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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치기

제국주의

알 수 없는 사용자 2008. 2. 27. 04:09

출처 : http://www.aspire7.net/english/reference-1-2-a.html

A. 제국주의의 의미와 역사

1. 제국주의의 의미

제국주의는 지난 4~5세기 동안 세계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요소입니다.
제국주의로 인해 아시아, 아프리카, 인도, 남 아메리카 등이 유럽의 식민화가 되었고, 세계 각국의 전쟁을 유발했으며, 유럽에서 두차례의 세계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문명이 황폐해지고,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으며, 도덕과 윤리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자신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우월한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소를 이용하여 약소국의 토지, 노동력, 원자재, 농산물, 시장을 수탈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치하에서 농산물 수탈을 경험한 바 있고, 2차대전 당시의 독일은 점령지에서 경제적 수탈을 자행했고, 포로 수용소에서 강제 노역을 통해 노동력 착취를 하였습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가 등장하기 전인 고대로부터 있어 왔는데 주로 피정복민을 노예화하고, 세금이나 공물 등을 바치게 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했습니다.
유럽에서는 16세기부터 화석연료를 사용하고,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량의 원료와 노동력,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약소국을 선점하려는 제국주의 경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이후에는 대기업의 자본축적이 이루어지면서 공산품뿐만 아니라 기계, 기술, 투자, 차관의 형태로 자본수출이 이루어졌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기 위한 생산기지 이동이 일어났습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에 팽창주의적인 동인을 가지고 있는데, 자국에서 투자한만큼 기대한 이익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이익을 좇아 자본과 기술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전 세계로 옮겨다닙니다.

자본주의는 또한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기 때문에 저렴한 생산기지와 넓은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은 정부에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정책을 결정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게됩니다.
그 결과 타국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위한 전쟁(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고, 적국(중국)과도 수교·협력을 맺게 되며, 수 많은 비밀 공작이 수행됩니다.

현재 400개의 대기업들이 비 공산권의 세계 자본의 80%를 소유하고 있고, 제3세계로 투자를 확대하고 있습니다.
서방 기업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천연자원의 75%를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고, 후진국의 낮은 임금과 노동과 환경에 대한 낮은 규제 덕분에 많은 이윤을 남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국 내 이익은 줄어들고 타국에서의 이익은 늘어나기 때문에 국가를 초월한 다국적 기업이 등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대기업들의 이익을 늘려 주었지만 상대적으로 가난한 국가의 빈곤과 정치적 혼란을 증대시켰습니다.
제 3세계 국가들은 원래 대부분 풍부한 자원과 농산물로 별 어려움 없이 지냈었은데 서방 기업의 수탈이 진행되면서 국내 산업은 쇠퇴하였고, 실업자는 늘어났으며, 복지혜택은 줄어들고, 기아와 가난은 증대되었습니다.
각 국의 자급자족 시스템과 전통산업은 무너지고, 대기업의 하청공장 내지는 집단농장으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제 3세계의 부(富)는 천연자원의 수탈, 차관의 이자를 갚기 위한 세금, 외국인 소유 부동산에 대한 임대료, 과중한 로얄티, 고가의 공산품 강매 등의 방법으로 외국 대기업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식민화된 국가는 국민을 위한 정책을 세우지 못하게 방해 받고, 외국 대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을 세우게 되며, 빚에 허덕이고, 스스로 살아 나갈 수 있는 산업의 발전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정치적으로도 강대국에 충성하는 포악한 군사 독재 정권에 시달리거나, 공기업을 외국에 팔아 먹는 부패한 정권으로 인해 사회복지는 줄어들고, 빈부격차는 심화됩니다.
현재 제국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초월해 대기업 연합의 이익을 위해 각종 무역협정과 조약이 체결되고, 국민의 이익보다 기업의 이익이 우선되는 각종 정책이 수립되는 단계에 이르고 있습니다.

2.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

제국주의는 강대국이 상대적 힘의 우월을 이용하여 약소국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다방면에 걸쳐서 지배하려는 침략주의적 경향입니다.
제국주의의 어원이 된 임페리움(imperium)은 원래 로마 공화정 시대의 법에 의한 명령을 의미하는 일반명사였지만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지중해 패권을 차지한 후에는 로마에 의한 타민족 지배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임페리움'이 근대에 다시 쓰여진 동기는 영국 신문 '데일리 뉴스'가 1870년 6월 8일자 신문에서 나폴레올 3세의 전제적 제2제정을 제국주의라 지칭하면서부터였습니다.
20세기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의 성격이 자유경쟁단계의 산업자본에서 독점·금융자본으로 변화함으로써 '제국주의'는 선진자본주의국가들이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식민지를 획득하기 위해 벌인 대립과 분쟁을 가르키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중엽에 근대자본주의 체제를 확립했던 영국은 세계 전역에 걸쳐 통상권을 지배하고, 군사력을 동원하여 영토를 병합해 갔습니다.
그리하여 1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자국 영토의 100배에 달하는 55개의 식민지를 경영하여 번영을 누렸지만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독일·프랑스·미국 등의 도전을 받아 그 지위가 흔들렸습니다.

세계는 자본주의 제국간의 경쟁시대를 맞이했고, 특히 1873년부터 23년동안 유럽을 강타한 경제 대불황은 경쟁을 더욱 가속시켰습니다.
이에 영국은 그동안의 자유무역정책을 보호무역정책으로 전환하고, 광대한 식민지를 긴밀하게 조직하였습니다.
예를 들면 수에즈운하 매수, 인도에 대한 지배 강화, 보호관세정책, 트란스발·오렌지 자유국과의 보어전쟁 등입니다.

장기적인 경제공황은 영국 이외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의 원료공급지와 소비시장으로서의 식민지 획득이라는 대외정책과 독점적 기업결합이라는 대내정책을 수행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자본주의 국가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1880년부터 1914년까지 아프리카를 분할하는 과정에서 열강들의 외교적 충돌과 군사적 대립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발생했습니다.

영국의 아프라카 종단정책과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정책이 정면으로 충돌한 파쇼다 사건과, 독일과 프랑스가 충돌한 모르코 문제가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1차 세계대전도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선진자본주의국가와 그렇지 못한 후발자본주의국가 간의 식민지 분할을 둘러 싸고 벌어진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국가 간의 경쟁은 필연적으로 카르텔이나 트러스트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을 출현하게 하였고, 독점자본에 의한 과잉생산은 소비시장으로서뿐만 아니라 자본 투자지로서의 식민지를 더욱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열강들이 충돌하게 된 배경에는 자본주의 국가들이 독점자본주의로 변모했기 때문이며, 식민지 지배를 둘러싸고 자본주의국가들이 각축을 벌렸던 1870년부터 1차세계대전까지의 시기를 '고전적 제국주의시대'라고 합니다.

a) 고전적 제국주의 비판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국가를 착취하면서도 식민지 경영이 식민지의 사회·경제적 발전에 도움을 준다고 선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식민 이전보다 더 어려운 경제적 상태로 가난과 기아를 유발했고,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습니다.
벨기에령 콩고에서는 고무 채집권을 가진 회사가 채집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주민의 팔다리를 자른 사건도 있었습니다.
영국은 3년간 남 아프리카의 보어인과 싸우면서 민간인까지 무참히 희생시키는 전략으로 국제여론의 지탄을 받았습니다.

보어전쟁을 계기로 사람들은 제국주의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J.A. 홉슨은 남아프리카를 방문해 보어전쟁의 배후에 금융업자들이 있다는 심증을 굳히고, 귀국하여 제국주의를 자유주의적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비판한 '제국주의론'(1902)을 썼습니다.
그는 저서에서 제국주의가 성립된 경제적 요인은 국내상품의 과잉생산과 산업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 의한 무력적 대외정책에 있다고 보고, 평등한 소득분배와 소비의 증대를 통해 과잉생산 및 과잉자본을 해소하면 제국주의 정책이 불필요할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R. 힐퍼딩은 '금융자본론'(1910)을 통하여 산업자본으로 전환되는 은행자본을 금융자본이라고 규정하고, 금융자본에 의한 산업과 카르텔·트러스트와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을 자본주의의 새로운 특징이라고 논함으로써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이 대외적으로 취하는 정책으로 이해하였습니다.

독일의 K.J. 카우츠키는 힐퍼팅의 이론을 발전시켜 초(超)제국주의론을 내세웠습니다.
초제국주의론에선 제국주의를 금융자본으로 독점이윤을 획득하려는 선진공업국가의 후진농업지역에 대한 정책체계로 보고, 자본가들이 경쟁의 결과가 비참한 전쟁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국제적 금융자본의 전 세계적 트러스트를 형성시켜야 국가 간의 경쟁과 전쟁이 사라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세계정부 수립과 유사)

이에 대해 독일의 R. 룩셈부르크는 '자본축적론'(1913)을 통해 자본주의의 자본축적은 비자본주의 지역의 수탈을 매개로 할 수밖에 없고, 그 결과 보호관세와 군국주의 같은 제국주의 경향과 비자본주의 지역의 축소화가 초래되어 자본주의는 결국 종말을 고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b) 레닌의 제국주의론

제국주의에 대해 가장 포괄적이고 역사적인 정의를 내린 사람은 레닌입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1916년) 일명 '제국주의론'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독점단계로 규정하고 그 특징을 5가지로 기술하였습니다.

자유경쟁자본주의의 독점자본주의로의 이행: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시장경쟁을 통하여 생산과 자본이 점차 소수의 대기업에 집중되며, 생산과 자본의 고도 집중은 카르텔·트러스트·신디케이트와 같은 독점적 기업결합으로 발전한다. 이는 다시 시장과 가격의 지배를 통해 독점적 고이윤을 생산함으로써 한층 더 발전된 소수의 기업결합체로 발전한다.

지배적 자본형태로서의 금융자본의 존재: 기업독점은 자금융자와 주식발행 등을 통하여 거대산업과 거대은행의 융합을 가능하게 하는데 여기서 금융자본이 형성된다. 금융자본은 생산과 자본을 지배하고 독점이윤을 취득함으로써 경제 전반에 걸쳐 금융과두제(金融寡頭制)를 가능하게 한다.

후진국에 대한 자본수출: 독점과 금융자본에 의해 형성되는 과잉자본은 높은 이윤과 유리한 투자기회를 찾아 후진지역으로 수출된다. 배타적이고 특권적인 거래조건(특혜적 통상조약, 철도와 항만의 배타적 점유, 유리한 조건의 증권발행 등)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수출은 금융자본의 막대한 이윤의 원천이다.

시계시장의 분할·지배: 전기산업·석유산업·국제금융자본 등은 카르텔·트러스트·신디케이트 등을 통해 세계시장을 분할·재배한다.

열강에 의한 식민지 분할의 완료: 세계시장의 재분할은 열강의 식민지 지배를 위한 경제적 기초가 된다.

이와 같은 제국주의의 발전과정에 따라 1914년에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독일, 미국, 일본 등 6대열강에 의해 아프리카의 90%와 남태평양 군도의 대부분이 식민지로 전락하였습니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한 영토확장이 끝나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다른 나라의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무력충돌과 세계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는 금융자본의 독점적 지배와 정치적 장악 위에 성립되는데, 오히려 자본주의의 쇠퇴를 가져옵니다.
제국주의는 소수 금융재벌에게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지만 민중의 빈곤화와 사회불만을 증대시킵니다.
레닌은 자본주의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천재적인 비판을 가했지만 자신이 만든 공산주의는 공산당 1당독재를 허용해 정치권력에게만 힘을 실어줘 국민에 대한 대규모 학살과 핍박이 가능하게 했습니다.

c) 현대의 '신 제국주의' 비판

2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식민지가 정치적으로 독립하고 나서는 전통적인 제국주의와는 다른 양상이 벌어졌습니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 이상 식민지 수탈이 아닌 현대적 경제체제로 성장하였습니다.
한 때 미국을 위시한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을 위시한 공산주의 국가 간의 정치적·군사적 대립인 냉전이 진행되었습니다.
독립을 쟁취한 과거 식민지 국가는 UN 가입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적 다수파로 등장하여 발언권을 증대시켰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선진국의 금융자본이 투자, 채무, 무역관계 등을 통해 후진국을 경제적으로 예속시키고 수탈한다는 '신 제국주의' 이론이 등장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신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에서는 친미정권 지원, 정치공작, 군사적 개입 등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금융자본은 국가의 이익을 초월하여 선진국과 후진국 모두에게 피해를 주며 성장하고 군림하고 있습니다. 

3. 고전적 제국주의의 역사

19세기 들어서 세계는 독일, 이탈리아, 미국, 일본, 러시아의 민족적 통일을 이루었고, 개인의 자유보다 국가의 이익을 중시하는 국가주의가 독점 자본주의와 결합함으로써 대외팽창적인 제국주의를 낳게 되었습니다.
고전적 제국주의는 산업혁명 이후 국내에 축적된 잉여자본의 투자를 위해 독점금융자본가가 근대국가의 정치를 장악하고 후진국을 군사적으로 침략하여 값싼 원료와 노동력, 넓은 시장을 획득하기 위한 경쟁입니다.

자본주의와 산업주의가 고도화되면 자유경쟁이 심화되어 대자본이 중소자본을 흡수하고, 트러스트(기업협동), 카르텔(기업연합)이 등장합니다.
독점자본의 최고형태로는 재벌 즉 콘체른(Konzern, Holding Company)으로 원자재로부터 완제품 생산, 유통, 금융까지 동일자본에 의한 전체산업의 지배가 가능해집니다.

독점자본이 은행을 장악함으로써 의한 자본의 집중화는 절정에 달하고, 독점자본가는 정치인을 매수하고 조종해 의회정치에 개입하며, 국가의 정치, 경제, 군사, 외교 정책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라테나우(Walter Rathenau)는 1909년에 "서로 잘 알고 있는 300명의 인간이 전 유럽대륙의 경제적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유럽열강은 자본의 수출과 식민지 분할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민족적 자립을 부정하고, 전통사회의 해체과정에서 반동세력을 이용했기 때문에 각 지역의 내부적 분쟁을 격화시키게 되었습니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운동과 전통가치, 사회주의적 경향 등을 억압하며, 자본주의 지배를 전 세계적인 규모로 실현한 정치적 지배체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a)
제국주의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1)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진출

   ① 리빙스턴과 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소개되자, 유럽 열강이 앞을 다투어 아프리카로 진출하였다.

   ② 제국주의 열강의 분할로 라이베리아와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전 지역이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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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럽 열강의 아프리카 분할

   ① 영국의 종단 정책 : 수에즈 운하를 매수하고, 남쪽의 케이프타운에서 북쪽의 카이로를 연결하는 종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② 프랑스의 횡단 정책 : 알제리를 거점으로 삼고, 동쪽의 마다가스카르 섬으로 진출하여, 아프리카를 동서로 연결하는 횡단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파쇼다 사건(1898) : 영국의 종단 정책과 프랑스의 횡단 정책은 수단의 파쇼다에서 충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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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유럽 열강의 아시아·태평양 분할
(1) 유럽 열강의 아시아 분할

   ① 영국 : 인도와 동남 아시아의 미얀마, 말레이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② 프랑스 : 인도에서 밀려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 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

   ③ 네덜란드 :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고 향료 무역을 독점하였다.

(2) 유럽 열강의 태평양 분할

   ① 태평양의 여러 섬들도 유럽 열강의 식민지로 분할되었다.

   ② 미국의 태평양 분할 : 미국은 에스파냐와 싸워 필리핀을 얻었고, 1898년에는 하와이 제도를 병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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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제국주의 유럽 열강의 대립

(1) 삼국 동맹

① 배경 : 통일 후 제국주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선 독일은 프랑스를 고립시키기 위해 삼국동맹을 맺었다.

② 동맹국 : 독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가 가담하였다.

(2) 삼국 협상

① 배경 : 독일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와 영국이 러시아를 끌어들여 삼국 협상을 맺었다.

② 협상국 : 프랑스는 러시아, 영국과 함께 삼국 협상을 맺음으로써 독일의 팽창 정책에 대응하였다.

(3) 유럽 열강의 대립 : 유럽 열강은 삼국 동맹과 삼국 협상이라는 양대 세력으로 나뉘어 팽팽히 맞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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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1) 발칸 반도

   ① 발칸 반도 : 독일의 범게르만주의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었다.

   ②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 : 슬라브 족이 많이 거주하던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가 합병하자, 오래 전부터 이 곳을 탐내던 세르비아가 분개하였다.

(2)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합병을 계기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대립이 더욱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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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신 제국주의

제국을 경영하는 것이 항상 강대국에게 이익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영제국은 제국을 보호하려다가 2차례의 세계전쟁을 치루었고, 이로 인해 국력이 약해져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식민지를 억압하고 경영하는데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이 큰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직접적으로 지배하는 것보다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경제적 효용을 얻는 것이 비용이 적게들어 더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채택된 전략이 '신 제국주의'로 50년 전 미국이 쿠바에서 가장 먼저 실시히였는데, 정치적 독립을 인정해 주는 대신 어용정부를 통해 경제적 수탈을 하였습니다.

1946년 필리핀이 독립되었을 때도 미국인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법에 따라 필리핀의 천연자원 개발과 공공 시설 운영에 대해 필리핀인과 동등한 권리를 부여 받았습니다.
자유무역 협정으로 인해 필리핀인들은 자국 산업을 육성할 기회를 잃어 버렸고, 덤핑으로 들어 온 미국 상품은 필리핀 산업을 붕괴시켰습니다.

금융거래와 대부는 외국 기업에 장악되었고, 필리핀의 대 달러 환율은 2:1로 고정되었으며, 미군은 주요 토지와 해군기지에 대한 조차를 승인받았습니다.
이로써 미국은 식민지에 대한 행정적 지배에 대한 부담을 피하면서도 경제적 군사적 잇권을 취했습니다.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마르코스 대통령의 부패한 독재 정권을 지원하였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생산력을 잃지 않은 유일한 강대국인 미국은 대기업을 위한 세계 자본주의의 보호자가 되어 각국의 민중을 위한 사회주의적 또는 민족주의적인 운동을 저지하는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다국적 기업이 전세계에 투자한 자본을 군사적으로 보호하였고, 제 3세계의 민주화를 방해했으며, 현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마음대로 무력을 휘두르는 초강대 제국이 되었습니다.

* 신 제국주의의 유형과 특징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a) 불평등 무역 관계

제 3세계의 경제는 주로 노동 집약적인 공산품이나 농산물의 수출에 의존하는데, 이를 수입해 줄 강대국은 많지 않으므로 자연히 불평등한 무역관계를 성립하게 됩니다.
가난한 나라의 수출품은 수입 제재를 당하거나 고율의 관세가 부과되고, 강대국의 수출품은 제한 없이 낮은 세율로 수입되게 됩니다.

만약 약소국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무역제재를 가하게 되는데 피해는 당연히 약소국이 더 많이 입게 됩니다.
약소국은 약소국끼리의 경쟁과 강대국의 압력으로 인해 수출품에 대한 정당한 가격을 받지 못합니다.
그리고 강대국의 값 비싼 공산품, 기계, 부품 등을 수입하기 위해 그들의 천연자원과 농산물을 헐값에 내다 팔게 됩니다.

b) 산업화에 대한 방해

약소국은 천연자원을 강대국에게 수출할 때는 면세 혜택을 받지만, 공산품을 수출할 때는 높은 세율을 적용 받습니다.
여기에 선진국에서 기술이전과 자본투자를 꺼림으로써 약소국의 산업 발전은 지연됩니다.
선진 기업들은 후진국에서 우수한 재정, 고도의 마케팅, 높은 상표 인지도, 높은 품질, 잦은 광고 등을 통해 토착 기업이 성장하는 것을 막고 산업화를 지연시킵니다.

제 3세계 국가의 제조업 분야의 자산 가운데 절반 이상을 외국 기업이 소유하고 있고, 주식 소유를 통해 경영의 주도권을 갖고 있습니다.
기업 간 합병과 투자 유치를 통해 점점 더 많은 토착 기업이 외국인 소유로 넘어가고, 외국인 소유의 기업은 기술개발을 외면한 채 단순한 하청 공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c) 해외 원조

후진국은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 중 일부를 선진국의 원조에 의존하는데 이 자금은 강력한 통제 수단이 됩니다.
미국의 원조를 받은 국가는 미국 제품을 고가에 구입하고, 미국 상선을 이용하도록 강요 받습니다.
해외 원조는 후진국 국민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고, 소수 정치인과 재벌에게만 주어짐으로써 빈부 격차를 가속합니다.
만약 선진국의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해외 원조는 줄어들므로 정치인은 외국 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세웁게 됩니다.

d) 채무를 통한 지배

제 3세계는 산업화에 필요한 자금을 대부분 서방 은행이나 IMF, 세계은행 등의 차관에 의지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는 빚의 이자도 갚기 힘들어 빚을 갚기 위해 고율의 단기 자금을 차용하게 되고,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됩니다.
1990년에 제 3세계의 채무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지경인 2조달러에 달했습니다.

채무 국가는 수출액의 대부분을 빚을 갚는데 사용하므로 국민 경제는 점점 더 어려워지게 됩니다.
만약 채무 불이행이라도 선언하면 가혹한 무역제재와 금융제재를 받게 됩니다.
자본 유출로 외환위기가 닥치면 긴급 자금을 수혈하기 위해 IMF와 협상을 하게 되는데, 공기업 민영화, 노동법 완화, 환경법 완화, 복지 혜택 축소, 시장 개방, 각종 규제 철폐 등의 조건을 받아 들이게 되 경제는 더욱 어려워지게 됩니다.

외국 기업은 경제위기로 폭락한 부동산과 기업을 헐값에 인수하게 되고, 각종 유리한 조건과 세금 혜택을 받으며, 상대적으로 토착 기업에게 주어지던 혜택과 보조금은 줄어듭니다.
이와 같이 인위적인 외환 위기는 다국적 기업에게 많은 이익을 안겨다 주며, 후진국의 산업화와 지속적인 발전을 막아 1석2조의 효과를 얻게 됩니다.

금 본위제가 폐지된 이후 제공 받는 차관은 근거 없이 찍어낸 가짜돈이며, 이자를 갚아 나가는 것은 그 나라의 국부(國富)를 유출하는 것으로 국민을 가난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소입니다.
국부(國富)는 한 나라가 생산하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이고, 화폐를 매개체로 순환하며, 부의 근원은 노동력, 지하자원, 토지, 사회 인프라, 교육, 과학 기술 등입니다.

e) 불균형한 개발

약소국의 균형 잡힌 경제 개발은 왜곡되고, 다국적 기업 투자자들에게 유리한 몇몇 분야에만 집중됩니다.
다국적 기업은 약소국에서 값 싼 노동력으로 채취한 원료나 가공한 상품을 선진국에 비싼 값에 판매해 막대한 이익을 거둡니다.
국가에서는 이들 주력 산업에게만 각종 특혜와 지원을 줌으로써 다른 산업은 몰락하게 됩니다.

f) 문화적 침투

세계 각국 사람들은 영화와 팝송, 음식 의류 등 미국의 보편적이고 실용적이며 쾌락 지향적인 문화에 익숙해져 미국의 지배를 거부감 없이 받아 들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미국에 의해 통제되는 언론과 통신사와 방송에 의해 미국적인 관점과 가치관에 의해 보도된 각종 뉴스를 접하게 됩니다.

