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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기

중소기업, 삼성과 인연을 맺어 망가지다

알 수 없는 사용자 2006. 1. 14. 04:00
? '서울의 찬가'와 함께 시작한 서울생활

내 고향은 충청도다. 거기서 줄곧 대학까지 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서울에 있는 직장에 합격해 고향을 떠나 서울생활을 하게 되었다. 마포구 대흥동에 있는 한국컴퓨터(주)가 내 첫 직장이었다. 시골촌놈이 주머니에 10만 원 달랑 들고 서울역에 도착했을 땐 믿을 수 있는 것은 직장에 합격했다는 사실이 전부였다. 대학 땐 전기공학을 전공했는데 취직은 컴퓨터회사에 했으니 걱정도 많았다. 입사해서 처음 직장생활을 할 때는 수원 못미처 율전역 근처에 월세방을 구했는데 주인 아주머니께서 직장인이라고 보증금도 받지 않았고 늦게 퇴근할 땐 연탄까지 갈아주셨다. 집이 멀어서 나는 항상 새벽에 일찍 출근을 해야만 했다. 그래도 출근길에 '서울의 찬가'가 울려 퍼질 땐 내가 무슨 훌륭한 일꾼으로서 큰일 하러 나가는 사람인 양 가슴 뿌듯하게 신입사원 연수를 받으며 다녔고 그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6년 동안 나는 금융기관 영업대표로서 업무를 하나씩 배워갔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금융기관뿐만 아니라 IT업계의 전반적인 동향과 발전방향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마침내 지금 내 사업분야인 종이없는(paperless) 사무자동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되었다.

6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나는 1년 이상 사업계획서를 꼼꼼히 준비하면서 자본가를 찿았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그 당시 투자가 가장 까다롭기로 소문난 장은투자에서 한 달만에 3억 원을 지원받아 꿈에도 그리던 내 회사를 창업할 수 있었다. 무조건 전화를 걸어서 만나달라고 사정했었고 수차례 거절당했지만 의지 하나로 끝까지 밀어붙인 덕에 핵심 인사를 만나 설득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는 사전에 준비한대로 기술력이 뛰어난 미국회사들부터 방문하여 협상한 결과 미국 IBM의 비즈니스 파트너 가운데 하나를 우리의 최상의 협력업체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과의 인연이 계기가 되어 2000년에는 샌디에고에 별도의 연구법인도 설립했고 세계적으로 경쟁력있는 제품까지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손으로 만든 엑스톰(XTORM)이란 제품은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회사들의 제품들과 몇 차례 성능비교시험을 했었는데 그때마다 우수한 차이(2-3배)로 당당히 우승을 차지했다. 그 때문에 가장 침투하기 어려운 금융시장 은행에 납품하게 되었고 주위의 격려와 박수 속에 회사는 승승장구 날개를 달게 되었다. 처음에는 은행 고객들도 우리 회사가 미국 회사의 대리점인 줄 알았다고 했다. 제품 성능이 국내회사가 만들었다고는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할만큼 성능과 기능이 우수했기 때문이다.

삼성SDS와의 악연

2002 년 4월, 국내에서는 최초로 BPR(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이란 사무자동화 프로젝트가 떴다. 그 프로젝트는 우리가 공급하는 제품이 핵심S/W이었다. 성능 좋기로 소문난 터라 삼성SDS와 현대정보기술이 선뜻 우리 제품으로 사업에 참여하고 싶다고 사무실로 찿아 왔다. 그때 나는 정말 이 사업이 이제는 제대로 되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동안의 제품개발 과정에서 있었던 온갖 고단함을 한순간에 씻고 희망에 부풀었다. 내 눈 앞에는 그야말로 고속도로 같은 탄탄대로가 펼쳐져 있는 것만 같았다.

그당시 한빛은행은 우리은행으로 탈바꿈하는 중이었고 좋은 선례가 될 대규모 프로젝트라 회사 임직원 모두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업자 선정방식은 최저가 입찰을 통한 방식이었는데 삼성SDS, LGㆍCNS, 한국IBM, 현대정보기술만이 서류심사를 통과해 입찰에 참여했다.

