은 울음을 그쳤고, 나는 내 침대 속으로 쑤시고 들어갈 수가 있었다.
  여동생이 대학을 졸업하고 여행사에 근무하게 되고 나서도, 우리의 그러한 생활 방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동생의 회사는 9시부터 5시까지 규칙적으로 근무하는 곳이었고, 내 쪽의 생활은 갈수록 게을러졌다.
  점심 전에 출근하여, 데스크에서 신문을 읽고, 점심 식사를 한 후 오후 2시경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해서 광고 대행사와 약속을 해놓고, 술을 마시고 한밤중에 귀가하는 일과가 계속되었다.
  여행사에 근무하던 첫해의 여름 휴가 때, 동생은 여자 친구와 둘이서 아메리카의 서해안에 갔다가-물론 할인요금이었다-그 여행단에서 만나게 된 한 살 위의 컴퓨터 엔지니어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에 돌아와서도 툭하면 그와 데이트를 했다.
  글쎄, 흔히 있는 일이긴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우선 단체 여행이라는 것이 맘에 안 들었고, 그런 곳에서 누구를 만나 사귀다니 생각만 해도 역겨워졌다.
  그런데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부터 동생은 이전보다도 훨씬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집안 일도 차분하게 처리하게 되었고, 옷에도 신경을 쓰게끔 되었다. 그때까지 동생은 워크셔츠와 색바랜 블루진과 운동화를 신은 모양새로 어디나 갈 수 있는 여자였다. 옷차림에 집착하기 시작한 덕분에 신발장은 온통 동생의 구두로 들어찼고, 집안은 세탁소의 철사 옷걸이 투성이였다.
  동생은 열심히 빨래-그때까지는 욕실에 아마존 개미둑 모양으로 더러워진 것들을 쌓아 놓고 있었다-를 했고, 열심히 다림질을 했으며, 열심히 요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청소를 하게 되었다.
  나도 약간의 체험은 있었지만, 그런 것은 위험한 징후였다. 여자아이가 그런 징후를 보이기 시작하면 남자는 줄행랑을 놓든지 아니면 결혼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여동생은 나에게 그 컴퓨터 엔지니어의 사진을 보여 주었다. 여동생이 나에게 그 사진을 보여 준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위험한 징후였다.
  사진은 두 장인데, 한 장은 샌프란시스코의 낚시 전시회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청다랑어 앞에 여동생과 그 컴퓨터 엔지니어가 나란히 서서 생긋이 웃고 있었다.
  "청다랑어가 멋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농담 좀 작작해요, 난 진지하다구요."
  "무슨 말을 했으면 좋겠니?"
  "아무 말 안해도 좋아요, 그런 사람이에요."
  나는 다시 한 번 그 사진을 손에 들고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 세상에서 첫눈에 역겨워지는 얼굴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런 얼굴이었다. 한 술 더떠서 그 컴퓨터 엔지니어는 내가 고교 시절에 가장 싫어하던 클럽 선배와 분위기가 비슷했다.
  얼굴 생김새는 그런 대로 나쁘진 않았지만, 머리가 텅 빈 억지스런 남자였다. 더구나 코끼리 처럼 기억력이 좋아서, 별 하찮은 일도 두고두고 기억하고 있었다. 머리가 텅 빈 부분을 기억력으로 보충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했니?"하고 나는 물었다.
  "엉터리 소리 그만해. 자기 척도로 세상을 재는 짓은 그만두라구요. 세상 사람이 누구나 다 오빠 같은 인간은 아니니까요."하고 얼굴이 빨개지면서 여동생이 말했다.
  두 장째 사진은 일본에 돌아와서 찍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컴퓨터 엔지니어 혼자 찍혀 있었다. 그는 사이가 붙은 옷을 입고 대형 오토바이에 기대 서 있었다. 시트 위에는 헬멧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와 완전히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밖의 다른 표정이 없는 모양이다.
  "오토바이를 좋아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보면 알아. 오토바이를 싫어하는 인간이 뭐가 좋다고 아래위가 붙은 가죽옷을 입겠니?"하고 나는 말했다.
  나는-이것도 물론 편협한 성격이 부리는 심술이겠지만-아무리 해도 오토바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인간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모양새가 요란하고 자기 선전만 너무 늘어놓았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잠자코 사진을 여동생에게 돌려주었다.
  "그런데" 하고 나는 말했다.
  "그런데 뭐예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될 것이냐, 그 말이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결혼하게 될지도 몰라요."
  "결혼 신청을 받았다, 그 말이니?"
  "글쎄 뭐, 아직 대답한 건 아니지만."
  "흐음.."
  "솔직히 말해서 난 취직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좀더 혼자서 편안하게 즐기고 싶거든요. 오빠만큼 분방하게는 아니더라도."
  "하기야 건전한 사고 방식이긴 하지."하고 나는 인정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고, 결혼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생각중이에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나는 식탁 위의 사진을 집어들어 다시 한 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 전의 일이다.
  해가 바뀌고 나서 얼마후, 어머니가 아침 9시에 전화를 걸어 왔다. 나는 블루스 스프링스턴의 <본 인 더 USA>를 들으면서 칫솔질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여동생이 교제하고 있는 남자에 대해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모른다고 했다.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여동생이 2주일 후 주말에 그 남자와 함께 집에 가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 왔다고 했다.
  "결혼한 거 아닐까요?"하고 나는 말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냐고 묻고 있잖니. 얼굴을 대하기 전에 이것저것 알아두고 싶어서."하고 어머니는 말했다.