미국 CIA는 세계 전역에 200 종류가 넘는 신문, 잡지, 통신업체, 출판사를 보유하고 있으며, 각 국의 친미 언론인을 관리 교육하고 지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각종 재단은 미국의 이데올로기를 담은 각종 자료를 제공하며 제 3세계 대학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약소국의 국민은 당연히 교육과 언론에서 미국적인 가치를 교육 받으며, 친미적 성향을 띠게 됩니다.

g) 정치적 침투

워싱턴은 세계 각국의 보수적이고 친미적인 정당들에게 재정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은 반 사회주의적 정책을 가지고, 서방 자본의 침투에 우호적이어야 합니다.
CIA는 많은 국가의 주요 정치 조직에 침투하였고, 정보원을 두고 있습니다.
CIA는 각 국에서 감청을 실시하고 있고, 친미 정부를 위한 각종 정치공작에도 협력하여 왔습니다.

냉전 이후에도 미국은 세계 각국에 군사기지를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미국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레바논, 도미니키 공화국, 그라나다, 파나마 등에서 군사적으로 개입한 이유는 각 국이 미국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평등적이고 사회주의적인 정부를 세움으로써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해를 끼치는 현상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미국은 제 3세계의 친미 무장세력, 정보부대, 헌병대, 테러단에 군사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음으로써 반동적 요소를 억압하고 반미 인사에 테러를 가해 왔습니다.
CIA로부터 자금지원과 무기지원을 받고 군사 기술을 전수 받은 나라로는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이란, 칠레, 브라질, 앙골라, 모잠비크, 니카라과, 아프카니스탄 등입니다.

h) 신 제국주의로 인한 피해

신 제국주의로 인해 제 3세계에서 개발된 것은 치명적이고 착취적인 형태의 의존적 자본주의입니다.
개발도상국에서의 경제적 여건은 다국적 기업의 투자 증가와 더불어 급속히 악화되었습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저임금과 실업난에 고통 받으며, 적절한 의료 혜택과 생활 보장 없이 살아갑니다.
그래서 가난과 가아에 허덕이며, 가정은 파괴되고, 실업 수당도 없이 높은 인플레이션에 시달리게 됩니다.

미국 국민도 신 제국주의의 피해자인데 높은 국방비(2004년 480조원)를 유지하기 위해 높은 세금을 부담해야 하고, 국내의 제조 업체가 해외의 값 싼 노동 시장으로 옮겨가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미국 국내에서도 기업의 편의를 위한 정책이 우선됨으로써 노동법과 환경법이 약화되 쉽게 실직자가 되고, 기본적인 의료혜택과 사회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신 제국주의는 선진국과 후진국의 국민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있으며, 오직 다국적 기업만이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미국의 제국주의는 냉전시대의 구 소련보다 악날한데, 냉전시대 소련은 동유럽의 연방국가의 땅이나 공장이나 유전을 소유하지 않았고, 오히려 많은 물자와 에너지를 원조해 줘 사회복지 체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B. 강대국의 흥망

역사적으로 수 많은 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는데, 강대국을 뒷받침하는 가장 큰 요소는 군사력입니다.
강한 군사력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는 경제력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과도한 국방비를 투입하다 보면 그에 비례해 경제가 희생되고, 결국 쇠퇴와 멸망의 길을 가게 됩니다.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이 과도한 군사력 경쟁을 벌였고, 소련은 이미 몰락했으며, 미국 또한 몰락하는 중입니다.

역사학자이자 미국 예일대 교수인 폴 케네디 교수는 5년동안 전 세계의 역사, 정치, 경제, 군사 행태를 분석하고 경제력과 군사력 간의 밀접한 관계를 규명함으로써 강대국들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찾아 내었습니다.
케네디 교수는 강대국들이 전성기에 군비경쟁으로 힘에 부치는 과도한 군사력을 유지하다 국력이 쇠퇴하였고, 적정한 군사력을 유지해 경제성장에 치중한 국가는 새로운 강국으로 부상했다고 주장합니다.

1,2차 대전 중에 전쟁으로 막대한 국방비를 소모하며 탈진한 유럽은 몰락하였고, 전쟁물자를 대며 피해를 입지 않고 경제성장을 한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냉전시대 소련과 과도한 군비경쟁과 핵무기 경쟁을 벌였는데 이로 인해 경제가 쇠퇴하였고, 구 소련은 몰락해 소련 연방이 해체되었습니다.

이에 반해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은 국방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고, 경제성장에만 전념한 결과 눈 부신 발전을 이루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은 경제력이 쇠퇴하고 제조업이 기울은 상태에서 엄청난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군사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과도한 국방비(2004년 480조)를 쏟아 붓고 있기 때문에 몰락하기 이전에 세계정복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1. 산업 혁명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시대 (A.D. 1815~1885)

유럽에서 중세 이후 산업혁명 이전까지 유럽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각국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17세기에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한 합스부르크 왕국이 권세를 쥐었고, 18세기에는 나폴레옹이 주도한 프랑스가 유럽의 패권을 쥐었습니다.
프랑스가 러시아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부터는 강한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이 유럽의 패권을 쥐기 시작했습니다.

18세기까지는 유럽에서 중상주의적인 정책으로 국가 간의 충돌이 잦았지만 19세기 들어서면서 자유무역과 국제적 화합이 강조되었습니다.
19세기에 영국에서는 제조업이 발달하면서 많은 원료와 큰 시장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기관총, 신 대포, 증기기관, 무장 군함을 갖추게 된 영국은 해외로 진출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

산업혁명은 열을 동력으로 전환시키는 기계를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1820년의 동력직기는 베틀을 이용하는 직공에 비해 20배나 많은 일을 했고, 동력에 의해 운전되는 뮬(mule) 정방기는 물레보다 200배나 많은 일을 했습니다.
철도 기관차 1대는 수백마리의 말이 운반하는 짐을 더 빠른 속도로 운반하였습니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인구도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유럽의 인구는 1750년 1억 4천만명에서 1850년 2억 6600만명으로 증가했습니다.
영국의 인구는 1801년 1050만명에서 1911년 4180만명으로 증사하였고, 19세기 동안 국민생산은 14배나 증가했습니다.
이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에서 공업 중심의 도시사회로 변모하였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영국은 방적의 기계화로 생산성이 몇배나 증가하였고, 인도나 중국은 공업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랭커셔 직물공장에서 나오는 값싸고 질 좋은 제품들은 인도와 중국에서 '역 산업화'(deindustrialize)를 초래하였습니다.
전통 면 생산국이었던 인도는 영국에서 수입된 엄청난 양의 면제품 때문에 전통적인 국내 생산자들을 몰락시켜 오히려 산업을 쇠퇴시켰습니다.

1860년경 영국은 세계 철강생산의 53%, 석탄과 갈탄 생산의 50%를 차지했으며, 세계 원면 생산량의 거의 절반을 소비했습니다.
영국은 세계 제품무역의 2/5를 차지했고, 세계 상선의 1/3이 영국 국적선이었으며, 근대산업의 세계 잠재력의 45%를 차지했습니다.

경제적 우위와 함께 군사적 우위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지배와 통치를 더 쉽게 하였습니다.
사격속도가 빠른 후장식 소총, 개틀링(Gatling) 기관총과 맥심(Maxim) 기관총, 경형 대포, 철갑 군함 등은 재래식 무기로 무장한 후진국의 군대와 원주민들을 가볍게 제압하였습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영국 군대는 인도와 중동, 중국 등에서 전통 왕조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1860년대에 영국의 국민총생산은 10억 파운드에 달했으나, 국방비는 국민 총생산의 2~3%를 소비하는데 그쳤고, 중상주의적인 보호무역 정책보다는 자유무역조치를 취했으며, 이로 인해 영국은 번영을 구가했습니다.
영국은 1815년과 1865년 사이 연평균 10만 평방마일 꼴로 팽창했고, 싱가포르, 아덴, 포클랜드 제도, 홍콩, 라고스 등을 전략적·상업적 목적에 따라 취득하였습니다.

영국은 막대한 양의 원료와 식량을 수입해 또한 막대한 양의 직물과 철강 제품을 수출하는 국가가 되었고, 이렇게 축적된 자본은 해외에 투자되어 또한 큰 소득을 올려 주었습니다.
영국에서는 또한 금본위제를 바탕으로한 금융산업이 발달해 쉽게 자본을 조달할 수 있었고, 런던에서 발행한 어음을 바탕으로 한 국제적인 환·지불 메카니즘이 발달하여 산업의 증진을 도왔습니다.

2.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립 (1885~1914)

19세기 말에는 영국에 이어 프랑스와 독일, 미국, 러시아도 산업화를 이루었고, 해외 식민지를 놓고 대립을 벌였습니다.
경쟁은 차츰 치열해졌고, 중상주의적 보호무역정책이 다시 도입되었으며, 강대국 간의 군사적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유럽의 중심부에 있으면서 통일을 이룬 독일의 팽창은 프랑스나 러시아 같은 주변국들을 긴장시켰습니다.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아시아에서 입지를 강화했습니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의 충돌이 잦았는데 1885년에는 콩고를 놓고 싸움을 벌였고, 1890년대에는 서아프리카에서 전쟁을 벌였으며, 1898년에는 아프리카 파쇼다에서 대립했습니다.
프랑스는 19세기 말에 적극적인 제국주의 정책을 펴서 영국 다음 가는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세네갈의 다카르나 베트남의 사이공 등에 군대를 배치하였습니다.

영국은 1900년에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루었는데, 1200만평방마일의 땅과 세계인구의 1/4을 지배하였습니다.
영국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보유했고, 전 세계에 해군기지와 전신중계송망과 해저케이블을 확보했습니다.
영국은 세계 최대의 해운국이자 무역국이었고, 런던은 세계 금융과 보험과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차츰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주변국들과 경쟁을 벌여야 했습니다.

영국의 전통산업인 석탄, 직물, 철강 산업의 세계적인 비중은 점차 줄어들었고, 화학, 기계공구, 전기제품 등의 산업에서 선두 지위를 뺏기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수출품은 각국의 높은 관세와 보호무역으로 인해 유리한 지위를 잃어 갔고, 영국 국내에는 보다 많은 수입품이 밀려들어 왔습니다.

19세기 말 영국의 생산성 저이브 경쟁력 약화는 빈약한 투자, 생산시설의 낙후, 국민성, 교육제도 등에 기인합니다.
1880년 영국은 세계 제조업 생산량의 22.9%를 차지했지만 1913년 13.6%로 줄어들었고, 세계무역 비중은 1880년 23.2%에서 1912년 14.1%로 떨어졌습니다.
산업력에 있어서 미국과 독일이 영국을 앞질렀는데, 이는 다른 나라가 영국보다 빠른 속도로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에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내고 '비옥한 농토', '막대한 원료', '풍부한 자원', '근대 기술의 발전', '철도 건설', '외국 투자자본의 유입' 등을 힘입어 큰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미국은 산업과 농업은 능률과 규모를 겸비하였고, 1914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을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은 남북전쟁 이전에는 면화나 금 등 원료를 수출하고 완제품을 수입했으나, 남북전쟁 이후에는 산업이 발달하여 농기계, 철강제품, 기계공구, 전기장비 등 공산품을 수출하였습니다.
또한 수송 혁명에 힘입어 수송단가가 낮아짐으로 옥수수, 소맥, 밀가루 등 농산물과 축산물이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되기 시작하였습니다.

3. 1차 세계대전 - 제국주의 열강들의 총력전 (1914~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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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세계 대전은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1918년 11월 11일 독일의 항복으로 끝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의 협상국(연합국)과,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이 양 진영의 중심이 되어 싸운 전쟁으로서, 그 배경은 1900년경의 '제국주의' 개막의 시기부터 고찰되어야 할 것입니다.

a) 제국주의 열강의 세계분할

제1차 세계대전은 20세기 초엽 인류가 경험한 최초의 대규모적인 세계전쟁이었는데, 그 발발의 배경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나타난 세계 제국주의의 성립이 있었다. 이 시기에 유럽 제국과 미합중국, 약간 뒤늦게 일본 등에서는 자본주의 경제가 독점단계로 들어가, 각국은 대형화한 경제력의 배출구(판로)를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이들 국가는 해외에서 식민지나 세력권을 넓히기 위한 격렬한 경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세계는 제국주의 열강에 의하여 거의 분할되었으며, 이제는 그 재분할이 열강의 주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의 쿠바나 필리핀을 둘러싼 미국-스페인전쟁이나,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Boer War) 후, 20세기에 들어서 제국주의 열강의 재분할 경쟁의 새로운 초점이 된 것은 ‘아시아의 병든 대국’인 중국과 투르크(터키)였다. 따라서 중국 동북(만주)과 한반도의 지배를 놓고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 제국주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다.

러 ·일전쟁의 배후에는 각각 영국 ·미국과 프랑스 ·독일이 있으며, 1905년까지 제국주의의 국제 대립의 중심은 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영국 간의 항쟁에 있었다. 그러나 러 ·일전쟁 후 러시아는 후퇴하고, 다시 그 진로를 발칸 ·중근동으로 향했기 때문에, 이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까지 제국주의 열강의 국제 대립의 무대는 종래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지배영역이었던 발칸 ·근동지역으로 옮겨졌으며, 그 곳에서 대립의 주역이 된 것은 영국과 신흥 독일이었다.

b) 삼국협상과 삼국동맹

러 ·일전쟁 후의 세계정세의 새로운 전개는 이미 전쟁 중인 1904년, 영국 ·프랑스협상 성립에 의하여 시작되고 있었다. 이 2대 식민제국은 세계 각지에서의 양국의 대립을 해소하고, 특히 이집트와 모로코를 서로 상대국의 보호령으로 인정하여 협정을 맺었다. 이어 영국과 러시아도 러 ·일전쟁 후 중국에서의 대립이 완화됨으로써 접근하기 시작하여, 독일의 근동진출과 이란에서의 입헌혁명이 직접적 계기가 되어, 양국은 이란에서 서로의 세력권을 확인하는 등, 1907년 영국-러시아협상을 성립시켰다.

이렇게 성립된 3국간의 협상체제는 이들 3국이 세계 가운데서의 식민지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힘의 과시인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3국동맹에 대항하여 유럽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외교관계였다. 한편, 3국동맹 내에서는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와의 대립에서 프랑스에게 접근하기 시작하였으므로 독일은 점차 국제적 고립을 더하여 갔다.

3국협상과 3국동맹의 대립의 주축은 영국과 독일로서 그것은 세계시장에서 이미 우월한 지위를 차지한 식민제국과 그 경쟁에 뒤늦게 참가한 신흥 제국주의국간의 대립을 나타내고 있었다. 양국 대립의 근원은 18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0년대에 시작된 영국의 3C정책(Calcutta ·Cairo ·Capetown을 잇는 지배권)과 독일의 3B정책(Berlin ·Byzantium ·Baghdad를 잇는 지배권) 간의 암투는 1890년대에 들어오면서 독일의 공업과 무역이 영국의 구세력을 위협하자 더욱 첨예화하였으며, 양국은 세계시장에서 격렬한 경제 경쟁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1898년에 독일이 대함대 건설에 나서면서 건함(建艦) 경쟁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양국간 경쟁은 더욱 격화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하에서 독일은 프랑스의 모로코 보호령화에 반대하여 1905년 3월, 제1차 모로코사건을 야기시켰으나, 오히려 국제적으로 고립하였고, 영 ·프의 협력관계는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1911년 7월의 제2차 모로코사건에서도 영국은 프랑스를 지지하여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 태도를 취하였으므로 독일의 외교공세는 두 번 다 실패하였다. 한편 1903년 이래, 독일은 투르크에서 바그다드 철도의 건설을 추진하였고, 또 투르크 육군의 근대화를 지도하여 이 나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여 갔다.

그리하여 국제적으로 고립함에 따라 독일의 대외 진출의 중점은 근동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의 독일의 3B정책은 지중해로의 진출구인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해협의 지배를 노리는 러시아의 진출과 함께 대영제국의 생명선을 잇는 3C정책에 대한 위협으로 느낀 영국과의 마찰을 증대시켰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의 국제 대립에서 이른바 주역을 담당하였던 영국과 독일은 서로 예리하게 대립하면서도, 그 행동은 신중하였다. 양국은 1908~12년 해군 군축 교섭을 계속하였고(불성립), 또 근동에서도 오랜 교섭 끝에 타협에 도달하였다. 결국 대전은 양 대국의 직접적인 충돌에서가 아니라, 협상 대(對) 동맹이라는 두 개의 블록 사이의 대립, 특히 양 진영 내에서의 조역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발칸 반도에서의 대립을 직접적 계기로 하여 발발하였다.

c) 발칸문제

발칸은 일찍이 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고 ‘유럽의 화약고’였다. 이 곳에 열강, 특히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진출하고 있어서,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내걸고 슬라브계 제민족의 결집을 꾀하였으며, 한편 오스트리아는 이 영향을 겁내어, 독일의 지지하에 범게르만주의를 주창하여 이에 대항하였다. 1908년 투르크에 혁명이 일어나고 불가리아가 독립하자, 오스트리아는 슬라브인이 사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세르비아는 러시아에 지원을 바랐으나 러 ·일전쟁과 제1혁명(1905)의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되지 못한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배후의 독일과의 충돌이 두려워 1909년 독일의 오스트리아의 병합정책 지지성명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후 러시아는 1912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에게 발칸동맹을 결성케 하였고 같은 해, 동맹은 투르크와 싸워(제1차 발칸전쟁) 승리하였으나 투르크로부터 얻은 영토의 분배를 놓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타 제국 사이에 1913년 재차 전쟁(제2차 발칸전쟁)이 일어났다. 패한 불가리아는 이후 오스트리아 ·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세르비아의 승리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의 승리를 뜻하여 오스트리아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리하여 유럽의 일각 발칸에서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의 세력 확장 때문에 소국(小國)의 운명을 조종하여 대립을 격화시키고 이 곳에서의 전쟁의 불꽃이 전유럽을 휩쓰는 위험한 정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d) 대전의 발발

1914년 6월 28일, 긴장이 고조되는 발칸의 일각,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육군 대연습의 통감(統監)으로 이 곳을 방문한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세르비아의 참모본부 정보부장이 밀파한 7명의 자객 가운데 G.프린치프의 흉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오스트리아는 이 사건을 이용하여 세르비아를 타도하고, 발칸에서의 열세를 일거에 만회하고자 하였으며, 독일도 그것을 지지하였다.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을 붙여 최후통첩을 보냈으며, 이것이 일부 거부되자, 즉각 세르비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어 28일에는 선전을 포고하였다. 그 동안, 오스트리아는 7월 5일에 황제 특사를 독일로 보내어 대(對)세르비아 강경방침에 대한 독일측의 양해를 얻었다.

종래의 정설은 독일이 오스트리아에 끌려서 전쟁에 말려들었다고 보았으나 근년의 연구로는 세르비아에 대한 강경방침을 내세우면서도 주저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도자를 격려하고, 오히려 빨리 전쟁을 개시하도록 압력을 가한 것이 독일측이었음이 밝혀졌다. 독일의 정부 ·군부 지도자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의 전쟁이 러시아나 프랑스까지도 끌어들이는 유럽전쟁으로 될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이와 같은 강경방침을 선택한 것은 깊어져 가는 국제적 고립과 해외 진출에서의 벽에 부닥친 처지를 타개하기 위하여 전쟁의 위험을 무릅쓴다는 결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일이 이 시기를 택한 것은 독일측의 군비강화가 1914년 여름에 그 절정에 달하는 데 대하여, 프랑스나 러시아의 그 시기는 1915년 또는 1916년이었음으로, 따라서 지금이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7월 28일, 오스트리아의 대(對)세르비아 선전포고에 대하여 즉각 대(對)오스트리아 동원을 하고 30일에는 총동원령을 내려, 이 또한 전쟁의 국지화(局地化)를 불가능케 하였다. 독일은 23~27일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사이를 조정해 달라는 영국의 여러 차례의 요청을 무시하거나 거부하였다. 그러나 29일 심야, 영국의 중립 예상이 무너지고 전쟁개입이 확실해지자 독일의 정부 지도자는 그 때까지의 강경한 태도를 약간 바꾸어, 오스트리아에게 러시아와의 교섭에 응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7월 위기’는 위기로 그치지 않고 마침내 대전으로 급선회하고 만다.

31일 독일은 러시아에 대하여 총동원령 철회를 12시간의 기한부로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러시아로부터 아직 회답이 없는 상태에서, 8월 1일 대러시아 선전포고를 하였다. 더욱이 8월 3일 독일은 프랑스의 벨기에 중립 침범을 비난하여 선전포고를 해놓고서도 스스로, 북서 프랑스 진공(進攻)을 위하여 벨기에에 침입하였고 영국은 이것을 이유로 하여 다음날(4일) 대독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전유럽 열강이 참가하는 유럽전쟁으로 발전하였다.

e) 전쟁의 경과

독일의 작전은 서쪽에서 프랑스를 먼저 굴복시키고, 이어 동쪽으로 옮겨서 러시아를 칠 계획이었다. 따라서 독일군은 개전 후 가장 먼저 북서 프랑스로 침입, 파리로 육박하였으나 1914년 9월 초순 마른(Marne)의 싸움에서 진격이 저지되었다. 한편 동부전선에서는 러시아군이 의외로 빨리 프로이센으로 침입하였으나,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원수의 지휘하에 8월말 타넨베르크에서 러시아군을 대패시켰다(타넨베르크전투). 그러나 동서 공히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며, 곧이어 참호전(塹壕戰)으로 바뀌어, 전선은 교착(膠着)되었다.

이 사이에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연합국측으로 참전(8.23)하여, 이 기회에 동아시아 및 태평양에서의 독일의 권익을 빼앗고, 특히 중국에서의 발판을 굳히려고 하였다. 한편 전전(戰前) 독일과의 군사적 유대를 강화하고 있던 오스만투르크는 11월 2일 동맹국측으로 참전하였다. 그 때문에 유럽의 전선은 카프카스,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으며, 1915년 2월에서 4월에 걸쳐 영 ·프 연합함대는 다르다넬스해협에서 격렬한 공격을 가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1915년 4월 서부전선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영국군을 상대로 사용하였다. 동년 연합국과 동맹국 쌍방에 있어서 가장 큰 관심사는 3국동맹에 속해 있으면서 중립을 지키고 있던 이탈리아의 동향이었다. 참전의 조건에 대하여 양진영과 거래하였던 이탈리아는 결국 동년 4월 ‘런던 밀약’에 의해 ‘미수복지’와 달마티아 등의 영토 획득을 약속받고 5월 2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하고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다. 이탈리아는 군사적으로는 약체이었기 때문에 그 참전이 전국(戰局)에 결정적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였다.