그런데 삼성SDS는 처음에는 사용자수 제한이 없는 무제한 사용자조건 견적을 요구하더니, 500명 사용조건과, 300명 사용조건의 견적을 요구했고, 현대 또한 똑같이 요구했다. 나는 그 당시에는 우리은행이 입찰에 대한 낙찰 예정가격을 산정하느라 다양한 형태의 가격조회를 하는 것으로 알았다. 그 뒤 삼성SDS는 입찰조건이 300명 사용자 조건이라고 알려 왔고, 300명 사용자조건으로 집중적으로 가격 협의가 이뤄졌다. 적정가격으로는 28억 원을 받아야 했지만 삼성SDS측은 국내 최초의 큰 사업이니 전략적으로 대응해 미래시장을 개척하자고 제안해 왔다. 그래서 4월 20일 입찰 당일 오전 6시까지 밤새 가격을 협의한 끝에 12억3400만 원까지 내려갔다. 가격이 너무 내려갔기 때문에 삼성그룹에서 향후 우리 제품을 30억 원 어치 팔아 주는 조건이었다. 결국 삼성SDS는 입찰에 성공하여 사업을 따내게 되었다.

그러나 삼성SDS는 입찰이 끝난 후 일방적으로 10억4500만 원으로 가격을 맞추라면서 더군다나 5년 A/S를 공짜로 해달라고 했다. 실제로 5년 동안 A/S를 공짜로 해주면 제품가격은 6억~7억 정도밖에 되질 않는다. 세상에 28억 적정가격이 12억3400만 원을 거쳐 10억4500만 원으로 내리더니 마지막에는 6억~7억 원이 되어 버리다니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 더 기가 막히는 것은 300명 사용조건을 무제한 사용자조건으로 바꾸라고 일방적으로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삼성과 나의 갈등과 골은 깊어만 갔고 지긋지긋한 악연이 시작됐다.

중소기업이 투자하기에는 엄청난 투자개발비(그 당시 70억 투자)는 어떻게 보상받으라는 말인지 눈앞이 깜깜했다. 삼성SDS가 일방적으로 저가 수주한 사업을 중소기업이 감당하라는 불공정거래가 시작된 것이다.

가격 때문에 삼성SDS와 줄다리기가 시작되자 우리은행 측에선 공사기간이 정해져 있으니 협상은 시간을 갖고 하고 우선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기술인력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계약서도 없이 가격도 정하지 않은 채 일하게 된 것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삼성의 뒤통수치기

그러던 중 우연찮게 삼성SDS가 우리와 사전 협의도 없이 우리은행과 삼성SDS 양자 간에 체결된 계약품목인 우리 제품 대신 외국 경쟁사의 제품으로 교체하려고 은행 측과 긴밀하게 협의를 했었다는 뒷이야기를 들었다. 그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고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계약도 없이 4개월을 일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인건비도 한푼 못받았고, 고가의 제품은 이미 납품되었고, 더 이상은 계약도 없이 일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삼성SDS측에 양해를 구한 후 어쩔 수 없이 사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한 뒤, 계약을 해주고 일을 시키든지 아니면 포기하겠다는 공문을 보냈다. 그러나 약속기일까지 삼성SDS로부터는 아무런 답도 없었다. 상황은 직원을 철수시킬 수밖에 없는 지경으로 점점 치닫고 있었다. 때마침 조흥은행 사업이 시작되었고 우리 회사 제품이 성능평가시험에서 그 우수성이 입증되면서 조흥은행에는 충분한 가격을 받고 납품할 수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은행에 형편없는 금액으로 납품하기는 더욱 더 곤란하게 되었다.