  "글쎄 만난 적은 없어요. 한 살 위에다 컴퓨터 엔지니어래요. IBM이래나 뭐래나 그런 곳에 근무하고 있구요. 알파벳이 3개에요. NEC라든가 NTT라든가. 사진으로 보기엔 별로 유별난 데는 없는 얼굴이었어요. 제 취향은 아니지만, 뭐 제가 결혼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느 대학을 나왔으며, 집안은 어떤지 모르니?"
  "알 길이 없잖아요. 그런 건."하고 나는 쏘아붙였다.
  "한 번 만나서 이모저모 좀 물어 보아 주지 않겠니?"하고 어머니가 부탁했다.
  "싫어요, 전 바쁘단 말이에요. 2주일 뒤에 직접 물어 보면 되잖아요."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컴퓨터 엔지니어와 만나게 되었다. 다음 일요일에 여동생이 그의 집으로 정식 인사차 가는데 함께 와달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하얀 셔츠에 넥타이를 메고 가장 수수한 양복을 입고, 메구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오래된 주택가 한복판에 있는 상당히 훌륭한 집이었다. 차고 앞에는 언젠가 사진에서 본 '혼다 500cc'가 세워져 있었다.
  "제법 멋진 청다랑어군."하고 나는 말했다.
  "있잖아, 부탁이니 오빠, 그 쓰잘 데 없는 농담은 안하기에요. 오늘 하루면 되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알았어."하고 나는 말했다.
  그의 부모님은 제법 점잖고-약간 점잔이 지나쳐서 못마땅한 점은 있었지만-훌륭한 사람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석유 회사의 중역이었다. 우리 아버지는 시즈오카에서 주유소 체인점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보면 동떨어진 혼인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의 어머니가 고상한 쟁반에다 홍차 잔을 받쳐서 들여 왔다.
  나는 점잖게 인사를 하고 명함을 건네주었다. 그쪽에서도 나에게 명함을 주었다.
  "원래는 저희 부모님이 찾아뵐 예정이었지만, 오늘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 다시 날을 잡아 정식으로 찾아뵈었으면 하십니다."하고 나는 말했다.
  여러모로 아들한테서는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지금 만나 보니 아들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얌전한 아가씨며, 집안도 좋다고 들었고, 해서 자기네 쪽에서는 이 혼사에 아무런 이의가 없다고 그의 아버지가 말했다.
  필시 이것저것 알아봤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열 여섯 살까지 초경이 없어서 만성적 변비로 고민했던 사실까지야 알지 못하겠지.
  일단 형식적인 이야기가 큰 문제없이 끝나자 그의 아버지는 나에게 브랜디를 따라주었다. 상당히 맛이 좋은 브랜디였다. 우리는 그걸 마시면서 각자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여동생의 슬리퍼 끝으로 나의 말을 차서, 너무 지나치게 마시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그 동안 아들인 컴퓨터 엔지니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장된 얼굴로 아버지 곁에 앉아 있었다. 그가 적어도, 이 집 지붕밑에서는 아버지 권력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옳거니,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는 그때까지 내가 본 적도 없는 기묘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고, 그 속에다 색깔도 맞지 않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급해서 좀더 진지하고 똑똑한 남자를 고르지 못했단 말인가?
  이야기가 일단락되고 4시가 되어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컴퓨터 엔지니어가 우리 두 사람을 역까지 바래다주었다.
  "어디 가서 함께 차라도 한 잔하지 않으시겠습니까?"하고 그가 나와 여동생에게 말했다.
  나는 차 같은 것도 마시고 싶지 않았고, 그런 요상한 무늬의 스웨터를 입은 남자와 동석한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하면 어색해질 것 같아서 셋이서 가까운 다방에 들르기로 했다.
  그와 여동생은 커피를 주문하고, 나는 맥주를 주문했는데, 맥주는 없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커피를 마셨다.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하고 그는 나에게 인사 치레를 했다.
  "뭐 별로, 당연한 일이니까"하고 나는 점잖게 말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농담을 할 만한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동생을 통해 형님 이야기는 늘 들었습니다."하고 그가 말했다.
  '형님?'
  나는 커피 스푼의 손잡이로 귓볼을 긁고 나서 그것을 도로 접시에 놓았다. 여동생은 또 나의 발끝을 걷어찼지만, 컴퓨터 엔지니어 쪽은 그 동작의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마 '이진법'의 농담이란 것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나 보다.
  "아주 사이가 좋아 보여서 저는 정말 부럽습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기쁜 일이 있으면 서로 발 걷어차기를 한다네."하고 나는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는 도대체 무슨 말인가 생각하는 어정쩡한 얼굴을 했다.
  "농담을 한 거예요. 그러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하고 여동생이 정나미 떨어졌다는 듯이 말했다.
  "농담일세. 가사를 분담하고 있지. 동생은 빨래를 하고 나는 농담을 하고"하며 나도 말했다.
  컴퓨터 엔지니어-와타나베 노보루가 정확한 이름이다-는 그 말을 듣고 다소 안심했다는 듯이 웃었다.
  "명랑해서 좋지 않습니까. 저도 그런 가정을 갖고 싶군요. 밝은 것이 첫째입니다."
  "보라구, 밝은 것이 첫째잖아. 네 신경질은 너무 지나쳐."하고 나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재미난 농담이라구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되도록이면 가을에는 결혼하고 싶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결혼식이야 역시 가을이 좋겠지. 그러면 다람쥐도 곰도 부를 수 있을테고."
  컴퓨터 엔지니어는 웃었고 여동생은 웃지 않았다. 동생은 정말 화가 나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볼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고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파트에 돌아온 후 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대충의 상황을 설명했다.