또한 같은 해 9월에는 불가리아가 동맹국 측으로 참전하여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그 협력을 얻어 세르비아를 점령하였다. 한편 1916년 8월에는 루마니아가 연합국측으로 참전하였으나, 곧 동맹군에 의하여 제압되었다. 이와 같이 1915∼16년 동맹국은 동유럽 ·발칸에서 적극적 공세로 나와 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었으나, 서부전선에서의 교착상태는 의연 타결되지 않았다. 즉, 16년 2월에서 6월에 걸쳐, 독일군은 베르덩 요새에 4회에 걸치는 대공격을 가하여 50만 명의 병사를 희생하며 막대한 탄약을 소모하여 사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페탱 장군의 지휘하에 요새를 굳게 지켰으며, 6월 말부터 영 ·프 연합군은 서쪽의 솜(Somme)에서 총반격으로 나왔고, 9월 15일 영국은 최초로 18대의 전차를 병기로서 전장에 투입하였다(솜의 싸움). 약 5개월에 걸친 이 전투에서 영 ·프군은 90만 명, 독일군도 60만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도, 승패가 가려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육상에서와는 달리, 해상에서는 영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였다. 독일 해군은 대폭적 증강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비하여 수적으로도 열세이어서 개전 이래 북해에 갇히고 말았다. 중요한 해전으로는 1915년 12월 도거뱅크의 해전과 1916년 5월 유틀란트 해전이 있었을 뿐인데, 모두 승패를 가리지 못하였고, 영국의 해상 지배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전쟁에서 신병기로 등장한 전차는 영국에 이어 1917년 프랑스, 1918년 독일이 각각 그 뒤를 이었으며, 주로 정찰용으로 쓰인 비행선은 독일이 처음 사용하였다.

f) 교전국의 국내정세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즈음하여, 각국 정부는 전쟁이 각각 상대방측의 공격에 의하여 야기된 정당방위의 전쟁이라고 주장하고, 국민에게 그것을 믿게끔 할 수가 있었기 때문에, 어디에서나 드높은 애국심의 고양(高揚)이 엿보였다. 각국의 지도자가 가장 근심한 것은 국내의 사회주의 정당이나 노동조합의 동향이었다. 왜냐하면,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사회주의 운동의 국제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은 그 대회 때마다 전쟁 반대결의를 하였는데, 특히 1912년의 바젤 대회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에는 혁명이라는 수단으로써 반대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각국 특히, 서유럽 대국의 사회주의 정당 내부에는 기회주의나 내셔널리즘의 경향이 강하여서 제국주의 전쟁에 단호히 반대하는 자세는 어느 정도 약화되어 있었다.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은 일부를 제외하고 종래의 슬로건에서 180도 전환하여 전쟁협력으로 내달았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사회주의 정당이던 독일 사회민주당이 정부의 군사예산에 찬성하고, 정부와 ‘성내평화(城內平和:Burgfriede)’를 맺어(1914.8.4) 전쟁협력을 약속하였으며, 각국의 사회주의 정당이 그 뒤를 따름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은 붕괴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예상을 뒤엎고 장기화함으로써 국민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 중에 예를 든다면 독일에서는 인구 6,000만 명 가운데 1,100만 명이 동원되었고, 그 중 전사자 177만 명, 부상자 422만 명을 내었으니, 국민 가운데 5명에 1명이 동원되어 그 반수 이상이 사상(死傷)한 것이 되는데, 이 비율은 프랑스에서 거의 같고 영국에서는 약간 떨어진다. 또한 이 전쟁은 공전의 물량(物量) 전쟁으로 이미 개전 당초, 불과 1주일간의 마른의 싸움에서 탄약 100만 발, 솜의 싸움에서는 그 20배인 2,000만 발이 소모되었다. 이와 같은 전쟁 수행을 위하여 각국은 자국의 경제력을 동원하고 경제 전체를 전쟁을 위한 것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하여 국민들 사이에 불만이 높아지자, 각국 정부에게는 국민의 불만을 누르고, 국가의 총력을 기울일 수 있는 강력한 지도체제를 만드는 일이 사활문제가 되었다.

이리하여 영국에서는 1916년 12월에, 로이드 조지 거국일치내각이 만들어졌고, 프랑스에서도 1917년 11월에 클레망소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들 내각은 경제통제를 강화하고, 군수생산을 높이는 한편, 국내외 반전 평화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영 ·프 양국은 식민지에게 식량과 원료의 공급을 강제할 수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150만 명, 아프리카에서 100만 명이나 되는 원주민을 병사 혹은 노동자로서 유럽의 전선과 공장에 투입하여, 식민지인의 희생으로써 본국민의 부담을 경감시킬 수가 있었다.

이에 대하여 식민지나 해외시장을 모두 빼앗긴 동맹국측에서는 물자의 부족, 국민생활의 궁핍은 그야말로 심각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1915년부터 빵의 배급제를 도입하였고, 곧이어 고기 ·우유 ·버터 등도 배급제가 되었다. 1916년 겨울을 예로 들면, 어른 한 사람의 1주일분 배급량은 빵 1,900g, 감자 2,500g, 버터 80g, 고기 250g, 설탕 180g으로서 평상시의 3분의 1에 불과하였다.

더욱이 1916년 말에는 노동력 부족을 보충키 위하여, 국내에 있는 16∼60세의 남자를 탄광이나 공장에 동원하는 힌덴부르크 계획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불만이 높아짐에 따라 1917년 7월 의회 다수파가 ‘화평결의’를 행한 뒤, 재상 베트만 호르웨크는 강경노선의 군부와 의회 사이에 끼어 맥없이 사임하고, 이후 군부에 의한 사실상의 군사독재체제가 성립되었다. 한편 같은 해 4월 사회민주당에서 ‘성내 평화’에 협력하지 않는 좌파가 따로 분열하여 독립 사회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노동자의 반전(反戰) 운동과 스트라이크가 번져갔다.

g) 대전 중의 비밀외교

제1차 세계대전중에 교전국은 결속을 다지고 또한 중립국을 끌어들이기 위하여, 전후의 영토나 세력권의 재분배를 약속하였다. 1915년 협상국측은 이탈리아에게 ‘미수복지’를 비롯하여 터키령과 아프리카의 독일령 식민지 등의 분할을 약속하였다. 또, 불가리아는 세르비아령 마케도니아를 약속받고 동맹국측으로, 루마니아는 헝가리령 트란실바니아의 영유를 미끼로 연합국측에 끌려들었다.

또, 빈사의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를 에워싸고 영 ·프는 러시아에 다르다넬스 ·보스포루스 양 해협의 영유를 약속하였으며, 다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국은 1916년 5월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맺고 러시아에 흑해 동남 연안을, 프랑스에게 시리아를, 영국에는 남메소포타미아의 영유를 각각 약속하였다. 또한 투르크령 서아시아에서는 아랍인의 독립운동이 고조되었는데, 영국은 1916년 초에 아랍인에게 전후 이 지방에 아랍국가 건설을 약속(마크마옹 선언)하는 한편, 1917년 11월 연합국에 사는 유대인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같은 지역의 팔레스티나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확약하였다(밸푸어선언).

또 인도에 대하여서도 전쟁협력의 대상(代償)으로서 전후의 자치(自治)가 약속되었으나, 그것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끝났다. 똑같이 동맹국측에서도 독일은 대전 중 러시아령의 핀(Finn)사람, 발트 3국의 제민족,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에게 독립을 약속하였으나, 그것은 모두 러시아 제국의 해체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한편, 일본은 1915년 1월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정부에게 산둥성이나 만주, 몽골을 위시한 중국 전토에서의 일본의 권익 획득에 대한 ‘21개조 요구’를 강요하고, 최후 통첩에 의하여 그 대부분을 승인케 하였다.

h) 전쟁의 종결

1917년에 제1차 세계대전은 최종 단계로 접어들었다. 독일은 같은 해 1월, 무제한 잠수함전의 개시를 선언하였는데, 이것은 영국 주변의 해역에서 중립국을 포함한 모든 나라의 상선을 무경고로 격침하여 식량이나 원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영국을 굴복시키려고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영국과 경제적으로 굳게 맺어져 있는 미국의 참전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미국 참전의 효과가 나타나기 이전에, 즉 6~8개월 이내에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독일 자신의 패배가 결정적이 되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독일의 잠수함은 이 싸움에서 예정을 상회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영국도 중립국의 상선까지 동원하여 곤경을 타개하였기 때문에 결국 무제한 잠수함전은 1917년 4월 미국의 참전을 야기시켰을 뿐, 실패로 끝났다.

이리하여 패배가 결정적으로 된 독일에게 있어, 나머지 승리의 최후의 기회라고 할 러시아혁명이 같은 해 3월(러시아曆 2월)에 일어났다. 러시아는 정치 ·경제 체제의 후진성 때문에 장기에 걸치는 총력전에는 견디지 못하여, 군수품 ·식량의 부족, 정정(政情)불안 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3월혁명이 일어나 차르 정부가 쓰러졌고, 이어 11월(러시아曆 10월) 혁명으로 소련 정권이 성립하여, 즉각 정전을 전(全) 교전국에게 제안하였다. 소련정부의 평화 호소와 비밀외교의 폭로는 세계에 충격을 주었는데, 미국 대통령 윌슨은 1918년 1월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여 연합국측의 동요를 억제하려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혁명으로 인하여 제1차 세계대전의 전선의 일각이 무너졌으며, 독일과 러시아는 같은 해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평화조약을 맺었다.

동부전선의 부담에서 해방된 독일은 서부전선에서 최후의 대공세를 폈으나 3~7월의 반복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실패로 끝나자, 독일은 이 공격에서 힘이 소진되었고, 7월 18일에는 미군의 증원을 얻은 연합군이 반격으로 나왔다. 이제까지 ‘승리의 평화’를 주장하여 모든 타협을 거부해 오던 군부도 이에 패배를 자인하고, 9월 말에는 연합국에게 휴전 제의를 하도록 정부에 제안하였다. 이와 동시에 군부의 괴뢰내각은 쓰러지고, 의회 다수파로 이루어진 막스 폰 바덴 내각이 성립되었는데, 신내각은 즉시 ‘위로부터의 개혁’을 단행하여 국민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한편,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14개조’에 의거하는 화평개입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이 사이에 동맹측은 총 붕괴되어, 9월 30일 불가리아, 10월 27일 오스트리아, 30일에는 오스만투르크로 항복이 잇따랐다. 독일에서도 11월 3일 킬 군항(軍港)에서 수병(水兵)폭동이 일어나 독일혁명이 일어나자, 곧이어 제정(帝政)이 붕괴되고, 임시정부는 11월 11일 연합국과의 휴전조약에 조인하였다. 이리하여 5년에 걸쳐 세계의 민중에게 커다란 희생을 입히고 싸웠던 제국주의 전쟁은 2개의 혁명을 유발시키고, 연합국측의 승리로서 종결되었다.

i) 베르사유조약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강화회의는 1919년 1월 18일부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독일과의 강화조약을 심의하는 이 회의를 주도한 이념은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14개조’의 원칙이었으나, 이것은 세계 민중의 평화에의 원망(願望)을 대표함과 동시에 세계정치에서 주도권을 잡으려는 미국의 제국주의 요구의 표출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영국 ·프랑스 ·미국의 3대국이 주도한 이 강화회의는 열강의 거래의 무대가 되었으며, 그러나 윌슨의 이념은, 독일에 복수하여 그 힘을 될 수 있는 한 약화시키고 그 대신 스스로 패권(覇權)을 확립하려 한 영 ·프 양 제국주의국의 현실적 이해(利害) 앞에 패하여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 결과, 6월 28일 베르사유에서 조인된 강화조약의 내용은 독일 국민에게 매우 가혹한 것이 되었다. 즉, 이에 따라 독일은 해외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벨기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에게 각각 약간의 영토를 할양함으로써, 인구의 15%와 유럽에서의 영토의 10%를 잃었다. 또 엄격한 군비제한이 부과되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민족인 오스트리아와의 합병도 금하여졌다. 특히, 무거운 짐이 된 것은 배상으로서, 1921년에 1,320억 마르크가 결정되었다.
한편, 다른 동맹제국과의 강화조약은 생제르맹조약(9.10:對오스트리아), 뇌이조약(11.27:對불가리아), 세브르조약(20.8.10:對터키), 트리아농조약(對헝가리) 등 각각 별개로 체결되었다. 베르사유조약을 중심으로 이들 조약이 형성한 전후의 국제질서를 베르사유체제라고 부른다. 이 체제는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투르크 등 동맹국측의 구제국(舊帝國)을 해체하여 단일 소국가로 하였을뿐 아니라, ‘민족자결’의 원칙에 따라서 발칸과 동유럽에는 다수의 소국가(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발트 3국)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민족자결’의 원칙도 패전국이나 비유럽 세계의 식민지 ·종속국(從屬國)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며, 동유럽에서의 신국가 건설도 동맹 제국을 약화하고, 나아가서는 소련을 묶어 두려는 의도하에서 행하여진 것이었다.
또한, 베르사유조약은 세계전쟁의 비참한 경험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하여 평화유지 기구로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정하였다. 그러나 제안국인 미국이 가맹하지 않았으며, 독일이나 소련도 당초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에 연맹은 평화유지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할 수 없었다. 결국 베르사유체제 그 자체가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세계 체제의 재편성에 불과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로서는 지극히 불충분하여 새로운 국제 대립이 발생하는 것을 방지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j) 1차 세계대전의 종합적 고찰

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된 총력전으로 전쟁에 필요한 인력과 기술과 자원을 얼마나 잘 뒷바침하는가에 따라 승패가 갈린 전쟁이었습니다.
일찍부터 식민지를 점유하고 산업화를 이룬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의 협상국 측이 뒤늦게 통일을 이루고 경쟁에 뛰어든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의 동맹국 측보다 다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협상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동맹국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계 제조업 생산 구성비(1913) 27.9% 19.2%
에너지 소비, 석탄으로 환산,
단위 100만톤(1913)
311.8 236.4
강철생산, 단원 100만톤 (1913) 17.1 20.2
총산업잠재력 (1900년의 영국=100) 261.1 178.4

협상국 측은 식민지의 원료와 노동력, 시장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데 비해 동맹국 측은 해외 식민지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며, 룩셈부르크의 원광석과 루마니아의 소맥과 석유로 원료의 부족을 채웠습니다.
따라서 영국이 막강한 해군으로 독일 북해 해안과 오스트리아 지중해 해안을 봉쇄했지만 동맹국 측은 이에 크게 영향을 받지는 않았고, 전쟁기간 중 식량 부족을 겪었습니다.

오히려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의 상선을 공격해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은 중립국 상선까지 동원하면서 이를 만회했습니다.
1차 대전 발발 이전에는 각 국이 국민소득의 4%를 군비 지출에 사용하였지만, 전쟁 중에는 무려 25~33%를 군비에 지출함으로써 국가의 모든 역량이 군수산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막강한 진지를 구축하고 영국과 프랑스 군의 진격을 막아냈으며, 동부전선에서는 폴란드에서 러시아군을 몰아내고, 남부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세르비아를 점령함으로써 초반 승세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전쟁 중반에 독일의 프랑스 베르덩 요세에 대한 총력전이 실패하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합스부르크 육군을 붕괴시키고, 영국군의 솜 공세에서 양쪽이 엄청난 소모전을 치루면서 협상국과 동맹국은 모두 탈진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군은 오스트라아-헝기라군과는 잘 싸웠으나 훈련부족과 물자부족으로 독일군에게 연패했습니다.
1916년 말까지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360만명에 이르렀고, 210만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1917년 러시아 왕조가 가장 먼저 막대한 군비와 인적 희생, 경제난, 식량난, 극심한 인플레이션, 파업 등을 이기지 못하고 러시아 혁명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프랑스는 독일에게 일부 영토를 점령 당해 강철생산능력의 24%와 석탄생산능력의 40%가 떨어진 상태에서 영국과 미국의 자금, 식량, 자원 원조를 받아 가며 무기 생산에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독일군과 정면으로 맞 붙은 프랑스군은 1917년 니벨 공세 이전에 이미 300만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1918년에 미군의 보충으로 프랑스군 102개 사단, 영국군 60개 사단, 미국군 42개 사단, 벨기에군 12개 사단 등 총 216개 사단이 정원 미달의 독일군 197개 사단과 대결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은 전쟁 이후 모든 경제적 역량을 동원하여 군수품을 제조했는데, 군사비가 1913년 9,100 파운드에서 1918년 19억 5,600만 파운드로 증가하여 정부지출의 80%, 국민총생산의 52%를 차지했습니다.
영국군도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1916년 솜 전투에서는 무리한 진격으로 40만명이 희생되었고, 1917년 이프로 전투에서는 30만명의 인명피해를 입었습니다.

영국은 자신뿐 아니라 러시아, 프랑스, 이탈리아가 차용하는 돈에 대해 보증을 섬으로써 경제적 지원을 했고, 일례로 1917년 협상국들의 43억에 달하는 전쟁차관 가운데 88%를 영국정부가 보증했습니다.
전쟁이 진행될수록 영국은 미국의 군수지원에 의존했는데, 금의 이전이나 달러표시 증권의 매도에 의해서도 무역적자를 메울 수 없어, 미국 군수업자에게 달러를 지불하기 위해 뉴욕과 시카고의 자금시장에서 차입에 의존하였습니다.

독일은 부족한 자원을 가지고도 능률적인 작전, 잘 갖춰진 통신망, 유리한 지형의 서부 진지 등을 토대로 전쟁을 벌여 대영제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을 거의 항복 직전까지 몰아 넣었습니다.
독일은 해상 봉쇄된 가운데서도 부족한 자원의 대용품들을 만들어 내었고, 북부 프랑스에서 원광석과 석탄을 캐내었으며, 루마니아의 소맥과 원유를 약탈하였습니다.

독일도 군수산업에 집중하기 위해 1916년 8월 힌덴부르크 계획에 돌입했는데, 경제와 사회에 대한 통제를 가했고, 정부차입이 증가했으며, 과도한 화폐의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이 야기되었습니다.
산업 생산에 필요한 부족한 숙련 노동자를 보충하기 위해 1916년 120만명을 제대시켰고, 1917년 190만명을 제대시켰는데 이는 서부전선에 심각한 병력부족을 초래했습니다.

힌덴부르크 계획의 가장 큰 문제점은 농업을 경시해 농업 부문의 인력과 말, 연료 등을 군대나 군수산업으로 돌림으로써 농업생산이 급격히 줄면서 국민들에게 배급제를 실시할만큼 극심한 식량난에 처하게 했습니다.
독일의 가장 큰 실수는 무제한 유보트 작전으로 인한 미국 상선의 침물과 멕시코와의 비밀동맹 제의로 미국을 자극해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의회가 참전을 결정하게 한 것입니다.

미국의 참전과 원조는 탈진한 협상국에게 큰 힘이 되었는데, 당시 미국의 산업 잠재력은 독일의 2.5배였고, 미국은 수 많은 상선과 군함과 무기와 식량을 지원함으로써 한계상황에 이른 독일을 압박하였습니다.
미국의 참전은 세력균형에 큰 변화를 가져왔는데, 투입된 미군의 숫자와 무기지원은 러시아의 붕괴를 보완하고도 남았습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계 제조업 생산 구성비 (1931)

51.7

19.2

에너지 소비량, 석탄으로 환산
단위 100만톤 (1931)

798.8

236.4

강철생산, 단위 100만톤(1931)

44.1

20.2

총산업 잠재력 (1931)

472.6

178.4

 

 

전비 (1913년 시가, 단위 10억달러)

총동원 병력 (단위 100만)

협상국측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미국 등)

57.7

40.7

동맹국측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투르크)

24.7

25.1

1917년 미국의 참전으로 다급해진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 영국군을 영불해엽으로 몰아내기 위해 1918년 3월에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 루덴도르프 대공세를 펼쳤지만 양측에 막대한 희생만 남기고 실패하였습니다.
결국 독일은 200만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남겼고, 협상국의 반격을 받게 되었으며, 불가리아 터키 오스트리아가 항복하고 독일 내부에 혼란이 일자 독일왕실은 무너지고 무조건 항복하게 됩니다.

1차 대전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충돌이었고, 독일은 모든 식민지를 잃고 영토가 축소됨으로써 몰락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유지하였고, 미국은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였습니다.
1차 대전의 영향으로는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의 왕실이 무너졌고,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국제연맹이 창설되었으며,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독일에 대한 가혹한 전쟁배상금은 또 다른 전쟁의 불씨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4. 1차대전과 2차대전 사이의 국제정세 (1919~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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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피해는 엄청났는데, 군인 중 사망 800만명, 불구 700만명, 중경상 1500만명이었고, 500만명의 민간인이 전쟁과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전쟁으로 피폐된 지역은 1918~1919년에 인플루엔자 전염병으로 또 다시 수백만명이 희생되었고, 전쟁 전후 전체 희생자수는 6000만명으로 추산되며, 이중 절반이 러시아인이었습니다.

물질적 피해도 극심해 프랑스, 세르비아, 폴란드 등 전쟁터였던 곳은 수십만채의 집이 파괴되고, 농촌은 약탈당했으며, 가축은 도살되고, 도로 철도 전신망 등은 엉망이 되었고, 농지는 불발탄과 지뢰로 쓸모 없는 땅이 되었습니다.
1차 대전의 물질적 피해액은 2,600억 달러로 추산되는데 이는 당시 세계 국가부채 총액의 6.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고, 제조업 생산은 1920년에 1913년에 비해 7%에 불과했고, 농업생산은 평균치의 1/3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지리적 변화는 예전의 합스부르크, 로마노프, 호엘촐레른 제국의 자리에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의 국민국가가 탄생한 점입니다.
오스트리아에 비해 독일은 영토를 적게 잃었지만, 프랑스의 경제적 착취, 엄격한 비무장화(해군, 공군, 잠수함, 전차 보유 금지),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차대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전쟁 이후에도 식민지를 잃지 않고, 국제연맹을 주도함으로써 여전히 강대국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이는 경쟁자였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멸망했고, 러시아는 혁명으로 내부문제에 휩싸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이 1920년 이후 고립주의를 채택함으로써 국제무대에 힘을 크게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는 압도적인 금융외교의 시기로 독일의 배상금과 협상국의 전시부채가 맞물려 전승국과 패전국과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미국과 협상국과의 관계도 악화되었습니다.
긴장이 높아지자 1924년 도즈계획(Dawes Plan)으로 금융적 타협을 서둘러 분란을 완화하였고, 1929년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으며, 1928년 파리부전조약(Pact of Paris)에서 많은 국가들이 장래 분규를 전쟁으로 해결하지 않겠다고 합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미국과 같이 금본위제를 도입하지 않고, 허술한 화폐·재정정책으로 인플레이션이 유발되어 경제난에 휩싸였고, 수출 촉진을 위한 경쟁적인 화폐의 평가절하는 재정적 불안과 정치적 반목을 야기시켰습니다.
특히 국가 채무를 두고 국가간 충돌이 잦았는데, 소련의 볼세비키들은 대미채무 36억달라 변제를 거부했으며, 프랑스는 독일이 배상하기 전에는 미국의 채무를 갚을 수 없다고 하고, 독일은 막대한 전쟁보상금을 갚을 수 없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유럽이 경제불안과 국가채무에 허덕이고, 미국이 세계 최대의 채권국이자 산업국이 되면서 세계 금융의 중심은 자연히 영국에서 미국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29년 10월 미국의 주식 대폭락으로 시작된 경제공황으로 인해 미국의 투자와 소비가 모두 위축되었고, 산업화된 국가들은 수출부진과 가격폭락으로 동반 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각국은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디플레이션, 금본위제 폐지, 화폐가치의 평가절하, 자본에 대한 제한조치, 국가채무에 대한 지불유예 등 비책을 사용했지만 세계무역과 신용체제에 더 큰 문제를 주었을 뿐입니다.
미국이 미국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스무트-홀리 관세법'(Smoot-Howley Tariff)을 통과시켜 철저한 보호무역주의로 돌아서자 유럽 각국도 이에 보복을 가해 양측 모두 피해를 입어 산업생산은 절반으로 줄고, 세계무역은 1/3로 줄었습니다.

경제불황과 장기실업으로 각국은 극심한 정치불안에 시달렸고, 국가주의와 군국주의가 득세했습니다.
1933년 세계경제회의(World Economic Conference)의 달러·파운드화 환율 조정 실패는 어두운 상황을 심화시켰습니다.
그러자 세계는 적대적인 경제 불록화를 겪게 되었는데, 영국 제국 내의 파운드화 불록, 미국의 달러화 블록, 일본의 극동지역의 엔화 블록, 프랑스의 금본위 블록 등입니다.