우리은행에서 직원들이 철수하자 은행측에서는 난리법석이 났고 그제서야 삼성SDS의 강운식 상무가 사무실로 찾아 왔다. 무조건 기술인력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원래 직원철수를 통고할 때는 경쟁사 외산제품으로 교체하라고 권유까지 했었다 .더구나 교체 시까지 필요한 기술지원은 무상으로 한다고 했었는데 아무런 답이 없었던 것이다. 삼성SDS는 다급했는지 우리은행에 저가(6억~7억)로 제품공급을 해주면 삼성계열사에 우리 제품을 16억8000만 원어치 독점 공급해 주겠다는 업무협약서를 들고 왔다. 그의 설득에 나는 어쩔 수없이 다시 삼성 제안을 받아들였다. 향후 시장을 생각하고 또 삼성과의 거래를 위하여 흔쾌히 공사를 마무리하기로 한 것이었다.우리은행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끝나 오픈되면서 주변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삼성계열사인 삼성화재와 삼성생명에 우리제품 대신 경쟁사 외산제품이 삼성SDS를 통해 공급됐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 수가! 나는 또 한번 속은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은행 계약담당 책임자로부터 300명 사용조건이 아닌 무제한 사용조건으로 삼성SDS측과 제품공급 계약을 했다는 엄청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또한번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뒤통수 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엘리트 삼성기업이 정말 이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나 좀 더 확실한 증거자료가 필요했다. 그래서 2002년 입찰관련 은행측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는데, 거기에는 S/W공급조건 또한 무제한 사용조건을 수용한다고 분명히 작성되어 있었다.

결국 입찰에 유리한 가격으로 후려치기 위해 우리를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속인 것이었다. 그래도 실감이 나질 않아 직원들이 녹음기를 휴대해서 은행측 계약담당 부부장을 찾아가 한번 더 계약조건을 확인해 보았다. 그 부부장은 명백히 '무제한 사용자조건' 입찰이었고 그렇게 계약을 체결했음을 확인해주었다. 그는 삼성SDS가 잘못한 거라며, 삼성SDS가 책임져야 한다고 분개하기까지 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었다. 아득하기만 했다.

2004 년 4월 대구은행 사업이 있었다. 그때도 삼성SDS는 우리 제품으로 입찰을 따냈다. 물론 입찰 전에 13억8000만 원을 제시했다. 이제는 안속는다고 우리도 엄청나게 신경을 썼다. 그러나 삼성SDS는 입찰 후 9억 원에 공급해 달라며 일방적으로 가격을 후려쳤다. 그렇게 가격조건으로 또 싸우다 결국 10억 원에 구두 합의했다. 힘없는 소기업이 어쩔 수 없었다. 가격이 합의되니까 이번에는 2002년 9월 2일 맺은 우리은행 업무협약서가 정상적으로 이행되었다는 공문을 요구했다. 세상에 기가 막혀도…. 우리 제품 대신에 경쟁사 외산제품을 공급해 놓고 해도 너무한 요구였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은행에 공급된 제품에 대한 사기판매에 대한 검찰고소 포기각서 또한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울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검찰고소 포기각서는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대구은행에 계약된 우리 제품을 경쟁사 외산제품으로 교체해 버렸다.

더 이상 말이 안 나왔다. 나는 마침내 2004년 8월 23일 삼성SDS를 서울중앙지검에 사기 혐의로 고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기의 증거는 너무나 많았다. 우리은행의 입찰제안서, 우리와 삼성의 계약서, 우리은행 관계자와 기타 관계자들의 녹취록 등등 사기임을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만도 넘치고 넘쳤다.

검찰고소와 막강한 삼성의 연줄

검찰고소 후 초기에는 7급 수사관이 소신을 갖고 굉장히 열심히 파고 들었다. 말로만 듣던 대기업 횡포를 실감한다며 사명감과 소신을 갖고 정말 열심히 수사를 하였다. 그러나 10월에 들어서자 여름휴가 못간 것 가야 된다며 1주일이 지나고, 그 후론 연수를 가게 되었다더니, 나중에는 다리가 아프다 하여 담당수사관이 5급인 수사사무관으로 바뀌게 되었다. 시간은 흘러갔고 마침내 삼성SDS와 우리은행 계약팀 책임자도 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미 우리는 IBM과 현대로부터 입찰조건은 무제한 사용조건이었으며 입찰조건의 변경은 없었다는 진술과 녹취록을 확보해서 검찰에 제출했었다. 현대는 검찰에 출두해 그 사실을 진술서로 작성까지 했다. 그런데도 삼성은 무제한 사용조건을 우리가 우리은행 측과 구두로 협의해서 300명 사용자 조건으로 바꾸었다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는 것이었다.