  "별로 나쁜 사람은 아니었어요."하고 나는 귀를 긁적거리면서 말했다.
  "별로 나쁘지 않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제대로 됐다는 말이죠, 적어도 저보다는 나아 보였어요."
  "네가 뭐 어디가 어때서?"
  "좋아라, 고마워요."하고 나는 천장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대학은 어느 대학?"
  "대학?"
  "어느 대학을 나왔대, 그 사람?"
  "그런 거야 본인한테 물어 보시죠."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맥주를 꺼내 한심한 기분으로 혼자서 마셨다.
  스파게티 건으로 해서 여동생과 말다툼을 한 그 다음날, 나는 오전 8시 반에 잠에서 깼다. 전날이나 다름없이 구름 한 점 없는 좋은 날씨였다. 꼭 어제 같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밤 동안 일시 중단하고 있던 인생이 다시 계속 이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땀으로 축축해진 파자마와 속옷을 세탁물 바구니 속에 던져 넣고, 샤워를 하고 수염을 깎았다. 그리고 수염을 깎으면서, 결정적인 순간에서 재미 보기에 실패하고 만 어제 저녁 여자아이에 대해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은 불가항력이었고,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기회는 또 얼마든지 있다. 아마 다음 일요일에는 잘 되겠지.
  나는 주방에서 토스트 두 개를 굽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나서 FM방송을 들으려 했지만, 오디오가 고장이란 생각이 떠올라 단념하고, 신문의 독서란을 읽으면서 빵을 먹었다.
  독서란에는 흥미를 끌 만한 종류의 책은 한 권도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거기 있는 것은 늙은 유태인의 공상과 현실이 교차하는 성생활에 대한 소설이라든가, 분열증 치료에 대한 역사적 고찰이라든가, 아시오 총독 사건의 전모라든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 따위 책을 읽을 거라면 차라리 여라 소프트볼 부의 주장과 자는 편이 훨씬 즐거울 것이다. 신문사는 분명 우리의 비위를 거슬리게 하려고 이런 책을 선정했나 보다.
  바삭바삭하게 구운 빵을 한 개 먹고, 신문을 식탁 위에다 도로 놓으려는데 잼 병 밑에 메모 용지가 끼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건 여동생이 평소나 다름없는 작은 글씨로 이번 일요일 저녁 식사에 와타나베 노보루를 초청했으니, 나도 꼭 집에 있다가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적어 놓은 것이었다.
  나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셔츠 위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털고, 그릇을 싱크대의 설거지통에 처넣고 나서, 여동생이 근무하고 있는 여행사에다 전화를 걸었다. 여동생이 나와 '지금 바빠서 틈이 없으니, 10분 후에 내가 다시 걸게요.'라고 했다.
  전화는 20분 후에 걸려 왔다. 그 20분 동안 나는 43회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손발을 합쳐서 20개의 손톱과 발톱을 깎고, 셔츠와 넥타이, 웃옷, 그리고 바지를 골라 놓았다. 그리고 이를 닦고, 빗질을 하고, 하품을 두 번했다.
  "메모 읽어 봤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읽었어. 그런데 안 됐지만 이번 일요일에는 선약이 있어서 안되겠어. 좀더 빨리 알았다면 비워놓을 수도 있었는데, 정말 유감천만이다."
  "뻔뻔스런 소리 좀 작작하라구요. 어차피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아이하고, 어디론가 가서 무슨 짓을 하려는 그런 약속일 테지 뭐. 그거 토요일로 돌리면 안돼요?"하고 여동생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토요일에는 하루 종일 스튜디오에 들어가 있어야 한다구. 전기 담요 CF를 만들어야 하거든. 요즘 좀 바빠서."
  "그럼 그 데이트 취소해요."
  "반환 요금을 빼앗기는 걸. 지금 비교적 미묘한 단계야."
  "내 일은 미묘하지 않아요?"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야."하고 나는 의자에 걸어 놓은 셔츠에 넥타이를 맞추면서 말했다.
  "서로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게 규칙 아니었어? 너는 네 약혼자하고 밥을 먹고... 나는 내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그럼 됐잖아."
  "된 게 아니라니까요. 오빠는 줄곧 그를 안 만났잖아요? 여태까지 한 번밖에 만나지 않았어요. 그것도 4개월 전의 일이에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몇 번이나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도, 오빠는 줄창 도망만 다녔잖아요. 굉장한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빠 여동생의 약혼자라구요. 한 번쯤 함께 식사 좀 하는 것이 뭐가 어때요."
  여동생이 하는 말에도 일리는 있었기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나는 확실히 아주 자연스럽게 와타나베 노보루와 동석할 기회를 피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와타나베 노보루와 나 사이에는 그다지 공통된 화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고, 동시 통역을 대동하고 농담을 하는 것도 상당히 피곤한 일이었다.
  "부탁이에요. 하루면 되니까 그렇게 해줘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여름이 끝날 때까지 오빠의 성생활에 대해 훼방놓지 않을 테니까."
  "내 성생활이란 아주 사소한 거야. 여름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를 정도라구."
  "아무튼 이번 일요일에는 집에 있어 주는 거죠?"
  "별 수 없군."하고 나는 체념하면서 말했다.
  "모르긴 해도 그가 오디오를 수리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사람 그런 거 정말 특기라니까요."
  "손가락 놀림이 특기겠지."
  "이상한 생각좀 작작하라구요."하고 여동생은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나는 넥타이를 매고 회사로 나갔다.