1930년대 말이 되자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파시즘 즉 전체주의 국가들이 反볼세비키주의와 反자유·자본주의 사상으로 무장하였습니다.
식민 각국에도 민족주의가 등장해 이집트에서는 와프드당(Warfd Party)이 결성되었고, 중국에서는 5·4 운동이 일어났으며, 인도에서는 간디가 영국의 지배에 대한 각계의 저항을 일원화했습니다.

a) 독일

폭격으로 피폐해졌던 2차대전과는 달리 1차대전 이후의 독일의 산업과 기간망은 거의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독일이 예전과 같은 강대국으로 부활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이를 불안히 여긴 프랑스는 배상금 완납을 주장하고,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으며, 국제연맹을 무력화시키고, 독일의 재무장을 극력 저지했지만, 이는 오히려 독일인에게 한을 품게 했고, 독일의 극우세력을 자극했습니다.

전 후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정치적 혼란과 외교적 고립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929~1933년의 금융·상업 위기로 인기 없던 바이마르 정부가 좌초되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히틀러가 등장하여 전체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 국민에게 민족 우월주의와 절대적 충성을 선동해 지지를 이끌어 냈습니다.

1938년 독일은 정부지출의 52%, 국민총생산의 17%를 군비에 쏟아 부었는데, 이는 영국·프랑스·미국의 군사비를 합친 것보다 많은 액수였습니다.
1939년 독일 육군은 103개 사단에 이르렀고, 항공기는 5000대 이상이었으며, 해군도 재건되었습니다.
독일 정부는 높은 세금과 적자 차입, 정부의 노동통제, 임금과 개인 소비 억제 등을 통해 이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이 무기산업을 일으키려면 철광석, 구리, 보크사이트, 니켈, 석유, 고무 등의 자원이 필요했는데, 이를 수입하기 위한 수출이나 외환, 식민지, 금 등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였습니다.
그래서 독일 정부는 외환통제, 물물교환, 합성 대체품 발명 등 편법을 동원했지만, 원료재고는 바닥나기 일수였습니다.
경제력에 비해 무리한 군비증강으로 경제난과 원료난은 심화되었고,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나찌는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독일의 오스트리아와의 합병은 5개 사단의 병력과 철광석, 유전과 2억달러 상당의 금과 외환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독일은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해 국립은행의 금과 외환 외에도 철광석과 금속을 획득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지나친 군비증강은 경제난과 원료부족, 침략전쟁을 유발하며, 현시대의 미국에서도 교훈을 찾게 됩니다.
결국 히틀러는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독일의 침략전쟁을 묵과할 수 없던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b) 일본

1930년대 들어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식량부족과 자원난, 낮은 생산성과 수출부진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한반도와 만주, 동남아시아 등을 점령했고, 정부예산의 70%를 군사비로 지출함으로써 군사강국이 되었습니다.

일본 해군은 급속도로 성장하여 세계 최대의 야마토(大和)급 군함을 제조하였고, 10척의 항공모함과 3000대의 항공기를 보유하였습니다.
일본 육군은 1941년에 51개 현역 사단과 133개 항공대를 갖추어 100만대군과 200만명의 예비군을 보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70만명이나 투입하는 총력전을 펼쳤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경제적 어려움에 처합니다.

일본의 중국 침력을 반대해 온 미국은 1938년 6월 항공자재의 '도덕적 금수조치'(moral embargo), 다음 해의 미·일 무역협정 파기, 1941년 일본의 인도차이나 점령에 대한 석유 및 철광석의 수출금지로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킵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은 미국이 일본에 비해 인구는 2배, 국민소득은 17배, 강철생산은 5배, 자동차는 8배, 산업잠재력은 거의 10배에 달할만큼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일본 내 많은 지식인이 반대했지만 군사 지도자들은 밀어 붙혔습니다.

c) 프랑스

프랑스는 1919년 이후 영국과 미국의 지원이 줄어들고 독일의 배상금도 제대로 이행되지 않자 경제적 혼란을 겪었지만 1926년 푸앵카레(Raymond Poincare)의 통화 안정책으로 산업은 호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화학, 염료, 전기제품에서 독일의 재배를 벗어났고, 프랑화의 유리한 환율로 무역이 활기를 띠었고, 프랑스 중앙은행의 방대한 금 보유고로 대공황의 영향도 적게 받았습니다.

그러나 1933년 이후 다른 국가들이 금본위제를 폐기하자 프랑화의 가치하락을 피해보려 애쓰는 바람에 프랑화의 수출 경쟁력이 떨어져 수입은 60%, 수출은 70%가 줄었습니다.
1935년 디플레이션 정책은 빈사상태의 프랑스 산업을 강타했으며, 1936년 인민전선(Front Populaire) 내각이 주 40시간 노동과 임금인상을 강행함으로써 기진맥진했습니다.

독일의 재무장에 겁먹은 프랑스는 1930년대부터 국방비 지출을 늘렸으나 경제력이 약해 절대액은 적었습니다.
1937년 독일이 5606대의 항공기를 생산할 때 프랑스는 겨우 370대의 항공기를 생산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은 가장 좋은 지원을 받아 현대적 함대를 보유하게 되었지만 육지에서 전격전이 진행되었을 때 제대로 한 번 써 보지도 못했습니다.

독일군이 현대화를 추진하였을 때 프랑스에서 현대적인 기갑부대를 건설하자는 드골(Charles De Gaulle)의 주장은 무시되었고, 현대적인 지휘통신 체계와 항공기의 역할도 외면당했습니다.
독일의 구데리안이(Heinz Wilhelm Guderian)이 쓴 '전차를 주목하자'(Achtung Panzer) 번역본이 프랑스군 도서관에 보내졌지만 읽혀지지 않았고, 우수한 전차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전술체계가 없었습니다.

d) 영국

1차대전 이후에도 영국은 강대국이었지만 정신적 인적 물질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유럽의 안정보다는 국내의 경제·사회문제나 제국관리 문제에 신경을 썼습니다.
영국 경제 역시 1929년 이후 세계적인 불황에 의해 크게 흔들렸는데, 직물생산은 2/3로 축소되었고, 강철생산은 절반으로 줄었으며, 조선산업은 1933년의 생산이 1차대전 전의 7%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1934년이 되자 경제는 조끔씩 회복되었지만 전통산업은 쇠퇴한 반면 항공, 자동차, 석유화학, 전기제품 등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였습니다.
영국은 국내의 정치·경제적 압력으로 1930년대 초에 국방비를 삭감했는데, 히틀러의 재무장으로 충격을 받은 1936년이 되서야 국방비를 증액했으나 독일의 1/3 수준이었습니다.

영국은 군사비를 국민총생산에서 1937년 5.5%, 1939년 12.5%로 증액했지만, 숙련공과 시설 부족으로 항공기, 전차, 함정 생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생산부족을 메우기 위해 미국이나 스웨덴 등에서 엄청난 무기와 철판, 볼베어링 등을 수입했는데, 이로 인해 외환보유고가 줄어들고, 국제수지가 위협 받았습니다.

e) 소련

소련은 1차대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1914년 1억 7100만명이던 인구가 1921년 1억 3200만명으로 줄었고, 폴란드와 핀란드 등 연안국가를 잃었으며, 많은 공장과 철도와 농장을 상실했습니다.
제조업은 엄청나게 쇠퇴했는데 1920년의 생산량이 1913년의 생산량의 13%에 불과했습니다.
해외무역은 자취를 감추었고, 1인당 국민소득은 60% 이상 감소하여 비참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레닌에 이어 권력을 잡은 스탈린은 산업화를 이루기 위해 개인농 제도를 집단농장으로 바꾸었고, 착취를 감행했는데 이로 인해 농업은 피폐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수출에 의존하지 않는 자체적인 경제발전을 이루어 대공황 중에도 높은 경제성장을 이루었는데, 국민소득이나 산업생산이 몇배 이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히틀러의 등장과 만주사변으로 위협을 느낀 소련은 1935년 군인원을 130만명으로 증가하였고, 많은 전차와 항공기를 생산하였으며, 기갑부대와 공수부대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권력에 집착한 스탈린의 광적인 탄압으로 많은 기술자와 공무원이 숙청되었고, 붉은 군대 장교의 많은 수를 제거했는데, 스탈린은 스스로 가뜩이나 부족한 고급 인적자원을 줄임으로써 국력을 약화시켰습니다.

f) 미국

1차대전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고 높은 경제성장을 이룬 미국은 세계 금융과 산업의 중심국이 되고, 세계 최대의 금을 보유한 채권국이 되어 최고의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미국인의 높은 생활수준과 활발한 투자활동은 제조업의 호황을 지속시켰고, 많은 자동차와 농기계 등을 생산해 다른 6대 강대국보다 많은 양을 생산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주가폭락과 금융위기로 인한 1920년대 대공황을 겪고 나서는 1930년대 다른 어느 강대국보다 쇠약해졌는데 이로 인해 세계정치의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유럽의 정세를 악화시켰습니다.
1929년 경제공황으로 미국의 국민 총생산은 3년 뒤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1,500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으며, 수출은 1/3 정도로 급감했습니다.

1930년대 다른 국가들은 어느정도 정상을 회복했지만, 미국은 1937년에 재차 불어닥친 경제공황으로 폭삭 주저 앉았으며, 세계는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로 다시 긴장이 높아졌습니다.
미국은 1934년 전시부채를 갚지 않는 외국정부에 대해 차관을 금지했고, 1935년 전쟁시의 무기수출을 금지함으로써 영국 프랑스와도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5. 2차 세계대전 - 대영제국의 멸망 (1939~1945)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은 두 개의 중심이 있어, 첫째, 유럽에서는 영·독전쟁, 독소전쟁, 둘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단계가 있다. 이들 전쟁은 각각 독자적 요인을 안고 발전했는데, 1939년 9월에 유기적인 연관에 놓여져서 미·영·프·소·중의 연합국과 독·이·일의 동맹국(同盟國)이라는, 이 전쟁을 일관하는 기본적 대항 관계의 기초가 이룩되었다. 또 이 전쟁에서 전체로서의 지배적인 성격은 반(反)파시즘 전쟁이었다.

a) 2차 세계대전의 전사

제1차 세계대전 후 자본주의 세계는 전반적 위기단계에 돌입하였다. 더욱이 자본주의 제국의 발전의 불균등이 두드러졌고, 1929∼33년의 세계공황은 이와 같은 불균등에 근거하는 국제대립을 일거에 첨예화시켰다. 즉 자본주의 열강의 블록화와 폐쇄경제적인 경향은, 자본주의국으로서 기초가 약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게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국내정책의 정돈상태를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9월 중국 동북에서 침략행동을 개시, 1933년 ‘만주국’을 성립시켜, 이 지역에 자본주의 발전의 기반을 얻으려고 하였다. 1933년 3월 국제연맹이 만주국을 부인하자 일본은 곧 연맹을 탈퇴하였다. 한편 독일에서는 국내정치의 혼란 가운데에서 1933년 베르사유 체제 타파를 외치던 히틀러가 정권을 장악하고 같은 해 10월 제네바 군축회의 결과의 불만으로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1935년 3월에는 재군비를 선언, 1936년 3월 라인란트 비무장지대에 진주하여 로카르노 조약을 파기함과 아울러 베르사유 조약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이를 본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 에티오피아에 침입하여 36년 5월에는 전토를 정복하였다.

이와 같은 침략의 확대, 전쟁 위기의 절박을 앞에 두고 반(反)파시즘, 민주주의 옹호를 주창하는 민중의 반전(反戰)운동도 활발해져서, 이것을 배경으로 1935년 여름의 코민테른 제7회 대회는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창, 1936년 2월에는 에스파냐에, 같은 해 6월에는 프랑스에 인민전선정부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에서는 독일의 노골적인 개입으로 내란이 벌어졌고, 중국에서는 1936년의 시안[西安]사건을 계기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자, 일본은 이를 응징한다는 명목으로 1937년 7월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도발하였다.

1936년 11월 독일과 일본은 방공협정(防共協定)을 체결하였고, 1937년 11월 이탈리아가 이에 가입하여 독 ·이 ·일 3국은 반소(反蘇)를 공공연히 외쳤으며, 이것을 구실로 하여 국내에서의 파시즘화와 대외침략을 추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똑같이 공산주의를 겁내는 미 ·영 ·프의 지배층으로부터 그 침략을 용인받으려고 하였다. 미 ·영 ·프의 지배층은 일면으로는 독 ·이 ·일과 제국주의적 대립을 나타내면서도, 일면으로는 이들 3국의 창끝이 소련이나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에로 향해지는 한, 이와 타협한다는 경향을 보였다(宥和政策).

1937년 11월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의 합병을 결의한 히틀러는 1938년 2월 일련의 인사이동으로 나치스 체제를 강화하고 같은 해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合倂:안슐루스)하였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방을 요구하여 전쟁의 위기를 조성하자, 영국 총리 체임벌린은 1938년 9월 뮌헨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하여금 수데텐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이리하여 독일은 동 ·중부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적 지위를 확보하였으나, 한편 국제연맹 또는 집단안전보장 체제는 붕괴되어 갔다.

소련은 독 ·일의 연맹 탈퇴 후인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하여 집단안전보장정책에 노력(리트비노프 외교)하게 되는데 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은 소련이 뮌헨 회담에서 제외된 것은 리트비노프 외교의 기초가 상실된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에스파냐에서는 1939년 1월 독 ·이가 원조하는 프랑코가 인민전선정부를 타도했다. 1939년 5월 소련 외상 V.M.몰로토프가 취임하여 무력외교로 자국의 안전을 꾀하려 하였다. 1939년 3월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해체하고 이어 폴란드 회랑(廻廊)과 단치히(그단스크)를 요구하였다. 끝없는 히틀러의 요구에 영 ·프에서도 유화정책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높아져, 양국은 폴란드에 원조를 약속하였다.

독일 ·폴란드 간의 긴장 격화와 함께 영국은 대독개전(對獨開戰)에 대비하여 소련과 교섭을 시작하지만, 한편으로는 극비리에 독일과도 교섭하고 있었다. 뮌헨 회담 이래로 소련의 영 ·프에 대한 불신은 숨길 수 없게 되었고, 8월에는 영 ·소 교섭이 정체되고, 이에 따라 독 ·소 교섭이 갑자기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미 폴란드 공격을 결의하고 있던 히틀러는 동서에 걸치는 2정면(二正面) 전쟁을 피할 필요가 있었고, 소련은 독일-폴란드전쟁이 반소(反蘇)전쟁으로 변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8월 23일의 독 ·소 불가침조약은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전혀 상반되는 이데올로기를 가진 양국이 제휴하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영 ·프의 유화정책은 결정적으로 파탄되었으며, 대소 침략을 겨냥한 일본의 대독 군사동맹교섭은 도각(倒閣)으로서 끝나 버렸고,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것은 파시즘에 반대해 온 유럽의 공산주의자, 소련 지지파, 인민전선 옹호자들이었다. 소련의 중립을 확보한 독일은 예정대로 1939년 9월 1일 폴란드에 침입하였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宣戰)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되었다.

b) 영독 전쟁

폴란드에 침입한 독일군은 2주일이 못 되어서 폴란드군 주력을 격파하였다. 이것은 주도한 준비뿐만 아니라, 전략공군과 기갑부대의 밀접한 제휴에 의거한 전격전의 성공에 따른 것이었다. 폴란드전(戰) 종료 후 히틀러는 영 ·프에게 화평을 제의하였지만 영 ·프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영 ·프는 서부전선에서 적극적 공세를 취하지 않아, 여기에서는 약 반 년 동안 전쟁다운 전쟁은 볼 수 없었다(기묘한 전쟁:Phony War). 영 ·프는 독 ·불 국경에 연하여 구축된 요새 마지노선(線)에 의존하고, 해상봉쇄 ·경제압박에 의하여 독일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하였던 것이다.

소련은 영 ·독전에서는 제국주의 전쟁이라 하여 중립의 입장을 취하였지만, 독일의 군사력과 침략성을 겁내어 국경방위선을 서쪽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은 폴란드에 있어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폴란드에 침입하고 부그 강변까지 진격하여, 9월 28일 독 ·소 양국 사이에서 폴란드를 분할하였다. 이어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각각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고, 1940년 7월에는 이들 3국을 소련령으로 편입하였다. 또 1940년 6월에는 루마니아로부터 베사라비아 지방과 부코비나 북부를 획득하였다. 이리하여 제1차 세계대전 후 잃었던 영토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더욱이 핀란드에게는 영토의 교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1939년 11월 전쟁을 개시하여 1940년 3월에 간신히 그 요구를 실현시켰다(소련-핀란드 전쟁).

이 때, 거의 유명무실해졌던 국제연맹은 창립 이래 최초로 소련을 제명처분하였고, 영 ·프도 핀란드 원조를 위하여 병력을 파견코자 하였다. 영 ·프는 핀란드 원조를 구실로 나르비크 등 노르웨이 제항(諸港)을 확보하여, 독일 공업에 불가결한 스웨덴 철광석을 장악하려 하였으나, 독일군은 선수를 쳐서, 1940년 4월 덴마크를 점령함과 동시에 노르웨이에 침입하여 영 ·프군을 격퇴하였다. 이 성공에는 육군장관 V.A.크비슬링 등 노르웨이 파시스트의 공모(共謀)가 기여하였는데, 크비슬링이라는 이름은 이후 ‘조국을 판 사람’이라는 뜻으로 통하게 되었다.

1940년 5월 10일 영국에서는 노르웨이에서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체임벌린 내각이 물러나고, 대독 강경론자인 처칠이 노동당을 포함하는 거국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바로 그 날 독일군은 제1차 세계대전 때와 똑같이 중립국인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를 침입하였고, 나아가서 마지노선의 북단을 가로질러 영국 해협으로까지 진출하여 영 ·프군을 남북으로 갈라놓았다. 북부에 고립된 영 ·프군 30만은 덩케르크에서 영국 본토로 기적적으로 철수하였다(덩케르크의 철수).

한편 독일군은 파리를 목표로 쇄도하여, 6월 14일 파리를 점령하였다. 이 정세를 보고 있던 이탈리아는 6월 10일 갑자기 참전하여 남프랑스에 침입하였다. 프랑스에서는 6월 16일 P.레노가 사직하고 H.P.페탱이 수상이 되어, 다음날 휴전을 제의하였다. 6월 22일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했을 때와 똑같이 콩피에뉴의 열차 안에서 휴전협정은 조인되었다. 이 결과 프랑스 본국의 약 2/3는 독일군의 점령하에 놓였고, 남부의 나머지 지역은 ‘자유지대’로서 비시(Vichy)로 옮긴 페탱 정부에 위임되었다. 비시 정권은 7월 10일 제3공화국 헌법을 폐지하고, 파쇼적인 신헌법을 공포하였다.

한편 항복과 동시에 탈출한 드골은 런던에서 대독항전(對獨抗戰)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자유 프랑스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히틀러는 계속하여 영국 본토 상륙작전의 단행을 결의하였다. 하지만 이에 불가결한 영국 해협의 제공권(制空權)을 둘러싼 전투, 즉 ‘브리튼의 싸움(Battle of Britain)’에서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지 못하였고, 1940년 9월에는 이 작전을 무기연기하고 소련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동방제국’의 건설은 히틀러 본래의 목적이었는데, 이 실현에 의하여 군사 경제의 기반을 강화하여 영 ·미에 대항코자 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발칸제국에 대한 공작이 활발해졌다. 이 곳은 대소(對蘇) 공격의 전진기지로서 뿐만 아니라, 터키를 거쳐 중동으로 진출하는 데에도, 더욱이 루마니아의 석유를 비롯한 전략물자의 공급지로서도 확보해 놓을 필요가 있었다. 히틀러는 1940년 8월, 루마니아에게 압력을 가하여 트란실바니아 지방을 헝가리에, 또한 도브루야 지방을 불가리아에 할양시켜 분규중에 있는 영토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아울러 이들 3국을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켜 기지를 확보하였다.

이것을 본 무솔리니는 1940년 10월 돌연히 그리스에 침입하였으나, 2주간도 못되어 좌절하고 독일의 원조를 요청하였다. 히틀러는 우선 그리스의 고립을 획책하고 1941년 3월 유고슬라비아를 독 ·이 ·일 3국동맹에 가맹시켰으나, 2일 후에는 친서구적(親西歐的)인 군부의 쿠데타가 일어났으므로, 4월 유고슬라비아에 침입하여 단시일에 전토를 제압하였다. 이와 동시에 그리스에도 침입하여 영국군을 격퇴하고, 더욱이 5월에는 공수부대가 크레타섬을 점령하였다.

이리하여 발칸 제국을 제압한 4월 말, 히틀러는 6월 22일을 소련에 대한 공격일로 명령하였다. 5월 10일 나치스 부총통 헤스는 단신 비행기를 조정하여 영국 본토로 가서, 대소전(對蘇戰)을 위하여 영 ·독 휴전을 실현코자 하였으나 무위로 끝났다. 한편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고 5월 6일 스탈린이 새 수상이 되어 예상 못한 사태에 대처하게 되었다.

c) 독소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발발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은 핀란드에서 흑해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일제히 소련으로 침입하였다. 북부군은 발트 3국을 거쳐 레닌그라드로 향하였고, 중부군은 모스크바로 직진하였으며, 남부군은 우크라이나로 동진하였다. 히틀러는 소련군 주력을 2개월 내에 분쇄하고 우크라이나와 카프카스의 자원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소련군에 대한 과소평가, 사회주의 체제의 급속한 내부붕괴의 기대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략은 엄동(嚴冬)의 도래와 함께 정체되었고, 12월에는 소련군의 반공(反攻)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대소전의 단기승리를 전제로 하는 히틀러의 세계전략의 좌절을 의미한다. 더욱이 독 ·소전이 발발하자 영 ·미는 즉각 소련에 대한 원조를 성명하였고, 8월 12일 영 ·미가 ‘대서양헌장’으로 전쟁목적을 분명히 밝히자 소련은 즉각 이를 지지하는 등, 영 ·미 ·소의 반(反)파시즘 연합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해 12월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37년 7월 이래로 일본은 중일전쟁의 늪 속으로 깊이 빠져 들었고, 영 ·미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1940년 5월 이래 독일이 네덜란드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 본토 상륙의 기미가 보이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독일 ·이탈리아와의 3국동맹을 체결하였고 ‘호기남진(好機南進)’의 방침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를 침공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국은 수출제한, 미 ·영 결속, 장제스[蔣介石]정권 원조강화로 대응하였다.

1941년 6월 독 ·소전(戰)이 시작되자, 일본에서는 재차 ‘북진론’이 대두되어 대소전의 준비가 진행(관동군 특별연습)되지만, 정부로서는 ‘남진’ 방침을 결정하고 7월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에 진주하였다. 이것은 미 ·일 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미국은 즉각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였고 석유의 대일 금수를 실시하였다. 이 조치는 일본 군부의 대미개전론을 자극하였고, 10월에 주전파인 도조[東條] 내각이 들어섰다. 12월 8일 일본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였다. 동월 11일 독일 ·이탈리아도 미국에 선전포고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의 여러 전장(戰場)은 일체가 되었고, 연합국(민주주의) 대 추축극(파시즘)이라는 기본적 대항관계(성격)는 명료해졌다. 1942년 1월 1일, 미 ·영 ·중 ·소 등 26개국은 ‘연합국 선언’에 조인하였다.

d) 대동아 공영권과 신질서

일본은 진주만공격과 함께 말레이반도 해역에서 영국의 신예 전함 2척을 격침하여 제해권을 잡았다. 또 개전과 동시에 육군은 말레이반도 ·필리핀에 상륙하여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영국 극동군을 무조건 항복시켰다. 필리핀에서는 1942년 1∼3월 마닐라를 위시하여 수마트라섬 ·자바섬을 점령하고, 네덜란드군을 항복시켰다. 또한 원장(援蔣) 루트의 절단, 인도에 대한 대영(對英) 이간공작을 위해 미얀마에 침입하여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리하여 남방작전은 일단락을 보았다. 하지만 주전장(主戰場)인 중국전선은 교착상태가 계속되었고 중국의 항전체제는 강화되어 갔다.