길고 지리한 검찰 조사를 여기서 일일이 떠올리고도 싶지 않다. 참으로 대한민국 검사들의 실상을 나는 두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을 수 없었다. 2005년 2월 14일 담당검사가 대전지검으로 인사발령 났다고 하더니 이틀 뒤인 2월 16일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리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 이래서 대한민국을 삼성공화국이라고 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도 많은 너무나 뻔한 증거를 내놓았는데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니 어이가 없었다. 하긴 엑스파일의 예에서 보듯 분명히 검사들에게 돈을 갖다 준다는 녹음테이프가 있음에도 수사를 하지 않는 검찰이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2005 년 3월 15일 나는 별로 기대도 없지만 서울고등검찰청에 항고했다. 끝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다. 항고장 접수 후 일주일에 두세번씩 담당 검사실에 전화를 걸어 담당 부장검사님을 만나 뵙고 싶다고 했다. 그때마다 검사님께서 알아서 공정하게 검토하고 있으니 기다리고 있으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다 어느 날 또 전화를 걸었더니 지긋지긋했는지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를 걸고 서울고검으로 갔다. 들어서자마자 담당검사는 "당신 미쳤어! 내가 삼성SDS측 변호사 만나 봤는데 당신 148억 민사소송 냈다면서?" 하며 꾸지람하듯 소리치는 것이었다. 속으로 '난 죄 지은 게 없는데요'라고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148억은 표준소비자가 기준금액이다. 사기 치니까 소비자가 기준 그대로 청구한 것뿐이다. 물론 정상적인 전략적 제휴관계면 60억~70억도 할 수 있지만 민사소송이니까 정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 렇게 담당검사실에서 호통 아닌 호통을 들었던 날은 우연히도 삼성본관 앞 촛불시위에 초대연사로 초청받은 날이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낮에 워낙 서럽게 당해서인지 마이크를 잡은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삼성 이건희 회장의 기업이념인 상생경영ㆍ나눔경영ㆍ윤리경영은 새빨간 가짜라고 치를 떨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날은 민주노동당 의원들도 참석하였는데, 기가 막힌 사연인지라 한숨 내쉬는 게 내 귀에도 들릴 정도였다.예상했던 대로 8월 30일, 서울고검에 항고한 사건도 기각되었다. 나는 또 2005년 9월 16일 대검찰청에 재항고장을 접수했다. 그랬더니 이번엔 마약수사본부에 사건이 배정됐다.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 회사는 마약을 제조하거나 파는 회사가 아니다. 더군다나 삼성SDS와 무슨 마약밀거래를 한 것도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 정신병동에 가둬놓고 재산 빼돌린다는 소설은 본 적이 있지만, 설마 나를 마약사범으로 조작해내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겁이 더럭 났다.

삼성 덕택에 정말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송에도 자주 나가게 된 내 인생이, 생방송 심야토론까지 나간 내 모습이 나는 아직도 실감 나지 않는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흘러 왔고 바뀌게 되었는지, 내가 왜 대한민국에 태어나서 중소기업을 창업했는지 수없이 후회만 든다. 나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일까. 하루종일 삼성과 싸우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착한 아내에게는 한없이 미안하기만 하고 토끼같은 아이들에겐 큰 짐을 주는 것 같아 죽고 싶을 만큼 마음이 미어져 온다.

회사는 이미 다른 사람들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11명의 이사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반란을 일으켜 아예 나를 대표이사 직에서 쫓아내 버린 다음, 직원들도 대부분 흩어져 버렸다. 그러고는 남아 있는 직원 월급도 주지 않고 아예 회사 운영을 하지 않음으로써 그냥 고사시키고 있는 중이다. 그 대신 쫓겨난 내게 선물로 돌아온 것은 회사 빚보증 43억 원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어렵게 어렵게 마련한 내 집은 이제 얼마 후 경매로 넘어간다. 이제 나는 완벽하게 길거리의 노숙인 대열에 서 있는 셈이다. 과연 누가 나를 이렇게 철저하게 짓밟아 놓은 것인가.

이 땅에는 나같은 중소기업인들이 한도 끝도 없이 많다. 나는, 이들 중소기업인들은 도대체 어찌 하면 좋단 말인가.













조성구/전 얼라이언스시스템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