  그 주일 동안 줄창 맑은 날씨였다. 매일매일이 한결같았다. 수요일 저녁에 나는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이 바빠서 이번 주말에도 만나기 어렵겠다고 했다. 내가 벌써 3주일 동안이나 그녀와 만나지 않았으니, 당연히 그녀는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수화기를 든 채로, 일요일에 데이트했던 여대생 집에 전화를 돌렸는데, 그녀는 없었다. 목요일에도 금요일에도 그녀는 집에 없었다.
  일요일 아침, 나는 8시에 여동생 등쌀에 일어났다.
  "시트를 빨아야 하는데 언제까지 자고 있을 거예요."하고 동생이 말했다. 그리고 시트와 베갯잇을 벗기고 파자마를 벗겼다.
  나는 갈 것이 없어서 샤워장으로 들어가 수염을 깎았다. 저것도 차츰 어머니를 닮아 가는군, 하고 나는 생각했다.
  여자란 마치 연어와 같다. 뭐니뭐니해도 다들 반드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다.
  샤워실에서 나온 후 나는 반바지를 입고, 색이 바래서 거의 글씨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린 티셔츠를 뒤집어써서 입고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오렌지 쥬스를 마셨다.
  몸속에는 아직도 어젯밤의 알코올이 얼마만큼 남아 있었다. 신문을 펼쳐 보고 싶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 크래커 상자가 있기에, 나는 그것을 서너 개 먹고는 아침 식사 대용으로 때웠다.
  여동생은 시트를 세탁기에 넣고 돌렸고, 그 동안에 내 방과 자기 방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걸 끝내자 세제를 풀어 거실과 주방의 바닥과 벽을 걸레로 닦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줄곧 거실 소파에 누워서 미국에 있는 친구들이 보내 준 '허슬러'의 누드 사진을 보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여성의 성기는 참으로 여러 가지 크기와 형태가 있다. 키의 크기랑 지능 지수의 차이도 마찬가지다.
  "있잖아요, 거기서 뒹굴지 말고 시장 좀 봐다 줄래요?"하고 여동생이 가득 적어 놓은 메모지를 내게로 건네주며 말했다.
  "그리고 그런 책은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감춰 두라구요. 깔끔한 사람이니까."
  나는 '허슬러'를 탁자 위에 놓고 메모지를 노려보았다.
  레터스, 토마토, 샐러리, 프렌치 드레싱, 스모크 서먼, 마스터드, 양파, 수프 스톡, 감자, 파슬리, 스테이크 고기 세 조각...
  "스테이크 고기? 난 어제도 스테이크를 먹었다구. 스테이크는 싫어. 크로켓으로 하는 게 좋아."
  "오빠는 어제 스테이크를 먹었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먹지 않았어요. 고집 좀 부리지 마세요.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해 놓고, 크로켓을 내놓을 수는 없잖아요?"
  "난 여자아이 집에 초대받아 가서 금새 튀긴 크로켓이 나온다면 감동하고 말텐데 말이야. 가늘게 채썰은 하얀 양배추를 수북하게 담아 곁들이고 바지락 조개 된장국이 있고... 생활이란 그런 거라구."
  "하지만 오늘은 아무튼 스테이크로 정했어요. 크로켓 정도야 앞으로 죽도록 먹여 줄 테니까, 오늘은 군소리 작작하고 꾹 참고 스테이크를 먹으라구요. 제발 부탁이에요."
  "좋습니다요."하고 나는 순순히 따라 주었다. 나는 이러고저러고 군소리는 하지만 결국엔 말 잘 듣는 착한 사람이다.
  나는 가까운 슈퍼마켓으로 가서 메모되어 있는 모든 물건을 하고, 술 가게에 들로 4,500엔 짜리 샤브리를 샀다. 나는 약혼한 두 사람의 젊은이들을 위하여 샤브리를 선물할 셈이었다. 그런 것으로나 친절한 사람이 될 수밖에.
  집에 돌아오자 침대 위에는 랄프 로렌의 블루 폴로셔츠와 얼룩하나 없는 베이지색 면바지가 놓여 있었다.
  "그걸로 갈아 입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아이고 맙소사, 하고 생각했지만 군소리 않고 갈아입었다. 뭐라고 말해 봤자, 평소의 따스하고 지저분하고 평화로운 휴일이 쟁반 위에 담겨져 돌아올 리는 없을 테니 말이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3시에 찾아왔다. 물론 오토바이에 올라타고, 산들바람과 함께 찾아왔다. 그의 혼다 500cc의 퍽퍽 거리는 불길한 배기음은 5백미터 앞에서부터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다.
  베란다에서 머리를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아파트 현관 앞에다 오토바이를 세워 놓고, 헬멧을 벗는 것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STP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헬멧만 빼놓고, 오늘은 지극히 보통 사람에 가까운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풀을 빳빳하게 먹인 체크 무늬의 앞 트인 셔츠에다, 통 넓은 하얀 바지, 술 장식이 붙어 있는 갈색 로퍼 슈즈의 모양새였다. 구두와 벨트색이 어울리지 않았을 뿐이다.
  "낚시 전시회의 친구가 온 것 같애."하고 나는 부엌에서 감자 껍질을 벗기고 있는 여동생에게 말했다.
  "그럼 잠시만 오빠가 얘기를 나눠줄래요? 나는 저녁을 준비할 테니까."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별로 내키지 않는걸. 무슨 말을 할지 모르잖아. 내가 식사 준비를 해줄게. 너의 둘이서 이야기하면 어때?"
  "바보 소리 좀 그만해요. 그런 짓을 했다가는 꼴이 말이 아니잖아요. 오빠가 앉아 있어야 해요."