1942년 1월에 일본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건설 방침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남진’의 목적의 하나는 전략물자의 확보에 있었기 때문에 ‘대동아공영권’이란 유럽의 식민지지배에 대체되는 새로운 일본의 식민지적 체제에 불과하였다. 일본의 침략과 가혹한 점령정책에 따라 동남아시아의 각지에서 반일저항운동이 일어나고 이 저항을 통하여 아시아의 민족해방 운동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히틀러는 1939∼42년에 정복한 유럽 제국을 그 인종론적 이데올로기에 따라 재편성하고자 하였다(신질서).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독일 사정관(司政官)에 의한 민간정부가 설치되었지만, 언젠가는 대독일 제국으로 편입할 예정이었다. 룩셈부르크 ·알자스로렌 ·단치히 등은 대독일 제국에 합병되었다. 폴란드와 러시아에서는 ‘열등인종’으로 취급된 슬라브계 주민이나 유대인은 강제이주, 대량 멸절(滅絶)하고, 이에 대신하여 독일인을 식민시킬 계획이었다. 점령지역의 행정권은 히틀러의 친위대(SS)에게 위임되었다. 또한 히틀러의 국가 비밀경찰(게슈타포)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적 해결’을 명령받고, 독일의 지배가 미치는 모든 곳에서 유대인을 잡아들여 아우슈비츠 ·트레브링카 등의 가스실에서 420만 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군수생산 강화에 따라 심각화되는 노동력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1942년 3월 노동총감 자우케르는 독일 지배하의 유럽 전토에서 노동자의 강제징용을 시작하여 적어도 750만 명이 독일의 공장으로 송출되었다. 이상의 몇 가지 예에서 볼 수 있는 나치스의 점령지 지배에 대하여, 민중들은 지하투쟁을 포함한 갖가지 형태로 저항하였다. 연합군의 반공(反攻)은 동 ·서에서도 이러한 민중의 저항운동과 맞호응하면서 전개되었다.

e) 전국의 전환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영 ·미 회담에서 먼저 독일 타도에 전력을 다한다는 유럽 제1주의가 결정되지만, 독일 타도의 전략을 놓고 영국과 소련은 대립하였다. 소련이 유럽에서의 ‘제2전선’을 요구한 데 대하여 영국은 북아프리카 작전을 고집하였다. 지중해에서 중동 ·인도에 이르는 대영제국의 식민지체제를 확보하고 추축국의 ‘부드러운 아랫배’부터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더욱이 1942년 여름에 북아프리카 전선은 긴박해졌다. 패배를 거듭하는 이탈리아군을 원조하러 간 롬멜 장군의 기갑사단은 토브룩을 점령하고 카이로 약 100km까지 육박하였다. 1942년 10월 영국군은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에 호응하여 영 ·미 연합군은 프랑스령 북아프리카에 상륙하였다. 독일 ·이탈리아군은 동서에서 협공을 받아 1943년 5월에 북아프리카에서 완전히 소탕되었고, 이어서 영 ·미 양국은 이탈리아 진공작전을 계획한다.

이와 같이 제2전선이 연기됨으로써 유럽 전선에서 독일군의 95%를 떠맡은 것은 소련이었다. 1942년 봄 재개된 독일군의 공격은 남부전선에 중점을 두었고, 스탈린그라드(볼고그라드)에서는 독 ·소 양군의 촌토(寸土)를 다투는 전투가 전개되었다. 격전 결과 포위당했던 독일군은 1943년 1월 말 항복하였는데, 이 패배가 가져다 준 영향은 매우 컸다. 민중의 저항운동을 비롯하여 연합국 진영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군부 내의 히틀러에 대한 불신이 커졌으며, 이탈리아는 영 ·미측과의 강화를 획책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독 ·소전은 히틀러에게는 ‘사활의 투쟁’이 되었다. 히틀러는 총동원 체제를 취하였지만, 1943년 여름의 총공격에서 실패하였고, 이후 대세를 만회하지 못하였다.

1943년 7월 영 ·미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하자 이탈리아에서는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군부와 보수파가 무솔리니를 감금하고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켰다(7월 25일). 바돌리오는 즉각 영 ·미와 교섭을 개시하여 9월 3일 무조건항복을 하였다. 항복은 9월 8일 발표되었고, 남이탈리아로 피신하였던 국왕과 바돌리오 정부는 10월 13일 독일에 선전포고하였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를 구출하고 북이탈리아에 공화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초까지 계속되지만, 이 일종의 내란상태에서 국왕과 보수파의 권위는 상실되었다(1946년 5월, 왕제폐지).

1943년 태평양에서의 전국도 전환하였다. 서전에 성공한 일본은 제2단계 작전으로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를 차단하려 하였지만, 1942년 5월의 산호해 해전, 특히 같은 해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았다. 일본 해군기동함대의 주력(主力)이 상실되었고, 태평양에서의 전략적 주도권은 미국군이 장악하게 되었다. 1942년 8월 미국군은 과달카날섬에 상륙하였다. 격전 끝에 1943년 2월 일본군은 패퇴하였다. 이후 미국군의 반공은 격렬하여 뉴기니 ·솔로몬제도 ·길버트 제도 ·마셜제도로 향하여 전개되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 선언에서 미 ·영 ·중은 전후 일본의 영토 처리방침을 분명히 하였다. 1944년 3월 미얀마의 일본군은 임팔 작전으로 인도에 침입하려 하였으나 7월 대패하였다. 마리아나제도에 육박하는 미군도 7월 사이판섬을 점령하고, 일본 본토 공습의 기지를 얻었다. 태평양 방면 총사령관 맥아더는 필리핀 탈환을 위하여 10월 레이테섬에 상륙하였다. 일본 해군은 전력을 다하여 레이테만의 미 함대를 격멸시키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중국전선에서도 1943∼44년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 ·신사군(新四軍)에 의하여 화북(華北)과 화중(華中)에 ‘해방구(解放區)’가 만들어짐에 따라 일본군은 간신히 점(點:都市)과 선(線:鐵道)만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f) 유럽에서의 전쟁 종결

이탈리아 항복 후의 1943년 11월, 영 ·미 ·소는 제2전선의 실시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1944년 6월 6일 아이젠하워 장군이 지휘하는 영 ·미 연합군은 북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상륙하였다. 영 ·미군의 진격과 함께 프랑스의 저항운동도 활발하여져, 8월에는 파리 시민이 봉기하여 파리를 해방하고 드골을 맞아들였다. 독일에서도 군부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가 7월 20일 반(反)히틀러 쿠데타를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미 ·영군에 호응하여 소련군의 진격도 활발하여, 1944년 가을에는 소련 영토를 해방하였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격과 이에 호응하는 지하저항전의 격화를 앞에 두고 동유럽의 동맹제국(同盟諸國)은 동요하여, 잇달아 대독(對獨) 참전으로 방향전환하였다. 1944년 3월 루마니아는 소련군이 육박하자 국왕과 군부가 인민민주주의 블록에 협력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9월 소련과 휴전협정을 체결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 불가리아는 영 ·미에 선전하고 소련에는 형식상 선전하지는 않았으나, 소련이 1944년 9월 선전하자 조국전선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10월).

이어 소련군은 유고슬라비아에 들어오지만, 이 곳에서는 일찍이 저항운동이 활발하여 1942년 유고 인민해방군이 결성되었고, 1943년 11월 티토가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를 해방하였고, 거의 자력으로 독일군을 전토에서 일소하였다. 이어서 소련군은 헝가리로 향하였다. 홀티 섭정이 휴전을 제의하자 독일은 홀티를 감금하고 친독적 정부를 수립하였다. 공산당 등의 ‘헝가리 전선’은 소련군의 협력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독일에 선전하였다(45.1).

소련군은 1945년 2월 부다페스트를 함락시켰으며, 소련군의 진격과 함께 동유럽제국에는 저항운동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기 시작하였다. 이미 1944년 10월 스탈린과 처칠은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에는 소련의, 그리스에는 영국의 우월권을 인정하기로 합의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영 ·소가 대등한 입장에서 함께 티토 정권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분규가 생겼다. 저항운동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런던 망명정부는 반소적이라고 하여 소련은 이와 단교하고, 1944년 7월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1944년 8월 런던 망명정부는 무력봉기에 의한 바르샤바 해방을 시도하였으나, 독일군에게 진압되었다. 1945년 1월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입성하고, 폴란드의 두 정권의 통일과 국경에 관하여는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일단 해결을 보았다. 또한 이 회담에서는 독일 처리문제가 검토되었으며, 소련의 대일(對日)참전도 결정되었다.

히틀러는 1944년 12월 서부전선 아르덴에서 일대 반격을 시도하지만 4일 만에 괴멸당하고 만다. 1945년 2월 소련군은 오데르강(江), 4월 나이세강(江)에 도달하였다. 동시에 영 ·미군도 공격을 재개하여, 3월 쾰른을 점령하고 라인강(江)을 건너 4월 25일 엘베강(江)의 토르고에서 소련군과 교환(交歡)하였으며, 이 날 소련군은 베를린에 돌입하였다. 사태에 절망한 히틀러는 4월 30일 애인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리고 자살하였다.

후계자로 임명된 데니츠 제독은 군대와 민간인을 가능한 한 영 ·미 점령지구로 옮기면서 5월 7일 무조건 항복하여 9일 항복이 정식 조인되었다. 5월 23일 데니츠 정부의 전원이 체포됨으로써 독일의, 제3제국은 명실공히 소멸되었다.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이 4월 29일 항복하면서 무솔리니는 4월 28일 밀라노 근교에서 살해되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끝났다.

g) 일본의 항복

1944년 11월 이래, 미군 폭격기 B-29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은 격화되었다. 1945년 2월 미군은 마닐라를 탈환하고 이오섬[硫黃島]에 상륙하였다. 4월에는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3개월이나 걸린 오키나와전에서는 전 도민이 동원되어 희생됨으로써(9만여 명), 닥쳐올 본토 결전의 비참한 양상을 암시하였다. 7월 26일 미·영·중은 ‘포츠담선언’에서 대일(對日) 처리방침을 명시함과 아울러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였다. 일본이 이를 묵살하자 미국은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9일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고 소련은 이 날 대일 참전하여 만주에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이르러 일본 군부도 항복을 결의하고 10일 밤 포츠담선언 수락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주전파의 ‘국체수호(國體守護)’ 고집으로 진통을 겪다가 일본왕의 결단으로 14일 가까스로 수락을 통고하고, 15일 일본왕은 이것을 국민에게 방송하였다. 30일 미군은 일본 본토를 점령하였고,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號)에서 항복문서가 조인되면서 태평양전쟁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났다.

h) 전후세계와 전후처리

제2차 세계대전은 문자 그대로 세계를 전장(戰場)으로 하고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를 끌어들인 전쟁이었다. 참가국은 연합국측이 49개국, 동맹국측이 8개국이며, 중립국은 스위스 등 6개국에 불과하였다. 동원병력 1억 1000만 명, 전사자 2,700만 명, 민간인 희생자 2,500만 명으로, 그 중에서 독 ·소 양국의 희생이 가장 많아 소련의 전사자 1,36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000만 명, 전인구의 약 1/10, 독일의 전사자 500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550만 명, 전인구의 약 1/10이라고 알려졌다. 일본의 전사자는 185만 명, 민간인을 포함하여 사망자 250만 명, 전인구의 약 1/40 이다. 이 개수(槪數)에서도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할 때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동원병력수는 약 2배, 전사자는 약 5배, 민간인 희생자는 약 50배이다.

요컨대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민간인의 희생자가 현저히 많다. 이것은 나치스의 인종론적 절멸(絶滅)정책에 유래한다. 민간인의 희생자 가운데 약 500만 명은 유대인인데 이것은 나치스 지배하의 유대인 총수의 약 70%라고 한다.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의 전쟁이 민간인을 제외하지 않은 제노사이드(genocide:대량살륙)전쟁으로 된 데에서 찾을 수 있겠다. 전비(戰費), 파괴된 재산을 오늘날의 물가에 맞추어 재평가한다면 너무나 방대하여서 아마도 계산할 수가 없을 정도일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의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최초부터 전쟁 책임의 소재가 명료하였다는 데 있다. 독일 ·이탈리아 ·일본은 국내에서는 파시즘화를 추진하면서 대외침략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연합국은 첫째로는 전쟁범죄인을 단죄하고(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극동 국제군사재판), 둘째로는 일본 ·독일을 점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인 민주화를 꾀하고자 하였다.

확실히 파시즘에 대항하는 연합국의 공통된 슬로건은 ‘민주주의’였으나, 자본주의국과 사회주의국과는 그 이해에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일본 ·독일의 처리를 에워싸고 양 체제의 대립으로까지 발전하였다.그 배경을 살펴보면, 최대의 피해를 받고 대독전쟁 승리에 최대의 기여를 하였던 소련은, 내외의 사회주의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국제적 발언권을 강화하였다. 소련의 지도하에 동유럽 제국은 인민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정치체제를 취하였다.

동아시아에서는 오랜 대일 항전에 견디어 낸 중화민국이 5대국의 하나가 되었으나, 국공대립(國共對立)은 내전으로 발전하여 1949년 10월 중국정권의 성립을 보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일본의 패퇴와 동시에,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는 베트남공화국,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성립되지만, 종전의 식민국인 프랑스 ·네덜란드는 이것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하지만 동남아시아뿐만 아니라 인도에서 중동아프리카에 이르는 지역에서 민족해방운동은 고조되어 잇달아 독립하였다.

이리하여 패전국 일본 ·이탈리아는 물론, 전승국 영국 ·프랑스도 뒤이어 식민지를 잃었다. 더욱이 영국에는 노동당내각이 성립되었고, 프랑스 ·이탈리아에서는 저항운동 가운데에서 공산당의 힘이 신장되었다. 미국만이 ‘민주주의 병기창’으로서 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최대최강의 자본주의국으로서 세계를 지도하기에 이르렀다.

i) 양극체제의 대립과 평화조약

미 ·소를 정점으로 하는 양 체제의 대립이 격화, 냉전화(冷戰化)함으로써 추축국과의 평화조약 체결은 용이하지 않았다. 1946년 7~10월의 파리 평화회의에서는 트리에스테(Trieste)문제를 둘러싸고 미 ·소가 대립하였으나, 1947년 2월 10일 간신히 이탈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불가리아 ·핀란드에 대한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이탈리아는 북아프리카의 식민지를 잃었고,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에게 영토를 할양하였다. 트리에스테는 국제연합 통치하의 자유지역이 되었으나, 1954년 이탈리아와 유고슬라비아에 분할되어 일단 해결을 보았다. 루마니아는 1940년의 소련에의 영토할양을 재확인하였으나 트란실바니아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였다. 헝가리의 국경은 거의 1938년의 국경으로 되었고, 불가리아는 도브루자 남부지방의 영유가 인정되어 41년의 국경을 거의 유지하였다. 핀란드에 대하여는 1939년의 소련-핀란드전쟁에 의한 소련에의 영토할양이 인정되었다.

독일처리방침은 1945년 8월 2일 포츠담 의정서에서 명확히 되었으나 그 해석을 에워싸고 미 ·소는 매사에 대립하여, 1947년 말의 런던 4국 외상회담은 결렬되었다. 1949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서독)과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수립되었고, 미 ·영 ·프는 1952년 5월 서독과 ‘평화확정조약’을 맺었으며 1954년 10월 파리협정에서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사실상의 단독강화를 체결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1953년 5월 동독에 자립권을 주었고, 1955년 9월 동독의 주권을 회복하였다. 이리하여 두 개의 독일은 고정화되었다.

1945년 7월 26일의 대일 포츠담선언에 명시되었으나, 대일 강화문제에서도 미 ·소는 일치되지 않았으며, 또 일본 여론도 분열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일 강화조약이 조인되었다. 소련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는 조인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초청되지 않고 인도 ·미얀마 ·유고슬라비아는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중화민국 ·인도 ·미얀마와는 별도로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6. 미·소 냉전시대 (1945~1990)

2차 대전 당시 히틀러는 영국, 소련, 미국 등 강대국과 한꺼번에 전쟁을 함으로써 전술과 무기면에서는 우위에 있었으나 생산력과 인력, 보급이 뒷받침 하지 못함으로써 패망하였습니다.
일본 역시 중국, 만주, 태평양 등 광대한 전선을 형성했고, 부족한 자원과 기술, 낮은 전략과 전술(항공모함보다 전함에 치중), 생산력 차이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멸망하였습니다.

a) 전 후 미국

2차대전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 등 과거 유럽 강대국은 산업이 피폐해지고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음으로써 약소국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2차대전으로 인해 생산력이 크게 증대되어 뉴딜정책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대공황의 잔재를 말끔히 걷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최대의 산업 및 군사 강국이 되었습니다.

전쟁 종결 당시 미국의 금 보유고는 200억달러로 세계 금보유고의 2/3에 달했고, 세계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담당했으며, 세계 수출의 1/3을 차지하였습니다.
미군은 주력 군함 1,200척과 수십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함으로써 영국을 압도하는 해군력을 갖게 되었고, 유럽의 나치를 분쇄한 2,000여대의 중 폭격기와 일본 도시를 잿더미로 만든 1,000여대의 B 29 장거리 폭격기를 소유하였습니다.

미국은 전후 자유무역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위해 새로운 질서를 확립했는데, 1942~1946년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IBRD) 등 국제협정을 마련했고,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이 체결되었습니다.
경제개발을 위해 약간의 돈이라도 차입하고자 하는 국가는 자유태환과 공개경쟁을 준수할 수밖에 없었으며, 자본주의적 체제에 이질감을 느낀 소련은 일찍이 이 체제를 멀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유경쟁 체제는 미국과 같이 경쟁력이 강한 나라에는 유리하였지만, 2차 대전을 겪어 폐허가 되고 빚더미에 올라 앉은 나라에는 불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소련의 영향력이 커지자 미국은 마셜플랜(Marshall Plan)을 통해 경제적 원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b) 전 후 소련

2차대전 당시 독일군 506개 사단을 격파하였지만 자국민 2000만명 이상이 희생되어 전쟁을 정면으로 치루어냈던 소련은 전 후 동유럽과 만주, 한반도 등에 군대를 파견해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소련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는데, 북쪽으로는 핀란드, 중부유럽에서는 폴란드의 영토를 침해했고, 남쪽에서는 루마니아를 침식했으며, 발트해 연안 3국은 합병하였습니다.

소련은 동유럽에 폴란드,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의 위성국을 세워 서방세력을 견제했고, 극동에서 만주, 사할린, 북한 등을 신속히 점령함으로써 러·일전쟁의 패배를 설욕했습니다.
하지만 전 후 소련은 군사상국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피폐하고 가난했는데, 미국의 무기대여와 경제지원이 끊힘으로써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소련은 1945~1950년 경제성장을 위해 국민생활과 농업을 희생시키면서 중공업과 산업발전에 총력을 기울여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게 되었습니다.
소련은 군 현대화에도 투자를 해 1948년 미그(MIG)-15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였고, 장거리 전략공군을 창설하였으며, 독일의 과학·기술자를 활용하여 유도 미사일과 원자폭탄을 개발하였습니다.

c) 냉전 (Cold War)

2차 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한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한 사회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는데 물리적인 충돌 없이도 전쟁상황 같은 첨예한 긴장상태가 지속되었다고 하여 '냉전'(cold war)이라 지칭하게 되었습니다.
냉전은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으로 더욱 심해졌으며, 과도한 군비경쟁과 핵무기 경쟁을 일으켰고, 케네디 대통령 시절 쿠바의 미사일 위기로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이면에는 미국 군산 복합체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 산업의 거의 절반을 차지했던 미국의 군산 복합체(military-industrial complex)는 초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나고 평화무드가 정착되자 의회에서 군비를 대폭 삭감해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래서 소련과 짜고 한국전쟁을 일으켜 소련과 공산주의란 새로운 적을 만들어냈고 군사비도 대폭 증액되었습니다.

연도 미국 소련
1948 109 131
1950 145 155
1951 333 201
1953 496 255
1955 405 295
1958 455 302
1961 478 436
1962 523 499
1965 518 623
1966 675 697
1970 778 720
2004 4013 약 600

미국과 소련의 군사비 지출(단위 1억달러, 출처:강대국의 흥망)

미국의 군사비는 한국전쟁(1950) 발발 이후 급격히 늘었으며, 1953년 이후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군산복합체가 미국의 사회와 경제를 망치기 전에 이를 통제해야겠다는 노력이 반영되었지만, 1962년 쿠바 위기로 다시 증액되었고 1966년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상승했습니다.
그리고 구소련이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었는데도 테러와의 전쟁이후 미국의 군사비는 대폭 증가되어 2004년 군사비는 재정적자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인 4013억달러(450조원)에 달합니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고, 1950년대 소련이 장거리 폭격기를 보유하자 미국의 핵 독점시대는 막을 내리고 양국간의 핵무기 경쟁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수소폭탄을 개발하자 소련도 1953년 수소폭탄 실험을 하였고, 소련이 1957년 대륙간 탄도탄을 개발하고 세계 최초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 미국은 긴장하게 됩니다.

1960년대 이후 미국과 소련은 잠수함에서 핵 미사일을 발사하는 기술을 발전시켰으며, 온갖 종류의 전술 핵무기와 단거리 로킷을 제조하였습니다.
미국과 소련은 1961년 베를린 위기,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등에서 충돌했으며, 베트남 전쟁으로 직·간접적으로 부딛혔고, 중동과 아프리카 등에서 서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미·소 양국은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할 수 있는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 상태를 유지했는데, 우발적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핫라인(Hot-Line)을 설치했고, 1963년 핵실험 금지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밖에도 대륙간 탄도 미사일 수를 제한하고, 여러 군축협상을 벌였으나 군비경쟁은 멈추지 않았고, 다탄두 로켓 같은 새로운 무기체계를 도입하였으며, 미사일 적재 잠수함을 늘렸습니다.

소련은 해외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해군력을 강화했으며, 리비아의 카다피와 그라나다의 좌익정권을 지원하고, 이디오피아, 모잠비크, 기니, 콩고 등 서아프리카에 공산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1979년 소련군은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는 등 팽창주의를 일삼자 1980년 미국의 공화당 정부는 소련을 '악의 제국'(Devil Empire)이라고 비난하면서 대규모 군사력과 비타협적인 정책으로 대항하였습니다.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엄청난 자원과 인력을 쏟아 붓고도 실패했고, 국론은 분열되었으며, 방위비도 삭감되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레이건가 행정부 들어서면서 강한 미국을 슬로건으로 국방비를 증액했고, 인공위성으로 대륙간 탄도탄을 요격하는 SDI(스타워즈 계획)를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레이건은 경기부양을 위해 세금은 줄이면서도 예산은 늘려 미국 정부를 만성적자의 늪에 빠뜨렸습니다.

미국의 도전에 자극 받은 소련은 경제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국방과 과학·기술 분야에 예산을 집중했고, 아프카니스탄 전쟁의 실패까지 겹쳐 국가경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습니다.
결국 소련은 군사 분야에 모든 경제력을 투입한 결과 만성적인 가난과 비능률적인 공산주의 시스템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고, 고르바초프가 자본주의를 도입했지만 결국 민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1991년 붕괴합니다.  

소련은 중공업과 군수산업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투입했고, 개인소비를 억제하는 경제체제와 산업의 비효율성, 낮은 농업 생산성 등의 문제가 쌓여 자본주의 국가보다 경쟁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미국 역시 1960년대 이후 과도한 국방비 지출로 재정적자와 산업 경쟁력 약화로 무역적자에 시달렸으며, 금보유고가 줄어들어 브레튼우드체제(Bretton Woods System)가 붕괴됩니다.

  미국 소련
대륙간 탄도 미사일 적재 탄두 2,118 6,420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 적재 탄두 5,536 2,787
항공기 적재 탄두 2,520 680
10,174 9,987

'국제 전략 연구소'(IISS)가 밝힌 미국과 소련의 전략 핵탄두 보유수 (1986)

C. 대영제국의 흥망

로마제국에 이어 17~19세기에 결쳐 세계적인 제국을 건설했던 대영제국의 흥망사는 이 시대에도 많은 교훈을 줍니다.
현재 세계 유일의 초 강대국인 미국도 대영제국의 전철을 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영제국이 지나친 군비와 산업경쟁력 약화, 잦은 전쟁 등으로 국력이 쇠약해졌듯이 미국 또한 그러합니다.
원래 영국은 잉글랜드만을 가르키는데 17세기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통합하면서 브리튼(Britain)이 됩니다.

1. 대영제국의 개관

대영제국은 한 때 세계 육지 면적의 1/4, 세계 인구의 1/6을 지배하였으며, 세계 산업과 금융의 중심지였습니다.
유럽의 외딴 섬에 있는 혼열민족(이베리안, 켈트, 앨글로 색슨, 데인, 노르만 등)이 장기간에 걸쳐 세계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 학문 등을 주도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영국은 16세기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 18세기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유럽의 강자로 등장합니다.

하지만 영국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전쟁(1899~1902)으로 제국주의의 자성론이 일었고, 1,2차 세계대전으로 국력을 거의 소모하였으며, 미국과의 수에즈 운하 분쟁(1956)으로 제국주의의 막을 내리게 됩니다.
영국은 17세기 이후 200년에 걸쳐 서서히 융성하였다가 절정에 올랐고, 다시 200년에 걸쳐 서서히 내리막 길을 걸었다고 볼 수 있는데, 19세기가 대영제국의 절정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국은 제국 초창기에는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에 바탕을 둔 중상주의적인 팽창을 했고, 제국 중반기인 19세기에는 강한 산업 경쟁력으로 자유무역에 바탕을 둔 번영기를 가졌으며, 제국 말기에는 독일, 프랑스 등과 과잉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다가 보호무역과 경제 블록화를 실행해 필연적으로 세계전쟁을 유발하였습니다.
영국의 힘을 지탱한 것은 막강한 해군력, 거대한 공업 생산력, 광대한 식민지, 금융 보험 해운의 발달 등입니다.

대영제국이 멸망한 결정적인 원인은 1,2차 세계대전때문인데 전쟁기간동안 국민소득의 60% 이상을 전비로 쏟아부었고, 영국 재무부와 중앙은행은 거의 파산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45년 영국의 부채는 33억 6천만 파운드에 달했고, 11억 2천만 파운드에 상당하는 영국의 해외자산이 매각되어 중동의 석유 이권 등 해외자산을 미국 기업에 헐값에 넘겼습니다.

과도한 군비지출이 강대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것은 이전 단원에서도 지적한 바 있는데, 영국이 오랫동안 제국의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이 전성기인 19세기에도 국민생산의 2%만 군사비로 지출했다는 점입니다.
영국이 이렇게 적은 군사비로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세력균형(Balance of Power)이란 외교정책을 썼기 때문인데, 세력균형 정책은 한 나라가 강대해지면 다른 경쟁 국가가 세력균형을 이루도록 도모하는 정책입니다.

2.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과 스페인 무적함대

영국도 한 때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즉위(1558년)하기 전에 영국은 유럽에 남은 최후의 영토인 칼레를 상실하고 섬나라로 고립됬습니다.
그러나 평생 독신으로 지낸 엘리자베스 여왕은 성공회 수장이 되었고, 세심한 국정과 세련된 외교로 나라를 일으킵니다.
엘리자베스와 재상 세실은 즉위 다름 해 스코틀랜드를 점령해 에든버러 조약을 체결하여 스코틀랜드를 통합하였습니다.

1567년 스페인 정예 육군 5만명이 명장 알바 공작의 인솔 하에 네델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의 반 스페인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영국 건너편인 네델란드에 진주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당시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네델란드를 스페인군이 점령하고, 그 곳이 영국 켄트 주의 해안까지 불과 48km밖에 안된다는 것은 영국의 안보에 큰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에 영국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네델란드의 반군을 지원하며, 해적을 이용하여 스페인군의 보급을 방해하는 등의 간접적인 전략을 사용합니다.
결국 영국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참모들의 치밀한 준비와 지도 끝에 130척의 함선과 3만명의 군사를 동원해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유럽의 패권을 쥐게 됩니다.

대영제국의 기초를 이룬 것은 다름 아닌 풍부한 학식과 차분한 인품을 갖춘 엘리트들인데 이들은 폭 넓은 정보수집과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으로 약점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이러한 엘리트가 배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영국의 귀족제도, 옥스퍼드 대학 같은 우수한 교육 시스템, 인격을 중시하는 영국의 신사(Gentleman) 정신 등이 있습니다.

3. 대영제국의 위기

영국은 19세기에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1850년부터 1879년까지 영국의 대외무역은 3배나 신장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간동안 선박이나 철도 등 교통수단의 발달로 북미와 동유럽의 농산물이 싸게 들어와 영국 내 농산물 생산은 저하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산업 경쟁력이 약화되고, 해외 투자가 급증해 영국의 경제적 불안감이 높아졌습니다.

1820년대까지 보호무역을 시행했던 영국은 경제패권을 확립하여 공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자 해외 시장확보를 위해 자유무역의 기치를 들고 외국에 시장개방을 요구하였습니다.
자유무역은 영국은 공업은 발전시켰지만, 농업시장의 개방으로 대량의 식량 수입이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장기간에 걸쳐 무역적자가 일어났습니다.

19세기 말의 20년 동안 세계를 덮은 경제불황은 각 국을 보호무역주의로 몰아 넣었고, 면제품 등 영국의 수출은 대폭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영국은 경쟁력이 저하된 자국 산업의 유지를 위해 식민국가와 경제 블록화를 형성했고, 개방적 블록으로서의 대영제국의 세력권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러한 영국의 노력은 제국의 과잉 확대를 초래하게 되었으며, 광범위한 지역의 군사적 개입에 따른 비용이 증가되었고, 고전적인 제국의 피폐로 연결되었습니다.
영국의 팽창주의는 세계적인 '대경쟁의 시대'를 격화시켜 선진국과 후발 공업국과의 마찰을 빚었고, 식민지에 대한 무리한 억압은 식민 지배에 대한 도덕성과 명분의 상실을 가져 왔습니다.

4. 대영제국의 수치 - 보어 전쟁

남아프리카 전쟁이라고도 하는 보어전쟁은 1899~1902년 영국과 트란스발공화국이 벌인 전쟁입니다.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에서는 영국이 케이프 식민지를 기지로 하여 세력을 확대시켰고, 그 북방에는 네덜란드인의 자손인 보어인이 건설한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예자유국이 있었다. 1867년 트란스발에서 금광이 발견되고, 오렌지강변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지배권 확립을 기도하여, 많은 영국인을 이 지방으로 옮겨 들어가게 하였다. 따라서 영국인과 보어인 사이에 마찰이 생겨, 1881∼84년 제1차 전쟁이 일어났다. 그 후 트란스발은 영국과 대항하기 위하여, 오렌예자유국과 군사동맹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양국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어, 1899년 10월 마침내 양측간에 전쟁이 시작되었다.

1900년 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예자유국도 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예자유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연합보어군은 그 후 2년 동안 게릴라전을 전개, 반항을 계속하여 영국군을 괴롭혔으며 두 나라의 대부분을 다시 해방시키고, 영국령까지 진격하여 들어갔다. 이에 영국은 철저한 전멸전법을 취하여, 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 ·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비전투원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 이 강제수용소의 설비 ·대우는 최악의 상태로서 총 약 2만의 사망자를 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민족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 함으로써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희생도 매우 컸다.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두산 백과사전>

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끌어 모은 50만 대군으로 총력전을 펼치고도 3만5천명의 보어군과 오랫동안 접전을 벌렸고, 야만적인 민간인 학대는 국제적인 비난과 제국주의에 대한 영국내 자성론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전쟁의 명분도 없었고, 단지 남의 나라에서 발견된 금광이 탐이 나서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영국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었고, 대영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전초적 사건이었습니다.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세실 로즈 일파가 영국인 중에서 범법집단을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해 정부를 타도하고 금광의 지배를 꾀한 제국주의적 음모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3일만에 보어 정부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영국 제국주의'라는 오명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899년 10월 보어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은 불러 대장의 지휘 하에 3개 사단 8만명의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의 두배 이상 되는 병력입니다.
20세기 들어 첫 전쟁인 보어전쟁은 공교롭게도 미국이 사상 처음 패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이었는데 보어군의 용감한 반격과 매복공격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는 영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영국 육군 최고의 명장이었던 불러는 경질되었고, 수 많은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70세의 로버츠 원수가 지휘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지휘는 49세의 참모장인 키치너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는 거대한 조직에 의한 '기계 전쟁'을 위해 총동을 체제를 지휘하였습니다.

키츠너는 조직화된 병력의 집중 배치와 계통적인 보급체계를 중시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면돌파를 실시하는 세계대전형 군인이었는데, 훗날 1차대전에서는 징병제를 도입해 거대육군을 창설하고 총력전의 선두에 서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1차대전의 솜 전투나 파센텔의 대량전사라는 결과로 연결되고, 영국군의 궤멸적인 손실을 초래하게 된 전략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영국군은 보어군에 대한 민중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의 부녀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한사람씩 수용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에 강제 수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엘리트 중 양식 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환멸과 반발을 일으켜 '제국의 이상'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게 하였으며,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이 전쟁은 체임벌린과 세실 로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 거대한 증오를 사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불 태워 죽인 이래 이만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인 없다고 확신합니다.

부도덕한 전쟁에 대해 전쟁을 찬동하는 측은 좋든 싫든 우리 조국의 전쟁이라는 '애국주의'와 배타적 맹목적 광신적 애국주의이자 대외 강경론인 '징고이즘'(jingoism), 인류 평등을 위한 전쟁이라는 호전론(好戰論) 등으로 옹호하였습니다.
양자간의 격렬한 논쟁은 국론을 분열시키고, 엘리트 가운데서도 친구 가족 사제 간에도 분열을 일으켜 '양심의 대결'이라는 양상을 띠게 됨으로 영국인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이러한 균열은 자유당의 붕괴와 노동당의 대두라는 20세기 영국 정치사의 대전환의 계기가 되었고, 지식인들 가운데 냉소주의를 심었으며, 이 후 스패인 내전과 수에즈 전쟁에서의 국론 분열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보어 전쟁은 영국군 5만명의 사상자와 보어군의 4천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2만명의 부녀자가 희생되었고, 2억 3천만 파운드(1900년 국민 총소득은 17억 5천만 파운드)의 전비를 들인 끝에 3년만에 끝이 났습니다.

역사가 테일러는 보어 전쟁의 결과 보어인의 독립이 무산된 것 이상으로 영국인의 '제국에의 신념'에 대한 정신적인 권위가 실추된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제국 지배에 대한 정당성이나 도덕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고, 국민의 정신적 활력의 쇠퇴를 가져와 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에 이은 20세기 영국의 쇠퇴기인 에드워드 7세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Age)는 근엄했던 빅토리아와 방탕했던 에드워드의 성격만큼이나 극명하게 다릅니다.
중후하고 성실하며 확신에 찬 빅토리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무책임하고 허무주의적이며 향락적인 에드워드 시대는 '마음의 상처'와 '자기 확신의 상실'을 초래한 보어전쟁으로 기점으로 갈리기도 합니다.

5. 미국의 도전

영국은 1763년 프랑스와의 7년 전쟁의 승리로 북미 대륙에서 프랑스 세력을 일소하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앵글로색슨의 대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러부터 20년만에 미국과의 독립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북미에서 지위를 잃어 버렸고, 영국인들은 심한 배신감을 맛 보아야만 했습니다.

새로 태어난 미국 공화국은 급진적인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였으며, 이후로 1세기 동안 영국과 대립과 마찰을 빚었습니다.
1820년대 중남미의 스페인 식민지가 독립 움직임을 보일 때 프랑스가 개입하려 하자 영국은 미국에 '아메리카에 유럽의 개입을 허용하지 말자'는 성명을 공동 발표하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은 영국을 빼돌린 채 먼로 선언을 발표하였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캐나다 국경문제, 파나마 운하 구상, 영해군의 전시 봉쇄권 등을 놓고 대립했는데, 미국은 영국과의 힘의 격차를 인정하면서도 굴복하지는 않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영국은 1861년 시작된 미국의 남북전쟁에 남부의 편을 들어 참전함으로써 미국을 분할하거나 미국 정부를 전복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맙니다.

남북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30년만에 공업생산과 무역액이 두 배로 증가될 정도로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고, 인구도 급격히 늘었습니다.
서부 개척이 끝나자 미국은 해외에 눈을 돌려 1890년부터 불과 10년만에 세계 3위의 해군국이 될 정도로 성장해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였습니다.

1895년 미국이 남미의 베네수엘라와 영국령 기아나의 국경분쟁 때에 먼로 선언을 내세워 자신의 강제적 중재권을 인정해 줄 것을 영국에 요청하였으나 영국이 이를 일축함으로써 양국은 전쟁 직전의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같은 앵글로 색슨족끼리의 충돌을 꺼려 1901년 파나마 운하를 미국에게 넘겼고, 알래스카 국경 문제를 미국에 양보하는 등의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는 영국에 당시 급격히 성장하는 독일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고 세계 각지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켜 유럽에 집중시켰기 때문에 프랑스나 러시아, 미국에 대해 양보해 협상을 맺는 외교를 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국의 포위망을 벗어나려는 독일과는 계속 충돌을 빗어, 1905년 탕헤르 사건(1차 모르코 사건)과 1911년 아가디르 사건(2차 모르코 사건)을 겪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의 위협을 과대 평가하고 독일과의 공존 가능성을 포기하고 억지와 봉쇄에만 초점을 둠으로써 1차세계대전 이란 재앙을 맞게 되었습니다.
영국은 대국의 포용력을 잃어버리고 조급하게 대응했는데, 영국이 미국에게 양보한 것의 절반만 독일에게 양보했더라면 전쟁을 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차대전으로 영국의 국력은 크게 위축되었고, 미국으로부터는 거의 도움을 받지 못했으며, 전쟁이 끝나자 미국의 채무국으로 전락해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 설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영국은 1차세계대전을 통해 '다 가지려고 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교훈과 '쥐도 코너로 몰면 고양이를 문다.'는 값비싼 교훈만 얻게 됩니다.

6. 대영제국 몰락의 내부적 원인

당시에도 현재와 같은 자유무역으로 각국은 치열한 경쟁을 벌였는데, 영국은 신흥 공업국에 대한 가격과 품질의 우위를 점점 잃어 버리고 고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영국의 기업가들은 해외에 공장을 세워 투자하거나 금융산업에 집중했는데, 이는 영국의 산업 공동화와 무역적자, 인력의 유출과 교육수준의 저하 등을 초래하였습니다.

이에 일부 개혁파들이 제조업의 기반유지와 관세수입에 의한 재원확보를 위해 보호무역을 주창하였으나, 자유무역을 신봉하는 보수파에 밀려 실행되지는 못했습니다.
영국은 독일을 견제할 거대육군을 창설할 재원을 마련할 수 없었고, 필연적으로 프랑스, 러시아와 연합하는 삼국협상을 맺었는데, 이는 오히려 1차 세계대전을 촉발하게 됩니다.

당시 영국은 거대 토지를 소유한 귀족 중심의 사회였는데,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 조달을 위해서는 세제(稅制)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지만 의회를 장악한 토지 귀족이 스스로 개혁을 이루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로써 사회 활력의 고갈, 자유무역을 둘러싼 대립, 그리고 부족한 재원이라는 세가지 장벽이 대영제국의 개혁을 좌절시키게 됩니다.

1906년 구성된 자유당 내각에서 보어전쟁의 반대와 복지사회의 이상을 부르짖었던 로이드 조지가 재무장관에 취임해 1910년 '민중 예산'(peoples budget)에 의한 사회개혁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의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개혁' 노선은 1차세계대전과 그것이 몰고온 여파에 의해 난파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맙니다.

7. 영국의 대참사 - 1차 세계대전 (1914~1918)

1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군인의 전사자는 무려 90만명으로 2차 세계대전 전사자 40만명의 두배가 넘습니다.
독일 또한 1차 대전 때 180만명과 2차 대전 때 350만명의 전사자를 낳았습니다.
1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탈진시켰고, 비인간적인 작전은 영국인들에게 전쟁에 대한 환멸을 가져왔습니다.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1차 세계대전은 인간의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은 가장 비참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10년 전부터 독일의 강대국화와 해외진출을 대영제국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이고 군사 외교 경제적 수단을 통한 억제와 압박으로 독일을 유럽 안으로 가두려고 하였습니다.
1914년 8월 거대한 독일 육군이 성난 파도처럼 벨기에를 지나 파리로 쇄도했지만 9월 4일 프랑스가 파리 근교 마른 강가에서 반격에 성공하여 간신히 프랑스를 지켜내었고, 전선은 프랑스 내에서 고착되었습니다.

전쟁은 철조망과 참호로 대치한 지루한 참호전이었고, 공격하는 쪽은 기관총 세례를 받았고, 방어하는 쪽은 포탄 세례를 받으면서 막대한 희생을 치루게 되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가 독일 측으로 참전하자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했는데, 적의 집중 포화를 받아 그 곳에서만 20만명이 사상했습니다.

유럽 전장의 교착 상태를 뚫기 위해 영국은 1916년 6월 솜 전투에서 25개 사단을 투입하는 대공세를 펼쳤는데, 수십만명의 보병이 광대한 적진을 향해 일제히 돌진한 무모한 전술은 첫날 7만명의 사상자를 낳았습니다.
영국은 3개월 동안의 솜 전투에서 50만명에 가까운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대부분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지원병이었고,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대학에서 출전한 사람의 1/3이 집에 돌아 오지 못했습니다.

8. 아라비아의 로렌스

1차 세계대전 후에도 영국은 모든 식민지를 유지하고 독일 식민지까지 취합함으로써 겉으로는 멀쩡했지만 속으로는 인적, 재정적, 정신적으로 골병이 들었습니다.
영국의 젊은이들은 제국의 이상에 환멸을 느꼈고, 1925년의 총파업을 비롯해 상습적인 노사분규에 시달렸으며,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문명에 의한 세계지배라는 대영제국의 명분을 흔들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석유수요가 높아겼기 때문에 석유자원을 확보하고,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 영국은 중동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솜전투의 실패 등으로 좌절을 맛 보았던 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앨런비 장군이 지휘하는 중동 파견군이 이집트에서 시나이 반도를 가로질러 투르크군을 추격하여 십자군이 철수한지 700년만에 예루살렘을 탈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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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리비아의 로렌스'로도 유명한 토머스 애드워드 로렌스는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고고학자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카이로 주둔 육군 정보부의 정보장교로 근무하였습니다.
당시 영국은 오스만 투르크 통치 하에 있던 아랍인들을 메카의 족장인 하시미테 가(家)의 후사인을 중심으로 결집시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도록 공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1916년 연락장교로 아라비아 반도 서부의 헤자즈 지방에 파견된 로렌스는 그곳에서 후사인의 아들 파이살과 역사적인 만남을 갖습니다.
로렌스는 파이살과 협력하여 투르크군에 대항하는 아랍-베두인군의 사막 유격전을 지휘하게 되었고, 50기의 베두인 낙타 부대를 이끌고 죽음의 네프트 사막을 기적적으로 건너 난공불락의 요충항인 아카바 요새 기습에 성공합니다.

그 후 로렌스의 아랍 군단은 수에즈 운하에서 가자로 진출하여, 아라비아의 정규군 우익과 합류함으로써 예루살렘의 수복에 성공합니다.
영국은 이미 메카의 족장 후사인과 만일 아랍인이 영국군과 협력해 투르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킨다면 아랍인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해 주겠다는 밀약을 맺은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국은 한편 프랑스와 아랍인 지역을 분할하기로 밀약한 상태였는데, 이를 안 로렌스는 도리상 중동지역을 아랍인들에게 돌려 주어야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함락한 뒤 아랍의 기병군단을 재촉하여 사라센 제국의 수도이자 아랍의 상징적 도시인 다마스쿠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낙타와 말로 구성된 로렌스의 부대는 트럭과 지프를 타고 다니는 영국군을 앞지르기 위해 투르크 군의 저항이 적은 시리아 사막을 횡단해 영국군보다 하루 먼저 다마스커스 입성에 성공합니다.
대영제국의 탐욕스러운 제국주의에 맞서 영국의 신의와 도덕을 지키고 아랍인들에게 독립국가 건설을 원했던 로렌스의 작은 반란으로 인해 사람들은 로렌스를 이상주의자로 기억합니다.

로렌스의 아랍 군단이 다마스쿠스를 점령하기 위해 시리아 사막을 달리고 있을 때 로이드 조지 내각의 외무장관인 벨푸어는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건설을 약속한 편지를 보냈습니다.
후에 벨푸어 선언이라고 불리게 된 이 약속은 영국과 미국의 유럭한 유대인 금융가로부터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자금을 순조롭게 조달 받기 위한 것입니다.

중동의 석유와 수에즈 운하를 손에 넣기 위해 벨푸어는 아랍에 독립국가 건설을 원치 않았고, 유대인 국가 건설이 제국의 유지라는 영국의 전 후 구상에 적합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아랍 통일국가를 약속한 맥마흔 편지, 프랑스와 중동 분할을 약속한 사이크스-피코 협정,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건설을 약속한 벨푸어 선언이라는 서로 모순된 세가지 약속을 한 채 1차 세계대전을 끝냅니다.

이러한 행동양식은 벨푸어와 처칠 그리고 권력의 사제로 변신한 로이드 조지 등의 제국 유지에 대한 집념에서 나온 것으로 서로 모순된 것을 뒤섞어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주도권을 쥐는 앵글로 색슨의 행동양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도덕으로 지탱되었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대영제국과는 다른 제국 정신의 명백한 후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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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지역 지도

1919년 인도에서 출정한 10만명의 영국-인도군은 페르시아만의 쿠웨이트에 상륙해서 이라크 평원을 북상하여 바그다드를 점령했고, 다시 북상하여 키르크크와 모술의 유전지대를 확보함으로써 페르시아만과 이라크 전역을 확보하였습니다.
로렌스는 제국의 야욕에 환멸을 느끼고 영국으로 귀국하여 옥스퍼드 대학의 고고학 연구원으로 돌아 갔지만 전장을 누볐던 로렌스는 적응하지 못하였고, 국가에서 주는 훈장도 거부한 채 살다가 1935년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1919년 4월 벨푸어 선언에 의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이주가 된 다음부터 지금까지 80년 이상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아랍의 분쟁과 대립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영국은 팔레스타인을 지키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려야 했고, 아프카니스탄의 충돌과 이라크의 반란에도 직면해야 했습니다.