  벨이 울려 문을 열자, 거기 와타나베 노보루가 서 있었다. 나는 그를 거실로 맞아 들이고, 소파에 앉게 했다. 그는 선물로 서틴원 아이스크림을 들고 왔는데, 우리 냉장고에는 좁은데다가 냉동 식품이 가득 채워져 있어서, 그것을 집어넣는데 몹시 애를 먹었다. 정말로 귀찮게 구는 녀석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고많은 중에 아이스크림 따위를 사들고 오냐 말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에게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다. 안 마신다고 그는 대답했다.
  "체질상 술을 못합니다. 맥주 한잔만 마셔도 기분이 좋지 않을 정도라서요."하고 그는 말했다.
  "나는 학생 시절에 친구들하고 내기를 해서 큰 사발 가득하게 맥주를 마신 적이 있는데."하고 나는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꼬박 이틀동안 소변이 맥주였어. 덕분에 트림이..."
  "저어. 이럴 때 오디오 수리를 부탁하면 어떨까요?"하고 여동생이 불길한 연기 냄새라도 맡듯이 다가와 오렌지 쥬스 두 잔을 탁자 위에 놓으면서 말참견을 했다.
  "좋지요."하고 그가 대답했다.
  "손재주가 있다면서?"하고 나는 물었다.
  "그렇습니다."하고 그는 아무 거리낌없이 대답했다.
  "옛날부터 프라(플라스틱)모델이랑 라디오 조립을 좋아했습니다, 온 집안의 망가진 것을 수리하며 돌아다녔지요. 오디오의 어디가 안됩니까?"
  "소리가 나오질 않아."하고 내가 말했다. 그리고 앰프의 스위치를 넣고 레코드를 걸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는 맹수 같은 모양새로 오디오 앞에 앉아서 하나하나 스위치를 점검해 보았다.
  "앰프 계통이군요, 그것도 내부가 잘못된 게 아니고."
  "어떻게 알지?"
  "귀납법입니다"하고 그는 말했다.
  '귀납법',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소형 프리 앰프와 파워 앰프를 끄집어내 놓고 전선을 전부 뜯어, 하나하나 정성들여 점검했다. 그 동안에 나는 냉장고에서 버드와이저 캔을 꺼내 혼자서 마셨다.
  "술을 마실 수 있다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겠지요."하고 그는 샤프 펜슬 끝으로 플러그를 건드려 보면서 말했다.
  "글쎄, 옛날부터 줄창 마셨으니 잘 모르겠어. 비교할 길이 없거든."
  "저도 조금 연습하고 있습니다."
  "술 마시는 연습을?"
  "예, 그렇습니다. 이상합니까?"
  "이상하긴, 우선 백포도주로 시작하는 게 좋겠지. 커다란 잔에다 백포도주와 얼음을 넣고 거기다 페리에를 타고 레몬을 짜 넣어 마시는 거지. 난 쥬스대신 마시지만."
  "시험해 보겠습니다. 옳지, 역시 이거였군,"
  "뭐가?"
  "프리와 파워 사이의 코넥팅 코드지요, 좌우 모두 핀 플러그가 뿌리부터 빠져 버렸군요. 이 플러그는 구조적으로 상하의 흔들림에 약합니다. 그런데 엉성하게 만들었네요. 이 앰프 요즘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았나요?"
  "그러고 보니 그 뒤를 청소할 때 움직였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바로 그거야."하고 그가 말했다.
  "그거 오빠 회사 제품이죠? 그렇게 약한 플러그를 붙여 놓는 자체가 잘못이지."하고 여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만든 건 아니라구, 나는 광고를 만들고 있을 뿐이야."하고 나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땜질 인두가 있으면 곧 되겠는데요, 있습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나는 '없다.'고 했다.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제가 한달음에 사오겠습니다. 땜질 인두는 한 개쯤 있으면 편리하니까요."
  "그렇겠지, 그런데 철물점이 어디 있더라?"하고 나는 풀이 죽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까 그 앞을 지나서 왔으니까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나는 또 베란다로 얼굴을 내밀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에 올라앉아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은 사람이죠?"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마음이 누그러지는군."하고 나는 말했다.
  핀 플러그의 수리가 무사히 끝난 것은 5시 전이었다. 그가 가벼운 보컬을 듣고 싶다기에 여동생은 훌리오 이글레시어스의 레코드를 걸었다. 훌리오 이글레시어스, 하고 나는 생각했다. 맙소사 어떻게 그 따위 두더지 똥 같은 것이 집에 있었지?
  "형님은 어떤 음악을 좋아하십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이런 거 좋아한다구."하고 나는 심통스럽게 말했다.
  "그밖에는 블루스 스프링스턴이라든가 제프 벡이라든가 도어즈라든가, 그런거지."
  "다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이런 느낌의 음악입니까."
  "대개 비슷하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지금 그가 속해 있는 프로젝트 팀이 개발중인 새로운 컴퓨터 시스템 이야기를 했다. 철도 사고가 일어났을 때 가장 효과적으로 되돌리는 운전을 하기 위한 다이어그램을 순간적으로 계산하는 시스템인데,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까, 확실히 편리하긴 하겠지만, 그 원리는 핀란드어의 동사 변화만큼 잘 알 수 없었다.
  그가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나는 적당히 받아넘기면서 줄창 여자만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휴일에는 어디서 누구와 술을 마시고, 어디서 식사를 하고, 어느 호텔에 들어갈까, 뭐 그런 것이었다.
  나는 필시 나면서부터 그런 것이 구미에 맞았다. 프라 모델을 만들고 전차의 다이어그램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한편에 있듯이 나는 이런저런 여자와 술을 마시고 그녀들과 자는 것이 좋았다. 그런 것은 꼭 인간의 지혜를 넘어선 숙명과도 같은 것일거다.