9. 잠에서 깨어난 식민지들

1919년 4월에 북인도 암리차르에서 영국군이 수천명의 무저항 인도인을 대량 학살한 사건은 제국의 역사에 있어서 씻을 수 없는 잔혹함과 오점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간디와 네루의 독립운동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1920년 4월 인도의 펀자브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인도 식민정부의 예상을 깨고 급속도로 확산되었는데, 그것은 6년 전 세포이의 반란 이후 '대반란의 계절'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도는 영국에 있어서 자원과 시장을 제공하는 생명선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1차 대전 중에 출정한 군인 390만명 중 150만명이 인도 식민정부의 자체 비용에 의해 동원되었습니다.
영국이 '로렌스의 환멸'이나 '앨런비의 망설'임에도 불구하고 중동에 대한 노골적인 지배의 야욕을 드러낸 이유도 인도로 가는 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국이 무려 700년동안 오직 무력으로 지배해온 아일랜드도 1919년 자치권을 획들하기 위한 독립운동이 일어났으며 이후 영국 왕권의 부정과 완전 독립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영국이 1916년 아일랜드의 이스턴 봉기 참가자에 대해 잔혹안 처형을 실시하고, 로이드조지가 투입한 특수부대에 의한 독립운동가들의 학살은 아일랜드인이 영국인을 철천지 원수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의 승리에 도취했던 영국은 세계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독립열기와 반란에 휩싸였고, 과연 '제국을 유지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영국이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부 후퇴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디까지 후퇴할 것인가?'가 주요 과제가 되었고 이 가운데 새로 등장한 개념이 유화(有和, appeasement)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힘의 나약함을 느끼면서도 깨끗하게 화해하지 않는, 지배에 대한 집념을 보여 주는데, 로렌스에게 환멸을 심어 주었던 속임수적인 대응 방식이 대영제국의 '유화'정책입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유화정책은 제국의 식민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었고, 점차 주변 유럽에 대한 정책에도 적용되었습니다.

10. 대영제국의 말로 - 2차 세계대전

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성장에 대한 영국의 무리한 억압으로 발발하였다면, 2차 세계대전은 피폐해진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무리한 전쟁 배상금 요구로 발발하였습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대공황까지 겹치자 독일은 극도의 정치 사회 경제적 혼란을 겪었고, 자연스럽게 전체주의적인 파시즘 정권이 들어선 것입니다.

히틀러는 집권하자 경제부흥과 함께 금지된 재무장을 실시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군사력에 집중한 군국주의적인 정책은 단기간 내에 독일을 다시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으로 만들었습니다.
소련과 불가침 협정을 맺은 독일은 마음 놓고 서부로 진격할 수 있었고, 안일하게 안주했던 프랑스는 참패했고, 됭케르크에서 기적적으로 탈출한 영국은 뒤늦게 제국은 모든 자원을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영국에 비해 영불 해협을 무사히 건널 해군력이 없었던 독일은 우세한 공군력을 바탕으로 런던을 비롯한 영국에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했지만 이는 오히려 영국이 군수품을 생산할 시간을 벌어 주었습니다.
영국이 항복하지 않고 새로 개발된 레이더를 이용한 조기 경보망과 허리케인과 스피트파이어 같은 우수한 전투기로 대등한 공중전을 벌였기 때문에, 히틀러는 영국 정복을 포기하고 소련을 침공하게 됩니다.

스탈린의 대대적인 숙청으로 허약해진 소련군은 독일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순식간에 밀려 모스크바 앞까지 진격을 허용했지만 추운 겨울과 대대적인 반격으로 방어에 성공합니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을 포기하고 남부의 유전과 곡창지대를 노려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노렸으나 치열한 접전 끝에 오히려 포위되어 대군을 잃었고, 이후로 계속 소련군에 밀리게 됩니다.

독일이 소련과 싸우고 있는 동안 영국은 직접 대응을 피하고 주로 중동에서 롬멜의 기갑사단과 전쟁을 벌여 보급이 빈약한 롬멜 사단을 물량전으로 물리치고 이탈리아로 진격하게 됩니다.
미국이 진주만 피해로 2차대전에 참전하면서 전쟁의 상황은 급변하고,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과 동쪽에서 진격한 소련군에 포위된 독일군은 끝내 다시 패망하고 맙니다.

전쟁에서는 승리했지만 영국은 엄청난 물직적 피해를 입었고, 국가의 모든 자원을 투입한 나머지 빚더미에 올랐으며, 거의 모든 식민지를 잃고 미국에 제국의 자리를 물려 주게 됩니다.
영국은 독일과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아시아 방어에 소홀히 하게 되는데, 아시아의 거점이었던 싱가포르를 일본에게 뺏김으로써 13만 5천명 이라는 전례 없는 영국군 포로를 만들었습니다.

1945년 5월 8일 처칠은 하원에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전하고 환희에 빠졌지만 수주일 뒤 치루어진 총선에서 패배해 권좌에서 물러났고, 1960년 1월 사망합니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의 '무기 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한 대규모 경제지원으로 생활을 영위했지만 전 후 미국은 모든 지원을 중단하였고, 영국은 식량수입에 대한 대금지불조차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릅니다.

'무기 대여법'의 규정에는 영국이 미국으로부터 제공 받은 물자와 비슷한 제품은 어떤 것도 다른 국가로 수출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항목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영국 공업제품의 수출을 막아 영국 경제를 망가뜨린 독소로 작용합니다.
1944년 영국의 수출액은 1938년의 1/3 수준으로 떨어졌는데, 그 해 6월에 영국 상무부는 '전 후 영국은 수출이 증가할 전망이 없으며 영국 산업의 경쟁력 저하는 피할 수 없다.'는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11. 대영제국의 종말 - 인도에서의 퇴진과 수에즈 운하 사건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동안 약 11억 파운드의 해외 자산을 모두 잃었고,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7억 6천만 파운드였던 대외채무는 33억 파운드로 늘어났습니다. (1938년 영국의 국민 총소득은 46억 파운드였습니다.)
전 후 미국의 무기 대여법 정지로 영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아 배신감을 느꼈지만, 미국에 계속적인 거액의 융자를 구걸하는 것 이외에는 살 방도가 없었습니다.

1945년 영국과 미국의 재무 협상에서 미국이 제시한 조건은 37억 5천만 달러를 2%의 이자로 대여해 주는 대신 대영제국의 식민지를 하나의 경제권으로 묶는 이른바 '제국 특혜관세'(imperial preferential tariff) 제도를 철폐하여 미국에 수출문호를 개방하고, 파운드 대 달러 교환율을 1939년 당시의 4달러 3센트라는 고율로 정하고, 조속한 시기에 파운드의 교환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영국은 1945년 12월 12개조로 된 영미 차관협정을 조인하였는데, 이 협정만큼 미국의 압도적인 우위와 영·미간의 지위 역전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은 없었습니다.
이 협정에 의해 파운드화와 경제적 유대에 의해 형성되었던 '스털링 지역'(Sterling Area)이 붕괴되어 대영제국의 해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 중에 인상적인 것은 미국의 대영제국의 해체 과정이 놀라울 정도로 계획적이고 전략적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반해 영국의 재무부 고문 케인스를 중심으로 한 영국 지도부의 대응은 영국의 객관적인 입장이 고려되서인지 숙명적인 체념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리하여 영국은 전후 재건에 필요한 모든 경제적인 원동력을 잃고, 중세시대의 가난한 섬나라로 주저 앉게 되었습니다.

1차 대전 이후 피폐해진 독일의 재건을 돕고, 히틀러가 재무장 하는데 가장 큰 협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 미국의 록펠러를 비록한 금융세력이란 보면 어쩌면 2차 세계대전은 대영제국을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의 치밀한 연극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국은 전후에도 수년동안 식량, 의약품, 연료 등에 대해 배급제를 실시했고, 레스토랑의 메뉴는 제한되었으며, 성인의 1주당 배당량은 버터 170그램, 치즈 40그램, 달걀 1개가 전부였습니다.

영국은 전후에도 세계 각지에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군사비를 줄일 수 없었고, 1946년의 군사비는 16억 파운드로 1938년의 7배에 달했습니다.
피폐해진 경제로 제국을 관리할 능력을 상실한 영국은 전후에도 수에즈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10년 동안 제국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진퇴에 대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미얀마 국경까지 다가온 1942년 인도 전역에서 발생한 반영 폭동은 영국인으로 하여금 인도에 대한 지배가 오래가지 못할 것이란 것을 느끼게 했고, 미국마저 인도의 독립을 요구하며 압력을 가했습니다.
1943년 인도 총독이 된 영국의 웨이벌은 인도인의 독립 요구의 정당성을 깊히 인식해 인도인에게 독립을 약속하면서도 '인도 사수'를 반복하는 처칠의 훈령 때문에 고뇌해야 했습니다.

일본군의 인도 육박을 간신히 격퇴하였지만 인도의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의 무력충돌은 점차 심각해졌고, 식민정부의 관료와 경찰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영제국의 요람인 인도에서의 단순한 퇴각은 제국의 미학과 위신에 맞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모양새좋게 퇴진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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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2월 20일 영국 수상 애틀리는 '영국 정부는 1948년 6월까지 인도에서 철수하고, 정권을 인도에게 양도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인도의 불신을 해소함과 동시에 '최후의 총독'이란 단서를 붙혀 46세의 마운트배튼을 임명합니다.
2차대전 후반에 동남 아시아 연합군 총 사령군으로서 일본군을 항복시키고, 동남 아시아에서 다시 유니온 잭을 펄럭이게 한 마운트배튼은 이미 아이젠하워, 맥아더와 함께 승리의 영웅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모엇보다도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였던 그는 영국 왕족 신분이고, 국경을 초월한 인류의 평등을 신봉하는 진보적 지도자라는 점에서 최후의 인도 총독으로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종말을 장식하기에 알맞은 인물이었습니다.
인도 현지인에게 최대한 잘 보인 마운트배튼은 인도와 파카스탄의 분할을 이루고, 예정보다 1년이나 앞당긴 1947년 8월 15일에 명예로운 퇴진을 실시하여 인도인에게 정권을 넘겨 주게 됩니다.

8월 15일 이전의 초여름 동안 인도 봄베이 항에서 장대한 군악대가 연주하는 동안 친영 인도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영국 병사를 가득 실은 수송선이 위풍을 간직한 채 서서히 부두에서 멀어지는 모습은 품위의 승리였습니다.
1947년 8월 15일 오전 8시 30분을 기해 인도 전역에서 유니언 잭이 내려졌고, 300년에 걸친 영국의 인도 지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미얀마와 스리랑카에서도 철수한 영국은 어렵게 점령한 팔레스타인에서도 철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독립국가 건설을 목표로 반영 테러를 계속하는 유대인 세력과 전투가 계속되었기 때문입니다.
걸프 지역의 석유 이권을 지키기 위해 친아랍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는 영국이었지만, 미국과 국제연합은 유대인 입장에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지배에 계속 압력을 가했습니다.

유대 세력과의 유격전으로 탈진한 영국군은 아랍인의 불신과 모멸의 시선을 받았고, 국제 여론의 비웃음 거리가 되었으며, 본국은 막대한 군사비 지출로 신음하였습니다.
마침내 영국 정부는 1947년 12월 품위 있고 명예로운 퇴진과는 거리가 먼 큰 환멸과 굴욕 속에서 UN과 미국에게 모든것을 맡기고 철수하였습니다.

한편 1956년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 나세르 대통령은 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했는데, 수에즈 운하야말로 1875년 디즈레일리가 사들인 이래 오랫동안 제국의 생명선이 된 중요한 권익이었습니다.
대영제국의 최후의 보부를 잃게 될 것을 두려워 한 영국의 이든 수상은 수에즈 운하 탈환을 위해 현실을 무시한 채 이집트 파병을 결심합니다.

단독으로 행동하기를 주저한 영국은 프랑스를 충동질하여 이스라엘을 포섭해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공격하면 그 충돌에 끼어 들어 정전을 강제하기 위한 다국적군으로 영국-프랑스군을 수에즈 운하에 파견하는 방법에 열중합니다.
대영제국의 전통과는 거리가 먼 유약하고 치졸한 음모는 보어 전쟁 못지 않은 도덕적인 결함을 드러냈는데, 이전과는 달리 힘이 없었던 영국은 비참한 실패를 맛보게 됩니다.

특히 미국의 의사를 무시하고 제국주의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국제도덕의 근본을 짓밟은 영국의 독단적 행동에 대해 워싱턴의 반발은 격렬했습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영국의 수에즈 파병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경고하였고, 뉴욕 시장에서 투매로 인한 파운드화의 대폭락은 과대 평가된 파운드화에 의해 간신히 모양새를 유지한 영국의 자존심을 짓밟았습니다.

미국의 비난에 이어 수련 흐루시초프는 영국 본토에 대한 미사일 공격의 위협마저 내비침으로써 영국은 미·소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더 이상 단독으로 어떤 행동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수에즈 사건은 대영제국의 완벽한 종말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사건이었으며, 수에즈 운하 북쪽 끝에 있는 도시 포트사이드에 걸려 있던 유니언 잭은 영원히 내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에 남아 있던 영국령 식민지의 독립사태가 이어졌는데, 영국은 이제 현실을 직시하고 순수히 물러나게 됩니다.
1971년 영국이 EC(유럽 공동체)에 가입하면서 싱가포르의 영국 극동 사랑부에 마지막으로 나부끼고 있던 유니언 잭이 내려짐으로써 영국은 영원히 제국의 깃발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D.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의 특징

1. 미국 제국주의의 역사

미국은 1840년대부터 1890년대에 이르는 약 40년 동안 노예문제로 일어난 50년대의 위기와 남북전쟁, 전후의 남부의 재건과 대서부의 개척, 그리고 혁신주의적 사회개혁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었기 때문에 북미대륙의 경계를 넘어 해외로 국력을 진출시키는 문제에는 별로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습니다.

이 기간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의 후진지역에 대한 세력범위를 확대해 나가는 제국주의 진출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습니다.
미국도 1890년대에 들어서 자국의 산업자본이 고도로 성장하여 독점자본의 형태를 취하게 되자 늦게나마 제국주의적 조류에 참가하여 해외영토의 팽창을 추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미국이 1890년대 이전에 해외진출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오래 전부터 미국의 팽창주의자들 가운데는 유럽국가들의 남아메리카 침투를 막아야 한다는 전략적인 이유에서 팽창을 주장하였고, 또 어떤 팽창주의자들은 우월한 국민으로서 미국인이 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니고 있다는 인종주의적 측면에서 팽창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업가 가운데는 미국경제와 사회의 안정상 해외시장이 필요하다는 경제적인 논리로 팽창을 주장하였습니다.

a) 소극적인 해외진출
이러한 주장들이 남북전쟁 후 1880년대 말까지 소극적이나마 미국의 해외진출을 가져왔습니다.
1867년에 링컨-앤드류 존슨시대에 국무장관을 지낸 시워드(William H. Seward)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군도를 획득하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라(에이커당 2센트)의 싼값으로 사들였고, 그란트 대통령은 1870년에 카리브해역에 있는 산토도밍고(Santo Domingo)를 합병하려다가 상원의 반대로 실패한바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인이 대거 진출하고 있는 하와이는 1875년에 제3국이 이 지역을 합병할 수 없다는 조약을 맺었고, 이어 1878년에는 태평양무역의 중계요지인 사모아군도 내에 해군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습니다.
동양에서는 1882년에 중국의 알선으로 조선과 우호통상조약을 맺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b) 적극적인 해외진출론의 대두

그러나 이러한 성과는 유럽열강의 제국주의 진출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미국도 1880넌대 말에 이르면 해외진출에 대한 종래의 소극적인 정책을 비판하고, 적극적인 정책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팽창의 요구에 대해 지식인들과 정치가들도 열열히 옹호하였습니다.

사회학자인 존 피스크는 우수한 앵글로색슨족의 언어 정치 종교제도가 전세계에 전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정치가인 핸리 케봇 로지(Henry Cabot Lodge)도 미국이 열강과 나란히 하기 위해서는 해군력의 강화가 절실하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해군력의 필요성을 주장한 사람은 알프래드 머핸(Alfred T. Mahan)이었습니다.
그는 1886년에 해군대학에서 행한 연설에서 영국이 대제국으로 발전하게된 원인을 분석하여 그 바탕이 무역에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상선대의 무역을 보호하려면 대해군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강연은 "제해권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이라는 저서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는 이어 1897년에 "제해권과 미국의 이해, 현재와 미래(The Interest of American in Sea Power :Present and Future)'라는 저서를 통해 카리브해를 세력범위로 해야 하며, 태평양의 제해권을 잡고 극동에 있어서의 미국의 입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당시 이러한 머핸의 이론은 해외진출을 갈망하는 팽창주의자들에게 이론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이들은 파나마 운하 건설, 캐나다 합병, 태평양으로의 진출을 요구하는 대정책(Large Policy)을 내세웠으며, 공화당은 1896년 선거에서 그 정책을 정강으로 채택하였습니다.

c) 미·스페인전쟁 -제국주의로의 진입
1898년에 일어난 미·스페인전쟁은 미국이 제국주의로 진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895년에 스페인의 식민지 쿠바에서는 식민지 통치에 항거하여 혁명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혁명은 장기화하면서 스페인의 혁명탄압도 가열되어 20만 명의 양민이 기아와 질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미국의 언론은 쿠바인에 동정적이었고, 뉴욕에 소재하는 허어스트계의 "져널"지와 "월드"지는 이 사실들을 과장 보도함으로써 미국 국민을 분노케 하였고, 미국의 쿠바혁명에 대한 간섭을 요구하는 여론을 크게 형성시켰습니다.

미국의 쿠바간섭은 인도주의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내의 농민문제를 해소하는 한 방법으로, 또한 쿠바가 미국의 시장으로서의 가치성, 국민적 유대감과 실업자 문제의 해결 등의 다양한 요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클리브랜드 대통령이나 그를 계승한 맥킨리 대통령은 다 같이 쿠바사태를 신중히 대처하려 하였으나 1898년 1월에 허어스트계(Hearst) 신문들은 주미 스페인 대사가 맥킨리 대통령을 모욕하는 사신을 공표하여 미국민의 감정을 자극하였으며, 2월에는 미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아바나에 파견된 메인호(Maine)가 원인 불명의 폭팔 사건으로 침몰하여 266명의 장병이 생명을 잃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여론은 "메인호를 잊지 말자"(Remember the Maine)고 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선전포고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들의 압력으로 매킨리정부는 1898년 3월에 스페인에게 쿠바의 독립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개전을 두려워한 스페인은 쿠바에 대한 자치부여를 수락할 용의가 있다는 것을 통고하였으나 이 통고가 미국에 도착한 다음 날 4월 11일 대통령은 선전포고 교서를 의회에 보냈고, 19일에 상.하양원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결의하였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전선을 확대하여 쿠바에 인접한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와 태평양의 구암(Guam)을 정복하고 다시 필리핀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습니다.
필리핀에 대한 공격은 선전포고 2개월 전에 해군차관보 데오도어 루스벨트가 미국동양함대사령관인 존 듀이(John Dewey)에게 스페인과의 전쟁이 일어날 경우 지체없이 필리핀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도록 극비명령을 내린 바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제의로 12월에 강화조약(파리조약)이 체결되어 쿠바의 독립이 승인되었고, 배상으로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와 구암을 양도받았으며, 필리핀에 대하여서는 2천만 달러에 매수하였습니다.
존 해이는 이 전쟁을 '눈부신 소전쟁'(Splendid Little War)이라 평가하였습니다.

c)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 정책
미국이 필리핀을 영유할 당시 중국에서는 열강들이 세력범위(sphers of influence)라는 이름 아래 영토를 분할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의 대중국 무역은 전체무역량에서 2%에 불과했으나 얼마든지 확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방관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국은 중국의 분할을 막으려 했고, 그에 따라 1899년 9월에 국무장관 존 헤이는 제1차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을 선포하였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이미 세력권을 구축한 열강에 대하여 미국에게도 대등한 무역권을 요구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강대국들은 미국의 제안에 마음이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른 나라들이 미국의 제안을 승인할 경우에는 그 원칙에 찬의를 표한다는 애매 모호한 회답을 보내왔습니다.

이와 같이 각국의 회답은 조건부였으나 헤이는 각국이 전적으로 동의한 것으로 간주하고, 1900년 3월에 문호개방원칙을 일방적으로 발표하였습니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의화단의 난이 일어나자 이 소요 속에서 열강이 중국을 분할하지 않을까 우려한 헤이는 7월에 제2차 문호개방통첩을 각국(11개국)에게 발송하였습니다.

제1차의 경우와 같이 각국에 회답을 요청하지는 않았으나 각국은 이 통첩에 동의한다는 회답을 보내 왔습니다.
해이의 선언은 중국의 영토보존과 독립유지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진출의 기회는 열리게 되었으나, 일본제국주의에 유린당하는 중국의 영토보존을 도의적으로 책임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d) 파나마 운하문제
미국은 태평양으로 가는 통로를 얻기 위해 파나마 운하의 건설을 계획하고, 1902년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프랑스 회사로부터 건설허가권을 사들였으나 콜롬비아 의회가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함으로써 미국의 계획은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파나마지역에서 1903년에 콜롬비아정부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자 미국은 즉각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도와 공화국을 수립케 하였고, 콜롬비아는 파나마를 잃은 대가로 2천 5백만 달러의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파나마 운하는 1914년에 완공되어 각국 선박에게 동등한 조건으로 개방되었습니다.

e) 베네수엘라 문제
1902년에 베네수엘라는 영국과 독일로부터 많은 차관을 얻어 왔습니다.
그러나 차관상환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두 나라는 항구들을 포격하고 세관을 접수하였습니다.
그러자 미국은 독일과 영국이 먼로주의를 위반하였다 하여 베네수엘라를 지원하였습니다.

f) 멕시코 내전 개입
미국은 1911년도에 멕시코의 석유자원의 2분의 1 이상, 철도의 3분의 2 이상 , 광산의 4분의 3을 점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0년도에 반동적인 후에르타(Huerta) 군사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러자 윌슨 대통령은 후에르타 정권의 승인을 거부하였고, 입헌주의자 카란자(Carranza)를 도와 새로운 정부를 세웠습니다.

그러나 카란자 정부는 반미주의자이며 빈민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는 판쵸 빌라(Pancho Villa)의 반란에 직면하였습니다.
미국의 보수세력- 카톨릭 교회, 허스트계 신문들, 기업가들 -은 멕시코에 대한 응징을 요구하였으나 윌슨 행정부는 당시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할 가능성이 높아 1917년에 이곳에서 철수하였습니다.

그 외에 미국의 태프트 정권은 1912년에 니카라과에, 그리고 1915년에 윌슨은 아이티에 군대를 파견하여 친미적인 정권을 수립하였습니다.
또한 1916년에는 도미니카에 군대를 파견하여 군정을 실시하였습니다.

2. 미 제국주의의 특징

고전적 제국주의가 국가의 이익을 위하고 무력적으로 식민지를 정복했다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신제국주의는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고 시장 개방을 통해 경제적으로 후진 국가를 예속시킵니다.
미국은 겉으로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키는 수호자를 자처하지만, 뒤로는 CIA를 통해 친미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민주인사 탄압과 군사 쿠테타, 경제적 혼란과 공기업 민영화 등을 조장합니다.

911테러 이후에는 미국의 패권에 순응하지 않는 국가에 대해 무력을 통한 침공과 점령을 시행함으로써 경제적 영향력의 감쇠를 군사력으로 상쇄시키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석유 파이프라인 확보를 위해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였고, 석유자원과 달러 헤게모니를 지키기 위해 이라크를 점령하였으며, 리비아와 이란이 미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핵무기를 포기하였고, 현재 북한만 남은 상태입니다.

1958년 이란의 모사테크 체제가 석유자원의 국유화를 통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자 미국은 쿠테타를 일으켜 친미 왕정을 복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란은 왕정체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국가 발전이 지연되었고, 이란의 막대한 미국 산 무기 구입은 경제적 어려움을 가져와 결국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샤 체제가 붕과됩니다.

미국은 1954년 토지개혁을 주도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을 전복하고 군부정권을 세웠으며, 1961년 쿠바 정권을 전복시키기 위한 침공과 카스트로 암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명분 없는 경제봉쇄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1970년에 선거로 집권한 칠레의 아옌데 체제를 무너뜨리고, 피노체트를 중심으로 한 군사독재 정부를 세움으로써 인권탄압이 극에 달한 칠레의 암흑시대를 열었습니다.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은 1998년 선거로 집권하여 개혁을 단행해 미국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과감히 반기를 들었고 미국이 끈질기게 요구해 온 석유기업의 민영화를 차단하는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이에 미국은 2002년 4월 군부 쿠테타를 지원하여 성공하였만 2일 천하로 끝나 실패하였고, 뉴욕 타임스는 부시 정권의 관계자들이 반차베스 쿠테타 주도세력과 회합을 가졌다고 폭로하였습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전시 중의 학살, 강간 등 전쟁범죄에 대해 처리할 수 있는 기구로 2002년 4월 66개국이 인준함으로써 발족되었지만, 미국에 이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는 미군이 개입하는 전쟁이 워낙 많다 보니 미군과 관련자가 전범 재판을 받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전범처리 대상을 국가나 정부 뿐만 아니라 일반군인이나 민간인도 재판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3. CIA - 미 제국주의의 첨병

미국은 겉으로는 세계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정의로운 국가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국주의적인 더러운 일은 주로 CIA가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마치 한국의 군사정권이 정의로운 척 하면서도 각종 비리를 저지르고, 안기부를 통해 각종 정치공작과 민주인사 고문과 테러를 자행한 것과 비슷합니다.

CIA는 냉전 분위기가 시작된 1947년 7월 트루먼 정권 때 창설되었는데, 국가안보국(NSC)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책임을 지는 기구로 탄생합니다.
CIA는 대통령의 외교전략을 일선에서 수행하는 정보활동기구며, 1947년 12월에는 정보활동에 비밀심리전 수행이라는 임무를 추가로 부여 받아 비밀정보 및 공작기구로 전환됩니다.

CIA는 주로 제 3세계에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비밀활동을 수행해 왔는데, NSC 비밀명령 10/2 문서에 의하면 비밀활동은 프로파간다(선동), 경제전, 사보타주와 반사보타주, 파괴와 철수작전 등을 포함하는 혁명 예방조지, 적대국 내의 지하 게릴라에 대한 지원 등을 포함한 반미정권 붕괴, 반공세력 지원 등을 의미하고 이 외에 요인 암살 등이 실제적으로 추가되었는데 이 내용은 미 의회 청문회에서 밝혀져 미국 내 여론을 경악시키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NSC 10/2에 미국 정부의 정치공작 비밀개입을 은폐하는 조항이 들어 있다는 점인데, 이 조항은 CIA의 제3세계 정치공작에 대해 미국의 개입을 불분명하게 보이도록 만들어 왔습니다.
그 내용은 "작전은 미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관계자 이외에는 미국의 책임이 분명하지 않도록 계획되고 시행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작전이 적발되더라도 미국 정부가 이에 대하 관련책임을 부인할 수 있다."입니다.

특이한 사항은 CIA가 독일 나치의 대소 첩보망을 고스란히 넘겨 받아 냉전정책의 수행에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라인하르트 겔렌(Reinhard Gehelen)은 대소 첩보기구 책임자로 그가 관할했던 첩보망을 미국에 넘져주는 대신 전범 처리에서 빠졌습니다.
CIA는 나치가 다차우(Dachau)에서 행한 인체 대상 생화학 실험을 토대로 심리통제를 위한 약물실험을 해 왔습니다.

CIA가 약물실험을 정책적 관심사로 삼은 것은 나치 독일의 인체 생화학 실험 결과를 인수하여 1953년 MK-Ultra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부터입니다.
CIA 앨런 덜레스 국장 밑에서 이 계획을 추진한 리처드 핼럼스는 이를 가르켜 "인간의 행위를 통제하기 위한 실험으로 생화학 물질을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프로그램"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CIA가 제3세계 비밀공작 활동을 추진한 대표적인 예는 이란의 민족주의 체제 모사테크 정권의 전복과 과테말라 아르벤스 정권의 붕괴작전입니다.
이 두 사건을 통해 CIA는 제3세계 정치공작 비밀개입에 대해 자신감을 얻게 되며, 이후 CIA 활동의 전술적 지침과 경험을 얻게 됩니다.

1941년 영국의 후원으로 이란을 통치해 온 팔레비는1951년 민족주의자 모사테크에 의해 축출당하였고, 모사테크는 영국 투자기업인 영-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mpany)를 국유화합니다.
이에 반발한 영국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해 모사테크 정권 전복작전(암호명 AJAX)을 추진하는데, 이란 군부 내 왕당파를 지원해 1953년 쿠테타로 모사테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팔레비를 재옹립 하게 됩니다.

CIA의 다음 작전 대상은 1952년 농지개혁법에 따라 미국 기업 '유나이티드 프루츠'(United Fruits)의 비경작 토지를 국유화 과정을 통해 몰수한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정권입니다.
1954년 1월부터 6월까지 CIA가 아르벤스 제거 작전에 들인 자금은 2000만 달러로 이는 반란군 조직, 비밀 공군 폭격대조직, 비밀 라디오 방송국 설치, 대체 군부 지도자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 중령의 발굴 등에 쓰였습니다.

심리전이 주요한 작전에서 1854년 6월 아르마스는 소수의 군부대를 아끌고 미군의 공군 폭격 지원과 비밀 라디오 방송의 흑색선전으로 큰 힘 들이지 않고 아르벤스 정권을 함락시켰습니다.
CIA는 아르마스에게 300만 달러의 군자금과, 군사훈련, 훈련기지, 군수물자 등을 제공하고, 쿠테타 지도자 선발에서 구체적인 작전지도까지 지원함으로써 정치공작의 표본을 완성했습니다.

캐네디 정권 들어서 행한 CIA 비밀활동 중 대표적인 것으로는 쿠바의 피그만 침공과 이것이 실패한 후 카스트로 제거를 위해 케네디의 동생 로버트 케네디가 직접 지위한 몽구스 작전, 베트남전 개입 등을 들 수 있습니다.
피그만 침공은 미국으로 망명한 소모사 정권의 잔류부대를 동원하면 쿠바의 민중이 호응할 것으로 보고 전개했으나 무참히 실패했고, 카스트로 암살 계획은 마피아까지 관련시켰지만 역시 실패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전에도 개입하여 1960년대 후반에는 만여 명에 달하는 특전사와 CIA의 자금 지원을 받는 3만명의 산악부족을 훈련·지원하였습니다.
미국의 지원으로 설립한 디엠 정권이 오히려 미국의 외교전략 수행에 방해가 되자 CIA는 군부의 쿠테타를 부추켜 1963년 11월 쿠테타가 일어났고, 디엠은 부하의 손에 저격 당하게 하였습니다.

CIA는 베트남에서 통비(通匪)분자 색출과 처단이라 할 수 있는 '불사조 작전'(Phoenix Operation)을 실시하여 2~3년 사이 4만명의 민간인을 억울하게 희생시켰습니다.
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유격 근거지를 파괴한다는 명분으로 자행한 베트남 민간인 대량 학살 작전은 라틴아메리카에서 민간인 학살을 도맡은 '죽음의 군단'(Death Squads)의 기본 모델이 되었고, 한국군도 동원되어 역사에 오욕을 남깁니다.

베트남전 패전 이후 CIA의 대중적 위상 하락과 미국의 제3세계 군사개입을 거부하는 이른바 '베트남 증후군(Vietnam Syndrome) 현상으로 닉슨 정권은 간접 개입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이로써 CIA는 비밀개입의 군사적 성격을 완화하고, 주로 정치공작 차원에 주력하게 됩니다.
키신저는 CIA를 정책을 결정하는 조직이 아니라 '40인 위원회' 감독 아래 정책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칠레의 아엔더 정권 전복 계획은 칠레의 통신망을 장악하고 있는 ITT와 코카콜라사의 요청에 따라 닉슨과 키신저가 NSC의 결정으로 CIA를 동원하여 추진했습니다.
CIA를 통해 칠레 군부를 지원함으로써 1973년 쿠테타를 성공시킨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궁지에 몰린 뒤 사임하게 됩니다.

1975년 포드 정권 때에는 미 의회 내에 정보기구에 대한 특별위원회가 설치되는데, 상원의 특별위원회는 CIA의 비밀활동 역사와 카스트로 암살 등 암살 계획을 밝혀 냈습니다.
의회 청문회를 통해 CIA의 창설 과정과 제3세계 비밀공작이 상당 부분 공개되었고, CIA는 의회의 제도적 견제를 받게 되면서 카터 정권 들어 비밀활동이 약화되었습니다.

CIA 국장 스탠스필드 터너는 정보수집과 분석기능을 강화하는 대신 비밀공작 기능을 부분적으로 해체하는 조취를 취해 820개의 직책을 폐지하고, 200명의 비말활동 경력요원과 600명의 대체요원이 해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란 인질사태가 벌어지자 카터 정권은 현실주의 외교노선으로 급선회하여 전 CIA 비밀요원을 소환해 인질구출작전을 벌였지만 실패해 강력한 군사주의 노선을 제창한 레이건에게 선거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레이건의 등장으로 CIA는 다시 살아났으며, 1980년 CIA는 9,200명의 요원이 있었으나, 1985년에는 15만명이 넘는 상황으로 발전합니다.
CIA의 비밀 활동에 관심을 기울인 레이건은 CIA의 예산을 대폭 늘려 주었고, CIA의 캐시 국장은 의회의 감시 때문에 공식 루트가 아닌 제3자에게 일을 맡기는 청부작전을 구사하게 됩니다.

이란-콘트라 작전이 대표적인 청부작전의 사례로 이스라엘의 무기를 이란에 팔아 인질문제를 해결하고, 그 무기 판매 수익금을 니카라과 반군 원조자금으로 활용한 1석 2조의 작전이었습니다.
당시 이란은 무기 판매가 금지된 국가였으므로, 국가안보 보좌관 맥팔레인은 이스라엘 군사외교 책임자 데이비드킴츠를 접촉하고, 판매 경로에 사우디 거부 카쇼기를 내세웠습니다.

레이건에 이어 대통령이 된 부시 대통령은 CIA 국장을 역임한 바 있으며, 노리에가를 제거한 파나마 침공과 같은 군사개입과 심리전을 위주로 한 정치공작을 함께 펼칩니다.
현 부시 대통령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을 빌미로 국민감시를 강화하고, CIA와 FBI의 기능을 통괄하는 국토안보국(Homeland Security Department)를 창설함으로써 정보 및 비밀공작 기능을 대폭 강화하였습니다.

4. 라틴 아메리카 - CIA의 공작정치와 마약정치로 물든 파나마침공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자 시몬 볼리바르가 라틴 아메리카를 하나의 독립된 연방제 국가로 묶고자 노심초사했던 이유는 장차 이 지역이 미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이런 구상은 영국과 미국의 라틴 아메리카 분열 정책으로 라틴 아메리카가 20여 개국으로 분열되면서 좌절된다. 1823년 미국의 먼로 독트린(Monroe Doctrine)을 가리켜 미국의 고립주의 정책이라고 짤막하게 설명하는데, 사실 먼로 독트린은 불간섭주의, 고립주의 정책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유럽의 식민주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팽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898년 미국-스페인전쟁을 통해 카리브해 일대의 패권과 필리핀 점령을 통해 태평양에 미국의 팽창 전략의 전진기지를 확보한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을 관통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해로를 찾고자 했다.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위해서는 장장 1만 5천 킬로미터를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파나마 운하 건설을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페르디낭드 드 레세프였지만 공사는 여러가지 악재들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뒤이어 미국이 중단된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인수하려 했을 때 파나마를 통치하고 있던 콜롬비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자들을 지원하여 콜롬비아로부터 독립시켜 파나마 운하의 건설권과 운영권을 차지하고, 이른바 '파나마 운하지대'로 불리는 파나마공화국의 영토 중 5%를 할양받게 된다. 이 지역에서 미국은 운하의 운영 및 관리는 물론 사법권까지 행사하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행사했다.

스페인의 식민지에서 콜롬비아의 식민지로 독립 이후에는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된 파나마인들이 자주적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은 이미 20세기 초엽의 일로 1963년에는 파나마 운하지대에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려던 학생 23명이 미군과의 충돌로 사망하기도 했다.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각성하기 시작한 반미운동의 물결은 파나마에도 몰아쳐 1971년부터 파나마 운하 사용과 관련된 협상에서 파나마측은 미국의 고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게 된다. 1968년 아리아스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 정권은 1973년 이 문제를 국제 문제화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정권을 장악한 토리오스였지만 1969년 군부 반란 움직임이 미국의 사주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되자 제3세계 비동맹권 국가들과의 연대를 강화하고, 쿠바와 국교를 정상화하는 등 국내 기반을 강화하며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 구조를 개선하려 했다. 토리오스는 미 CIA의 지휘 아래 있는 정보요원 출신으로 미국의 다국적 기업인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대규모 농장지대에 대한 좌익운동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제3세계 국가의 많은 군부 엘리트들이 그러했듯이 미국이 운영하는 군사학교13)를 다니면서 다양한 훈련을 받았고, 마누엘 노리에가는 그의 오른팔이었다.

파나마 운하 문제를 UN에 상정하자 이에 압박을 느낀 미국은 협상 과정에서 파나마 운하에 미군을 영구주둔시키는 문제를 협정에 명시하고자 했다.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파나마의 토리에스 정권은 정보기구 G-2를 동원해 파나마 운하 일대에서 반미시위를 벌이도록 하는 한편 G-2의 책임자였던 마누엘 노리에가를 막후 협상대표로 삼아 워싱턴에 파견하여 사용료 인상에 합의하는 등 유리한 결과를 얻어내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때 노리에가는 당시 CIA 책임자였던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나면서 CIA와 밀착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노리에가는 파나마 운하 지역 내에 위치한 남부사령부의 자금 지원을 받으며 동시에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권과 중남미 마약 조직의 움직임에 관해서도 상세한 정보를 제공했다.

레이건 등장과 때맞추어 1981년 토리에스가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파나마 실질적인 실력자로 부상한 노리에가는 레이건 정권의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전복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는 CIA의 여러 비밀 공작들 '이란-콘트라 게이트'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노리에가의 체포 후 월스트리트지의 폭로에 따르면 부시 전 대통령이 CIA 국장으로 있던 1976-1977년 매년 11만 달러를 노리에가에게 공작금을 건넨 것을 비롯해서 총 1천 1백만 달러 상당의 돈을 지급해왔다고 한다. 한 나라의 최고 실권자가 미 CIA의 앞잡이14) 역할을 해온 것이다.

미국의 중남미 정책은 미국 자본주의 기본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950년대 이전까지 중남미에서 미국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한 방식은 해병대와 포함(砲艦)을 동원한 직접적인 무력 침공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이후 라틴 아메리카 민중들의 반미 감정에 의한 저항에 부딪치게 되고, 냉전이 본격화되면서 공개적인 무력 침공은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책보다는 CIA를 동원한 비밀 공작에 주력하게 된다. 이후 미국의 CIA가 개입된 것으로 확인된 라틴 아메리카의 정변은 과테말라 아르벤즈 정권 전복(1954), 쿠바 피그만 침공(1961), 도미니카 공화국 내정 개입(1965),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1973), 니카라과 내전(1981-1983), 엘살바도르 내전(1981-1983) 등 다양하고 비밀스럽게 진행되었다. 베트남 전쟁 결과 조성된 미국 내 여론 역시 CIA의 비밀활동에 대해 의회의 규제가 강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므로, 미국은 CIA와 같은 공식기구가 아니라 그 실체가 좀더 명확하지 않은 일종의 청부조직을 가동하게 된다. 그 와중에 터져나온 것이 '이란-콘트라 게이트'였다.

니카라과는 1855년 미국의 해적 윌리엄 워커에 의해 처음 침략당한 후, 1909년부터 1934년까지 지속적으로 미국의 침략을 당했다. 1934년 민족주의 지도자 세사르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암살되었고, 그를 살해한 아우구스타시오 소모사가 미국 해병대의 지원을 받아 정권을 잡고, 소모사와 그 일족은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으로 타도될 때까지 이 나라를 통치했다. 소모사 정권이 얼마나 폭압적이고 살인적인 통치를 펼쳤는지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조차 그를 가리켜 "소모사는 개새끼였지만 우리의 개자식이다."15) 말했다. 소모사를 타도하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장악한 산디니스타 정권은 1980년대 미국의 최대 고민거리였지만, 1982년 미국 의회는 니카라과 정권 전복을 목적으로 CIA가 비밀리에 활동할 수 없도록 했다. 그러나 CIA는 1984년 니카라과의 항만에 비밀리에 어뢰를 설치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의회는 일체의 개입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는 '레이건의 보수주의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미국의 힘에 의한 세계 전략이 기승을 부리던 시기로 미국은 니카라과의 반군(콘트라)을 지원할 예산이 봉쇄되자 니카라과 반군은 마약거래를 통해 자금을 마련했고, 미국은 세계 각국에 콘트라를 지원할 명목으로 자금 지원을 요구한다. 게다가 미국은 비밀리에 사우디 아라비아의 무기상인 카쇼기를 통해 이란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니카라과 반군지원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때 미국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이룬 것이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였다.

탈냉전이 시작되던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노리에가에 대한 파나마 국민들의 반발이 심해지고, 노리에가가 국제 마약밀매업에 깊숙이 개입해온 것을 두고 미국 내 여론의 비판이 심해졌다. 미국은 1989년 12월 20일 파나마의 민주헌정을 회복하고, 국제마약밀매 혐의자인 노리에가를 미국 법정에 세운다는 명목으로 파나마를 침공했으나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은 1980년대 말 탈냉전이 시작되면서 세계 도처에서 도저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군부통치가 종식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미국의 새로운 세계전략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힘의 우위에 의한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한 경제력 소모가 커지면서 경기침체가 지속되고, 제3세계의 군부통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강해지고, 미국 경제의 하락으로 이에 크게 의존하고 있던 군부정권의 경제 관리능력이 한계에 달하게 된다.

미국은 민중혁명이 발생하기 전에 저항 세력 가운데 친미적인 개혁 세력을 내세워 문민정부를 수립하도록 지원하는 재민주화 전략을 세우게 된다. 그러나 이에 저항한 파나마의 노리에가는 미국의 직접적인 공격에 의해 일종의 시범 사례로 제거된 것이다. 많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노리에가 축출을 지지하면서도 미국의 이런 방식을 비난하고, 국제법상의 '범죄적 행위'로 규정했다. 이는 미국이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로 귀속되는 파나마운하에 대한 지배권을 사실상 유지하겠다는 것과 동시에 미국 중심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국제법에 제약받지 않고 강제하기 위해서는 일방적인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기도 했다.

미국의 침공 당시 파나마 민간인 300여명이 희생당했다. 그러나 미국의 파나마 침공 당시 미국 언론의 주요 관심사는 국제법 무시로 인한 비난이나 파나마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이 작전에 최초로 실전 참가했던 F-117 스텔스 폭격기의 성능이었다. F-117 스텔스 폭격기는 걸프전 당시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공격의 95%를 담당하며 그 성능을 맘껏 뽐내기도 했다.

5. "개도국 富유출 경제공작 있다" 前 美안보국 직원의 양심선언

(::경제 저격수의 고백 / 존 퍼킨스 지음 / 황금가지::)

미국 국방부가 ‘차세대 디스플레이’ 개발을 위해 한국 전자업체들에 전략적 제휴를 비밀리에 제의해왔다는 보도가 최근 있었다. 국방부까지 나서 세세하게 미국의 경제적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산업전쟁으로까지표현되는 현재 자본주의 경쟁체제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 책은 ‘산업스파이’의 수준을 뛰어넘어 미국이 어느 정도까지 국익을 위해 국가적으로 ‘비밀공작’을 펼치고 있는지를 그중심에 있던 사람이 직접 고백한 내용이다.

저자는 실제로 1971년부터 10년 동안 인도네시아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등지에서 ‘경제 저격수(Economic Hit Man)’로 미국 기업과 정부의 이익을 위해 활동한 사람이다. 그는 1945년 뉴햄프셔주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보스턴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했다. 고교시절부터 부친의 지나친 기대에 좌절을 경험했다.

경제저격수란 겉으로는 국제 컨설팅 회사의 직원으로 개발도상국을 돕는 경제전문가처럼 행세하지만 실제는 미 국가안보국(NSA)에서 훈련을 받고 해당 국가의 국고(國庫)를 미국이 손쉽게 ‘털어내도록’ 공작을 벌이는 사람이다.

그 선발 과정부터 섬뜩하다. 그 사람의 지식수준이나 도덕적 가치나 심지어 애국심도 오히려 선발에 장애가 된다. 그 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겪은 좌절을 통해 얼마나 적개심을 품고 있는지, 여자를 원하고, 근사한 삶을 꿈꾸는지가 더 중요하다. 공작에는 숭고한 가치는 방해물이 되기 때문이다.

일단 선발되면 마음대로 그만둘 수도 없는 공작원으로서의 삶이시작된다. 목표로 정한 국가에 민간인 신분으로 들어가 경제성장률을 부풀려 예측하고 그에 따라 기간산업의 개발계획을 수립한다. 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도록 표적 국가의 정·재계 요인에게 접근한다.

그 과정에서 회계부정과 선거조작, 뇌물, 섹스가 동원되기도 한다. 그들이 실패하면 그 다음엔 ‘자칼’이라는 미 중앙정보국의암살자가 나선다. 저자는 1981년 원인불명의 사고로 숨진 하이메 롤도스 에콰도르 대통령과 오마르 토리호스 파나마 대통령이이들 자칼에게 살해 당했다고 주장한다. 자칼이 동원돼도 공작이 성사되지 않으면 그 다음은 젊은 미국 군인을 동원한 전쟁으로간다.

개발도상국들이 이같은 경제저격수의 마수에 걸려 일단 차관을도입하면 그 차관으로 이뤄지는 모든 개발계획은 미국 기업에 돌아간다. 개발이 된다한들 부풀려진 경제적 예측에 의한 것이 제대로 운용될 수 없다. 결국 이들 나라는 국부를 미국 기업에 유출하고 극심한 경제적 파탄에 시달리게 된다. 책은 그같은 사례를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저자는 이같은 미국의 경제적 공작의 근원을 거대기업과 정부, 은행이 삼위일체가 돼있는 미국 특유의정치체제인 ‘기업정치’에서 찾고 있다.

저자는 저격수로 활동하는 동안 이혼을 했으며, 친구였던 파나마와 에콰도르 대통령의 의문사를 경험하면서 양심의 가책을 받아1980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이 책이 나오는 과정에서 많은 협박과 회유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엄주엽기자

문화일보   2005-04-08

우리는 제국주의 단원을 통해 인간의 끝 없는 탐욕이 각종 음모와 전쟁과 학살과 경제적 혼란이라는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상호존중의 대등한 국제질서가 무너지면, 곧바로 보호무역과 보복관세 같은 경제적 전쟁이 벌어지고 곧이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다는 것은 역사적 교훈입니다.

야고보서 1/14~15 그러나 누구든지 자신의 욕심에 이끌려 유혹을 받을 때 시험을 당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느니라.

* 참고 서적

1. 강대국의 흥망 (폴 케네디, 한국경제신문)

2. 대영제국 쇠망사 (나카니시 테루마사, 까치)

3. 밀실의 제국 (김민웅, 한겨레 신문사)

4. 국부론 (아담 스미스, 범우사)

5. 세계 제2차대전사 (이대영, HOBBIST)

* 참고 사이트

1. http://www.encyber.com/

2. http://www.greatwar.pe.kr/