  내가 네 병째 맥주를 거의 다 마셨을 무렵에 저녁 준비가 되었다. 메뉴는 스모크 서본과 버시 소워즈, 스테이크, 샐러드와 프라이드 포테이토였다. 평소나 다름없이 여동생이 만든 요리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샤브리를 따서 혼자 마셨다.
  "형님은 어떻게 전자 제품 회사에 취직을 하셨는지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전기에 대해 별로 취미도 없는 것 같은데."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텐덜로인 스테이크를 나이프로 썰면서 물었다.
  "오빠는 대개 유익하고 사회적인 일은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그래서 일자리는 어디라도 관계없는 거죠. 공교롭게 거기 연줄이 닿아서 들어갔을 뿐이에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맞았어."하고 나는 힘차게 동의했다.
  "머리 속엔 노는 일밖에 없어요. 뭔가 진지하게 탐구한다든가 그런 생각은 제로라고요."
  "여름 날의 베짱이."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진실하게 사는 사람을 삐딱하게 보고 즐기고 있다구요."
  "그건 아닌데. 남의 일과 내 일은 별개의 문제야. 나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정해진 열량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라구. 남의 일과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지. 삐딱하게 보지도 않고, 확실히 나는 별 볼일 없는 인간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을 훼방놓거나 하진 않아."하고 나는 말했다.
  "별 볼일 없다니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거의 반사적으로 말했다. 필시 가정교육이 잘 되어 있다.
  "고맙네."하고 말하며 나는 포도주 잔을 치켜 들었다.
  "그리고 약혼을 축하하네, 혼자만 마셔서 안됐지만."
  "식은 10월에 올릴까 합니다. 다람쥐도 곰도 부르지 못하지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그거 마음에 두지 말게나."하고 나는 말했다. 어이쿠, 이 녀석 농담도 하는군.
  "그래 신혼 여행은 어디로 가지? 할인 요금으로 갈 수 있을 테지?"
  "하와이"하고 여동생이 간결하게 말했다.
  그 다음 우리는 비행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안데스 산중의 비행기 조난 사건에 대한 책을 몇 권 읽었을 뿐이라서 그 이야기를 했다.
  "사람 고기를 먹을 때에는 비행기의 듀랄루민 파편 위에다 고기를 올려 좋고, 태양 볕에 익혀서 먹는대."하고 나는 말했다.
  "아니 식사 중에 어떻게 그따위 얘기를 할 수 있죠? 그런 악취미가 어디 있어요? 다른 여자아이를 꼬일 때도 식사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하나요?"하고 여동생이 손을 멈추고는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형님은 아직 결혼할 생각이 없으십니까?"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사이에 끼어들었다. 마치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가 손님을 초대한 꼴과 같았다.
  "기회가 없어서."하고 나는 프라이드 포테이토를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어린 여동생 시중도 들어주어야 했고, 오랜 전쟁도 있었고."
  "전쟁, 어떤 전쟁이죠?"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깜짝 놀란 듯이 물었다.
  "쓸데없는 농담이에요."하고 여동생은 드레싱을 뿌리면서 말했다.
  "그래, 쓸데없는 농담이야. 하지만 기회가 없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라구. 나는 성격이 편협한데다 양말도 제대로 빨아 신지 않았으니 함께 살아도 좋다는 생각을 해주는 멋진 여자아이를 만날 수가 없었다네. 자네하고 달라서 말이지."하고 나는 말했다.
  "양말이 어떻다구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물었다.
  "그것도 농담이죠. 양말정도는 내가 매일 빨아 준다구요."하고 여동생이 지친 목소리로 설명했다.
  와타나베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1초 반동안 웃었다. 이 다음에는 3초쯤 웃겨 주자고 나는 결심했다.
  "하지만 동생과는 줄창 함께 사셨지 않습니까?"하고 그는 여동생 쪽을 가리켰다.
  "그거야 여동생이니까."하고 나는 말했다.
  "그건 오빠가 멋대로 놀아도 내가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니까 그렇죠. 하지만 진짜 생활이란 그런 게 아니잖아요. 진짜 어른들의 생활이란 말이지, 진짜 생활이란 사람과 사람이 좀 더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죠. 하긴 오빠와 함께 지낸 5년간의 생활은 나름대로 재미도 있었어요. 자유롭고, 속 편하고. 하지만 최근에 와서 이런 것은 진짜 생활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뭐라고 하면 좋을까, 말하자면 생활을 실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오빠는 오로지 자기밖에 모르고 있고, 진지하게 말하려 해도 이죽거릴 뿐이고."
  "소극적일 뿐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오만한 거예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소극적이고 오만하고. 소극적인 것과 오만의 되돌리기 운전을 하고 있는 셈이지."하며 나는 포도주를 따르면서 와타나베 노보루를 향해 설명했다.
  "알 것 같습니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하지만 혼자 있게 되면-말하자면 동생과 제가 결혼하면 그 말인데-역시 형님도 누군가와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하고 나는 말했다.
  "정말?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친구 중에 착한 아이가 있는데, 소개해 줄까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그때가 되면, 지금은 아직 위험 천만이야."하고 나는 말했다.
  식사를 끝내고 우리는 자리를 거실 쪽으로 옮겨 커피를 마셨다. 여동생은 이번엔 윌리 넬슨의 레코드를 걸었다. 다행스럽게도 훌리오 이글레시어스보다는 조금 괜찮았다.
  "저도 사실은 형님처럼 서른 가까이 까지 혼자 있고 싶었습니다."
  여동생이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때 와타나베 노보루는 나에게 털어놓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자 왠지 결혼하고 싶어졌습니다."
  "괜찮은 애지. 다소 고집이 있고 변비 증세가 있지만, 선택은 잘했다고 생각하네."
  "하지만 결혼한다는 거 어쩐지 두려워지는군요."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 생각하면 뭐 두려울 게 있겠나. 나쁜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면 그만이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나서 나는 여동생 곁으로 다가가 잠시 근처를 산책하고 오겠다고 했다.
  "10시 지날 때까지 돌아오지 않을 테니 둘이서 실컷 즐기라구, 시트도 갈았겠다."
  "이상한 쪽에만 정신을 파는군요."
  여동생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내가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특별히 반대하지 않았다.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 곁에 가서, 이웃에 볼 일이 있어 다녀오겠는데 좀 늦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무척 즐거웠습니다. 결혼하고 나서도 자주 놀러 오십시오."하고 와타나베 노보루가 말했다.
  "고맙네."하고 나는 상상력을 일시적으로 멈추고 말했다.
  "차는 가지고 가지 말아요. 오늘은 많이 마셨으니까."
  나가는데 여동생이 말했다.
  "걸어갈게."하고 나는 말했다.
  근처에 있는 바에 들어간 것은 8시 조금 전이었다. 나는 카운터에 앉아서 IW 하퍼의 온 더 록을 마셨다. 카운터 속의 텔레비전에서는 거인과 야쿠르트의 야구 중계를 방영하고 있었다. 소리는 나지 않고 그 대신 신디 로퍼의 레코드가 걸려 있었다. 피처는 니시모토하고 오바나인데, 득점은 3대2로 야쿠르트가 이기고 있었다. 무음의 텔레비전을 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걸, 하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 야구 중계를 바라보면서 온 더 록을 석 잔 마셨다. 9시가 되자 3대3의 동점인 채 7회 후반에서 야구 중계가 끝났다. 그러자 텔레비전도 꺼졌다.
  내 자리 하나 건너 옆자리에 가끔씩 여기서 만나는 스무 살 안팎의 여자아이가 앉아서 나와 마찬가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중계가 끝나자 나는 그녀와 야구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자기는 거인의 팬인데, 어느 팀을 좋아하느냐고 나에게 물었다. 아무 팀이면 어떠냐고 나는 대답했다. 단지 시합 자체를 보는 것이 좋다고.
  "그런 게 무슨 재미일까? 그런 식으로 야구를 보면 열중할 수 없잖아요?"하고 그녀가 물었다.
  "열중 안해도 좋아. 어차피 남들이 하고 있는 일인걸."     
  10시가 되자 나와 그녀는 그 바를 나와서, 좀 더 편안한 의자가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나는 거기서 또 위스키를 마시고, 그녀는 글라스 호퍼를 마셨다.
  그녀는 상당히 취해 있었고, 나도 아닌게 아니라 취해 있었다. 11시가 되자 나는 그 여자를 바래다 줄 겸 그녀의 아파트로 가서 당연한 일처럼 섹스를 했다. 방석과 차를 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을 꺼요."하고 그녀가 말하기에 나는 불을 껐다. 창으로는 커다란 니콘 광고탑이 보였고, 옆집으로부터는 텔레비전의 프로 야구 중계 소리가 크게 들려 왔다.
  어두운데다 상당히 취해 있어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나 자신도 알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것은 섹스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페니스를 움직여 정액을 방출하는 것뿐이다.
  적당히 간략화한 한바탕의 행위가 끝나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내 잠이 들어서, 나는 제대로 정액도 닦지 못한 채 옷을 입고 방에서 나왔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옷과 뒤섞여 있는 나의 폴로셔츠와 바지와 팬티를 찾아내는 것은 적잖은 고생이었다.
  밖으로 나오자 취기가 한밤중의 화물열차처럼 급격하게 나의 몸 속을 빠져나갔다. 정말이지 지독한 기분이었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사나이처럼 몸이 삐걱거렸다.
  술을 깨려고 자동 판매기의 쥬스를 한 병 마시자마자 나는 위 속의 것을 전부 토해냈다. 스테이크랑 스모크 서본이랑 레터스랑 토마토의 잔해들이었다.
  아이구 맙소사, 하고 나는 생각했다. 술을 마시고 토하다니, 도대체 몇 년 만일까? 나는 지금 대체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인가? 같은 짓을 되풀이하고 있는데 그때마다 더욱 나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나서 나는 불쑥 와타나베 노보루와 그가 사온 땜질 인두를 생각했다.
  "땜질 인두 하나쯤 있으면 편리하니까요."하고 와타나베 노보루는 말했다.
  건전한 생각이지, 하고 나는 손수건으로 입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자네 덕분에 드디어 우리 집에도 땜질 인두가 생겼군. 하지만 그 땜질 인두 탓으로 거기는 나의 집이 아닌 양 느껴졌다.
  아마도 그것은 내 성격이 편협한 탓이겠지.
  내가 아파트로 돌아온 것은 한밤중이 지나서였다. 물론 현관 옆에 오토바이의 모습을 없었다. 나는 엘리베이터로 4층까지 올라가 자물쇠를 열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방 개수대 위에 조그만 형광등이 하나 켜져 있을 뿐 나머지는 캄캄했다. 여동생은 지쳐서 먼저 자버린 모양이다. 그 기분 알 만하다.
  나는 유리잔에다 오렌지 쥬스를 따라 단숨에 들이키고, 그리고 나서 샤워실로 들어가 비누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땀을 씻어내고 정성스레 이를 닦았다.
  샤워실에서 나와 세면장의 거울을 보자 스스로도 오싹하리만큼 지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끔씩 마지막 전차의 시트에서 볼 수 있는 추한 주정뱅이 중년 남자의 얼굴이었다. 피부는 거치고 눈은 움푹 꺼지고 머리에는 윤기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세면장의 전깃불을 끄고 목욕 타월을 한 장 허리에 두른 모양새로 주방으로 돌아와 수돗물을 마셨다. 내일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안되면 또 다음날 생각하자. 오브라디 오브라다, 인생은 흘러간다.
  "많이 늦었네요."하고 어둑한 속에서 여동생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거실 소파에 앉아 혼자서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술 마시고 있었어?"
  "오빤 너무 과해요."
  "알고 있어."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내어 손에 들고, 여동생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우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이 이따금 맥주만 들이키고 있었다. 바람이 베란다 화분의 잎을 흔들고, 그 저편에는 멍청하게 반달이 보였다.
  "말해 두지만 하지 않았어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뭘?"
  "뭐든지, 마음에 걸려서 할 수 없었다구요."
  "헤에."
  나는 반달이 떠 있는 밤에는 어쩐지 말이 없어진다.
  "뭐가 걸렸느냐고 묻지 않아요?"하고 여동생이 말했다.
  "뭐가 걸렸는데?"하고 나는 물었다.
  "이 방이. 이 방이 마음에 걸려서 여기서는 할 수 없어요, 나는."
  "흐응."
  "아니, 어쩐 일이에요? 몸이 어떻게 된 거 아니에요?"
  "피곤해, 나라고 피곤하지 않을까?"
  여동생은 잠자코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 나는 남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등받이에다 목을 올려놓고 눈을 감았다.
  "오빠, 우리 때문에 피곤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아니야."하고 나는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말하기에 지쳤다, 그거에요?"하고 여동생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는 몸을 일으켜 동생 쪽을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저어, 오늘 내가 오빠한테 좀 심한 말을 했잖아요? 이를테면 오빠 자신에 대해서라든가, 오빠와의 생활에 대해서라든가..."
  "아니야."
  "정말?"
  "너는 요즘 줄곧 옳은 말만 했지. 그러니 신경 쓸 거 없다구.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했지?"
  "그가 돌아가고 나서 줄고 여기 앉아서 오빠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좀 지나친 말을 한 게 아닌가 하는."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두 개를 꺼내고, 오디오의 스위치를 넣어 작은 소리로 리치 바이라크 트리오의 레코드를 걸었다. 한밤중에 취해서 돌아왔을 때 늘 듣는 레코드였다.
  "좀 혼란스러워. 생활의 변화 따위에 대해서 말이야. 기압의 변화와 마찬가지야. 나도 내 나름대로 얼마만큼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거야."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오빠한테 대들어서요?"
  "다들 누군가에게 대들고 있어. 하지만 만약 네가 그 중에서 나를 뽑아 대들고 있다면, 그 선택은 잘못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신경 쓸 거 없다구."
  "때때로 어쩐지 굉장히 무서워요. 앞날의 일들이."
  "좋은 면만 보고 좋은 일만을 생각하도록 해. 그럼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나쁜 일이 일어나면 그때 가서 생각하도록 하면 돼."하고 나는, 와타나베 노보루에게 한 말과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그렇게 잘 될지 모르겠네요."
  "잘 안되면 그때 가서 또 생각하면 돼."
  여동생은 깔깔 웃었다.
  "오빠는 옛날이나 다름없이 묘한 사람이야."하고 동생이 말했다.
  "이봐, 하나만 질문해도 될까?"하고 나는 맥주의 풀링을 따면서 말했다.
  "좋아요."
  "그말고 앞에 몇 남자하고 잤지?"
  동생은 잠시 어리둥절해 하다가 손가락을 두 개 내보이며 말했다.
  "두 사람."
  "한 사람은 동갑이었고, 또 한 사람은 연상의 남자였지?"
  "그걸 어떻게 알죠?"
  "상식이지."하고 말하며 나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나라고 무작정 놀고 잇는 건 아니라구, 그 정도는 알아."
  "표준이라는 건가요?"
  "건전하다, 그거지."
  "오빠는 몇 여자하고 잤어요?"
  "스물여섯 명. 요전에 세어봤지. 생각나는 것만 스물 여섯명. 생각나지
않는 것이 열 명쯤 있을지 몰라. 일기에 적어 두는 것도 아니니까."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여자하고 자요?"
  "몰라, 어디선가 끝을 맺어야 하겠는데, 나 스스로도 계기를 잡지 못하는 거야."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우리는 그 다음에도 말없이 나름대로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멀리서 오토바이의 배기음이 들렸는데, 그것이 와타나베 노보루일 까닭은 없었다. 이미 새벽 1시였다.
  "있잖아요, 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요?"하고 여동생이 물었다.
  "와타나베 노보루?"
  "그래요."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 구미에 맞지 않고 복장에 대한 취향도 약간 동떨어진 건 있지만"하고 조금 생각하고 나서 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하기야 한 집안에 한 사람쯤 그런 사람이 있어도 괜찮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나는 오빠가 좋아요. 하지만 세상 사람이 다 오빠 같다면 이 세상은 엉망진창이 돼버리지 않을까요?"
  "그렇겠지."하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나머지 맥주를 마시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시트는 새것이라 청결했고 주름 하나 없었다. 나는 그 위에 몸을 눕히고, 커튼 사이로 달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기에는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눈을 감자 졸음은 어두운 망처럼 소리 없이 머리 위에서 내려와 나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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